북알프스 가는 길
강 문 석
난 순간 "아!" 하는 탄성과 감사기도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내가 탈진할 정도로 지친 걸 어찌 알고 절대자께서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시나 싶었다. 순간 흥분한 나는 주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줄도 몰랐다. 암반을 겨우 20여 미터 오른 지점에서 더 이상 오르길 포기하고 어렵게 오른 암반 길을 내려서기 시작했다.
성공은 내가 내려서는 걸 보고도 왜 그러느냐고 물을 힘도 없는 모양인지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거꾸로 내려서기 시작하자 기진맥진했던 몸에서 다시 기운이 솟았다. '그래,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는 거야!' 라면서 자신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올랐던 암반을 그렇게 거의 내려섰을 때였다. 조금 전 나타났던 평탄한 등산로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무수한 화산잔해물이 쌓인 자갈길이 버티고 있었다. 그 순간 사막의 신기루가 이런 것일까 하고 놀랐다. 그때라도 난 내려선 길을 다시 올랐어야 했다.
그런데도 지친 몸은 조금만 더 내려서면 아까 본 그 등산로가 분명히 나타날 거라고 꼬드기고 있었다. 화산폭발로 형성된 자갈들은 흘러내리다 겨우 걸쳐있는 형국이라 발만 디디면 연신 좌르르 좌르르 무너져 내렸다.
난 그동안 산행을 해오면서 들었던 일본 돌 절대로 믿지 말라는 장난 같던 그 말이 불현 듯 떠올랐다. 지금 내가 그 화산석 지대를 들어선 걸 알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어스름은 빠르게 몰려오는데 편마암 자갈밭을 벗어나지 못하자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나에게 비상식량이나 만년설 속에서 밤을 새울 방한장비가 있을 리 없었다. 불안감이 공포로 바뀌자 몸에서 더 많은 식은땀이 솟으면서 이제 한기까지 몰려들기 시작했다.
작년 여름 등반 때의 기억을 더듬어 스키훈련장 쪽을 찾아들었다. 계곡에 쌓인 만년설을 이용하여 만든 급경사 훈련장이었다. 이제 자갈밭은 겨우 벗어났지만 스키훈련장 옆 늪지대엔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웅덩이들이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었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며 허둥대는 사이 어둠은 깨나 짙어졌다.
만년설 스키장이 약한 조명 역할을 해서 그나마 주위를 식별할 수 있었다. 이젠 얼음을 지치면서 밑으로만 내려가면 산장에 닿을 터였다. 하지만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으니 조난을 벗어날 방책은 없었다. 피로와 공포에 탈수까지 겹쳐 난 정신이 점점 몽롱해져갔다. ‘아, 사람의 목숨이 이렇게 끝날 수도 있구나!’ 싶었다. 잠시 혼미했던 정신을 가다듬어 이를 악물고 악을 쓰면서 소릴 내질러보았다. 바짝 말라붙은 입에서 소리가 제대로 나올 리 없었지만 몇 번이나 일행이 넘은 쪽을 향해 양팔까지 흔들어대며 악을 썼다.
일행과 헤어져 2시간 넘게 사지를 헤매다가 산중턱에 위치한 산장에 도착하자 초로의 산장주인이 반갑게 날 맞았다. 그가 영업상 환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일행이 정상 산장에서 전화로 내가 나타나면 알려달라는 부탁을 해놓았던 것이다. 얼음처럼 차가운 석간수를 한 바가지나 들이켜자 몽롱했던 정신이 차츰 돌아오기 시작했다.
산장전화로 산행대장과 통화하면서 난 일행을 이탈한 걸 사과했고 그는 챙기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북알프스 자락 두 산장 사이 육백여 미터 거리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아득하게 느껴졌다. 산꼭대기에서 일행이 손전등을 흔들며 나를 향해 소리를 질러대지만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졌고 잠자리에 들자 죽을 고비를 넘기느라 사투를 벌인 악몽이 차츰 의식에서 멀어져갔다.
다음날 일행은 카미고지上高地로 내려섰다.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북알프스 최고봉을 오르기 위해 지구촌 곳곳에서 동절기를 빼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승지다. 특히 한국인 방문객이 많아 이정표마다 한글도 함께 표기한 곳이다.
카미고지에서 산행대장은 일행에게 후지산을 가자고 했다. 일본까지 온 김에 세계적으로 이름난 명산을 오르자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산행대장은 일본어가 능통한 윤 교감을 대절용 승합차들이 늘어선 주차장 건너편으로 흥정하라고 보내면서도 자신이 알고 있는 듯한 운임은 알려주지 않았다. 윤 교감은 승합차 기사가 요구한 15만 엔 운임을 알렸고 산행대장은 절반으로 깎아보라며 다시 보냈다. 윤 교감은 2차 협상에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어를 모르는 산행대장이 나서더니 필담으로 통했는지 요금을 절반으로 후려쳤다가 선심 쓰듯 5000엔을 더 얹어 8만 엔에 낙찰을 봤다. 교육자와 사업가의 협상능력은 이처럼 차이가 났지만 옆에서 지켜본 난 후지산에 닿을 때까지 기분이 씁쓸했다.
병상의 장유곤 사장은 내가 아내와 병실을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간병하던 아내에게 두 부부가 함께 미국 동부지역 여행을 떠나자고 재촉했다. 그는 몹시 수척하여 몸피가 평상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만큼 간에서 시작된 암세포가 위장까지 퍼져 몸을 갉아먹은 것 같았다. 움푹 들어간 퀭한 눈빛이 더욱 애잔했다. 장 사장은 그날로부터 불과 며칠을 더 못 넘기고 64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난 인생 2막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예순 전후에 그가 있었기에 심심하면 대마도를 찾았고 중국 황산과 일본의 여러 명산들 그리고 말레시아의 코타 키나발루산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가 처음 산악회를 맡고 30여 명과 오른 아소구주국립공원 유후다케由布岳와 도야마현의 다테야마, 북알프스 최고봉 오쿠호다카다케奧穗高岳 3190m도 잊히지 않는 명산들이다.
장 사장이 부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국립대학에 거액의 발전기금을 쾌척하여 행정대학 총동창회장을 맡으면서 연일 술자리가 이어진 것을 난 기억하고 있다. 동창회장 취임사를 내가 썼고 직장 강당으로 불러 발표 예행연습까지 시킨 사람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그가 복합 암을 꼭 회복하겠다고 마지막까지 용을 쓴 것은 날짜를 받아놓은 아들 결혼식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들 결혼을 보지 못한 채 결혼식 주례를 나에게 맡기곤 떠나고 말았다.
장유곤 사장이 잠든 신불산 공원묘지는 실제 울산 신불산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내가 살고 있는 양산 시가지에 가깝다. 장 사장이 이끈 것은 아니지만 그가 떠난 5년 뒤 난 양산으로 이주했고 가끔씩 그가 그리울 땐 묘소를 찾는다. 그럴 때마다 무덤은 무연고 묘지처럼 잡초가 무성했다. 망자가 생전에 미리 장만했는지 알 수 없지만 좋은 위치에 크게 자리한 유택이라 더욱 쓸쓸하고 애잔하게 느껴졌다. 관리비가 체납된 묘소는 공원묘지 측에서도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왕년의 봉고산악회 멤버들도 흐르는 세월에 떠밀려 절반가량이나 먼 길을 떠났다. 남은 사람들이라도 초청하여 장 사장 추모제를 가지려고 그 아들에게 먼저 연락했다. 아들은 물려받은 아버지 사업을 지키지 못했으니 삶이 팍팍해 보였다. 대학 체육학과 출신답게 아들은 정직하게 바로 답했다. 자신도 이제 2세를 돌봐야 해서 틈을 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난 비록 추모행사는 못 가졌지만 세상이 점점 망자를 망각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끝.
강 문 석
부산대 사회교육원 소설창작과정, 부산교대 사회교육원 수필창작과정, 국제신문 문예창작교실, 동국대 사회교육원 여행작가과정 수료. <가톨릭신문> 위촉기자, <실버넷뉴스> 사진부 기자, 양산문화원 인터넷 문화관광해설사 역임. 한국문협 부산문협 부산가톨릭문협 부산소설가모임 회원. 2004《에세이문예》창간호 신인상, 제5회 부산수필문협 우수작품상, 2020년 부산문협《문학도시》소설 등단. 수필집『산으로 남고 싶은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