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토산품 ‘거제도 유자와 귤’, 2편>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세종 1426년 남부지방에 유자와 귤 재배를 중앙정부에서 권장해, 착과량을 호조에 보고하게 하고 직접감사가 작황을 조사하여 상납하게 하였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는 “유자 생산지역이 전남은 영남, 장흥, 해남, 강진, 진도, 순천, 낙안, 보성, 광양, 고흥이고 경남은 곤양, 남해, 사천, 하동, 창원, 거제, 사천, 기장이다.”라 적고 있다. 그러나 이후 관리들이 이를 착복하기 위해 열매가 달리면 일일이 개수를 세웠다가 늦가을에 이 숫자에 맞추어 공물로 거두어들이니 백성의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에 남몰래 유자나무 밑둥을 베어내기에 이른다. 조선 말기에는 유자도에 유자나무가 없어졌고 대나무만 울창하여 명칭도 죽도(댓섬 竹島)로 바뀐다.
(4) 자진이 반죽 지팡이를 준 데 사례하다.[謝子眞乞斑竹杖] / 이행(李荇) 1506년 作.
故人住近柚子島 내 벗은 유자도 가까이 머무나니
柚子島多斑竹林 유자도에는 반죽의 숲도 매우 많지
乞我錚錚一枝足 내게 금옥 같은 대지팡이를 주었으니
白雲岑上要登臨 흰 구름 봉우리 위로 올라가리라
[주1] 자진(子眞) : 崔淑生(최숙생)의 자(字). 위의 걸(乞) 자는 거성(去聲)이다.
[주2] 반죽(斑竹) : 대과(科)에 딸린 대의 한 가지. 줄기 겉에 흑색의 아롱진 무늬가 있는 것이 특징(特徵)이며, 바소 모양의 잎은 가지 끝에 1~5개씩 달림.
고현만 앞바다에는 삼성조선소에 의해 매립되어 사라진 유자도[現 댓섬(竹島), 현재 유자섬(橘島)은 당시에는 소도(小島)]가 있었다. 장평동 삼성호텔자리에 유배 살던 홍언충과 최자진(최숙생)은 종종 유자도에 놀려갔다가 유자도 따오고 대나무도 잘라 와서 동료들에게 선물을 주곤 했다. 이행(李荇)선생이 최숙생에게 지팡이 선물을 받고 읊은 노래이다.
(5) 유자를 즐기며[賞柚實] /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81년 거제도 作.
八月歧城秋色遅 8월의 거제는 가을빛이 아직 더디어
滿庭柚實半黃皮 뜰에 가득한 유자의 껍질이 아직 절반만 누렇구나.
藏身翠葉仙人掌 몸을 숨기 듯, 푸른 잎이 신선의 손바닥 같아
擁鼻酥香妃子肥 깨끗하고 매끄러운 향기가 코를 찌르니 황후의 인심도 넉넉해지네.
(6) 유자를 쪼개다[劈柚] / 유헌(游軒) 정황(丁熿) 1550년대 거제시 고현동
分金節今過 누런 감 먹는 절후 막 지나니
已迫一陽來 이미 동짓달이 다가왔다.
無限洞庭思 무한한 동정호 생각에
帶霜春事回 서리 띤 봄일 회상하네.
(7) 10월7일 저녁에 청주 질녀의 매장에 노란 유자를 제물로 보내며[陽月七日夕送柚黃致奠淸州姪女入壙] / 유헌(游軒) 정황(丁熿)
黃果入我手 누런 과일이 나의 손에 들어오니
照我目兒魂 나의 눈에 질녀의 혼이 비친다.
降爾果認爾 내려놓으면 과연 너는 알까
叔病不見葬 숙부는 병으로 장례에 못 간다.
不臨情茫茫 가지 못하니 정만 아득한데
淚淫淫爾哭 흐르는 눈물로 너를 곡 하노라.
宜我哭倒仰 내 달려가서 곡함이 마땅하나
蒼天蠻海老 푸른 하늘가 바다에 갇힌 노인신세란다.
한국에는 840년(문성왕 2) 신라의 장보고가 중국 당나라 상인에게 얻어와 널리 퍼졌다고 한다. 하지만 서기 797년에 편찬된 ‘속일본기(續日本記)’에 “나라(奈良)의 도(都)에 떨어진 운석의 크기가 유자만 했다.”라는 기록이 있고, 일본에 유자가 전파된 것이 한반도를 경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이 보다 역사가 더 오랜 된 과일임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 31권에 1426년(세종 😎 2월 전라도와 경상도 연변에 유자와 감자를 심게 한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재배 시기는 세종실록에 기록된 것보다 훨씬 오래 전으로 추정된다. 종류에는 청유자·황유자·실유자가 있다.
<거제도 토산품 ‘거제 황금 귤’>
우리나라에서 감귤이 재배되기 시작한 옛 기록이 없어 옛날부터 재배되어온 재래 귤들의 도입경로와 도입연대가 분명하지 않다. 근래 많은 일본 학자들이 금귤·감자·유자·탱자 등이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에 도입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여 우리나라의 감귤재배의 역사는 대단히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최초의 기록으로는 백제 문주왕 2년(AD 476) 탐라국에서 공물(貢物)을 받았다는 탐라지의 기록이다. 고려사세가(高麗史世家)에는 고려 문종 6년(1052)에 세공으로 탐라국에서 받아오던 귤의 양을 100包로 늘린다고 하였는데, 이는 감귤을 세공품으로 받아 왔다는 것을 뜻한다. 조선시대 감귤에 대한 기록 중, 태조실록에는 태조 원년(1392)부터 정해진 양을 받다 오던 상공(常貢)에서 생산량을 참작한 별공(別貢)으로 제도를 바꾸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세종실록에는 세종 8년(1426) 2월에 호조의 계시로 경상도, 전라도 등 남해안지방까지 감귤재배지를 확장하고 재배시험을 시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중국의 감귤 역사는 BC 300∼400년까지 문헌상, 거슬러 올라간다. 이 당시 중국 토종 귤은 탱자보다 조금 크고 가시가 있었으며 신맛이 아주 강했다. 이 후 품종이 뛰어난 인도 귤이 다시 들어와 양자강 연안과 광동지방에서 중국특유의 오렌지군을 형성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현재 귤나무는 1910년대에 들어온 온주밀감 계열로, 재래 귤과는 조금 다르다. 재래종 귤나무는 그보다 작고 껍질이 두꺼우며 신맛이 강하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귤의 껍질은 성질이 따뜻하고 맛은 맵고 쓰며 독이 없다하여 가슴에 기가 뭉쳤을 때 큰 효능이 있으며, 소화에도 도움을 주어 대소변을 원활하게 한다"고 돼 있다. 비타민C가 많고 혈액순환에 좋으며 피부미용에 아주 탁월하다. 거제도 재래감귤은 문헌 기록상, 세종 때 유자와 감귤 재배지 확대 조치로 인해 본격적으로 재배 생산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1) 유자를 먹으며[食柚] / 한충(韓忠), 1520년 수월리.
南溟島嶼長 남쪽 큰 바다엔 도서(島嶼)가 줄 잇고
地暖秋無霜 따뜻한 땅이라 가을에도 서리가 없다네.
冬靑多橘柚 사철나무인 귤과 유자가 많아
佳實壓枝黃 맛좋은 과실이 가지마다 누렇게 처져 열린다.
(2) 희강(이장곤李長坤)과 더불어[與希剛 二絶] / 홍언충(洪彦忠) 1504년 장평동.
東郭先生畏寒坐 고루한 글쟁이 선생이 추워 움츠려 앉았고
寓菴居士忍飢吟 우암거사(홍언충)는 배고픔을 참고 읊조린다
誰分林下新霜橘 누가 숲에 내린 첫서리 맞은 귤을 나누어 줄까?
來慰呑江渴夢心 목마른 꿈속 마음같이 강을 삼키듯 위로받았다.
煙雨秋來靑又黃 가을철 안개비에 푸르고 누런 빛깔,
酸甜新帶洞庭霜 신맛에 단, 신선한 동정귤에 서리 내렸다.
要分兩顆煩包裹 정히 두 개씩 나누어 바쁘게 포장을 하니
攪得詩人覓句腸 어지러운 시인의 마음은 글귀를 찾을 뿐.
중국 춘추전국시대인 BC 3세기, 이소경(離騷經)과 어부사(漁父辭)의 저자, 초나라 굴원이 강남으로 쫓겨나 '귤송(橘頌)'을 지었다. 거제 유배객 정황(丁熿)은 굴원의 처지를 자신에 투영하여 아래 글을 지었다. 이글은 표면적으로는 귤을 찬미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처지와 심정을 담았다. 아래 작품에서 선생의 이상과, 세파에 흔들리지 않는 정직하고 강직한 삶의 절의를, 숭상하고 찬미하였다.
(3) 서리 맞은 귤[霜橘] / 유헌(游軒) 정황(丁熿) 1550년대 거제시 고현동
南服歲寒樹 남녘땅에 세한의 푸른 나무,
后皇曾汝嘉 일찍이 천지간에 너를 아름답게 여기셨다.
棘枝劍戟立 가시가지가 칼과 창처럼 날카롭고
金實玲瓏斜 금 같은 열매가 영롱히 비꼈구나.
渠性風霜見 그 성품에 바람과 서리를 만날
幾時雨露加 때마다, 비와 이슬이 더해지누나.
一心限淮水 회수 강남에서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深固三閭嗟 뿌리가 깊고 단단하여 굴원도 감탄했다네.
'채근담'에 인생의 교훈을 전하는 말이 있다. "하루해가 저물었는데 오히려 노을은 아름답고, 한 해가 장차 저물려고 하는데 새로운 귤이 꽃다운 향기를 뿜는다. 그러므로 군자는 말로(末路) 즉, 만년(晩年)에 다시금 정신을 백 갑절 떨쳐야 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