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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중한담(茶中閑談)1 박현선생님과 함께 하는 이야기마당2023
(2023년 10월 8일 14:00, 지유명차 청담점)
들머리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인사부터 올리겠습니다. 박현입니다. 앉아서 말씀 올려도 될까요?
우리가 살면서, 여기 저보다도 연배 있으시고 경험도 넉넉하신 분들 계셔서 주제넘은 말씀 올리기가 어렵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무릅쓰고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는 자리로 삼으려고 합니다.
오늘부터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 자리가 저에게는 그 이전에 이야기를 나눴던 자리와 완전히 구분되는 자리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를 생각을 좀 해서, 그 생각을 가지고 생각에 실타래를 풀어내는 그런 이야기의 마당이 아닙니다. 어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겠다는 목적도 없이 그냥 가자!’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먼저 생각이 든 게 ‘우린 대체 지금 어디 있지?’라는 이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릴 적에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고 떠올렸고, 그러다가 지쳐서 그만두었던 질문의 연장선인 ‘나는 누구이지?’라는 것과 비슷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면 내가 뭐 하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것도 크게 문제가 아니게 살아왔습니다.
1-1 나는 누구이지 그리고 우린 지금 어디에 있지?
우리는 삶을 관리한다고 그러는데, ‘관리한다’고 할 때 관(管)이 원래 글자 뜻만 풀어보면 관악기이거든요. 악기이거든요. 악기의 조율을 말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소리가 제대로 원하는 대로 나오는가, 목적하는 대로 이렇게 소리의 실현이 이루어지는가를 살펴보는 그리고 그것을 다스려가는 일, 그게 관(管)이거든요.
‘이치대로 소리를 조율하다’는 의미인데 어쨌든 관리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을 하지만, ‘과연 내가 관리할 걸 관리해 왔던가’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는 관리하려고 했는데 과연 관리했던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제(2023.10/08) 젊은 분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그 결혼식을 한 신랑의 삶을 알고 계신 분도 혹시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6살이 돼서 교통사고로 아버님을 여의고 본인도 중간에 그런 것이 겹쳐서 생긴 병일지 모르지만, 큰 그래도 뭐 암이라고 이름 붙은 그런 것을 이기고 아무런 장애 없이 결혼을 했던 친구여서 특별히 축하의 말을 했었는데요. 거기서도 그런 얘기를 했었습니다.
살면서 많은 분들이 돈 관리도 하고 시간 관리도 하고 몸 관리도 하고 그래서 다른 이름으로는 재테크라고도 해서 시테크라고도 하고 건강테크라고도 하고, 그런 것들을 하는데 과연 그게 내가 관리해 와야 했던 품목의 중요한 부분들일까, 오히려 다른 뭔가 관리할 것을 놓치고 했던 건 아닐까? 그리고 그게 관리가 안 됐을 때 나는, 아니 거꾸로 그 세 가지를 관리했다고 했을 때 내가 어느 날 눈빛이 다 돼서 눈을 내리 감는 날 거기에서 얻어갈 게 있을까, 그런 생각이 또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어디 있는가, 그런 생각을 자꾸 하게 됐는데 크게 보면 좀 고답적으로 들릴 수 있을 수도 있어서 저는 이런 이야기 마당이 시테크, 재테크, 건강테크와 궤는 같이 하겠지만 좀 다른 영혼테크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내 영혼은 누가 관리해 줄까? 자기가 안 하면은. 솔직히 돈이야 남한테 폐 끼치지 않을 만큼 있으면 고마운 것이고 폐를 약간 끼칠 정도 밖에 안 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최선을 다해서 폐를 안 끼치려고 애쓰면 뭐 살 만큼 사는 것이고. 건강도 남한테 폐를 그렇게 심하게 끼칠 정도만 아니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고.
조율하고 관리하고 싶은데 무엇을 관리할까
그런데 시간 관리도 무엇을 위해 시간 관리를 하느냐, 제가 대학교를 다닐 때 역사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고대사와 관련된 첫 수업에 들어갔는데 그때 교수님이 나중에 총장도 하고 이랬던 분인데 제가 듣기에는 상당히 뜬금없는 얘기를 했었습니다. 인생 사는 게 자는 시간 빼고 먹는 시간 빼고 쉬는 시간 빼고 뭐 얼마나 되겠냐고. 그래서 자기는 최대한 잠을 줄여서 산다고. 시테크죠.
그런데 저는 그 생각이 들었어요. 교수님이지만. 그때는 저도 어리니까 반발심도 약간 해서, ‘자는 건 내 시간 아닌가?’ 어쩌면 자는 시간이 열심히 일하는 시간보다도 더 소중할 수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 잠자는 시간이 없다면 우리가 돌아와서 깼을 때 부작용 같은 것을 떠나가지고 그 자는 사이에 우리는 이 세계에서 내 몸을 갖고 날아보지도 못하는데 날아도 보고. 이 세계에서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고 사는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기도 하고 내려가 보기도 하고.
공간적으로도 빛의 속도가 1광년이라고 하고, 물론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 양자 전달의 속도도 있다고 하지만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빛으로도 움직일 수 없고 다른 도구를 이용하지 않으면 음속만큼도 움직일 수가 없는 삶에서, 꿈에서는 빛의 시간으로 수억 광년도 순식간에 이동해 볼 수 있는데 그러면 그렇게 까지 내 마음 또는 내 마음의 알갱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날아도 보고 시간도 넘어서 보고 공간도 넘어서 보는 그 일이 꼭 잠자는 무시당하는 시간으로 대접받아야 되겠느냐.
실제로 현대인들을 보면 잠자는 시간이 잘못돼 가지고 다 아프고 힘들고 그런 느낌이 있거든요. 잠 잘 자는 분들치고 병든 분들 저는 한번도 못 봤어요.
잠이 안 좋으면 몸도 어렵지만 여러 가지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거나 자기가 너무 힘들어 만사를 놓아버리고 싶은 그런 상황이 될 수도 있지만 잠이 그렇게, 우리가 참 질량이라는 질과 양이라는 표현을 갖고 쓸 수 있는 게 거의 없는데 그렇게 쓰니까 굳이 따진다면 삶의 질이 너무 안 좋은 거죠. 너무 안 좋으면 과연 건강에만 문제가 생기느냐는 거예요. 내 영혼도 못 날아보죠. 시간 극복도 못 해보죠. 공간 극복도 못 해보죠. 당장 내일 일어나서 움직일 만큼의 좋은 잠이 없는데.
저는 오늘 이런 시간도 크게 보면 잠이라고 생각해요. 가만히 앉아 계시잖아요. 뭐 드시지도 않고 운동을 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앉아서 꿈 속에서 이야기 나누는 거나 지금 여기서 이야기 나오는 거랑 뭐가 다를까 싶은 생각을 해봐요. 저 이야기도 아무런 선입견 없이, 미리 준비해 온 것 없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시간도 넘어가 보고. 공간도 넘어가 보고. 그리고 생각이라는 것도 넘어가 보고 싶어요.
잠이 중요하지만 잠을 무시하는 경향
제가 오늘 입고 온 바지를 보통 치노바지라고 그러더라고요. 치노라는 말이 오다가 생각이 났는데 스페인어로는 중국의 것 뭐 이런 의미라고 하죠. 그런데 이 치노라고 하는 바지가 처음 이렇게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 20세기 초반이라고 합니다. 그 비슷한 것이 스페인에서 입었던 것은 가장 빠른 것이 1898년이라고 그러는데.
아무튼 그때 입으면서 20세기 초에 입으면서 중국의 것이라고 했다는 거죠. 그런데 사실 그때 중국에는 이런 면을 짤 수 있는 방적기가 없었어요. 이런 면을 짤 수가 없었어요. 능직으로 면을 짤 수 있는 기계가 없었고 전통적인 방직 시설을 가지고는 도저히 이렇게 촘촘한 능직을 짤 수가 없었어요. 그러면 중국 것 아닌 거죠. 여전히 그런데 중국 것이죠.
사실은 맨체스터 지역에 있던 영국 원단 회사가 짠 직조물이라고 해요. 그런데 그 직조물을 짜다 보니까 인건비도 비싸고 또 20세기 들어서부터 일하는 분들도 말을 잘 안 듣고 이윤을 높이려고 당시 식민지였던 인도에다 갖다 놓고 짰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스페인 입장에서는 동쪽에서 물 건너온 것이니까 선입견으로 그건 당연히 중국 것, 인도 것이라고 안 하고 중국 것이라고. 왜냐하면 모르는 어딘가의 영역이었던 거예요. 모르는 어딘가의 영역에서 건너온 것에 대해서 깊이 판단 안 하고 깊이 살펴보지 않고 인도 것 또는 영국 것이라고 하지 않고 중국 것이라고 해버렸다는 거죠. 어쩌면 우리가 ‘a는 반드시 a야’라고 하는 것도, 저는 그런 면에서 치노에 붙여진 잘못된 오명 표기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왜 여기 있지?’라는 이야기로 돌아가면요. ‘우린 뭐지’, 그러니까 저는 ‘나는 뭐지?’ 하면 도저히 풀 수 없는 무언가가 있어요. 그래서 ‘우린 뭐지’하면 조금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인간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인간을 인간이라고 만 생각한다는 거죠. 그러면서 어떤 얘기가 나오는가 하면 인간을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인간만 인간이라고 생각하니까 피부의 색을 다 넘나들어서 공통된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으니까 다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그 인간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인간은 ‘원래 초식하는 동물이었다’, ‘인간은 원래부터 육식했었다’, ‘인간은 어쨌다’ 그러는데, 저는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면 중국에 여행 한 번 갔다 오신 분들이 중국 음식은 어땠다라고 규정하는 것처럼 들려요.
중국이 워낙 넓잖아요. 상하이에는 상하이의 음식이 있고 절강성(浙江省)에는 절강성의 음식이 있고 산동(散瞳)에는 산동의 음식이 있고, 호남((湖南)에는 너무나도 매워서 아주 그냥 혀를 알알하게 하는 매운 음식도 있고, 운남(云南) 음식도 있고 더 매워서 매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안 매울까 두렵다고 말하는 사천((泗川) 음식도 있고 그리고 다양한 민족들이 있어서 그 민족들의 민족적 특성을 가진 음식도 있는데 중국 음식이 어떻다고 해버리면 말이 안 되는 거죠.
선입견으로 보는 인간에 대한 이해
인간에 대해서도 우리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유럽의 누군가가 프라하를 여행하고 와서 프라하 음식을 먹고 체코 음식이 어떻다고 말하는 사람은 있지만 프라하 음식을 먹고 나서 유럽 음식은 어떻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나라로 묶인 한 단위가 주는 오해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어쩌면 인간이란 어떻다고 말하는 데 있어서 그만큼 많은 다양성을 접어버리게끔, 현재 우리의 모습에 인간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실제로 지구상에서 제가 이래 살펴보니까 전문가들도 계시겠지만 전문가들 계시더라도 저런 생각도 할 수 있는 거지 하고 그냥 들어주시면 제 마음이 편하겠습니다.
인간을 빼고 나면 피부가 좀 다르다는 것 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 그러나 유전자적으로는 공통성이 있다는, 그 인간을 빼고 나면 다른 모든 종류의 동물들은 한 종류가 없어요. 개라고 불리지만 개가 무지 많아요. 황소만한 개부터 해서, 말만한 개부터 해서 손 안에 들어오는 개까지, 털이 긴 개부터 해서 털이 거의 없는 개까지, 꼬리 긴 개에서부터 꼬리 짧은 개까지, 가분수인 개부터 몸통이 큰 개까지, 다리 짧은 개에서부터 다리 긴 개까지 공통점이라면 다리가 4개라는 거 그 정도고.
원숭이를 보더라도 그래요. 어디에는 고릴라가 있고 어디는 침팬지가 있고 어디는 또 일본원숭이가 있고 중국에는 금모성성이가 있고 또 개코 원숭이도 있고 수많은 원숭이가 있어요. 소도 그래요. 우리가 키우는 소도 종류가 다양하지만 야생에 있는 소들도 덩치가 커서 많이는 못 살아남았지만 물소도 있고 버팔로 소도 있고 코뿔소도 있고 많아요. 고양이과의 동물만 하더라도 사자도 있고 표범도 있고 범도 있고 많아요. 삵도 있고.
인간만 어쩌면 종류가 단일화돼 있어요. 굳이 인간도 원숭이를 위에 집어넣어서 한 종류로 넣어서 다양한 것의 하나라고 하면 될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하기는 좀 무리인 종자이거든요. 그런데 역사적이나 고고학적으로 보면 인간도 다른 동물들만큼 굉장히 다양했던 것 같아요.
초식을 하는 인간도 있었던 것 같고 동물적으로. 우리가 보이헤이라고 하는 인종. 파란티푸스 보이헤이라고 하는 종은 지금 발굴을 해보니까 이빨이라든가 당시에 형질을 보니까 초식만 했다는 거죠. 어떤 인류는 보니까 육신만 거의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도 매우 다양한. 큰 나무에 다양한 많은 줄기들이 그 나무를 이루듯이 계통도도 나무로 그리죠. 인간도 그렇게 한 단면을 잘랐을 때 어느 시기에는 다양한 원숭이보다도 더 다양한 인종이 있었다는 거죠. 그런데 어느 순간 호모 사피엔스만 나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남아 있는 호모 사피엔스만 가지고 인간은 원래 채식했대, 인간은 원래 육식했대 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이야기일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초식하는 인간은 소처럼 하루 종일 먹었겠죠. 하루 8시간을 먹었겠죠. 그리고 상대적으로 대장이 길었겠죠. 육신만 주로 하는 또 인류가 있었다면 그 인류는 상대적으로 소장이 길었겠죠. 그리고 위는 좀 줄어들었겠죠. 대신 팽창력이 많이 생겼겠죠. 초식하는 인류는 위 자체가 컸지만 팽창량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겠죠. 대신 하루 종일 먹어야 되는 거죠. 소처럼 먹어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 현재 인간의 위를 보면 우리가 지금 요즘 채식한다 해도 그렇게 안 먹잖아요. 원래 순수하게 채식을 한다면 하루 8시간 먹어야 되는 거죠. 그래야 힘을 유지하는 거죠.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그런데 육식을 한다면 사자처럼 한 번 생길 때 막 먹고. 배가 터질 듯이 있다가 배가 불러 터질 때는 앞에 먹거리가 나타나도 관심도 없다가 또 배가 고프면 사냥을 해야죠. 사냥을 하면 뜻대로 늘 되는 건 아니니까 사냥이 될 때까지는 굶어야겠죠. 그러니까 위에 팽창과 수축량이 크겠죠.
그런데 인간이 원래 육신을 했다면 또 그렇게 살았을까요? 애초에 다양한 인간이 있는데 어쩌면 인간은 그 중에 하나만 살아남은 걸 수 있죠. 다른 모든 동물들을 보면요. 자연에 적응해서 살아가요. 유전적으로 바뀌든 소위 말해서 진화를 하던 간에 전부 자연에 적응해 가는 과정이 인간은 적응해 가는 과정 못지않게 적어도 호모 사피엔스는 극복해 가는 뭔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적응하는 게 아니라 극복해버린다는 거죠. 이 극복이 굉장히 야만적일 수도 있고 이 극복이 굉장히 침략적일 수도 있다는 거죠. 다른 수많은 인류들이 결국은 살아남지 못하고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은 거죠.
하나의 종류로 단일화되어 버린 인간
그런데 그 살아남은 이유가 저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사회적 동물이 무리 지어 산다고 해서 사회적 동물은 아니잖아요. 사자가 사회적 동물은 아니잖아요. 그냥 군집체를 이루고 살 뿐이죠. 조직돼 있지는 않죠. 조직돼 있다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 전문적으로 주어져 있을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군집체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그냥 대응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아주 정확하게 일이 조직돼 있지는 않다는 거죠. 사자 같은 경우나 다른 들소들이나 무리를 짓고는 살지만 조직돼 있지는 않거든요. 그 이유가 저는 간단한 것 같아요. 동물들 중에 조직되어 있는 건 벌이나 개미가 그런 것 같아요.
그 이유가 저는 음식을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생겼다고 봐요. 먹을 것을 그 자리에서 구해서 먹고, 초식하듯이 한없이 구해서 먹고 고기 먹듯이 한꺼번에 구해서 먹고 그런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음식을 축적할 수 있는 무언가를 얻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봐요. 그러니까 무언가를 얻어서 축적이 되니까 조직이 가능한 거죠.
결국은 음식을 축적할 수 있는 인류로서의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모든 호모류들을 다 정복해버린 것 같아요. 그러니까 다른 호모류들은 적응해 가고 있었겠지만 다른 하나의 종류인 사피엔스가 자신들을 정복해 오고 극복해 오는 데는 대응을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결국은 인류만이 전 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단일종이 되 버린 것들.
그런데 언제 그렇게 단일종이 됐을까? 저는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아요. 아주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아요. 나중에 뭐 이건 돌아서서 웃기지 마라 하셔도 할 수 없는데요. 저도 제 개인 나름대로 근거 없이도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저는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게 처음이 아닌 것 같아요. 적어도 몇 번은, 한 두세 번은 반복한 것 같아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적어도 7~8천 년 전부터 한 번 이렇게 다시 시작한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한 번은 만 2~3천 전 경에 한 번 또 시작한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저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현재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사피엔스 사피엔스라고 부르잖아요. 사실 그렇게 큰 차이도 없어 보이는데. 유전자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거겠죠. 그런데 호모 사피엔스로부터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진화해 왔다고 생각하잖아요.
저는 다르게도 생각해요. 만약에 그 이전에 그런 역사를, 역사가 아니라 그런 시기를 겪었던 흐름이 있었고 그 흐름이 무언가의 문제로 말미암아서 멸망했다면 그리고 그들 중에 일부가 남아서 어쩔 수 없이 혼혈을 통해서 다시 역사를 시작해야 했다고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퇴화물이죠. 호모 사피엔스와의 결합에 의해서 탄생한 퇴화물인 거죠. 그러나 호모 사피엔스의 입장에서 본다면 또 다른 선인류와 결합해서 진화된 인류가 나온 거죠.
음식의 축적과 이를 위한 조직화로 등장한 새로운 유형의 인류
저는 그래서 두 가지 측면을 다 가진 인류가 현재 인류가 아닐까. 제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현재 인류들에게는 유전적으로 그 선인류라고 부른다면 그 선인류의 유전인자가 문화적으로 정신적으로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 작용의 1차적인 성격이 뭐냐고 저는 제 나름대로 얘기를 한다면 그리움이라고 해석하고 싶어요. 선인류가 무언가의 이유로 그 문명을 놓아버렸던 그때의 나름대로의 좀 더 선진적이고 조금 더 차원이 달랐던 문명에 대한 삶에 대한 그리움. 그게 이상향이라는 형태로 인간에게 유전되고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그게 때로는 종교적으로 천국도 됐을 것이고 때로는 극락도 됐을지 모르지만 저는 그런 요소가 문화적으로 우리 속에 흐르고 있었다. ‘어떻게 증명합니까?’, 증명할 길 없죠. 증명하고 싶은 생각도 없죠. 왜냐하면 제 생각이니까요. 왜냐하면 그럴싸하네 하면 그만인 것이고. 웃기지 마 해도 그만인 거예요. 그걸로서 끝나는 대화예요 사실은. 그런데 아무튼 저는 그렇게 생각이 들어요.
그 선인류는 아마 어떤 것에 의해서, 저는 개인적으로 사실상 번식성을 상실했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어느 시기에. 그래서 혼혈이 아니고서는 재생산을 해갈 수 없었다고 봐요. 그래서 호모 사피엔스와 결합이 됐을 거라고 봐요. 그런데 호모 사피엔스에 의해서 결합이 되면서 인류가 나름대로 또 일정한 숫자를 갖춰가지만, 갖춰가는 것 과정에서 선인류는 분명 그 그리움을 교육 과정, 종적 교육 과정을 통해서도 문화 신체적 인자를 통해서도 분명 내림 했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그 내림은 우리에게 깊숙이 박혀 있는 무언가의 그리움이 아닐까, 꿈속에서도 아름다운 걸 보고 울 수밖에 없는, 우리의 감정마저, 감정도 유전인자에서 오는 거니까. 사이코패스(Psychopath)는 그래서 감정이 다르다면서요. 유전인자하고 상관이 있는 거죠. 그럼 우리의 희로애락(喜怒愛樂)도 관계가 없을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그런 것들에서 유전되어 오고 있는, 막연한 그리움. 무언가 ‘이렇게’가 아니라 ‘다르게 살아야 되는데’라는 그 그리움이 교육 또는 유전으로 내림 되어온 것이 아닐까.
그런데 세상이 이제 조금 달라지면 실제로요 어느 종교나 어느 시대의 문화나 설화를 보더라도 처음에 지옥이라는 개념은 없어요. 천국만 있어요. 그 천국은 거의 이상향으로 표현돼요.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살아서도 이룰 수 있고, 이룰 수 있다고 믿고. 그러는 곳만 있어요. 어느 시기가 오면 지옥이라는 개념이 나타나는데 하데스(hades))라고 불리는 서양의 지옥도 사실은 죽으면 가는 곳이지 벌받아서 가는 곳이라는 뜻은 아니예요.
누가 복음에 나오고 요한계시록에 나온다고 했는데 거기도 보면 엄밀히 말하면 죽어서 가는 곳이고 요한계시록이나 누가 복음 일부에는 벌받아서 가는 곳으로 나오긴 하지만, 기독교의 경우에 예수님 스스로 한 번도 그런 지옥을 얘기한 적이 없어요. 비유적으로 얘기한 적은 있어요. 그것도 누가 복음에만 나와요.
그런데 아무튼 지옥 개념은 없어요. 다만 그리움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그리움에 대한 반대로 어느 날 경고, 너무나 멀리 벗어나기 시작하는 흐름이 생길 때, 그 경고의 의미로서 또는 통제의 의미로서 지옥이 등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그래서 천국, 이상향, 극락 어떻게 표현되든 간에 그 그리움은 유전된 것이지만 지옥은 인간이 만든 통제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쨌든 이제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죠. 그렇게 통제가 되면서 우리는 정말로 이렇게 모여 살아야 되나 또는 저렇게 모여 살아야 되나, 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선택 없이 어디인가에 무조건 한 단위가 돼서 모여 사는 단위로 가정 간주돼 버리는 거죠.
과연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형태로 살아야 되나 아니면 아시안이라는 형태로 살아야 되나, 노자가 말한 인구는 적고 나라는 적은 과민소국으로는 못 사는 걸까, 이렇게 돼 버린 거죠.
현생인류에게 남긴 앞선 인류의 유전인자 그것은 그리움
여기 몇 분은 저보다 연배가 위 십니다. 몇 분 아이고 한 두 분 밖에 안 계시시니까. 두 분도 한 두어 분도 많은데 두어 분 밖이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중학교 이 무렵 다닐 때 우리 지구 인구가 60억이 안 됐던 걸로 기억이 나요. 예전에 해방가를 들어보면 3천만 잠들었을 때니까, 남북한 합쳐서 3천만이라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지금 남북한 아무리 적게 해도 7천만이 넘어서 8천만 가까이 되는 걸로 보고 있잖아요. 그러면 2.5배나 늘어난 거죠.
중국이 그때 7억의 죽의 장벽이라는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 이영희 교수의 글에서 7억의 인구라는 얘기를 했어요. 그때는 뭐 인구 컨센서스(consensus)를 세계적으로 할 수 있고 공개하는 시절도 아니니까 그러면 그런 줄 알았죠. 그런데 아마 7억에 과장이 있었던 걸로 알아요. 실제로는 6억을 살짝 넘어갔던 걸로 알아요. 그때 인도 인구는 4억이었던 걸로 알아요.
전 세계 인구가 60억이라고 했지만 제가 초등학교 때 오래된 겁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60년은. 그런데 57억이 안 됐던 걸로 알아요. 57억인 것은 제가 중고등학교 가고 나서 그랬던 것 같아요. 이렇게 늘어났어요.
아까 제가 기독교의 성경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럼 그 시대로 돌아가서 전 지구의 인구는 얼마였을까? 4억이 안 됩니다. 그런데도 이미 통제의 인문학이 생기기 시작한 겁니다. 화합과 소통의 인문학에 추가하여 통제의 인문학이 생기기 시작한 거죠. 현재 인문학은 저는 끊임없이 인문학은 소통이고 다른 존재를 인정하고 공존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얘기하지만 현재 인문학의 51% 이상은 통제 인문학이라는 것도 알고는 있거든요. 몰라서 그렇게 얘기하는 건 아니죠. 누구나 다 알죠. 통제와 소통이 공존하는 인문학이죠.
그런데 통제 부분이 점점 느는 거죠. 통제가 늘다 보니까 우리가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인구가 지구에 살면서 저질러 놓은 거 많잖아요. 엄청나게 많은 걸 저질러 놨잖아요. 지금 대가가 조금씩 조금씩 오고 있지만.
저는 환경운동 같은 거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환경운동 같은 거 중시하시고 하는 분께서 계시지만, 저는 속으로 코웃음을 쳐요. 환경운동 아무리 해도 인간은 환경운동을 통해서 도달하려는 목표의 3분의 1에도 도달하지 못할 거예요.
진실은 외면되고 있는 겁니다. 진실은 4억 이하만 남아야 되는 거죠. 그런데 그 얘기를 누가 하겠어요. 이 통제 인문학이 이미 길들어 있는데요. 전쟁하자고 하겠어요, 식인하자고 하겠어요, 서로 돌려가며 죽이자고 하겠어요, 전염병을 오라고 하겠어요. 아무도 할 수 없는 얘기들에 의해서 통제돼 있죠.
그렇다고 해서 그러면 평화적으로 임신 정년기, 결혼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남자들부터 해가지고 14세가 되면 전부 묶어버리자! 묶었다가 나중에 임신을 해서 애를 낳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신청을 받아서 그 중에 20분의 1에게만 당첨을 시켜주고 당첨된 사람에만 풀어주자! 이럴 수도 없잖아요.
그런데 그게 답일지도 몰라요. 지금은. 솔직히 가장 평화로운 답일지도 몰라요. 그래서 그 중에서도 신청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여러 가지를 검사하고 검사를 해서 일정한 그룹에 속하는 부분에 대해서 다시 그때는 무작위로 추첨을 해서 출산하게 하자. 나머지 남자는 영원히 죽을 때까지 묶고 살자 이게 답일지도 몰라요. 환경 운동이 답이 아니라.
70억, 80억이라 그럽니다. 저 70억이라고 말한 지가 지유명차 시작한 지 20년 조금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후 70억 안 됐습니다. 지유명차가 겨우 청년기를 넘기자마자 청년기에 이르자마자 인구가 10억 이상이 늘어나버린 거예요. 12억에서 13억 헤아리던 중국이 갑자기 14억이 넘어버렸어요. 12억 어쩌던 인도가 14억이 넘어버렸어요. 인도는 그때는 심지어 10억 그랬던 것 같아요. 인도네시아 1억 넘어 버렸어요. 아프리카에 많이 늘었어요.
그것도 먹고 살 책임성으로 따지자면 가장 어려운 나라가 더 많이 늘었어요. 그런데 어쨌든 인구가 그렇게 늘었어요. 그 속에서 환경 운동을 아무리 철저히 해도 인간이 존재한다는 그 사실만으로 환경은 정화되지 않는다는 거죠.
4억만 남으면 누가 그렇게 가스를 그렇게 켤 것이며 기름을 캘 것이며 자동차가 아무리 매연을 빵빵 뿜고 다닌들 뭐 얼마나 매연이 있을 것이며, 플라스틱을 많이 만들어 쓴다고 한들 플라스틱 말고 좋은 것들이 넘쳐날 것인데 굳이 플라스틱을 쓸 것이며, 환경은 저절로 좋아질 거라는 거죠.
그런데 인구 줄이자는 얘기를 못하고 심지어 통제된 관념에 의해서 우리는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국가를 유지한다는 명분 하에서 사실은 이 자본주의를 영원히 발전시키기 위해서 인구가 부족하다는 겁니다.
인구는 이미 넘치고 넘쳐서 폭발하기 직전인데, 이미 생존이 어려운 상황까지 왔는데, 앞으로 어떤 세월이 올지 누가 알겠습니까? 적어도 지금보다 좋은 세월은 안 올 거라는 거죠.
80억이 먹고 살 게 없어요. 80억이 임시적으로 몇 년간은 먹고 살겠지만 80억이 인간이 차지하는 이상 자카르타처럼 지반도 변할 것이고 먹을 것도 점점 사라질 거예요. 그런 느낌이 없다면 지금 인도가 왜 쌀 수출을 안 하겠다고 하겠습니까? 미얀마나 라오스가 왜 쌀 수출을 안 하겠다고 하겠습니까? 내년부터. 그 쌀 수출 대국들이 말입니다. 먹을 것부터 없어질 거예요. 먹을 거의 초 한계점이 저는 80억이라고 봐요.
지금 현재의 지구의 자본주의적인 부의 기준을 가지고 전 세계에 적용시킨다면 화폐 기준으로는 전 세계가 다 먹고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식량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생산되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죠. 80억이 먹을 넉넉하게 먹을 식량은 없어요. 이미. 우리가 다 평등하게 살아도 이 지구상에 80억이 모두 평등하게 살아도 이상적으로 살아도 식량은 부족해요. 그 아프리카에서 굶은 수의 사람이 아시아에서 굶을지, 유럽에서 굶을지, 미주에서 굶을지는 몰라도 그 수만큼은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거죠. 상대적 구조에 의해서 부족한 것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부족한 그런 시기에 우리 살아요.
그러면서 급해지니까 더 재테크를 이야기합니다. 평생 재테크를 한 분들, 행복하신 분들 얼마나 봤나요? 남한테 폐 끼칠 정도면 충분해요. 폐 좀 끼치면 용서받을 정도로만 폐 끼치면 돼요. 그러니까 뭐가 느낌이 이상하니까, 건강테크도 찾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 나름대로 착각 막 하잖아요. 여기 두 분께 죄송합니다만 저도 노인이거든요. 노년이 계속 늘어나고 있어요. 인생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노년만 늘어나고 있는 거예요. 부정하고 싶죠. 인생 자체가 고무줄처럼 골고루 늘어났으면 좋겠는데 고무줄인 것처럼 알았는데 보니까 한쪽은 절대적인 강철 줄이 있었던 거예요. 그건 안 늘어나요. 우리는 쭉 늘어나니까 그냥 눈 감고 평균적으로 늘어났겠지. 그런데 요 어딘가 안 늘어나고 그대로 있는 부분이 있는 거예요. 나머지만 더 늘어난 거예요. (계속)
감사합니다!(1-2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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