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드로 보티첼리, 〈수태고지〉. 1489년, 패널 위 템페라, 150×156cm,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테라스 밖으로 높다란 나무가 서 있다. 안개도 나무를 가리지 않고, 구름도 나무에 걸리지 않았다. 하늘이 맑다. 이렇게 맑은 날 가브리엘 천사가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을 들고 마리아에게 와서 임신 소식을 알린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1). 순결한 처녀 마리아에게, 약혼한 마리아에게 회임을 고지하는 건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다.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법이 그랬다.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신 22:23-24). 마리아가 임신해 배가 불러오면 누가 마리아의 순결을 믿겠는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마리아의 진술을 어느 재판관이 받아들일 것인가. 법대로라면 약혼한 마리아는 간음죄로 돌에 맞아 죽을 것이다.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는 수태고지를 그리면서 천사 가브리엘을 거의 화면 중앙에 배치했고 마치 마리아를 향해 뛰어나갈 듯한 자세로 그렸다. 마리아는 곧 달려올 것만 같은 가브리엘을 피해 그림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듯 몸을 틀어 돌린다. 마리아는 두 손으로 완강하게 가브리엘을 거부한다. 눈을 감고 입술은 닫아 더 이상 들을 말도 할 말도 없다는 투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천사 가브리엘의 전언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요, 마리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다. 돌에 맞아 죽지 않는다 해도 당연히 파혼당할 것이고, 아비가 누군지 말할 수 없는 자식을 키워야 한다.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말을 누가 믿어 주겠는가 말이다. 보티첼리는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영접하는 사건을 치욕적이며 위험한 것으로 그렸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절엔 예수를 영접했기 때문에 치욕을 당하거나 위험하지 않다. 좋은 시절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시 예수께서 오시는 12월을 맞는다. 그런데 말이다. 감사한 마음 한 켠엔 의혹도 있다. 어쩌면 예수를 제대로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치욕적이지 않고 위험하지도 않은 건 아닐까. 예수께서 내 안에 제대로 착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 흔한 입덧도 없이 그저 평안하게 사는 건 아닐까.
가깝게 지내던 세례 요한이 참수당했음에도 헤롯을 향해 여우라 칭하며, 사두개와 바리새인 등 종교 지도자들과 충돌하고, 여론 따위 아랑곳 않아 매국노 삭개오마저 친구 삼으며, 끝내 제자들에게 배반당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그 예수를 기다리거든, 각오해야 할 터다. 나는 몸을 틀어 그림 밖으로 도망갈 준비가 되어 있다.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