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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송현동 주둔 36사단 백호부대를 기억한다
‘27년간 안동은 주요 군사주둔 도시였다’ [안동시 공동 기획연재] 2017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11) 대한민국 국민은 납세, 교육,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하는 3대 의무를 국가가 헌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 남자들은 당연히 국방의 의무를 해야 한다. 군대생활을 해본 남자들이면 누구나 신병훈련소에서 무릎에 피가 나고, 이가 갈리고, 다리에 알이 베는 이른바 PRI 사격훈련을 기억하고, 영점사격을 하며 첫 경험한 총알에서 내뿜는 화약 냄새로 인해 군대 생활을 실감한다. 부모님 전상서로 시작되는 훈련소에 쓴 첫 편지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고마움이 눈물 나도록 스며있는 사연으로 인해 어머니들은 통곡의 편지였다고 추억한다. 그리고 그런 남자들의 세상이 안동에도 있었다. 6.25전쟁이후 1955년 창설돼 안동에 주둔한 보병36사단. 이번 글에서는 27년 동안 안동에 주둔했던 백호부대 36사단의 연혁과 사람들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편집자 주> 36사단 백호부대의 탄생 1953년 7월 27일은 이 땅에서 3년간 치러졌던 동족상잔의 비극이 끝난 날이다. 6.25전쟁은 남한과 북한을 비롯해 UN과 중국 등 참전한 국가에게 막대한 피해만 야기한 채 휴전이라는 명목으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6.25전쟁 발발 당시 대한민국 육군은 전체 8개 사단 23개 연대와 해군, 공군 지원·특수 병력 등 총 병력 105,752명 수준이었으나, 전쟁기간 중인 1952년 11월부터 1953년 6월까지 10개 사단을 추가로 창설하고, 1954년 3, 5, 6군단 창설과 미 8군을 대신해 전선을 총 지휘할 1군 사령부를 창설하게 된다. 1953년 휴전으로 전쟁이 중단되자 미국은 한국이 자주국방 능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20개 사단 편성과 유지를 위해 약 2억 달러의 무상 군수지원을 보장하는 한·미 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이런 흐름 속에서 36사단은 탄생하게 된다. 육군 제36보병사단 백호부대는 현재 강원도 원주시에 위치하고 있는 향토방위 사단이다. 1955년 강원도 인제에서 창설된 36사단은 같은 해 6월 5일 사단 사령부가 안동으로 이동함에 따라 1군 예하의 유일한 향토방위 사단으로 경상북도 북부지역(안동, 울진, 문경 일대) 을 위수지역으로, 1982년 7월1일 현 위치인 원주로 옮겨가기까지 안동에 주둔하면서 국토방위는 물론 안동 경제에도 한 몫을 담당하던 부대였다. 시간이 흘러 36사단은 원주시로 이전, 이후 송현동 36사단 군부대 자리는 지난 1977년 대구에서 창설된 육군 제70사단이 주둔하다, 2008년 12월 1일 2008년 국방개혁 2020 계획에 따라 후방지역 병력감축을 위해 공식 해체된다. 이후 대구로 이전한 보병 제50사단 예하부대가 주둔하고 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소유했던 안동36사단 송현동 군부대 부지 일제강점기 시절 안동시 송현동 36사단 부지 소유자는 일본인이었다. 안동시 토지정보과 토지대장 부책 편에 안동36사단 송현동 군부대 대표번지 토지소유자에 관한 이전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대정2년(1913년) 2월 15일 36사단 대표번지에 관한 최초사정조사자는 안기동 조용혁, 소유자는 소화10년(1935년) 4월 22일 안기동 375번지 안경호씨 소유로 있다가 소화19년(1944년) 3월1일 大東精一(다이또우 세이치)로 기록되어있어 일제강점기 시절에 36사단 대표부지가 일본인 소유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옥야동에 사는 임정호씨로 이전 되었다가 1956년 4월 17일 대한민국으로 소유자가 변경된 후 1970년 지금의 국방부로 소유권 이전이 완료 되었다. 박태규 (전)안동시 의회의원이 추억하는 36사단 안동시 송하동 경로당 송하분회 분회장 박태규 회장은 송현동 호암마을이 고향인 호암마을 토박이다. 원래 나이는 무인생 (1938년) 범띠지만 호적에는 1940년생이며 송현동 707번지에서 태어나 군대생활 2년을 제외한 80여년을 호암마을에서 살고 있다. 초대 송현동 안동시의회의원을 역임한 그는 36사단이 안동에 주둔할 당시 군부대에 관한 여러 일화를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박 회장은 안동36사단 주둔 당시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먼저 국민학교 시절을 애기했다. "초등학교 입학당시에 학군이 지금의 안동시청 자리에 있던 화산국민학교로 정해져 호암마을에서 6명의 친구들과 지금의 군부대 앞 도로를 거쳐 비포장 길 15리를 걸어서 학교에 다녔는데 2학년쯤 다니다가 전쟁이 났어요. 당시에 다니던 학교가 폭격으로 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불타버리고 폐허가 되었어요." 전쟁 전 36사단 앞의 모습을 기억한 박 회장은 36사단이 안동으로 오기 전 송현동 모습을 자세히 기억한다. "36사단자리는 대부분 임야 또는 논밭이었어요. 지금 군부대 옆 영주통로 신규 도로 부근 또한 임야 논밭으로 변변한 도로조차 없었어요. 성창주택 자리에는 조그마한 야산이 있었고요. 당시 송현국민학교 앞에 큰 웅덩이가 있었어요, 그곳에 주민들이 신시장 부근에서 소달구지를 이용해 짚과 인분을 운반해 거름을 섞어 지금의 비료대용인 퇴비를 만들어 공동으로 사용했어요. 도로는 비포장 길로 늘 먼지가 뽀얗게 도로에 뒤덥혀 있었고요. 그러다 보니 도로인지 웅덩이인지 몰라 주민들이 더러 웅덩이 빠져 곤혹을 치루기도 했어요." 36사단이 안동에 주둔하기 전 군부대 앞도로는 1차선 정도의 비포장도로가 형성되어 있었고 건물이라고는 지금의 송현초등학교 인근에 가옥 3-4채와 안동공고 자리에 도축장건물이 전부였다고 한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쯤 호암마을 주민들 사이에 송현동에 군부대가 들어선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자리 잡더라고요. 36사단이 들어서고 난 이후에 부대 앞 도로를 기점으로 안동기차역까지 2차선 도로와 4차선 도로 확장공사도 시작됐죠." 송현동에 자리 잡은 36사단은 송현국민학교 운동회, 졸업식은 물론이고 안동시민체전 등 큰 행사가 있으면 사단 군악대를 동원해 악기를 연주했다고 한다. 일부 군부대 장병들은 송현동 소속으로 시민체육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또한, 매일 아침 훈련병들이 군가를 부르며 호암마을과 노하동을 거쳐 군부대로 아침 구보를 하는 장면을 늘 볼 수 있었고, 여름철에는 호암마을 앞 냇가에서 군인들이 목욕을 했다고 한다. 농번기 때는 대민지원을 위해 군 장병 수백명이 호암마을 일대에 진을 치고 도와줬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군부대 앞에 스레트 건물 여인숙이 있었어요. 주인은 36사단 중사로 근무하던 박정학 씨로 기억해요. 그리고, 사단 정문에서 도보로 5분 거리인 지금의 송하동주민센터 인근에 3층 건물이 들어섰는데 1층에 진미식당이라는 해물탕 전문식당이 있었어요. 지금 한라막창 식당자리에요. 장사가 얼마나 잘되었는지 군부대 장교들과 하사관들이 점심시간이면 식당 밖에서 30분 이상을 기다릴 정도로 영업이 잘 되었어요." 36사단이 이동해오자 송현동의 모습도 변해갔다. 박 회장의 말처럼 부대 앞 도로는 넓어지고 군인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려는 상인들도 하나둘 송현동으로 몰려오게 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술집과 여인숙이었다. 산과 들, 논밭이 전부였던 송현동의 경제 지도가 군인들로 인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섞이면 다툼도 있게 마련이다. "지금의 송현초등 뒤편에 아리랑 주점식당이 있었어요. 당시 주민들과 36사단 장병들이 더러 이용했어요. 한번은 외사촌 동생이 술을 먹다가 그곳에서 장병들과 시비가 붙어 주먹다짐까지 갔어요. 동생이 우리 집에 와서는 전후사정을 애기하고 숨겨 달라 해서 집 마당 짚단 밑에 숨겨 줬는데, 야간에 36사단 헌병들이 어떻게 알고 우리 집에 찾아왔어요. 그때 내가 경희대학교 경제학과에 2학년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헌병들이 와서 막무가내로 동생을 찾아내라니까 어이가 없는 거예요 그러다가 주거침입죄라는 단어가 생각났어요. 그래서 헌병들에게 우리집 안으로 한 발짝만 들어오면 야간 주거침입죄로 청와대에 신고한다고 으름장을 놓자 헌병들이 돌아갔죠." 박 회장이 소개한 아리랑 식당과 외사촌동생 간에 있었던 일화는 '역시 군 부대가 있는 동네 어디를 가더라도 군인들과 동네 총각들의 다툼은 어쩔 수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아버지 혹은 삼촌, 남자들 군대 얘기를 들어 본 분들은 다들 공감할 것이다. 군부대 앞 주택단지에 사는 가정주부가 기억하는 36사단 안동에 36사단이 주둔할 당시 사단 본부에 신병교육대가 함께 있었다. 안동36사단 신병교육대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 중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이 1979년 1월 5일 경북 안동 36사단 훈련병으로 입대해 신병교육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고, 정세균 국회의장이 안동 36사단에 입대, 만기 제대했다. 신병교육대 앞은 훈련병들이 입소하거나 퇴소할 때마다 여러 풍경을 만들어 내고는 했다. 특히, 훈련병들이 훈련을 마치고 퇴소하는 날에는 그 일대가 눈물바다를 이뤘다고 한다. 송하동 성창주택 통장 김선희(74세)씨는 이들의 이런 모습을 묵묵히 지켜본 목격자다. 봉화가 고향인 김 씨는 1978년 태화동에 살다가 1981년 송현동 성창주택에 입주한 후 지금껏 그곳에 살고 있다. 군부대와 가까운 지역에 살다보니 부대에서 울려 퍼지는 기상나팔소리와 야간 취침 때 울리는 음악소리를 늘 듣고 살았다. 일부러 의자를 놓고 담 넘어 군인들이 생활하는 모습도 지켜봤다. 다들 아들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통장을 맡고 있다 보니 누가 이사오거나 하면 혹시 간첩일지도 몰라 일반인이라도 그의 신상을 모두 알고 있어야 했다고 한다. 백미는 신병들 퇴소식 때라고 그녀는 전했다. "부대에서 신병훈련이 끝나고 자대배치를 위해 이동하는 날에는 병사들의 부모, 일가친척들이 새벽부터 부대 앞에 대기하고 있어요. 그때는 군인들이 훈련 마치면 자대로 가기 위해 안동역까지 걸어갔는데 그 시간이 새벽 4시예요. 그런데도 어떻게들 알고 오는지.... 아들 얼굴 한번 볼까 싶어서 알음알음 오는 거죠. 다들 한결같이 안절부절 하면서 기다리다가 군인들이 나오면 또 자기아들 찾는다고 '아무개'야 '아무개'야 하면서 울음섞인 목소리로 기차역까지 따라 가면서 아들 이름을 불러요. 그런데 군인들이 자기 이름 들린다고 반가워하거나 쳐다볼 수 있어요? 조교들 서슬이 시퍼런데. 다행히 아들 얼굴 찾은 사람들은 그 얼굴 더 보겠다고 울면서 따라가고, 못 찾은 사람들은 계속 아들 이름 목 놓아 부르고, 부모님 목소리 들은 군인들도 울고, 나도 참 많이 울었다니까." 1966년 평해 대간첩침투작전에 참여했던 어느 장병의 기억 안동 주둔당시 36사단은 경상북도 북부지역(안동, 울진, 문경 일대)을 위수지역으로 대간첩작전 수행부대로서의 역할도 담당했다. 1961년 6월 봉화 대간첩작전, 1966년 8월 평해 대간첩작전, 1967년 5월 봉화 대간첩작전, 1968년 11월에는 울진, 삼척 지구 대간첩작전, 원주 이전이후 1996년 강릉 대간첩작전 등 6회에 걸쳐 총 252일 대간첩작전을 수행, 무장공비 18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36사단의 긴박했던 대간첩 작전 중 안상욱 씨의 블로그 '멸공(滅共)군대 병사(兵士) 수첩'이라는 글에 안동 36사단의 대간첩 침투작전과 관련한 추억을 기록해 놓았다. 안 씨는 1964년 9월 24일 대구 50사단 신병교육대에 입대 2년 7개월(31개월)의 병역의무를 다하고 만기제대 한 그는 군 복무기간 중 부대이동과 단독 전출을 8번이나 하면서 복무하는 특이한 군 경험 후 제대했다. 안 씨는 대구 50사단, 안동 36사단 309연대, 울진 해안경비대 등에서 근무했으며, 1966년8월에 발생한 평해 대간첩작전에 투입됐다. 그 당시 긴박했던 대간첩 작전에 대해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안동 36사단 왼편 능선을 넘어 309연대에 우리부대 50여명은 독립부대로 남아 있었다. 36사단은 예비사단으로 연병장은 GMC 50여 대가 가로 세로로 도열해 즉시 전투에 투입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우리부대는 매일 야전 교육장에서 각개전투훈련을 받는데 왜 받는지는 알 수 없었다. 3개월쯤 되는 어느 날 밤 12시에 작전 명령이 떨어졌다. 완전 군장을 하고 연병장에 가니 차량에 시동을 걸어 놓고 사단장이 실탄을 지급하고 장전해 열쇠로 채우라는 명령이다. 나는 큰 전쟁이 발생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우리부대가 선발대로 투입되고 50여 대의 GMC에도 병력이 실려 출동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전우들은 서로가 말이 없는데 차는 밤길을 달리고 있었다. 가로변에는 사과가 탐스럽게 익어 향기가 그윽한데도 서로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아침에 도착한 야영지는 어딘지 알 수 가 없었다. 작전은 영양군에 나타나 경찰 총을 탈취한 간첩을 포획이나 사살하라는 명령이다. 나의 분대는 저녁나절에 자연부락에 들어가 농민들을 귀가시켜 놓고 통행을 금지하고 검문검색에 들어갔다. 마을 이장은 군인들이 마을 외곽을 지키는 일에 놀라워하며 우리에게 닭과 돼지를 잡아 극진히 대접했다. 이튿날 우리부대는 어디론가 또 이동이다. 찻길도 없는 산속 계곡을 따라 하루를 내려간 곳이 영덕이다. 영덕에서 해안선 도로를 따라 북상하고 있었다. 우리부대가 정착한 곳은 울진군 영해면 월송정이다. 월송정은 평해황씨의 본관이다. 우리부대는 동해안 경찰 초소에 경비대로 발족해 해송 사이에 벙커를 만들어 텐트를 치고 정착했다. 경찰이 해안 초소를 지키던 것을 우리부대가 인계받았다. 당시 동해안 어선 속에 간첩선과 일월산 불빛이 교신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행정소대는 해안 부락과 백사장 초소를 맡고 경비소대는 죽변에서 후포까지 기동타격대로 임무가 주어 졌다. 행정소대는 어민들이 해안선에 접해 사는 마을은 고성방가로 제압하고, 해안으로 불빛이 세어 나오지 못하게 소등시키는 일이다. 주민들을 진정 시킨 후에 우리는 4명이 1개조로 해안가 백사장에 삽으로 둔턱을 만들어 판초우의와 담요를 깔고 덥고 바다를 향해 엎드려 사격자세로 밤을 지새웠다. 북에 간첩선이 어선으로 위장해 해안선으로 침투하면 생사를 걸고 교전을 해야 했다. 간첩선은 해안 100여m에서 고무보트에 기관총을 걸어 놓고 육지에 투입된 간첩이 백사장에 도착하면 로프로 보트를 간첩선으로 당겨서 북으로 간다. 이때 교전이 발생하면 M1 소총 4정과 기관총의 접전이 발생 할 수 있다. 우리부대 보급품은 36사단에서 지원을 받는데 나는 월 2회 3종 보급수령을 갔다. 평해에서 청송군 진보면을 통과해 안동시로 가는 길에 졸병은 적재함에 타고가도 즐거웠다. 안 씨의 글을 보면 당시 동해안 쪽에서는 고정 및 침투 간첩들과 그 간첩들을 복귀 및 침투시키는 간첩선이 빈번히 출연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동에 사단 사령부를 둔 36사단은 울진을 위수구역으로 두고 있었기에 대간첩작전에도 번번히 출동했다. 그러다 보니 육군 중 대간첩작전에 가장 많은 인력을 동원한 사단으로 남아 있다. 제36보병사단은 현재 사단 내 백호충혼탑에서 울진·삼척 대간첩작전 도중 산화한 12명의 선배 전우들의 희생을 추모하고 호국정신과 애국심을 되새기기 위해 매년 11월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우경 장경석 장군이 말하는 안동36사단 사단장 시절 장경석 장군은 1920년 7월 24일, 함경북도 청진시 서자작동에서 태어났고 올해 98세다. 본관은 울진이며 19세 때 경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 해방 전까지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월남해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5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그의 나이 29세 때였다. 53년 대령으로 진급하여 20사단 포병사령관으로 명을 받아 부임했고, 그 뒤 군단 포병 사령관도 두어 군데 지냈다. 1야전군 포병부장 보직 후 5개월 만에 준장 진급, 야전군 기획참모부장과 육군대학 부총장을 거친 뒤 보병 36사단장과 보병 8사단장 등을 역임한 후 1965년 예편했다. 장 장군은 36사단 사단장 시절 주민들과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각종 대민지원과 민원 해결에 앞장섰다고 재임 시절을 회상했다. "나는 소통이 일상에서 얼마나 소중하다는 걸 그 시절(사단장)에 절실히 깨달았어요. 안동에 주둔한 36사단장으로 부임하는 나에게서 보직 신고를 받고는 당시 김종오 참모총장이 '장 장군 안동 민심이 고약하단 소릴 들었소. 역대 사단장들이 푸대접 받은 곳이야'라고 말하는 거야.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그저 조심하는 차원에서라도 대원군처럼 차라리 부대 문을 폐쇄하고 지낼 생각이었지. 그래야 말이 없으리란 심산이었어. 그런데 그게 아니야. 어쩌다 민간인을 만나면 그들은 정말 순수하고 인정스러웠고, 국방의 중요성도 이해하고 있었던 거야." 장 장군은 시간이 지나면서 안동 사람들에 대한 오해가 풀어졌다고 한다. 역대 사단장들이 푸대접을 받았던 이유가 그 사단장에게 있었다는 걸 깨닫자마자 장 장군은 주민들 대민지원 사업을 위해 헌신하게 된다. "어느 날, 정보참모와 특무부대장을 불러 사단에 출입할 만한 인사에게 출입증을 만들어 주라고 지시했어요. 사단의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너도나도 찾아오는 거야. 당시 내 차가 지금의 벤츠보다 비싼 하드탑인데, 시골길을 달리다가 갓 쓴 촌로들을 보면 세우고 태워드렸지. 이야기도 나누고. 헤어질 때는 명함과 아리랑 담배를 건네줬어요. 그런 인간관계가 민과 군의 장벽을 깨뜨리는 계기가 된 셈이지. 찾아오는 사람들의 민원도 잘 해결해 주고 했어요.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일은? 예로부터 안동은 양반들의 고장이고, 특히 견훤의 난을 치른 삼태사(三太師) 후예인 권, 김, 장 씨 들이 많이 사는 곳이야. 그 중 하나인 장 씨인 내가 사당에 찾아가 참배를 하기도 했어요. 정말 보람을 느낀 1년 6개월이었어. 지금도 나는 군 후배들을 만나면 강조해요. '군의 대민 지원 사업은 전투력 증강 요체다'라고." 이후 장 장군은 안보회의 비상 기획위원과 코오롱 감사, 교육부 정책 자문위원도 지냈다 . 특히, 군인이 되기 전 초등학교 교사로 있었기 때문에 교육에 대한 사랑, 소신과 철학이 있다는 걸 숨기지 않고 용인대학교에서 요가 학과를 창설하고 12년 동안 후학을 가르쳤다. 전쟁 때 함경북도 청진에서 월남, 안동처녀와 결혼한 고성욱 주임원사 안동시 송현동 삼성명가에 사는 고성욱(76세)씨는 함경북도 청진이 고향이다. 그는 6.25전쟁 당시 남쪽으로 피난 오다 도중에 폭격으로 부모님과 생이별을 경험하게 된다. 그의 나이 9세 때였다. 폭격에서 살아남은 그는 함께 피난 나온 이모님과 춘천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이모님도 피난 도중 폭격을 맞아 다리가 절단되는 등 불편했기에 가정형편은 넉넉지 못했고, 돈을 벌기 위해 자연스레 군인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 "그러니까 1961년초에 군에 입대해 논산훈련소에서 신병훈련 받고 6월 36사단으로 자대배치를 받았어요. 처음에는 사병으로 군에 갔는데 바로 하사관 지원을 했죠. 그러니까 사병 생활을 20개월하고 1963년 1월에 하사관으로 임용돼 36사단 병기중대에서 하사관 생활을 시작했죠. 그러다가 1966년 8월 미8군 왜관부대(캠프캐럴)로 전출 가서 1년6개월 근무하기도 했죠. 당시 미군부대 근무했다고 하면 다들 알아줬어요. 이후 베트남도 갔다 오고, 다른 사단에서도 근무했지만 안동에서 가장 오래 근무했죠. 36사단이 원주로 가고도 50사단 창설 요원으로 안동에 계속 남아있었으니까." 고 씨의 인생은 참으로 파란만장 했다. 이북에서 월남하다 부모를 잃고 어렵게 장성해 군에서 인생을 다 보냈다. 그는 자신이 군 생활을 하는 동안 사단장을 비롯한 전우들과 주위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아마 그 도움이 없었다면 34년간 군 생활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군 생활 하던 중에 송현동에 아들 없이 딸 셋 가진 집으로 장가들었죠. 1962년도 일거예요. 뭐 데릴사위죠. 신혼살림도 처갓집에 방 하나 얻어서 시작했고, 계속 장인장모 모시고 살았으니까. 부모님을 여의고 가진 것도 없는데 딸을 내준 장인장모님에게는 아직도 고마움이 남아 있어요. 처음에 결혼한다고 했을 때 장모는 허락했는데 장인은 완강하게 반대했죠. 처고모들도 다 반대하고. 처가는 그 당시 부자였거든요. 장인이 일제강점기 때 훈장도 하고 땅이 많았어요." 그렇게 고 씨는 군에 입대했다가 안동 처녀를 만나 평생의 배필로 삼았다. "결혼은 전통방식으로 했어요. 그때 36사단 참모들도 많이 참석하고 그랬죠, 군 생활 하고 얼마 안됐으니까 돈도 그리 많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장농도 사단 공병대에서 짜서 저한테 주고, 당시 사단장님은 금성라디오를 선물하기도 했죠. 당시 금성라디오가 처음 나와서 굉장히 귀했는데 결혼 선물이라고 주시더라고요. 그렇게 안동에 완전히 자리 잡게 된 거죠." 고 씨는 안동에서 장가들 당시 36사단 참모들을 비롯해 부대 내에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다며 그 고마움을 아직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긴 가족들을 위해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군 생활과 결혼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데릴사위 격으로 장가를 갔으니 이게 또 힘들어요. 물론 장인장모가 많이 챙겨줬는데 그런데도 나름 힘든거죠. 군 생활 하면서 농사도 지어야 했으니까... 매일 새벽 3~4시면 일어나서 논밭일을 먼저하고 출근했죠. 그리고 군에서 받은 월급은 다 장인 드렸고요. 군 생활과 농사를 병행하다보니 당시 사단장, 보안부대장 등이 정말 많이 도와줬어요. 군에서 대민지원 계획이 잡히면 부대장이 우리 논밭은 우선적으로 지원해 줬죠. 그랬으니 그 일 다 했지 아니면 못했어요." 고 씨는 결혼과 군 생활, 농사까지 그야말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애들이 하나둘 태어나면서 경제적으로는 늘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다 왜관 미군부대 근무 후 안동 36사단으로 복귀하자 장인이 제대를 권유했다. 농사만 짓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렇지만 고 씨는 그럴 수 없었다. "장인은 내가 전역하기를 바랐어요. 근데 농사만 짓기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전역을 할 수 없었죠. 애들 키우는데도 문제고. 그래서 결국 돈 벌려고 월남에도 다녀왔죠. 순전히 돈 벌려고. 그래서 1969년 백마부대 소속으로 월남에 파병을 갔다 왔어요. 월남 갈 때 못 가게 할까봐 장인·장모 모르게 갔어요. 장인도 나중에는 자기 때문에 내가 고생 많이 했다고 얘기하곤 했어요." 그렇게 고 씨는 두 번째 전쟁터로 나갔다. 월남에서 고 씨는 꽤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월남이나 한국이나 월급은 십여만원으로 같았어요. 그런데 전투수당이라고 해서 월 60달러 정도를 받았는데 당시 우리나라 돈으로 60만원 정도였어요. 나라에서 60불 중 20불은 저를 주고 40불은 집으로 보냈어요. 월급도 집에서 받았고, 지금이야 60달러가 생각하기에 따라 큰돈이 아니지만 당시는 월급의 4~5배나 되는 큰돈이었죠." 고 씨는 월남에서 14개월을 근무했다. 71년 2월 경 귀국, 양평 20사단포병대에서 2년간 근무하다 36사단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1982년 50사단 창설요원으로 참여했고, 주임원사로 근무하다 지난 1995년 34년간의 군 생활을 마감하고 전역 했다. "작전이 바뀌었어요. 원래는 원주로 50사단이 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36사단이 가는 걸로 변경 됐죠. 당시 36사단 안에는 70사단도 같이 위치해 있었는데 36사단은 예비사단이라 소장이 사단장이었고, 70사단은 동원사단이라 준장이 사단장 이었어요. 당시 안동에 36사단과 70사단이 같이 있으니까 36사단이 원주로 가라 이렇게 해서 36사단이 원주로 가게 된 거죠. 70사단은 36사단이 원주로 간 이후 완전히 자리 잡은 거고. 원래 저도 원주로 갔어야 됐는데 당시 사단장이 저를 배려해 줬어요. 안동에 있으라고." 안동에 남아 50사단 창설요원으로 군 생활을 이어가게 된 고 씨는 안동에 자리 잡았던 36사단과 70사단, 50사단을 군 생활 내내 경험했다. 고 씨는 현재 50사단 그러니까 36사단 부지에 있던 담장을 본인이 주관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처음 36사단에서 군 생활 할 때는 담장이 없었어요. 그래서 부대 경계가 모호한거죠. 그냥 아무것도 없이 나무만 서있거나 간간히 철조망이 있거나 그랬어요. 그래서 당시 36사단 부대원과 방위병들을 동원해서 할당을 주는 방식으로 담장을 만들었어요. 당시 지금 송현동 자리에 108연대, 109연대, 포병연대 등이 주둔해 있었는데, 그들 구역은 그들이 직접 공사를 하도록 지시하고, 시멘트는 공병대에서 받아썼고, 하다못해 부대 내에서 직접 블록 벽돌을 제작해 가면서 만든 담장이죠." 고 씨는 군 생활에서 그래도 부대에 담장 하나는 남기고 나왔다고 자랑했다. 그렇게 일평생을 군에 몸담았던 고 씨는 1995년 34년간의 군 생활을 마감하고 전역 해 지금도 안동 송현동에서 그 삶을 이어가고 있다. 안동인들의 기억속의 그때 그 시절 안동 36사단 과거 안동36사단 시절에는 부대주변에 하사관 주택이 많이 있었다. 운안동 하사관주택단지, 송현초등학교 뒤편, 사단 후문 등에 있었다. 또한 군부대 내의 생활용품과 건물유지, 보수 등을 위해 군인들이 주로 신시장을 많이 이용했다. 신시장에서 30년 이상 영업을 했던 상인들 중에는 36사단 주둔당시 군부대내의 건물보수와 수리 등을 위해 중대급 부대에 매월 격별유지비가 지급 되었다. 각 예하부대의 인사계, 군수장교 등이 수시로 물건구입을 위해 신시장등에서 전기재료, 철물재료, 도배, 장판재료, 스레트 등을 구입했다. 때로는 외상장부를 기재하면서 활발한 거래를 했다고 기억하는 분들도 남아 있다. 구시장일대의 여관, 식당, 안동역. 운흥동시외버스터미널 주변에는 외박, 외출, 휴가, 면회, 출장 등으로 36사단 군 장병들을 늘 볼 수 있었다. 기차역 TMO부근과 역사 대합실 인근에는 36사단 헌병들이 짚차를 타고 내려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검문검색을 하던 모습들을 안동인들은 기억하고 있다. 1955년부터 27년 동안 안동의 역사와 함께한 36사단은 송현동 군부대 근처에 있었던 아리랑주점의 추억, 버스터미널 부근 학다방, 포진리 유격장, 호암마을 송야천 냇가의 추억과 애환을 남긴 채 1982년 강원도로 이전하면서 안동과의 인연이 다하게 된다.박태규 회장은 36사단이 사라진 것에 대해 상당히 아쉬워했다. 36사단 안동주둔 시절에는 1만 여명의 병력이 있었던 걸로 기억했다. 군 장병들이 외출, 외박, 휴가, 면회 시 군인들이 안동시내에서 밥도 사먹고, 영화도 보고, 선물을 사는 등 안동서민경제 활성화에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에는 가게만 있으면 무슨 장사를 해도 다 잘 되었을 정도로 안동경제가 호황을 누렸던 시절이라고 말하고 있다. 출처 : 경북in뉴스 [출처] 안동 송현동 주둔 36사단 백호부대를 기억한다|작성자 권택기 즉결 처분이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빗발처럼 쏟아지는 총탄을 뚫고 적을 향해 돌격하는 병사들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나라가 없으면 자신도 없다는 애국심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적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절체절명의 위기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죽어가는 전우를 보고 치솟은 분노 때문인가. 상관의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인가. 모두 정답일 수도 있고 또한 오답일 수도 있다. 명령에 죽고 사는 군인이라고 해서 자신의 목숨이 아깝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군인도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심각한 전장공포에 시달리다 못해 전장에서 이탈을 하는 병사가 나오게 마련이다. 그들에게는 엄한 군법이 적용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군법회의를 열 수 없을 만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장에서 지휘관의 명령에 불복종하거나 전장이탈을 하는 병사가 생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전세가 아군에게 극도로 불리한 절체절명의 위기라면 말이다.
625가 발발한 지 사흘 만에 서울을 적에게 빼앗길 정도로 국군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공격할 때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용감한 군인과 비겁한 군인의 차이는 후퇴할 때 곧잘 드러나기 마련이다. 개전 초기 임진강에서 있었던 일이다. 부대의 편제조차 무너진 상태에서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장병들을 재편성하기 위해 모소령이 나와 장교가 있으면 나오라고 했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모두들 계급장을 뗀 상태였기 때문에 장교와 사병을 쉽게 구분할 수 없었다.
그때 군인들을 강 건너편으로 실어다 줄 배 한 척이 나타나자 모여 있던 무리 중에서 한 사람이 자칭 장교라면서 먼저 타려고 했다. 그 소령은 조금 전에 장교가 있으면 나오라고 할 때는 나오지 않더니 배를 탈 때는 장교냐 하면서 권총으로 사살했다. 그러자 여기저기 흩어져 명령도 제대로 듣지 않던 장병들의 질서가 순식간에 잡혔다고 한다. 1사단 12연대 예하 중대에서도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서울을 빼앗겼다는 소식은 병사들에게도 심한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중대장이 병사들에게 집합명령을 내리자 하사관 몇 명이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집합이냐』면서 비웃자 중대장이 권총으로 세 명을 모두 사살해 버렸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축 처져 있던 병사들은 중대장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내 집합했다고 한다. 극히 일부 부대에서 있었던 일이기는 하지만 당시 우리 국군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국군이 연전연패를 되풀이하자 절망 속에 빠져 후퇴하는 병사들에게 상관의 명령이 제대로 통할 리가 만무했다. 많은 장병들은 군인으로서의 임무를 망각하고 제 한 목숨을 부지하기에 바빴다. 군법회의에 회부할 만큼 여유도 없는 상태에서 나온 것이 바로 즉결처분권이다. 「국군의 후퇴는 육참총장이 명령할 뿐이다 서울을 적에게 내주고 후퇴하던 1950년 7월3일, 육군본부에서는 「부대의 후퇴는 軍 최고지휘관인 육군참모총장이 명령할 뿐이고 예하 부대장은 후퇴를 명령할 권한이 없다」는 작전훈령 제2호를 선포한다. 하지만 그야말로 그런 訓令만으로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병사들을 돌려 전투에 투입시킬 수는 없었다. 사기가 땅에 떨어진 장병들에게는 육참총장의 훈령도 그야말로 사후약방문이었을 따름이었다.
결국 육본은 7월26일 영시부터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거나 명령 없이 전장이탈을 하는 부하들에게 즉결처분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분대장급 이상 지휘관에게 부여한다. 전시에서의 측결처분이란 곧 총살을 의미했다. 이후 즉결처분권은 군법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적에게 죽기 전에 자칫 잘못하면 상관에게 먼저 총살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군법에 의하지 않고 지휘관이 자의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즉결처분권은 처음부터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결처분권을 행사하는 지휘관의 판단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사전에 막을 방법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육사 8기생들이 펴낸 「노병들의 증언」이라는 회고록은 군법에 의하지 않고 명령 불복종인 부하들을 총살시킬 수 있었던 즉결처분권이 일부 지휘관에 의해 남용되면서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625 발발 일년 전인 1949년 5월에 소위로 임관한 육사 8기생들은 대부분 중위 때 6.25를 맞았다. 실제 최전선에서 병사들과 함께 전투를 치러야만 하는 소대장으로 625의 초반부를 보냈던 그들은 육사 어느 기수보다 희생이 컸다. 1천3백45명의 동기생 중 6.25 때 전사하거나 실종된 사람은 4백19명으로 전체 동기생 중 3분의 1에 달한다. 그 희생자 중에는 적군이 아닌 상관에 의해 즉결처분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8사단 10연대 1대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김천만 중위도 그중 한 사람이다. 김천만 중위가 배속된 10연대 1대대는 1950년 7월4일 강원도 원주와 충북 제천의 중간지점에서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월등한 화력과 병력을 앞세운 인민군의 야간 기습공격에 김천만 중위의 소대는 전멸하다시피 했고 간신히 살아남은 김중위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즉결처분권을 앞세운 10연대장 고근홍 중령(육사 2기,전사)의 질책뿐이었다. 결국 김중위는 연대장으로부터 명령 없이 후퇴했다는 이유로 즉결처분 선고를 받자 소지하고 있던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즉결처분권은 적군보다 더 가혹했다 육사 8기생들은 책 속에서 그들을 강한 어조로 비난하고 있다.
「625 초전 일부 몰지각한 지휘관들은 최전선에서 분전하던 초급장교만을 선택하여 생명을 빼앗는 가혹한 횡포를 서슴지 않고 자행하였다. 그들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말살한 즉결처분이라는 용어가 유일한 무기이며 방편인 듯했다. 그들은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하고 지휘권 남용과 횡포로 명령에 복종하는 초급장교의 충성을 짓밟았다. 그들은 계급적인 우월감으로 공포와 강압을 자행하여 암흑사의 주역으로 등장되었던 어두운 그림자였다. 그들의 잔인한 횡포는 포화보다, 적군보다 더 가혹했다」 포화보다 적군보다 더 가혹했다는 즉결처분에 부하를 잃어버린 아픔을 맛본 박치옥 (前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씨. 당시 그는 김천만 중위가 소속된 10연대 1대대장이었다.
박치옥씨의 증언.
1950년 7월4일, 인민군의 대규모 야간 기습공격을 견디지 못한 일부 중대가 연대본부가 위치한 곳까지 후퇴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연대장 고근홍 중령이 명령 없이 후퇴하여 방어선을 무너지게 한 책임을 물어 소대장 김천만 중위와 이인수 소위를 즉결처분했다는 사실은 대대장인 저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연대장이 두 사람을 즉결처분시킨 다음에 나한테 전화를 해 알려주더군요. 그래서 내가 장교 하나 키우기가 얼마나 힘든데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항변하자 「그렇게 됐소」라고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전화를 끊어버리더군요. 평시라면 모르겠지만 전시에 주둔지를 이탈해 연대장에게 가서 항의할 수도 없는 형편이어서 혼자서 참을 수밖에 없었지만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굳이 후퇴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 있다면 전투가 소강상태에 있는 틈을 이용해 충분히 군법을 적용할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소대장 한둘을 죽인다고 해서 이미 뚫린 방어선이 복구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맡고 있던 1대대 말고 10연대 예하 다른 대대에서도 소대장들이 고중령에게 총살당했다는 소문이 떠도는 것을 듣기도 했습니다』
연대본부를 향해서 기관총 사격을 감행한 중대장 박치옥씨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일본군 중위 출신이었던 고근홍 중령은 그 이후에도 몇 명의 초급장교를 더 즉결처분하는 물의를 일으킨다.
강원도 원주의 신림전투에서 최용덕(육사 9기) 소위가, 이어 단양전투에서는 인민군의 집중포격을 견디지 못하고 진지를 이탈한 정구정(육사 8기) 중위가 고중령에 의해 총살되었다. 전투가 있으면 죽음이 따르는 것이 전쟁의 비극이다. 적군에게 죽는 죽음도 슬프지만 아마 그보다 더 억울한 죽음은 아군에 의해 총살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두 번도 아니고 수차례에 걸쳐서 일개 병사도 아닌 소대장들을 즉결처분시킨 고근홍 중령을 주위에서는 어떻게 평가했을까.
박치옥씨의 증언.
『걸핏하면 즉결처분을 시킨다는 좋지 못한 그런 소문이 자꾸 돌자 연대장인 고근홍 중령은 연대 장병들로부터 신뢰를 받지를 못했습니다. 오죽하면 모 중대장이 연대본부가 있는 곳을 향해서 기관총 사격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저는 지휘관이 엄격한 군법만을 내세워 부대를 통솔해서는 강한 전투력을 지닌 군대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병사들이 지휘관을 형님처럼 믿고 따르는 부대가 오히려 강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일본군 지원병 출신들이 해방 이후에 국군의 지휘관이 되자 리더십도 없는 상태에서 자신들이 배운 것을 그대로 써먹은 것이 즉결처분권입니다. 어떻게 적을 눈앞에 둔 전쟁터에서 자기 부하를 쏴죽입니까. 말도 안되는 얘기죠. 그리고 똑똑한 장교 하나 키우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얼마나 손해라는 것은 바꾸어 말해서 우리가 625 때 인민군 장교 하나를 죽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는지 생각해보면 쉬울 겁니다』
즉결처분권의 희생자는 사병들이나 초급 장교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광복 54주년인 지난 8월15일, 독립운동에 기여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에게 훈장이 수여되었다. 이날 발표된 건국훈장 애국장 수상자 명단에는 임시정부 휘하의 광복군 대원이었던 윤태현(사망)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윤태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그의 이력을 살펴보자.
3․1운동이 일어나던 해인 1919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그는 열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중국으로 건너간다. 일제에게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임시정부 휘하의 광복군에 입대하여 활동하던 그는 1945년, 임정과 美 OSS(전략첩보국 CIA의 전신)가 합작하여 한반도에서의 게릴라 활동을 목적으로 수립한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에 참가한다. 우리의 손으로 일제를 타도하려는 목적으로 계획된 「독수리 작전」은 훈련을 끝마친 대원들이 한반도 침투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일제가 항복하는 바람에 작전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고 끝나버렸다.
이처럼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독수리 작전」에 참가했다는 경력만으로 윤태현은 이미 오래 전에 공적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아야만 했다. 해방된 지 50여년이 지나는 세월동안 그가 국가유공자 대상에서 제외된 까닭에 대해서 그의 양아들인 윤덕한(충남 공주시 장기면 하봉리)씨는 이렇게 얘기한다.
윤덕한씨의 증언
『1963년도에 광복군 단체에서 광복군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의 독립운동 증거자료를 일괄적으로 정부에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분들은 다 인정이 되는데 유독 저의 아버님만 제외되는 겁니다. 그 이후 몇 번이나 더 증거자료를 모아 국가보훈처에 제출했지만 이상하게도 번번이 심사에서 탈락했습니다. 아버님보다 더 못한 독립운동 경력을 지낸 사람들도 훈장을 수여받는데 말입니다. 나중에 아버님의 서류가 심사대상에서조차 제외되었다는 것을 알고나자 허탈하기가 그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번번이 공적심사에서 탈락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해방 후 귀국한 윤태현은 육사 7기(특별)를 거쳐 소위로 임관한다. 대위 때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그는 이후 소령으로 진급하여 8사단 21연대 1대대장으로 부임한다. 6,25가 일어나기 두 달 전인 50년 4월, 공비 토벌작전에 투입되어 태백산맥에서 활동하던 이호제 부대의 부대장과 작전참모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던 윤태현 소령이 번번이 국가보훈처의 심사에서 탈락한 이유는 단 한 가지다. 625 전쟁 중 즉결처분을 당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625 전쟁중 분대장급 이상 지휘관에게 주어졌던 즉결처분권은 법률에 의하지 않고 인간의 고귀한 생명권을 침해했다는 점에서 위헌적인 요소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이 지금과 같은 평시가 아니라 인민군의 남침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는 것이 급선무였다는 점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나라의 운명이 어찌될지 모르는 판국에 즉결처분권의 위법 여부를 따지고 있을 겨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즉결처분권은 부하들을 지휘관 마음대로 죽일 수 있다는 것보다는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에게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전장이탈을 하면 총살을 당할 수도 있다는 위협을 주어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시키려고 하는 경고성 목적이 강했습니다』
실제로 분대장 이상 지휘관에게 즉결처분권이 주어졌지만 6,25에 참전했던 참전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분대장이나 소대장이 예하 분대원들을 즉결처분 시켰다는 경우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소대원들 사이에는 사선을 함께 넘나들면서 알게 모르게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꽁초담배 한 개비라도 나누어 피울 수 있는 전우애다.
그래서 최악의 상황이 아니면 한솥의 같은 밥을 먹는 식구와 같은 부하들을 분대장이나 소대장이 총살시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대 규모를 벗어나 연대급이나 사단급 정도만 되더라도 같이 얼굴을 맞대고 생활할 기회가 별로 없다보니 인정에 얽매이지 않고 즉결처분권을 행사하기가 쉬웠다. 윤태현 소령이 배속되어 있던 국군 8사단은 동해안 지역에 주둔하고 있다가 625가 발발하자 강원도 원주를 거쳐 7월6일 충북 단양까지 후퇴한다. 그곳에서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려고 했지만 화력과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7월13일에는 경북 영주까지 후퇴했다. 그리고 영주와 풍기 일대에 방어선을 펴고 남하해온 인민군 8사단과 열흘간에 걸친 치열한 접전을 펼친다. 이 전투에서 연대장 김 모 중령에 의해 1대대장 윤태현 소령이 즉결처분을 당하는 참사가 벌어진다.
21연대 대전차포 소대장이었던 송제근(前 경찰대학장)씨는 멀리서나마 그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다. 당시 그의 소대는 산악 지대에서 대전차포는 필요없다고 해서 대전차포는 경북 안동으로 내려보내고 보병소대로 임무를 전환하여 전투에 참가하고 있었다.
송제근씨의 증언 『연대본부가 영주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1950년 7월17일경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소대는 연대본부 경비 책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가까이에서 보지는 못했지만 파진 구덩이 앞에 팬티만 입은 사람이 서 있었는데 잠시 뒤에 총성이 울리더니 그가 쓰러지더군요. 죽은 사람이 1대대장 윤태현 소령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습니다. 즉결처분 연유는 잘 몰랐지만 나중에 21연대 출신장교들의 모임에서 윤태현 소령이 즉결처분을 당한 이유에 대해서 얘기가 있었습니다. 윤태현 소령의 1대대가 연대본부 작전계획대로 제 위치를 사수하지 않고 뒤로 물러난 것이 한 번에 그친 것이 아니고 서너 번 그런 적이 있었다더군요. 즉결처분의 이유라면 결국 그것 때문이겠죠』
하지만 윤소령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다르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의 막내동생인 윤주현(충남 공주시 장기면 하봉리)씨는 윤소령과 같은 대대에서 사병으로 복무했던 육촌 형 윤동현(사망)으로부터 들었던 얘기를 해주었다.
『둘째 형님(윤태현 소령)이 그 참사를 겪기 얼마 전에 제 육촌 형은 중상을 당해 통합병원에 후송됐는데 거기에서 나중에 같은 대대에 있다가 부상을 당해 후송된 전우를 우연히 만났답니다. 그래서 형님의 생사가 궁금해서 물어보니 조심스럽게 얘기를 해주더랍니다. 원래 연대에서 내려온 1대대의 방어지점은 그 전에 배치되었던 다른 대대가 한 번 전멸을 당했던 곳이었답니다. 그래서 대대장이었던 둘째 형님이 연대장 명령대로 방어선을 펼쳤다가는 또 전멸당한다면서 원래 지점보다 약 1㎞ 정도 떨어진 후방에 병력을 배치시켰답니다. 그걸 안 연대장이 명령불복종이라면서 처벌하겠다고하자 둘째형님이 명령대로 했다간 내 부하 다 죽인다면서 항명을 했답니다. 그것이 결국 말다툼이 되었고 그러자 화가 난 대대장이 결국 그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거죠』 두 사람의 증언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윤소령이 연대장에 의해 즉결처분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증언대로 1950년 7월17일에 윤태현 소령이 즉결처분을 당했다면 문제는 또 있다. 분대장급 이상 지휘관에게 주어진 즉결처분권은 1950년 7월26일 0시부터 주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이전에는 그 어떤 지휘관에게도 즉결처분권은 없었다.
태윤기 변호사의 증언.
『상황에 따라서 좀 다르기는 하지만 즉결처분권이 분대장급 이상 지휘관에게 주어지기 전인 1950년 7월26일 0시 이전에 즉결처분을 했다면 그것은 분명히 지휘관의 권한을 남용한 불법행위고 범죄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어차피 법을 무시하고 일어나는 행위다. 또한 자칫 잘못하면 나라가 없어질 판국에 전투의 결과에 무한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지휘관으로서는 법조문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무슨 수를 동원하더라도 인민군의 남침을 저지하는 것이 지휘관들의 최우선 과제였다. 때문에 몇몇 지휘관들은 그 이전부터 이미 자의적으로 즉결처분권을 행사했고 그들 중 상당수는 일본군 지원병 출신의 지휘관들이었다.
수도사단 1연대 작전주임 보좌관으로 625를 맞이한 윤흥정(前 戰敎司 사령관)의 증언.
『사실 즉결처분은 6,25 때도 물의가 많았습니다. 특히 일선 전투현장에서 분대장이나 소대장 같은 지휘관이 전투 도중 행사했던 즉결처분은 상황 자체가 군법을 행사할 만큼의 여유가 없으므로 이해할 수가 있지만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 충분히 군법으로도 처리할 수가 있는 연대급 이상의 대부대 지휘관이 즉결처분권을 행사했다는 것은 쉽게 수긍할 수 없습니다. 물론 즉결처분이 625의 전세를 바꾸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사실은 나도 625 전쟁 기간 동안 몇몇 상관으로부터 명령대로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면 즉결처분을 시켜버리겠다는 위협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그리고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부하들에게 즉결처분권을 행사하라는 권유를 주위에서 받기도 했지만 나는 도저히 못하겠습디다. 어떻게 명령에 불복종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기 손으로 부하를 죽입니까. 그리고 실제로 상관이 내리는 공격명령의 태반이 실현 불가능한 일인데 말입니다. 사실 병사들은 죽는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앞으로 돌격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들어야만 비로소 돌격을 하죠. 병사들에게 돌격을 하더라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해주는 것이 바로 지휘관의 역할이고 병사들은 그런 지휘관을 더 믿고 따릅니다. 강한 전투력은 바로 그럴 때 나오는 거죠』 즉결처분권은 독전의 주요 수단이었다 하지만 일부 지휘관들은 부하들을 믿고 따르게 하기보다는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전근대적인 방법인 즉결처분권을 휘두르면서 병사들을 전투에 투입시켰다. 특히 전선이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는 바람에 벼랑끝으로 몰려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던 시기에는 그런 현상은 더 심해졌다.
낙동강 방어선의 한 축이었던 안동 방어작전에 투입되었던 송제근씨의 증언.
『그때 우리 8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수도사단이 추가 투입되었는데 수도사단장 김석원 장군은 자기가 있는 한 더 이상의 후퇴는 없다면서 전선 후방에 헌병을 배치시켜 놓고 후퇴하면 무조건 사살한다고 위협을 했습니다. 말 그대로 사수하라는 거죠. 그때 분위기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소대장인 제가 전투지휘를 하려고 소대원들이 있는 참호를 왔다갔다 하면 뒤에서 독전을 하고 있던 헌병들이 제가 전선을 이탈하려는 줄 알고 총으로 위협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것은 단순한 위협만은 아니었다. 「육군 헌병 50년사」에서도 즉결처분권을 독전의 주요 수단으로 사용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全 전선에 걸쳐서 후퇴 및 반격간에 발생하는 전투 기피현상과 신병들의 도망, 낙오 등을 억제하기 위해 후퇴자 중 12명을 全부대원이 보는 앞에서 즉결처분하고 명령 없이 후퇴하는 연대장을 구금했다」 이처럼 즉결처분은 무너지는 전선을 지탱하려는 주요 수단이었다. 동부전선의 영덕을 방어하고 있던 3사단에서도 전투에 패배한 책임을 물어 소대장을 총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가운데 철모쓴 사람이 김종원 중령이다 "노병들의 증언"에 의하면 "학살에는 귀신,전투에는 등신"으로 평가된다
3사단 23연대장 김종원 중령은 예하 소대장이 지키고 있던 영덕 남방의 고지를 빼앗기자 탈환을 명령한다. 하지만 탈환에 성공하지 못하자 그 책임을 물어 소대장과 사병 한 명을 즉결처분시켜 버린다. 아무런 문제도 없이 그냥 묻혀져버릴 뻔했던 이 사건은 후일 3사단 미군 고문관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김종원 중령이 연대장직에서 해임되는 사태로까지 확대된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김종원중령은 일본군 하사관 출신으로 필리핀,뉴기니전투등에 종군한바 있으며 한국군창설후 한국군에 투신하여 여순 순천사건때 투입되어 부역자들을 일본도로 직접 학살한다 하지만 23연대장으로 근무하다 한국전이 터지자 전방에 투입되었는데 미군고문관의 말을 빌자면 "끝없이 후퇴하며 전투때마다 어디론가 사라진(도망간) 연대장을 찾느라 힘들다"였을 정도로 전투에는 등신이었다 그는 즉결처분을 즐겨하는걸로도 유명했다 한때 그가 23연대를 일본군식 반자이돌격에 동원하려 한일이 있었는데 연대작전장교가 작전의 무모함과 부당함을 역설하며 항명하자 옆에 있던 헌병에게 즉결처분할것을 명하고 연대본부 안에서 작전장교와 헌병이 총을 겨누고 대치하는 상황까지 간 적도 있었다 김종원중령의 외조카인 구본환씨는 2004년 <백두산 호랑이를 찾아서>라는 독립영화를 통하여 김종원중령에게 희생된 희생자들에게 용서를구하고 김중령을 비판하기도했다)
625 전쟁중 발생했던 즉결처분은 휴전 후 법적 소송으로까지 치닫는 경우도 있었다. 송요찬 장군은 수도사단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1950년 9월, 17연대 3대대장이었던 조영구 중령을 즉결처분한다. 경주 북방의 곤기봉에 배치시켰던 3대대가 자꾸만 후퇴하자 여러 번 후퇴하지 말라고 경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후퇴를 하자 헌병을 시켜 즉결처분을 시킨 것이다. 당시 안강, 경주 축선이 무너지면 힘겹게 지키고 있는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일시에 무너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상태였다 조중령의 유가족은 1960년도에 송요찬 장군을 살인죄로 고소했지만 송장군은 검찰에서 불기소처분되었다.
625 전쟁중 발생했던 즉결처분 때문에 유일하게 법적 소송에까지 휘말린 송요찬 장군에 대한 송제근씨의 증언.
『저는 8사단 21연대에서 소대장부터 대대장까지 하면서 3년 내내 일선 전투지구만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한때 8사단장으로 부임해 왔던 송요찬 장군 밑에서 대대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분이 총살을 잘 시키는 것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지만 사실과는 좀 다릅니다. 휴전을 열흘 정도 앞둔 1953년 7월 중순일 겁니다. 하루는 사단장인 송요찬 장군이 대대장인 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지도를 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지도상의 한 고지를 좌표로 찍어주면서 그 고지를 점령하면 훈장 탈 준비를 하고 점령하지 못하면 총살당할 준비를 하고 자기에게 오라고 하더군요. 그것은 점령하지 못하면 꼭 죽이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만큼 필사의 각오로 싸우라는 심리적인 효과를 노린 거죠』
이처럼 일부 지휘관들은 625 전쟁 기간 내내 즉결처분권을 약방의 감초처럼 부하들을 독려하는 데 사용했다. 하지만 실제로 즉결처분권이 유효했던 기간은 약 1년간에 불과했다. 지휘관의 독단에 의해 시행되었던 즉결처분권이 본래의 의도와는 반대로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등 군 내부에 여러 가지 물의를 일으키자 시행된 지 일년 만인 1951년 7월10일 영시부터 취소가 된 것이다. 하지만 지휘관의 명령이 최우선일 수밖에 없는 군대의 생리상 일선 전투현장에서 즉결처분권의 위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사병으로 입대했다 전쟁터에서 현지임관되어 대위로 전역한 김홍관(충북 청원군 북일면 형동리)씨는 화랑무공훈장을 세 개나 받은 역전의 용사이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던 1951년 봄, 초임 소위들은 현지에 도착하기가 바쁘게 전사했다. 소위들의 부족현상이 심해지자 소대 선임하사였던 그는 소위로 현지임관을 한다.
소대장을 버려두고 도망친 병사 중부전선 905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중공군과 벌인 전투는 그야말로 사투에 가까운 소모전이었다. 한때 그가 속한 중대원 중 살아남은 사람이 겨우 30여명에 불과할 때도 있었다. 살아있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대대장은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면 죽여버리겠다고 전화에다 대고 협박을 했다. 결국 그는 마지막 방법을 택한다. 소대가 점령해야 할 고지는 아군이 공격할 때 고지를 지키고 있는 적의 사격으로부터 몸을 숨길 은폐물과 엄폐물이 전혀 없는 민둥산이었다. 그는 적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소수의 병력으로 결사대를 조직해 공격하기로 했다.
하지만 죽을 것이 뻔한 결사대에 부하를 내보내기에는 마음이 걸려 자신이 나섰다. 수류탄을 든 그는 엄호를 해줄 부하 두 명과 함께 포복으로 고지로 접근해 갔다. 하지만 뒤따라오던 부하가 오발을 하는 바람에 고지를 지키고 있던 적에게 들켰고 곧 집중사격이 퍼부어졌다. 그때 뒤에 따라오던 부하들은 엄호를 해주기는커녕 자기들만 살겠다고 오히려 줄행랑을 쳐버렸다.
그가 구사일생으로 고지에서 살아내려왔을 때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부하 중 한 명이 개울가에 주저앉아 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그는 옆에 있던 선임하사의 총을 빼앗아 부하를 향해 발사한다. 『무엇보다 저 혼자만 살겠다고 소대장을 버려두고 도망친 부하들이 괘씸했습니다. 그래도 소대장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걱정은 해야 하는 것이 인간된 도리 아닙니까. 죽이겠다는 생각보다는 머리 끝까지 치민 화를 저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총알은 허벅지를 살짝 스치는 정도여서 목숨에는 아무런 지장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손으로 부하를 죽이는 최악의 경우만은 피했지만 지휘관들에게 즉결처분권이 없었더라면 과연 우리가 625를 제대로 치러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홍관씨의 증언.
『결사대의 공격마저 실패로 끝나자 대대장이 전화에다 대고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면 당장이라도 죽여버릴 듯이 고함을 치더군요. 그때의 심정은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하는 수 없이 저는 그날 새벽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남은 병력을 집합시켜 놓고 오늘 공격에 성공하지 못하면 어차피 우리는 다 죽는다. 한발짝이라도 후퇴하면 내가 쏴버리겠다고 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병사들도 내가 대대장에게 어떻게 협박당하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다른 말을 하지 않더군요. 하여튼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면 어차피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무서운 게 없더군요. 죽기를 각오하고 돌격한 것이 하늘을 감동시켰는지 그날 드디어 고지를 점령했습니다. 나중에 고지까지 올라온 대대장이 며칠 만에 휑하게 변한 내 몰골을 보더니만 첫마디가 중대장더러 밥 좀 갖다주라고 하더군요. 사실 워낙 적의 포격이 심해 식사마저 제대로 추진되지 않아 며칠 동안 거의 굶다시피하면서 전투를 치렀거든요』
박치옥씨의 증언.
사관후보생의 신분으로 경기도 문산 전투에 투입된 이후 격전의 현장을 누빈 최상호(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씨는 일선 소대장이 된 지 한 달을 겨우 채운 1951년 1월에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는데 거기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최상호씨의 증언
『병원에서 2사단 소속 소위를 만났는데 그에게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사단장이 全 사단 장병들을 모아놓고 특별 훈시를 하는데 그 자리에서 조금 움직였다고 해서 총살을 시켰다는 얘기를 듣고 아무리 전쟁 중이지만 정말 그래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사단장이야 땅에 떨어진 병사들의 군기를 세우려는 의도로 그렇게 했겠지만 즉결처분권을 지휘관의 너무 마음대로 행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윤주현씨의 증언.
『6촌형이 전쟁 때 입은 부상으로 상이군인이 되어 돌아와 그런 얘기를 해주자 지금은 돌아가신 큰형님께서 8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둘째 형님이 무슨 이유로 즉결처분을 당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피하기만 할 뿐 아무도 속시원하게 얘기를 해주려고 하지 않았답니다. 그후 세월이 흘러 419에 의해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 정권이 세워지자 약간의 희망을 가졌지만 516이 일어나면서 포기하다시피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당시 연대장이었던 그 사람은 육군참모총장까지 승승장구 진급하더군요』
윤태현 소령의 조카인 윤은한씨의 증언. 『그가 육참총장을 하고 있을 때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참모총장실로 찾아가 사유를 설명하고 면회를 요청하니까 부관이 나와서 돈이 필요하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저는 돈보다 작은 아버지가 억울하게 돌아갔는데 명예라도 회복시켜 드리고 싶다고 하니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요. 그때만 하더라도 그 사람들이 우리를 무서워했겠습니까. 마지막에 명예회복하는 데 제발 방해만 하지 말아달라. 그 말만 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윤덕한씨의 증언.
『아직 정확한 사망날짜조차 몰라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분이 죽었다고 증언한 7월17일을 돌아가신 날로 삼아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지 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정부에서는 아직도 전사통지서 한 장 없습니다. 죄를 짓고 사형당한 사형수의 유가족에게도 사망통지만은 해주는 법인데 어떤 이유 때문에 총살을 당했는지는 아직 자세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쨌든 나라를 지키려고 전쟁터에 나갔던 군인 아닙니까. 죽었다면 죽었다고 통보를 해주는 것이 국가의 의무 아닙니까』
자식도 남기기 않고 죽은 윤태현 소령의 제사라도 지내주기 위해 양아들로 들어간 윤씨는 작년 5월에 다니던 직장마저 그만두고 양아버지의 죽음을 밝히는 자료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는 정부 곳곳에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아직 부친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겠다는 대답은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윤흥정 장군의 증언.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하겠지만 만에 하나 다시 일어난다면 자동적으로 후방에 있는 동원사단의 예비군들은 전원 소집됩니다. 그런데 이들 연령의 대부분은 가족의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가장입니다. 집에 남아 있는 처자가 뭘 먹고 살지도 모르는 판국에 예비군들이 제대로 전투에 임할까요. 아마 기회가 있다면 가족을 먹여살리려고 전장이탈을 하는 사람들이 속출할 겁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동원되는 예비군들의 가족에 대한 생계 대책을 마련해 놓는 것도 극심한 혼란을 막을 한 가지 방법일 겁니다』
한 번도 양아버지 윤태현 소령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윤덕한씨는 양아버지와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던 전우들을 애타게 수소문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양아버지가 묻힌 곳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찾기 위해서였다. 625 전쟁 중 즉결처분에 의해 희생당한 장병들의 수는 아직 공식적으로 밝혀진 적이 없다. 노병들의 증언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아직도 몇몇은 즉결처분에 대해서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굳이 우리 군의 아픈 부분을 건드려서 얻을 것이 뭐가 있냐는 거였다.
출처: http://blog.daum.net/lost454/3806052
----------------------------------------------------- 저희 할아버지께서도 육사8기 특별반 출신이셨는데,, 동기들이 엄청 많이 죽었다고 하시더군요,, 대신 살아남으면 진급은 엄청나게 빨랏다구요 머 위건 아래건 다 죽어나가니.. 결국 저희 할아버지께서도 전쟁발발시 중위셧는데 1년만인 27살에 대령달으셧던... 51년 전투중 중상을 입으셔셔 그걸로 진급행진은 끝나버리셧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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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장고한 역사가 있었군요
우리 옛모교에 있기에 알아 봤슴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후방부대라도 전군에서 대간첩 작전을 제일 많이 한 실전 부대 네요
옛 육군 제1하사관 학교에 현재 주둔중인 육군 36사단의 역사에 관한
귀한 기록을 발췌하여 올려 주셔서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36사단은 육군제일하사관학교에 안동에서 올라와 그자리 그대로 주둔 부대라 모교 방문 총 5회 1박3회 당일 2회 방문때마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사단장님은 바뀌었지만 우리 노병 선배님이라고 깍듯이 영접 해주고 환영 해주는 정다운 부대 입니다 또 갈일이 있겠지요
장문입니다,
수고하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