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손님은 아무래도 몇 올 남지 않은 앞 머리카락들이 세찬 바람에 날려 흐트러지는 게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눈치다. 아까부터 정리하고 또 정리한다. 그러면 또 바람이 흐트러버리고... 보기에 안쓰럽다.
일이 이상하게 자꾸만 꼬인다. 준비는 완벽했는데...
우리에게는 너무나 귀한 손님이었다.
한국 청년 다섯이 모였다 해서 회사 이름을 단순 무식하게 한오 무역이라 짓고 맨땅에 헤딩한 지 한 반년 정도 지났을 무렵.
대전 전자통신연구소(ETRI)에서는 1989년경 한국 최초 인공위성 발사 계획 연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마침 그 연구에 참여한 적이 있는 동료 중에 한 명이 중요한 정보를 하나 얻어냈다.
위성에서 보내오는 정보를 받기 위한 수신장치에 들어갈 중요한 회로와 부품을 ETRI에서 찾고 있다는 정보였다. 워낙 중요한 장치다 보니 회로와 부품 가격 합해서 억 단위가 넘는 큰 프로젝트였다. 작은 규모로 출발한 우리 입장에서 보면 회사 성장의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될 수도 있는 크고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물론 ETRI에서는 부품 단위의 구매와 일괄구매 두 가지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었지만...
정보수집 결과 미국에 있는 퀄컴(지금은 셀폰에 들어가는 통신 반도체 독점 공급 업체)이 그 당시 그 분야에선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회사 규모와 인지도도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없으리만치 크고 높았다.
하지만 어차피 맨땅에 헤딩하는 우리. 겁날게 뭐 있으랴~
얻어낸 정보를 바탕으로 그 연구에 참여한 적이 있는 동료를 내세워 그 회사에 접근을 했고, 그 정보의 신뢰성을 인정한 그 회사에서도 다행히 관심을 보였다.
88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잔뜩 한국의 위상이 높아진 데다가 이제는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충분한 기술 습득이 된 나라라고 그쪽에서도 판단을 한 것이다.
그 회사의 부사장이 그 건과 관련해서 직접 ETRI 연구원들을 만나보러 한국에 나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 회사의 부사장이라면, 여직원과 직원 포함 총 일곱 명인 우리 회사 입장에서 보면 아주 대단히 귀한 손님인 것이다.
그 당시 우리 동료 다섯은 아무도 차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맨땅에 헤딩하기로 작심한 우리에게 승용차는 호사 내지는 사치 그 자체였다.
귀한 손님은 나온다 하고... 렌터카를 빌리기로 했다. 면허는 있었지만 운전 경력이 없으니 기사도 함께 빌렸다.
힐튼 호텔에서 그 귀한 손님을 모시고 렌터카를 탄 순간부터 일은 꼬이기 시작했다.
무성의한 렌터카 회사. 그렇게 신신당부했건만...
갑자기 VIP가 많이 왔다는 핑계로 구형 소나타를 보내왔다. 그 정도라면 참겠는데... 무더운 여름이었는데 그 차를 가져온 기사 왈, 어제 갑자기 에어컨이 고장 났다네. 미팅 시간은 정해져 있고 차를 바꿀 시간 여유가 없었다.
영어가 짧으니 간단간단하게 부사장에게 설명했다.
"우린 차가 없다."
"차를 빌렸는데 우리가 원하던 차가 나오지 않았다."
"근데 이 차는 에어컨이 없단다."
"정말 미안하다."
귀한 손님은 서양인 특유의 매너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이 말을 몇 번이나 했다.
No Problem~. No Problem~
대전으로 내려가는 고속도로. 결국 양사방 창문을 다 열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시속 100킬로, 바람은 사정없이 차 안으로 불어 들어왔다. 뜨겁고 습한 바람들이 세차게...
귀한 손님이 머리 모양을 매만질 때마다 옆에 앉은 나는 안절부절 할 수밖에 없었고, 그는 그런 내 얼굴을 보며 연신 노 프라블럼을 외쳤다. 여전히 머리를 매만지면서.ㅠㅠ
그런 와중에도 동료와 나는 그에게 ETRI에 가면 만날 사람에 대한 정보를 교환했고, 어떤 질문을 해올 것이란 것에 대한 정보도 전해 주었다. 태풍처럼 불어 들어오는 바람 속에서...
두 번째로 또 일이 꼬였다.
그 소나타가 본넷으로 연기를 내뿜더니 결국 천안 조금 못 미친 곳에서 덜컥 서버렸다.
"아무래도 고장 난 것 같습니다."
기사의 말에 앞이 막막해졌다. 가슴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그걸 풀어내고 있을 시간이 없다.
손님도 갑자기 일어난 사태에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이었고, 동료와 나는 어떻게 이 난관을 돌파할까... 골몰했지만 뾰족한 수단이 없었다. 고속도로 중간에서 퍼진 차. 어떻게 수습한단 말인가...?
구세주처럼 고속도로 순찰 봉고차량이 다가왔다. 급히 달려가 상황을 설명하니, 친절하게도 천안 톨게이트까지 태워줄 테니 톨게이트에서 대전 가는 고속버스를 타란다.
귀한 손님을 봉고차에 싣고 천안으로 향했다.
면목이 없다...
"I am sorry..."라고 할 때마다...
"It isn't your fault. No problem."
그가 오히려 나와 내 동료를 달랬다.
결국 천안 톨게이트에서 고속버스를 갈아타고 무사히 목적지에 시간 맞추어 도착했다.
미팅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ETRI 연구원들의 다양한 기술적인 질문에 부사장은 신뢰감 있게 설명을 하며 퀄컴이 그 분야 최고 기술의 회사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렌터카는 중간에 퍼져버렸고 우리는 기차를 이용하러 대전역으로 갔다.
새마을도 없고 우등도 남은 자리가 없었다. 특급을 이용할 수밖에...
좁은 자리에 세명이 함께 앉았다.
천장에 매달려 돌아가는 선풍기를 보며 우리는 또 열심히 미안해했고, 그는 여전히 노 프라블럼.
자기가 중국 출장 갔을 때를 이야기하며, 그때 중국에서 탄 기차에 비하면 아주 호화판 기차라고 오히려 우리를 달래기까지 했다.
황당했던 그날도 여느 다른 날처럼 시간이 되자 해는 서산으로 졌다.
며칠 후 자기 나라로 돌아간 그 부사장에게서 팩스가 왔다.
"이번 한국 출장은 아주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당신들은 아주 중요한 엔지니어들과의 신뢰감 있는 교분을 가지고 있었고, 꼭 그 일을 성취하겠다는 열의에 불타고 있었다. 나는 당신들이 보여준 열의에 감동했으며 이 프로젝트에 관한 한 당신들의 회사를 우리의 유일한 파트너로 인정한다."
환호성이 터졌다.
비록 그 프로젝트는 ETRI가 최종적으로 일괄구매방식을 정책적으로 결정하는 바람에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그날의 황당했던 일은 그때 함께했던 친구이자 동료였던 우리들이 서른한 살의 나이에 맨땅에 헤딩하며 만들었던 오래 잊지 못할 에피소드로 남았다.
그날 하루, 내가 남발할 수밖에 없었던 Sorry는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했던 Sorry를 다 합한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Sorry였었던 것 같다.
누리호 발사 성공에 이어 달 궤도 탐사선까지 날려 보낸 뉴스를 보던 날, 무궁화 1호 위성 개발과 관련된 추억을 떠올리며 돌아본, 귀한 손님을 가장 황당하게 접대했던 에피소드 하나.
첫댓글
회려한경력이 어마어마합니다 ^^
요즘은 어케 지내십니까 ?
요즘은 미국 중부의 남과 북을 오가는 트럭커로 신나게 살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읽으며 내한 공연을 왔다가
홀대 논란을 남기고 돌아간 엔니오 모리꼬네가 생각났습니다.
머리를 연신 매만지며 No problem. 하시던,
마음 그릇이 머리카락 갯수보다 넉넉한 귀한 손님이
선물한 파트너쉽에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트럭커로서 올리신 글도
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어서 참 좋았습니다.
참 난감한 날이었는데 지나고 돌아보니 그날도 귀한 추억으로 남아있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날씨도 더웠는데 정말 진땀 나던 순간이었네요.
초창기엔 우리가 외자를 구매할 때 턴 키 방식을 많이 채택했는데
거기에 걸렸던 모양이군요.
그래도 한국인으로 누리호가 순항하고 있는 걸 기뻐해야겠지요.
턴키로 구매 결정을 하는 바람에 우리가 그 오더를 따내진 못했지만, 그날의 경험 덕분에 자심감을 갖고 새로운 도전을 해볼 수 있었답니다.
줄줄 호기심 가득히
읽어가면서 엷은 미소 띄웁니다.
그 상황이 실감나게 저를 두근거리게 만들고
청소 하던 손을 놓고 충전기 뽑다가
그새가 궁굼하여 수필방 문을 열고 마음자리님
글을 따랐더니 긴장탓도 있고
성공적 이야기에 안도감도 있고
1시 10분경 점심시간 배도 고파서
점심 맛있게 먹을거 같습니다.
ㅎㅎ
육중한 덩치의 트럭을 운전하고
드넓은 도로를 달려서
기분 좋은,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댓글에서 기도드리겠다는 글을 쓰노라니
그 약속을 지키느라
기도 드리는 시간을 늘려서
약속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니
이 또한 감사롭습니다.
댓글로 보여지는 조윤정님의 여러 동작들이 떠올라 웃습니다. 점심은 맛있게 드셨는지요?^^
저에 대한 기도까지...감사합니다. 밤 시간 휴게소에 주차한 사진 하나 감사한 마음으로 보냅니다.
@마음자리 멋저부러!^♡^
이런 단어가 어울립니다.
글 읽는 내내 조마조마 했습니다.
용기와 신념으로 월급생활에서 탈바꿈하려 하는
젊은이들을 보아왔습니다.
물론 성공을 비는 마음이야 비길 데 없지만,
그 시절만 해도, 사업하기에는
한국사회가 미비 된 것이 많았습니다.
결집된 실력과 좋은 아이디어로
신용을 제 1로 삼은 젊은 청년 사업가도 많았지만,
랜트 카 회사가 넘 얄밉습니다.
미국서 오신 그 부사장님은 젠틀멘이십니다.^^
제 또래의 많은 청년들이 그당시 수출이나 수입쪽의 오파상을 만들거나 오파상에서 일하거나 했지요. 자원이 없으니 무역을 해야한다는 분위기도 있었고, 비록 후에 무너지긴 했지만 대우그룹이나 명성 제세 등등의 오파상에서 성공한 사례도 선배들이 보여주었으니... 현대와 삼성이 이룩한 신화까지 젊음을 이끌어주던 등불이나 가로등이 참 많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부사장님, 생각하면 늘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아고.,
그분은 덕분에 한국서민들의 삶을 경험하셨네요
네 ㅎㅎ. 아주 멋진 한국 여행으로 회상하곤 할 겁니다.^^
웬만한 글엔 별무감동인 저지만 마음자리님의 수필(회고담)은 흥미진진에 감동까지..멋진 글입니다.
소재인 에피소드가 흥미를 더하는 한편으로 글을 풀어내는 출중한 역량이 없고서야 이토록 좋은 글이 . . .
그렇습니다. 아무리 기술천국의 시대라지만 역시 사람이 아름답다는 걸 실감합니다.
우스개 한토막 전합니다.
작은 오파상 말단으로 막 취업한 내게 오너의 급한 오더 -
미국에서 오는 바이어 한분을 김포공항에서 회사까지 픽업해오란-가 떨어졌다.
황급히 영어회화책을 펼쳐 1장 만남편을 급열공 . .
바이어 이름이 적힌 핏켓을 들고 입국장 로비에 서서조차 열공,또 열공....
드뎌 약속된 비행기가 도착하고 내가 든 피켓을 살피며 가까이 나타난 미국 손님.
헉쓰 . . .놀랍게도 그는 큰 덩치의 흑인이었다.
하얀 치아를 들어낸채 만면의 미소를 띄고 내게 다가와 뭬라뭬라 하며 악수를 청한다.
그 숭간 . . .그의 우악스런 손아귀에 내손이 잡힌 채 튀어나온 나의 제일성 .
" 렛쓴 원~!!!"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단풍이 많이 든 미 중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그때 일이 떠올라 올려 놓았습니다.
@지오 그 긴박하고 긴장된 순간을 함께 하다가 렛쓴 원~!! 에서 웃습니다. 새벽잠이 깼는데 웃는 바람에 잠이 확 달이났습니다. ㅎㅎㅎ
개발도상국의 31살 청년들의 열기가 글을 읽는 지금도
후끈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성장했어요.
이야기꾼 마음자리님 길 위에서 삶 오늘도 화이팅!
안전운전하세요^^
맞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열심히 성장했어요.
지금은 중북부 위스콘신 주의 어느 남쪽 휴게소에서 새벽잠을 깼습니다.
감사합니다. 꼭 안전운전 하겠습니다.
언젠가 한 번 들은 얘기 같으다. 한국사람들도 아니고 외국인들인데다, 자칫 벤쳐회사의 명운이 걸렸던 상황에서 연이어 벌어진 황당한 사건들로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을 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갑니다. 하지만, 외국인들 중엔 오히려 그런 상황들을 상대입장에서 오히려 잘 이해하고 쿨하게
반응해주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을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당시의 긴박감을 잘 살린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자나깨나 운전조심~!!
워낙 마음 졸인 일이라 형에게도 언젠가 이야기했을 겁니다.
안전운전~!
실무자로서 정말로 난처하셨겠습니다. ㅎㅎ
지금으로 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당시에는 우리의 수준이 그것밖에는 안되던 시절이었지요.
프로젝트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 열의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짐작이 갑니다.
달궤도 탐사선까지 보낼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한 대한민국인데요, 문제는 정치입니다. 기가 찰 일이지요.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선배들이 앞에서 등불 켜준 덕분에 저희들도 겁없이 도전해볼 수 있었지요.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분야가 크게 성장했는데 정치만 나라의 격을 떨어뜨리고 뒷걸음질을 치니 염려를 멈출 수가 없네요.
당시의 아슬아슬한 심경이 잘 표현되어
실감나게 읽어 내려 갔습니다.
젊은 시절의 그 역동적인 삶이
그리워 질 때가 있을 것 같군요.
항상 건강하시고 운전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