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은 문화적 혹은 가족 생활방식의 귀결과도 같이 이미 어떤 종교적이며 영적인 지남력(spiritual orientation)을 가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영적 구도의 길(spiritual pathway)은 여러 다양한 가르침들과 원리들을 통해 자연스러운 관심을 일으키는 온전한 영적 도구(material)에 대한 교육이나 공부를 통해서 시작된다. 기도로써 의지는 보다 힘을 받게 되어 널리 퍼져 있는 의식의 수준들과 조화를 이루는 진실의 단계들로의 발견이 점차 가능해진다.
수행자는 기본적인 영적 개념을 선택할 수 있는데 그날의 주제 혹은 관상이나 명상 그리고 기도와 헌신적인 행위들을 이용하는 것과 같다. 대표적으로 라우렌시오(로렌스) 수사의 '하느님의 현존 연습'(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이나 *토마스 키팅 신부의 '향심기도'(Centering prayer)와 같은 것은 꽤 유익할 수 있다. 또한 영성적인 동료들(holy company)을 찾고 200 이하 수준의 사람들이나, 장소들 놀이들을 피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이는 영적이란 칭호를 달고 널리 알려져 있으나 측정치는 매우 낮은 활동들을 포함한다. 때문에 뉴에이지류(Cal 185)들이나 점괘 or 운세보기(Cal 185) 그리고 의식 수준을 올려준다고 주장하는 기교들은 피하는 것이 좋다. (추가 사항들은 진실 대 거짓 참조 要)
관상(contemplation)을 하는 동안, '목격함'(witnessing)과 '관찰함'(observing) 또는 '경험함'(experiencing)의 현상이 자율적(autonomous)이고 저절로 일어나며 본질적으로 비인격적임(impersonal)을 주목하는 것은 유용하다. 또한 주목할 것은 세속적으로 매력적임(desirability)의 속성들은 내재된 에고로부터 비롯된 투사라는 점이다. 행복은 소유물들(possessions)이나 경험들로부터 비롯 되기 보다는 (자신이 되어온 바로써)의식 수준의 귀결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불쾌한 사건들이나 상황들은 이들의 보이지 않는 카르마적 이로움을 확인하여 선용(善用)하는 것으로 전환 될 수 있다. 이는 그것들이 카르마적 빚의 취소를 나타낸다고 추정함으로서 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 결과, 그것이 아직 추정일 뿐이거나 설사 돌이킬 수 없는 것일 지라도, 자신은 언제나 희생자보다는 가해자로서 있어왔기에 자신을 용서하는 일은 좋은 일이 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인간의 삶은 개인 뿐만 아닌 전 인류의 의식 진화를 위해 선택적인 특전(optional benefit)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적 의도(spiritual intention)는 인내(patience), 탄원(suplication), 불굴의 노력(perserverance), 기도(prayer), 내맡김(surrender), 깊은 겸손(depth of humility)으로 힘을 받는다(empowered). 진실(Truth)과 실상(Reality)은 여러 장애들이 제거되었을 때 자연스럽게(effortlessly) 스스로 자신을 드러낼 뿐이다.
영적인 진화는 전 생애에 걸친 전념(lifetime commitment)이며 세상과 모든 경험들이 영적인 목적에 이바지 하는 삶의 방식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신의 종이 되고자 선택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소명(부르심)은 없다. 영적인 발달로써 각각의 진보(increment)는 동등하고도 비슷한 중요성을 가지는데, 이는 마치도 오직 하나의 벽돌을 빼냄으로 인해 벽 전체가 붕괴되는 것과 같으며,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가능해지게 된다.
조만간 기적적으로 보이는 일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기 시작할 수 있다. 여기서 현상들(pheomena)은 스스로 행한다거나 혹은 개별적 자아에 의한 것이 아니며, 어떤 마술적인 힘(power)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기적적인 사건들은 조건들이 타당할 때 발생하는 잠재성의 현실화(actualization of potentiality)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한 조건들 중 하나는 고도로 높은 의식수준의 에너지의 현존이다. 보다 더 진보된 의식수준으로부터 모든 현상들은 우주 스스로의 진화의 귀결과도 같이 실은 저절로 일어나 가시화(可視化) 되어지는 것이므로, 참가자/관찰자인 입장에서 삶은 완벽한 것일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드러남(revelation)인 것이다.
자아(self)가 참나(Self)에 포괄되어지며 용해되는 과정으로 인해 여러 다른 에피소드들이나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느낌 드는 시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의 대상이 되는 자아(self)의 거짓 지각일 뿐이므로 그런 현상을 내맡기는 것은 안전한 것이다. 이는 또한 육체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내맡길 수 있는 뜻밖의 시간이다. 몸(body)은 계속 걸어 다니거나 그러지 않을 뿐이다. (죽음에 관한) 실제적인 선택은 개별적인 자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 오직 참나(Self)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죄책감(guilt)은 자기애적 탐닉(narcissistic indulgence)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무런 진전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길고도 메마른 시기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속임수(deception)인데, '길고도 메마른 시기'(long, dry period)라는 것은 결단을 시험하는 것(test of resolve)처럼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기들은 영적 에고가 '진보'(progress)통해 얻으려 하는 것을 초월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 그러므로 낙담함(frustration) 자체는 진정으로 통제 불가한 것을 통제하려는 노력의 징후인 것이다.
에고와 인간의 육체적 삶은 일시적인 것이며, 영혼의 운명은 시간 밖에 있다는 것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은 유용하다. 그러므로 대(大)를 위해서 소(小)를 내맡기는 결정은 가치 있는 것이다. 친척들이나 친구들 혹은 사업 동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다 높은 소명에 응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에 대해 직관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Reality, Spirituality, and Modern Man : Practicum p348 - 352 中)
* 원문에는 Fr. John Keating으로 되어 있는데 원문의 표기가 잘못 된 것 같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인간의 삶은 개인 뿐만 아닌 전 인류의 의식 진화를 위해 선택적인 특전(optional benefit)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 "최상의 이득(optimal benefit)"으로
When fully comprehended, human life is seen to be of (optional→)optimal benefit for the evolution of consciousness of the individual as well as all humanity.
원문을 찾아보니 optional이 optimal로 수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마리아님 감사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사랑합니다.....()
마리아님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세상을 매력적으로 보는 걸 멈춰야겠네요ㅠㅡㅠ
용기를 주셔서 감사드려요~길고 메마른시기 공감되요~
마리아님 늘 감사드려요~
감사합니다.
영성의 진보에 도움되는 글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