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시절에 미군들이 비행장으로 사용했던 여의도의 섬 둘레에 대형 콘크리트 빔을 묻고 둑을 쌓은 후 TBS, MBC, KBS 방송국과 63빌딩 등이 들어서고 신 도시를 만들기위해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국토개발의 중요성과 중개업의 부가가치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현대 건설에서 2년 동안의 짧은 직장생활을 마치고 제 5 공화국 말기부터 중개업을 시작했습니다.
조선시대에 지방으로 내려가거나 올라오는 말에게 여물 먹이고 마졸도 쉬어 간다고 해서 말죽거리라고 이름지어진 동네에 숙명여고를 비롯한 명문학교들이 옮겨 와 강남 8학군이 형성되고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넓은 배추밭에는 각종 시설물과 아파트 숲이 들어서는 가운데 한건이라도 더 중개하기위해 여러 명의 판돌이들과 함께 아침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활동했습니다.
제 3 공화국부터 시작한 경제개발 계획에 따라 전국이 어지러웠던 춘추 전국시대 현장을 체험해
중개업은 이렇게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자신 만만한 돌팔이는 과천에 제 2 정부청사가 들어섬과 동시에 신도시를 만들면서 원주민에게 주는 아파트 입주권을 사기위해 투자 했다 보기 좋게 사기 맞았습니다.
그게 어떤 돈인데, 몇 년 동안 고생 고생하면서 모은 피땀 어린 돈이거든.. 땅을 치고 울면서 저를 깊은 구렁에 빠뜨린 사기꾼을 원망했습니다.
며칠 동안 술독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환청이 들리도록 울며 지내다 어느 순간
잘못은 나에게 있었다고..
원주민의 잘못된 행위를 원망하기 전에 편법으로 아파트를 소유하려던 저의 허황된 망상이 잘못이라고 말입니다. 1984년 3월에 경기도 수원으로 내려와 작은 빌딩 1층에 있는 점포하나를 임차해 중개 사무소를 열면서 스스로에게 몇 가지 다짐을 했습니다.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는 저같이 피눈물 나는 일이 없도록 해주자고 말입니다.
탈법과 편법을 바라는 고객들의 요구는 받아 드리지 않고 설득하겠다고 말입니다. 중개업은 이렇게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사무실 문 닫고 귀가하면 한 겨울에도 찬물로 샤워하며 하루 일과를 뒤돌아보고 반성했습니다.
초 심을 잃지 않고 중개업을 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편법과 탈법을 부추기는 유혹도 있었습니다. 받으면서 단골도 생기고 주위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중개하는 업소라고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자신이 자랑스럽고 부동산 중개업이라는 직업에 긍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짧지않은 세월동안 부동산 중개업에 종사하면서 나름대로 알만큼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중개업은 이렇게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공대를 나온 하나뿐인 아들에게 중개업이라는 같은 길을 가자고하자 저의 권유를 받아들인 자식은
근데 요.. 조금 더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싶어하는 자식을 LBA 법률중개사 22기 과정에 등록시켰는데 저의 눈과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고객께서 지금 아파트를 매도하면 이 금액 정도의 양도 소득세가 나오고, 도정법이 적용되는 이지역의 개발이 완료되면 이런 모습으로 변모될 예정입니다. . . 분들이 계시는데 저의 경우 성공의 비법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씀 드립니다.
최선을 다하면서 스스로의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도록 노력하며 가족들에게 자랑스러운 가장이 되고 싶었을 뿐입니다. 정보를 논리적으로 갖춘 진정한 전문가로 일하다가 명예롭게 은퇴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느 때 중개업을 그만두게 되더라도 저의 이름이 새겨진 상호를 내릴 때까지는 새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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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분 선배님이 저를 아끼는 마음으로 충고해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궁, 어떻게 하면 짧게 쓰면서
가끔씩 사랑방에 들락 거리는 동안 저라는 인간이 어떤 모습을 하고있는지 자성하면서 부끄러운 마음으로 저 자신에게 얘기하듯 주절거려 봅니다. ㅡㅡㅡㅡ [배경음악은 카페 음악과 겹치게되어 사랑방에 올렸습니다.]
중개업에 종사하면서 힘들 때마다 내가 처한 어려움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적이 있었는데 떠나야지, 떠나야지 생각만 하던 어느 날..
모든 일상에서 벗어나 일찍 길에 나서야 하는데 새벽에 딴짓 하느라 기차를 놓치고 할 수 없이 다음 열차 입석 표를 끊었어.
천안까진 빈자리가 있어 편히 갔는데 자리주인이 오길래 기차 맨 뒷 칸으로 갔어.
앞에 놓인 빈 맥주병에는 종이컵 뚜껑이 씌워져 있고
검게 그을린 얼굴이며 손발 생김새는 중년의 월급쟁이 아니면 실직자 모습인데 한 병 술에 검붉게 취한 얼굴은 주름 투성이었어.
마르고 거칠어진 손가락엔 두 돈 쯤 되는 금반지가 어색하게 반짝이고
삶의 고단한 냄새 물씬 풍겨 나는 할아버지 같은 아저씨는
할일없이 생겨나는 호기심에 슬며시 그 옆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는데
아, 놀래라..-_- 순간적으로 온몸이 굳어지면서 잘못하다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비켜서는 바람에 빈 맥주병이 넘어지고
그의 얼굴에 스치듯 지나가는 허전한 빈 웃음을 말이야.. 고달픈 세상살이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꿈을 꾸느라
스스로 노력한만큼 행복지수는 높아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외면하고 싶은 나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살아가고자 하는 내 삶의 자화상은 아니었을까?
서울 21기 이상수 선배님이 찍어 주셨습니다. 이상수 선배님..고맙습니다. ^ㅡ^ 제 옆에 호탕하게 웃고계신 분은 성남 27기 한완수 지도 교수님으로 수일내 일일 방장 감투쓸 것 같다는 예감^^
금년 5월 3일에 결혼한 아들 이향섭과 며느리 김 선해라 입니다. |
다음 일일 방장님은 전주 24기 김 현주 (010-2604-1174) 선배님이신데
현주 선배님을 섭외 한 과정은 이렇습니다.
서울과 수도권에서는 다른 지역의 다른 기수로 동성이 아닌 이성으로 지명하라는
지침을 보고 분당으로 어느 선배님을 만나기 위해
가는 도중에 차가 교차로에 설 때마다 부지런히 회원 수첩을 뒤졌습니다.
눈 여겨 볼만하면 신호 바뀌는 바람에 급하게 눈팅 작업을 하다
바닥에 수첩을 떨어뜨렸는데 펼쳐진 수첩을
다시 집어 드는 순간 묘령의 여인이 저의 시선을 잡아당기는 겁니다.
수원과 멀리 떨어진 전주이고 다른 기수이면서 꼴깍하고 침넘어 갈만큼 미모까지 받쳐주는 이성..
미루고 자시고 할 것없이 바로 작업 들어갑니다.
여보세요?
저는 수원 23기 아무개라고 하는데 혹시 김현주 선배님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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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끝^ㅡ^
첫댓글 항상 부지런하시고 열정에 넘치신 선배님을 뵙때마다 부족한 저 자신을 채찍질 해봅니다...선배님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