洛陽(낙양)이냐 北平(북평)이냐 南京(남경)이냐, 空中(공중)에 뜬 首都問題(수도문제)
朱耀翰(주요한)
上海衝突(상해충돌)이 일어나자
長江一帶(장강일대) 保*占領說(보점령설)이 쫙 퍼젓다. 이 소문을 들엇음인지 아닌지 國民政府(국민정부)는 南京(남경)을 떠나서 洛陽(낙양)으로 遷都(천도)를 하고 말앗다. 廣東(광동)에서 武漢(무한)으로 武漢에서 南京(남경)으로 南京에서 다시 洛陽으로 三遷四遷(삼천사천)하는 國民政府는 八字(팔자)인 즉슨 긔구한 셈이다.
1911년 武昌革命(무창혁명)이 의외에 功(공)을 奏(주)하야 300년 淸朝(청조)가 一旦(일단)에 몰락한 후 孫文一派(손문일파)는 臨時政府(임시정부)를 南京에 설립하엿섯다. 孫文(손문)은 죽을 때까지 南京首都說(남경수도설)을 고집하엿다. 北京(북경)은 위치가 너무 北으로 치우첫다는 것과 또는 소위 公使館區域(공사관구역)이란 것이 잇어 首都(수도)내에 外國警察(외국경찰)이 駐屯(주둔)한다는 國耻的 遺物(국치적유물)이 잇다하야 반대하고 언제든지 中原(중원)의 中央(중앙)에 잇고 宋明(송명) 800년의 舊都(구도)인 金陵(금릉)을 理想(이상)의 首都(수도)라고 하야 辛亥革命(신해혁명)에 여기 都邑(도읍)을 햇고 그의 著書(선서)중에 명백히 南京을 首都(수도)로 할 것을 지시하엿다. 後年(후년)에 蔣介石(장개석)이 武漢政府(무한정부)에서 탈퇴하야 新政府(신정부)를 南京(남경)에 樹立(수립)할 때에 孫文(손문1866. 11. 12~1925. 3. 12)의 遺敎(유교)라고 버린 所以(소이)가 여기 잇다.
袁世凱(원세개)의 출현으로 孫文의 世上(세상)이 1년 못되어 깨어지니 南京首都도 동시에 종막이 되고. 國都는 다시 北京으로
가게 된 것이엇다. 비록 이름은 共和國(공화국)이로되 支配階級(지배계급)은 그대로 舊軍閥(구군벌)이 엇으니 오래 살든 北京을 떠나기가 싫든 것이다. 未久(미구)에 討袁軍(토원군)이 雲南(운남)에서 생기고 南方派(남방파)가 廣東(광동)에 護法政府(호법정부)를 건립하니 이에 한참동안 中國은 兩政府(양정부)의 대립이 되고 廣東(광동)이 사실상의 一首都(일수도)가 되어 왓다. 中國의 革命運動(혁명운동)의 원천이 廣東이니만큼 그리고 廣東이 교통관계로 北方軍隊(북방군대)의 遠征(원정)의 손이 및지 못하는 이만큼 언제든지 民黨(민당)이 뜻을 못 얻을 때는 廣東으로 籠城(농성)을 하게 쯤 된 것이나.
그러나 물론 南方政府는 廣東을 영구히 首都로 할 意思(의사)은 없는 것이다. 그 까닭은 물론 그 位置(위치)가 南으로 치우친 것과 交通(교통)이 불편한 것 등이다. 그들은 언제든지 北伐(북벌)을 꿈꾸는 것이엇다. 孫文이 出師(출사) 兩次(양차)에 다 실패하고 北京에서 客死(객사)하엿다.
蔣介石이 北伐軍을 이끌고 江南(강남)을 석권할새 國民政府는 廣東을 떠나 桂林(계림)과 南昌(남창)을 거치어 먼저 武漢(무한)에 落着(낙착)이 되엇다. 武漢을 首都로 주장하는 이들은 南京이 上海(상해)에서 너무 가까와 外國軍艦(외국군함)의 砲擊(포격)받을 念慮(염려)가 많다고 하엿다. 蔣介石은 武漢派와 政見(정견)을 달리하기때문에 新政府를 조직하고 南京은 수도로 삼으니 그 이유의 하나로 先師(선사) 孫文의 遺志(유지)를 끄으러 온 것이엇다. 그러나 금일 洛陽遷都를 臨(임)하야는 당시 武漢派의 念慮가 事實化(사실화)한 셈쯤 되엇으니 어찌 感慨無量(감개무량)치 아니하랴.
南京이 正式(정식)으로 首都가 되고
未久에 武漢派가 沒落(몰락)하며 張作霖(장작림)이 頓死(돈사)하고 아들 學良(학량)이 易旗(역기)를 단행하니 南京이 全中國의 唯一無二(유일무이)한 진짜 수도노릇을 얼마동안 하게 되엇다. 그리하야 北京(북경)은 北平(북평)이 되고 直隷省(직예성)은 河北省(하남성)으로 奉天省(봉천성)은 遼寧省(요녕성)으로 그 명칭까지를 사양한 것이엇다. 이것이 1928년의 일이다.
南京은 宋明兩朝(송명양조)의 古都(고도)로 주위 30里의 大城廓(대성곽)이 잇고 人口 80萬의 大都(대도)다. 揚子江岸(양자강안)에는 下關港(하관항)이 잇어 聯絡(연락)되니 長江의 上下 船路상하연로)며 北으로는 對岸(대안)의 浦口(포구)를 기점으로 津浦鐵路(진포철로)가 놓엿고 下關(하관)은 上海에서 오는 滬寧鐵路(호녕철로)의 종점이 되어 잇다. 東城一帶(동성일대) 舊 明宮(구 명궁)터는 太平亂(태평천국난)에 廢墟(폐허)가 되어 버렷으나 紫金山(자금산)을 뒤에 두고 玄武(현무), 莫愁(막수)의 호수가 잇어 風光(풍광)도 明媚(명미)하다. 首都가 된 이래로 孫文陵(손문능)을 紫金山에 세우고 銳意(예의)市區改正(시구개정)에 노력하야 점차로 文明都市(문명도시)의 面目(면목)을 가추게 되어 간다. 各國 公使(각국공사)도 南京政府의 鞏固性(공고성)을 점차 信用(신용)하야 公使館(공사관)의 南遷說(남천설)까지도 잇엇든 것이다.
楊子江(양자강)에서 砲丸(포환)이 城內(성내)에 미친다 하거니와 만일 中國의 主權(주권)이 완전하다 하면 楊子江이 內河(내하)인지라 外國軍艦(외국군함)이 범접을 못할 것이언마는 弱國(약소국)의 悲哀(비애)로 下關(하관)에는 가끔 外國軍艦이 와서 碇舶(정박)을 하며 1927년 같이 구실이 잇으면 城內 砲擊(성내포격)을 불사하니 현실의 客觀的 情勢(객관적정세)하에서 南京이 首都로 不適說(부적합설)을 主唱(주창)하는 것이 무리도 아니다.
蔣介石의 南京政府가 比較的(비교적) 統一的(통일적)으로 서 잇는 동안에도 될뻔 宅(택)의 首都가 여러 곳 잇엇다. 閻錫山(염석산)을 盟主(맹주)로 한 北平의 反蔣政府(반장개석정부)도 잇엇고 이것이 太原(태원)으로 갓다가 소멸되엇다. 汪兆銘(왕조명)의 廣東獨立(광동독립)은 실패햇지마는 후에 孫科(손과) 胡漢民(호한민)의 廣東政府가 생겻다. 廣東에 한 번 長沙(장사)에 한 번 쏘베트政權(정권)의 수립이 잇엇고 현재에도 어느 산속에 쏘베트首都가 잇는 것이 사실이다. 滿洲事變(만주사변)으로 廣東政府(광동정부)가 解消(해소:해산)가 되엇지마는 그 대신 奉天(봉천)에 獨立王國(독립왕국)이 출현하려고 한다.
洛陽遷都는 千慮萬考(낙양천도는 천려만고)策(책)이라고 본다. 洛陽은 물론 歷史的 古都다. 洛陽城(낙양성) 10里許(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이라는 성주푸리로, 그리고
洛陽城東桃李花낙양성동도리화
飛來飛去落誰家비래비거낙수가
로 유명한 洛陽(낙양)이다. 지금도 桃花(도화:복숭아꽃)가 유명하다 한다. 그러나 歷史的 古都(역사적고도), 周朝(주조)에서 唐(당)에 이르기까지 近 千年(근천년)의 舊都(구도), 黃河文明(황하문명)의 代表的 舊都(대표적구도)라 하야 意義(의의)를 찾자는 것이 아니다. 洛陽은 險山峻嶺(험산준령)이 가로막혀 難攻不落(난공불락)의 要塞地(요세지)라 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겟다는 勇士(용사) 100명만 잇으면 10萬 大軍이라도 어찔 수가 없다는 洛陽이다. 安錄山(안록산)의 亂(난)에 洛陽이 不戰而落(부전이락)햇지마는 이는 당시에 軍紀(군기)가 얼마나 頹廢(퇴폐)햇섯다는 것을 證(증)할 뿐이라 한다.
더구나 금일의 洛陽은 어느 軍艦(군함)에서나 砲丸(포환)이 가 닷지 못하는 곳이다. 그러면서도 조곰 나오면 鄭州(정주)가 잇으니 平漢線(평한선)과 隴海線(롱해선)의 교차점으로 동시에 北平(북평), 武漢(무한), 徐州(서주)의 三方(삼방)을 제어할 수 잇다. 이 모든 것이 洛陽의 장점이다.
首都를 洛陽에 두니 이미 여기는 蔣의 直系 10萬大軍이 雄據(웅거)하고 잇다. 그리고 城은 전기철조망으로 에워싸고 地下陣地(지하진지)를 준비햇으며 兵工廠(병공창)을 옴겨 두엇다.
洛陽에 政府가 잇고 鄭州에는 辦事處(변사처), 南京에는 各部(각부)가 그냥 잇고 上海에는 出張所(출장소)를 두엇다. 그리고 軍事會議(군사회의)는 徐州서 한다. 이야말로 移動本部式(이동본부식)이다.
轉變多端(전변다단)한 中國의 首都가 革命(혁명)이후로 대략 如左(여좌)하다
洛陽은 물론 임시다. 첫재로 주말에 上海로 遊樂을 갈수가 없는 것이 결점이다. 둘재로 財閥의 後援받을 地盤이 못된다.
汪兆銘君은 南京이 首都로 不適한 고로 北平으로 갈듯하다고 한다. 汪君은 廣東人이요 蔣은 浙江人이다. 둘다 南方人이다. 現下 國民黨(국민당)의 세력도 浙江人(절강인)이 아니면 廣東人(광동인)이 가젓다. 中國은 目下(목하) 南方人(남방인)의 全盛期(전성기)다. 南(남)에서 일어나서 北平(북평)에 都邑(도읍)한다는 것은 歷史上(역사상)으로 어려운 일이다. 周(주)나 遼唐(요 당)시에는 물론 長江(장강)이남에는 文明(문명)이 없엇다. 宋(송)의 南遷(남천)이후 燕京(연경)을 占據(점거)하는 者(자)는 蒙古人(몽고인)이 아니면 滿洲族(만주족)이엇다. 明(명)이 南(남)에서 일어낫으매 金陵(금릉)에 都(도)하엿섯다. 이제 南方人이 民國(민국)을 세우매 그 形勢(형세)가 自然 南方(자연남방)에 都邑(도읍)할 것을 요구한다. 과연 그들의 北進(북진)이 가능할까. 매우 흥미잇는 문제다
受難(수난)의 渦中(과중)에 잇는 在滿, 在中國同胞(재만 재중동포)
韓靑山
만주에 잇는 우리 동포가 50萬 이상 100萬은 되겟지오. 200萬이라고 보는 이도 잇습니다. 그 대부분은 압록강 건너 서간도와 두만강 건너 북간도에 살고 滿鐵沿線(만철연선)과 吉林各縣(길림각현)에도 많이 삷니다. 그리고는 흑룡강, 관동주, 몽고까지 아마 흐터저 사는 사람이 어디라고 없는 곳이 없을 것입니다.
중국 본토에는 아마 상해에 약 2,000명이 가장 많겟지오. 虹口方面(홍구방면)에 많이 살고 佛租界(불조계)에 일시는 800명까지 되엇섯으나 지금은 적을 듯, 그밖에는 靑島(청도), 天津(천진), 北平(북평), 南京(남경), 廣東(광동), 기타 各地(각지)에 조곰식 다 살지오.
그들의 직업이 무엇이냐고요.
(一) 만주 오지에 사는 사람은 대개가 농민이지오. 그 중에는 오래전에 가서 지주가 되고 풍속까지 중국화해서 중국민이 다 된 사람도 잇고 아직도 소작인으로 고생하는 이 또는 농업노동자로 잇는 이가 다수입니다.
(二) 만철연선 각 도시에 가령 안동현, 봉천, 장춘, 등지에 사는 사람중에는 아마 장사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겟지오. 상해, 청도, 천진등지에도 장사나 기타 직업을 가진 이들이 좀식잇는 모양.
(三) 그 사람중에는 물론 망명객, 운동자, 무장단체들이 잇습니다. 만주에는 무장단체가 많앗지오. 민족파, 공산파, 무정부파로 나누어 잇엇는데 이번에 전부 토벌된 모양입니다. 상해의, 가정부는 하도 유명하고 그외에 공산당의 각 그룹들이 상해 북평등지에 잇겟지오.
현하 어지러운 풍파에 그들의 안부가 어떠냐고요. 묻지 않어도 다 잘 알것 아닙니까.
만주의 농민들은 얘매하게 희생이 되어 죽고 빼앗기고 남은 사람은 피난해 와서 가진 고생 다하고 이제 봄에는 농사지을 곳이 문젭니다 그려.
장사하든 사람들이야 대개 평안 무사하지오.
란리통에 리본(이익본) 사람도 많겟지오.
셋재그룹에 잇는 친고들이야말로 수난시기겟습니다. 북간도에서는 공산당 소탕이 잇고 서간도에서는 국민부의 二三四中隊 전멸의 소식이 들립니다. 북평, 상해등 비교적 안전지대에 잇는 망명객들이 어떠케나 지나는지 소식이 묘연합니다. 물론 상해서도 虹口方面에 잇든 이들은 中國軍의 포탄을 피해서 避難(피난)햿겟지오. 佛租界(프랑스조계)방면은 아직까지는 안전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關東軍(관동군)과 朝鮮軍 부속으로 잇는 朝鮮軍人 양반들은 實戰(실전)에는 별로 참가 아니한 모양이니 안전하겟고 南京軍官學校(남경군관학교)에 朝鮮출신이 수명 잇다고 들엇는데 그들의 안부는 못 들엇습니다.
全中國의 學生(학생)이 休學狀態(휴학상태)니 모처럼 中國留學(유학)갓든 학생들도 공부는 못하고 어수선해 할 것이 상상됩니다
柳光烈(류광열)
間島(간도)의 槪觀(개관)
間島라 하면 최근에는 共産黨(공산당)을 聯想(련상)하고 『테로』 運動(운동)을 聯想(련상)하게 되지만 그 외에 間島 一帶(일대)는 歷史的(역사적)으로 朝鮮人과 不可分(불가분)의 관계가 잇다. 그러면 間島는 어떠한 地帶(지대)인가. 白頭山 東北便(백두산 동북편)의 廣漠(광막)한 地帶(지대)=延吉(연길), 和龍(화룡), 汪淸(왕청)의 3縣(현)을 總稱(총칭)하야 間島(간도)라 한다. 間島의 名義(명의)에 대하야는 諸說(제설)이 區區(구구)하야 이것이 朝鮮人이 古來(고래)부터 불러오든 固有(고유)한 朝鮮語(조선어)인지 또는 그 一帶(일대)를 島(도)로 看做(간고)하고 間島라고 부름인지 또는 起墾(기간:개간)의 『墾간』 字(자)를 取(취)함인지 알 수 없으나 何如間(여하간) 南北間(남북간) 100여里(리) 東西(동서) 250里(리)의 地帶(지대)에는 中國人이 僅僅(근근) 10萬(만) 內外(내외)가 삶에 反(반)하야 朝鮮人은 50萬이 居住(거주)하고 間島의 中央都市(중앙도시)라 할 만한 龍井村(용정촌)에는 朝鮮人口(조선인구)가 數萬(수만)이 살아 宛然(완연)히 朝鮮人 중심의 都市(도시)를 形成(형성)하엿다.
歷史(역사)의 一瞥(일별:대충훑어봄)
古昔(고석) 高句麗時代(고구리시대)에는 滿洲 全土(만주전토)가 朝鮮人의 所有(소유)이엇으며 그 후 高句麗가 新羅(신라)와 唐(당)의 聯合軍(연합군)에게 倂合(병합)된 후에도 高句麗의 遺臣(유신)이 滿洲(만주)에 가서 渤海國(발해국)을 創建(창건)하엿고 渤海(발해)가 建國(건국)된지 226年만에 망하여 半島(반도)는 高麗王朝(고리왕조)로 統一(통일)된 후에도 間島一帶(간도일대)에 跳梁(도량:함부로날뜀)하는 女眞(녀진)을 征服(정복)하기 위하야 高麗 睿宗(예종) 2年에 尹瓘(윤관)이 16萬 大兵(대병)을 거느리고 가서 豆滿江 以北(두만강이북) 700餘里(여리)를 開拓(개척)하는 동시에 先春嶺선춘령(今금 北滿북만 安縣안현) 上(상)에 石碑(석비)를 세우고 『高麗之境고리지경』이라고 색이엇는데 古記(고기)를 보면 『碑之四面有書 皆胡人剝去비지사면유서 개호인각거』라 한 것을 보아 朝鮮人에게 征服(정복)된 胡人(호인)의 心事(심사)를 엿볼 수 잇엇다.
李太祖(리태조)가 豆滿江 沿岸(두만강 연안)에 勃興(발흥)하니만큼 이 방면에 用心(용심)하야 太祖 卽位(태조즉위) 후에 佟豆蘭(동두란)을 식혀 女眞(녀진)을 鎭撫(진무)하니 延褒(연부) 1,000餘里가 모다 그 版籍(판적)에 들어 갓엇다. 그 후에도 女眞이 旺盛(왕성)하므로 世宗 時(세종시)에는 7鎭(진)을 設(설)하야 統治(통치)하엿섯고 世祖 (세조)때에는 申叔舟(신숙주)가 討伐(토벌)한 일이 잇엇고 成宗中宗 (성종중종)때에도 女眞을 征伐(정벌)한 일이 잇고 宣祖(선조) 때에는 穩城府使(온성부사) 申砬(신립)이 擊退受降(격퇴수항)하엿다.
이러케 李朝(리조)된 후에도 間島에 잇는 女眞이 朝鮮에 臣事(신사)하기도 하고 謀叛被斬(모반피참)되기도 하다가 宣朝(선조) 때에 女眞 중 『노라씨』 一族(일족)이 旺盛(왕성)하야 諸部落(제부락)을 倂合(병합)하고 滿洲國(만주국)을 建設(건설)한 후 다시 淸國(청국)이 되어 征服하고 朝鮮 仁祖(인조)의 降(항)을 받앗엇다. 이러케 中國과 朝鮮을 倂合(병합)하는 동시에 間島를 朝鮮의 地界(지계)에선 白頭山(백두산)을 淸朝發祥(청조발상)의 山(산)이라 하야 自國(자국)의 境界 內(경계내)로 그 山을 넣고자 肅宗 (숙종)38年(西紀 1712) 5月에 穆枉登(목왕등)을 시기어 白頭山上(백두산상)에 自意(자의)대로 定界碑(정계비)를 세우고 『西爲鴨綠서위압록, 東爲土門故동위토문고, 於分水嶺上어분수령상, 勒不爲記늑부위기』라고 하엿는데 이 土門江(토문강)의 下流(하류)가 間島一帶(간도일대)를 句括(구괄:묶어서)한 것인지 아닌지를 詳審(상심:자세히살핌)히 아니한 것이 그 후 오랫동안 韓淸國交問題(한청국교문제)가 되엇다. 土門江(토문강)의 下流(하류)를 쫓아가면 間島一帶(간도일대)가 朝鮮의 版圖(판도)로 들어오기 때문이니 더욱 距今(거금) 60餘年前 己巳(기사) 庚午年間(경오년간)에 朝鮮 咸北(함북)에 大凶(대흉)이 들어서 間島에 移住(이주)한 者(자)가 數十萬(수십만)에 達(달)하니 淸國(청국)에서는 速(속)히 朝鮮移民(조선이민)을 刷還(쇄환)하라고 朝鮮政府(조선정부)에 요구하엿으나 多數移民(다수이민)은 이를 不肯(불긍)하고 國境問題(국경문제)는 더욱 複雜(복잡)하게 되어 朝鮮에서는 淸國과 數次 談判(수차담판)이 잇엇으나 각각 自領(자국령)을 固執(고집)하고 讓步(양보)치 않엇다
間島란 이러한 곳, 間島問題 特輯(간도문제툭집)
農村居士(농촌거사)
우리가 보통 間島라고 하는 것은 吉林省 東南(길림성 동남), 和龍(화룡), 延吉(연길), 汪淸(왕청)과 및 琿春(혼춘)의 4縣(현)을 이름이다.
그런데 明治(명치) 42年(1909년) 日中 兩國間(일중 양국간)에 間島協約(간도협약)이 잇엇는데 이 協約(협약)에 琿春縣(혼춘현)은 間島에 넣지 않엇다. 그러나 通稱(통칭) 間島라 하면 琿春(혼춘)까지 包含(포함)하엿으므로 이에서는 琿春까지 間島로 잡고 이아기 하려 한다.
현재 보통 間島朝鮮人을 40萬이라고 한다.
間島人口간도인구 (昭和소화 4年<1929년> 間島 總領事舘 調査총영사관조사)
昭和 4年 調査(조사)에 의한 統計(통계)를 보면 間島의 朝鮮人은 38萬1,000餘名, 日本人은 2,000餘名, 中國人은 11萬6,000餘名이다. 이로 보아 中國人보다도 3倍 以上(배이상)의 朝鮮人이 居住(거주)하고 잇으며 間島人口의 7,8割(할)이 朝鮮人이라는 것을 알 수 잇다.
누구나 間島에 발을 들어 놓아 본 사람은 알 일이겟지마는 統計와 같이 坊坊谷谷(방방곡곡)에 同胞(동포)의 居住(거주)하는 것을 볼 수가 잇다. 또한 4縣 가운데도 延吉縣(연길현)이 人口(인구)의 密度(밀도)로 보아 第 1位(위)요 다음으로 和龍, 琿春, 汪淸이다. 間島의 首府(수부)라고 할 만한 龍井村(용정촌)도 延吉縣에 잇다.
滿洲 全体(만주전체)의 在留(재류) 朝鮮人은 80萬 乃至(내지) 100萬을 算(산)하는데 間島의 朝鮮人은 이에 比(비)하면 그 4割(할) 乃至 5割에 當(당)하는 우리와 甚(심)히 密接(밀접)한 관계를 가진 땅이다.
우리가 大槪 間島라 하면 그러케 險(험)한 땅이요 馬賊(마적)이 晝夜(주야)로 橫行(횡행)하는 곳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같이 그러케 심하지 않다는 것이 正當(정당)할 것이다. 물론 奧地(오지)에 들어가서 생활하는 朝鮮人의 生命(생명) 財産(재산)이 안전한 처지에 잇다는 말은 아니다. 間島協約(간도협약) 以後(이후) 間島朝鮮人은 營業居住(영업거주), 土地家屋(토지가옥)의 所有(소유)에 잇어서 中國人 同樣(동양:같은모양)의 取扱(취급)을 받고 잇다.
間島協約(간도협약)
間島를 중심으로 한 日中 外交問題(외교문제)는 間島協約으로써 大槪를 알 수 잇다. 明治 42年(1909년) 9月 4日 日淸(일청) 兩國 全權(양국전권)이 北京(북경)에 會合(회합)하야 安奉線(안봉선) 改築交換條件(개축교환조건)으로 間島協約을 締結(체결)하엿다. 이제 그 協約을 보면 다음 같다.
間島協約 全文(전문)
日本政府及 淸國政府는 善隣(선린)의 交誼(교의)에 鑑(감:본보기)하야 圖們江(도문강)이 淸韓 兩國(청한양국)에 國境(국경)인 事(사)를 確認(확인)하고 且妥協(차타협)의 精神(정신)으로써 一切(일체)의 辨法(변법)을 商定(상정)하야 淸韓 兩國(청한양국)에 邊民(변민)으로 하여금 永遠(영원)히 治安(치안)에 慶福(경복)을 亨受(향수)케 하기 위하야 玆(자)에 左(좌)의 條款(조관)을 締結(체결)함.
第1條 日淸 兩國政府(양국정부)는 圖們江(도문강)을 淸韓 兩國(청한양국)에 國境(국경)으로 하고 江源地方(강원지방)은 定界碑(정계비)를 起點(기점)으로 하야 石乙水(석을수)로써 兩國境界(양국경계)를 定(정)할 事(일)를 聲明(성명)함.
第2條 淸國政府는 本協約 調印(본계약조인) 후에 可及的 速(가급적속)히 左記 各地(좌기각지)를 外國人(외국인)의 居住(거주)及 貿易(무역)을 위하야 開放(개방)할 지며 日本政府(일본정부)는 此(차) 等地(등지)에 領事舘(영사관) 又는 領事分舘(영사분관)을 配置(배치)함을 得(득)하며 期日(기일)은 別(별)로히 此(차)를 定(정)함.
龍井村(용정촌), 局子街(국자가), 頭道溝(두도구), 百草溝(백초구)
第3條 淸國政府는 從來와 如히 圖們江 以北의 墾地에 韓民의 居住를 承認(승인)하고 其地域의 境界는 別圖로써 此를 示함.
第4條 圖們江 以北 雜居地區域 內 墾地에 居住하는 韓民은 淸國法權에 服從할 지며 淸國 地方官의 管轄裁判에 歸함.
淸國官憲은 右 韓民을 淸國民 同樣으로 待遇하고 納稅 기타 一切 行政上의 處分도 淸國人과 同樣으로 할 事.
右 韓民에 관계가 有한 民事及 刑事에 一切 訴訟事件은 淸國官憲이 淸國法律에 按照하야 公平히 辨判할지며 日本國 領事舘 又는 其委任을 受한 官吏는 自由로 法廷에 立會함을 得함.
但 人命에 관한 重案에 就하야는 爲先 日本 領事舘에 知照하기로 하되 若 日本國 領事舘에서 法律에 按照치 않고 判斷한다는 念慮(염려)가 有할 時는 公正한 裁判(재판)을 期(기)키 위하야 따로히 官吏(관리)를 派遣하야 覆査할 事를 淸國에 請求함을 得함.
第5條 圖們江 以北 雜居地區域內의 在한 韓民 所有地의 土地 及 家屋은 淸國政府로부터 淸國人民의 財産과 同樣으로 완전히 保護하고 又 豆滿江 沿岸에는 場所를 擇하야 渡船場을 設하고 雙方人民의 往來는 自由로 함. 但 兵器를 携帶한 者에 限하여는 公文 又는 照會가 有하기 前에는 越境을 不得함.
雜居地區域 內에서 産出되는 米穀은 韓民에 販運을 許하고 非常한 凶年에 限하여는 禁止함을 得함. 柴草는 從前과 如히 照辨할 事.
第6條 淸國政府는 將來 吉長鐵道를 延吉 南境까지 延長하야 韓國 會寧에서 韓國鐵道와 連絡하되 其 一切에 辨法은 吉長鐵道와 一律로 하고 開辨時期는 淸國政府에서 情形을 酌量한 후 日本政府와 相議하여 此를 定함.
第7條 本協約은 調印 후 直히 效力을 發生케 하기 위하여 統監府臨時派出所 文武官員은 可及的 速히 撤退를 開始하야 2個月로써 完了(완료)할지며 日本政府(일본정부)는 2個月(개월) 以內(이내)에 第2條(조) 所開(소개)의 通商地(통상지)의 領事舘(영사관)을 開設(개설)할 事(사).
右를 證據로 하야 下名(하명)은 각 本國 政府로부터 상당한 委任(위임)을 受(수)하고 日本文(일본문) 及 漢文(한문)으로 作成(작성)한 本協約(본계약) 2通(통)에 記名 調印(기명 조인)함.
明治명치 42年 9月 4日 大日本特命公使대일본특명공사 伊集院彦吉 印
宣統 元年선통원년 7月 20日 大淸國欽命外務部尙書會辨大臣대청국흠명외무부상서회변대신 梁敦彦량돈언 印인
間島의 農耕地(농경지)
間島의 總農耕地 面積(총농경지면적)은 200萬町步(만정보)나 되는데 朝鮮人의 所有(소유)는 92,000餘町步요 中國人은 99,000餘町步이다. 이로 보아 朝鮮人 農民(농민)의 所有耕地(소유경지)는 약 그 半分(반분)에 가까웁다. 특히 中國農民은 水田耕作(수전경작)할 줄 모름에 反(반)하야 朝鮮人이 이를 耕作(경작)하는 점으로 보아 間島의 農業(농업)은 朝鮮人의 손에서 左右(좌우)됨을 알 수 잇다. 이는 오로지 40萬(만)의 朝鮮人이 40年(년)동안 피땀을 흘리며 開拓(개척)한 一片(일편)의 報應(보응)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間島는 地理的 (지리적)관계로 보아 大海(대해)와 접한 곳이 없느니만치 農産物 以外(농산물이외)에 水産(수산)이라든지 기타의 産業(산업)은 발달되지 못하엿다. 그러므로 間島의 産業을 論(논)함에 잇어서 農業(농업) 그것뿐이 그 全体(전체)라고 해도 큰 矛盾(모순)이 없다.
이제 間島 地方別 農耕地面積(지방별농작물경지면적)을 보면
地方別 農作物 耕地面積지방별농작물경지면적(1927년 조사 : 단위는 千町步천정보 四捨五入사사오입)
間島(간도) 重要農産物(중요농산물) 收穫高수확고(단위 千石천석)
粟(밤) 974 / 馬鈴薯(감자) 2천 8百萬貫(백만관)
大豆(콩) 765 / 大麥(보리) 134
玉蜀黍(옥수수) 216 / 黍(기장) 72
高粱(고량:수수의일종) 156 / 菜豆(강낭콩) 30
稻(벼) 135 / 小豆 (팥)28
小麥(밀) 137
人口(인구)의 密度(밀도)와 마찬가지로 延吉(연길)이 首位(수위)요 다음은 和龍(화룡), 汪淸(왕청), 琿春(혼춘)의 順序(순서)이다.
그리고 그 農産物(농산물)은 大槪 어떠한 것인가. 間島(간도)의 名産(명산) 粟(률:밤)이 第(제)1位(위)이요 大豆(대두), 小麥(소맥), 옥수수, 감자 등 統計(통계)에서 보는 바와 같다.
間島朝鮮人(간도조선인)의 食糧問題(식량문제)를 左右(좌우)하는 것은 첫재로 粟(밤)이며 稻(도:쌀), 大豆(대두:콩), 玉蜀黍(옥촉서:옥수수), 馬鈴薯(마령서:감자)일 것이나 大槪(대개) 大豆(콩) 粟(밤) 등은 貿易(무역)의 對象(대상)이 된다. 그러나 稻(벼), 玉蜀黍(옥수수), 馬鈴薯(감자)는 主要食糧(주요식량)이다. 大槪(대개)는 白米(백미)에 粟(률)을 섞어 먹으며 村(촌)에서는 粟(밤)과 감자가 主食物(주식물)이다. 中國人이 옥수수를 많이 먹는데 옥수수를 밑가루같이 가루를 내어 떡을 하여 먹는다. 이것은 매우 맛나고 좋은 食物(식물)로 朝鮮에서도 이같은 것을 勸(권)하고 싶다.
食料 (식료)이아기에서 뺄 수 없는 것은 소곰이다. 이것은 中國소곰(岩鹽암염)을 꼭 먹어야 한다. 이것은 高價(고가)의 것이요 質(질)이 不良(불량)하다. 그러나 國庫收入(국고수입)을 위하야 强制(강제)로 1人分(인분) 1年分(년분) 12斤(근)식 먹지 않으면 罰金刑(벌금형)에 處(처)한다.
우에서 감자는 主食物(주식물) 중에 하나이라고 하엿다. 間島村村(간도촌촌)을 다녀보면 第一 色(제일색)다른 것이 감자다. 감자는 밥에 넣어 먹는 수도 잇고 또는 떡도 국수도 가지각색 식물을 만든 감자떡과 국수를 먹지 못하고 間島(간도) 구경을 한 사람이 잇다면 헛구경하고 온 사람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만큼 間島(간도)의 名物(명물)이다.
마지막으로 間島 農家(간도농가)의 階級別(계급별)을 보면 다음 같다.
農戶 階級別농호 계급별(1927년말 조사)
朝鮮人 地主(조선인지주)는 4,100餘戶, 自作은 18,900餘戶, 自作兼 小作은 13,000餘戶, 小作이 19,000餘戶이다.
中國人(중국인)은 地主(지주) 4,200餘戶(여호), 自作(자작) 3,100餘戶, 自作兼 小作(자작겸소작) 800餘戶 小作(소작) 1,200餘戶이다.
이로써 보면 民族別(민족별)로는 中國地主(중국지주)가 많고 小作(소작)이 적다. 그리고 그 農耕法(농경법) 大規模(대규모)의 粗放的 經營(조방적경영:거칠고면밀하지않은경영)에 의한 것으로 大槪(대개)는 廣大(광대)한 面積(면적)의 土地(토지)를 所有(소유)하고 잇다.
朝鮮人(조선인)도 統計(통계)에서 보는 바와 같이 自作(자작)과 自作兼 小作(자작겸소작)이 많은 것을 보아 朝鮮 內(조선내)에 잇는 農民(농민)보다는 좀 넓은 土地(토지)를 가지고 좀 나은 생활을 한다고 할 수 밖에 없다. 地主階級(지주계급)이라고 할 만한 것은 심히 적고 그 所有土地(소유토지)는 그러케 엄청난 것은 比較的(비교적) 적다. 그리고 그 小作(소작)의 大槪(대개)는 中國人(중국인)의 「지팡」 사리로 貧農(빈농)들이다. 이 農民階級(농민계급)은 朝鮮(조선)의 貧農(빈농)보다도 한 가지 더한 것은 中國人 地主(중국인지주)의 橫暴(횡포)에 시달리는 것이다. 심한 例(예)로는 빗값에 딸을 빼앗는 등의 일이다.
要(요)컨대 新開拓地(신개척지)이요 그리고 廣大(광대)한 地域(지역)이니만큼 아직 階級別的(계급별적) 差異(차이)는 激甚(격심)치 않으나 역시 朝鮮에서와 같은 過程(과정)을 밟는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석을수(두만강지류) 의문?강원도가국경과붙어있는가??
첫 눈 오는 밤 동광 제34호1932년 06월 02일 학생시(詩)
鏡城公農 李命錫(경성공농 리명석)
고요하게 첫 눈 나리는 밤
해마다 오는 눈이련만
옛날에 오던 눈이 또 다시 오건만
아득하게 먼 하눌의 캄캄한 속에서
소리없이 눈 뿌리는 이 밤
옛날에 이별 해간 그 동무도
눈 오는 이 밤에 무엇을 생각하고 잇겟지
아-옛날의 그 동무가 생각켜라
椰子(야자)나무 그늘에서 뛰놀며
기쁨의 노래소리 들리는
겨울 모르는 나라 사철 봄의 나라
그리고 남쪽 나라 따뜻한 내 고향에는
지금 한창 冬栢(동백)꽃이 피엿겟지
고요히 첫 눈 나리는 이 밤
아-내 고향
그리고 겨울없는 나라가 그다지도 그리워라.
椰子(야자)열매
花園中學 趙黙 (화원중학 조묵)
고요한 이국의 달밤
인적이 없는 바다 가에는
남쪽 나라 섬에서 흘러 온 야자 열매가
외로이 여을에 흔들리고 잇어라.
네가 자라난 섬에도
이 밤 달이 皎皎(교교)히 떠 잇고
네 달렷든 가지의 그림자
바다 물결 우에 춤추리라.
출넝이는 야자 열매의 가슴 같이
내 맘도 달빛을 타고
바다 우으로 보람없이 닫네.
바다가에 서서
돌아갈 길 헤아리니
가슴 막막만 하여라.
1932.7.
禮成江(예성강)을 건늘 때
徐光霽(서광제)
나는 언제든지 가을을 좋아한다. 調落(조락)과 懷古(회고)와 戀慕(연모)와 哀愁(애수)의 가을...
이루미네슌과 네온싸인과 쨔쓰(째즈)와 粉女(분녀)가 뛰노는 도회를 떠나 귀뚜람이와 개고리를 동모 삼아 흘러나리는 내ㅅ물을 키타의 소리로 한 겹의 연기도 가리워 잇지 않은 프른 하늘의 맑은 공기를 힘껏 호흡하며 네 활개를 펼 때...
아! 탁하고 더러운 都會菌(도회균)은 모다 죽고 만다. 그리고 새로운 생의 서막을 열게 된다.
서울서 한 시간 남짓 북으로 기차를 타고 土城驛(토성역)에서 나려 가지고 10여 리쯤 걸어 가면 禮成江(예성강)이 눈 아래 보인다.
물껼이 세고 탁하기로 유명한 강이다. 강 넓이는 얼마 아니되나 원악(워낙) 물껼이 세기 때문에 그냥 나룻배가 곳장 건너가려며는 아래로만 떠나려 가므로 힘이 들지만 우으로 저어 가지고 한참만에 겨우 건너가게 된다.
이 강을 건늘 때마다 나는 어린애와 같은 생각이 들며 글ㅅ방에서 종아리 맞어가며 郡守(군수) 도적질하든 생각이 난다. 그것은 이 나루ㅅ배를 젓는 늙은 사공이 내가 이 세상에 발을 딜어 놓앗을 때부터 25, 6년이 지난 오늘까지 에헤야 에헤야 강 노래를 부르며 나루ㅅ배를 젓고 잇을 것이다.
땅 임자는 변하고 세상은 변하엿것만 나루ㅅ배의 사공은 아모 변함없이 지금껏 배를 젓고 잇다.
이 강을 건느면 白川溫泉(백천온천)이다. 가을이면 찾어가도 나의 1년에 한번 밖에 없는 휴식처다.
그곳에는 나의 친구 R군이 잇다. 그도 가을이면 나를 기다리며 나도 가을이면 白川溫泉(백천온천)이 그리워진다. 가을의 우울은 돈드는 휴식처 白川(백천)을 찾어 새 호흡을 갓고 도회로 다시 온다.
北部江原紀行(북부강원기행) 동광 제38호 시(詩)
李石山(리석산)
(1931년 6월 나는 북부 강원도의 고원지대를 여행하엿다.그 곳은 특수한 풍물을 이루고 잇다)
1. 고원 한 가운데서
고원에 핀
이름모를 꽃
도라지 캐는 안악네들의
「신고산타령」은
靑風(청풍)을 타고 살아진다.
아 꽃에 거름(걸음) 붙잡힌 나그내
6월의 황혼!
2. 李王職牧場(리왕직목장)
A.
고원의 푸른 바람
누런 해볓 물결 속에
굴레 벗은 말들이 뛰논다.
하늘에 성큼 오를 듯이
맘대로 뛰논다.
B.
말들은 넓고 풀은 뜰에서
싱싱하게 잘도 자라는구나!
저 말은 길러서 어찌하려노?
3. 洗浦(세포)의 4거리
겨울해 저믈 때
눈보라 속에
오그라트린 회색의 거리
카나다의 砂金鑛(사금광)거리런가.
여름 아츰 다섯시 반
비ㅅ 속에 잠들은 이 거리
퇴페한 남방의 어촌인가.
비 개인 낮에
길까에 나서니
태양이 잡힐 상 싶이 가깝고나.
망막한 고원의 一角(일각)으로
부는 淸風(청풍)에 가슴을 싯기우자니
바로 하늘 우가 내 고향인가 해서
용솟음치는 향수를 느낀다.
4. 고원의 소녀
지나갈 적엔
다소곳이 숙으렷든 얼골
다 지나 모통고지에서 돌아다보는
고원의 소박한 안악네
하용없이 피엿다 슬어지는
고원의 붉은 꽃 같은 자기 신세가
부끄러움인가?
수저움(수줍음)인가?
5. 蘭谷 機械農場(난곡 기계농장)
6월도 절반인데
인제야 아카시아가 피엇어라.
야지의 떼는
클로버 푸른 잔디 우에서
꽃향기에 취해 잇고
밀 찟는 바람가비는 종일 돈다.
밭·밭·밭...
콩·燕麥·감자·콩·燕麥(연맥)·감자...
아득한 曠野(광야)에 김매는 농부의 힌 班點(반점)이
풍풍 쏘다지는 햇볓 아래 무수히 아믈거린다.
(아! 異國情調이국정서에 가득찬 이 한 폭의 전원 풍경화에 취해서 묵묵히 거늘든 나는 품팔이에 굼주린 白衣 農夫백의농민들의 희미하고 원망스런 시선에 그만 가슴이 절리어 갈 길을 재촉하야 총총히 떠낫다.)
恨(한)많은 江南(강남)
金萬祚 (김만조)
달밝아 오르는 추석날 밤에
그림도 江南이 더욱 그리워
달밝은 이 밤에 江南 아씨네
임그려 노래를 부르겟지요
한많은 江南을 단겨오자면
여기서 몇만리 할 수가 없고
그리운 아씨네 언제나 볼가
달밝은 이 밤에 더욱 그립네
멀고먼 江南을 그리워 말고
버들잎 뜰어서 편지를 하게
그러면 江南에 아씨가 보고
그대를 찾아서 도라를 오리
버들잎 뜯어서 편지를 하고
한많은 달밤을 홀로 새우네
그대를 맞고저 피리를 불며
달밝은 이 밤을 홀로 새우네
滿洲와 朝鮮人
龍井永新中學校5년 孫琪龍(용정촌신중학교 손기룡)
滿洲(만주)는 亞細亞(아세사) 極東中華民國東北(극동중화민국동북)에 잇는 東三省(동삼성)이라는 땅인데 45년 전에는 遼東平野(요동평야)에 와 奉天, 吉林, 長春, 哈爾賓(하얼빈) 등지에는 사람이 살앗고 其 외에는 황무지인데 드문드문 사람이 살앗고, 馬賊(마적)과 胡賊(호적)이 잇어서 사람을 파리 죽이기 같이 하는 이 땅에 우리가 이부터 四五十年(45년이래) 이래 昨日(작일)까지 허주럼한 봇다리를 걸머지고 樹林(수림)이 蒼蒼(창창)하고 雲霧(운무)가 자욱한 滿洲(만주)를 향하야 따뜻하고 애정이 넘치는 삼천리 錦繡江山(금수강산)을 떠나 豆滿江(두만강)과 鴨綠江(압록강)을 눈물로서 건너와 뜻없는 황무지를 沃土(옥토)로 만든 사람이 오늘날 滿洲에 잇는 우리올시다. 그러치만 우리가 여기에 어떤 대우를 받음니까. 驅逐(구축)을 당하야 서름에 눈물을 먹음고 가랴니 路費(로바)가 잇습니까. 어디로 가겟습니까. 힘 없다고 마음대로 逐出을 시키니 어대로 가겟서요. 갈데 없어요. 蒙古로 가겟습니까. 蒙古(몽고)에서는 오라고도 하지도 않을 뿐더러 기후 풍토가 우리의 체질에 적합치 아니합니다. 이 滿洲에서는 우리가 살만한 체질을 가젓고 원소와 자격을 가젓고 염치를 가젓서요. 이 땅은 우리 先祖(선조)가 활동하든 활동무대이요 覇權(패권)을 갖든 곳이며 세계에서 朝鮮이라 이름을 놓은 곳이며 임금노릇하든 땅이올시다. 그러니 살만한 자격과 권리를 가젓습니다. 황무지를 沃土로 만들어 놓앗스니 우리가 살 권리를 가젓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못살고 가면 露西亞로 가겟습니까. 露西亞(로서아)에서는 露國國境警官(로국국경경관)이 총을 들고서 허가 없이 오는 자는 죽인다 하니 露西亞(러시아)로도 못가겟습니다. 그리면 왓든 곳으로 다시 가랴니 갈 처지가 못되엇습니다.
여러 형제들이어, 이 몸에 이 일을 어찌하겟습니까? 이 일에 책임자는 늙으신 하라바지나 할머니나 부모나 형님들이 아니요 젊은 우리들과 第2世 어린이들이 이 일에 책임자올시다. 만약 우리가 이곳에서 逐出을 당치 않고 산단들 현대는 黃金萬能時代(황금만능시대)이니 돈이 잇습니까. 吾等(오등)의 經濟(경제)에 생명을 운전한다는 것이라야 농산물 뿐인데 이것이나마 마음대로 하엿으면 좋겟지요마는 예로부터 中國에서는 입살의 수출을 금하엿고 좁살은 드문드문 자기네 편리를 위하야 수출을 시켯고 자유로 수출이 된다는 것이라야 대두와 白太 기타 잡곡이더니 이것도 오늘 어떠한 문제하에서 1斗(두)에 40전씩 하든 것이 18전씩하니 이 몸의 經濟生命(경제생명)이 어떠케 되엇습니까. 알뜰하게도 이 몸의 黃金이 나는 구멍을 막아놓앗습니다. 이곳의 형세와 처지는 자세히 말치 않어도 아르시며 앞길 막는 눈물을 먹음으시겟지요.
지금 저 東支鐵道(동지철도) 부근에 잇는 저이들은 中國 敗殘兵(중국패잔병)에게 참살을 당하고 부상을 당하여 피난을 갓다는 곳이라야 먹을 것이 잇습니까. 남이 주는 과자쪼각이와 떡부스럭이와 그림자가 환이 보이는 조이죽 한 그릇으로 나날이 생활합니다. 저이들은 이곳에서 살라야 살 수 없고 가랴야 갈 곳이 없습니다. 비록 천지가 넓드라도 이몸들이 갈 곳이 없으며 제멧대로 살 곳이 없습니다. 여러분이어, 이 몸의 일을 어찌 하겟습니까.
여러분이어 우리가 지금 逐出(축출)을 당하니 通情(통정)을 말하며 살기 위하여서는 中語를 배워야 하겟지요. 日語도 배워야 하겟습니다. 우리의 서적의 현대물질문명에 합당한 것이 없으니 남이 만든 서적이나마 속히 번역하여 우리 농민에게 읽히고 알리기 위하야 현대 물질적문명의 근원인 서양말을 배워야 하겟습니다. 우리의 文化(문화)가 세계의 落伍者(낙오자)가 되엇으니 이것을 빛내며 조선 사람의 사상을 지배하기 위하여는 朝鮮語와 글과 옛 일을 연구하며 배워야 하겟습니다. 科學萬能(과학만능) 時(시)에 科學에 힘써야 하겟습니다. 우리 경제가 파멸을 당하엿으니 경제를 復興(부흥)시켜야 하겟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젊은이에 책임이올시다. 아모것도 없는 나로서는 못하겟다 하고 낙심하며 자포자기하면 永生의 희망과 장래의 승리의 월계관을 내어버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도탄 중에서 헤매이는 인생으로서 사라갈사록 비관이요. 날마다 날마다 남는 것은 서름이요. 나는 것은 눈물이고 보이는 것은 헌옷 입고 北極의 찬바람을 등에 지고 滿洲 뜰 넓은 벌판 힌눈 우에서 갈 곳 없이 헤매이는 이내 몸들 뿐이고 大氣는 고요한 夜月 3更에 들리는 것은 「엄마 부억에 불 넣엇나오, 추워라」 「찬바람 생긴다」 「저 앞에 商店房 中國사람 찾어 왓대」 하는 등등 여러 가지의 혼돈한 것 뿐이지요 마는 지금 이 같은 광경 이것이 장래의 無比(무비)한 영광을 받는 데는 큰 힘이며 기초의 힘이다 하고 지금이 光景(광경)을 잊지 않고 배경을 삼아 힘쓰면 이것이 우리의 생명의 길이올시다. 장래의 승리의 월계관을 취하는데 자격자이올시다. 울고 잇는 우리의 승리의 월계관을 취하여 지상천국을 건설함에는 千幸萬苦(천신만고)를 당하여도 원성을 잃지 않고 이 광경을 배경삼아 힘쓰는 자와 先犥(선표)�의 히골을 비관치 않고 원망치 않고 犧牲舞臺(희생무대)에서 힘쓰는 젊은이와 第2世 어린이들 만이 우리의 이 조롱을 깨처줄 줄로 믿습니다.
▶先犥(선표)?옛날(이전) 얼룩소. 해석하기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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