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하늘”
본문 말씀 ; 고후 12:1-4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잠깐 나그네처럼 사는 것이고 결국 인간의 최종적인 목적지는 하나님 나라라 입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잠깐 머물다 가는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사는 하숙집과 같은 곳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물이나 식물처럼 잠깐 살다 죽어서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영이신 것처럼 우리 인간들도 영적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흙으로 만들어진 우리 육체 안에는 바로 나 자신인 ‘영’(spirit)이라고 말하는 내 본체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일평생을 살아가면서도 항상 거울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볼 때마다 껍데기를 보는 것이지 속에 있는 알맹이는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사람들은 도대체 나는 누군가 하면서 자기를 찾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자신을 ‘spirit’ ‘영’ 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만이 하나님이 가진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일성이라든지 영원성이라든지 생각하고 느끼며 결정하는 인격이라든지 그리고 거룩성이나 사랑이라든지 물론 이것은 생육번성을 위한 육신적인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영혼의 사랑이 있습니다. 서로 용납하고 이해하고 온유하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줄 알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런 모습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나면서부터 절대로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살도록 지음 받은 아주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최고의 가치가 있는 존재이기에 인간 자체로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할 줄 아는 존재, 거룩성이 있는 존재, 사랑할 줄 아는 존재, 그리고 하나님과 같이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 그리고 영원한 존재이므로 예수님이 우리 사람을 보실 때에는 외모나 외형적인 것을 보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흙으로 된 껍데기를 보고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형상을 보고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외형을 보고 미인이다 미남이다 하는 평가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미인 미남이 나라마다 상황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어떤 곳에는 몸이 좀 뚱뚱한 분들이 미인으로 취급을 받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또 우리나라 사람들은 코가 좀 작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코가 아주 큰데 그 나라 사람들은 늘 무엇을 사모하느냐 하면 우리처럼 코가 작은 것을 사모합니다.
그러니 그 나라에서 성형수술이 발달한다면 코를 작게 만드느라 애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들 속에서 보는 가치관이지 하나님 편에서 보는 가치관은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는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믿습니까? 그래야 정신 차리고 살지 인간적인 가치관과 인간적인 눈을 가지고 살면 정신 못 차리고 살게 될 것입니다. 다 미쳐서 잘못된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그게 최고인 것처럼 오해하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그의 형상대로 만드셨으므로 속에 있는 알맹이가 정말 중요합니다. 세상에서는 외부적인 것이 얼마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기준이 다릅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분은 높이 평가되고 직책이 낮은 사람은 보잘 것 없이 평가되고 있는데 이런 외부적인 것이나 외부적인 직책들은 다 업무에 따라서 다른 것뿐입니다. 남녀 관계도 마찬가지로 그 속에 있는 영은 다 똑같으므로 남자의 인격이나 여자의 인격이나 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서로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자기를 찾는다는 것이고 인간의 창조된 모습대로 회복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회복해 나가는 사람은 얼마나 좋은 사람이 되는 겁니까? 남을 존중히 여길 줄 알고 남을 배려할 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렇게 잠시 머물다가 하나님의 나라로 다 돌아갑니다. 그곳에서 영원히 주와 함께 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런 삶을 먼저 샘플로 살았던 곳을 에덴동산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쫓겨났습니다. 쫓겨난 인간은 거기서 살던 습관이 배어 본능적으로 에덴을 추구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통스런 이 세상 속에서 지배당할 때 자유를 추구하고 전쟁 있는 곳에서는 평화를 추구하고 질병 있는 곳에서는 질병 없는 세상을 추구하고 사상적이나 또는 정치적 이념이나 또한 여러 가지 의학이나 과학을 통해서 인간들이 결국 이루어 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유토피아’입니다.
이 ‘유토피아’란 말 자체가 아주 재미있는 말입니다. ‘유토피아’란 말은 ‘이상 세계’란 말입니다. 이 말은 세상에는 없는 세상을 말합니다. 머리 속에만 있는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세계를 이루어 보려고 사람들은 굉장히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유토피아라고 하는 글도 나오고 그런 글뿐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상과 정치적 이념 속에서 또는 현실적인 과학이나 철학과 의학을 통해서 인간의 꿈을 실현시켜 보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적으로 보면 당신이 찾고 있는 것은 에덴동산을 찾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은 찾고 있으면서도 그게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세계를 이루어 보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런 세계를 찾고 있고 기다리고 있고 이루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세상에서는 이룰 수가 없는 것이며 사람들의 글 속에 있는 정치적 이념 속에서도 이런 것들은 실현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세계를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우리들의 꿈이 실현되는 세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두꺼운 책입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 10년씩 했어도 성경을 한번도 제대로 읽어 보지 못한 분들이 더러 계실 겁니다. 처음에는 시작하다가 읽다 보면 레위기에 가서는 무슨 제사법이 이렇게 복잡하냐면서 중단하는 경우도 있고 해서 성경을 잘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은 정말 귀한 보물입니다. 이것은 신앙이요 우리의 희망입니다.
누구의 말이나 사상, 어떤 인간의 가치관이나 인간의 가르침 속에서 찾을 수 없는 진리가 이 속에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은 우리에게 위로를 주고 희망을 줄 뿐만 아니라 성경 속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핵심적인 알맹이는 우리 사람들이 찾고 있는 그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뉴질랜드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미국에 대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미국이든 뉴질랜드든 세계 어느 나라든 인간의 본질적인 고통은 다 있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미국에 갈 때 미국은 색다른 나라일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갔습니다. 강물도 깨끗할 것이고 그곳에는 공동묘지도 어쩌면 없을지도 모른다. 거기는 병원도 어쩌면 없을지 모른다. 왜 세계에서 최고로 발전한 나라이니까. 적어도 그 정도의 꿈을 가지고 갔는데 가서 보니까 강물도 지저분하고 공동묘지도 많고 병원도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인간의 본질적인 것들을 바르게 찾으려고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경을 들여다보면 이 속에 내가 찾고 있는 세계가 있다는 겁니다. 내 자신만이 아니라 내 가족 내 이웃들과 온 인류의 꿈이 이 속에서 실현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것을 입증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이 세계를 전달하시며 가르치시다가 이 세계가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그는 전하신 말씀의 진리의 확실성을 우리에게 증거 해 주신 것입니다. 성경을 바로 이해하고 나면 기뻐할 수 있고 왜 범사에 감사하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왜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기쁨을 잃어버리지 아니하는지 왜 감사를 잃어버리지 아니하였는지 그토록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을 버릴 수 있었는지 이런 이유들을 다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찾으려 하는 세계, 그것은 성경 속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살
아가는 인생들에게 땅에 것밖에 보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다투고 분쟁하는 인생들에게 우리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나타내 주려고 기록한 문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연구 서적이 아닙니다. 성경은 누가 연구해서 발표한 논문도 아닙니다. 어떤 도인이 깨달음을 얻어서 기록한 책도 아닙니다. 성경은 증거 한 책입니다. 그 사실을 본 사람이 그대로 증거 해준 책입니다. 그래서 그 성경 속에는 ‘내가 보니’ 이런 말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내가 깨달으니’ 가 아니라 ‘내가 보니’ 본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증거 한 책이지 어떤 깨달음이나 논문을 기록한 글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믿어야 할 책입니다. 믿고 보면 경험되어지고 경험 속에서 이해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나면 예수 믿고 사는 것이 어떠하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하나의 생명, 그 하나의 존재 자체가 소중한 것입니다. 내가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이 땅에 있다는 자체가 감사한 것이고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의 것으로 인하여 울고 웃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웃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자리에 이를 수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구약이라는 책이 있는데 창세기로부터 말라기까지입니다. 이 속에는 많은 선지자들이 등장해서 하늘의 것과 하나님의 뜻을 보고 그것을 그 시대 사람들에게 전달하기도 하고 기록해서 남겨놓은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 인간의 꿈이 실현되는 거룩한 나라, 하늘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 새로운 세계를 우리에게 계시해 놓고 있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의 글이 있습니다만 그 중의 대표적인 책을 고르라고 하면 이사야서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66장으로 기록되어 있는 예언서인데 한편에서는 그 시대의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의 죄악된 것을 지적하면서 또 한편에서는 주변 나라들의 흥망성쇠를 다루고 있고 한편에서는 하늘의 하나님이 하나의 나라를 세울 것인데 바로 새로운 세계가 임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을 계시해 주고 있는 책입니다. 사65장에서 17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선지자를 위하여 하나님이 마침내 완성하실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셨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이곳에는 새로운 삶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19절 말씀을 보면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저는 목회하는 목회자입니다. 내 문제보다도 성도들의 문제에 대해 항상 많이 고민하고 어떤 때 나는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도들의 문제들을 상담하면서 눈에서 눈물이 글썽글썽할 때 제 마음이 편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힘은 없고 주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권면하면서 조언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그 가운데서 다시는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고 하니 얼마나 위로가 됩니까? 성도들의 눈에서 눈물이 그치고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겠다고 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새벽기도 때나 기도하실 때 성도들의 기도에 높고 낮음을 들어보면 저 집에 무슨 큰일이 터졌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고민이 안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실한 약속이 없다면 목사가 무슨 힘 있는 사람이라서 위로의 말씀을 건네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목사가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는 것은 하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궁극적으로 이 사람의 눈에서 눈물이 다 그쳐지는 날이 오기 때문에 위로할 수 있고 권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사야는 보았습니다. 그 시대라고 어지럽지 않았겠습니까? 그가 본 이 새로운 세계를 자세하게 다루어 놓은 것이 이사야서인데 한번 중간 중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사2장을 살펴봅시다. 이사야서의 주제가 무엇이냐 하면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나라’ 라고 말하면 됩니다. 4절 말씀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치 아니하리라”
1차 대전이 1918년에 막을 내렸습니다. 전쟁의 참상을 본 전 세계 26개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전쟁은 있어서는 안 되겠다 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 국제연맹이라는 기구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연맹을 만들어 놓고 20년이 지난 1939년에 더 무서운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나서 51개 나라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UN이라는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유엔의 덕을 톡톡히 본 나라입니다. 그 유엔은 전쟁을 없애보자고 만든 기구인데 지금 지구상에는 불법 합법 따질 것 없이 끊임없는 전쟁이 일어났었고 앞으로도 크고 작은 수많은 전쟁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유엔 빌딩 앞에 가보면 건너편 사무실로 올라가는 벽면에 사람들의 꿈이 담긴 글이 새겨 있는데 그 내용이 바로 사2:4의 말씀입니다. 유엔 센터 앞에 공원이 하나 있는데 그 공원에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기증한 동상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동상 하나는 어떤 사람이 망치를 들고 칼을 꺾어서 두들기는 모습인데 소련에서 기증한 동상입니다. 그런 것들을 수없이 만들어 놓은 사람들의 전쟁은 그치지를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앞으로 더욱 더 세상이 더 요란스런 상황으로 들어가게 될 것을 우려하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속에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이 나라가 저 나라를 다시는 치지 아니하리라는 이제 다시는 전쟁을 연습치 아니 할 세계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복음이며 모든 인류가 들어야 될 소망의 복음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사25장으로 넘어가 봅시다. 6-8절 말씀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그 가리워진 면박과 열방의 그 덮인 휘장을 제하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는 날, 그리고 사망을 영원히 멸하시는 그날, 여러분! 이런 날이 있다면 정말로 얼마나 큰 소망이 있겠습니까!
이번에는 베드로전서를 한번 찾아봅시다. 베드로는 성질이 급하고 용기가 있었던 정말로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으로서 처음에는 예수 믿는 목적이 세상적이었던 터라 예수를 부인하기도 했었으나 나중에 성령 받고 나서 그를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벧전1:3-4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 하신 것이라” 여러분의 삶, 여러분의 재산, 여러분의 영광이 하늘에 준비되어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베드로후서 3장을 봅시다. 12-13절입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 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사야가 보았던, 선지자들이 보았던, 주님이 증거 하셨던 이 나라를 사도들도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계21장을 봅시다. 1절 다같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믿어지면 아멘하십시오.
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아멘입니다. 이사야서를 통해서 예언한 것처럼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십니다. 다시는 사망이 없습니다. 애통하는 것도 곡하는 것도 아픈 것이 다시는 있지 않습니다. 이 나라가 속히 임하기를 바라시는 분들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나라가 임하옵소서’
이 성경에는 하늘의 나라를 직접 보고 설명하듯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나라를 직접 다녀온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고후12장을 다시 한번 봅시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 새로운 세계를 낙원이라고 표현하면서 그 세계가 어디에 있다고 이야기했느냐면 세 번째 하늘에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천국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면 우물우물하지 마시고 또 연약하고 어리석은 한계에 있는 인간의 지식에 근거를 두지 맙시다. 우리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 1-2절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 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기도할 때 그 하늘이 바로 셋째 하늘을 말하며 또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는 하늘인 것입니다. 인간은 지구 밖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찾고 있습니다. 달나라에 가보니까 아무것도 없어서 이제는 화성탐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람이 살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하나님은 세 번째 하늘에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3-4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 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사도 바울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그곳에 가서 보았습니다. 그곳에 가서 들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최고의 세상을 그는 보았던 것입니다.
하늘이라고 하면 세 가지 하늘이 있습니다. 이 ‘하늘’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성경에서는 무엇이라 했느냐 하면 창1장에 ‘궁창’이라고 말합니다. ‘궁창’이라는 말은 넓고 넓은 공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3개의 공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기권 안에 있는 비행기가 날고 새들이 날아다니는 지구의 하늘이 있고 대기권 밖에는 수많은 별들이 존재하는 우주의 하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고 선지자들에게 보여주신 새로운 세계가 펼쳐져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곳을 보고 와서 사람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천국을 아느냐 천국을 소유했느냐 예수를 아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서 보고 오니까 세상 것들에 대하여 가치 기준이 싹 바뀌어 버렸습니다. 저는 이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제가 방글라데시나 네팔에 가서 보면 그 지역에 있는 선교사님들이나 목사님들이 참 좋은 물건들이 있는 시장 구경 좀 하자고 하는데 미안한 말입니다만 그걸 가지고 와서 우리나라에서 사용할 수 있느냐 하면 별로 사용할 게 없습니다. 왜? 우리나라에는 더 좋은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방글라데시에 가서 그 물건을 가지고 싸우겠습니까? 싸울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와서 증거 한 것입니다. 그의 철학이나 윤리나 도덕이나 종교적인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는 본 것을 증거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빌3장을 보니까 자기에게 유익한 것들을 다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합니다. 여기에 황금덩어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 황금 덩어리가 있으면 그것을 차지하려고 싸우겠습니까? 안 싸우겠습니까? 자기가 가지려고 싸울 것입니다. 형제간에 심지어는 아내와 남편까지도 못된 자식은 다 차지하려고 우리 아버지 언제 죽나 생각하는 자식들도 있을 것인데 만약에 여기에 배설물을 한 바가지 퍼 가져다 놓았다면 그것 가지고 싸우겠습니까? 안 싸웁니다. 서로 제발 좀 가져가라고 해도 주변에 가까이 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것은 여기 있는 것이 금으로 보이느냐 배설물로 보이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세번째 하늘 이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우리는 결국 이 하늘에서 영원히 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모두는 세번째하늘을 사모하며 사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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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