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혼열 한국인 라이따이한의 힘겨운 삶)
베트남 다낭시 호이안 투본강에는 라이따이한 이라는 사람들이 따로 모여 사는 마을이 있다
라이따이한 이란 베트남에 거주하는 혼열 한국인을 말한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 한국인 군인 또는 한국인 근로자와 베트남 여자 사이에서 정상적으로
태어난 자녀들을 베트남에서는 라이따이한 이라고 부른다
전쟁에서 붙잡혀 억지로 강간을 당하는 여자들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 바로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불륜으로 태어나는 아이는 거의 없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 남자와 베트남 여자가 살림을 차리고 사는 동안 태어난 한국인 2세를
라이따이한 이라고 부른다
베트남 전쟁은 민주주의 남부 베트남과 공산주의 북부 베트남 전쟁으로 장기간 계속되었다
(전쟁기간 1965~1975 약 10여 년간 전쟁)
그러다가 남부베트남에서 싸우던 미국은 수많은 전쟁비용만 날리고 공산주의 북부베트남에 패하게 된다
공산주의 북부베트남이 승리하고 민주주의 남부베트남이 멸망하자
1973년 미국과 한국은 전쟁에서 패하고 모두 철수하게 된다
이때 미국은 10만 명이나 되는 미국인 2세와 베트남 아내를 모두 미국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한국은 3만 명이나 되는 한국인 2세와 베트남 아내를 모두 베트남에 그대로 두고 귀국했다
공산주의 승리로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전쟁에서 승리한 북부베트남에서는 수년간에 걸쳐서
전쟁에서 패한 남부베트남 주요 인사들을 모두 찾아내서 처형하고 사람들을 차별 대우하고
몇 년 동안은 적군이었던 일반인들까지도 학살이 계속 이어졌다
특히 라이따이한과 함께 살았던 그의 어머니가 발각되면
적군이었던 미국과 한국 군대에 정보를 주고 도와줬다는 이유로 무차별 죽임을 당했다
죽임을 당하지 않는 경우라도 갖은 학대와 멸시로 몰매를 맞거나 삶이 피폐해져서
굶어죽거나 아파도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갔다
라이따이한은 적군의 피가 흐른다고 해서 북베트남 정권에서 호적을 등재해주지 않았다
베트남 시민권을 아예 박탈해버렸다
라이따이한 자녀를 둔 베트남 여자들은 공산주의 베트남 정권에서 온갖 학대를 받고
숨어서 지내거나 궂은일을 하고 한국인 아버지가 없는 상태에서 여자의 혼자 몸으로
자녀들을 키우기 위해서 갖은 고초를 모두 겪어야만 했다
라이따이한은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어머니가 베트남인 혼열 한국인을 말한다
처음에 라이따이한은 3만 명이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맞아죽거나 굷주려 죽거나 병에 걸려 죽어서
현재는 겨우 5천여 명이 살아 남아있다
살아남아 있는 라이따이한도 천대받고 삶이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태어난 2세 10만 명 전원과 베트남 아내를 모두 미국으로 데려갔는데
한국은 왜 데려오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라이따이한은 고통 받고 자라면서 자기들을 버리고 떠난 한국인 아버지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와 갖은 고생을 하면서 살아온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이들이 아주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고 남의 일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라이따이한을 많이 지원해주고 보살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아버지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한 때는 한국의 관련단체들이 진상조사를 하려고 해도 베트남 정부는
한국이 적군인 남부베트남 참전을 이유로 거부감이 많아서 협조해주지 않았다
미국과 한국은 베트남 전쟁 당시에 적군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세월이 많이 흘러서 한국은 베트남과 경제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베트남에는 또 다시 신 라이따이한이 많이 태어났다
베트남 현지에 처를 두면 통역과 거주 및 사업상 거래 등에 잇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베트남 아가씨들은 한국이 정말 잘 사는 부자 나라라고 생각하였고 한국에 가서 사는 것을
최대의 꿈으로 여겨왔기 때문에 한국인 남자라면 나이와 상관없이 무조건 결혼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베트남으로 갔던 한국 남성들은 젊고 어리고 아름다운 베트남 여성들과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낳은 경우가 아주 많았다
여기서 새로 태어난 자녀들이 제 2차 라이따이한이다
베트남 정부에서 라이따이한은 진학도 막아버렸고
라이따이한의 어머니는 하찮은 화냥녀 취급을 당해 멸시를 당하며 살았다
한국은 베트남과 점점 관계가 좋아지면서 교류가 활발해지자
베트남에 사는 라이따이한이 한국으로 와서 아버지를 찾는 경우가 늘어났는데
이로 인해서 한국에 있는 가정이 깨지는 사례도 늘어나는 부작용이 생겨났다
아버지를 찾아와도 한국에서 아버지가 만나주지 않는 경우도 많다
반면에 한국에 있는 아버지의 초청으로 라이따이한이 한국으로 올 경우
미성년자만 국적취득이 가능하고
성년이 지나면 귀화 대상자로 분류되어 국적을 취득하지 못해서 무국적자가 되어
일자리를 구하거나 취직도 할 수 없다
국적을 취득하려면 자격시험에 통과해야 되는데 매우 어려운 모양이다
중국 동포나 탈북민은 일정한 절차를 거쳐서 국적을 취득하는데
무엇 때문에 라이따이한에게는 제한하는지도 알 수 없다
나는 라이따이한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다
처신을 잘못한 한국인 아버지가 문제이고 한국인 아버지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된다고 본다
현재 이들은 베트남 정부지원 하에 다낭 호이안 투본강 주변에 라이따이한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공동체 마을을 형성하고
투본강에서 한국인 관광객들을 바구니 배에 태워주고 그 댓가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호이안 투본강 강가로 가는 길가 양쪽에는 시원한 여름옷과 모자를 파는 허름한 상점들이 있는데
모두 라이따이한들이 운영하는 가게들이다
여름용 여성 원피스의 경우 우리 돈으로 5천 원씩 팔고 있었다
달러도 받지만 한국 돈은 더더욱 반갑게 받아준다
한 벌씩 사다가 입어도 시원하게 입을 수 있고 가격은 아주 싸지만 잘 어울릴 듯 하다
바구니 배를 틴퉁이라고 부르는데
대나무를 엮어서 커다란 바구니를 만든 다음 물이 세지 않도록 소똥을 발라서 틈새를 메우고
말린 것인데 보통 뱃사공 1명 관광객 2명 등 3명이 승선한다
앞으로는 대나무 대신 플라스틱으로 만든 틴퉁으로 바꿀 예정이라고 한다
다낭 호이안에 있는 투본강가로 바구니 배를 타러 가면
강 입구에서부터 라이따이한들이 마이크를 잡고 한국에서 히트치는 트롯트 곡들을 메들리로
부르고 춤을 추면서 환영하고 반겨준다
라이따이한 젊은 남자들은 모두 한국말로 노래를 불러준다
어떤 관광객들은 신이 나서 그들과 함께 춤을 추기도 한다
관광객 중 거의 대부분은 한국 사람들이다 외국 사람들은 거의 볼 수 없을 정도이다
나는 라이따이한에 관한 슬픈 사연을 미리 듣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1달러짜리 팁을 주니
다른 사람들도 팁을 주고 있었다
바구니 배를 타고 멀리 나가자 넓은 강물 위에는 수상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쪽으로 관광객을 태운 많은 틴퉁 바가지배가 몰려들자
수상 무대 위에서 라이따이한들이 한국 노래를 부르며 관광객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도 팁을 주었다
나중에 바구니 배에서 내릴 때도 뱃사공에게 팁을 주었다
그들은 팁을 주면 혼자 쓰지 않고 모두가 팁을 모아서 함께 나누며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참고로 배 삯은 40불이고 배를 타고 오가는 소요시간은 30분~40분 정도 걸린다
힘겹게 사는 그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한국인인 라이따이한의 후손들이라니
가슴이 뭉클하고 코끝이 찡하다
어떤 관광객은 이들의 아버지가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이 또한 전쟁이 낳은 비극이 아닌가 싶다^^
수많은 라이따이한들이 베트남에서 차별대우를 받지 않고 꿋꿋하게 열심히 살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즐거운 날들이 되었으면 한다
베트남 다낭으로 여행하는 분들은 참고하시고 호이안 투본강 바구니배를 타러 갈 경우
그들에게 모두들 조금씩이나마 팁을 주신다면
그들에게 많은 위로와 큰 힘이 될 것으로 본다
첫댓글 멋진 인생
용규친구 화이팅
준수 친구
베트남 잘 다녀 오셨는가
어떤 친구는 하필 우기 철을 만나 매일 빗속에서 고생만 하다가 돌아온 경우도 있던데..
오늘은 해운대도 거의 영하로 떨어지고 바닷가 강풍이 불어와 매우 춥다
내일은 엄마 생신으로 대전 유성호텔로 형제들이 모여
새벽에 기차타고 올라간다네 이제는 웬만하면 운전대 안 잡을려고 노력 중
시간이 되면 금강수목원 건너편 아버지 산소도 다녀올 예정
추위에 건강하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