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는 현존재는 죽음의 존재
이미 보았듯이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다른 존재자들에 비해서 인간이라는 존재자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사물의 근본적인 존재 양태를 도구적 존재, 즉 ‘손안에 있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순간 이미 전제된 것이나 다름없다. 하이데거는 도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즉 손안에 있는 것이란 다른 존재자를 위한 도구를 뜻하는데 이때 다른 존재자란 결국 인간 이외의 다른 어떤 존재자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이데거는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존재를 다른 존재자들의 존재와 구분하기 위해서 ‘현존재(現存在, das Dasein)’라고 부른다.
하이데거가 인간이라는 현존재에 부여한 가장 근본적인 특권은 ‘존재물음(Seinsfrage)’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구두는 스스로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물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물음을 제기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한다. 이러한 물음을 한 번도 떠올려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물음을 제기한다는 것은 그러한 물음을 제기할 수 없는 다른 존재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존재라는 점을 드러낸다.
‘현존재’를 영어로 표기하면 ‘거기에 있음(being there)’이 될 것인데, 거기에 있음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특정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뜻한다. 인간이라는 존재자는 정지된 사물이 아닌 항상 특정한 상황에 놓여 있는 존재자이다. 이는 곧 인간이 시간의 흐름 속에 놓인 존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da, 거기)’은 공간적으로 거기에 있음이라는 특정한 장소적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하이데거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특정한 공간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상황을 뜻한다는 점에서 시간의 흐름과 더 본질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실제로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 즉 시간의 흐름 속에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현재의 한순간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과거와 미래의 중첩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뜻한다. 인간은 누구나 과거를 떠올리고 미래를 예측하면서 현재의 순간을 경과해나간다. 그런데 미래에 대한 예측이나 선구는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순간, 즉 죽음의 순간에까지 이른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항상 인간에게 내재해 있다.
고대 로마 시대 스토아 철학자였던 에픽테토스(Epiktētos, ?55~?135)는 죽음이란 살아 있는 동안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죽음을 현재와는 상관없는 미래의 사건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항상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란 살아 있는 현재와 무관한 것이 아닌 살아 있는 동안에도 항상 경험하는 것이다.
현존재로서의 인간이 존재물음을 제기하는 이유도 자신이 죽는다는 것, 즉 유한한 존재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각성은 인간이 결코 피할 수 없으며, 이는 인간에게 까닭을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불안감은 인간에게 주어진 불행과 고통의 징표가 결코 아니다. 하이데거는 불안감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사물과 같은 존재자로 전락하지 않고 끊임없이 존재의 본래 모습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동력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존재의 본래 모습이란 ‘진리’를 의미할 것이며, 죽음에 대한 각성은 인간에게 진리를 찾아 나서게 하는 견인 요소가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간이라는 현존재는 죽음의 존재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