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칭찬한 대로 100년 만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재상의 재목은 채제공에 이어
정약용이 거듭 나왔지만, 그 재목을 알아준 군주는 정조 이후에 다시 나오지 않았다."
박광용의 <영조와 정조의 나라>中
<대인은 대인을 알아본다. 천재 실학자 정약용 한눈에 알아 본 성군 정조대왕>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영조의 뒤를 위어 왕이 됩니다.
하지만 왕이 되고 나서도 사도세자를 죽인 전범들이자 정조가 왕이 되는 것을 막고자 했던 노론에게
끊임없이 암살위협을 받습니다.
실제로 정조가 홀로 책을 보고 있을때 자객 3명이 들이닥친적도 있었는데, 이런 때를 대비해 일찍이 무예를 출중히 닦아둔
정조께서 홀몸으로 자객들을 모두 베어버린 사건도 있었지요.
마침 내시들도 호위무관들을 살펴보러 자리를 비운 시간이였다고 합니다만,
이미 대비를 비롯한 궁의 거의 전체를 차지하는 노론이 자신을 죽이려는 마당에
정조는 내시도 호위무관들도 궁녀들도 모두 자신의 암살에 개입했을거란걸 어렴풋 알고 있었겠지요.
정조는 늘 새벽 늦게까지 책을 보다가 잠들었다고 하는데요 처마위에 내려앉는 자객의
발자국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시달렸을지....알만하죠 ㅜ.ㅜ)
그 축적된 독서량덕분인지 조선에서 가장 많은 책을 편찬한 왕은 정조입니다...보통 세종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요..
또 정조는 어의마저도 믿을수 없다고 생각하여 자기 몸은 스스로 치료하고자
의학까지 익혔습니다. 그래서 진단과 처방까지 스스로 내렸다고 하고, 때로 어의가 잘못된 탕약을
지어오면 꾸짖을 정도로 의학에도 수준높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1783년. 세자책봉을 축하하기 위한 증광감시에 합격한 이들의 연회를 위해 어전으로 합격자들을 불러 들였습니다.
그 시험에 합격하여 막 성균관 유생이 된 22살의 정약용과 32살의 정조는 이날 선정전에서 처음 만납니다.
정약용을 처음 본 정조는 얼굴을 들으라고 말하며 네 나이가 몇이냐고 묻습니다.
사실 조선시대 국왕이 대과에 급제한 신하도 아닌 기껏 생원시에 합격한 미관의 청년에게 자신의 용안을 보여 주는 일은 극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과거 선조 재위시 이항복이 대과에 합격, 조정의 조회에 참여했을 때 그 특유의 궁금증으로 국왕의 얼굴을 보고 싶어 살짝 얼굴을 들여
쳐다 보다 들켜 유배를 간 사실을 보면 국왕의 얼굴을 보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였지요.
그런 상황에서 정조가 고개를 들어 자신의 얼굴을 보여 주며 나이를 물은 것은 무언인가 인연이 있음을 감지했을지도요
정약용은 “임오생이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임오생은 1762년.
바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해였습니다.
그 해를 잊을리 없는 정조에게 정약용은 잠시스침이라도 또렷한 기억이 되었겠죠.
(실제로 사도세자가 5월 말 뒤주에서 죽고, 이십여일 지난 6월 16일 정약용이 태어납니다. 마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사도세자가 하늘에서 내린 인연같지요..)
정조와 정약용의 인연은 성균관 교육에서 더 크게 빛을 봅니다.
성균관 유생들을 엄격히 교육시킨 정조는 자주 어려운 시험을 치루게 했는데, 어느날은 '중용'을 읽고
의문이 나는 점 70가지를 뽑아 이를 논문화 하라는 과제를 내립니다.
(전하...너무하십니다 70개씩이나....ㅎㄷㄷㄷㄷㄷㄷㄷ)
이때 정약용이 쓴 글이 정조의 생각과 기가 막힐정도로 일치합니다. 그걸 잠깐 설명하자면..
정조는 중용과 관련해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학설 모두를 인정하고 공부했는데 사실상 이 문제와
관련해선 율곡 이이의 학설이 더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약용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글을 쓴 것이지요. 이게 참 대단한게,
정약용이 단순히 정조와 같은 의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놀란 게 아니라
그가 바로 남인출신인데도 이같은 글을 썼기 때문입니다.
남인은 대대로 퇴계 이황의 학설을 따르는 집단이었기에 어떠한 일에 있어도 율곡의 학설을 인용하거나
그것이 옳다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 당쟁의 가장 큰 문제였지요.하지만 정약용은 오랫동안의 폐단을 극복하고
사상의 자유로움을 통해 반대당의 정신적 기둥인 율곡의 학설을 지지하고 인용한 것입니다.
이 일은 진정 국왕 정조가 추구하는 탕평정치와 정확히 일치했고,
정약용이 얼마나 깊은 사고와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계기였지요.
또 그 사상뿐만이 아니라 글솜씨도 다른 유생들은 난잡한데에 비해 정약용의 글은 흠잡을데가 없었다고 해요.
이때부터 정조의 본격적인 총애와 훈육이 시작됩니다.
성균관에서 보는 크고 작은 시험에서...거의 늘 정약용이 1등을 합니다.
그때마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글이나 사상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습니다.
때로는 초시에서는 합격시키고 본시험에서는 떨어뜨리기도 했는데, 실력부족이 아니라 정약용을
더 큰 그릇으로 만들기 위한 담금질 이라고 할까요?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뵈니, 임금이 다산의 시험 답안지를 읽게 하고 무릎을 치며 칭찬하기를
‘네가 지은 것이 사실은 장원보다 못지않으나, 다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물러나오니, 승지 홍인호(洪仁浩 : 다산의 6촌 처남)가 ‘아무개 같은 사람은 반드시 재상이 될 것이다’
라는 임금님의 말씀을 전해주었다”
<사암연보> 中
시험에서 1등을 한 이에게는 질 좋은 종이나 귀한 책을 한권씩 선물로 내렸는데
정약용은 그런식으로 한권한권 팔자백선 대전통편 국조보감 병학통까지 전부 받아 공부하게 되죠.
국조보감을 받던 해에는 정조가 흰 종이 100필을 함께 하사하는데, 특이한 명이
궁궐문 앞까지는 스스로 안고가고, 궁궐문 밖에 당도해서야 나졸들을 시켜 들어주도록 하죠.
그래서 정약용은 상으로 받은종이 백필을 껴안고-.- 궐안을 걷게되고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겠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은연중 정약용을 뛰어난 자라고 인식하게 됩니다. 정조는 그걸 의도한거지요.
(요새말로 언론플레이라고 할까 ㅋㅋㅋ궁궐내에 정약용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도록
정조는 정약용을 자연스럽게 칭찬합니다. 정약용을 관직에 나오면 높이 쓰려고 하는것이지요.).
성균관에서는 매번 1등을 하는 정약용이였지만 대과시험에서는 번번히 낙방합니다. 그가
남인이기 때문이지요. 보다못한 정조가 감독관은 남인출신 채제공으로 지시하고 특별과거를 열고
정약용은 그 시험에서 장원을 합니다.
정조는 과거에 급제한지 6개월밖에 안된 정약용게 영의정에게나 맡길 큰 임무를 지시합니다.
사도세자의 시신을 수원으로 모시는데 한강을 편안하게 건너갈 배다리를 설계하는 일이었습니다.
임무도 막중하지만 정조가 사도세자를 향한 효심이 어느정도였는지를 생각하면.. 이 일은 정말 자신이
심적으로도 믿는 사람에게 맡기고 싶었겠지요.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에게 맡기고 싶지는 않았을겁니다.
정약용에 대한 정조의 신뢰가 있었고. 정약용은 이 일을 완벽하게 해내죠.
- 아버지(사도세자)를 돌아가게 한 정적들에게 내가 조선의 왕이다 라는걸 각인시키는 대규모운행행렬-
3년뒤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이 돌아가십니다. 정약용은 관직에서 물러나 시묘살이를 하러 고향에
내려가지요.
그리고 그해 겨울 정조가 사람을 하나 보냅니다..
바로 수원 화성을 설계하라는 지시를 내리기 위해서지요.
조선시대에는 부모사망으로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하면, 그 동안은 절대 출사할수가 없습니다.
조정에서도 시묘살이를 하고 있는 대신에게 어떤 일도 내리지 않았지요.
그 관례를 깨고 정조는 정약용에게 화성건립에 대한 설계 지시를 내립니다. 화성을 짓는데 정약용이
빠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이였지요. 수원화성은 곧 정조와 정약용이 앞으로 꽃피울 기반의
시작이였으니까요. (이날을 기다렸다.. 앞으로 시작이다. 같은..) 정조의 가르침으로 커온 정약용은
그 뜻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상 중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수원화성설계에 착수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거중기를 발명하고 덕분에 처음 정조가 구상한 10년에서 무려 8년을 앞당겨 2년만에
완공합니다.
그 설계가 너무나 과학적이고 아름다워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됩니다.
<우리성상께서는 평소에 뜻이 공손하고 검소하셔서 말달리며 사냥하기를 좋아하지 않으시고
여색이나 진귀한 물건도 가까이 하지 않으신다. 환관과 궁첩에게도 사사로운 정을 주지 않으시면서
오직 신하들 중에 문학과 경술이 있는 자만을 좋아하여 그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어 즐기신다.
비록 사죽금석 같은 온갖 악기를 벌려 놓고 번갈아 연주하게 하면서 노닌 적은 없으나, 음식을 내려주고
온화한 낯빛으로 친한 이를 대하는 것이 마치 집안 사람들이나 부자사이와 같았으며, 엄하고 딱딱한 낯
빛을 짓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러 신하들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털어놓지 않는 바가 없어서, 민생의
질고와 여항의 감춰지고 답답한 사정을 모두 들을 수 잇엇으며, 경을 말하고 시를 이야기하는 자들도
의구심이 없이 질정을 변석하는데 정성을 다할 수 있었다.>
정약용이 책에서 정조의 성격에 대해 언급한 부분입니다. 정조는 나라와 관리의 모범이 되야 된다
하여 반찬도 다섯첩 이상은 자제하게 하였고 옷도 기워입을정도로 검소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정약용도 마찬가지지요. 임금을 도와 백성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위해 관직에 나아갈 꿈을
품은 정약용이지만 막상 그를 아낀 정조가 큰 벼슬을 제시하면 형평에 어긋난다며 늘 마다하곤 했습니다.
(정조가 아무리 들이밀어도 큰 자리 안갖겠다고 반항하느라 잠수도 타서 정조를 애태우고.. 뭐..그럽니다;;)
정약용은 백성을 잘 살게하고 농업, 상업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실용주의를 추구했고
어느 당쟁에도 휘말리지 않으며 정조의 개혁을 도왔습니다. 정조가 정약용에게 맡긴 임무들은
그 범위가 상상을 초월하는데 특히나 비밀스러운 업무는 거의 대부분 정약용에게 맡깁니다.
제대로 믿을수 있는 손발역할을 해준 것이지요. 정말이지 정조와 정약용만큼 다양한 분야에
전문가적 지식을 갖춘 임금과 신하는 없을것입니다... 어느 하나만 뛰어난게 아니라 둘다
모든 분야에서 최고였죠..
<정조와 정약용의 한자 내기>
정조가 먼저 "말이 마치(馬齒 : 말의 이빨)하나 둘이리"라고 농을 걸었다.
대구를 하라는 것이다. 정약용은 즉각 "닭의 깃이 게우(鷄羽 : 닭의 깃)열다섯이오"라고 응했다.
정조는 숨 돌릴 틈도 주지않고 "보리뿌리 맥근(麥根)맥근" 이라고 다시 문제를 던졌고,
정약용은 "오동열매 동실(桐實)동실"이라고 응수했다.
정조가 다시 "아침까치 조작(朝鵲)조작"이라고 던지자
정약용은 "낮 송아지 오독(午犢)오독"이라고 받았다.
이런 대거리가 끝나면 서로 마주보고 웃는 수밖에 없었다.
또 어느날, 정조와 정약용은 3개자가 1개자로 합성한 한자 쓰기 내기를 하였다.
晶(밝을 정), 姦(간사할 간), 森(나무 빽빽할 삼), 磊(돌 무더기 뢰), 묘(물 아득할 묘.水子3개)
등을 쓰는 내기였다.
"전하께서 한 자만은 신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 옵니다"
"자전에 있는 모든자를 다 암기 하는데 한 자가 미치지 못할 것이란 말이 왠말이냐?"
"그래도 한자만은 미치지 못할 것이옵니다."
둘이 각자 쓴것을 교환 했더니 과연 정조가 한 자 부족했다.三(석삼)자를 빼놓은 것이었다.
군신(君臣)은 서로 무릎을 치면서 웃었다.
(그냥 ㅋㅋㅋㅋ 웃겨서 ㅋㅋㅋㅋ 뭐 이러고 놀았냐규~~ㅋㅋㅋ)
<다산과 정조의 마지막 이야기 >
“1800년 6월 12일 달 밝은 밤에 홀로 한가하게 앉아있자니, 규장각의 아전이 『한서선(漢書選)』10권을 가지고 왔다.
그러면서 임금의 말씀을 전해주는데,
‘오래도록 서로 보지 못했다.너를 불러 책을 편찬하고 싶어 주자소의 벽을 새로 발랐다.
아직 덜 말라 정결하지 못하지만 그믐께쯤이면 궁에 들어와 경연에 나오거라 ’
하셨다면서,‘책 10권 중에서 5권은 네 집에 남겨두고 5권은 책의 제목을 써서 다시 들여보내라’고 하셨다고 한다.”
얼굴을 못 보니 정약용의 글씨라도 얼른 보고 싶은 정조의 애정이 묻어났고 이에 정약용은 감동합니다.
정약용과의 책 편찬을 위해 인쇄소의 벽지를 새로 바르고 다정한 서찰을 보낸 정조.
정약용은 조만간 입궐할 준비를 했겠죠. 그런데 건강하던 왕께서 갑자기 승하하셨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 다음날부터 임금님의 병환이 나타나고 딱 보름 만에 하늘은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天竟崩矣).
그 날 밤의 그 하사품이 마지막 떠나시며 베푼 은전(恩典)이었고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題漢書選〉(정조는 6월 28일 붕어함)
정조의 죽음에 대해서는 거의 독살설이 확실시 되고 있죠.
물론 왕조실록에는 그런 기록이 없지만... 조선역사에서는 원래 왕의 죽음에 독살의심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것을 기록해두지 않았습니다. 그저 종기가 심해져서 돌아가셨다고만 적어두죠.
정조가 죽을때 마지막으로 정조를 뵌 사람은 대왕대비인 정순왕후라고 합니다. 노론파의 중심이지요.
정순왕후는 정조에게 직접 탕약을 들고 가 바치고, 정순왕후가 나온후 십여분이 지난 후에 왕이 승하하셨다는
것을 알리는 곡소리가 침전에서 흘러나왔다고 합니다.
당시 어의도 노론의 영수인 심환지 집안 사람이였으며 후에 당시 처방전을 분석해본결과
수은중독을 일으킬수 있는 물질들이 다량으로 검출되었다 하지요.
정조가 죽기전 마지막으로 한 말이 "수정전..." 이라는 말이 있지요. 수정전은 정순왕후의 거처입니다.
(결국 노론의 사리사욕에...훌륭한 지도자이자 군주는 그렇게 승하하십니다. 정조 승하후
노론은 정권을 잡고 막대한 이익을 누리고.. 정약용은 먼 귀양살이를 떠나게 됩니다 )
임금님이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정약용은 믿을수 없는 맘으로 한달음에 홍화문으로 달려가지만..
홍화문 앞에는 이미 신하들이 왕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정약용은 진정으로 하늘이 무너짐을 느끼고 실성을 하듯 울었다고 합니다.
그 일만 생각하면 눈물이 옷깃을 적셔 곧바로 따라 죽어 지하에서라도 임금을 뵙고 싶었지만 그러지를 못했노라고 한탄하였습니다.
이 글을 쓴것이 정조가 죽고 정약용이 귀양을 가 수십년이 지나서 인데
그때도 여전히 자신의 유일한 주군이자 스승이자 벗이였던 정조를 그리워했던것 같네요..
(후에 귀양지에서 정약용 역시 "전언에 의하면.."이라는 전제로 정조대왕의 암살 의혹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확실한 물증이 드러난것이 없었지요....)
정조 승하 207년이 지났는데... 생각해보면 그렇게 아주 오랜 과거는 아닌것 같죠?
조선시대라고 하면 막 까마득한것 같아도... 의외로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위에
정조와 정약용.. 그 시절이 있네요.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우는 정조시절. 앞으로 해야할게 너무 많은
두사람이였는데... 정약용은 정말 대단한 천재죠... 발명가이자 과학자이자 의학가이자
실학자이자 건축가이자 냉철한 수사관이자 (정약용이 한때는 현대판 CSI 길반장이였다는 사실ㅋㅋ
미해결 살인사건 캐러다니고 ㅋㅋ 흠흠신서가 유명하죠..후에 이 책은 조선 범죄수사관들의 교과서적 존재가
됩니다..ㅋㅋ )
암행어사 노릇에 탐관오리 숙청까지... 하지만 이 모든건 정조라는 훌륭한 임금을 만난 덕에
꽃피울수 있었죠. 그 시기가 생각보다 너무 짧았지만..
두분에 관한 에피소드는 참 많지만.. 확실한건 정조가 완전히 믿고 의지할수 있는 유일한 신하였던
정약용과, 그런 정약용을 알아준 단 하나의 주군 정조. 참 역사적이고 운명적인 만남이였다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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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성균관 재학시절부터 정조에게 이쁨을 받습니다. 인재 발굴, 젊은 층, 그것도 노론을 견제할수 있는 남인에 주목하고 있던
정조에게 22살의 젊고 천재성마저 보이는 성실한 남인출신의 정약용은 눈에 안들어올수가 없었죠.
정약용의 유생시절 정조가 정약용의 시험지를 채점한 걸 보면...뭐랄까 참 귀여워요 ㅋㅋㅋ
구몬 선생님 같달까-.-;; 그래도 역시 왕답게 쉬크합니다. 점수만 내리는게 아니라 가끔 "수고했다" 라고 덧붙여주기도 하죠.
제목은 '모든 나라 사절이 황제에게 절 드리네[萬國衣冠拜冕旒]'였는데, 11월이었다.
어비(御批)에 "수고했다." 하시고 점수를 내리셨다.
한번은 정약용을 앉혀놓고 담배를 피우는 동안 시를 하나 써내라고 하죠.
정약용이 재빨리 시를 지어서 내자 그 시가 맘에 들었는지 칭찬하면서 점수를 3배로 내립니다..;; (완전..채점을 자기 맘대로..ㅋㅋ)
시를 지어 올리자 어비에 "담배 한 대를 피우는 그 사이에 붓을 잡아 곧장 써냈으니 어찌 뛰어난 재주가 아닌가."
하고 점수를 세 갑절로 내리셨다
[前編纔下 又命進詩 令承旨吸金絲煙一團以爲限 篇旣徹 御批曰 吸竹之頃 操筆立書 豈非奇才 三陪畫]
과거에 합격한 이후에도 정조가 정약용을 가르친걸 보면 바보도 영재가 될수밖에 없을만큼 강한 스파르타식이예요;;
정약용은 규장각초계문신출신인데 정조가 죽고 나서도 초계문신을떠올리면치를떨며비난합니다(ㅋㅋ)
초계문신이란 과거에 합격한 인재들 중 정조가찍은초 엘리트들로 구성된 스터디그룹이랄까요.
왕이 가르치는 만큼 특별 대우를 받아 젊은관료들의선망의대상이기도합니다.
이들은 후에 정조의 정책을 뒷받침하게 되는 핵심 브레인들이기도 해요. 정조는 막 조정에 진출한 재기발랄한 새내기 관료들이
당파에 물들어 여기저기 붙어 세력을 키우기 전에 자신이 스스로 그들의 스승이 되어 왕권을 강화하며 정치틀을 구성할 계획으로
초계문신을 뽑죠. 해마다 누가 초계문신에 뽑히나가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당연히 유생시절부터 정조에게 점찍혀있던
정약용은 첫번째로 뽑혀들어가고 매우 기대와 열의에 차 있는데..
가문의영광같아도 막상 닥치고 보면 끊임없는 시험과 과제로 이어지는 스파르타교육의시작입니다.
정조가얼마나달달달볶아댔으면…공부귀신들린천재정약용도초계문신시절을회상하며 불세출의 저작 '경세유표'에서
‘과거까지붙어관직에오른사람들을다시 끊임없이 시험을보게하고,임금이바로 옆에 붙어서(御前咫尺)
조금만실수하면등에서땀이쫙흐르고(惶懼)어린애같이때리며(童蒙)생도같이(生徒)관리하니 공부 열심히 해서
관료가 된 사람들을 이렇게 대하는 법이 어디있냐!’라고하죠. 한마디로 정조가 규장각에 가둬두고 출석체크도 하고 숙제도 내주고
매주 시험을 봐서 채점도 하고 틀리면 매도 때립니다-.-;;
'언의(言議)를 드려서 정사를 돕더라도 불가할 것은 없는데, 어째서 반드시 수험생신분(擧子)으로 굴복시켜서
그 포부를 시험하는 것인가? 초계해서 거듭 시험보는(課試) 법은 지금부터 혁파하는 것이 마땅하다'
(기껏 열과 성을 다해 가르쳐놨더니 이렇게 써놨죠ㅋㅋ 정조가 경세유표 읽었으면 군신간의 의리고 뭐고 다 깨질듯ㅋㅋ)
정조는 임금이지만 당대의 뛰어난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시절 천재라고 불리우는게 이가환과 정약용이였는데,
정약용은 사실 천재라기보다 정조의 교육 아래 수련된 꼼꼼한 우등생이였고 정조보다 열살이 많았던 남인출신의 이가환은
한번 대충 본것도 절대 잊어버리지 않으며 오랜 시간이 흘러 그 부분을 물어보면 물이 콸콸 흐르듯 주저없이
지식이 흘러나오는 천재중에 천재였다고 합니다. 정약용도 이가환의 재능을 신기해하며 우러러봤지요.
특히 수학과 천문학에는 따를 자가 없었는데 이가환이 죽을때 "내가 죽으면 조선의 수학은 맥이 끊긴다" 라고 했습니다.
겸손을 미덕으로 갖춘 선비가 스스로 그렇게 말할만큼 이가환은 모두가 인정하는 천재였던거죠~
정조는 그런 이가환과 막힘없이 학문을 주고 받을만큼 학식이 뛰어났습니다.
당파라는 것이 원래 기본적으로 학문 즉 사상을 따라 갈리게 됩니다. 학문을 같이 해야 정당도 같아지게 되죠.
뿌리깊은 붕당세력을 해산시키려면 노론의 핵심을 몇몇 제거한다고 영구적으로 해결되는게 아니라는 걸 정조는 알았습니다.
새로운 인재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자기 아래에 당을 만들어 왕권을 높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정조는 초계문신을 뽑아가며 신하들의 스승을 자처한 것이죠. (정약용은 뭐..힘들어 죽겠다고 하지만...)
막상 정약용이 관직에 진출해도 요직에 앉히려고만 하면 노론의 쓸데없는 반발이 거세 정조는 정약용을 높이 쓰기위해
끊임없이 언론플레이를 합니다.
어느날 밤, 정약용이 병조에서 숙직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정조는 승지를 시켜 느닷없이 동이 틀때까지
'칠언배율의 백운시百韻詩'를 지어 올리라고 명령하죠. 글제도 막막하게 '폐하께서는 만세의 수를
누리시고 신은 이천석二千石이 되었습니다' 라고 정해줍니다. 딱 들으면 "그게 뭐지?"싶죠.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가진 범인이라 해도 단 몇시간만에 해결하기 어려운 시제와 분량이기에 정약용에게 어명을
전하는 승지조차 전하께서 무리한것을 요구하신다며 혀를 찹니다.
하지만 정조는 그 과제를 내릴 때 이미 정약용이라면 자기 계획에 맞게 완벽히 시를 써 올릴거라는걸 알고 있었습니다.
한밤중에 엉뚱한 과제를 내려 남들이 할수 없는 일을 해내는 정약용을 모두에게 증명해보이는거죠.
얌전히 숙직 서고 있다가 맞은 급작스런 어명에 정약용은 어안이 벙벙하지만 일단 어명이니 쓰기 시작합니다.-.-;;
(분량이..어마어마해요. 백운이니..)
동이 트고 돈화문이 열리자 입직승지는 정약용이 다 썼을거라는 기대도 없이 병조로 갑니다.
병조 앞에는 새하얗게 질린 정약용이 밤 새 써내려간 백운시를 들고 승지를 기다리고 있었죠. 물론 정조는 잠들지 않고
침전에서 기대에 차 기다리고 있다가 승지가 바치는 시를 얼른 받아봅니다.
시는 정조의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고 정조는 기뻐하며 날이 밝아 대조전에 백관들이 모두 모이자 정약용이 쓴
백운시를 내각학사에게 낭독하라고 시킵니다.
또 직접 비평도 하며 예문각,홍문각, 규장각 대제학들에게 감상문까지 쓰게 하고 (ㅋㅋ) 정약용에게 사슴가죽을 하사하죠.
나이든 대신들 모두가 칭찬할만큼 잘쓰기도 했지만... 정조가 이런 잔꾀를 벌여야 할만큼 노론의 견제가 컸다는 것이죠.
"어젯밤 군호(軍號)의 일로 시험삼아 백운 배율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는데, 그때는 2고(鼓)가 지났고 제목도 분명치 않았다.
승지를 통해 더 자세한 것을 물어왔기에 '인물은 서경(西京) 시대이고 내용은 활쏘기이다.'라고만 적어 주고 그에
관한 고사를 널리 찾아 지어 새벽 대궐문을 열 때까지 그 권축(卷軸)을 바치게 하였다. 대궐문을 열자마자 권 축이
벌써 올라왔는데, 문장이 원만하고 구절이 매끄러운데다 경구도 꽤 많았다. 이서구,한만유같은 이가 지은 '장안 저자의
술집에서 잠들었네[長安市上酒家眠]'라는 제목의 백구 고시같은 것은 기한이 충분했으므로 특별히 말할 것이 없고 황기천이
1경(更) 사이에 지은 백구부는 사람들의 입에 널리 오르내렸으며, 윤행임이 지은 백구 (百句)의 표(表)와 세 편의 책(策)은
더운 여름 한밤중 8각(刻) 동안에 일필휘지함으로써 문원(文院)이 크게 빛났었다. 오늘 이 사람의 작품은 신속한 점은 시부
(詩賦)보다 낫고 법도에 맞는 점은 표책(表策)보다 못하지 않으니, 이같은 사람은 참으로 알찬 재주꾼으로서 보기드문 경우라
하겠다. 제학들은 평론하여 올리도록 하라. 대내에서 대록피 한 벌을 내려주도록 하라."
정조는 자신이 외로운만큼 신하에게는 다정한 왕이였습니다. 서얼출신으로 규장각에서 일했던
이덕무가 죽고나서 이덕무의 아들이 돈이 없어 고인의 유고집을 내지 못하자
왕의 개인돈 내탕금을 건네주며 문집을 낼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아들을 검서관으로 일할수 있게
배려해줍니다. 정약용에게도 쌀쌀한 초봄에 문득 "봄이 춥다" 면서 고운 비단도포를 선물로 줍니다. 1등을 했다고
준것도 아니오 날씨가 춥다고 신하를 챙겨주는 왕의 마음씀씀이가 느껴지죠..
정약용은 하사품이야 많이 받아도 관료 녹봉이 박봉이기도 하고 자기 재산은 잘 안모으면서 남을 많이 도와서 가세가 좋은편이 아니였기때문에
정조가 따뜻한 비단도포를 선물하지 않으면 봄도 춥게 지낼뻔했죠. (또..자기가 비싼 비단도포를 장만할만큼
주변머리도 없었던것 같고..;;;)
여름에는 연꽃 그림이 그려진 부채도 선물로 주는데 정약용은 이 부채가 맘에 꼭 들었는지 지방직에 내려가 있을때도
여름이면 챙겨가지고 다닙니다. 정약용의 글을 보면 참 덤덤하게 부채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부채를 만든 사람은 왕실화사 김홍도다'라고 하는데 그때의 정약용입장에서는 그냥 궁에서 일하는 화가였겠지만
지금 역사에서는 둘 다 대단하지요...;;
정조가 직접 쓰던 책갈피도 너 쓰라고 주는데.. 정식 상으로 내리는 가죽이나 귀한 물건보다 이런게 더 마음이 끌리죠..ㅋㅋ
정약용과 사도세자와의 인연-
정약용과 사도세자의 인연은 정약용이 태어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762년. 정약용의 부친 정재원은 새로 합격한 진사로서 영조 앞에서 <예기>를 강연하게 됩니다.
정재원의 빼어난 학식과 단정한 행동거지는 영조의 호감을 사고, 대과시험에 합격하지도 않았는데
특지벼슬을 내리죠.
그 해의 5월에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혀 죽임을 당하는 조선 최대의 궁중비극이 일어납니다.
세자가 뒤주에 갖혀있는 8일동안 오직 어린 세손만이 아비를 살려달라며 영조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며 빌죠.
사도세자가 죽어갈때 사건의 주도세력들은 한강에서 뱃놀이중이였습니다.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뱃머리에서 듣지요.
차마 눈뜨고 볼수 없는 이 참상을 지켜보던 정재원은 벼슬에 대한 모든 뜻을 버리고 고향 마재로 돌아가기로 결심을
합니다. 집권 노론의 압박속에 임금이 자기 아들을 죽이는 참혹한 사태가 벌어지는 정치판에
남인의 차분한 학자였던 그는 조정벼슬에 나아갈 마음을 완전히 접은것이죠. 궁에 대한 모든 정나미가 떨어진 모양입니다.
오랜 세월후에도 정조가 정약용의 부친을 만나보고 인물됨이 재상감이라고 하며 정식 과거시험을 권유하지만 정재원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대며 거절합니다. 그와 친한 채제공도 몇번이나 설득을 해보지만 절대 넘어오지 않았죠.
그렇게 마재로 내려온지 몇일이 지나지 않아 아들이 태어납니다. 그는 조정의 풍파에 휩쓸리지 않고
고향에서 평화롭게 농사나 지으며 살자는 의미로 태어난 아들의 아명을 '귀농歸農'이라고 짓습니다.
우여곡절끝에 그 아이는 스물두살이 되는 해에 정약용이라는 이름으로 성균관 시험에 합격해 정조를 만나게
되지요.
외척들이 모두 제 아비를 죽여놓고 뱃놀이를 즐기던 모습을 지켜본 어린 세손은 이제 고독하고 강인한 왕이 되어있었고
그 사건을 지켜본 아비가 평온한 인생을 염원하며 지어준 귀농이라는 아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염원과는
반대로 첫 만남부터 정조의 눈에 들어 그의 평생 신하이자 동지가 되어 조정 풍파 한가운데로 얽혀들어가죠.
세손시절의 정조는 과묵한 아이였습니다. 눈 앞에서 본 아버지의 참혹한 죽음이 일찍 철 들고 영민했던 열 한살짜리 아이를 그렇게 만들었죠.
저 아이가 왕이 되면 우린 끝장이야 저 아이를 우리가 먼저 죽여야 해 라고 중얼대는 노론들 사이에서 세손은
최대한 몸가짐을 아끼고 말 수를 줄이며 내면에서 나오는 표정을 없앤 채 살아갑니다. 그 안에 담고 있는 분노와 한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표면적으로 하는 일이라곤 부지런한 성격에 매일 일찍 일어나 학문에 매달리고
무술 연습을 하는등 특별할 것 없이 지내는것 같았습니다.
남이 보기에는 그저 늘 책만 읽고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는 말 없고 얌전한 세손일 뿐이었죠.
영조가 세손에게 승명대리를 선언하자 노론이 난리난리를 피우며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이라는 희안하고
말도 안되는 설을 내세우며 세손은 노론과 소론이 뭔지 정치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없다고 주장할때도 세손은
아무런 내색이 없습니다.
하지만 매일 새벽 화살 50발을 쏘면서 일부러 49발만을 맞추어 완벽에서 오는 자만을 피하던 세손은 그들과 달랐죠.
세손은 속으로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왕이 되자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하며 칼을 빼어들죠.
몇년간 줄초상이 이어졌지만 복수심에 비하면 정조는 결코 서두른게 아닙니다. 가끔은 좋건 싫건 노론쪽의 환심도 사며
유연한 정치를 펼치죠. 그러면서 서서히 척출해내야할 사람은 척출하고, 죽은 사도세자의 추존사업을 시작합니다.
여기서 눈에 띄인게 정약용입니다. 사도세자의 능 이전을 위해 한강에 배다리를 설치한것이 정약용이고 수원 화성을
건설하는 것, 정조의 화성 행차를 보좌하는 것,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존함을 올리는 것 등등. 사도세자와 관련된
모든 일에 정약용의 뛰어난 재능이 빛을 발합니다. 노론은 정조가 사도세자와 관련된 일을 입에 올릴때마다 움찔움찔 하는데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그의 개혁을 돕는데다가 사도세자와 관련된 일에 매번 비상한 재주를 보이는 정약용이 결코 좋게 보일리가 없죠.
노론은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이 천주교신자라는것을 빌미로 정약용가문을 찍어내려 매번 모함을 짜고
상소를 올립니다.
하지만 정조는 무고라고 일축해버리죠. 그런데도 자꾸만 엉뚱한 모함이 들어오니 이제는 아예 상소문을 다 읽기도 전에
화를 버럭 냅니다.
그리고 보란듯이 정약용의 둘째형 약전을 관직에 앉히죠. 약전은 정약용의 형이지만 함께 마음을 다지고 학문을
논하는 정약용 평생의 지기입니다. 형제들중 유난히 두 사람이 친했죠. 약전은 차분하고 단정한 정약용과 다르게
술도 완전 말술에 (ㅋㅋ)체격 좋은 호걸이였습니다. 또 정약용만큼이나 학식이나 문재가 뛰어났죠. 정약용은
약전에게 많은 의지를 했어요.
정조는 아름다운 약용보다 준걸한 약전이 낫다고(뭔 의미야-.-;;)...뭐 한마디로 형이 낫다고 농담을 하는데
진심이라기 보다 그냥 하는 소리죠 ㅋㅋ 그만큼 정약용의 가족을 지켜주려고 했고 아껴준 것입니다.
정사년 가을에 나는 곡산 도호(谷山都護)가 되어 나갔으나, 약전은 여전히 불우하니 상께서 특별히 생각하시어 약전을
친정사관(親政史官)으로 6품에 올려 주시고, 다시 전조(銓曹)에 명하여 약전을 조용(調用)하라 하시니,
약전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상이 연신(筵臣)에게 말씀하기를,
"약전의 준걸한 풍채가 약용의 아름다운 자태보다 낫다."
하시고, 무오년 여름에 약전에게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를 편찬하게 하셨으니 그에 대한 총애가 옅지 않았다.
정조가 죽고 나서 신유사옥이 일어나 형제 모두가 죽고 약전과 약용만이 살아서 각각 흑산도와 강진으로
귀양을 갑니다. 약전은 결국 정약용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귀양지에서 죽고 말아요. 정약용은 너무나 슬퍼하며,
오직 상만이 형의 능력을 알아주셨다며 울어요..
정조와 정약용의 성균관 시절
성균관은 모두 아시다시피 조선 유일의 국립대학이죠. 조선 팔도의 난다 긴다 하는 수재들이 다 모여듭니다..
이곳에서 거의 탑을 달리는게 정약용이구요.. 정조와 정약용의 인연은 시작부터 신기했죠. 성균관 인원수가
백수십명 정도인데 그 많은 유생들중 정약용에게 고개를 들어보라고 한 것도 그렇고... 하필 또 임오년에
태어나서 한번 더 멈칫하게 만들었죠. 거기다 시험에서 매번 좋은 성적을 내고 남인에다가 당파에 휩쓸리는 걸 싫어하는
성격에 시까지 잘 짓는다는 걸 하나씩 알게되자 '조정 대신들보다 더' 총애가 깊어집니다. 성균관이 탄생한 이래로
왕이 유생을 이만큼이나 눈여겨보고 아낀 경우는 없습니다. 왕은 왕이고 학문 장려차 한두차례 성균관에
행차하는 정도였죠. 학자군주 정조와 조선 최고의 천재라는 정약용의 만남이니.. 역사에 이정도 예외(?)는
생겨야겠죠 (ㅋㅋ)
밝은 촛불 삼경 밤에 비단자리 비출 제 (銀燭三更熙綺筵)
유생의 차림새로 어좌 앞에 이르렀다 (儒衣直到御牀前)
진지하신 장려말씀에 밤은 깊어가고 (獎諭溫諄移漏箭)
보배로운 서책 하사 향기를 머금었네 (賜書珍重帶香煙)
독대, 야대는 왕을 홀로 접견하는걸 말합니다.(야대는 밤에 한다고해서 夜對)
성균관은 전원 기숙사제예요. 그리고 모두 푸른색 도포를 입습니다. 정조와 정약용이 야대를 유난히 많이 한건 낮에는
정약용은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고, 정조는 조정에서 집무를 보죠. 그러다보니 직접 성균관에 행차하거나 유생들이
궐안에 들어오는 행사가 있는 날이 아니라면 밤 밖에 만날수가 없었겠죠..
이때는 사관도 나가 있어요. 왕에게 말씀을 올릴때 옆에서 사관이 눈을 번쩍이며 대화내용을 죄다 슥슥 써내려나가는 걸
보면 안그래도 왕 앞이라 긴장되는데 나오려던 말도 들어가죠.
그러다보니 왕에게 은밀히 무언가 고할때 쓰게 되고, 그만큼 까다롭습니다.
한때는 정4품이상만 할수 있었다고 하는데... 궁궐문이 늘 열려있는것도 아니고, 해가 지면 궁궐 출입이 무척 어려워요.
병조에서 철통수비를 하고.. 열고 넘어야할 문도 수도 없이 많죠. 정조는 승지를 시켜 데려오라고 했겠지만
따라가는 정약용은 무척 조심스럽고 긴장이 되겠죠.일개 유생이 왕을 만나는 거니까요.보통 사람이라면
그 위엄에 압도되서 함부로 고개도 못듭니다. 그에게 왕은 하늘이고 궁은 별세계지요.
황혼에 누굴 위해 자물쇠를 열었다던가(黃昏魚鑰爲誰開)
은촛대 금병풍 신발 끌며 종종걸음치네 (銀燭金屛曳履催)
조심스런 긴장과 두근거림이 느껴지죠... 열리고 마는 문, 어전에서 타오르는 은촛대,
뒤에 두른 금빛 병풍. 종종 걸음치며 물러나는 나인들...
정약용이 관직에 나아가서도 야대와 독대는 자주 있는데,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유생시절에는 정약용이 야대를 하건 뭘하건 힘없는 유생일 뿐이니까 노론벽파도 눈길을 안주지만,
관료시절에는 정약용의 존재감이 크기 때문에 대놓고 염탐하려고 애씁니다;; 사관이 기록도 안하니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니까요.
새벽빛은 누각을 재촉하는데 ( 曙色催銀漏)
문창성 자미원에 접근하였네 ( 文星近紫微)
하찮은 문장 기예 부끄러운데 (技慚雕繪小)
조정 관원보다도 은총이 깊어 (恩比搢紳稀)
꽃 버들에 붉은 연 자리 옮기고 (花柳移紅輦)
바람 구름 베옷을 에워쌌다네 (風雲繞白衣)
임금님 음성이 폐부 깊이 감격을 주니 (玉音淪肺腑)
감히 생전에 돌아간단 말을 할 수가 ( 生死敢言歸)
정약용은 나라를 위해 실질적으로 자신이 보탬이 되려면 관직에 나가는 길밖에 없다는 걸 알고
어릴때부터 대과 합격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지만, 가끔은 스스로 관료타입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엔 딱 개혁관료타입인데.. 이분은 평소에 쓴 글은 참 온화한데 조정의 폐단이나 백성들이 나라법으로
고생하는 걸 보면 즉시 정조에게 살벌한 상소를 올립니다.ㅋㅋ 이러저러하니 이게 옳으냐 따지죠;
물론 정조는 정약용의 그런 면을 몹시몹시 아꼈지만..음...그래도 바른말 할때는 몸을 사리지 않고 무서워요..ㅋㅋ)
그런 고뇌는 조정 관직에 나아가서 반대파들의 계속되는 모함을 받으며 더 반복되지만
대과에 합격하기 전에도 잠깐의 망설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던차에 마침 정조가 불러 새벽까지 다정한 격려를 아끼지 않자..
이날부로 마음을 굳히고 관직에 나아갈 결심을 합니다. 정조가 잘 낚은거죠...ㅋㅋ;;
남인 젊은 관료들의 사교모임
정약용이 성균관에서 나와 관직 생활을 하며 산 곳은 명례방이였습니다. 지금의 명동 이지요.
그때도 나름 번화가에 속하고, 궁궐과 가까워서 인지 아침 저녁이면 출퇴근 하는 고관대작들의
말발굽 소리와 가마꾼들 소리로 집 앞 거리가 시끄러웠다고 합니다. 마재의 아름다운 자연에 익숙해있던
정약용은 이렇게 시끄러운 도심 한복판에서 (ㅋㅋ) 시상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을 것 같단 생각에
집 안에 있는 뜨락을 반 쪼개서 아름다운 정원을 만듭니다. 정약용은 대나무와 국화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이 정원을 대나무를 써서 만들고 온갖 국화와 매화,금잔화, 석류,은대화등으로 채웁니다. 그리고 '죽란사' 라는 이름을 붙이죠.
정약용의 집에 놀러왔던 동갑내기 절친한 친구 채홍원이 (채제공의 아들이예요~) 은은한 대나무 정원을 보고
감탄을 하며 좋은 아이디어를 내요. 나이도 같고 친한 채홍원, 정약용, 윤지눌, 이주신, 그리고 정약용의 형 정약전등이 중심이 되어
정기적으로 이 죽란사에 모여 시를 읊고 학문을 논하는 동인을 만들자는 이야기였습니다.
정약용도 좋은 생각이라고 하고 당장 그 근처에 사는 남인 친구들을 모아 '죽란시사' 라는 모임을 만드는데, 그 인원이
15명이나 됬습니다.
정조 재위기에 서울과 인근에 거주하면서 초급관리 시절을 보내던 남인계 청년들의 사교 모임인거죠. (ㅋㅋ)
모두 형제, 사촌간이거나 성균관시절부터 벗이였던 이들이 모였기때문에 '죽란시사'는 조정에 나아가면
겨우 말단직이거나 노론의 눈치를 보며 눌려있는 젊은 남인 관료들에게 문학을 나누기 이전에 숨통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채제공은
"훌륭하다, 이 모임이여! 내가 젊었을 때는 어찌 이런 모임을 생각하지 못했을꼬.
이는 모두 우리 성상께서 수년간 선비들을 기르고 성취시키신 효과이다. 늘 모일 적마다 성상의 은혜을 읊어서
보답할 방법을 생각해야지, 한갓 곤드레만드레하여 떠드는 것만 일삼지 말거라"
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모여서 술만 마시지 말고 잘 하란 말이죠...
하지만 이런 구성의 모임이 대게 그렇듯 채제공의 충고가 허무하게, 모였다 하면 술 마시고 조정 대신들을 안줏거리로 씹습니다 (ㅋㅋ)
똑똑하지만 정권에서 수십년 물러나 몸을 숙이고 있는 남인출신의 젊은 관료들이 모였는데, 이럴때 실컷 술 마시며 노론벽파도 씹고 임금도 씹고 하면서 갑갑한 마음을 푸는거죠.
이렇듯 어두운 상황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남인들은 더 잘 뭉쳤습니다.
노론은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시파와 벽파로 나뉘고 북인은 광해군 때 왕위 계승문제를 놓고 싸우다가 대북과 소북으로 나뉜후
인조반정에 와서야 소멸되었고 소론도 영조때 이인좌의 난으로 소멸되었는데,
그러는동안 남인은 쭈욱 남인이였죠. 바퀴벌레 당파라고도 불립니다.-.-;;
공서파(攻西派)의 등장과 정약용의 관직 생활
이런 남인도 슬슬 내부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공서파(攻西派)의 등장이죠. 서학과 천주교를 공격하는 당파예요.
홍낙안, 목만중, 이기경이 뭉쳐 격렬히 같은 남인들을 모함하고 나섰습니다. 당시 조정의 분위기가 서학과 천주학을
사학으로 보고 배척하는 분위기였고, 이대로 남인으로 영영 말단직이나 하다가 향촌으로 밀려나면
조상 뵐 낯도 없는 상황이였죠. 그래서 이들은 이 기회에 남인들을 제거하고 집권세력에 붙어 중앙관직에
진출하기 위해 노론보다 더 반대파가 되어 열심히 날뛰죠. 남인 내부에서 알아서 설쳐주니 노론벽파는 왠 떡이냐 합니다..
이들은 먼저 정약용을 끌어내릴 계획을 세웁니다. 이기경은 정약용과 성균관 시절도 함께 보낸 친구였는데,
홍낙안의 꾐과 시기심에 눈이 멀어 그런 짓을 저지르죠.
목만중은 60대의 노년이였지만 수십년 관직에 있어도 6품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정약용은 성균관 졸업하자마자
바로 배다리 설계하는 일을 맡았고 규장각 초계문신에도 뽑혀들어가고 한림원에도 선정되 단독 예문관 검열이 되죠.
품계와는 상관없이 개인적인 공도 컸고 단번에 7품벼슬에 오른 경우입니다.
그냥 두면 채제공을 뛰어넘는 남인의 영수가 되어 정조의 개혁을 도우며 중앙정치에서 큰 몫을 할게 눈에 보였죠.
정약용이 예문관 검열에 뽑혔다는 소식을 듣자 이 공서파와 노론벽파는 탄핵상소를 마구 올리며 격식에 맞지 않는다, 부정이다 하며 물의를 일으킵니다.
원래 관직 임용시에 물의가 있으면 물러나는게 관례예요.
정약용은 관직생활 하는 내내 노론벽파와 공서파의 탄핵을 받기 때문에 이로 인해 빚어지는
정조와 정약용의 갈등 (기싸움?;)도 대단합니다-.-;;
정조는 어떻게든 정약용을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하고, 왕권을 어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정약용은 신하가 군주에게 자주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사적 은혜베품의 형식으로
자신을 구제해주는 걸 싫어합니다. 그래서 정조가 (물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그 직함에 있으라고 해도
자기가 은혜입기를 거부하고 관례대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건 결국 왕명을 어기는게 되구요. 정조가 조절을 잘 안해주면 벌을 이중으로 받게 생겼죠.
(둘 다 좋아서 이러는 건 아니지만.. 반대파들이 워낙 드세고 눈을 번뜩이고 있어 적당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이래서 정조는 정약용을 가끔 지방 외직으로 돌려요.. 반대파들에게서 보호해 주는거죠.
사실 정조의 사적감정 없이 오직 실력으로 등용한다 해도 정약용의 빠른 승진이 틀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노론벽파와 공서파들이 조금만 요직 등용의 기미가 보여도 난리를 부리니 정조도 다소 술책을 부릴수밖에 없었죠.
정약용은 왕명이고 뭐고 없습니다...그의 신념은 떳떳함..당당함...)
정조는 물의가 일어났으니 정약용이 분명 관직을 거부하고 물러날 것임을 알고 자신이 명을 내리기 전에는
나가지 말라고 분부하지만, 정약용은 예문관 검열을 사양하는 소장을 써서 올리고 바로 궐 밖으로 나가버립니다.
(일단 물의를 빚은 죄인이니까요;)-.-;;
승정원에서는 왕명이 있었으니 정약용을 붙잡아놨어야 했는데 정약용이 나가버리니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정조에게 물어보죠 (ㅋㅋ)
승정원이 아뢰기를,
"검열 정약용은 사정이 있다 하여 소장을 올리고 곧바로 나갔습니다.'전지(傳旨)가 내리기 전에는 나갈 수 없다.'고
이미 분부를 내리셨는데, 대번에 이처럼 곧바로 나가는 행위를 하였으니 마땅히 엄중히 따져야 할 터인데,
본원에서는 금추를 청하는 외에는 딴 벌을 시행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하여야겠습니까. 이에 감히 여쭙니다."
(왕의 명령은 모두 승정원을 통하고, 탄핵은 사헌부를 통합니다. 이러니 이 두 곳이 바빠지죠--;;)
정조는 소장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일단 데려와 공초를 받으라고 하죠. 그러나 정약용은 궐 안에 들어오지 않아요 다만 궐 밖에서 엎드려있으면서
이런 소장을 또 올릴뿐이죠;
'교지를 받자와 외람하게 공초를 올렸으나 이 역시 스스로의 죄책감 때문에 미처 자세히 사정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은혜로운 용서가 곧 내리시어 전하의 부르심이 여러 번 임하였는데, 한결같이 거역하고 거만하여 더욱
황공하옵니다. 이에 또다시 참람하고 망령되게도 급한 소리로 부르짖으니, 전하께서는 불쌍히 여기소서.
신은 유생으로 있을 때부터 특별히 뛰어난 사랑을 입어서 이리 성장하고 제 몫을 함에 있어 전하의 은혜 아님이 없으며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털끝 하나라도 전하의 혜택 아님이 없으니, 하늘처럼 믿고 부모처럼 의지합니다.
하물며 한림원(예문관)의 직책은 전하를 가까이서 모시니, 세상의 지극한 영광이고 신하로서 지극히 바라는 바입니다.
진실로 일푼의 이성이라도 소유한자라면 누군들 미련을 두어 떠나기 싫어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헌부의 탄핵이 심하고
공론이 속으로 꾸짖고 있으니, 일신(一身)의 염치는 그만둔다하여도 백 년의 이름난 직위야 어찌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신이 처해야 할 도리는 반복하여 생각해 봐도 오직 한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굽어살피시어
신이 띠고 있는 직함을 빨리 삭제하심으로써 기관이 미치는 영향을 중히 하시고, 신의 거만한 죄를 다스려 국법의 기강을 밝히소서.'
이제는 정조도 열받기 시작하죠 (ㅋㅋ) 정약용의 고집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국왕이 계속 불렀는데
신진 말단 신하가 응답을 안하니 처음에 검열직을 사양한 것은 작은 허물이지만 이제는 큰 죄가 되고 말죠.
정조는 정약용이 죄가 있는것이 아니라 죄없는 이를 탄핵하여 물러나게 한 공서파와 노론벽파가 나쁘다는 걸 잘 압니다.
하지만 이대로 놔두면 벽파쪽에서 또 죄인을 덮어둔다고 난리를 부릴테니 아예 확실히 벌을 내리고 뒷 말이 안나오도록
저약용을 해미로 유배를 보내버립니다. (ㅋㅋ)
유배도 여러가지라.. 머리 풀어헤치고 쇠고랑 차고 질질 끌려가는 유배도 있고..말타고 깨끗한 옷 입고 시종까지 거느리고
가는 유배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공서파는 정약용이 유배를 갔다는 파격적인 소식을 듣고 기뻐 날뛰고,
정약용은 바닷바람을 쐬며 오랫만에 지방 산천 구경을 합니다.
마침 해미에 친한 집안 어르신도 있어 찾아뵙고..(뭐냐긔;;ㅋㅋ)
그렇게 해미로 내려가지요.
그리고 공서파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정조가 열흘도 안되서 정약용의 유배를 해지하고 궁으로 소환합니다;;
그냥 휴가 한번 보내준 셈이죠..공서파의 분위기는 찬물 맞듯이 싸해집니다.
정약용은 오는 길에 온양행궁을 지나는데, 이곳은 왕실에서 피부병 치료를 위하여 자주 찾곤 하던 왕실 온천이예요.
마침 사도세자가 그곳에 자주 왔었다는 주민들의 말을 듣고 구경하다가, 잘 관리된 온천에서 유난히 단이 무너지고
휘어진 홰나무를 발견합니다. 연고를 물어보니 사도세자가 생전에 심은 나무인데, 죄인의 나무라 관리를 못받아 온게
지금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죠. 정약용은 무척 안타까워하며 직접 잡초를 다 치우고 관리인을 시켜 앞으로 잘 관리하라고
신신당부를 합니다.
그리고 호기심이 생겨 사도세자에 관한 이야기를 물어봅니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노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사도세자가 무척 늠름하고 훌륭한 분이셨다는 칭찬을 합니다. 세자를 따라온 신하의 말이 인근 농민들의 수박밭에 들어가
수박을 다 망가뜨렸는데, 그것을 곡식으로써 모두 보상해주고 깨진 수박은 갈증에 시달리는 신하들에게
나누어줬다는 말을 하죠. 홰나무도 사도세자가 그 자리에서 활쏘기를 했는데 모두 명중한 것을 기념으로
직접 심었다는 것도 알게되구요.. 여기서 정약용은 사도세자가 정신병이 아니였다고 확신합니다.
(여기서 아마.. 더 정조의 슬픔을 잘 이해하는 부분이 되었을거예요.어쨌든 해미에 다녀오길 잘 했죠.)
그렇게 정약용이 궁에 도착하자마자 예문관 검열에 바로 복귀가 됩니다.
정약용은 그렇게 물의를 빚은 자리인데 돌아오자 마자 다시 예문관 일을 맡을수는 없다고 직분을 거두어줄것을 청해요.
'....성상의 넓으신 도량으로 은총이 더욱 두터워 해미에 잠깐 정배되었으나 유배지에 이르자마자 곧 용서하시니,
유배지에 있은 지가 채 10일이 못 되었고, 갔다 돌아온 길이 모두 1천 리가 넘지 않았습니다. 은혜와 영광이 온 길에 덮였고
기쁜 축하가 집안에 넘치니, 신은 길이 한림원을 사양하고 오로지 규장각의 공부에 전념하여 인재 양성의 혜택을 우러러
받았으면 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검열의 옛 직책이 다시 제수되니, 신은 이 직책에 대하여 장차 어떻게 자처해야하겠습니까.
....만일 신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마침내 한림원의 벼슬자리에 있게 된다면 전하께서는 비록 일시적으로 명령이 시행된 것에
만족하시겠지만, (헐..ㅋㅋㅋ;;;) 염치없는 한 비부(鄙夫)를 전하와 가까운 곳에 들여놓는 결과가 될 것이니,
어찌 이것이 만족하게 여기실 일입니까...'
그러자 정조는 알겠다 하고 정약용을 용양위 부사직 6품 벼슬로 승진시켜버립니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명궁실력을 칭송하는 의미에서 직접 심은 홰나무가 온양행궁에 있고 정약용이 발견하여
관리하도록 지시한 사실까지 귀에 들어가자 크게 기뻐해요. 그동안 정사가 바빠 그런 소소한 것들까지 찾을 생각을
못했던 정조는 생각치 않은 곳에서 아버지의 흔적이 있음에 (그것도 아버지의 똑똑함을 증명해주는 흔적이!) 기쁜거죠..
정조의 지시로 그 나무는 특별 관리에 들어가고 정약용은 또 금이야 옥이야 총애를 받습니다.
공서파와 노론은 정약용이 돌아와 승진했는데 사도세자까지 업고 돌아왔으니 경악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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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정월달이 돌아오면 歲歲靑陽月
임금님의 행차가 화성으로 거둥하시지 鑾輿幸華城
가을이 지난 뒤에 배를 모아서 船從秋後集
눈 내리기 이전에 다리 만드니 橋向雪前成
새 나래 붉은 난간 두 줄로 서고 鳥翼紅欄夾
고기비늘 흰 널판자 가로로 깔려 魚鱗白板橫
선창가의 저 바위 구르지 않아 艙磯石不轉
천년토록 임금의 마음을 알리 千載識宸情
정약용이 노량진에 배다리를 설계한 건 그의 나이 28세때의 일입니다. 배다리를 설치 하는 것은 당시에 매우 큰 국사로,
따로 배다리 설계를 관장하는 관청인 주교사(舟橋司)를 설치해 영의정, 우의정,좌의정까지 모두 책임지고 일에 뛰어들만큼
막중한 일이였죠. 관료들은 각자 머리를 써서 연구한 끝에 주교절목을 만들어 바치지만 정조는 그것을
비효율적에 치밀하지 못하다며 조목 조목 비판합니다. (왕이 웬만한 신하들보다 더 똑똑한 유일한 시대였죠..ㅋㅋ;;)
그리고 직접 주교지남을 써서 그것을 바탕으로 배다리를 설계할것을 지시하죠.
주교지남을 본 정약용은 짧은 기간에 최소의 비용으로 완성할 수 있는 배다리를 설계해 정조에게 바칩니다.
배는 한강을 드나드는 상업선들을 활용하여 새로 배를 만들 필요도 없었고, 동원된 선박에 못을 박지 않고도 안전한 다리가
되도록 독특한 연결방법을 구상해서 빌린 배에 손상이 없도록 했습니다. 물론 배를 빌리는 대신으로 어물의 운송이나
세곡등의 이권을 줬고 안전성과 아름다움까지 추구해 완만한 아치형이 되도록 배치했죠.
이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한강 일대의 지리조건이나 조수간만의 차도 정확히 꿰뚫고 있어야 가능한 설계였습니다.
조선왕조에서 정조 이전에 배다리라는 것을 만들어 본적이 없어 모두 반신반의했고
장엄한 행렬로 수원에 있는 사도세자의 능에 행차하는 모습은 국왕 정조의 이미지와 왕권의 강화에 큰 몫을
하리란 걸 노론대신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반대의견이 빗발치지만 정조는 기술 문화와 국가 위신을
높인다는 명분을 내세워 정약용이 제출한 설계를 그대로 밀어 붙입니다.
정약용은 자신이 가진 모든 기술적 재능을 발휘하여 정조를 보좌하죠.
배다리와 수원성 설계때야 말로 정약용이 지치지 않고 반짝반짝 빛을 내던 시절이 아닌가 싶어요..
(또...정조는 정약용을 임시로 병조참의직에 앉혀 실제로 화성행차에서 행렬을 보좌하게 만듭니다.
ㅋㅋ굳이 비교하자면 지금의 국방부 차관 바로 밑에랑 비슷하다고 할수 있겠네요..
무시무시한 백운시를 지어올리라 명 받은 것도 병조에서 숙직할 때였죠.
병조가 군사적 업무를 담당하기 때문에... 이렇게 몇번 병조에서 일하게 된 경력과 정조가 익혀두
라고 하사한
병법서등으로 정약용은 군사지식에도 상당한 깊이를 갖추게 됩니다. 처음 활을 잡을 때는 서툴고 당황스러워
어쩔줄 몰랐던 정약용이지만 나중에는 무과시험 감독도 맡기도 하구요. 대단한 발전이죠 ㅋㅋ (물론...그냥 감독만
하는거라 개인 역량과는 별로 상관이....ㅋㅋ)
글선생주제에 용감한 군사를 이끌었네(書生領虎賁) 숙직하며 경호할 때 이용할 무기 없어 (未有寸兵資宿衛)
탈 없이 삼경되기만을 남모르게 기원한다( 黙祈無事到三更)
허술하죠..ㅋㅋ뭘 믿고 맡긴건지 ㅋㅋ정조는 엉뚱하게 숙직하다가 백운시 써내라고 하고..정신이 없었을거예요..ㅋㅋ
이런 정약용때문에 상관인 병조참판은 안심할수가 없었는지 교대때에도
몇번이고 자리를 떠나지 않고 왔다갔다 안절부절하면서 주의를 줬다고 합니다. ㅋㅋ
<병조에서 숙직을 교대할때, 당번을 마치는 자가 아직 문지방을 넘어서지 않았을 때에 사변(事變)이 일어나면
당번을 마치는 자가 책임지고, 이미 문지방을 넘어서면 상번하는 자가 책임을 진다.
그러므로 상번자가 궁궐 문에 들어서자마자 당번을 마친 자는 이미 몸을 일으켜 기다린다. 그래서 겨우 얼굴만 대하면
이별하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는다. 그러나 참판 유공은 그렇지 않다. 항상 숙직을 교대할 때는 유공은 자리에 머물러
시간을 보내며 궁중에서 숙직할 때 지켜야 하는 모든 법칙을 전수하며 경계하기를,
"어느 문에는 세 번 가야 하고 어느 문은 다섯 번 가야 한다. 수문장은 잠을 깨워야 하고 성을 순찰하는 병사는 그 수를
점검하여야 한다."하고 또 경계하기를,
"관원들의 공문서를 발급해줄때는 그쪽에서 보낸 아전의 말을 그대로 들어서는 안 되며, 외방(外方)의 역졸은
지금쯤 다 피폐하여 병조에서 한 번이라도 살펴주지 않는다면, 역졸들이 어깨를 쉴 수 없을 것이니, 마땅히 살펴보아야 한다."
하였다. 이렇게 간곡히 말하며 이미 갔다가 다시 돌아오곤 해서, 말의 간절함이 얼굴빛에 나타났다.
공이 홍주 목사로 있을 때 나는 금정 찰방으로 임명되었다. 일찍이 공적인 업무로 편지를 보내어 그와 의논하였으나
공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5~6일이 지난 뒤에 사람을 보내어 재촉하였지만, 또 답이 없었다.
그 뒤 내가 홍주에 이르러 공을 만났을 때 그 까닭을 따졌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임관되어 백성을 다스리면서 일찍이 남의 편지에 답장을 한 적이 없었다."
하였다. 그리고 시중드는 아이에게 상자 하나를 가져 오게 하여 그것을 쏟았는데, 그것은 모두 조정의 재상 및
이웃 고을 군수의 편지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뜯어보지 않은 상태 그대로였다. >
상관도 좀 특이했죠...ㅋㅋ 영의정이 편지 보내도 안 뜯어보는...ㅋㅋ
정약용은 유배지에서의 수많은 저술덕에 실학으로만 많이 소개되었지만 그가 전문적으로 연구한 지식은 당시 조정의
학자들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의학, 율학,법학, 건축학, 기상학, 지리학, 자연과학등 범위가 매우 넓고 다양했습니다..
정조가 죽지 않고 정약용이 재상까지 올라서, 신해통공을 주창한 채제공처럼 현실정치에 반영되는 개혁안들을
아낌없이 내 놓고 추진할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면 그의 무엇보다 빼어난 실학사상이 실제 정치에 반영되어
무수히 빛을 발했을테지만, 정조가 재위하는 기간동안 정약용은 늘 노론벽파에게 탄핵의 대상이 되서 내직과 외직을 오가며
어지러운 관직 생활을 해요.그래서 정조가 살아 있는동안 끝내 오를수 있던 벼슬직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38세에 동부승지를 마지막으로 정조가 급 서거하니까요.
물론 30대 초반에 아무런 정치적 연고없이 정 3품까지 오른 인물이라 당시에 모두 주목하긴 했습니다.
정조는 정약용을 가르켜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인재다.'라고 말하죠.
왕이 의외의 유생의 이름을 자주 말하며 관심을 쏟자 왕을 보좌하는 승지 김상집이 같은 승지이자 정약용과 6촌관계인
홍인호에게 "대체 정약용은 어떤 사람이요?"라고 물을 정도였습니다. 명군의 자질중에 하나가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
이라고 하는데 그런 면에서 정조는 탁월했죠.
정약용이 관직에 나아간지 몇년 되지 않아 부친상을 당하자 정조는 진심으로 안타까워 하며 시묘살이를 하는 정약용에게
장례는 잘 치뤘는지, 별 일은 없는지 자주 안부를 묻곤 했습니다.
그리고 정약용이 조정에 돌아오자 따뜻하게 맞이하며 "그대의 효심을 알게 되어 기쁘고, 오랫만에 벗과 재회하여
기쁘다" 라고 하죠. 그 이후로 정약용의 가족이 끊임없이 공서파에게 천주교 신자라는 모함을 받고,
노론벽파에게도 사사건건 모함을 받지만 정조는 언제나 정약용을 보호해줍니다.
정약용의 형 약전이 작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매번 공서파에게 모함을 당해 정약용이 불안해하자
"네 형은 죄가 없다" 라고 단호하게 말해줄 정도로 정약용의 가족을지켜주지요..
나비야 나비야 너 믿을 것이 뭐가 있니
전갈 이빨 벌 독침이 네겐 본디 없지 않니
부디 그저 꽃 밖에서 훨훨 날아다니고
꽃술을 사모하여 맴돌지를 말아라
정조는 정약용에게 부모이자 스승이자 보호막같은 존재였고 정약용은 마음이 강한 신하였지만 모함과 중상모략이 계속되자
한갖 나비 그림을 보며 이렇게 되뇌일 만큼 그는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비에게는 그렇게 말할지언정 정약용은 정조를 떠나지 못합니다.
언제나 고향으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야 있지만 마음에서 끝나고 말죠.
이렇게 한번 탄핵을 받고 외직을 돌고 난 후 한양으로 돌아와 아직 특정한 업무를 부임 받지 않은 채로
지쳐 쉬고 있는 정약용에게 정조는 모든 배려를 아끼지 않아요.오죽하면 정약용이 '특이하다' 고 할 정도로..ㅋㅋ
땔감까지 챙겨줬다고 하죠 ㅋㅋ; 그런 정약용에게 당시 검서관이였던 유득공이 찾아와 규운옥편의 의례를
함께 상의하라는 왕의 명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건 정조가 정약용이 뛰어난 학자와 교류할 수 있도록
스승으로서 의도한 일이기도 합니다.
<내가 포의(布衣 벼슬이 없는 선비)로 임금님의 지우를 입어, 총애와 격려가 동렬(同列)에서 특이하였다.
그래서 전후에 하사받은 받은 서적ㆍ내구마(內廐馬),가죽 및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 등은 이루 다 적을 수 없을 정도이다.
기밀에 참여하여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적어 올리게 하여 즉석에서 들어주셨다.
늘 규장각에 들어가서 문적을 살피곤 했는데 한번도 일 때문에 독촉을 한 적이 없었다.오히려 매일 저녁 성찬을 보내시어
배불리 먹이기까지 하시고 내부의 비장된 서적을 각감(閣監)을 통하여 언제고 보기를 청하면 허락해 주었으니,
이는 참 드문 대우였다>
여론이 잠잠해지는 틈을 타 정조는 그를 다시 내각으로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맡기는 일은 주로 규영부(규장각) 교서 일 입니다. 말은 교정이지만 이서구, 박제가,이덕무 같은 당파때문에 머리 아플 일 없는
실력있는 북학파 학자들과 교류할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고 정약용이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을수 있도록
각감에게(규장각의 도서와 어진등을 지키는 사람이예요) 그가 비장도서를 보고자 하면 허락하라고 지시해줍니다.
규영부 교서일은 정약용이 딱히 어떤 직함을 달고 하는게 아니라서 규장각에서 노는 백수와 다름없었지요-.-;(물론 그 논다는게
책보고 교정하고 자료찾고 주석달고 책 편찬하고 제목정하고 .. 다 공부이긴 하지만. 정약용이 무척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ㅋㅋ)
규장각은 위치도 좋아서 창덕궁 깊숙한 곳 숲과 연못들에 둘러쌓여 있기에 조정에만 나가면 반대파
무리들에게 달달 시달리던 정약용
에게는 더 없이 고요하고 마음 편한 곳 이였죠.
정약용도 교정일을 하다 문득 문득 생각보다 너무 편하고 즐겁다는 걸 느끼고 모든게 정조의 배려임을 깨달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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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이 나라에 살면서 임금의 문에 들어가 빛나는 임금의 풍채를 가까이할 수 있다면, 비록 물 뿌리고 비질하는 일을
할지라도 영광스러운 것인데, 하물며 내부에 비장되어 있는 책과 군옥(群玉 제왕의 장서고)의 보배로운 문적을 가지고
문필(文筆)에 종사하게 하신 데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또 여기에서 일을 하게 되면 이익이나 봉록이 없다고 해도 영광스럽게 생각할 것인데, 하물며 앞에는 여덟가지의 진미(八珍)를
벌여 놓게 하시고, 뒤에는 다섯가지 도수의 술을(五齊) 갖추어, 옥소반에 진기한 음식을 날마다 내려주심에야.
병진년 겨울에 신(臣) 정약용. 이익진, 박제가가 상의 부름을 받고 규영부에 들어가 <사기(史記)>를 교정하였다. 상께서는
내고(內庫)에 소장되어 있는 '사기'의 여러 본을 모두 꺼내다가 서로 이동(異同)이 있는 곳마다 여러 본에서 가려 뽑아 좋은
것을 취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문(文)으로 말미암아 주(注)를 찾고 주로 말미암아 백가(百家)의 서적을 찾아 하나라도
고증할 것이 있으면 문득 내오기를 청하였다.
이 때문에 내고(內庫)에 비장되어 있는 책을 열에 하나 둘 정도는 넘겨다 볼 수 있었다.
저녁밥이 집에서 오면, 어떤 때는 각감이 들러서 말하기를 '오늘 저녁은 배불리 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날 밤에는 반드시
상께서 진귀한 음식을 하사하셔서 배불리 먹었으니, 그 영광됨이 매우 특별하지 않은가.
아, <사기>를 교정하는 것은 책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내고에 여러 본이 갖추어져 있는데, 무엇 때문에 교정을 하겠는가.
<사기>를 교정하는 것은 나라를 위하는 것도 아니다. 자획(字畫)이나 편방(偏旁 글자의 좌변과 우방)이 설령 잘못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나라에는 아무 해될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교정을 하겠는가.
<사기> 교정하는 것은 신(臣)들을 위한 일이었다.>
첫댓글 정순왕후 이 씨발련 15살때 궁에 들어왔다죠
정조승하후 안동김씨기득권이 천지를 진동하죠...족같은데 역사는 반복되요..배우만 달라질뿐
제가 홍국영 후손이여서 그런건 아니지만 도승지였던 홍국영을 아예 내쳤으면 안되었다고 생각합니다ㅎ
풍산홍씨 ㅎㅎㅎ
아주 길었지만...정말 잼나게 잘 읽었습니다^^
이산과 정약용을 기리고 그리워하는 이여
지나간 역사의 순간들은 다시 오지 않지만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자랑스런 기억으로 빛나리니
길고 긴 이별할 때 새로운 만남을 약속하였다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두분 다 훌륭하시죠. 다만 님은 한글로 댓글을 달고 질문하고계시네요..
잘읽었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이런 글 정말 좋아합니다.
고맙습니다 잘 읽었네요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진짜~잼나게~잘읽었습니다~^^
정조 정약용
오 정조 정약용
좋은글 고맙습니다
스크랩좀 해갈 수 있을까요?
이미 23명 해가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