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날 제법 눈이 내렸고, 다시 오늘 밤부터 많은 눈이 온다는 예보가 있는 날이었다. ‘밤늦게’라는 단어에 무심하게 길을 시작했는데, 가끔 해가 나왔을 뿐 대부분 흐렸고, 간간히 눈이 비쳤다. 평화누리길 9코스 율곡길 시작 파고라 앞에서는 제법 눈처럼 보이기도 했다. 율곡습지공원은 예쁜 조형물 몇 개가 서있었고, 빈들에 얼음이 얼었고, 그 위에서 썰매를 즐기고 있는 개구쟁이들 웃음소리가 빈들을 채우고 있었다. 창동, 상계동에 논이 남아있던 시절 나 역시 같은 놀이를 했던 경험에 웃음소리가 귀에 들어 온 모양이다.
하루에 두 구간을 걷기로 작정하고, 두 번째 구간으로 들어서면서 찬 날씨에 지례 겁을 먹었다. 햇살이라도 있으면 따뜻하다고 억지를 부릴 참이었다. 도로변에 나오자 버스정류장이 나왔다. 일반 시내버스 92번이 휙 지나갔다. 다음 버스를 탈까 싶기도 한 것은 율곡리 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계속 만난 정거장 탓이기도 했다. 3km 가까이 도로를 따라 걸은 길은 횡단보도를 건너며 두포리 쉼터를 만났다. 오늘 처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마음도 바빴지만, 겨울엔 발을 멈추기 어려웠다. 찬 기운이 엉덩이에 닿는 것이 무엇보다 싫었다. 산보다 길을 택한 것은, 어쩌면 중간 중간 마을을 만나고, 도로를 만나면서 자리하고 있을 카페를 감안한 꼼수이기도 했다. 빨리 걷는 대신 따뜻한 차와 공기를 원하기도 한 것인데, 이번 평화누리길에서는 음식점은 즐비했으나, 실내에서 잠시 쉴 공간은 없었다.
포장길이 이미 익숙해져 있지만, 마음속에서는 숲길을 원하고 있었다. 예기치 않게 박석고개 입구라는 이정표와 함께 숲길을 만났다. 낙엽에 두터워 그 밑에 혹시나 얼음이 있을까 발을 조심했지만 역시 발이 편했다. 비록 1km에 불과한 숲길이었지만, 그 사이에 임진강을 내려다보고 숨을 들이킬 수 있었다. 파평면사무소로 가는 길은 다시 산책로였다. 9코스는 점점 길꾼의 희망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고라니 한 마리가 아주 천천히 길을 따라 앞서 걷더니 이내 숲으로 사라졌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 어려운 얘기다. 파평면사무소를 지나 금파리 강변산책로를 거쳐 적벽산책로에 들어서면서 이 길에서 가장 기대했던 구간을 만난 것이다. 임진강 적벽, 광주 무등산을 제외하면 드물게 내륙에서 볼 수 있는 임진강의 주상절리가 붉은색이나 자줏빛으로 보인다고 하여 이름붙이 적벽, 임진강을 따라 282km 지속된다는 안내에 그 기대가 한껏 부풀었던 것이다. 한동안 이런 명소를 찾아다니던 시절에도 임진강 적벽은 만나지 못했으니 이번 평화누리길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2km에 걸쳐 임진강변을 끼고 조성된 산책로에서는 그 적벽을 확인하지 못했다. 아무리 강 건너를 쳐다봐도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아마 그 색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일몰 등 해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해 봤으나, 강 건너에는 그 빛을 흡수, 반사할 만한 암벽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자치단체에서 장마루권역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의 이름을 ‘적벽산책로’라고 명명한 모양이다. 그런데 이 마저 급히 조성한 탓인가? 2009년에 공사를 마친 산책로는 마치 폐허처럼 헝크러져 있었다. 하긴 근처에 큰 마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파트 등 신 주거단지가 조성된 것도 아니고, 넓은 국도에서 차들이 거칠게 달리는 길 옆 산책로에 대한 유입요소가 과연 있었을까 따져봤다. 자전거를 즐기는 분을 두 번 만났으니, 자전거로는 이 길이 매력이 있어 보였다. 산책로가 끝나고 8.9km 지점에서 장파리라는 이정표를 만났고, 굴다리를 지나 다시 빈들에서 9코스의 정확한 반 지점인 빈들을 만났다. 철새들이 가득한 곳, 슬그머니 논둑으로 녀석들에게 다가갔고, 역시나 놈들은 재빨리 비상하기 시작했다.
평화누리길 9코스 율곡길은 정말 길을 찾는 사람들이 원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다. 굳이 따져 들면, 짧은 숲길을 제외하면, 농로마저도 깔끔한 포장길이라, 올레길의 ‘해병대길’ 등 기존의 길이 아닌, 코스를 위해 새롭게 만들어 낸 구간이 있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도 남았지만, 그건 내 욕심에 불과한 것이다. 하긴 9코스까지 걸으면서 평화누리길의 가장 큰 덕목은 어느덧 나 자신이 포장길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며, 잰걸음으로 걷는 것이 몸에 붙어서, 평소 느릿느릿 굼벵이처럼 걷던 도시의 습관도 고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올레길 등 다른 길을 걸었을 때, 구간 순간속도를 한 시간에 4km를 걷기도 했으나, 하루 종일 걸은 30km를 기준으로 하면 쉬는 시간, 점심시간을 포함해서 시간 당 3km이상을 초과하지 못했는데, 평화누리길에서는 구간별로 5km 이상을 걷기도 했고, 하루 걸음이 시간 당 평균 4km내외를 유지하고 있으니, 그만큼 종종걸음을 쳤다는 것인데, 크게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포장길이라고 불평을 하면서도 몸은 또 적음이 되고 있는 모양이다.
다시 말하지만, 율곡길은 다양한 들판과 야산, 마을을 보여주는 길이었다. 코스의 중간 지점인 장좌리 빈들에서 철새들을 만났고, 이어진 들판은 잠시 국도를 만났으나, 그 역시 사람의 흔적이 짙었다. 몇 채의 집들이 멀리 보였고, 묘지들이 야산을 덮고 있기도 했다. 때론 간헐적으로 내리고 있는 눈이 눈으로 들어가며 불편하기도 했으나 장좌리의 벌판과 야산을 즐기는 것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이정표와 살랑거리는 리본에 정이 가고 있는데 평화누리길은 이제 완주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두 번째로 자리에 앉았다. 자장리 쉼터에서다. 사탕 몇 개를 먹고,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서두른 길, 겨울철이라는 핑계로 끊임없이 걷고 있었지만 불편하지 않았다.
길을 걸으며 원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숙소였다. 길이라는 이름을 주고 새롭게 제시된 길은 마을과 마을 등 주민들을 위한 길을 전국, 아니 모든 이에게 확장된 길이다. 올레길이 생기기 전 제주를 가면 가장 불편했던 것이 ‘관광지’라는 이유로 터무니없이 비싼 숙박료, 관광지 근처의 단체손님들을 위한 대형 음식점이다. 특히나 음식점들은 일반음식점에 비해서 비싼 가격표를 책정해 놓고, 여행사들에게는 할인을 해 준다지만, 자유여행자들은 꼼짝없이 메뉴에 표시된 가격을 치러야 했으므로 억울한 측면도 있었다. 올레길의 성공은 길의 아름다움에도 있겠지만, 이러한 관습을 깨 준 것에 있다. 저렴한 게스트하우스가 생겼으며, 일단 관광지가 아닌, 경유하는 마을의 주민들이 이용하는 식당을 올레식당으로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며칠 이상을 걷도록 설계되어 있는 길은, 지역민들만을 위한 길이 아니다.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의 성공 중의 하나는 바로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숙소가 각 구간 시종 근처, 혹은 구간 중간쯤에 예비되어 있는 것이다. 가볍게 산책삼아 한 코스 정도를 걷는 이들도 많겠지만 이렇게 종주를 위해 사람들을 위한 편의시설은 길 설계자의 덕목이어야 한다. 서울에서 살고 있는 나 자신도, 김포나 고양구간은 굳이 현지 숙소를 물색할 필요가 없었지만, 파주나 연천구간에서 슬그머니 며칠을 이어 걷고 싶었던 것은, 각 코스의 접근을 위해서 편도 2시간 반, 환승시간이 안 맞으면 3시간 이상 걸리는 불편함에 있었다. 적어도 접근한 시간보다는 오래 걸어야겠다는 욕심이 때론 하루 2코스를 걸을 수밖에 없는 핑계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각 지방자치단체 혹은 기관에서 조성하고 있는 길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이 바로 숙소다. 최근에 9박 10일 동안 평화누리길을 완주하신 분이 있다. 그 분은 동두천 등 가까운 곳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그 다음 날 코스로 돌아가는 것을 반복하셨다고 했다. 만일 코스에 숙소가 있었다면 그 분은 길에 대한 애정이 더 생기지 않았을까? 물론, 갑자기 어쩌다 들리는 길꾼을 위해 마을에 일반 숙소를 운영하는 것은 어렵다. 강원도 바우길처럼 운영단체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도 두 곳 밖에 없다. 다행히 만들어지고 있는 길은 대부분 소위 시골을 지난다. 마을엔 노인정이나 마을회관이 있다. 그 곳을 숙소로 개방하면 어떨까? 물론 그럼 식사도 문제가 된다. 일몰시간 전에 도착하거나 예약을 통해 잠자리를 제공하고 주민들 집 중 하나에서 식사를 제공하는 시스템은 어떨까? 일본 시코쿠순례길처럼 지역민의 무료제공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이건 길꾼의 바램일 뿐이지 이런 번거로움을 굳이 주민들이 할 이유는 사실 없을 수도 있으니 그 대신 마을에 대한 지원, 최소한 숙소를 운영하고, 식사를 제공하는 사례에 대한 지원제도를 만들어 내면 다소 개선되지 않을까? 그것이 지역의 작은 마을을 전국에 소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혹시 이런 계기로 마을이 활성화 될 수 있으면 또 다른 명소로 길과 더불어 마을도 명소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평화누리길을 시작하면서 길 중간에 게스트하우스가 두 곳이 있다고 알았고, 그 사이에 한 곳이 추가 오픈했다는 소문도 들었다. 2코스를 지나면서 한 곳을 보았으나, 연락처도 적어있지 않은 마을회관이었다. 자장리를 지나면서 한 곳을 만났으나 이 역시 굳게 문이 닫혀 있었다. 당연히 연락처도 없었다. 하긴 이곳에서 신세를 질 수도 없을 것이다. 별도의 친절함이 없으면 꼼짝없이 굶게 생겼다. 글쎄다 평화누리길을 다시 걷는 것이 시간이 걸릴터이니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다독거리며 그 집 앞을 지났을 뿐이다.
자장리를 벗어나 숲길, 그리고 넓은 도로로 잠깐 나왔던 길은 다행히 다시 길섶으로 숨어 들었다. 황포돛배나루가 내려다보이면서 파르초처럼 장식된 공간을 만났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악한 나무에 매달린 평화누리길 리본들은 의도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했다. 황포돛배나루에 내려오니, 이곳엔 친절하게 코스가 2km 늘어나면서 원래 있었던 파고라를 다음의 장소에 옮겼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이런 친절을 원했던 것이다. 음. 이정표를 모두 수정해야 함에 불구하고 율곡길을 연장한 것은 혹시 버스 정류장 때문인가? 어차피 버스를 타기위해서는 기존의 10코스로 진입했야 했다. 도로로 나오자 두지리 매운탕 골목이 건너보였다. 연천에 왔으니 민물매운탕 한 그릇을 먹어야겠다지만, 적성버스터미널 근처에도 있지 않을까 예단을 했다. 장남교를 건너면서 눈발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밤늦게 온다는 눈이 서둘러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장남교를 지나자 삼거리 건너 버스정류장이 보였다. 그리고 잠시 더 걸어가자 9코스 끝, 아니 10코스 고랑포길의 파고라가 보였다. 이렇게 평화누리길 9코스 율곡길도 끝낸 것이다
여담이지만, 길은 걷는 이가 원하는 것이 더 있다. 버스정류장엔 버스번호와 시간표가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 하루 몇 차례 없는 마을버스를 무턱대고 기다릴 수는 없다. 그리고 이왕이면 올레길처럼 지역 콜택시 전화번호도 안내했으면 더 좋지 않을까? 또 있다. 파고라는 지붕이 필요하다. 오늘처럼 눈이 오는 날, 스탬프 도장을 찍기 위해서는 막힌 천정이 필요했다.
하여간에 거세게 내리는 눈을 꼼짝없이 맞으며 콜택시를 검색했고, 적성에서 5분이면 온다는 반가운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적성터미널에 도착하니 미터기를 꺾지 않은 요금은 6천원이었고, 콜비 천원이 추가되었다. 아침에 문산역에서 반구정까지 훨씬 먼 거리를 4,900원에 간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이 짧은 거리를 7천원을 낸 것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백두대간의 구간을 잇는 택시비도 미터요금이다. 숱한 산을 다니며 날머리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곳까지 지역택시를 이용하는 경우가 잦았으나, 요사이는 대부분 미터요금에 익숙했는데, 추억의 저 편에 밀려나 있었던 요금체계를 만나면서, 다음 코스는 반드시 시간을 맞추어 적성터미널로 와야겠다고 마지막 심통을 부렸다.
햐, 코스를 2km 연장하기 위해 전부 교체했을 이정표. 그 중 하나가 실수를 했다.
장좌리로 표시되어 있는 이 이정표를 확대해서 보면,
율곡습지공원 10,9km, 장남교(원당리) 10.1km 합치면 21km가 된다.
율곡길은 19km다. 고쳐주세요. 또 돈 들겠지만.
9코스를 끝내고 다시 장남교로 되돌아와 버스정류장에서 적성 콜택시를 불렸다.
다시 말하지만, 적성터미널까지 5분거리를 미터기 꺾지 않은 요금은 6천원이었고,
콜비 천원이 추가되었다. 적성콜택시 031 959 0600
전 날, 경기도교통정보센터에서 한 시간이상 걸려 알아 온 마을버스정보도 이상했고,
공지되어 있는 마을버스 회사 전화번호도 가정집이었다.
음 참고로 적성터미널 건너편에서 장남교로 오려면 92면 원당리 방향을 타면 되는데
시간은 아침 7시 20분, 8시 35분, 11시, 14시 10분 등이다.
나는 이제부터 문산이 아니라 양주 등 1호선 전철역으로 간다. 훨씬 빠르거든.
적성에서 의정부가 종점인 25번 버스는 25번 버스는 평일은 15-20분, 주말엔 25-35분 간격이며
적성터미널 기준 막차는 22시 45분이다. 양주역까지는 한시간이 안 걸렸다.
http://blog.naver.com/return0724/220919707040
|
첫댓글 긴구간 걸으시며 많은 생각을 하셨군요.
추운 날씨에 수고 하셨습니다.
2016년 3월엔 적성에서 택시비 4,000원 주고 갔었는데 ㅠㅠㅠ
남은 구간도 무사히 완주하시길 응원 합니다.
와~~길도 길이지만 이렇게 현장감 나는 여행기^^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가족분들과 행복한 설명절
즐거히 잘 지내시고.
늘 건강하시기을 바람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