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에 대한 구전은 다솔사(서기 504년 영악스님이 창건)의 작설차의 풍미가 하동 화개차보다도 구례 화엄사보다도 낫다는 말이 있으며, 심지어 그것을 실험까지 했다는 기록은 차를 달여 본 결과 화엄사 소산차는 그 살점이 단단하고 화개소산 차는 약간 부드러우며 다솔사의 차는 물이 흐려질 정도였다고 전한다. 한국의 다도 서문에서 발췌
원효는 차의 성질을 말하기를 ‘雖無功能應機 說話猶如天鼓“라고 했는데 애써 풀이한다면 ”비록 평상시에는 능히 공이 없어 보이나 그때에 따라서 말문이 터지면 하늘에 북을 치는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이 또한 차는 물과 불이라는 상대적인 성질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곧 차라는 것도 인간이 차례를 통하여 행여 산사람의 지극정성이 태어남과 죽음의 양면성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을까 싶다.
한민족의 차생활에 대해서는 구전에 언급했듯이 신라시대에 이미 차에 대한 맛과 달이는 맛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 해주는 것이 <삼국사기>에 기록에 의하면 선덕여왕때 시작되어 흥덕왕 2년조에는 入唐廻使인 金大廉이 차나무 종자를 가지고 오자 그 차씨를 지리산 남녁에 심게 하였다. 이곳이 오늘날 지리산 화개동이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은 아호를 다산이라 차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으리라 여겨진다. 그의 차에 대한 한마디는 “차를 마시는 민족은 흥하고 차를 모르는 민족은 쇠한다” 라고 예견하고 있다. 그러나 차에 대한 처음 시배지는 화개사 부근이 아니라 구례 화엄사 부근이라고 전하나 중요한 것은 화개사나 화엄사나 이웃한 쌍계사나 모두 차가 발육하기에는 더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에는 이설이 없다.
다시 <삼국사기> 흥덕왕 3년조에는 차 생활이 성행했던 흔적을 볼수 있는데 경덕왕이 연승 충담사를 궁중에 맞아서 차를 마신 기록과 이 기록 가운데 충담사가 앵통을 졌는데 그 안에 차구가 구비되어 여기저기서 차를 끓여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공양했다. 그런데 다시 왕의 청에 따라 한사발의 헌다례에 왕과 사신 일행은 차의 기미가 신기하여 입안에 향기가 가득찼다고 말하고 있다.
고려 중엽에는 문인인 가정 이곡의 기행문인 <동류기>에서 그가 사선들의 차구가 동해의 갯마을에 실물 그대로 보존되어 있음을 목격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고려 대유학자이신 이규보가 전라도 부안, 변산에 있는 원효방을 심방하여 원효와 사복간에 차 생활에 관해 흥미있는 얘기를 전한바 있다. 아울러 진감국사의 비문에서도 차생활에 대한 기록이 있다. 또한 화랑들의 차 생활을 참고하여 볼 때 차생활과 신라 호국불교와의 연관성도 배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茶聖이라 일컬는 초의선사는 지리산 화개동에서 이름난 죽로차에 대해서 천하에 제일가는 차라고 칭찬하고 있다. 차는 돌자갈에서 자라는 것이 상품인데 화개동이 바로 그런 토양이라고 말했다. 추사도 화개동의 죽로차는 중국의 용정차나 두강차보다도 질이 나으며 인도의 유마거사의 주방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명차는 명기에 담겨져 있어야 천하 최고의 맛을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차완이라면 바로 고려 차완의 진면목이아직도 심해에 살아 있지 아니하던가?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는 팔관회나 국가 제의시에 고대의 습관과 통행하여 제주나 차가 반드시 사용되었고, 그 중에서도 차를 더 중요시 했음을 문헌적으로 살펴 보았다. 이러한 좋은 차례의 풍습도 시기를 잘못 만나면 형식화 되고 도식화 되어 그 본래의 의미를 망각하는 세태로 돌변하게 된다.
또한 고려말 포은 정몽주는 시에서 보국에 공효없는 늙은 서생이 차마시는 버릇되어 세정을 모른다. 눈보라 치는 밤 고요한 집에 홀로이 누웠으니 돌차솥 물끓는 소리 정답게 들리는 도다 라도 자신의 처지를 술회하고 있다.
그리고 차와 떨어질 수 없는 물에 대해서는 고려말 이행이 성석인을 만난 대화에서 볼 수 있는데 충주 원주가 제일이고 한강중의 우중수가 다음이고 속리산 삼타수가 말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차인들은 물맛에 이르기까지 생활화했으며 그들의 차생활의 경지를 이루었음을 알 수가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여기서 민희 종친님과 쟁하는 차례에 대해서 조선시대에는 궁중에서나 민가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가운데 서산대사는 차생활 분만 아니라 차시에서도 “ 만국의 도성은 개미집과 같고 천가 호걸들은 하루살이와 같구나. 밝은 달 흰 구름을 벗한 자리에 차솥 물끓는 소리만 하염없이 들리네” 라고 읊고 있다.
다음은 차에 대한 글자의 해석보다는 차례에 대한 것을 언급할까 한다. 차례란 차를 마실 때 예의 범절 즉 차례에 행하는 예를 말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만 차례라는 말을 쓰고 있다. 물론 술이 좨주로 쓰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술보다는 차를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는 성현의 <용재총화>에서 그 문맥을 볼 수 있는데 “祭奠諸果餐餠茶湯與酒”라 했다. 곧 “제사에는 여러 가지 과일과 인절미와 차와 탕과 술을 쓴다”라는 말이다. 이렇게 중요시 했던 차례가 지금은 숭늉과 찬물로서 대체하고 있으니 차례의 진정한 의미가 퇴색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재례에서 뿐만 아니라 혼례에서도 두 번의 차례를 행한다. 한번은 남혼여취의 납폐를 행할 무렵에 양가 부형들은 차로써 예를 행하고, 그 다음은 혼약이 결정되어 봉차라고 하여 차를 봉해 옴으로서 그 굳은 언약을 표했다. 그리고 결혼례를 치른 다음 신부가 시가에 들러서 처음 선영이나 사당을 배알할 때 반드시 차례를 행했다. 이렇듯이 차례를 중히 여겼던 이유는 차나무의 습성은 본디 옮겨 심으면 잘 살아가지 못하는 습성을 가진다고 한다. 그러하듯이 시가에서 정절을 지키고 찻닢처럼 싱그럽게 잘 자라는 주술적이 의미도 느껴볼 수가 있다.
차는 “茶”에서 음운이 변해 지금의 우리말로 굳어 졌고, 지금의 중국인들 또한 茶/cha 로 발음하여 쓰는 말이다. 일본 또한 차에다가 접두어를 써서 오차라고 불리워 진다. 이를 종합하면 “차”를 말하는 “茶”와 “다”를 말하는 “차”는 음운의 차이에서 발생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아직도 찻집, 차례, 찻종, 명차 등등으로 “다”가 아닌 “차”로 널리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말과 글은 끈질긴 민족성과 함께 영속성을 갖고 있음을 여실히 나타내어 주는 글자이다.
그 외 차에 대한 글은 밤이 짧아서 다 언급할 수가 없다. 특히 원전에 대한 참고문헌이나 한자변환은 굳이 번거롭고 필요치 않아 많은 부분을 올리지 못함을 양해 바랍니다. 지금 시간이 닭이 우는 시간이다. 아쉽지만 다시 시간이 나면 더 보충하기로 하고 여기서 끝을 맺을까 한다.
첫댓글 좋은 자료입니다. 수고 했네요. 내용은 좀 틀리지만 인터넷 검색을 하면 좋은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