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번역서 > 제가역상집 > 제가역상집 제4권 > 귀루〔晷漏〕 > 최종정보제가역상집 제4권 / 귀루〔晷漏〕《수서(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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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고영요(考靈曜)》ㆍ《주비산경(周髀算經)》ㆍ장형(張衡)의 《영헌(靈憲)》과 정현(鄭玄)이 《주관(周官 주례(周禮))》에 붙인 주(注)를 살펴보면, 모두 이르기를, “해가 땅에서 그림자가 지는 것은 1천 리마다 1촌씩 차이가 난다.”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남조 송(宋)나라 원가(元嘉) 19년(442) 임오에 사신을 교주(交州)에 보내서 그림자를 측정하였는데, 하지에 해의 그림자는 규표의 남쪽 3촌 3분에서 나왔다. 하승천(何承天)은 멀리 양성(陽城)에서 관측하고, ‘하지에는 1척 5촌이라’고 하였다. 양성은 교주에서의 거리를 따져 보면 1만 리나 되는 거리이지만, 그림자의 실제 차이는 1척 8촌 2분인데, 이는 6백 리마다 1촌씩 차이가 난 셈이다. 또 양(梁)나라 대동(大同 양나라 무제(武帝)의 연호, 535~546) 연간에 이지(二至)에 측정한 것은 8척의 의표(儀表)를 이용하여 비율로 구하였는데, 하지에는 1척 1촌 7분 강(強)에 해당되었다.
후위(後魏)의 신도방(信都芳)은 《주비사술(周髀四術)》에 주(注)를 달아 이르기를, ‘영평(永平 북위(北魏) 선무제(宣武帝)의 연호, 508~512) 원년(508) 무자는 양(梁)나라의 천감(天監) 7년에 해당되는데, 낙양(洛陽)에서 그림자를 측정하는 것을 보았으며, 또 공손숭(公孫崇)이 조정의 여러 인사들을 모아 놓고 함께 비서성(秘書省)에서 그림자를 관측하는 것을 보았다.’라고 하였다. 똑같은 하지의 해로 그 그림자의 평균 값은 모두 길이가 1척 5촌 8분이다. 여기에 따라 추산하면, 금릉(金陵 중국 남경(南京)의 옛 이름)은 낙양에서 남북으로 약 1천 리 떨어졌기 때문에 그림자는 4촌이 차이가 나므로, 2백 50리마다 그림자는 1도〔寸〕씩 차이가 나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이 다니는 길은 구불구불하고, 산과 내가 오르락내리락하여, 새가 날아다니는 길에 견주면 훨씬 멀어서, 천 리라고 말한 것은 근거로 삼기에는 부족하다.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0년 갑인 > 9월 15일 > 최종정보
영조 10년 갑인(1734) 9월 15일(정해) 맑음
10-09-15[24] 장릉에 전알할 때 약방 도제조 김흥경 등이 입시하여 능상을 봉심하고, 초헌례 등을 행하고, 김포 행궁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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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화문(敦化門)을 나와 여(輿)에서 내려 가교(駕轎)를 탔다
……………..
김흥경이 아뢰기를,
“20년 전에 영릉을 한 차례 봉심하였는데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만, 행룡의 형세와 도국의 관쇄(關鎖)는 비슷합니다. 여기는 옛날 고을 터입니다.”
하고, 황호원이 아뢰기를,
“금릉(金陵 김포(金浦))의 옛터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물이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중국의 금릉(金陵)에 빗대어 불렀다. 읍호는 본래 이와 같다.”
.............
이덕수가 아뢰기를,
“만일 온당하지 못하였다면 신들이 어찌 제진(製進)한 사람과 상의해서 고치지 않았겠습니까. 신이 송도(松都)에서 근무할 때에 살펴보니, 고려 태조의 능은 석인이 없이 단갈(短碣)만 있을 정도로 검소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뒤 공민왕의 능은 진 시황(秦始皇)보다도 사치하였으나 지금은 자취가 사라져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제왕(帝王)이 사치하고 검소하는 데에 경계가 됩니다.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 숙종실록 > 숙종 33년 정해 > 8월 19일 > 최종정보숙종 33년 정해(1707) 8월 19일(무술)33-08-19[01] 박의량의 국문과 국경 개방하여 채삼을 허가하라는 문제 등을 대신들이 건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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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여러 재신(宰臣)들과 함께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인견하였다. 최석정이 나아가 말하기를,
“위장소(衛將所) 서원(書員) 박의량(朴義良)이 사죄(死罪)를 범하여 포도청(捕盜廳)에서 형신을 당하자 갑자기 흉언(凶言)을 발하였는데, 거짓이던 사실이던간에 의금부(義禁府)로 옮겨서 국문(鞫問)할 것을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인엽(李寅燁)이 말하기를,
“조령(鳥嶺)을 방수(防守)하는 일은 일찍이 정해진 의논이 있었습니다. 사찰(寺刹)을 세우고 관문(關門)을 설치하는 일을 청컨대 미리 분부(分付)하소서.”
하고, 최석정이 계속해서 말하였다. 전에는 왜인(倭人)의 관백(關白) 및 대마 도주(對馬島主)에게 우리가 문위(問慰)할 일이 있으면 한 가지 글로 문위하고 일찍이 별폭(別幅)으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사이 와서 왜인들이 ‘관백은 임금이고 도주는 신하이니, 한 가지 글로 같이 답할 수는 없다.’고 하며 양도(兩度)로 나눌 것을 힘써 청하였으나, 조정(朝廷)에서 전의 규례가 이와 같지 않다고 하여여 허락하지 않으니, 왜인들이 내관(萊館)에 머물러 있으면서 반년 동안 떠나지 않으므로, 최석정과 이인엽이 고쳐서 줄 것을 청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윤세기(尹世紀)가 청하기를,
“강계(江界)에다 우리 국경을 열어 채삼(採蔘)을 허락하고, 또한 장사꾼들이 매매하는 것을 허락하되, 산원(算員)을 정해 보내어 세금을 거두는 것을 동래부[萊府]의 예와 같이 하소서.”
하니, 최석정도 또한 좋다고 하였다. 가가도(可佳島)는 호남(湖南)의 바다 가운데 있다. 처음에 이 섬이 적로(賊路)의 첫길이 된다고 하여 거주하는 백성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비워두었는데, 근래에 와서 유민(流民)들이 다시 모여들므로 조정에서 장차 다시 몰아내려고 하였다. 윤세기가 몰아내지 말고 그대로 훈국(訓局)에 소속시켜 군향(軍餉)에 보탤 것을 청하니, 아울러 따랐다. 이 섬과 홍어도(紅魚島)는 모두 나주(羅州)의 소관(所管)인데, 홍어도는 더욱 아득히 멀리 있어 남경(南京)과의 거리가 자못 가깝다고 한다. 사간(司諫) 윤행교(尹行敎)는 김창규(金昌奎)가 달아났다고 하여 의주(義州)의 감수인(監囚人)을 아울러 경옥(京獄)에 잡아다가 효시(梟示)의 율(律)을 베풀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김창규를 효시하라는 명이 내려진 뒤에 형조에서 즉시 거행하지 아니하고, 혹은 개시(開市)를 늦추어 기다린다는 설로 따로 의견을 내어 관문(關文) 발송을 지체시켰으니, 형조의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을 청컨대 아울러 파직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선부(李善簿) 【형조 참의(刑曹參議).】 가 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효시하려고 한 것은 대개 그 정상을 절통(絶痛)하게 여긴 데서 나온 것이다. 왕복하는 즈음에 저절로 지연하게 된 것이니, 이로써 파직한다면 지나친 일이다. 낭청은 파직하라.”
하였다.
【원전】 40 집 268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사법-치안(治安)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농업-특용작물(特用作物) / 무역(貿易) / 호구-이동(移動)
[주-D001] 내관(萊館) :
고전번역서 > 성재집 > 성재집 제36권 > 강설잡고〔講說雜稿〕 > 최종정보성재집 제36권 / 강설잡고〔講說雜稿〕연거만지〔燕居謾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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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을 읽는 사람은 먼저 지리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천하의 산천과 주현(州縣)의 대체를 훑어본 후에 역사책을 읽어야, 역대 제왕의 흥망, 천도(遷都), 분리와 합병, 치우침과 온전함 등을 안다. 이것은 바둑을 관전하는 사람이 먼저 바둑판이 19줄임을 알고 나서야, 사람이 바둑돌을 놓음을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천하의 형세는 서북이 높고 동남이 낮다. 그러므로 역대의 융성한 나라의 땅은 모두 서북에 있었다. - 오직 명나라 초에만 잠깐 금릉〔南京〕에 도읍했다. - 그러다가 쇠퇴하면 혹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거나, 혹 북쪽에서 남쪽으로 갔다. 일단 내려가면 다시 떨치지 못했다. 아마 왕의 교화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기가 쉬우나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기가 어려운 것, 즉 순역(順逆)의 형세가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천도(天道)는 왼쪽으로 돈다. 그러므로 지도(地道)가 오른쪽으로 돌아 서로 어른다. 중국의 산천에 기운〔風氣〕이 모이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그러나 황하가 용문(龍門)에서부터 기주(冀州)를 돌아 지나서 갈석(碣石)에서 바다로 들어가 마치 둥근 옷깃처럼 꽉 오므렸고, 장강과 한수(漢水)가 또 굽은 활처럼 그 밖을 지나간다. 그러므로 기운의 모임이 하내(河內)에 가장 많고, 하외(河外)가 그 다음이다. 그리고 낙예(洛汭) - 낙양(洛陽)- 가 낙표(洛表) - 변(汴) -에 비하여 많은 것은 그것이 황하와 낙수(洛水)가 만나는 중간에 있기 때문이다. 장강과 한수의 밖은 또 낙표에 못 미친다. 그러므로 금릉(金陵 남경)과 전당(錢塘 항주)의 경치가 비록 아름다워도 기운은 가장 적다. 지금 황하의 하구가 옛날에 비하여 천여 리 남쪽으로 물러났는데, 이것 또한 천지의 큰 기운〔氣數〕이 쇠퇴하는 증거다.
기주(冀州)가 땅이 척박하고 물산이 부족하지만 성인을 가장 많이 낳은 것은 청명한 기운이 상승했기 때문이고, 강남이 땅이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지만 총명한 사람을 오히려 적게 낳은 것은 살과 비계가 아래로 모였기 때문이다.
지구 전체로 말하면, 중국은 앞면의 위쪽에 가까운 곳, 즉 위로 북극까지 55도 떨어지고 아래로 적도까지 36도 떨어진 지점에 있다. 이것은 마치 사람에게 얼굴이 있는 것과 같다. 전에 청나라 신하 이광지(李光地)가 ‘중국에 정한 곳〔定處〕이 없다.’라는 서양인의 설 때문에 여러 번 곤욕을 당했다. 서양인이 중국을 계란에 비유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계란이 비록 둥글지만 그 속에는 장래의 머리, 날개, 등, 배가 될 일정한 위치가 있으니, 어찌 모호하게 앞뒤가 없겠는가? 게다가 중국의 지형이 어떠한지도 논하지 않았다. 만물은 심장을 중심으로 삼는다. 따라서 세상에 처음 성인을 낳은 곳이 바로 세상의 심장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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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蠻夷〕가 중국을 침략하는 것을 요순 때부터 이미 그 싹을 잘랐다. 공자가 《춘추(春秋)》를 지을 때에 이르면 화가 눈앞에 닥치는 우환이 있었다. 진(晉)에 이르러 오호(五胡)가 중국을 어지럽혔으나 세력이 강하여 막지 못했다. 다만 그들이 황제의 자리〔大統〕를 범하지 못했을 뿐이다. 원(元)에 이르러 비로소 대통을 범했는데, 천지의 큰 변고〔大變〕다. 그러나 원은 중국을 신하로 삼았으면서도 머리를 깎도록〔剃髮〕 한 적은 없었다. 청(淸)에 이르러 비로소 체발했으니, 더 이상 할 짓이 없게 되었다. 아! 비참하다. 그때 우리나라는 해외의 변방으로서 홀로 한 줄기 양기(陽氣)를 보존했는데, 그것은 하늘의 뜻이다. 우리나라는 은사(殷師 은나라 태사 기자)가 동쪽으로 오고부터 하늘이 소중하게 돌보게 되었는데, 홍무(洪武) 연호를 세우고부터(명(明)의 건국) 하늘이 우리 태조와 포은(圃隱) 선생을 낳아 의리를 바로잡고 윤리를 밝혀 마침내 황명(皇明)이 내복(內服)과 동일시하는 나라가 되었다. 만력(萬曆) 연간에 이르러 또 ‘재조지은(再造之恩)’으로 굳게 결합된 후에 대변(大變)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백성은 모두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의 생각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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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청나라 사람〔北人〕과 서로 접촉할 때, 그들을 추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중국 땅의 옛사람〔漢人〕들에 대하여도 한결같이 그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들은 지난 날 갓을 쓰고 경전을 공부하던 종족이다. 오랑캐 옷을 입고〔左衽〕 오랑캐 말을 하는 것이 어찌 그들 개인의 죄이겠는가? 성인이 상복 입은 사람을 보면 반드시 얼굴색이 바뀐 것은 그가 부모〔所天〕를 잃었기 때문이고, 장님을 보면 반드시 얼굴색이 바뀐 것은 해와 달의 밝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진실로 어진 마음〔仁心〕을 가진 사람은 이들에 대하여 측은한 마음을 가져야 또한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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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의리는 지극히 공정하여 내가 사사로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로부터 발동되었으면 내가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발동되었으면 내가 그 사람을 따른다. 지금 중국에서 비록 운남(雲南)과 사천(四川) 사람이라도 진실로 천지를 위하여 결심하고 천하에 대의를 창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나라 사람들도 가서 그들을 따라야 마땅하지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롭거나 인색한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오계(五季)에 혼란이 극에 달하자, 후당(後唐)의 명종(明宗)이 향을 피우고 ‘빨리 성인을 낳아 백성의 주인이 되게 해 주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늘에 빌었다. 그때 송(宋) 태조(太祖)가 태어났다. 이 대목이 깊이 음미하기에 가장 좋다. 인심(人心)이 발동하는 곳이 바로 천지지심(天地之心)이 발동하는 곳이다.
청(淸)이 순치(順治, 1644~1661)와 강희(康熙, 1662~1722) 이래 대대로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 마음이 있고 그 제도가 또 아주 실용적이고 치밀하여, 중국인이 목숨을 보전하여 이백 년간 무사할 수 있었다. 또 문헌을 해독하고 아낄 줄 알아 묻거나 태우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순결을 지키는 데 뜻이 있는 학자가 선왕의 전적을 지킴으로써 천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릴 수 있었으니, 이것 또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가운데 크게 우려할 만한 것이 있다. 원(元)이 천하를 지배할 때 잔인하고 혹독하게 정치를 하고 그 기간이 또 오래지 않았기 때문에, 명(明) 태조가 하루아침에 대의를 창도하자 천하에 천둥처럼 움직여 바람처럼 따르는 기세가 있어 힘들이지 않고 큰 공을 이루었다. 지금은 백성이 혜택에 깊이 젖고 그 기간이 또 오래되었다.
조선왕조실록 > 태종실록 > 태종 17년 정유 > 윤 5월 8일 > 최종정보태종 17년 정유(1417) 윤 5월 8일(계해)17-윤05-08[01] 절일사 통사 김을현이 북경으로부터 돌아와 진헌녀에 관한 일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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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일사 통사(節日使通事) 김을현(金乙玄)이 북경(北京)으로부터 돌아와 아뢰었다.
“황제(皇帝)가 2월 13일에 남경(南京)을 출발하여 5월 초1일에 북경에 하연(下輦)했었습니다. 황태자(皇太子)가 남경에 있었으므로 신 등이 남경으로 향해 가다가 숙주(宿州)에 이르러 황제의 대가(大駕)를 뵈었는데, 황제가 말하기를, ‘지금 오는 사신이 제비(諸妃)의 친척이 아니냐?’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사신 정구(鄭矩)는 정비(鄭妃)에게 동성(同姓)의 친척이 됩니다.’하였더니, 황제가 내관(內官) 구아(狗兒)를 불러 말하기를, ‘조선인(朝鮮人)은 돼지 고기를 먹지 않으니, 광록시(光祿寺)로 하여금 쇠고기와 양고기를 공급토록 하라.’하고, 수가(隨駕)하라고 명하여 10일에 북경(北京)에 이르렀습니다.”
【원전】 2 집 166 면
【분류】 외교-명(明)
> 고전번역서 > 운양집 > 운양집 제12권 > 서후 > 최종정보운양집 제12권 / 서후(書後) 모두 33수(首)인데 22수를 수록하였다.서진의 《죽지사》 뒤에 쓰다 무진년(1868, 고종5) 〔書徐振竹枝詞後 戊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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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서진(徐振)이 지은 《조선죽지사(朝鮮竹枝詞)》 40절이다. 서진은 이것을 지어서 채집한 민요 뒤에 붙였는데, 말이 혹 속이고 거짓되어 바르지 못하여 더 이상 자세히 살피지 않았지만, 그가 스스로 주석을 달기를 “남녀가 서로 좋으면 결혼한다.”라고 했는데, 《명사(明史)》의 잘못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그리고 “즉석에서 첩실을 빼앗았다.”라고 한 것은 우리나라에는 본래 이런 풍속이 없으니 또한 반드시 잘못 알려진 것이다. 《조야집요(朝野輯要)》에 “성종 조에 재상 이영근(李永根)과 이곤(李坤)이 한 기녀를 동시에 좋아하여 서로 빼앗고자 하니, 언관(言官)이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다. 임금께서 윤허하지 않으시면서 ‘사대부가 서로 처첩을 훔치는 것은 말세의 일이다. 내가 차마 이 세상을 말세로 내버려 둘 수 없다.’라고 하셨다.”라고 하였는데, 서진이 ‘즉석에서 빼앗았다.’라고 한 말은 아마도 이 사실을 전해 들은 것이 아니겠는가? “암행 어사가 가장 존귀하다.”라고 한 것은, 암행 어사는 어명을 받는 직함으로 당연히 공경하여 예를 갖추어야 하니, 임금의 수레를 끄는 말을 보면 예의를 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승상(丞相)보다 존귀하다고 말하니 또한 얕은 소견이 아니겠는가?
제도에 중국 사신은 숙소 밖으로 나가 거리구경을 할 수 없다고 정해져 있어서 숙소에 머무르는 동안에 한두 번 명설루(明雪樓)에 오를 수 있을 뿐이니, 길거리의 풍속은 눈으로 볼 새가 없었다. 삼국 시대 이전의 비루한 풍속을 가지고 지금 세상의 것으로 왜곡한 경우이니, 민월(閩越)에도 유교가 크게 융성하고 양자강과 한수(漢水)에 놀러온 여인들이 정숙해진 것처럼 풍속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 어찌 그 땅에만 있었겠는가?
문장을 일삼는 선비가 허망한 글을 고증하기 좋아하고 구설(舊說)을 답습하여 스스로 그 문채를 드러내 자랑하는 것은 예전부터 이미 그러하였다.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 같은 것이 그 선례이다. 그것을 논하는 자들이 동월의 부(賦)와 《명사(明史)》가 서로 부합된다고 하여 믿을 만한 글이라고 인정하였지만, 동월 또한 일찍이 목격한 적이 없고, 《명사》와 똑같은 오류를 답습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이것을 본 사람 또한 외국이라 하여 소홀히 여기고 다시 살펴 따져보지 않아서, 예의 바른 풍속을 변화시켜 오랑캐의 풍속으로 변질시켰고, 의관(衣冠)의 예법을 왜곡하여 금수(禽獸)가 되게 하였다. 잠깐 동안 붓을 들었던 것이 천하에 흘러 전하여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렇게 여기고 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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