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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白山
북으로 동진강이 서해를 향해 주변을 감싸며 흐르고, 수 십리 되는 넓은 들판이 사방으로 둘러져 있다. 그 가운데 봉긋이 솟은 백산은 자주 보아왔던 경상도에 나지막한 동산이나 언덕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렇게 낮은 산이지만 갑오농민전쟁의 성지로써 어느 산보다 드높고 기개가 넘치는 산이다. 정돈 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이끄는 동선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새롭게 정비된 축대가 둘러쳐져 있었고, 그 옛날 토성이었던 흔적은 방금 눈에 띄지 않았으나 화강석의 축대 사이 간간히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백산은 1차 농민전쟁 때 호남창의소가 설치되었던 곳으로 높이 47m 밖에 되지 않는다. 또한 사방이 평야라 관군이 진격해 오는 것을 방금 알아 챌 수 있는 유리한 지형이다. 조병갑의 학정에 봉기했던 농민군이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조병갑을 쫒아냈다. 그러나 신임 고부군수 박원명의 회유책에 스스로 해산을 했지만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로 인하여 본격적인 농민전쟁의 불길이 당겨진다. 농민군이 해산한 뒤에 군사 800을 이끌고 나타난 이용태는 살인과 방화를 일삼고, 약탈을 자행한다. 이를 그냥 두고 볼 전봉준이 아니었다. 도리어 전봉준에게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몇 해 전 아들아이와 둘이서 고창 선운사를 찾고 도솔암을 지나 동불암까지 올라 마애불을 찾아본 적이 있다. 그곳 마애불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마애불과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어쩌면 화난 농민군의 모습이었으며, 당당한 모습과 기골이 장대한 무골의 형상이었다. 가슴 부분에 사각의 홈이 파여 있는 것을 보았다. 전설에 따르면 ‘마애불 배꼽에 비결이 들어있다. 그것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하고, 비결과 함께 벼락살도 들어있어 거기에 손을 대는 사람은 벼락을 맞아 죽는다.’는 내용이다. 결국 손화중이 이 비결을 꺼냈고, 그런 소문이 사방에 퍼지자 그 아래로 수만의 교도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럼 손화중은 벼락살을 어떻게 피했는가? 이미 1820년에 전라감사 이서구가 그곳에서 서기가 뻗치는 것을 보고 뚜껑을 열자 갑자기 벼락이 쳐 ‘이서구가 열어 본다’라는 대목만 얼핏 본 채 도로 넣었다고 한다. 이미 벼락살이 지나간 후였으니 열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여부를 떠나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마애불에 그러한 전설이 내려오는 것은 그만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무엇이 나왔는지 알 수 없는 일이나 그것을 두려워했던 관리들이나 그것을 믿음으로 따랐던 백성들의 한판 이었을 것이다. 보수와 진보의 개념인가? 아니면 변화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세상이 뒤바뀌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파 놓았던 두려움과 희망이 교차되는 함정이었을까?
그렇게 모여든 농민군은 1894년 3월 20일 무장에서 봉기하여 고부를 치고 다음 날 곧바로 이곳 백산에 본진을 구축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조직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총관령 손화중과 김개남, 등 총대장 전봉준으로한 농민군은 3월 26일 전주를 향해 진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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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옷을 입은 농민군들이 일어서면 흰 옷으로 인하여 온 산을 하얗게 덮어 백산白山이라 하였으며, 앉으면 농민군의 항쟁 무기였던 죽창이 빼곡하여 죽산竹山이라 하였다. 이것을 기억해 내며 당시에 들끓었던 농민군들을 상상하며 상상으로 앉아보고 일어서 보기도 한다.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이 들끓는 함성과 함께 온 산은 수탈에 항거하는 열기로 가득 찼을 것이다. 나 또한 이마에 약간의 열기가 오를 즈음해서 정상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백산성白山城’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농민봉기 훨씬 이전 백제의 부흥을 꿈꾸며 백제의 왕자 ‘부여 풍’이 유민들을 모아 나당 연합군과 싸울 때 일본 지원군을 맞이한 곳이기도 하다고 적여 있다. 그러나 어찌 알았을까? 1200여년 후 이곳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이 일본군에 의해 좌절 될 줄은. 역사란 그런 것이다. 지혜를 모아 개선되기도 하지만, 반복되기도 하고, 반대로 일어나기도 하는 알 수 없는 것이 미래란 것임을.
팔각으로 된 이층의 루가 한가롭게 바람을 맞으려 서 있고, 그 앞으로 “동학혁명백산창의비”라고 쓰인 기념비가 우뚝 솟아있다. 가운데 비가 우뚝 솟은 대나무를 상징하는 세 개의 대칭, 순간 기념비를 보면서 생각나는 화두가 있었다. ‘동학농민항쟁115주년 심포지엄’에서 박준성님께서 발표하신 내용이 그것이다. 잠시 옮겨보자면,
농민군은 사람을 위아래 양반 상놈으로 엄격하게 나누는 상하 수직의 신분질서를 깨트리고 서로 대등한 수평의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또한 농민전쟁은 기존의 질서와 지배의 균형을 깨고 세상을 바꾸려는 밑으로부터 일어난 투쟁이었다. 그렇다면 조형물도 좌우 대칭의 중심에 수직으로 우람하게 선 조형의 상보다 수평의 형상으로 농민군의 뜻을 담는 것이 바람직하다.(중략) 5.16 군사구테타 이후 ‘근대화론’의 영향을 담고 있다.(하략)
상하의 수직관계에 몸서리를 치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일으킨 항쟁의 기념비를 다분히 군바리 문화에 물든 권위적이고, 남성적이며, 파시즘의 흔적 같은 정형화된 모습을 해 놓았으니 그분의 안목으로 질타를 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역시 답사는 좋은 선생님과 함께하라는 어떤 분의 말씀이다. 그것은 반드시 그분과 함께 다니란 말이 아니라, 그분의 시각을 빌어서 내 눈을 함께 열어 보라는 것이다. 나처럼 순수 아마추어 답사쟁이에게는 책을 통해서나 글 등을 통해서 좋은 시각을 빌어서 가는 것이 될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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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선은 그 아래로 강제되게 흐른다. 양분되어 오른 쪽에는 국사편찬위원회 김영석 선생이 지은 흑석의 비문이 있으며, 왼쪽에는 당시의 상황을 조각해 놓았다. 부조로 조각된 그림은 울분에 찬 농민들이 죽창과 삼지창을 들고 환호하며, 정형화 되고 볼에는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는 모습이다. 적당한 크기에 표정들이 당시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으나,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자동화 된 기계로 작품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덕분에 지나지 않아야할 선들이 이곳저곳에 상처처럼 파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를 기억하고 기념할 것이라면 석수쟁이의 손맛으로 해 놓으면 좋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정감어린 애정과 사람의 온기가 없음을 아쉬워한다. 손으로 만지면 손이 배일 것 같은 딱딱한 질감보다 톡톡······· 한 끌 한 끌, 정으로 다듬어 정성을 다한 투박하지만 정밀한 역사의 온기가 묻어있으면 더 좋았을 것을. 비단 이곳뿐만이 아니라 전국의 어느 곳이나 이와 비슷한 조각들뿐이니 하는 말이다. 아무리 문명화된 기계의 힘이라도 역시 사람의 손보다 섬세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우리 조상들은 돌을 떡 주무르듯 했다는 최순우님의 말씀이 생각나 드는 생각이다.
기념비 뒤로 ‘동학정東學亭’이란 팔각의 정자가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겹처마에 단청이 화려해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하나씩 나무계단을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넓은 평야가 탁 트여있어 사방을 경계하는 눈초리와 당시에 함성을 상상하며, 제법 쌀쌀하게 부는 바람을 맞는다. 결국 외세의 힘을 빌어서 자국민을 초토화시킨 무력한 정부, 국운이 다했을 조선말기, 아프게 살아야 했던 피맺힌 영혼들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결국에는 경술국치로 이어지며, 씻지 못할 치욕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국치國恥, 하면 줄줄이 연상되는 얼굴들이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경술국치이다. 외세의 앞잡이가 되어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내응하여 임금을 공갈·협박한 매국노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윤덕영 등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리고 보다 소급하면 만백성이 통곡하는 가운데 인조께서 오랑캐에게 삼배구고三拜九叩, 곧 세 번 큰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조아렸던 삼전도의 국치가 생각난다. 심양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삼학사 등 척화 선비들에게 ‘이놈 저놈’ 하며 모욕을 가하고 고자질을 일삼았던 은산 관노출신의 역관 정명수도 국치 인물이다. 어느 시대에건 간에 그러한 인물이 있게 마련인가 보다. 변화에 철저히 적응하며 자신의 안위와 부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은 지금도 여전해 보이니 하는 말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부는 바람을 안고 발길을 접는다.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떤 삶이 의미 있는 삶인가를 다시 한 번 좁은 가슴에 새겨본다. 늘 그렇게 다짐하며 살아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에게는 작심삼일도 자주하면 더 좋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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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장군 전봉준 옛집
야트막한 야산을 앞으로 두고 뒤로 모산母山으로 정좌하고 앞으로 작은 실개천이 흐르는 그곳에 전봉준이 살았던 옛집이 있다.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이라 불리는 곳이다. 살아생전 전봉준은 이렇게 살지 못했다. 바로 방하나 부엌하나 딸린 초가삼간이었을 것이다. 아예 똑 같이 만들지 않을 것이면 영혼에 위로하듯 팔작지붕에 기와로 올릴 것이지, 번듯하게 단장된 네 칸의 초가지붕은 또 무엇이며, 마당에 잔디밭은 또 무엇인가? 바로 인공의 손길이 묻어있는 일본의 정원처럼 꾸며 놓았다. 정원庭園이란 일본이 원류이다.
우리는 건물과 건물을 이어주는 소통의 공간이었으며, 만지고 쓰다듬고, 그 속에서 안주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자연을 닮아 바라보는 공간일 뿐이다. 그나마 주위에는 흙담을 두르고 황토를 발랐다. 집 또한 붉은 황토에 반듯하게 칠해져 있다. 다만 원목 그대로 사용한 굽어진 기둥이라든지 튓마루가 정겨움을 대신하고, 작은 부엌이 정겹다.
총명하고 용맹했던 그는 키가 아주 작은 데다 몸집은 옆으로 딱 벌어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녹두라고 불렀다. 즉 작지만 단단하다는 뜻이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아마 내 갓난아기 시절에 자장가였을 법하지만 당연히 기억은 없으나, 어릴 적 참 서글픈 음색으로 울 어머니가 들려주었던 노래였다. 지금도 노래를 흥얼거리면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느낀다. 바로 녹두장군 전봉준의 죽음이 안타까워 불렀던 노래이니 가난했던 시절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갈망하던 어머니는 노래에 미륵신앙까지 담아 소원하지 않았을까? 그 노래로 가난을 달랬고, 가슴 속 한을 달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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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전쟁 당시 눈부신 활약을 했던 그는 몰락한 양반출신이었다. 고창 죽림 당촌마을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며, 지금 이곳 이평면 장내리가 그가 태어난 곳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처음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학에 몰두하였으나, 보국안민輔國安民 이라는 동학에 감동한다.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였으며, 농민군을 조직하고 이끌었다. 그러나 적은 내부로부터 발생한다. 1894년 12월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인해 순창에서 체포되고 만다. 그리고 ‘적의 손에 죽을지언정 적의 법을 받지 않겠다.’ 라고 일갈하는 그의 음성을 상상하며, 기개 찬 모습을 엿보게 한다. 그리고 그는 1895년 3월 29일 따스한 봄바람이 이렇게 부는 날 손화중, 김덕명 등과함께 교수형에 처해진다. 1854년에 태어났으니 그의 나이 불혹을 갓 넘기는 40이 되던 해다. 이미 그는 어떤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은 불혹不惑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농민군 지도자였으며 진정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한 정신적 지주로 우리 후손들에게 영원히 녹두장군 전봉준으로 기억되고 교훈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툇마루에 앉았다. 해는 점점 붉어지고, 황토와 섞인 담들이 더 붉게 빛나고 있다. 기울어지는 햇살은 안간힘을 쓰듯 봄빛을 발했다. 봄의 오후는 가을느낌을 섞어준다. 일정에 놀라 후다닥 털고 일어선다. 압송되어 가는 사진 속의 모습을 그리면서·······
첫댓글 녹두장군. 작지만 누구보다 위대한 인물입니다.
어쩔 수 없었던 그들의 봉기.....안타깝다....
새긴 가슴에 무엇을 실천하는지?
마음에 담아 무엇을 전하려고 노력하는지?
녹두장군의 아련한 이야기가 이제는 전설처럼 옛날 이야기처럼 되어버리지나 않을런지....
잠시 스쳐가는 답사꾼이 뭔 역사를 논한다고....괜시리 질투합니다~
글에 파묻혀~
교통편이 몹씨 나쁜 시절에 갈아타고 갈아타면서 부산서 이평리에 갔었지요.
두 발로 터벅터벅 걸어 황토현으로,백산으로......
한참 지난 뒤 정희성 시인의 "황토현에서 곰나루까지"를 보게 되었지요.
이글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부를 했을고. 감탄!!!. 나는 가슴속 비기가 "목민심서"라는 썰에 한 표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