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4-28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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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걸림돌’이 아니라 ‘반석’이 되려면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묵상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 뒤를 따르는 방법을 일러 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첫째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는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에서 보듯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겪는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과 고통을 달갑게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둘째로,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죄인 취급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십자가는 사형수들이 지는 형틀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칭찬과 격려가 아닌, 손가락질과 비방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목적지가 골고타 언덕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도착하신 곳은 사형이 집행되는 골고타 언덕이었습니다. 결국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온전히 자신을 비우겠다는 결심 없이는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희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참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길입니다.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마태 16, 24-28)
요즘 고3 어머니들이 수험생을 위한 백일기도를 매일 성당에서 바치고 있습니다. 자녀의 좋은 성적을 위해서 아침 8시 20분부터 9시 10분까지 매일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기도는 분명 자녀들에게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어떤 기도이든 다 귀를 기울이시여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기도하며 자신을 사랑하는 부모들의 정성에 자녀들은 당연히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담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진심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한다면 틀림없이 기도의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이분들의 정성스러운 기도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과 또 자녀들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기도하고 염려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서는 많은 열정과 시간과 돈을 투자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육신의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턱뼈를 깎고, 광대뼈를 깎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해도 감수인내하며 많은 돈을 들여서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영혼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하느님을 위해서는 너무나도 인색하고 시간도 투자하지 않고 돈도 투자하지 않습니다.
건강을 위해서는 등산도하고, 헬스도 하고, 에어로빅이나 수영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 성체조배를 한다든지, 묵주기도를 꾸준히 바친다든지 성경말씀을 꾸준히 읽는다든지 영적독서를 꾸준히 하는 사람은 매우 드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녕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목숨은 육신의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살이처럼 세상의 안위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심지어는 많은 신앙인조차도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의 일들이 잘되길 바라는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시지만 십자가 위에 매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기꺼이 매일의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합니다.
저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지신 주님, 저희도 세속의 사람들이 성공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 이상으로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노력하는 신앙인이 되게 인도하여주시고 축복하여주소서. 아멘.
2013년 8월 9일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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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ever wishes to come after me must deny himself,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Mt.16,24)
제1독서 신명 4,32-40 복음 마태 16,24-28
고해성사를 듣게 되면 안타까움을 갖게 될 때가 종종 생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이 죄를 많이 지어서 느끼는 안타까움이 아니라, 제대로 죄 고백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지요. 즉, 남의 죄만을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 남편이 매일 술 마시고 들어와요.’, ‘자녀가 성당에 다니지 않아요.’, ‘아내가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자식이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대학까지 공부를 시켰는데 취업도 하지 못하고 그냥 집에만 있어요.’ 등등의 이상한 죄(?) 고백입니다.
물론 그래서 미워한다는 것이 죄의 요지이지요. 하지만 이 말을 다시 풀이하면, 내 주변의 사람들이 제대로만 산다면 자신이 절대로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즉, 남의 죄 때문에 자신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내 주변의 사람 때문에 내가 죄를 짓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내 안에서 죄를 범하고 있는데 그 모든 원인을 내 주변 사람에게 몰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깨끗하다고 주님께 스스로를 변호하는 것이지요.
요즘도 크게 문제가 되는 왕따 학생을 떠올려 보십시오. 왕따를 시키는 아이들은 말합니다. 왕따인 그 친구 자체가 문제이지, 자신들은 그 왕따 친구의 모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변호합니다. 그러나 누가 문제입니까? 약한 친구를 폭력이라는 힘을 이용해서 왕따 시키는 가해자가 무조건 잘못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의 고백에 있어서 자신의 죄가 아닌 남의 죄를 말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그래, 알았다. 너는 죄 없어.”라고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악마는 우리의 죄를 있는 그대로 고백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남 탓, 환경 탓을 하면서 죄를 고백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진정으로 깨끗한 내가 될 수 없도록 또한 주님을 똑바로 따를 수 없게 만듭니다. 고해성사를 보기는 하지만 고해성사의 은총을 받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십자가입니까? 주님의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남의 십자가입니까? 모두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짊어지라는 십자가는 바로 내 자신의 십자가였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주님의 십자가도 또 내 이웃의 십자가도 아닌, 바로 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남의 탓, 내 주변의 환경 탓을 하고 있다면 이는 자신의 십자가가 아닌, 남의 십자가만 지겠다고 욕심내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의 십자가를 짊어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내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내 십자가를 짊어지기에도 시간이 너무나 부족하니까요.
인생은 대개 흐리거나 비 뿌리는 나날이고 활짝 갠 날은 드물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 당신만의 멋진 우산이 생긴다(나해아).
몸무게 줄이는 화장실, 우리 죄의 무게를 줄이는 곳은 고해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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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고백
고해소에서 어떤 형제님께서 신부님께 죄를 고백합니다.
“신부님, 제가 밧줄 하나를 훔쳤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밧줄 하나 훔친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끼고 죄를 고백하는 이 형제님이 아주 열심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밧줄에는 소가 매여 있었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어떤 상황일까요? 단순히 밧줄 하나 훔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밧줄에 매여 있는 소 한 마리를 훔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차마 소를 훔쳤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밧줄을 훔쳤다고 말했던 것이지요.
악마는 이렇게 자주 유혹합니다.
“죄를 고백해. 그러나 죄를 있는 그대로 다 말할 필요는 없어.”
죄를 제대로 고백하지 못하게 만드는 악마의 유혹에 오늘도 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 겸손하게 모든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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