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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유명을 달리한 영화계 별들을 돌아본다.
다카하타 이사오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스튜디오 지브리'를 공동 설립한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의 작품 [천공의 성 라퓨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마녀 배달부 키키] 등에는 프로듀서나 음악 연출을 맡았고, [반딧불이의 묘], [추억은 방울방울],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이웃집 야마다군] 등을 직접 연출했다.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명작도 많지만, 1970년대 TV 명작 애니메이션인 [알프스 소녀 하이디], [엄마 찾아 삼만리], [빨강머리 앤] 등의 세계 명작 만화 시리즈로 큰 명성을 쌓았다.
감독이자 직접 그림을 그리는 천재 애니메이터 미야자키의 천재성에는 미치지 못 했지만, 완성도 높은 섬세한 연출력에서는 미야자키 이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4월 5일, 82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별세했다.
할리우드에서 활약한 1세대 한국인 배우로, 1960년대 말부터 미국 TV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해 평생 300여 편의 영화, 드라마, 연극, 뮤지컬에 출연했다. 1980년대 중반 이전에는 할리우드에 동북아시아인 배우가 많지 않던 시대여서, 오순택은 같은 드라마에, 심지어 같은 시즌에 여러 조연 및 단역을 번갈아 맡는 일이 많았다. 예를 들어 [하와이 파이브 오]에는 1968년부터 1979년 사이 여덟 번이나 출연했는데, 매번 다른 역할이었다.
비슷한 맥락으로 동북아 출신 악역 역할도 많이 맡았다. [굿 가이스], [대특명 2], [프레지던트 맨] 등 유독 척 노리스 주연의 액션 영화에 여러 번 출연했는데, 척 노리스가 동양 무술을 앞세운 액션배우인 만큼 상대 악역으로 무술 고수가 등장하는 설정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겠다. 가장 얼굴을 널리 알린 작품은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로, 홍콩 경찰 소속의 히프 경위 역할을 맡았는데 007 시리즈에 출연한 최초의 한국인 배우였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에서는 아버지 목소리를 맡았다.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면서 평생 자신의 한국 이름(Soon-Tek Oh)을 쓰기를 고집했다. 2001년 한국에 돌아와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서울예대 등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말년에 알츠하이머 병을 앓다가 4월 4일 85세의 나이에 LA에서 합병증으로 타계했다.
할리우드의 상업영화와 작가주의 영화를 모두 만족시키며 새로운 거장으로 급부상한 드니 빌뇌브 감독. 그의 심오한 영화에 신비로운 분위기와 무게감을 더해주는 힘이 ‘음악'에 있다면, 아이슬란드 출신 영화음악가 요한 요한손이야말로 그 찬사를 모두 받아 마땅하다. 그는 드니 빌뇌브의 [프리즈너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컨택트] 등의 대표작을 함께 작업했다.
그는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와 스티븐 호킹의 전기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으로 아카데미 및 골든글로브 영화음악상 후보에 2년 연속 올랐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모든 것]으로 골든글로브를 수상, 이 상을 받은 최초의 아이슬란드인이 되었다.
2월 9일, 자신의 베를린 자택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는데, 코카인 과다 복용이 사인으로 판명됐다. 사망 당시 만 48세의 창창한 나이였는데,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의 제임스 마시 감독의 새 영화 [더 머시]가 유작이 됐다.
다작으로 유명했던, 그러나 그만큼 신뢰감을 주던 일본 배우. 1970년대 중반부터 배우 생활을 했지만 딱히 주목받지 못하다가,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소나티네], [하나비] 등에서 누구보다 충직한 캐릭터로 선 굵은 연기를 보이며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특히 1997년 [하나비]와 1998년 최양일 감독의 [개, 달리다]에서의 연기로 일본 각종 영화상의 남우조연상을 휩쓸다시피 한 뒤로 본격적인 ‘다작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평생 400편이 넘는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할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했는데, [깡패수업], [순애보], [대호] 등의 한국 영화에도 출연했다. 2월 21일, 아직 한창 활약을 하던 66세의 나이에, 드라마 촬영을 마친 뒤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평생 37편의 장편 극영화를 연출한 영국의 영화감독. 1966년작 [알피]는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고, 2004년 주드 로 주연의 [나를 책임져, 알피]로 리메이크됐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는 [007 두 번 산다], [007 문레이커],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 등 세 편의 007 제임스 본드 영화와 [적과 백], [새벽의 7인], [리타 길들이기] 등이 있다. 만 98세 생일을 11일 앞둔 2월 23일 자연사로 별세했다.
[사랑에 관한 모든 것]의 실제 인물. 루게릭 병으로 몸을 맘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자기 목소리로 말도 할 수 없지만 인류 지식의 경계를 넓힌 천재 물리학자다. 그는 과학자였지만 영화사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우선 생전에도 훌륭한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에디 레드메인은 영화에서 호킹을 연기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2004년 영국의 TV영화 [호킹]에서는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그를 연기한 적도 있다.
그의 저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가 다섯 편이나 있고, 직접 출연하거나 목소리 출연으로 연기를 하기도 했다. 특히 그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독특한 기계 음성은 때론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목소리로, 때론 내레이션으로도 캐스팅되었다. 유머 감각도 뛰어나 자기 자신을 희화화하는 카메오 캐릭터도 기꺼이 허락하곤 했다. 미국의 너드 물리학자들이 주인공인 인기 시트콤 [빅뱅 이론]에서 그 자신으로 직접 등장해 연기한 모습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3월 14일 새벽, 영국 캠브리지에 있는 자택에서 타계했다.
1960년대 체코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체코 출신의 영화감독. ‘프라하의 봄’ 운동 때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에 살기 시작했다. 1975년작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이듬해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남녀주연상, 각본상 등 주요 5개 부문을 모두 석권했다. 역대 아카데미에서 이 다섯개 주요 부문을 모두 수상한 영화는 1934년 [어느날 밤에 생긴 일]과 1991년 [양들의 침묵]을 포함 세 작품 뿐이며, 심지어 같은 해 경쟁작이 스탠리 큐브릭의 [배리 린든], 로버트 알트만의 [내쉬빌], 시드니 루멧의 [뜨거운 오후],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 페데리코 펠리니의 [아마코드] 등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수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1984년 연출작 [아마데우스]로 다시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색상을 포함해 8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그 밖에도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 [래리 플린트], [맨 온 더 문], [고야의 유령] 등의 작품을 남겼고, 배우로도 종종 출연했다. 4월 13일 8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10대 후반 극단 생활을 시작, 21살 때부터 영화에 출연했다. 데뷔 초부터 서구적이면서 동시에 동양적인 미모로 주목받으며 스타로 부상했다. 1950-1960년대 [춘향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지옥화] 같은 영화들로 김지미, 엄앵란과 함께 한국영화 흥행을 이끌었고, [민며느리]로 감독 데뷔도 했다.
1978년 납북되었는데, 얼마 후 뒤이어 납북된 남편 신상옥 감독과 함께 북한에서도 배우 활동을 이어갔으며,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소금]으로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198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국 대사관으로 망명에 성공, 10년 넘게 망명생활을 하다가 1999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했다.
이처럼 어떤 영화보다도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던 그는 2006년 신 감독 타계 후 건강이 악화되었고, 1년 이상 투병하다가 4월 16일 9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