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老後)
인생의 마지막 20년을 함께 할 친구가 있습니까?
대만에서 '미래의 노후'라는 주제로한 웹 영화가 많은 네티즌의 공감을샀다고 합니다.
영화속 줄거리는 산속에서 혼자 사는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부인은 일찍 돌아가시고 4명의 자식들은 모두 장성해 교수가 되었거나 해외에 나가 장사를 하면서 잘 살고 있고,
노인만 자식들이 모두 떠난 산골집에서 혼자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과 손자가 멀리서 찾아온다는 소식에 그는 정성껏 맛있는 음식들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곧이어 바빠서 오지 못한다는 전화를 받게되고, 준비했던 음식들은 주인을 잃고 맙니다.
창밖의 하늘마저 우중충해지고 노인은 친구들이라도 불러 함께 식사 할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누렇게 색이 바랜 낡은 수첩을 한참 동안 뒤적거려도 함께 식사할 만한 친구가 없습니다.
세상을 떠났거나 모두 연락이 안되는 친구들 뿐이었습니다.
때맞춰 창밖에서는 비가 쏟아져 내리고,
결국 노인은,
부엌 식탁에 앉아 가득 차려진 음식을 홀로 먹게됩니다.
마지막 장면 위로,
"인생의 마지막 20년을 함께할 친구가 있습니까?"라는 자막이 흐릅니다.
대만 최고 베스트셀러 작가 '우뤄취안 著, "우리는 그렇게 혼자가 된다"는 미래 나의 자화상은 어떤 모습이 될지 잠시
명상에 잠기게 합니다... !
노후의 친구는
첫째: 가까이 있어야 하고
둘째: 자주 만나야 하며
셋째: 같은 취미면 더 좋습니다.
"회갑잔치가 사라지고,"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拾 古來稀)라는 칠순잔치도 사라진 지금,
인생백세고래희(人生百世古來稀)가 정답이 된 바이야흐로 초 고령화 시대입니다.
60대는 노인 후보생으로 워밍업 단계요,
70대는 초로(初老)에 입문하고,
80대는 중노인(中老人)을 거쳐,
망백(望百)의 황혼길에 이르럽니다
장수(長壽)가 좋기는 하나...,
아족부행(我足不行)
내발로 못 가고,
아수부식(我手不食)
내 손으로 못 먹고,
아구부언(我口不言)
내 입으로 말을 못하고,
아이부청(我耳不聽)
내 귀로 못듣고.
아목부시(我目不視)
내 눈으로 못 본다면
이런삶은 살아도 사는게 아니요,
죽을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
건강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래도 노인으로서 언제 어디서나 큰소리 치고 사는
"100세 시대의 노인 처세법"의
처음과 끝은 딱 하나!
그것은 바로
첫째도 "내가쏜다!"
둘째도 "내가 쏜다!" 이랍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술 한잔, 밥 한끼쯤 베풀 줄 아는
여유가 있어야 하며,
대접받기 보다는 한턱쏘는 즐거움이 최고랍니다.
결코 젊은 날로 돌아갈 수는 없고,
다시한번 더 살아볼 수도 더욱 없고,
지금 이순간 큰소리 한번 못치면 언제쯤 처보겠습니까?
죽을 때 자식들에게 줄 생각말고....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말처럼
이제부터라도 남은 여생을 큰소리 꽝꽝치며 삽시다.
내일 점심은 "내가 쏜다!"라고 큰소리 쳐도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들 인생은 이렇습니다"!
流水不復回(유수불부회)
흐르는 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行雲難再尋(행운난재심)
떠도는 구름은 다시 볼 수
없네 !!
老人頭上雪(노인두상설)
늙은이의 머리위에 내린 흰눈은,
春風吹不消(춘풍취불소)
봄바람 불어와도 녹지를 않네 ‼
春盡有歸日 (춘진유귀일)
봄은 오고 가고 하건만,
老來無去時(노래무거시)
늙음은 한번 오면 갈 줄을 모르네~
春來草自生(춘래초자생) :
봄이 오면 풀은 절로 나건만,
靑春留不住(청춘유부주)
젊음은 붙들어도 달아 나네~
花有重開日(화유중개일)
꽃은 다시 필날이 있어도,
人無更少年(인무갱소년)
사람은 다시 소년이 될 수 없네~
山色古今同 (산색고금동)
산색은 예나 지금이나 변화지 않으나,
人心朝夕變(인심조석변)
사람의 마음은 아침 저녁으로 변하네~
봄을 시샘하는 꽃샘 추위에 건강하시고,
나이를 시샘하는 치매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전우님이 보내준 "안 마그렛"의 음악을 들으니 당시 홍하사가 많이 듣고 부른 "당신의 愛人이 되렵니다."가 문득 생각키워 올린다.
내가 맨 처음 장충체육관을 찾던때가 1966년이니 아마도 57년전이 아닌가 싶다. 학업을 잠시접고 금의환향의 목표로 처음 서울와서 취직한게 서대문 창천동에 소재한 "흥진기업사" 란 전축회사였다. 난 음항기기쪽에 형님은 나무로 무엇이든지 가능한 목공부쪽으로---그리하여 당시 형제간에 원대한 꿈(?)을 이뤄보자고 다짐하며 둘 다 공장 한모퉁이의 빈 합판조각에 이불을 깔고 잠자고 밥은 기숙사식당에 대놓고 먹는 처지였다. 그런데 상경한지 일주일도 못돼 그공장은 부도가 났고 기술있는 형님은 선금받으면서 같은 그계통의 공장인 신설동에 취직이 되었지만 난 당분간 취직될때까지 별 수 없이 사촌누님댁서 기거할수밖에 없었다.
당시만해도 돈암동까지 전차가 다니던 시절의 동소문동의 누님댁은 꽤 잘 나가는 집이었고 높은직책의 매형께선 언제나 고급승용차가 태우러 오곤했으며 당시 대신중학교를 상당한 뒷돈을 대고 들어간 조카를 내가 취직될때까지 당분간 공부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의 누나도 진명여중 3 이었으나 내가 담당하긴 다소 버거웠기에 국민학교 3학년짜리와 둘이만 담당하게 되었다. 얼마전까지도 서울대니 연대나 고대등의 가정교사를 두기도 했으나 아이들 성적이 별로 올라가지도 않았거니와 방하나 따로주고 적잖은 과외비주고 끼니때마다 반찬 신경써야지 남을 한가족처럼 대하기가 보통 골치꺼리가 아니었던차 내가 기거하고난 후 부턴 모든게 팽팽 돌아갈 정도였다.
특히 집안일하던 부엌누나가 누구보다 날 좋아 하였다. 쓰레기를 치우던가 궂은 일등은 도맡아 놓고 도와주니 그럴수밖에---또한 공부만 잘해선 안된다며 내가 적극적으로 추천해서 합기도 도장도 다니게했고 집안에서 탁구도 가르쳤다. 한동안 홍하사가 왼손으로도 웬만한 사람과도 대적할 수 있음도 그당시 조카를 가르치면서(오른손으론 웬만큼 쳤었기에)왼손으로 칠때였기때문이다. 여담이지만 홍하사가 강남 신사동에서 탁구장을 할때 복식조가 와서 상대해 달라면 왼손,오른손 교대로 치며 두사람 몫을 혼자서 감당해 준적도 적지아니했다.
그런데 그 보결로 들어간 조카를 두달만에 1등으로, 그리고 16등짜리 여자아이를 9등으로 다시 한달만에 2등으로 끌어올리니 누님댁은 경사가 날 수 밖에---또한 남도아니고 열심히 조카들을 가르치니 게다가 누님의 심부름을 곧잘해서 시간,돈 등을 단숨에 벌어주니 비서처럼 계속 머무르기를 바랬다. 당시 조카가 다니던 大新中(당시 배구대회는 언제나 대신고교와 인창고교가 라이벌 관계였고 전국을 재패하던 때 였으며)을 홍하사는 응원하는 그를 따라 장충체육관을 몇번 가본적이 있었다.
지금은 뉴우질랜드에서 살고있으며 틈만나면 꼭 외삼촌을 초청해서 관광한번 꼭 시켜주고 싶다지만 내가 도저히 여유가없다. 그시절엔 장충체육관에서 경기를 볼 정도라면 맘을 먹어야 들어갈 정도였고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바람이 몹씨 불거나 비가오면 경기를 중단하는 운동장에서만 배구를 하다가 그처럼 으리으리한 체육관에서 경기를 막상보니 바람의 영향을 이용하는 슬라이스 서어브등은 별로 효과가 없겠다고 느꼈고 홍하사가 쬐그만 키에 배구를했다면 아무도 믿지못할것이다. 지금은 6인조(국제식)로 우선 키가 커야하지만 당시엔 9인조(극동식)로 하프센터나 빽센타의 포지션은 거의가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 물론 지금도 리베로(전문수비수)가 있긴 하지만---(각설하고)
♧ No, 6707
♧ 이름: 홍진흠 ( 남 )
♧ 2009/12/26(토) 00:01
♧ 조회: 2066
"장모님 이야기"---(1) (www.vietvet.co.kr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첫댓글 전우님들! 당시의 유명배우겸 가수인 '안 마그렛' 의 영화 "멋대로 살아라" 따위는 '엘비스 플레슬리' 와
함께 힛트를 쳤었지요 그 으리으리하던 장충체육관을 필리핀에서 지었으며 우리보담 잘살은 '필리핀'이었으나
미군들을 철수시키고 지금은 이웃나라에 식모살이 등~ 하여간 미군철수하면 곧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