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홍(百日紅), 백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열흘 붉은 꽃이 없다.’라는 말이 있지만, 배롱나무는 그 붉은 꽃잎들을 백일동안 간직한다하여 ‘백일홍(百日紅)’이라 이름 지어졌다. 또한, 꽃이 화려하고 영화로운 부귀와 다산(多産)을 상징하기도 한다.
배롱나무의 원래 이름은 백일홍나무이다. 그러나 그 발음이 ‘배기롱나무’에서 와전되어 배롱나무로 굳어진 것이다. 초본 백일홍과 구분하기 위해 흔히 목백일홍이라 부르며 한자 이름으로는 ‘자미화(紫薇花)’이다.
배롱나무의 꽃은 7월과 8월과 9월 초에 각각 20여 일간 피고, 이후 10여 일 정도 시들어 모두 100일 정도 연속해서 피고 진다고 한다. 배롱나무는 특히 8월 말에서 9월 초에 피는 유일한 꽃으로 예로부터 조상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絲綸閣下文書靜 사륜각에 문서 일 조용하고
鐘鼓樓中刻漏長 종고루의 물시계 소리 오래 되었네
獨坐黃昏誰是伴 황혼에 홀로 앉았는데 누가 벗해 줄 건가?
紫微花對紫微郞 자미화가 자미랑을 대하였네
-중당(中唐) 백거이(白居易) 「자미화」-
사륜각은 국가의 여러 문서를 담당하는 관청으로 자미성을 말한다. 이곳에서 한여름 문사들이 남긴 다수의 자미화 시 덕분에 자미화는 자미성 문사의 상징이 되었다.
歲歲絲綸閣 해마다 사륜각에서
抽毫對紫微 붓 들고 자미화를 대하였네
今來花下飮 금년도 꽃 아래서 술 마시니
到處以相隨 가는 곳마다 서로 따르는 듯하네
-성삼문(成三問) 「난만자미(爛漫紫薇)」-
千枝刻作玉瓏?。일 천 가지에 옥롱송을 조각해 놓은 듯
東閤西樓爛?紅。동쪽 서쪽의 누각에 붉게 만발하였네
憶昔草綸花下醉。그 옛날 조서 초하고 꽃 아래서 취할 적엔
寂寥池?又秋風。고요한 지관에 또 가을 바람이 불었었지
-김종직(金宗直) 「점필재집?畢齋集」 제9권 ‘자미화를 읊다’ 詠紫微花 -
배롱나무 표피
파양수(??樹.伯痒樹). 배롱나무의 또 다른 이름이다. 간지럼을 두려워하는 나무란 뜻으로 배롱나무의 표피 특성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배롱나무의 줄기는 해가 지날수록 담홍색을 띠며 껍질이 매우 얇고 매끄럽기 그지없다. 이 매끄러운 표피 덕에 신경이 예민해 간지럼을 잘 탄다 하여 파양수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실제로도 간지러운 것을 참지 못해 나뭇가지 사이를 손가락으로 긁으면 가지와 잎이 다 움직인다.
배롱나무의 원산지는 아시아 열대지역이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을 통하여 들어온 것이라 하는데 그 정확한 유입 시기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고려 최자(崔滋)의 「보한집」에 자미화란 이름이 보이며 조선 초에는 사대부들의 관상수로 애완된 것으로 생각된다.
“나무 둥치는 반들반들하고 한 길 남짓 큰다. 꽃잎은 붉고[] 쪼글쪼글한데 자잘한 꽃들이 모여 주먹만 한 송이를 이룬다. 꽃받침은 밀랍 빛깔이고 꽃은 뾰족뾰족하며 줄기는 붉은[] 빛깔인데 잎은 마주난다. 6월에 꽃이 피기 시작하여 대사()를 거듭하며 9월까지 계속 핀다.”
-「격물총화」中-
다른 꽃이 별로 없는 한여름에 독특하게 붉은 꽃을 피우는 특성 탓인지 식물의 품격을 1품에서 9품으로 나눈 강희안(1417~1464)의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는 백일홍이 매화, 소나무와 함께 1품으로 가장 위품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 꽃은 중국에서 성() 안에 많이 심었기 때문에 옛 문사들이 모두 이 꽃을 시로 읊었다. 우리나라의 성원에서는 이 꽃을 본 적이 없고 다만 홍작약 몇 그루가 있을 뿐이다. 오직 영남 근해의 여러 군과 촌락에서 많이 심는다. 다만, 기후가 약간 늦어서 오뉴월에 비로소 피었다가 칠팔월이 되면 곧 진다. 비단 같은 꽃이 노을빛처럼 고운데 뜰을 비추면 사람들의 시선을 어지럽게 빼앗으니, 풍격이 가장 유려하다. 도하 공후들의 저택에도 정원수로 많이 심었는데 높이가 한 길이 넘는 것도 있다. 근래에 영북()의 기후가 몹시 추워서 얼어 죽은 것이 대부분이고, 호사가의 보호를 받아 죽음을 면한 것은 겨우 열 가운데 한둘뿐이다. 몹시 애석한 일이다.”
-강희안 양화소록 中-
꽃이 백일이나 핀 것은
물가에 심었기 때문이네
봄이 지나도 이와 같으니
봄의 신이 아마 시기하리라
花能住百日。
所以水邊栽。
春後有如此。
東君無乃猜。
-정철 「자미탄紫薇灘」-
타고난 자태가 원래 부귀한데
어찌 해 주변에 심어 주기를 기다리랴
좁은 기슭에 붉은 놀빛 가득하니
어부의 놀란 눈길이 꺼려하네
天姿元富貴。
寧待日邊栽。
夾岸紅霞漲。
漁郞恐眼猜。
-고경명(高敬命) 「자미탄(紫薇灘)」-
송강 정철과 제봉 고경명의 「자미탄」시 이다. 자미탄은 무등산 골짜기에 있는 식영정과 환벽당 사이를 흐르던 여울의 이름으로 배롱나무들이 여울가에 많이 심어진 연유에서 붙여진 것이다. 현재 광주댐은 수몰되어 배롱나무가 심어진 모습은 볼 수 없지만 댐 가에 배롱나무를 심어 옛날 자미탄을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정철과 고경명 시를 읽으니 지금과는 달랐던 당시 자미탄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질 것도 같다.
제봉의 시에서 말한 ‘해 주변’이란 임금이 사는 곳인 궁궐을 말한다. 타고난 자태가 원래 부귀하여 굳이 궁궐의 뜰에 심어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방외거사 조용헌 선생도 배롱나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극은 그 색이 청과 홍으로 이뤄져 있는데, 그 청홍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식물이 소나무와 배롱나무이다. 소나무는 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식물로 겨울에 독야청청하며, 배롱나무는 홍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식물로 여름에 독야홍홍한다.”
청에 소나무, 홍에 배롱나무를 비유할 정도로 배롱나무의 기품이 소나무에 버금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삼척 신흥사 이수동체 나무(배롱나무와 소나무)_(사진: 문화재청 한문화재한지킴이)
방선생의 이야기를 대변해주기라도 하는 듯 강원도 삼척에는 재미있는 배롱나무가 있다. 어느 옛날, 배롱나무 고모의 구멍으로 솔씨 한 알갱이가 바람에 날아들었는데, 배롱나무 고목 속에 소나무가 뿌리를 내려 지금은 이수동체로 자라나고 있다. 여름에는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 겨울에는 소나무의 푸른 솔잎이 마당을 밝힌다.
매년 여름이 되면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 절정으로 다다르는 유명한 곳이 있다. 명옥헌이 바로 그곳이다. 명옥헌은 무등산 골짜기에 있는 소쇄원()과 식영정에서 송강정과 면앙정으로 가는 길목 중간에 있다.
배롱나무 꽃이 흩날리는 명옥헌 지당(池塘)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 승주의 송광사, 선암사 그리고 구례의 매천사당, 화엄사 일대에도 배롱나무들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붉은 꽃은 떨어져 없지만, 그 매끄러운 표피들이 간지럼이라도 핀다 치면 눈이 부시게 가을 햇살을 반사하며 토해낼 터이니 날이 더 추워지기 전 이번 주말에는 그 모습을 보러 집을 나서야겠다.
오소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