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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티누스 Ploti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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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cosmo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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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cosmo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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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요구절에 대한 해석과 나의 생각
Chapter 1: For Love of Love
(1) Lord, since eternity is yours, are you ignorant of the things that I say you, or do you see only at a certain time what is done(which cometh to pass) in time?
* 시간의 조건이 영혼이라면, 시간의 원인(Cause)은 창조자 신임을 밝히고 있다. 신은 시간에 지배를 받는 -시간 아래 있는- 분이 아니시기에, 내가 하고 있는 내가 하는 모든 이야기나 앞으로 할 이야기도 다 알고 계시다는 의미. 그렇기에 자신이 이야기 하는 것이 어쩌면 신 앞에서는 의미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함.
Why then do I set out in order before you this account of so many deeds? In truth, it is not that you may learn to know these matters from me, but that I may…… “The Lord is great, and exceedingly to be praised.”
*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고백하는 이유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라고 말하고 있다. 자아(the heart)와 신과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Chapter 2: The Treasures of Scripture
(4) Lord, have mercy on me, and graciously hear my desire. I do not think that it is for things of earth, for gold and silver, for gems or rich garments, for honors and power, for fleshly pleasure, not even for the needs of the body and of this our life of pilgrimage.
* 위의 글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제는 세속적인 욕망에서는 완전히 벗어났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소망은 성서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Chapter 3: The Language of Truth
(5) Therefore, since I cannot question him who was filled by you, and thus spoke true words, I entreat you O Truth, I entreat you, O my God, “spare my sins.” Do you who granted to him, your servant, to speak these true words, grant to me that I may understand them.
* 모세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에게도 모세와 같이 천지창조에 관한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을 간청한다.
Chapter 4: Evidence of Creation
(6) Lo, heaven and earth exist: they cry out that they have been created, for they are subject to change and variation, whatever has not been made, and yet exists, has nothing in it which was not previously there, whereas to have what once was not is change and vary.
You, therefore, O Lord, who are beautiful, made these things for they are beautiful. …… Compared to you, they are good, nor beautiful, nor real.
* 만물들과 비교하여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의 선함과 아름다움, 존재를 찬양한다.
Chapter 5: Creator of All Things
(7) But how do you make them? …… What exists, for any reason except that you exist? You spoke, therefore, and these things were made, and in your Word you made them.
What exists, for any reason except that you exist? You spoke, therefore, and these things were made, and in your word you made them.
* 세계는 무에서 창조되었으며, 만물들은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 창조되었음을 말한다.
Chapter 6: God's Voice
(8) But how did you speak? …… Whence it is clear and evident that a creature’s movement, a temporal movement, uttered that voice in obedience to your eternal will.
*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창조물의 운동을 통해 발음 되었다고 설명하며 ‘있으라’ 고 명하시는 말씀의 바탕이 되는 사물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 또한 주님이 만드셨음을 확신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 물체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궁금해 한다.
Then the mind compared these words sounding in time with your eternal Word in its silence, and said, “It is far different; it is far different. These words are far beneath me. They do not exist, because they flee and pass away. The Word of my God abides above me forever.”
*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도 영원한 하나님의 시간과 일반적인 시간과 연결시켜서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즉 시간 아래 있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에 그 영원한 말씀도 영원히 머물러 있는 반면, 일반적인 말들은 들으면 그냥 지나가 버리는 시간처럼 말이다.
Chapter 7: The Word of God
(9) We know, O Lord, we know, since in so far as anything which once was now no longer is, and anything which once was not now is, to that extent such a thing dies and takes rise. Therefore, no part of your Word gives place to another or takes the place of another, since it is truly eternal and immortal.
* 사물의 생성과 소멸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든 사물은 생겼다가 사라지지만 주님의 말씀만은 영원하며 불멸한 것이다.
Therefore, you say once and forever all that you say by the word, who is coeternal with you. whatever you say shall be made, then it is made, but while you do not make anything otherwise than by speaking, yet not all things which you make by speaking are made simultaneously and eternally.
* 6장과 7장을 미루어 볼 때 여기에 세 층위의 언어가 있다.
1) above - divine (creates and instructs) - eternity
2) inner - human (intellectual intuition)
3) outer - in sounds and language time
이러한 언어 층위에서 영원과 시간의 대립은 신의 언어와 외적인 인간 언어와 대립됨을
알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을 공부하려는 이유는 그의 유일한 관심사인 “'God and the soul I wish to know.' 'Nothing beside?' 'No, nothing at all.'"
Chapter 8 : Christ Our Teacher
(10) He is a beginning, for unless he abided when we went astray, he would not be there when we returned. But when we return from error, we truly return by knowing that we do so, and that we may know this, he teaches us, because he is the beginning and he speaks to us.
*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말씀이 만물의 시초 ‘태초’라 하고, 그 안에서 우리는 불변의 진리를 배운다고 한다.
Chapter 9: Wisdom Itself
(11) speaking in a wondrous way and working in a wondrous way.
I both shudder and glow with passion: I shudder, in as much as I am unlike it; I glow with passion in as much as I am like to it.
“How great are your works, O Lord; you have made all things in wisdom!” That wisdom is the beginning, and in that beginning you have made heaven and earth.
* 아우구스티누스는 주님의 말씀이 인간의 마음을 향해 어떻게 말하는지를 궁금해 했다. (11)에서 나온 빛은 지혜를 말한다. 자신이 지혜롭게 행동할 때는 그 빛과 같아져 사랑으로 불타오르나 자신이 죄의 괴로운 어둠으로 인하여 지혜롭지 못할 때 두려워하게 된다고 밝힌다. 또한 지혜는 주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원동력이며 시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Chapter 10과 12가 유사하므로 순서를 바꾸어 설명. Chapter 10과 12는 주님이 천지창조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한 사람들의 의문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이다.
Chapter 10: A Skeptical Objection
(12) Lo, are not those men full of their old carnal nature who say to us, “What was God doing before he made heaven and earth?”
If any new motion arise in God, or a new will is formed in him, to the end of establishing creation which he had never established previously how then would there be true eternity, when a will arises that previously was not there?
* 이 장에서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기 전에 무엇을 하셨는지 묻는 자들의 무모함을 말하고 있다. 위 구절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에 변화가 있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하나님 본질이 영원하다고 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Chapter 12: A Frivolous Answer
(14) “Before God made heaven and earth, he did not make anything. If he made anything, what else did he make except a creature?”
*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천지창조 전에 하신 일에 대해 묻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그것은 하찮은 물음이라 말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심과 하늘과 땅이 모든 피조물을 포함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기 이전에는 무(無)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Chapter 11: Past, Present, and Future
(13) …… but the whole is present, that no time is wholly present? Who will see that all past time is driven back by the future, that all the future is consequent on the past, and all past and future are created and take their course from that which is ever present?
*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한다. 현재였던 시간은 계속해서 과거가 되고 미래는 계속해서 현재가 되기 때문에 시간을 현존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어려움을 말한다. 영원에 있어서는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가변성도 아닌 불변성, 즉 모두가 현재이다. 모든 과거와 미래란 오직 한 분, 항상 현재인 그분(말씀, 하나님)에게 만들어져 흐르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무모한 질문을 하는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영원성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며 하나님의 영원성은 시간의 관계를 벗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Chapter 13: Before All Time
(15) How could they pass by, those countless ages, which you had not made, although you are the author and creator of all ages? Or what times would there
be, times not been made by you?
You made that very time, and no times could pass by before you made those times. But if there was no time before heaven and earth, why do they ask what you did then? There was no “then,” where there was no time.
* 아우구스티누스는 만약,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이전의 그 오랜 시간 동안 무엇을 하셨느냐고 묻는 이에 대한 답변을 하고 있다. 시간 그 자체를 주님이 만드신 것인데 주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만든 '시간'은 천지창조 이전에 적용될 수 없으므로 그것은 질문 자체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16) Your years are one day, and your day is not each day, but today, because with you today does not give way to tomorrow, nor does it succeed yesterday. With you, today is eternity.
You have made all times, and you are before all times, and not at any time was there no time.
*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마니교도들의 이러한 질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태초에 세상을 시간 안에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창조 이전에는 시간의 흐름이 없었고 다만 영원만이 있다는 말로 대답한다.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에는 하나의 형상에서 다른 형상으로 변화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었기에 시간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창조 이전에 ‘이전’이라든가 ‘이후’라는 말을 적용 할 수 없다.
Chapter 14: What Is Time?
(17) Yet I state confidently that I know this: if nothing were passing away, there would be no past time, and if nothing were coming, there would be no future time, and if nothing existed, there would be no present time.
* 시간들의 차이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두 가지의 시간 즉 과거와 미래의 경우,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존재한다고 말할수 있는가? 현재 또한 항상 과거로 옮겨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 또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현재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에, 과거로 옮겨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How, then, can these two kinds of time, the past and the future, be, when the past no longer is and the future as yet does not be? But if the present were always present, and would not pass into the past, it would no longer be time, but eternity. Therefore, if the present, so as to be time, must be so constituted that it passes into the past, how can we say that it is, since the cause of its being is the fact that it will cease to be?
* 시간의 존재는 ‘시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같은 것이다. ‘시간이 존재하느냐’ 하는 물음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시간이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여기 책상 위에 연필이 있다’는 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그렇다고 ‘있으면서 동시에 없다’는 시간의 존재와 비존재는 ‘존재를 결여한 존재’라는 말과 같은 의미에서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이를 인정하면서 시간의 본질과 존재를 파악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실토한다.
Chapter 15: Can Time Be Long or Short?
(19-20) Let us see, then, O human soul, whether present time can be long. …… If any point of time is conceived that can no longer be divided into even the most minute parts of a moment, that alone it is which may be called the present. It flies with such speed from the future into the past that it cannot be extended by even a trifling amount. For if it is extended it is divided into past and future. The present has no space. 그러니 인간의 영혼이여, 현재의 시간이 길 수 있는지를 고찰하여 보자. 그러나 현재는 그 어떤 공간도 가지고 있지 않다.
* 15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우구스티누스는 100년에서 1년, 1달, 하루로 시간을 좁혀가면서 결국 시간이 잴 수 없는 것임을 말한다. 100년을 현재라고 본다면 1년이 현재 그 외는 과거나 미래가 되고 1년, 1달, 하루로 시간을 줄인다고 해도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 나눌 수 없을 만큼 시간을 미세하게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현재’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길다고 부르는 시간은 어디에 있을까? 그곳은 미래인가? 미래는 “길 것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에 그것은 옳지 않다. 또한 길게 있는 시간은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가 존재하기 시작하여 길게 있을 가능성이 있는 현재가 되려면 현재는 결국 미세하게 나누어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에 대한 생각이다. 따라서 시간은 길고 짧음을 나눌 수 없다.
Chapter 16: Time and Measurement
(21) Therefore, as long as time is passing by, it can be perceived and measured, but when it has passed by, it cannot be measured since it does not exist.
(21) But it is passing time that we measure, and we make these measurements in perceiving them. As to past times, which no longer exist, or future, which as yet do not exist, who can measure them, except perhaps a man rash enough to say that he can measure what does not exist? Therefore, as long as time is passing by, it can be perceived and measured, but when it has passed by, it cannot be measured since it does not exist.
*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시간의 간격을 의식하고 그것들을 서로 비교하며 길고 짧음을 측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것을 측정할 수 없음으로, 더 이상 존재 하지 않는 지나간 시간과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시간을 측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시간은 지나가고 있는 중에만 측정할 수 있지만 그 ‘지나가는 도중’이라는 것은 인간이 인식하기 어려울 정도로 나누어진 것이기 때문에 결국 시간은 측정할 수 없는 것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Chapter 17: Prophecy and History
(22) Where did they who foretold things to come see them, if they do not exist? A thing that does not exist cannot be seen. …… Therefore, both future and past times have being.
* 아우구스티누스는 미래를 예언하여 맞춘 사람들, 또는 과거의 사건들을 내면의 통찰로써 현재, 미래와 구별하여 말하는 사람들을 근거로 하여 미래와 과거는 명확히 존재하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길고 짧음을 잴 수 없고 측정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분명히 시간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 존재하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반대로 보이지 않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22) If such things were nothing at all, they could not be perceived in any way. Therefore, both future and past times have being.
* 그럼에도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의 존재여부를 ‘존재하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도 식별될 수 없다’는 명제를 통해 알아낸다. 아직 현존하지 않는 사물과 지나간 사물에 대해서 식별한다는 것은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반증이기 때문이다.
Chapter 18: Induction and Prediction
(23) If future and past times exist, I wish to know where they are. They are there neither as future nor as past, but as present.
* 이 부분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와 미래의 존재 유무에 대한 성찰을 하고 있다. 현재에 있다는 것만 알고 있다는 것을 보았을 때 과거와 미래의 시간은 바로 현재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알게 된다. 자신이 과거에 대해 회상하거나 미래의 일에 대해 생각할 때 그 시점은 바로 현재이기 때문이다.
For if they are in that place as future things, they are not yet there, and if they are in that place as past things, they are no longer there. Therefore, wherever they are, and whatever they are, they do not exist except as present things.
*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은 현재의 시간으로가 아니면 사유될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미래의 시간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존재하지만 그것에 대한 계획을 행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더 이상 미래가 아닌 현재의 시간에 속한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시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존재하지만 그것의 심상을 마음에 그릴 때 그것은 여전히 나의 기억에 있으므로 이 역시 현재에 속한다고 말하고 있다. 미래의 사건들은 아직 존재하지 않고, 그것들이 아직 현존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현존하지 않으면 전혀 볼 수 없으나, 지금 있고 보이는 원인과 표시 등의 현재의 것들로부터 예측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24) These conceptions are already existent, and those who predict the future fix their gaze upon things present with them.
* 미래를 예견하는 예언자들은 결국 현재를 토대로 미래를 예언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결국 자신이 어떤 목표를 세우거나 미리 생각할 때 그것은 현재에서 보는 미래이며 이러한 인식을 통하여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 현재의 상황을 보고 미래를 예측하고 예언한다는 것이다.
Chapter 19: A prayer for Light
(25) Or is it rather that you teach things present concerning what is to come? what does not exist surely cannot be taught.
* 우리는 하나님이 미래의 사물들을 어떤 식으로 가르치시는지를 모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존하지 않으면 확실히 가르칠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와 대조하며 하나님의 가르치는 방식을 이야기하지만 너무 위대해서 하나님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고 그 한계를 인정한다.
Too distant is this way for my sight. It is too strong for me, and of myself I will not be able to attain it. But with your help I will be able to attain to it, when you will give it to me, you, the sweet light of my hidden eyes.
*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시간의 길이를 재는 것에 큰 어려움을 느끼고 또 놀라움을 느끼고 있다. 비록 시간에 대해 많은 사고와 인식을 가졌으나 이러한 시간의 길이를 재는 것에 대해 어려움을 느껴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원하며 깨달음을 찾으려 하고 있다.
Chapter 20: Three Kinds of Time
(26) It is now plain and clear that neither past nor future are existent, and that it is not properly stated that there are three times, past, present, and future. But perhaps be said that there are three times, the present of things past, the present of things present, and the present of things future. These three are in the soul, but elsewhere I do not see them: the present of things past is in memory the present of things present is in intuition; the present of things future is in expectation. If we are permitted to say this, then I see three times, and I affirm that there are three times.
*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은 어떤 방식으로 엄밀하게 명시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백한다. 그는 무엇보다 시간의 존재를 시간의 세 존재 방식과 연결하여 설명한다. 그러면 과거와 과거 일의 현재는 어떻게 다른가? 현재와 현재 일의 현재 그리고 미래와 미래 일의 현재가 어떻게 다른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에 따르면, 그 차이는 과거나 현재 또는 미래라는 그것 자체보다도 지나가고 없으며 오지 않아 알 수 없는 시간의 측량 문제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인식하는 데서 생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시간이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가? 어디에 존재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아우구스티누스가 객관적 시간 이해에서 주관적, 심리적 시간으로 관점을 선회하는 것은 객관적 시간의 부재라는 역설적 분석에 기인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므로 과거는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는 있는 듯 보이지만,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과거와 미래로 나누어지고 현재는 시간의 연장(延長)을 지니지 못하므로 길이가 없는 것이 어떻게 ‘긴 시간, 짧은 시간’처럼 있을 수 있는가? 그러므로 객관적 시간은 사실상 그 길이를 측정할 수조차 없는 것으로 과거, 현재, 미래 그 어느 것도 없다는 역설이 생긴다. 이러한 객관적 시간의 분석에 이어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가지 시제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현재에 세 가지 시제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은 바깥 대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영혼)에 있다고 본다.
Chapter 21: Measures of Time
(27) From where, except from the future? By what path, except by the present? To what place, except into the past? Therefore, it is from that which does not yet exist, by that which lacks space, and into that which no longer exists. …… We do not say single, or double, or threefold, or equal, or anything else of this sort in the order of time, except with regard to tracts of time.
* 시간은 어떻게 측정될 수 있는가?
시간의 방향성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이 미래에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흐르는 것이라 한다. 미래를 시간성의 본질로 설명하지 않는다. 미래가 어떤 큰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 다음에 따라 나오는 것이다. 미래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음의 연장(distentio animi)의 의미에서 시간의 본질을 미래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원을 미래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영원을 통해 미래를 제거했다. 결국 시간 측정이란 객관적인 대상으로서의 시간 측정은 불가능하고 세 가지 양태, 즉 마음의 활동인 기억, 직관, 기대의 상호 일치 속에서 영혼 안에서 파악된다. 그래서 시간을 “영혼의 팽창”이라고까지 했다. 과거와 미래는 더 이상 없고 현재는 연장을 가진 것이 아니지만 시간은 영혼에서 그 실재성을 확보한다. 시간 측정은 그 자체로서는 불가능하지만 인간의 영혼에 의해서 가능해진다.
Chapter 22: A New Task
(28) They are most clear and most familiar, but again they are very obscure, and their solution is a new task.
* 아우구스티누스는 가장 복잡한 수수께끼를 설명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는 자신의 무지를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이야기하며 운을 띄운다. 하나님의 성경에 대한 이해를 갈구하는 것을 사랑하고, 그 사랑하는 마음도 하나님이 주셨다고 언급하며 하나님께 복잡 미묘한 수수께끼의 이해에 대해 호소한다.
Chapter 23: Bodily Motion as Time
(29) I have heard from a certain learned man that the movements of the sun, moon, and stars constitute time, but I did not agree with him. Why should not rather the movement of all bodies be times?
* 학자들은 해와 달과 별들의 움직임 및 시간과 관계가 밀접한 지구와 태양의 운동이 곧 시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태양의 움직임이 시간이라는 것은 물체의 움직임이 곧 시간이라는 의미와 같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장한다. 물체의 움직임이 멈추어도 시간은 계속 흐르기 때문이다.
(30) I desire to know the power and the nature of time, by which we measure bodily movements, and say, for instance, that this movement is twice as long as that.
When at the prayer of the heavenly bodies constitute periods of time. when at the prayer of a certain man, the sun stood still until he could achieve victory in battle, the sun indeed stood still, but time went on. Therefore, I see that time is a kind of distention. 어떤 이가 싸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기도를 통해 해를 멈춰 서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해는 멈춰 섰지만,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싸움이 끝날 때까지 많은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시간을 일종의 연장(extension)으로 여깁니다.
* 시간은 어떤 연장임.
이 예는 성경에서 여호수아가 전투할 때 태양을 멈추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도한 후 전투를 하는데 그 기도가 이루어져 태양은 멈췄으나 시간은 흘렀다는 전투이다. 만약 물체운동이 시간이라 하면 태양이 멈추었을 때 모든 것이 멈추어야 한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는 멈추었으나 시간은 계속 흐른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을 일종의 연장이라 여기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해와 달과 별의 운동이 시간이라고 하는 이론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 이론은 모든 물체의 운동이 곧 시간이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가 알고 싶었던 것은 인간이 물체의 운동을 재기도 하고 그 시간을 서로 비교도 하는 그 시간의 본질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시간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장소는 인간의 마음(homo interior)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Chapter 24: Measures of Movement
(31) But I do not hear that the movement of a body constitutes time: this you do not say.
(31) But if we can mark off the distances of the places from which and to which the body that is moved goes-or its parts, if it is moved as on a lathe-then we can say in how much time the movement of that body, or its part, from this place to that, is completed. Since the movement of a body is one thing and that by which we measure how long it takes another, who does not perceive which of the two is better called time? For if a body is sometimes moved in different ways and sometimes stands still, then we measure in time not only its movement but also its standing still.
움직임 멈춤
a지점 b지점
*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은 물체의 운동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대해 반박하며 시간은 우리가 시간으로 측정하는 물체의 운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물체란 움직일 때가 있고 멈출 때가 있는 것으로서 우리는 운동뿐만 아니라 정지 상태를 시간으로 재는 것이다.
Chapter 25: The Deepening Problem
(32) I confess to you, O Lord, that I do not yet know what time is, and again I confess to you,…… Woe is me, who do not even know what I do not know! Behold, O my God, before you I do not lie. As I speak, so is my heart. “You will light my lamp, O Lord, my God, you enlighten my darkness”
*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한 답답함을 하나님께 가르침을 원함으로써 깨달음을 얻기를 원하고 있다. 자신의 상태가 어둠이 그려진 상태로 표현함으로써 주님에게 등불을 켜달라고 간구함으로써 자신의 답답함을 표현하고 명확하게 해결되길 바라고 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그는 무지함조차 모르는 나약한 존재임을 고백하며 애석해 한다. 이 부분은 그의 겸손함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 마음에 빛을 비춰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한다.
<시편18:28> 하나님, 정녕 당신께서 저의 등불을 밝히십니다. 저의 하나님께서 저의 어둠을 밝혀 주십니다.
Chapter 26: The Definition of Time
(33) ……, I measure the motion of the body in time. But again, do I not measure time itself? …… How, then, do I measure time itself? Do we measure a longer time by a short one, just as we measure the length of a rod by the length of a cubit?
For this reason it seemed to me that time is nothing more than distention: but of what thing I know not, and the marvel is, if it is not of the mind itself? 내가 시간을 연장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하겠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의 연장이옵니다. 이것이 내게는 경이로소이다. 아마도 내 영혼의 연장인 듯싶습니다.
Yet I do not measure the future, because it does not yet exist: I do not measure the present, because it does not extended in space; I do not measure the past, because I do not measure the past, because it no longer exist, What, then, do I measure? Time that pass, but are not yet past?
*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이 운동에 의해 측정될 수 없다면 어떻게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시간 측정의 문제를 다시 제기한다. 그는 영혼(mind)에 의해서 측정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과거는 ‘이미 없는’ 것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며 현재는 순간적으로 지나가기 때문에 연장(distention)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간 측정은 시간 그 자체로는 불가능하지만 우리 영혼에 의해 인간의 내면에서 측정된다 할 것이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영혼 속에서 마음의 눈으로 지나간 일을 지금 눈앞에 그려보는 행위이며, 기대는 이런 마음의 눈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앞서 생각하며 그것을 지금 눈앞에 그려보는 행위다.
Chapter 27: Where Time is Measured
(34) O my mind, and attend firmly. …… Before it sounded, the voice was to come, and could not be measured because it did not yet exist, and now it cannot be measured because it no longer is. 내 영혼아, 굳게 서서 주의를 집중하라! ……
* 이 대목에서 볼 수 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고는 그가 시간을 경험하는 것이 내부에 있는, 즉 영혼에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또 이 영혼 안의 경험을 통하여 시간의 길이를 재거나 정할 수 있는 것을 소리를 측정하면서 깨달은 것이다.
While passing away it was being extended over some tract of time, when it could be measured for the present has no space. …… Yet do we measure tracts of time, although not those which as yet are not, not those which no longer are, not those which are prolonged without a break, not those which have no limits.
* 들려오는 소리를 측정하려면 그 시작과 끝을 측정하여야 한다. 소리가 나기 전이라면 없는 것(미래)이니 그 길이를 잴 수 없다. 그러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해서 끝나지 않았다면(현재)소리는 계속 연장되고 있으므로 얼마나 길다 짧다 이야기할 수 없다. 또 어느 소리가 더 길다고 비교할 수도 없다. 소리가 끝나면 이미 없는 것이므로 잴 수 없다.
(36) It is in you, I say, that I measure tracts of time. The impression that passing things make upon you remains, even after those things have passed. That present state is what I measure, not the things which pass away so that it be made.
*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을 재는 것에 대한 총체적인 깨달음이 드러난 구절이다. 이 구절에서 시간을 잴 수 있는 곳을 안이라고 표현 하였다. 즉 마음에서 라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가 길고 짧음은 결국 과거에 대한 기억이 길고 짧음에 의해 그리고 기대가 길고 짧은 것에 의해 결정 된다고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So it is carried out, as long as his present intention transfer the future into the past, with the past increasing by a diminution of future, until by consumption of future the whole is made past.
* 즉 시간(소리)이란 미래에서 와서 현재를 지나 과거로 사라지는 시간은 무(無)에서 와서 무(無)로 지나가는 과정이다. 즉 없는 것이 전제가 되어 시간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시간은 항상 흘러가 버리고 과거로서만 존재하며, 결국 시간은 ‘필멸’로만 나아가게 되며 인간의 삶은 그 가운데 있다.
T. S. Elliot 「네 개의 사중주」: 번트노트
Time present and time past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Are both perhaps present in time future아마 모두 미래의 시간에 존재하고
And time future contained in time past.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에 포함된다(189).
Chapter 28: The Mental Synthesis
(37) But how is the future, which as yet does not exist, diminished or consumed, or how does the past, which no longer exists, increase, unless there are three things in the mind, which does all this? It looks forward, it considers (intuits), it remembers, so that the reality to which it looks forward passes through what it considers in to what it remembers. Who, then, denies that future things are not yet existent?
* 아우구스티누스의 질문은 우리 마음의 기대, 직관, 기억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가 무언가를 할 때 가지는 기대감은 미래의 것을 소모해 가며 직관을 통해 과거를 쌓으며 이 과정에서 기대감은 점점 짧아지고, 과거는 점점 늘어나게 만든다. 기대감이 무너지면 모든 활동이 끝이 나기 때문에 모든 인류는 저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38) The more this is done and done again, so much the more is memory lengthened by a shortening of expectation, until the entire expectation is exhausted. When this is done the whole action is completed and passes into memory. 이렇게 연거푸 진행이 되어 갈수록, <기다림>이 소멸될 때까지, <기다림>은 짧아지는 반면 <기억>이 길어진다. 이 모든 행동이 끝나면 <기억>으로 옮겨지고 마는 것이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미래와 현재와 과거를 <기다림>, <지켜봄>, <기억>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기다림>, <지켜봄>, <기억>을 시를 암송하는 과정에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다. 시 전체에 <기다림>이 미치고 있다가 시를 읊조릴 것을 <기다림>에서 이미 읊조린 <기억> 속으로 구절이 옮겨지고 그 과정을 <지켜봄>으로써 미래가 과거가 된다고 설명한다. 결국 시간 측정이란 객관적인 대상으로서의 시간 측정은 불가능하고 세 가지 양태, 즉 마음의 활동인 <기억>, <지켜봄>, <기다림>의 상호 일치 속에서 영혼 안에서 파악된다. 따라서 시간을 인간 영혼 속에 내면화시키는 것이 시간 이해의 열쇠이다. 과거와 미래는 더 이상 없고 현재는 연장을 가진 것이 아니지만 시간은 영혼에서 그 실재성을 확보한다.
Chapter 29: The One and the Many
(39) But since “your mercy is better than lives,” behold, my life is a distention, or distraction. But “your right hand has upheld me” in my Lord, the Son of man, mediator between you, the One, and us, the many, who are dissipated in many ways upon many things; so that by him “I may apprehend, in whom I have been apprehended,” and may be gathered together again from my former days, to follow the One.
* 우리들과의 중개자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으로 우리 곁에 온 것은 시간이 영원 속에 매개된 역사적인 사건이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이 바로 영원이 시간 속에 매개된 사건이며 여기서 영원자의 사랑이 나타난다 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이 유한하며 시간적인 인간이 영원자에게로 다가갈 수 있고 이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는 것(distracted amid times)을 막을 수 있고 즐거움(delights)을 얻을 수 있다. 결국 여태까지 시간에 대한 깊은 생각 끝에 인간의 인생은 기대, 직관, 기억으로 소멸하여 가는 불완전한 인생이며 그 영혼은 소멸로 끝을 맺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오른손을 붙드심으로 자신의 인생을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허무하게 소멸하는 인생이 아니라 앞에 있는 것, 즉 영원한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쫓아가는 믿음을 바탕으로 변화되었음을 말한다.
Chapter 30: God Alone Is Eternal
(40) May they also reach out forth “to those things which are before,” and understand that you are before all times, the eternal creator of all times, and that times are not coeternal with you, nor is any creature such, even if there were a creature above time.
그들로 자기들 앞에 있는 것들을 향하게 하시며, 만대의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만대 이전에 계시며 시간을 넘어서는 피조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공존하는 피조물이 없음을 깨닫게 하소서.
*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 이전에 무엇을 하셨는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에는 아무 것도 하시지 않고 계셨다가 왜 갑자기 무엇을 만들려고 생각을 하셨을까? 이 공허한 질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① What did God do before he made heaven and earth?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 이전에 무엇을 하셨는가?
Let them see, that there can be no time without creation, and let them cease to speak vanity. 그들로 하여금 세계창조 없인 시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허망한 것을 그들이 말하지 말게 하소서.
즉, 하나님이 태초에 세상을 시간 안에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창조 이전에는 시간의 흐름이 없었고 다만 영원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② How did it come to his mind to make anything, since he had never before made anything?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에는 아무 것도 하시지 않고 계셨다가 왜 갑자기 무엇을 만들려고 생각을 하셨을까?
하나님의 세계 창조가 시간 안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질문이므로 올바른 물음이 될 수 없다.
Chapter 31: Unchanging Thought, Unchanging Act
(41) Not so does it befall you who are unchangeably eternal, that is, truly eternal, the creator of minds. Therefore, just as in the beginning you have known heaven and earth without change in your knowledge, so too “in the beginning you made heaven and earth” without any difference in your activity.
* 이 장에서는 하나님의 지식이 인간의 지식과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 주고 있다. 어떤 지식을 아는 것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시를 읊는 예를 들면서 설명한다. 그는 시를 암기하는 것에 의해 얼마나 많은 부분이 지나갔고 얼마나 많은 부분이 남았는지를 알지만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초월한 그 자체로 진리인 무화(無化)영원의 존재임을 고백한다.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와서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인간은 불안함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과거와 미래도 없는 영원의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3. 결어
현 시대에서 사람들은 과거에 대해 후회하고 미래에 대하여 미리 내다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미래를 내다봄으로써 그 미래의 좋지 않은 일에 대해 대비하고 싶어 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과거와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과거와 미래의 존재 유무에 대하여 성찰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하는 과정에서 시간과 물체의 움직임의 관계에서 무엇이 먼저인가에 대한 것을 생각한다. 결론으로 시간과 물체의 움직임은 별개라고 내린다.
그 후 시간의 장단을 재는 것에 대하여 또 한 번 생각을 하게 된다. 성찰을 하는 과정에서 시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까지 이어지고 그것은 결국 과거 현재 미래를 나누는 과정이 우리 내부, 즉 영혼의 경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우치게 되는 것까지 이어진다. 여기서 과거는 우리가 현재로서 인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기억하고 있는 경험이요, 미래는 우리가 어떤 일을 현재를 토대로 계획할 때 기대가 미래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끊임없이 시간에 대해 성찰한 결과 우리 영혼의 끝은 소멸로 이루어 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오른손의 붙드심으로 자신의 인생을 변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에 대한 영원한 믿음과 찬양만이 소멸을 막고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깨달음을 얻게 해준다고 말하고 있다.
4. 토론주제
1. 제5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기술공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모든 사람의 재능을 하나님이 정해 주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재능은 하느님이 주신대로 정해져 있는 것인가? 후천적인 노력으로 계발하여 얻을 수 있는 재능은 없는 것인가?
2. (제14장) 우리는 일상의 대화에서 시간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만큼 시간은 우리가 친숙하게 많이 말하게 되는 것인데, 과연 시간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과거와 현재, 미래는 명확하게 존재하는가?
3. 무(無)로부터의 창조 (제5장)
제5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무로부터의 창조설을 설명한다. 그 이유는 무로부터의 창조설이 하나님의 주권과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플라톤의 형성설 에서는 원초적 질료(1. 형식을 갖춤으로써 비로소 일정한 것으로 되는 재료. 물질의 생성 변화에서 여러 가지의 형상을 받아들이는 본바탕이다. 2. 형식을 갖춤으로서 비로소 실체로서, 실현되는 소재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를 형상(形相)과 함께 존재(存在)의 근본 원리라고 생각했음 이를테면 건물의 구조(構造)는 형상(形相)이며 재목(材木)은 질료임)로부터 창조되었다 주장하는데, 과연 이 세상(시간)은 어떤 절대자에 의해 창조된 것인가? 아니면 어떤 질료부터 형성된 것인가? 이에 관해 토론해 보자.
4.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와 미래를 현재의 시점으로 보고 그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기억의 경험이고, 미래를 현재를 토대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기대감을 가지는 것이라고 한다. 과거 현재 미래를 나누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의견에 동의하는가? 과거와 미래를 나누는 기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5. 내면 속의 시간
시간은 그 사람이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흐르는 속도가 다르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시간은 가변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면서 시간이 빨리 갔던 때가 있고 시간이 천천히 간다고 느낀 때가 있을 것이다. 각자의 경험을 이야기해 보자.
6. 시간 안에 있는 모든 사건 (제11장)
아직 없고 앞으로 있을 사건이나 현재 눈앞에 있는 사건이나 지나가서 없어진 사건들을 하나님은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현재의 순간으로 본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미래와 현재, 그리고 과거가 있다. 미래에 대한 기다림, 현재의 순간, 또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살고 있는데 각자는 미래와 현재와 과거 중 어느 것을 중요시하며 살고 있는가?
7. 영혼 속의 기억 (제26장)
I do not measure the past, because it no longer exists, What, then, do I measure?
“나는 과거를 측정하지 않고 있으니,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면서도 자신의 영혼 속의 기억에 의해 과거가 존재한다고 한다. 각자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있어 잊히지 않는 일이 있는가? 이에 대해 토론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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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단한 끈기가 필요한 작업을 수행하고 계시는군요! 저는 아이온님이 <고백록>과 관련하여 올리시는 글을 계속 읽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아이온님의 글을 따라 1권부터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조만간 <고백록>을 읽기 시작하면 아이온님이 오래 전에 올리신 글에 댓글로나마 저의 의견을 올리겠습니다. 많은 글을 읽느라고 몸이 상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아, 아닙니다.^^ 저야 단지 고백록 어디든 같이 읽어낼 준비가 되어 있을 뿐 여전히 보충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학생들과 이 책을 같이 읽으며 많은 재미난 토론을 해가는 중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제11권은 영원과 시간의 관계에 대한 그의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고 있지요. 이후 서구의 시간론이 이 분의 생각을 거의 뛰어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서구는 참 오래 전에 근대화 과정을 거쳤고, 또 다른 한편 가장 어렵고 기본적인 철학 문제에 대해 서구사상가들이 상당히 단일한 생각들을 해왔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지요. 20세기 시간현상학은 다분히 아우구스티누스주의적입니다. [에크리]에도 그가 자주 언급되더군요.
저는 Henry Chadwick의 영역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박사과정에 있을 때 지도교수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전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넓은 의미에서 종교/문화 심리학의 입장을 취하여 그의 도덕 이론을 검토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녀와 더불어 아우구스티누스를 논의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저는 아우구스티누스에 큰 관심이 없었지요. 생각해 보면 그녀와 더불어 정신분석학과 문화인류학 등을 읽고 많이 배웠지만 정작 그녀에게서 가장 크게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도외시했던 것 같습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아직 아우구스티누스에 큰 관심은 없습니다. 우선 라틴어를 배울 시간이 없어서^^ 종교적 경험의 차원에서, <고백론>은
흥미있는 책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말로 하느님 안에서 평화를 찾았을까요? "Do not hide your face from me. Lest I die, let me die so that I may see it." (I, v.) 그리고 이 대목, "But who calls upon you when he does not know you? For an ignorant person might call upon someone else instead of the right one." (I, i) 아우구스티누스의 아동기에 대한 입장은 오랜 세월을 거친 후에야 "순진무구한 아동기"라는 패러다임을 파괴하면서 정신분석학을 통하여 수용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헤게모니를 장악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지도교수님과 아우구스티누스를 같이 읽으셨더라면 어땠을까요? Henry Chadwick 번역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이분이 쓴 짤막한 아우구스티누스 소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슈어만 교수가 추천해 준 John Ryan의 58년 번역을 주 텍스트로 삼고 있습니다. 종교적이지 않으면서 정교하고 제 정서에 맞는 것 같습니다. 다행히 저는 다른 영어번역본과 불어/라틴어 대역본이 있어 텍스트에는 구애받지 않고 읽는 쪽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에 대한 가장 신뢰할만한 소개서는 스콜라 철학의 대가인 E. Gilson 것이 좋고 저의 경우 신부서품을 받았던 슈어만 그리고 역사학자 P. Brown 등의 자료도 종종 들춰보는 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동기가 순진무구해서 죄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는 걸 자주 강조한 점 정신분석적이지요.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묘사하고 있는 동승처럼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에 9년 동안이나 묶여 있었던 이유가 바로 한살림님이 인용하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지요? 후일 그는 하나(One)님을 "outside myself"에서만 찾고자 했던 것을 한탄합니다. 19세 무렵 키케로의 저작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지혜를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 다음 성경을 펼쳐보는 데 그 내용이 젊은이의 눈에 너무도 황당했던 게지요.
이런 점에서 칸트의 순수의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divine will"을 모델로 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그 부분이 칸트와 셸링이 말하고 있는 선과 악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겠구요. 우리의 의지의 신체적인 측면과 정신적인 측면은 사실 늘 다투는 형국이라고 볼 때 말입니다. 위 질문에 대한 정신분석적인 아우구스티누스의 답을 찾으라면 저는 먼저 제13권 ( XXXII, 47)에 있는 구절, "And even as in his soul there is one power which is master by virtue of counsel and another made its subject so as to obey, so also for man in the corporeal order there was made woman.
Becaus of her reasonable and intelligent mind she would have equality of nature, but as to bodily sex she would be subject to the male sex, just as the active appetite(impulsion) is made subject, so as to conceive right and prudent conduct from the rational mind."과 (XXXIV, 49)의 "Next you formed the living soul of the faithful through affection kept in order by a manly continence. Then, after your own image and likeness, you renewed the mind, made subject to you alone and needful to imitate no human authority. Its rational actions you made subject to the primal subject, as is woman to man."
을 들고 싶은데 어떤 해석이 가능하신가요?
결국 저로 하여금 <고백록>을 다 읽게 유혹하시는군요^^ 좀더 읽은 후에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세미나I>에서 라캉이 관심을 가진 아우구스티누스의 텍스트는 <교사론>입니다. <고백록>을 다시 읽으니 I, viii (13)에 관계 있는 언급이 있습니다. 제가 언급한 교수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우리에게 - 정신분석학적 인문학자에게 - 무엇을 가르치는가, 에서 출발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신분석학자를 항상 놀라게 합니다.
네, 저도 [세미나 I]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서른다섯에 쓴 대화록 [교사론]을 논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고백록] 제11권만 하더라도 논의의 출발점이 언어의 문제이지요. 언어의 단절이 사상의 단절을 가져온다고 보구요. 언어와 시간-영원-영혼 사이에 대단히 긴밀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라캉 역시 그 지점을 중시했던 것 같습니다. 사건은 시간이나 언어나 그것의 핵심적인 문제는 “nihil”이라는 것을 아우구스티누스가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특히 하이데거 시간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요. 후일 가다머의 해석학에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언어관과 시간론은 매우 중요한 이슈가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부자 역시 언어의 본질에 대해서 깊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게 1600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재발견된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의 아들 아데오다투스는 천재 중의 천재였던 것 같습니다. 그가 자기 아버지만큼 살았더라면 라틴 시대의 사상과 이념이 전혀 다른 차원으로 전개되었을 것 같지요? 언제 차분히 [세미나 I]과 아우구스티누스 [교사론]을 면밀히 대조하면서 읽어봐야겠습니다.
철학자와 (종교)심리학자는 같은 텍스트를 읽지만 정말 다른 것을 '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에고심리학자인 에릭슨은 창조적 인물의 자기동일성(ego-identity) 형성의 표본을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발견합니다. 에릭슨의 해석에 대한 비판이 이후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분석학적 활동의 한 분야를 이룹니다. 가령 <고백록>을 통해볼 때 인간 존재의 발달 단계 같은 것. 그래서 아이온님의 설명을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현대 철학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이 아니라 사유가 어떤 점에서 중요할 수 있는가를 배울 수 있어서 좋습니다. 정신분석학적 시각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학에서 사람으로-있음이 "조화"보다는 "갈등"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는 레비나스의 <탈출에 대하여>에 따라서 나와-나의-갈등이라는 주제를 요즘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갈등에 있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God)은 주인 기표 같은 것으로서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사람으로-있음을 고정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아직 깊이 생각해보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고백록>을 계속 읽을 구실들을 마련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앞으로도 계속 아이온님의 도움을 받겠습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세미나II>에서 라캉은 시계의 발명에 따른 시간의 환원을 다루고 있습니다.
I-IX까지는 인간존재의 발달과정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요? 자기동일성 역시 지겹도록 거론되고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고백록]을 덮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요소를 거두어 내면 전혀 다른 아우구스티누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레비나스 초기 저작도 함께 읽어가시는군요. 저도 어제밤 레비나스 서책들과 메를로-퐁티 책들에 덮인 먼지털며 이들을 일이차 자료로 재분류를 하였지요. 레비나스 옆의 앙리 책들에도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네요.^^ [고백록]을 [나는 진리다]의 앙리 입장을 통해서 읽으면 가장 맛갈스러울 거라 생각하고 있지요. 오늘은 레비나스가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언급한 게 있나 찾아보는 걸로부터 시작해야 겠네요
여기저기 사소한 일에 마음이 빼앗겨 책을 거의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를 일독한 것과 제임스의 중편 하나 읽은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고보니 대학생 마르크스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하나도 읽었습니다. 여하튼 지금 막 <고백록> 2권을 끝내었는데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입니다. "I became to myself a region of destitution" (II, x (18)). 오래 전에 읽은 레비나스의 논문의 주제와 호응하는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4절에 이런 구절이 있더군요. "그가 모든 것을 허비했을 때에, 그 지방 전역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는 궁핍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라틴어 원문은 "ego ... factus sum mehi regio egestatis (une region de distte)입니다. 아구스티누스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구분이 "avergio"와 "convergio"인 것 같습니다. 전자가 결핍의 영역이 되겠지요. 아우구스티누스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 레비나스의 초월과도 상관이 있을 것 같군요.
제가 사는 곳 옆에 천주교 계열의 작은 대학이 있습니다. 거기서 <고백록>의 라틴어 원서를 하나 대출해 왔습니다. 물론 라틴어를 모르는 제가 읽을 수 없겠지만 손으로 만져 보기라도 하려고 말입니다. James J. O'Donnell이라는 이가 서문을 달고 상세히 주석하여 1992년 Oxford출판사에서 3권으로 펴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