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헌은, 자는 사정(士精)이며, 호는 만전당(晩全堂)이요,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처음 이름은 자정(自靖)이며, 판윤 기대항(大恒)의 손자이다. 임술년(1562)에 나서 임오년에 생원ㆍ진사시에 합격하고, 경인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과 호당(湖堂)에 뽑혔고, 갑진년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폐모론(廢母論)에 절개를 세우고, 정사년에 북으로 귀양갔다가 계해년에 판중추 부사가 되고, 갑자년(1624)에 목매어 죽였다. 그의 아내가 선조의 형 하원군 이정의 딸이라 궁중과 통하였다.
○ 기유년(1609) 11월에 판중추 부사 기자헌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고 겸하여 지난해에 참소를 입은 사유를 진술하였으며, 그의 아우 윤헌(允獻)이 소를 올려 그 형에 대한 전날 유순(柳淳)의 상소문 속에 있던 유박(帷薄)에 관한 말을 변명하였다. 《응천일기(凝川日記)》
○ 경술년(1610) 4월에 자헌이 당직(當直 당직청의 당직 금부도사)으로서 상언(上言)을 올려 자기가 부친의 첩을 간음하였다는 말에 대해 유순과 대질하고자 하니, 대신들에게 논의 하도록 명하고 유순을 잡아다 문초하였다. 유순이 두 차례의 형을 받고, “그 상소는 판서 송언신(宋言愼)이 시켜서 한 것이며, 소의 초안을 써서 보내왔었습니다…….”고 말하고, 또 이인장(李仁長)을 끌어대므로 모두 잡아 가두고 대질한 뒤에 언신은 풀어주었다. 전교하기를, “유순의 전후 진술이 급속히 바뀌어 헤아릴 수 없으니 반드시 진짜 공모한 사람이 있을 것인데 굳게 감추고 말하지 않으니 그 정상이 밉살스럽다. 각별히 엄히 국문하라.” 하였다. 《응천일기》
#모비(母妃)를 폐하여 서궁(西宮)에 있게 하다
일찍이 신해년 12월에 임금이 갑자기 대비를 모시고 창덕궁(昌德宮)에서 신문(新門) 안의 경운궁(慶運宮)으로 옮기더니 이내 대비를 남겨 둔 채 홀로 창덕궁으로 돌아오려고 하였다. 이에 대신과 삼사가 간했으나 오래토록 허락하지 않았다. 정계(停啓)하자는 의논이 사헌부에서 나와 정언(正言) 정온(鄭蘊)이 아뢰기를, “요사이 삼사가 합해 아뢴 것은 곧 한나라 공공의 의논인데도 전하께서 한결같이 굳게 거절하십니까. 오늘 문안하는 행차는 아들된 도리로서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백성들이 이에 대해 떠들썩하게 퍼뜨리기를 ‘반드시 대비를 그대로 남아 계시게 하고, 돌아오지 못하게 할 의사이다’고 합니다. 불행히 그대로 경운궁(慶運宮) 곧 황화방(皇華坊)의 신궁(新宮) 에 남아 계시리라는 백성들의 억측이 맞는다면 신은 마땅히 연(輦)을 범하여 목에 피를 내고 옷자락을 당겨 울면서 간하여 대궐문 밖에서 죽겠습니다” 하였다. 아뢴 글이 들어 갔으나 비답(批答)하지 않고 전교하기를, “지금 창덕궁으로 돌아오는 일은 실로 부득이 한 데서 나온 것이다. 12월 그믐에는 틀림없이 영구히 경운궁으로 옮기라는 하교를 전후에 되풀이 하려는데, 정언 정온이 감히 이치에 맞지 않는 말로써 임금이 행차하는 날에 시끄럽게 하니 사리를 알지 못하면서 기탄없이 날뛰는 형상이 매우 놀랍다. 우선 지방관으로 내보내라” 하였다.
○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이호민(李好閔)이 차자를 올리기를, “정온의 이번 아뢴 일은 명백하고 간절하옵니다. 전하께서 처음에는 대비에게 문안하기가 편리하지 못하다고 이유를 붙이시고 또 겨울 추위에 적당하지 못하다고 말씀하셨사온데, 임금이 거처하시는 데는 조화(造化)를 따라 겨울에는 따스하게 하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하여 절후 따라 알맞게 취하는 것입니다. 이에 신 등은 전하의 이 명령이 반드시 경운궁으로 옮기시려는 데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사오나 외간의 헛소문이 뒤따라 시끄럽게 나오니 신은 정온의 말이 과연 이치에 맞지 않고 근거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정온의 논한 바는 신들도 같이 수행하면서 일제히 청한 것이온데 정온이 떠나가면 신 등이 어찌 감히 그 관직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명륜록》
○ 정온을 특명으로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임명하니 삼사에서 도로 명령을 회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는 창덕궁 재건을 끝마치고 임금이 옮겨간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요사스러운 말이 떠돌아 새 궁전이 임금에게 이롭지 못하다 하므로 경운궁으로 돌아와 거처하였다. 그런데 임금과 대비 사이에 틈이 있으므로 외간에서 여러 가지로 말을 전하니 이원익이 또한 차자를 올려 이를 논하였다.
○ 계축년 옥사에 이위경ㆍ정조ㆍ윤인 등이 비로소 “모후가 안으로는 무고(巫蠱)를 일으키고 밖으로는 반역의 모의에 응하였으므로 어머니의 도리가 끊어졌다”는 말을 주창하였다. 자세한 것은 위에 나타났다.
○ 갑인년 2월 25일 저주와 흉서(兇書)의 두 가지 일을 들어서 서울과 시골에 교서를 반포하였다.
○ 을묘년 1월에 서울과 시골에 교서를 반포했는데 그 대략에, “역적의 괴수 제남(悌男)이 처음에 영경(永慶)과 함께 무신년의 화(禍 무신년에 광해(光海)가 세자(世子)에서 폐위될 뻔한 일)를 일으켰는데, 그 흉악한 계책이 이루어지지 않자 양갑(羊甲)ㆍ우영(友英)등과 가만히 결탁하여 밖에서 난을 만들고 응희(應希)ㆍ금란(金蘭)등과 몰래 통하여 안에서 요망한 짓을 했으니, 그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죄상은 다 말하기가 어려우므로, 우선 저주ㆍ흉서의 두 가지 일만 말한다. 내가 일찍이 현재 드러난 저주에 쓴 물건의 종류와 요망한 짓을 한 날짜를 기록하여 비망기(備忘記)를 만들어 친히 국문할 때에 빈청(賓廳)에 내려 보내어 여러 역적의 공초(供招)와 비교해서 살펴보니 부합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양궁(兩宮)과 양전(兩殿)을 해치려는 계획이 매우 흉악하고 참혹하였다. 여러 역적은 처단된 후에도 그 나머지 잔당들이 아직도 해독을 피워 금란(金蘭)ㆍ의일(義一)등은 편지로써 안팎으로 서로 통하였는데 파자(破字)한 비사(秘辭)는 음험하고 괴이하고 망측하였으며, 중국 관원에게 비밀히 하소연하여 흉계를 부려 화를 전가시키려고까지 했으니 더욱 마음 아픈 일이다. 이로써 저주의 사실과 흉서의 일은 여러 사람의 공술한 바가 남김없이 드러났으니 저들이 비록 지극히 흉악하여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하고자 도모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나인(內人)은 내가 차마 모두 법대로 처단할 수 없으므로 사약(死藥)을 내려 죽게 하고 그 나머지 무리들은 내버려두고 죄를 묻지 않겠다. 이에 두 마음을 가진 무리들이 아직도 스스로 불안해 할 것이며,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은 혹시 알지 못하게 될까하여 전후의 공사(供辭)를 대강 초하여 서울과 지방에 널리 고한다” 하였다. 《명륜록》
○ 이원익이, 반포한 교서를 보고 탄식하며, “이 일은 윤상(倫常)에 관계되는 것이니, 종척(宗戚)의 늙은 신하인 나 같은 자가 감히 한 번 죽음을 아까와하여 한 마디 없을 수 있으랴” 하고, 즉시 짤막한 차자를 올렸다. 이때 광해주가 대비를 버리고 창덕궁으로 옮겼다. 2월 6일에 정조ㆍ윤인등이 다시 대각(臺閣)에 들어가니 인심이 흉흉하여 두려워 하였다.
○ 9일에 이원익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은 수년 전부터 노병(老病)으로 물러가 있으면서 일찍이 한 번도 국청(鞫廳)에 참석하지 않았으므로, 죄인을 신문한 시말과 외간의 이야기는 전혀 그 자세한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지난 해에 유생들이, “대관(臺官)이 대비를 동요시킨다”고 하며 대관을 죄주자고 청할 때에 조정의 의논을 가만히 들으니, 대관은 다만, “대비를 따로 거처시켜야 된다”는 것을 말했을 뿐이고 실상 동요시키려는 뜻은 없었다고 합니다. 경연에서도 그런 등류의 이야기가 없지는 않았으나 신은 처음에는 의심하다가 나중에 의심을 버렸었습니다. 지난 번에 해당 관청에서 교서 반포할 일을 수의(收議)할 때에 신의 생각에는 이 일은 죄인을 국문한 곡절에 관계된 것이므로 물러나 국청에 참석하지 않았던 신이 알 바가 아니기 때문에 감히 다른 의견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길가에 전해지는 말을 들으니 인심이 흉흉하여 사람들은 머리를 맞대고 ‘이 일로 말미암아 장차 대비에게 영향이 미칠 것이라’ 고들 하니, 신은 놀랍고 간담이 서늘해지고 넋이 나가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비록 자식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자식은 어머니에게 효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와 자식의 사이는 명분이 지극히 크고 윤기(倫紀)가 지극히 중하온데 성스럽고 밝으신 전하의 시대에 어찌 대비를 동요한다는 이런 류의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조정에서 과연 이런 의논이 없었다면 신이 길거리의 뜬소문을 경솔히 믿고 미리 지껄인 죄를 피할 수 없사오니 신의 망녕되이 말한 죄를 다스려 나라 사람의 의심을 안정시키소서. 신은 선조(先朝)의 늙은 신하로서 충성은 정온에게 미치지 못하고, 죽는 것은 이덕형보다 먼저 하지 못하여 나라를 저버리고 임금을 속였사오니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12일에 또 비밀 차자를 올리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니 매우 놀랍고 마음이 아파서 불안하다. 내가 대비를 받드는 것과 백관이 대비를 조알(朝謁)하는 것이 전일과 다름이 없는데 경은 어느 곳에서 이러한 허황한 말을 듣고 문자에 나타내어 여러 사람의 귀를 현혹시키는가. 마땅히 바로 진술하여 대답하라” 하고, 사관 남명우(南溟羽)를 보내어 물어 아뢰게 하니 원익이 다시 아뢰기를, “지난 해에 대신(臺臣)이 이 말을 꺼낸 후로 갈수록 나라 사람들의 의심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근년 이후로 이 말을 꺼낸 사람이 사헌부와 홍문관에 배치되어 있는데 또 장차 저주와 흉서(凶書)에 관한 일을 반포하려 하니 신의 마음에 크게 의심하는 것은 이 때문이며 길가에서 떠도는 의심스런 말도 이 때문입니다. 신의 망녕된 차자는 실상 신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요 거리에 떠도는 말만 듣고 올린 것은 아닙니다. 한 두 사람의 외인에게 미루고 스스로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행위는 천한 서민도 부끄러워하는 바인데 더구나 신은 예전에 대신의 뒤에 끼어 있었으니 죽더라도 이런 짓은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답하기를, “불효가 어떠한 죄악인데 길거리의 뜬소문만 믿고 나를 의심하느냐. 어찌하여 나를 대우함이 도리어 길거리 사람을 대함만도 못한가. 경은 들은 데가 있을 것인데 한사코 말하지 않으니 내가 경에게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되었는가. 경의 아름다운 이름은 반드시 뒷날에 드러나겠지마는 나의 악한 이름은 어느 때에나 씻겨지리. 대비를 받드는 예절에 빠뜨림이 있는가. 조알(朝謁)하는 예절을 폐지한 적이 있는가. 대간 가운데 혹시 글을 올려 그렇게 하자고 아뢴 일이 있는가. 이미 의심할 만한 것이 없는데도 경은 의심하여 내가 묻는데도 대답하지 않으니 마음이 매우 불안하여 침식을 폐지한 지 수일이나 되었다. 경은 숨김없이 바른대로 진술하여 나의 죄를 물어 줌으로써 외인에게만 덕을 베풀지 말고 나도 돌보아 주오. 저주와 흉서는 모두 역적의 지휘에서 나온 것이고 모두가 궁녀들이 한 짓이니 어찌 대비와 관계가 있으랴. 의리가 밝지 못하고 사특한 의논을 마음대로 행하여 역적을 비호할 줄만 알고 임금은 있는 줄을 알지 못하여 혹은 이 저주와 흉서의 일을 실제가 아니라 하는 까닭에 내가 팔방에 교서를 반포하여 정상(情狀)을 알리는 것이다. 경은 양조(兩朝)의 원로로서 조정 의논에는 참여해 듣지 않은 것이 없는데도 도리어 죄인을 국문한 시말에 대해서 자세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하고 이러한 의심을 내니, 하물며 서울 안의 무식한 사람과 먼 지방의 소원하고 천한 사람이랴. 더욱이 오늘의 일은 내가 이런 의심하는 의논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그 일을 방지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대신이 먼저 의심하여 의심하는 사람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나를 불측한 지경으로 밀어 넣을 줄 생각했으랴” 하였다. 또 사관을 보내어 물어 아뢰게 하니 원익이 세 번째로 아뢰기를, “임금의 뜻이 해와 별처럼 밝으시온데 어리석은 신하는 거짓이 많고 망녕되어 만 번 죽어도 속죄하기 어렵사옵니다. 임금의 교서가 이에 이르렀으니 신은 바로 땅을 뚫고 들어가고 싶습니다” 하였다. 《명륜록》
○ 을묘년 1월 18일에 임금은 양사(兩司)를 불러 원익의 소를 내려 보이고 이내 전교하기를, “내가 평상시에 원익을 매우 후하게 대우했는데 원익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소를 올려 인심을 동요시켰으니, 나는 매우 놀랐다. 악명(惡名)을 임금에게 돌아가게 하고 좋은 명성을 자기가 뒷날에 차지하려는 것 뿐만 아니라 한 때의 시종과 대간들도 모두 죄의 그물에 돌아가게 하였으니 시종 대간들을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이 아니겠느냐. 어진 정승의 사업이 과연 이와 같을 수 있는가. 혹 불평을 품은 간사한 무리들이 흉악하고 참혹한 말을 만들어 내어 원익에게 권하여 이런 소를 만들게 한 것이 아닌가” 하였다. 《명륜록》
○ 정인홍(鄭仁弘)이 차자를 올리면서 여후(呂后)를 사당에서 내쫓은 고사(故事)를 인용하고 정조ㆍ윤인 등의 의논을 주장하여 의(㼁)를 우리 안의 돼지에 비유하였다. 먼저 그 편당들의 죄를 다스려 깃과 털이 떨어지게 하면 어리고 약한 의는 단지 우리 안의 불알을 깐 돼지일 뿐이라 하였다. 그리고 7신하를 의의 우익(羽翼)이라 하면서 “유명(遺命)을 전하고자 한다면 대를 이을 임금과 대신(大臣)을 불러들여 명백 정대하게 명령을 내려 가지고, 청천백일(靑天白日)처럼 할 것이지, 어찌 몰래 작은 편지를 척리(戚里)의 무리에게만 전할 수 있으랴” 하였다. 말이 매우 패역(悖逆)스러웠다. 이이첨(李爾瞻)의 무리는 인홍의 말을 표준을 삼아서 기세가 더욱 성하여 정조ㆍ윤인을 다시 등용하고, 대비를 폐하자는 의논이 점점 또 일기 시작하였다.
○ 이원익이 임자년 이후로는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는데, 이때에 와서 소를 올려 임금에게 자전한테 효도를 다하도록 간절하게 청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서 사자를 보내어 매우 꾸짖었다. 신동양(申東陽)이 지은 《청백당기사(淸白堂記事)》
○ 삼사가 합계하여 이원익의 관직을 삭탈하여 성문 밖으로 내쫓게 하고, 남이공(南以恭)은 위리안치 하도록 청했으니 남이공이 원익을 달래어 소를 올리도록 권한 때문이었다. 이에 비답하기를, “군신의 큰 의리는 어린 아이까지도 알고 있는데, 역적 정온(鄭蘊)이 앞에서 주창하고 완평(完平 이원익)이 뒤에서 잇달아 감히 불측한 악명(惡名)을 임금에게 부당하게 씌었으니, 위력으로서 진정 시킬 수는 없다” 하였다.
○ 3월에 원익을 먼 곳으로 귀양보내기를 또 청하였다.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 안전(安佺)등이 소를 올려 이원익과 남이공의 임금을 무함한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내가 평상시에 대비를 섬김에 효도를 다하지 못하여 궁중에서 망측한 참변을 만나고, 대신을 정성스럽게 대우하지 못하여 천고에 없는 악명을 얻게 되니 밤낮으로 내 자신을 책망할 뿐이요, 어찌 감히 남을 탓하랴” 하였다.
○ 원익을 홍주(洪州)로, 이공을 송화(松禾)로 귀양보내었다. 이때 원익이 오랫동안 충원(忠原)에 있으면서 항상 하늘을 쳐다보고 한숨쉬었다. 친구들이 보낸 한 됫박의 쌀과 한 치의 베도 받지 아니하고 자기 손수 짚으로 자리를 짜면서 세월을 보내었다. 《일월록》
○ 이에 유생 홍무적(洪茂績)ㆍ정택뢰(鄭澤雷)ㆍ김효성(金孝誠)등이 서로 잇달아 소를 올려 원익의 충성을 말하고, 정조(鄭造)ㆍ윤인(尹訒) 등을 목베도록 청하였다.
○ 홍무적 등35명의 소에, “정조ㆍ윤인 등의 말은, ‘국모(國母)로 그를 대우하랴’ 했으니 만약 국모로서 대우하지 않는다면 대비를 어떠한 처지에 둘 것입니까” 하니, 대간이 무적 등의 죄를 논하여 모두 섬으로 귀양보내었다. 《하담록(荷潭錄)》
○ 정택뢰 등 40명의 소에는, “정조ㆍ윤인ㆍ이위경 등은 대개 혈기가 있는 사람이면 한 조정에 같이 있기를 부끄럽게 여기고, 저들도 또한 숨을 죽이고 스스로 천지 사이에 용납되기 어려울 것을 알고 있었는데, 얼마 안 가서 윤 인은 장령(掌令)이 되고 정조는 수찬(修撰)이 되고, 위경은 한림(翰林)이 되었으니, 어찌 지난 번의 모후 폐하자는 말이 과연 오늘날 다시 나오지 않을 줄을 알겠습니까. 이 때문에 원익이 서둘러 차자를 올리고 조금도 늦출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김효성 등 7명의 소에는, “정조ㆍ윤인ㆍ이위경의 머리를 빨리 베어서 귀신과 사람의 분함을 풀어 주고 이원익을 빨리 부르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조야기문(朝野記聞)》
○ 정택뢰는 남해(南海)로 귀양가서 그 어머니 강(姜)씨와 같이 있다가 한 해가 지난 후에 강씨가 죽으니 너무 슬퍼한 나머지 눈이 멀어 죽었다. 계해년에 지평(持平)을 증직하였다. 《계곡집(溪谷集)》
○ 유희분(柳希奮)의 차자에는, “신은 왕실의 척당으로 은혜를 후히 입는 대우를 받고 있으므로 요로에 있는 이들에게서 꺼림을 당함이 눈에 가시와 같습니다. 이에 신과 친한 이에게까지 감정을 품고서 먼저 남이공에게 시험하고 차례로 제거하여 이미 신의 몸에 다가왔습니다. 신은 남이공과 정의가 두터워 수레의 덧방나무와 바퀴처럼 서로 의지하고 있으니 신이 어리석고 사리에 어둡지마는 짐승과는 다릅니다. 이미 동지(同志)가 갑(甲) 희분에게 대한 노여움이 을(乙)에게 옮겨지는 혹독한 화를 입는 것을 보면서도 완강하게 맹렬한 불길 속에 버티고 앉아서 머리를 숙이고 입을 다물고서 몸뚱이가 타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또한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명륜록》
○ 생원 정유도(鄭有道)가 소를 올려 남이공과 조경기(趙慶起)를 목벨 것을 청하였다.
○ 감찰 최공망(崔公望)이 흉악한 유생 김효성(金孝誠)을 빨리 목베어 공성왕후(恭聖王后)를 모욕하고 임금을 협박한 죄를 다스리도록 청하는 동시에 정조ㆍ윤인ㆍ이위경 등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 일을 근심하는 성심을 변명하였다.
○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 홍경정(洪景艇) 등이 소를 올려 김효성을 극형에 처하도록 청하는 동시에 정택뢰ㆍ홍무적ㆍ남이공을 귀양보내기를 청하였다.
○ 2월 9일에 전교를 내렸는데, “화포장(火砲匠) 20명을 관원이 거느리고 와서 10일부터 시작하여 연 이틀 동안 대궐과 동궁에 총포를 쏘게 할 일을 군기시(軍器寺)에 말하라” 하니,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경(敬)은 온갖 사특한 것을 이겨내고 사특한 것은 바른 것을 범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임금의 덕이 밝으시면 온갖 좋지 못한 것이 저절로 제거되고 사라질 것이온데, 화포 소리를 내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오며 조정과 민간에서 듣고 놀랄 뿐입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안에서 참작해 할 것이니 번거롭게 아뢸 것이 없다” 하였다. 《명륜록》
○ 3월 17일에 전교하기를, “대비께서 거처를 옮기신 후에 북문 밖의 대비 궁전 근처에는 담 밖 사면에 군사가 있는 작은 성을 만들고, 군사를 많이 배치하여 잡인의 출입을 엄하게 금지시키고, 또 창덕궁ㆍ창경궁(昌慶宮)의 가위장(假衛將)에게 경운궁(慶運宮)의 사면에서 지키면서 숙직케 하라” 하였다. 《응천일기》
○ 4월에 삼사가 합계하여 양궁(兩宮)을 수리하라는 명령을 정지시켜 매우 곤궁한 백성을 구해 주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궁전을 수리하는 역사는 당초에 대단한 일이 아닌데 삼사가 계하하기까지 하니, 어느 사람이 사특한 의논을 주장하여 임금의 손ㆍ발을 묶으려고 하느냐” 하였다. 승정원에서 비답의 말씀에 민망한 바가 이 있다고 아뢰니 다시 답하기를, “지금의 수리하는 일이 과연 궁전을 짓는 역사와 같다면 사람들이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위에서도 또한 사태를 잘 분별하지 못하는 정도까지는 이르지 않을텐데, 하필 이때에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역사를 억지로 하겠는가. 임금의 거처는 한 곳에 전적으로 고정시킬 수 없는 것이다. 혹시 절박한 사정으로 옮겨야 될 일이 있으면 그때에는 여염(閭閻)집에 임시로 거처하여도 무방하단 말이냐. 우리 나라의 인심이 부박(浮薄)하여 사체(事體)는 살피지 않고 조정의 한 가지 거조(擧措)에도 반드시 과격한 의논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 그 말을 떠벌려 두렵게 선동하면 양사(兩司)가 으레 따라서 호응하게 된다. 내가 평소부터 심병(心病)이 있어 병이 심할 때에는 발언이 사납고 망녕되기도 하니 승정원에서는 나를 가련히 여겨 허물하지 말기를 바란다” 하였다. 《응천일기》
○ 5월에 사헌부의 집의(執義) 이하의 관원에게 명령하여 윤번으로 경운궁(慶運宮)에 입직(入直)하여 모든 일을 살피게 하였다. 사간원에서 아뢰어 명령을 도로 거두어 사헌부의 체면을 존중해 주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법관(法官)이 윤번으로 숙직하여 규찰함은 의도가 있다” 하였다. 승정원에서 또 그것이 합당치 않다고 아뢰니, “일이 변통될 수도 있는 것이니 어찌 일정한 규정에만 구애되랴” 하였다.
○ 18일에 정언 이익(李翼)이 혐의를 피하는 소를 올렸는데 그 소에, “세상이 옛날 시대와 멀어져서, 사람마다 자신만 아껴서 모두가 입을 다물고 서로 장마(仗馬)를 경계하니, 전하께서 신 등을 우대하지 않고 숙직하는 곳에 몰아 넣는 것은 신 등이 자초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지도 지금 8년이 되었사오나 아직 한 번도 경연(經筵)을 열어 정치하는 방도를 강론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궁녀와 환관과 항상 접촉하게 되니 신들과는 아주 먼 거리에 떨어져 있으며, 궁궐을 엄하게 단속하지 않아서 안팎이 서로 결탁하여 태아(太阿)의 칼자루가 이미 다른 사람에게 거꾸로 잡혀졌습니다. 사사로이 뇌물을 바침이 끊임 없으며 이를 서로 본받으니 민생의 곤궁함이 이미 극도에 달하고 그 밖에도 가지가지의 병이 모두 극도에 이르러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천명(天命 광해의 왕위가 안정(安定)된 것을 말함)이 이미 정해 졌으니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화근(禍根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말함)이 이미 제거되어 별로 의식할 만한 것이 없사온데, 어찌 소소한 일로서 금지하고 방위하여 남의 시청을 놀라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궁궐을 엄하게 단속하지 않아서 태아의 자루가 이미 거꾸로 잡혔어도 팔짱을 끼고 보고만 있을 뿐, 이를 구제하고 바로잡을 생각이 없다는 것은 어떤 사람과 어떤 일을 가리킨 것인지 이익에게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이에 회답해 아뢰기를, “궁궐을 엄하게 단속하지 않고 사사로이 뇌물을 바침이 끊임없다는 등의 말은 요사이 길거리에서 보통으로 하는 말입니다” 하니 다시 명하기를, “그 말을 들은 곳과 그런 일을 사주한 사람을 자세히 아뢰라” 하였다, 회계하기를, “다행히 무신년에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에 와서 우연히 이정원(李挺元)이 역적 토벌하는 소를 짓는데 참여하여 소를 쓰기까지 했는데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어찌 남의 사주를 받고 스스로 전하의 위엄을 범하였겠습니까” 하였다. 답하기를, “임금을 무함하는 말을 종이에 가득히 늘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태아의 자루가 이미 거꾸로 쥐어졌단 말까지 있섄니 어떠한 뜻이기에 이미 말을 꺼내었다가 도로 숨기고 바른대로 아뢰지 않느냐. 간관(諫官)의 풍채가 조금도 없는 사람이다” 하고 다시 승정원에 명하여 상세히 물어서 아뢰도록 하니 회계하기를, “지금 척리(戚里)중에 전하께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오니 누구누구라고 명백히 가리킴으로써 신의 마음을 속이고 전하를 속일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응천일기》
○ 21일에 옥당의 차자에 답하기를, “늙고 병든 이원익과 죄가 애매한 남이공은 위리안치 시키고 먼 곳으로 귀양보내기를 굳이 청하면서, 이익만은 임금을 협박하고 속인 죄가 있어도 힘을 다하여 두둔해 주고 임금 사랑하는 정성으로 깊이 인정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기까지 하니 옥당이 임금을 멸시하고 사당(私黨)을 비호함이 심하도다” 하였다.
○ 22일에 또 이 익을 패초(牌招)케 하니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연일 패초하여도 힐문한 일이 같사오니 극히 미안합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그 단서를 꺼내 놓고서 명백하게 말하지 않으니 그 심정을 헤아릴 수가 없다. 태아 자루가 거꾸로 쥐어졌다느니 안팎이 서로 결탁했다느니 하는 말을 다시 캐어물어서 아뢰니 만약 실상대로 진술하지 않으면 마땅히 그 실정을 국문하리라” 하니 회계하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는 위아래의 사이가 현격하니, 비록 얼굴 빛을 부드럽게 해서 할 말을 다하도록 시켜도 오히려 감히 그 심정을 다 말하지 못하는 것인데, 하물며 임금을 협박했다는 말로서 위압하고 국문을 하겠다고 위엄을 보이면 이 뒤에 누가 즐겨 그 위태로운 전철(前轍)을 밟아서 스스로 우레같은 위엄을 범하겠습니까. 신은 진실로 어리석고 망녕되어 만분의 일이 되는 정성도 바치지 못하면서, 장래에 언관(言官)으로서 할 말을 다하는 사람이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시초를 열어 주게 되었사오니 신의 죄는 이에 이르러 더욱 커졌습니다. 청컨대 형벌을 가하여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다.
○ 23일에 전교하기를, “척리(戚里)라고만 말하고 바로 누구라고 지적하지 않아서 여러 척리의 대신들을 모두 불안하게 하였다. 태아를 거꾸로 쥐었다는 것은 왕망(王莽)ㆍ동탁(董卓)이 왕위를 빼앗은 역모를 가리는 말이니 일이 종사에 관계되는 것이다. 만약 과연 이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실을 명백히 캐내어 반역의 죄를 다스려야 될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이익이 반좌(反坐)의 형률(刑律)을 면치 못할 것이다. 어찌 간관이라고 해서 죄를 용서해 심문하지 않고서 쥐 같은 무리들로 하여금 나라에 사람이 없음을 다행히 여기고 마음대로 날뛰며 하늘을 이기게 하랴. 잡아 가두고 엄하게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 내라” 하니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이익이 말을 잘못함으로써 죄를 얻는다면 아마도 성스러운 시대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대신과 삼사와 함께 자세히 의논하여 처리하겠습니다” 하였다. 위관(委官)인 영의정이 사직하면서 이익의 일은 다시 다른 대신과 의논하여 처리하기를 청하였다.
○ 전교하기를, “대조전(大造殿)이 깊숙하고 어둠침침하여 불편하므로 사세가 오래 거처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내가 창경궁(昌慶宮)으로 옮아 거처하려고 창경궁을 수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그 후에 대신과 유사가 서로 잇달아 들어와서 말하니 매우 한심한 일이다. 창경궁은 수리하지 말고 경운궁(慶運宮)은 무너진 곳만 수일 안으로 빨리 역사를 시작하여 수리하라. 수개월 안에 경운궁으로 옮겨야 되겠다”고 하였다.
○ 25일에 옥당에서 사헌부 관원이 숙직을 여러 번 회피한 일로서 그 관원을 체직(遞職)할 것을 아뢰었다. 전교하기를, “경운궁을 사헌부에서 숙직할 동안은 우선 병조의 실직 당상관과 도총부의 실직 관원을 시켜 숙직하게 하되 잡인의 출입을 엄하게 금지시키고 문을 닫고 밤낮으로 비밀히 탐사케 하라” 하였다. 도총부에서 아뢰기를, “병조는 일이 많아서 실직 당상관이 양궁(兩宮 경운궁(慶運宮)ㆍ창경궁(昌慶宮)에서 숙직하기에는 인원이 모자랍니다” 하니, 명망이 있는 재신(宰臣)을 분병조(分兵曹)의 참판ㆍ참의로 임명하였다.
○ 6월 2일에 분병조에서 아뢰기를, “대비가 계시는 궁전 가까운 곳에서 2, 3명의 여인 우는 소리가 났는데, 오경(五更)에 이르러 뜰에서 불에 무슨 물건을 태우는 듯하더니 이내 우는 소리도 그쳤습니다” 하였다.
○ 21일에 유학(幼學) 조 직(趙溭)이 소를 올리기를, “지금 자전의 죄를 들추어 내는 사람이 첫째는 어머니의 도리가 이미 끊어졌다 하고, 둘째는 명백히 모자의 정리를 끊어야 될 죄악이 있다고 합니다. 대개 여염집의 일반 사람에게도 남의 자식에게 부모의 과실을 말하여서는 안되는 것인데, 감히 임금 앞에서 공공연히 말하니, 이는 여염집 일반 사람도 못할 일을 우리 전하께 하는 것이니 막대한 불경입니다. 그런데도 죄는 받지 않고 좋은 벼슬만 하게 되니, 나라의 공론이 자자하게 일어나고 이원익의 차자와 전하의 거기에 대한 비답(批答)이 있게 되었는데, 그 비답을 보고는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 ‘원익이 늙어서 망녕을 부렸다’ 하고 다시는 전하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대비께서 경운궁으로 옮겨 거처하신 이후로는 전하와 따로 거처하시어 수라상을 살피심도 오랫동안 폐하시고 혼정신성(昏定晨省)도 또한 빠뜨렸습니다. 한결 같은 효성은 그 전보다 덜 하지 않겠지만 보고 들은 것에 의거하건대 신하와 민간에 의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아, 대비는 곧 전하의 어머니십니다. 쓸쓸한 옛 궁전에서 귀신들과 이웃하고 햇빛을 못 본 지가 3개월이나 되었습니다. 그 위태롭고 근심하는 심사와 피눈물로 우는 형상을 보소서, 선왕(先王 선조(宣朝))께서 대비를 전하께 부탁하신 뜻은 반드시 이 같이 하라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오니, 밤중에 전하의 마음인들 또한 어찌 가엾게 여기심이 없겠습니까. 대비를 한 궁 안에 받들지 않고서, 이원익을 죄주는 사람들의 입을 막는 것으로서 방법을 삼으니, 이는 마치 물을 더 끓이면서 끓어 넘치는 것을 그치게 하려는 것으로서 방법을 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 전하께서 구중 궁궐 깊은 곳에 계시니 크고 작은 외간의 의논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신하는 아는 것은 모두 급급하게 아뢰어야 마땅한데, 대신은 임금에게 간언하지 않고, 삼사는 임금의 의도에 맞추려는 심사뿐이고 시일을 끌기만 하고 한 사람도 올바로 말하는 이가 없으니, 이런 대신과 삼사를 어디에 씁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 모자간의 정리에 마음을 두시고. 간사한 말에 혹하지 마시어 대비를 그 전처럼 봉양하신다면 어찌 전일의 과실을 가리우고 새로운 교화를 밝히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소가 들어간지 6일이 되도록 임금이 노하여 답을 내리지 않으므로, 조직은 대궐문 밖에서 임금의 처분을 기다렸다.
○ 그믐날에 전교하기를, “조종조때부터 대비께서 별궁에 따로 거처하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 대비를 받들고 모심이 전일과 다름이 없고, 궁중에 요사스러운 귀신의 변괴가 없는데도 네가 말한 것은 무슨 뜻이냐. 네가 감히 조정에 사람이 없음을 다행히 여기고 함부로 흉한 소를 올려 임금을 멸시하느냐. 반드시 매우 간악한 자가 있어서 사주하는 것이다. 하늘이 굽어보고 있으니 바른대로 대답하라” 하니 조직이 승정원으로 들어가 뜰 밑에 서서 붓을 휘둘러 글로써 대답하기를, “신이 지금 시대에 났으니 조종조의 옛 관례(慣例)를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어린 아이와 심부름하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전하께서는 경운궁으로 옮겨서 요사스런 귀신을 피하면서도 대비만은 귀신을 피하지 않게하시니 신등이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으로 우리 임금이 과실이 없게하려 하려는 것이지, 어찌 남의 사주를 받고 스스로 우레같은 위엄을 범하겠습니까. 하늘이 위에서 보고 계시니 신은 감히 자신의 마음도 속일 수 없사온대 하물며 밝으신 임금을 속이겠습니까. 이 밖에는 할 말이 없사오니 다만 형벌을 기다릴 뿐입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대답한 말이 상세하지 못하니 다시 물어서 아뢰라” 하니 조직이 또 대답하기를, “대비께서 별궁에 따로 거처하는 일은 옛날에 있었다 하지마는, 혼정신성의 절차를 빠뜨림도 옛날에 관례가 있었습니까. 요사스러운 귀신의 변괴에 화포(火砲) 20자루로서 밤마다 포를 쏘니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조직이 처음 소를 가지고 대궐문 밖으로 나가던 때에 대비를 폐하려는 사특한 말이 한창 퍼졌었고 흉한 소를 올리는 자가 잇달았으므로, 사람들이 처음에는 조직을 흉한 당인인 줄 알았다가 한 이속(吏屬)이 조직의 소의 내용을 엿보고는 두려워하고 놀라면서, “이 상소가 한 번 들어가기만 하면 큰 화가 곧 일어나게 될 것이니 젊은 사람이 죽는 것이 애처롭지 않으냐” 하고 즉시 여러 이속과 함게 조 직을 헐청으로 이끌어 들여 자리를 마련해주고 앉게 하였다. 이때는 한 여름이었으므로 어떤 사람은 얼음물을 주고 어떤 사람은 부채를 부쳐 주면서 둘러앉아 한숨을 짓고 탄식하였다. 대궐에 들어가서 대답할 때에 승정원의 승지 이춘원(李春元)이 화기띤 얼굴로 말하기를, “그대가 상세히 대답하고 헛된 죽음은 하지 말라” 하였다. 조직이 포를 쏜 일에 대하여 대답하고자 했으나 포가 몇 자루인지 그 수를 알지 못했는데, 마침 한 군사가 가는 목소리로, “20자루”라 하였다. 재차 묻는 날에는 보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혼정신성을 빠뜨림도 또한 옛날의 관례입니까” 라는 말이 나오니 한 관원이 옆에 있다가 혀를 차며 애처롭게 여기면서, “이 사람이 반드시 죽겠다. 운명이니 어찌 하겠느냐” 하였고 춘원은 슬픈 기색을 하고 손바닥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에 대사헌 이각(李覮)과 대사간 유인길(柳寅吉) 등이 임금께 조직을 잡아다가 신문하기를 청하여 7월 15일 옥에 내려 가두었다. 전교하기를, “이것은 의금부(義禁府)에서 보통으로 신문할 일이 아니니 삼성(三省)에서 번갈아 좌기하여 엄하게 국문하여 사주한 자를 찾아내라” 하였으나 위관(委官) 기자헌(奇自獻)과 판의금(判義禁) 박승종(朴承宗)이 서로 미루고 핑계하면서 끝내 개좌(開坐)하지 않았다. 이듬해 4년 무오 12월에 비로소 국문하니 공술하기를, “정신병이 든 사람이 아니면 어찌 남의 사주를 받고 스스로 불측한 화에 빠지겠습니까” 하였다. 형을 받고 옥에 갇히었다가 이듬 해 기미년 5월에 남해(南海)로 귀양가서 위리안치되었다.
○ 이때 조 직의 아버지 수이(守彛) 자(字)는 언상(彦常)이고 벼슬은 참봉(參奉)이었는데 수직(壽職)으로 한풍군(漢豐君)이 되다. 가 어떠한 일 때문에 황해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서울에서 오는 사람을 만나 서울 안의 일을 물으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사인(士人) 조직이 소를 올려 극도로 말을 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위태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수이가,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이다” 하니 그 사람이 말에서 내려 절하면서, “이 같은 아들을 두었으니 어찌 감히 존경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조직이 옥에 갇히니 의금부의 이졸(吏卒)이 서로 약속하기를, “만약 한 가지 물건이라도 조공에게 청구한다면 우리들은 어머니가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하였다. 이때 역적의 옥사가 연달아 외인의 출입을 더욱 엄중히 금지하였는데, 나졸의 무리들이 간혹 공사로 출입할 때는 반드시 조직의 집으로 가서 옥 안의 사정을 전하여 주고, 서신을 받아 가느다랗게 꼬아서 신틈에 숨겨 가지고 가서 조직에게 전해 주었다. 형을 받을 때 조 직이 눈을 감고 있다가 곤장을 다 맞고 난 후에 눈을 떠보니 곤장을 때린 사람이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문 밖으로 나가자 즉시 옷을 찢어서 상처를 싸매 주니 옆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며 눈물을 흘렸다. 계해년 인조 반정 때에 맨 먼저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임명되었다. 사은하던 날에 대비가 발을 드리워 불러 보시고, 술을 내려 주고 약을 주어 귀양살이에서 얻은 토질병(土疾病)을 치료케 하였다. 모두《명재집(明齋集)》에서 나왔다.
○ 조직은 자는 지원(止源) 또는 심원(深源)이라 한다. 이고 호는 지재(止齋)이다. 이때 나이 24세였다. 소를 바치던 날 승정원의 승지와 이졸들이 모두 놀라 얼굴 색이 변하면서 그를 위태롭게 여겼으나 공은 평시와 같이 태연하게 말하니, 정권을 잡은 파에서는 그를 박승종(朴承宗)의 사주를 받았다고 지목하여 옥에 여러 해 동안 가두어 두었다. 벼슬은 창녕현감(昌寧縣監)ㆍ강원도사(江原都事)에 이르고 죽은 후에 특별히 대사헌을 증직하였다.
○ 유학 신상연(申尙淵)이 소를 올려 여러 간사한 자의 머리를 빨리 베어 귀신과 사람의 분을 풀어 주도록 청하였다. 공홍도사(公洪都事) 김형(金瀅)도 소를 올려 김효성(金孝誠)ㆍ조 직등을 형에 처하여 윤기(倫紀)를 바로 잡도록 청하였다. 유학 신흡(申吸)은 소를 올려 간사한 자를 물리치고 어진 사람 정인홍 등을 등용하도록 청하였다.
○ 심경(沈憬)이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다. 이때는 대비를 폐하자는 의논이 일어나려 하던 때로서 간사한 무리들이 바야흐로 정인홍을 추대하여 당세의 으뜸으로 만들고 그의 손을 빌어 그 의논을 성립시키고자 하였는데 사기(事機)가 극히 은밀하였으므로, 감히 말하는 이가 없었다. 심경이 대사헌 한찬남(韓纘男)에게 그 비밀 대책을 폭로하고 공공연히 꾸짖으니 찬남이 노하여 소문의 출처를 캐내고자 하여 옥에 몇 달 동안 잡아 가두었다가 경성(鏡城)에 안치시켰다. 경성에 있은 지 1년만에 죽었다. 《염헌집(恬軒集)》○심 경은 위의 기축년 옥사(獄事) 이발(李潑) 조(條) 다음에 나타났다.
○ 6월에 집의 유희량(柳希亮)이 남이공(南以恭)의 아뢴 것을 억지로 합계(合啓)하자고 간통(簡通)하니, 헌납 정준(鄭遵)은 쉽사리 의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대답하고, 정언 황중윤(黃中允)은 절대로 경솔히 의논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희량이 또 간통 가운데 쓰기를, “정조(鄭造)의 아우 정헌납(鄭獻納)의 조종(操縱)으로서 당겼다 늦추었다 할 것은 아닌듯하며, 황정언(黃正言)의 절대로 안 된다는 말은 더욱 우스운 일이라” 하였다. 정준은 이 일로서 노하여 피혐하면서 희량을 전적으로 공격하고 그의 형 희분(希奮)까지, 공격하여, 등 통(鄧通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총애하던 소신(小臣))ㆍ양기(梁冀 한나라 질제(質帝)의 삼촌으로 임금을 죽인 역적)ㆍ두헌(竇憲 한나라 경제(景帝)의 외삼촌으로 권력을 쓰던 자임) 등에 비하기까지 하면서 극력으로 헐뜯었다. 이에 희분이 차자를 올려 원통함을 말하니 답하기를, “양기와 두헌에게 비하는 말은 비록 매우 놀랄 만한 일이었으나 처음부터 들어와 아뢰지도 않았는데 제가 또 스스로 변명하니 어찌 그들과 다른 것이 있으랴” 하였다.
○ 병진년 가을부터 대비를 폐하자는 의논이 다시 성하게 일어나니 선조의 유교(遺敎)를 받은 일곱 신하의 말로서 자료를 삼았다. 서신(徐兟)ㆍ송문규(宋文奎) 등이 이이첨의 명령을 받아 서로 잇달아 소를 올려 죄 주기를 청하였고, 정조ㆍ윤인ㆍ유숙(柳潚) 등이 삼사를 나누어 차지하여 또 7신을 귀양보내기를 계속 청하였다. 《명륜록》
○ 이때 임금이 대비를 폐하고자 하여 김제남을 추형(追刑)하여 시장(市場)에 시체를 들어 내놓았다. 한편 대사헌 근(瑾)ㆍ대사간 정조ㆍ부제학 유숙등은 7신의 한 사람인 신흠(申欽) 등을 무함하여 귀양보내었다. 〈상촌(象村)의 시장(諡狀)〉
○ 8월에 경상도의 유학 서신(徐兟) 등이 소를 올려 ‘빨리 좌의정 정인홍 을 등용하여 어진 사람에게 정사를 맡기고 역적을 토벌해야 된다’는 말을 쓰도록 청하였다. 이에 양사(兩司)에서 신흠(申欽)ㆍ한준겸(韓浚謙)ㆍ박동량(朴東亮) 등 7명에게 똑같은 형을 쓰지 않고 허욱(許頊)ㆍ최천건(崔天健)ㆍ성영(成泳) 등 3명의 역적에게 내린 형벌이 미진함을 따져 아뢰니 비답하기를, “허욱은 곧 선조(先朝 선조조(宣祖朝))의 대신이고, 박동량은 선후(先后 선조왕후박씨(宣祖王后朴氏),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선왕의 능을 삼 년 동안 지켰고, 최천건은 당시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꾀로서 이홍로(李弘老)ㆍ양학서(楊學瑞)를 밖으로 내보내려다가 홍로의 탄핵을 당할 뻔했으나, 당초에 동궁에 있는 나에 대하여 이간질이 있을 무렵에 나를 받들어 추대한 정성이 있으며, 서성(徐渻)은 이미 귀양을 보냈으니 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다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자원에 따라서 중도부처(中途付處)하고 한응인(韓應寅)과 허 성(許筬)의 일은 아뢴대로 따르겠다” 하였다. 《응천일기》
○ 신흠ㆍ한준겸ㆍ박동량을 부처(付處)시켰다.
○ 정사년 1월 20일에 어느 사람이 익명서를 경운궁(慶運宮)에 투입하였는데, 부도한 말이 매우 많았다. 또 기(奇) 영의정 기자헌(奇自獻) 가 강제로 우겨 박(朴) 병조판서 박승종(朴承宗)을 몰고 유(柳)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 유희분(柳希奮)를 협박하여 대비를 맞이해서 큰 일을 일으킨다는 말이 있었다. 이에 임금은 영의정과 병조판서를 불러 의논해 아뢰도록 하고 또 힘을 다하여 역적을 토벌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어 궁성을 호위하도록 하는 동시에 경운궁 동쪽 담 밖의 군사 2명을 잡아 가두도록 명하였다. 《응천일기》
○ 영의정이 차자를 올려 물러가기를 원하니 답하기를, “이것은 곧 대비의 처소에 화살에 매어 쏘아 들여 보낸 것인데 잡지 못한 일 때문이다. 경에게는 조금도 관계가 없으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재차 차자를 올리니 답하기를, “지금 이 흉악한 익명서는 고변하는 것이 아니고 간악한 사람의 짓인 듯한데 경이 상세히 안다면 어찌 그 사람을 바로 고발하지 않고서, 이 위급한 시기에 영의정으로서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고 있다가 환난에 이르러 번거롭게 관직을 사면하고 도피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문창부원군 유희분의 차자의 개요는, “흉서에 무함을 입었으므로 하소연해서 위에 알리고 면직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 27일에 전교하기를, “거짓이든 참이든 간에 이미 화살에 매어 익명서를 투입한 변고가 있는데도 어찌하여 대신은 의논해 아뢰지 않고서 도피하고 있으며, 의금부에서도 의논해 아뢰지 않는가. 옛날에도 상금을 걸고 죄인을 찾는 일이 있었으니 후한 상을 내어 걸고 진범을 고발하게 하면 될 것이다” 하였다.
○ 병조판서 박승종의 차자에 답하기를, “경은 왕실과 인척관계에 있는데 무엇 때문에 머뭇거리느냐. 구(驅)라는 한 자(字)는 익명서에 ‘유(柳)를 몰아서...’라는 한 문구가 임금의 죄를 헤아려 들추어 내는 흉악한 말과 비교해 어떠하냐. 이 같은 역적의 무리의 말 때문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응천일기》
○ 이때 허 균(許筠)이 그 무리 감득황(金得榥)을 시켜 글을 화살에 매어 경운궁(慶運宮)으로 던져 넣고 사람을 시켜 고발했었는데, 그 가운데에 임금을 지적하는 말은 차마 말할 수 없는 내용이 있었다. 또 근거없이 떠도는 말을 만들어, “이 화살의 글은 생각건대 아무 아무개가 삼청동(三淸洞)에 모여서 만든 것인데 먼저 조희일(趙希逸)을 논핵(論劾)하여 이산(理山)에 안치(安置)시키고 장차 큰 옥사(獄事)를 일으킬 것이다” 하였다. 이를 보고 임금이 매우 놀라서 대신ㆍ삼사ㆍ대장을 불러 의논케 하였더니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이, “이것은 간사한 사람이 화를 남에게 넘겨 씌우려는 계책이고 반드시 다른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고, 간했으나 들어주지 않으므로 드디어 한 필의 말을 타고 성 밖으로 나와 바로 강릉(江陵)의 절로 가서 드러누워 나오지 않으니 임금은 혼자 결정하지 못하여 승지 이홍주(李弘冑)를 여러번 보내어 부르므로 자헌은 강릉에 있으면서 차자를 올려 화살에 끼워진 글의 변고는 그것을 꾸민 사람이 있다고 진술하였는데 그 뜻은 실상 허 균을 지목한 것이었다. 임금은 마음도 조금 풀어져서 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청백당기사(淸白堂記事)》
○ 이때 허 균이 익명서를 화살에 끼워서 서궁(西宮)에 쏘아 넣어 장차 당시 선비의 무리를 한꺼번에 모조리 잡아 죽이려 하고 삼청결의(三淸結義)라고 지목했는데, 삼청(三淸)은 곧 김 유(金瑬)가 사는 동리였다. 임금이 국문하려고 군사를 모아 대궐을 호위하게 하였다. 김유ㆍ홍서봉(洪瑞鳳)ㆍ김상헌(金尙憲)ㆍ장유(張維)ㆍ조희일(趙希逸)은 모두 잡으러 오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때마침 기자헌이 국청(鞫廳)에서 바로 강원도로 향해 가면서 소를 올려 허 균을 지목했으니 이로서 김유 등을 미처 국문하지 못하였다. 박승종이 이이첨과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여 허균의 간사한 계책을 고발하여 이이첨에게 그 화가 미치게 하고자 하였다. 성 문에 방을 써 붙이고 벼슬과 상을 걸고 고발하는 사람을 모집하였는데 무인 민인길(閔仁佶)이 평소에 허균과 친히 사귀는 사이어서 허균의 일을 자세히 알고 있었으므로 이에 소를 올려 그 실상을 진술하니 일이 중지되었다. 〈백헌집(白軒集) 김 유(金瑬)의 시장(諡狀)〉
○ 2월 1일에 사용(司勇) 민인길(閔仁佶)이 비밀히 소를 올려, “흉악한 익명서는 허균의 짓입니다” 하였다. 이에 행사직(行司直) 허균ㆍ지사(知事) 성우길(成佑吉)ㆍ부원군(府院君) 유희분(柳希奮)ㆍ사복정(司僕正) 유충립(柳忠立)ㆍ봉상주부(奉常主簿) 이재영(李再榮)ㆍ급제(及第) 기수발(奇秀發)ㆍ활인서별좌(活人署別坐) 이사정(李士星)ㆍ이문학관(吏文學官) 이원형(李元亨)이 모두 비밀소(秘密疏)를 날마다 와서 바쳤다.
○ 4일에 삼사가 합계하기를, “민인길이 비밀히 고발한 후로 서로 잇달아 소를 올려, 서로 싸우는 것처럼 되었사오니 빨리 국문하여 사실을 캐내어 처단하기를 청합니다. 승정원에서는 사리와 체통을 돌아보지 않고 이미 변고를 고발한 인길을 가두도록 청하지도 않으며, 자기 변명의 비밀소를 받아 들여서 상소가 연달으니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해당 승지를 파직시키소서” 하였다.
○ 7일에 영의정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선왕때에 간사한 사람이, 신이 ‘장차 동궁을 무함한 사람을 귀양보내고자 한다’ 하고, 자기가 동궁을 무함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뽐내고 남을 업신여겨 장차 큰 옥사를 일으키려 했으니, 만약 큰 옥사가 일어났더라면 전하가 어떤 처지에 놓였겠습니까. 다행이 선왕의 밝으심에 힘입어 형벌을 면했을 뿐만 아니라 그 간사한 사람이 신을 두려워하여 신에게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글을 보내었는데 그 글에 ‘살려 준 은혜는 나를 낳은 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지금 이 간사한 사람이 장차 신이 협박을 받을 것(익명서에 있는 말)이라고 하니 진실로 괴이한 일입니다. 계축년 무렵에 원임(原任)으로 있을 때 의주부윤(義州府尹)의 일로도 오히려 조정에 편히 나오지 못했사온데, 하물며 지금 신이 당한 말은 얼마나 큰 죄입니까. 그런데도 마음이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수년 전에 어떤 사람이 서울에 와서 글을 보내어 신에게 떠나가기를 권했는데 그 계책이 교묘한 듯하지만 실상은 어리석고 망녕된 것이었습니다. 금년에는 신의 (姓)을 직접 거론했으며, 또 부신(符信)을 내어 준다고 말했으니 그 말은 다만 함정에 밀어 넣으려고 한 정도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였다. 〈강릉(江陵)에서 올린 차자〉
○ 유학 조흡(趙洽)이 소를 올려 기자헌(奇自獻)이 임금과 나라를 저버리고 어려운 시기에 도망해 가버린 죄를 다스리도록 청하고, 또 삼사가 기자헌을 비호하여 잠잠히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은 죄를 다스리도록 청하였다.
○ 허균이 이미 기자헌과 적이 되자 그 모의를 더욱 급히 서둘러 대비의 죄를 말함이 한이 없었으며, 심지어는 의는 선묘(宣廟 선조)의 아들이 아니고 민가 사람의 아이를 데려다가 기른 것이라고 하였다. 또 서응상(徐應祥)이 궁중에 출입하면서 외관과 의논을 몰래 통했다 하여 응상을 목베었다. 《청백당기사》
○ 10월에 허균이 비밀히 소를 올려 김계남(金季男)ㆍ오응란(吳應鸞)등 5명을 잡아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계남과 응란은 압사형(壓沙刑)을 가하며 신문하고 김 진(金軫)은 원정(原情)을 받았다.
○ 좌윤(左尹) 김은(金誾)의 소에, “허균이 신에게 서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김진은 김제남(金悌男)의 괴수이니 급히 대장에게 통지하여 이 사람을 잡아서 엄하게 신문하면 종사에 복이 있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10월 2일에도, 박몽준(朴夢俊) 등이 소를 올려 김제남의 처를 목베도록 청하였다. 상세한 것은 연흥부인(延興夫人) 조 아래에 있다. 한편 여러 통역을 엄하게 단속하여 나라의 실정을 중국 사람들에게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 11월 5일에 유학 한보길(韓輔吉)이 소를 올려 다시 충직한 말을 진술하고, 나라의 환란을 그치게 할 것을 아뢰었다.
○ 이 해 겨울에 유희분(柳希奮)이 병조판서가 되었는데도 서궁(西宮)에 가서 사은하지 않았다. 벼슬에 임명된 사람이 대비에게 가서 사은하지 않은 것은 유희분에게서 시작하였다. 《정무록(丁戊錄)》
○ 박몽준(朴夢俊) 등의 소에, “전하께서는 어머니와 자식과의 은혜에 관련된 일을 감히 다른 사람이 의논할 수 없다 하여 여러 소를 예조에 내려 보냈으니 몹시 슬퍼하고 불안해 하신 뜻이 말씀하지 않는 가운데 넘쳤습니다. 당당한 한 나라의 공론을 예조에서 어찌 감히 홀로 감당하겠습니까. 따라서 3대신을 보고 백관들과 수의(收議)하여 화근을 제거하도록 힘써 청하자는 예조의 의견이 매우 이치에 합당하니, 대신된 이도 빨리 조정의 벼슬아치를 거느리고 의거(義擧 대비(大妃)를 폐하는 것)를 행할 일로서 논해야 할 것입니다. 대비를 내치는 일은 대신들이 행하고 전하께서는 조금도 이에 간여하지 않으시어 사사의 은혜를 보전하심이 정리(情理)와 예에 당연한 것입니다. 영의정 기자헌은 핑계만 대고 이를 결정하지 않으며,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은 우유부단하게 주위의 눈치만 보고 있으며, 원임 정창연(鄭昌衍)은 병을 핑계대고 일을 보살피지 않으면서 한 마디 말도 대답하지 않으니, 이는 모두 일을 전하께 미루고 저들은 일을 먼저 주도했다는 비난을 면하려 하는 계책입니다” 하였다.
○ 이 숙(李璹)이 소를 올리기를, “지난 번에 유생 8명이 혈서를 연달아 올렸으니 대의가 이미 발론(發論)되어 중지될 수가 없습니다. 기자헌이 비록 자기가 해야할 일을 남에게 미루는 자취가 있으나 그 처벌을 기다리는 말을 보면 아직 상황이 변할 여지가 있사오니 넘어진 일을 일으켜 세우도록 책임을 지울만 합니다. 또 이첨(爾瞻)은 세 집〔三家〕을 두루 다니면서 화근을 제거하지 않아서는 안된다는 뜻을 극력 진술했으니 신하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희분(柳希奮)과 박승종(朴承宗)만은 화근을 제거해야 될 줄은 알고 있으면서도 한결같이 움츠리고 물러나서 말 한 마디도 없으니 퍽 괴이합니다” 하였다. 《명륜록》
○ 10월 8일에 유학 윤유겸(尹惟謙)이 소를 올려, “지난 해에 이경전(李慶全)ㆍ이각이 의기가 분발하여 화근을 제거해야 된다는 의논을 주창하고, 그 다음에 박승종ㆍ유희분ㆍ이이첨 세 사람이 마음과 힘을 같이 하여 나라의 어려움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큰 일이 거의 성취되려 했는데 이론(異論)이 횡행하여 중대한 의논을 맨 먼저 꺼낸 이경전이 화를 두려워하여 도리어 물러서서 회피하려는 말이 있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의지하고 믿는 사람은 대신인데, 기자헌은 임금을 버리고 간 죄를 졌으며, 한효순은 악인과 편당 지은 자취가 있는데도 전하께서 이를 용서하고 형벌을 가하지 않느 것은 그들이 나라의 은혜를 후하게 입었으니 반드시 화근을 제거하여 공을 세울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럭저럭 한 해가 지나도록 만연히 말 한 마디도 없으니, 저 박승종과 유희분은 무엇을 기대하기에 아직도 그 성패의 결과만 앉아서 보고 있으며 이이첨과 힘을 합하여 역적을 토벌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뒷날에 화가 집안(대비)에서 일어나 천지의 위치가 바뀌어진다면(임금이 쫓겨난) 저들만이 그 가족을 보전하겠습니까. 이이첨은 충의를 대강 알아서 지금 역적을 토벌하자는 의논을 주장하고 있으나, 오히려 그 근본은 토벌하지 않고 그 말류(末流)들만 토벌하고 있으니 나라의 안위를 맡은 중신(重臣)이라 하겠습니까” 하였다. 《명륜록》
○ 우의정 한효순이 휴가를 청하는 원서(願書)를 제출하고 강가로 나가자 이이첨도 휴가를 청하는 원서를 제출하였는데 임금은 그들을 불러 모두 일을 보게 하였다. 《일월록》
○ 16일 진사 정혼(鄭渾)이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전일 유생의 소에 나라의 큰 계획을 들어서 논했을 때 비답(批答)을 기다릴 것도 없이 대신과 삼사가 마땅히 피하기를 청해야 할 것이며, 태학(太學)의 유생들도 또한 마땅히 연달아 글을 올려야 될 것인데도 조용히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매우 한심한 일입니다. 또 이각은 화근을 제거해야 된다는 의논을 맨먼저 주창했으나 이경전(李慶全)은 주저하고 있습니다. 이각만은 충성스러운 계책이 명백하여 분연히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한 번 죽을 것을 맹세했으니 참으로 이른바 기둥하나가 하늘을 떠받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대사헌이 되었으니 그 사람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지워 대신과 삼사와 함께 힘을 합하여 종사를 편안케 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대사헌 이각이 피혐하면서 아뢰기를, “신은 정혼(鄭渾)과 안면도 없는 사이입니다. 정혼은 신이 어디서 어떠한 의논을 한 줄 어떻게 알고 신이 맨 먼저 의논을 주장했다고 별안간 신을 지목하는지 은연중에 의아하게 여깁니다. 일이 과연 종사에 관련된다면 한 나라 모든 백성은 의리상 마땅히 생사를 같이 해야 합니다. 신은 백관을 통솔하여 큰 산악 같은 위엄으로 물의를 진정시키는 일에서는 조정의 대신만 못하며, 태평 시대를 만나서 즐거움과 걱정을 나라와 같이 하는 데도 훈척(勳戚)의 여러 경재(卿宰)와 같지 못하며 이 밖에 벼슬아치 중에서 재기(才器)ㆍ덕업(德業)ㆍ충성ㆍ계책이 신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 한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반드시 지극히 어리석고 추하고 한미하고 소원(疏遠)한 신을 시켜 전하의 귀를 더럽히게 하는 것은 무슨 의도이옵니까” 하였다. 《응천일기》
○ 허균이 이이첨과 함께 무뢰배를 불러 모으니, 시골 구석의 비렁뱅이들이 날로 그 문 앞에 모여 옷과 밥을 그 곳에서 얻게 되었다. 그는 선비의 옷을 갖추어 입고 날마다 패역한 말을 올렸으며, 이건원(李乾元)과 한보길(韓輔吉) 등은 대비의 호칭을 직접 말하면서 이를 역적 토벌이라고 말하였다. 이후로 허 균은 문을 열어 소청(疏廳)을 설치하고 직접 소를 준비하여, 글의 분량을 늘이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면서 문장을 만들어서 날마다 6, 7번이나 올렸다. 또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을 시켜 대궐문 앞에 엎드려 대비를 폐하도록 청하는 한편 허 균의 무리 김 개(金闓)와 원 종(元悰)은 안에 들어가서 일을 꾀하였다. 이때 한효순은 거의 죽게 된 나이로서 겨우 목숨이 붙어 있는 형편이었는데 이이첨의 문전에서 굽신거려서 정승의 관직을 얻더니 이첨의 명을 받들어 개와 파리처럼 더럽게 행동하므로 사람들은 이 사람이 반드시 큰 일을 저지를 것이라고 하였다. 《청백당기사(淸白堂記事)》
○ 여러 역적들이 날마다 무뢰한을 모아 아주 패리(悖理)한 욕과 극히 참혹한 말을 가르쳐, 번갈아 올리는 일이 갈수록 심한데도 광해주는 그것을 당연하다고 보고 용납하였다. 그러나 대비를 폐하여 내쫓는 일만은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는 이 일을 담당할 상신(相臣)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적신(賊臣)들이 한효순은 종처럼 부릴 수 있는 자인 줄 알았기 때문에 그에게 정승의 명칭을 빌려주어서 집밖에서는 여러 역적을 시켜 그를 협박하고 집안에서는 그의 사나운 처를 시켜 졸라대었다. 《사옹만록(思翁漫錄)》
○ 18일에 유학 정만(鄭晩)이 소를 올리기를, “큰 의논이 다시 발론(發論) 되었는데도 조정과 좌우에서는 아직 말 한마디 없으니 빨리 영의정과 우의정을 불러서 유생들의 소를 보이고 종사의 큰 계책을 속히 결정하소서” 하였다. 《응천일기》
○ 19일에 유학 이지호(李之皓)가 소를 올려 사간 남이준(南以俊)과 정언 김세렴(金世濂)의 교묘하게 회피한 죄를 먼저 다스리고, 또 빨리 여러 소를 내려 보내어 의논해 처리하기를 청하였다. 북천록(北遷錄)에는 ‘이호’(李皓)라고 쓰였다. 영남의 유학 정옹(鄭滃) 정인홍(鄭仁弘)의 가까운 친척. 이 소를 올리기를, “요새 조정 신하들이 대비에게 조하(朝賀)한다는 말을 듣고 신은 사사로이 의분심(義憤心)을 일으켜, 혀를 끌끌 차기를 오랫동안 하였습니다. 신은 명색이 과거의 초시에 참여하였는데 먼 길을 걸어 서울에 들어와서 병조판서 유희분이 대비에게 사은숙배(謝恩肅拜)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한편으로 나라를 위하여 경하하고 한편으로 조정을 위하여 다행하게 여겼습니다. 신이 처신할 도리가 어찌 유희분보다 못하겠습니까. 지금 복시(覆試)에 합격한다면 창방(唱榜)한 후에 결단코 경운궁에 사은(謝恩)하지 아니하여 당대의 시비를 결정하고 만세(萬歲)의 강상(綱常)을 세우려고 합니다. 원하옵건대 신하들에게 물으시어 경운궁(慶運宮)에 조하하고 사은하는 일을 폐지하도록 하옵소서” 하였다. 한보길(韓輔吉)ㆍ박몽준(朴夢俊)ㆍ설구인(薛求仁)ㆍ한천정(韓天挺)등이 소를 올리기를, “진(晉)나라의 양준(楊駿)이 처벌받아 죽을 때에 장화(張華)가 아뢴대로 한 성제(漢成帝) 조태후(趙太后)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양준의 딸을 태후의 칭호를 버리게 하였는데 본조의 정릉(貞陵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일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지금 장화(張華)의 의논에 의거하여 일국의 공론으로 대비를 폐하고, 전하께서는 대비에게 다만 사사로운 은혜로서 음식을 바치고 문안을 드려 천수를 마치게 하소서” 하였다.
○ 21일에 예안(禮安)의 유학 서신(徐兟)이 소를 올리기를, “빨리 여러 유생의 소를 내려 보내어 조정에 있는 신하들에게 쾌히 보이고, 널리 여러 의논을 수합하며, 분조(分朝)에서 조알하는 것을 속히 철폐하여 영원히 원수처럼 대비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혹시 부당한 의논을 하는 자가 있으면 대역으로 논죄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응천일기》
○ 정혼(鄭渾)ㆍ박몽준(朴夢俊)ㆍ한보길(韓輔吉)ㆍ정옹(鄭滃)ㆍ이지호(李之皓)ㆍ정만(鄭晩)ㆍ윤유겸(尹惟謙) 등이 소를 아홉 번이나 올렸는데 모두 봉하여 예조로 내려 보냈다.
○ 22일에 정언 김세렴(金世濂)이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귀양갔는데 이것은 김세렴이 이조 좌랑 황덕부(黃德符)를 탄핵하려고 서면으로 동료에게 통한 것을 가지고 사간원에서, “큰 의논(폐모론)이 방금 크게 일어나려 하는 시기에 피혐하여 교묘히 그 일에 참여하는 것을 회피하고 도리어 벼슬에 천거한 사람(황덕부)을 원수로 여겨 사특하고 독한 마음을 부리고자 한다”고 지목했기 때문이었다. 사헌부에서는 그가 교묘히 회피하였다고 하며 관직을 삭탈하도록 청하였다.
○ 유학 서의중(徐義中)이 소를 올리기를, “유생의 소를 이미 내려서 큰 의논이 방금 일어났는데도 대신은 해조(該曹)에 미루고, 예조에서는 기꺼이 담당하지 않아서 나라 일이 낭패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레와 우박의 변괴는 실로 대신이 직무를 제대로 행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것이니 중한 죄로서 기자헌(奇自獻)과 정창연(鄭昌衍)을 다스려 종사를 편안하게 하소서” 하였다.
○ 삼사가 합계하여 승정원에서 유생의 소를 예조에 내려 보낸 것을 탄핵하는 동시에 유생의 소를 바로 의정부로 내려 보내어 빨리 대신들에게 의논해서 처리하도록 청하였다. 《응천일기》
○ 22일에 대사헌 이각ㆍ대사간 윤인(尹訒)ㆍ부제학 정조(鄭造)가 대비를 폐하여 내쫓아야 된다는 의논을 바로 꺼내면서 다른 사람을 향하여 위협하기를, “이 일에 순종하고 거역하는 것으로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된다”하니 공경대부(公卿大夫)들도 몹시 두려워하여 얼굴색이 변하고, 유생 산인들도 또한 모두 도망해 피하였다. 임금은 여러 소를 봉하여 의정부로 내려 보내었다. 《청백당기사》
○ 사인(舍人) 유충립(柳忠立)이 봉해 내린 유생의 소 아홉 통을 초저녁에 영의정 기자헌에게 가지고 가서 전하니, “지금은 이미 날이 저물었을 뿐만 아니라 대신이 먼저 의견을 드려야 될 것이니 우의정에게 가서 전하라” 하였다. 곧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의 처소에 가니 효순이 대답하기를, “지금 병으로 휴가를 청하고 있는 중이므로 정신이 흐려서 감히 열어볼 수 없다” 하였다. 또 이 뜻을 영의정에게 회보(回報)하니 영의정은,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과 봉래(蓬萊 정창연(鄭昌衍))도 모두 대신의 반열에 있으니 낭청(郎廳)을 시켜 가서 의논하게 하고, 좌의정에게도 한 통을 등사해서 보내야 한다” 하였다. 《명륜록》
○ 23일에 영의정 기자헌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은 본래 배운 것이 없는 사람으로서 마침 인재가 모자라는 시기를 당하여 의정부에 자리를 채웠는데, 이제 신이 만약 주장하여 대비를 폐한다면 국사(國史)에 ‘아무개가 함부로 대비를 폐했다’고 기록되어, 신만이 만세의 공의(公議)에 죄를 얻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성조(聖朝)의 수치가 될 것입니다. 전일에 대간이 전하와 대비는 따로 거처해야 된다는 의논을 하다가 또한 관직을 삭탈당함을 면하지 못했는데 만약 뒷날에 지금의 이런(대비를 폐하는)일로서 혹시 신들을 죄 주자고 청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때는 전하께서도 반드시 용서해 주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영부사(領府事) 이항복(李恒福)과 좌의정 정인홍(鄭仁弘)이 밖에 있고, 전 우의정 정창연은 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며,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은 병으로 휴가를 청하고 나오지 않은 지가 몇 날이 되어 신만이 서울에 있사온데, 이처럼 막중막대한 일을 어찌 혼자서 처리하겠습니까. 또 계축년 무렵에 여러 대신들이 아뢰는 말에 신도 또한 같이 참여했사오니 그전과 지금의 의논을 달리 할 수 없습니다. 지난 해에 이원익(李元翼)이 귀양갈 때에 삼사에서는 아뢰기Ű ‘조정에서는 본래 이러한 (대비박해) 마음이 없었는데도 원익이 늙어 노망하여 망녕된 말을 하여 임금에게 악명(惡名)을 돌렸다’고 했기 때문에 원익은 경자년에 전하께 충성을 다한 사람인데도 오히려 죄를 얻어 서울에서 떠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조정과 민간에서 모두 임금께서 순(舜)과 같은 효행이 있다고 하며 공경하여 우러러 보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 소의 뜻을 본다면 신이 이미 계축년에 대신들의 아룀에 참여했으므로 신은 죄를 진 사람이 되는데, 외람되이 정승의 자리에 있은 지 지금 벌써 4년이 되었으니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일찍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보니 당나라에서 황후를 바꾸어 세울 때에 장구령이 ‘감히 조칙(詔勅)을 받들 수 없다’는 말을 하였는데 진덕수(眞德秀)가 이를 칭찬했습니다. 신이 망녕된 생각으로 장구령을 본받고자 하여, ‘백관이 대비에게 신자(臣字)를 쓰고 숙배(肅拜)하는 예를 변경하여 시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사람들에게 반역을 가르치게 되는 것이다’ 하였으니 신의 죄는 이에 이르러 더욱 큽니다. 여러 소는 내용이 너무 길어서 상세히 기억할 수 없사오나 이것은 (대비를 폐하는 일) 실로 예전에 없던 일이므로 놀라고 당황할 뿐 어떻게 처리해야 인심을 복종시키고 천하 후세에 변명할 말이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강씨(姜氏)와 무후(武后)의 일의 경우는 그것이 과연 오늘의 처지와 꼭 서로 같은지 알 수 없사오며, 진(晉)나라 혜제(惠帝)때 양태후(楊太后)의 일에 대해 상소에서 쓴 것은 망발인 듯하오니 어찌 전하의 세상에 그것을 비겨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에 진(晋)나라 장화가 ‘마땅히 별궁에 거처하게 하여 끝까지 태후를 보전해야 된다’고 했는데, 이것은 전일의 ‘임금과 대비께서 따로 거처해야 된다”는 의논과 같을 뿐입니다. 왕황(王晃) 등은 오로지 폐하자고만 주장하였습니다. 주희(朱熹)의《통감강목(通鑑綱目)》에는 진나라 동양(董養)의 말을 취하여 썼는데, 그 후에 과연 오호(五胡)가 중국을 요란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대학연의(大學衍義)에는 동양이 대학(大學)에서 당(堂)에 올라 탄식하기를, ‘조정에서 이 집을 세워 장차 무엇에 쓰려는가. 하늘과 사람의 도리가 이미 소멸했으니 큰 난리가 장차 이를 것이라’ 한데 대해 진덕수(眞德秀)가 논하기를, 모후(母后)까지도 죄를 주어 폐한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이에 하늘과 사람의 도리가 쓸린 듯 싹 없어졌으니 견식이 있는 사람이 큰 난리가 장차 일어날 줄을 안 것이다’ 했습니다. 오늘의 일은 이를 인용하여 예(例)로 삼을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주 희(朱熹)가 장후(張后 당나라 숙종(肅宗)의 후(后)이다)는 이보국(李輔國)이 죽였다고 강목에 특별히 썼으며, 안진경(顔眞卿)은 당나라 숙종(肅宗)때에 봉주장사(蓬州長史)로 좌천되었다가 대종(代宗)의 초년에 이주 자사(利州刺史)로 제수(除授)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니 그때에 조정에 돌아와서 도저히 그 일에 찬성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양관(楊綰)의 전(傳)에도 장후(張后)에 대해 언급한 말이 없는데 이 말이 어느 글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염후(閻后)는 처음에는 제(帝)의 어머니를 죽였고, 중간에는 제를 폐하고 북향후(北鄕侯)를 임금으로 세웠으며, 마지막에는 북향후가 죽으니 또 다른 사람을 임금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의 흉악하고 참혹함이 이에 이르렀는데도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주거(周擧)가 이합(李郃)에게 한 말을 썼습니다. 주거가 이합에게 말하기를, “옛날에 고수(瞽瞍 순임금의 아버지)가 항상 순(舜)을 죽이려고 했으나 순은 고수 섬기기를 더욱 정성을 다하였고, 정(鄭)나라 무강(武姜)은 장공(莊公)을 죽이기를 꾀하였으므로 장공은 황천(黃泉)에 가기 전에는 무강과 서로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으며, 진시황(秦始皇)은 그 어머니가 음행이 있는 것을 원망하여 오랫동안 발길을 끊었으나, 장공은 영고숙(潁考叔)의 말에, 진시황은 모초(茅焦)의 말에 감동하여 다시 자식의 도리를 닦았으므로 역사에서 이를 칭찬하였다. 지금 여러 염(閻)씨가 새로 죽음을 받았고 태후가 별궁에 갇혀 있으니, 슬퍼하고 근심한 나머지 병이 나서 하루 아침에 세상을 떠나게 되면 임금께서 장차 무슨 면목으로 천하를 호령하겠는가. 공이 마땅히 비밀리에 조정에 글을 올려 태후를 받들게 하고 여러 신하를 거느려 조알(朝謁)하기를 그전처럼 하여 천심(天心)을 만족하게 하고 사람들의 기대에 보답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이합(李郃)이 즉시 소를 올려 아뢰니 그 이듬해에 순제(順帝)가 태후에게 조알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주거(周擧)의 말에 대해 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말대로 따랐으니 가상한 일입니다. 진관(陳瓘)의 ‘너무 빠르다’는 말도 역시 옳지 않게 여기는 뜻입니다.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일은 죽은 후에 말만으로서 치리한 일이고, 지금은 해마다 한식날에 제사를 지내니 오늘날에 견줄 만한 일은 아닙니다. 더구나 지금 여러 소의 결론은 대부분 중국에 보고하고 대비를 처분하자는데 있습니다. 임진왜란 후로는 우리나라의 모든 일을 중국에서 간섭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물며 조선의 일로 관계되어 화를 당한 석성(石星)ㆍ정응태(丁應太)ㆍ조즙(趙楫)ㆍ이성량(李成樑)등의 족당(族黨) 중 반드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니, 만약 그들이 우리 나라에 일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되면 뜻밖의 말썽을 부릴지도 모릅니다. 힐책하여 묻는다는 일이 있다면 대개 신이 근심한 바와 같을 것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욕심이 한이 없으니 이 기회를 타서 뇌물을 요구한다면 아마 수만 냥 정도로는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동양(董養)ㆍ진덕수(眞德秀)와 같은 말을 한다면 두렵지 않습니까.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보낸다. 천자에게 고한다’는 말은 마치 잠자는 범의 꼬리를 밟는 것과 같으므로 일이 없는 중에서 일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삼가 일에 이르러 조심하여 깊이 잘생각하소서. 요사이 본 바를 말씀드린다면 이 일에 대하여 핑계대고 미루는 사람은 신 뿐만이 아닙니다. 신의 의논이 허망한 것이라면 비록 내쫓기고 죽음을 당하더라도 회피하지 않겠습니다. 여러 대신들도 감히 ‘집에 있기 때문에 이 일을 모른다’고 하겠습니까. 조정의 의논을 널리 수합한다면 반드시 나라를 위하여 좋은 계책을 드리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 달 22일에 밤에서 낮에 이르도록 계속해서 큰 우레 소리가 나는 변괴가 있었습니다. 이 겨울에 성난 우레 소리가 이렇게 여러 시간동안 크게 진동하니 근고(近古)에 없는 큰 재이(災異)입니다. 신은 장차 어떻게 대처해야 될 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명륜록》
○ 이때 허균이 김개(金闓)ㆍ이강(李茳)을 시켜 호남ㆍ영남의 무뢰배를 꾀어 모아서 유생처럼 가장하여 잇달아 소를 올려 먼저 화근〔大妃〕을 제거하고, 다음에는 영상(기자헌)이 역적의 괴수를 비호한 죄를 다스려야 된다고 하였다.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이러니 저러니 하여 시끄럽자, 기자헌이 이를 막지 못하고 널리 수의(收議)해야 된다는 의논을 주장하여 꺼내었다. 《명륜록》
○ 유학 송영서(宋永緖)가 소를 올리기를, “대신이 도리어 시일을 끌 마음을 먹고, 소와 차자의 내용이 극히 흉악하며 괴이합니다. 그가 말한 전첩부도(專輒不道)라는 것은 지칭한 바가 매우 심각하니, 전첩(專輒)의 첩은 암암리에 위(衛)나라 첩(輒)에게 비교한 것입니다. 그가 전에 이이첨(李爾瞻)을 중상하고자 할 때에는 아뢰는 글 속에 ‘어진 신하를 얻어 백성이 모두 우러러 보는 〔民具爾瞻〕위치에 둔다’는 말이 있었고, 허 균(許筠)을 중상하고자 할 때에는, 그가 도망가면서 올린 차자에 “어떤 사람이 이런 일을 하였느냐〔何許人如許〕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평소의 재주인데 지금은 임금에게도 미쳤습니다. 유생의 소가 의정부에 이르니 영을 내어 백관을 모으지는 않고 감히 먼저 의견을 드렸습니다.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기자헌은 한평생에 오직 임금을 저버리고 나라를 배반하는 것으로 임무를 삼았습니다. 조종(祖宗)과 선왕이 부당하게 악명을 입을 때에 억울함을 변명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흉악한 익명서를 화살에 꿰어 쏘아서 요사스런 변고가 일어나려 할 때에는 임금을 버리고 가서 자신만 벗어날 궁리를 하며, 서궁(西宮 대비(大妃))의 생일에 여러 사람들이 모두 가지 않는데 혼자 가서 조하하였습니다. 방금 큰 의논이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미루고 핑계만 대니, 머리를 베고 시체를 거리에 놀어놓아도 오히려 시원하지 못합니다.”하였다.
○ 유학 김정량(金廷亮)이 소를 올리기를, “어찌 이이첨ㆍ이각(李覮)ㆍ허균 이경전(李慶全)ㆍ임취정(任就正) 등 5명의 신하를 불러서 큰 의논을 결정하지 않습니까”하였다.
○ 유학 이기(李琦)가 소를 올리기를, “유희분(柳希奮)ㆍ박승종(朴承宗)이 이 큰 의논이 일어난 때에 말 한 마디 없으니 매우 한심한 일입니다. 두 신하를 엄하게 타일러서 서로 합의하여 화근을 제거하도록 하소서”하였다.
○ 유학 김서룡(金瑞龍)ㆍ이구(李榘)ㆍ한보길(韓輔吉) 등이 소를 올렸는데, 서궁을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어 대궐문 밖으로 내쫓기를 청하기도하고, 서궁에 조하(朝賀)를 끊고 영의정과 우의정에게 죄 주기를 청하기도 하였다.
○ 25일에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 김상하(金尙夏) 등이 소를 올려 대비의 열 가지 죄를 논하여, 존호(尊號)를 깎고 분조(分朝)의 시위(侍衛)와 공헌(貢獻)을 거둬 치워서 화근을 제거하고, 다음은 역적 괴수를 비호한 기자헌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답하기를, “소를 살펴 보니 나라를 위하는 성심을 알겠다. 내가 매우 불행하여 변고를 만나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차마 들을 수도 없으며 어찌할 줄 모르겠다. 대신 마음에 있는 생각을 진술하였으니니 여러 말 안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성옹년보(醒翁年譜)》와 《응천일기》를 합하여 기록한 것이다.
○ 송영서(宋永緖)ㆍ이구(李榘)ㆍ김서룡(金瑞龍) 등의 소를 봉하여 의정부에 내려 보내고, 영의정의 차자를 봉하여 삼사(三司)에 내려 보내었다.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 기자헌의 흉악한 차자를 빨리 불살라서 후세 사람의 의심을 없애도록 청하였다. 의정부의 낭청(郎廳)에게 명하여 의정부에서 차자를 불사르게 하였다. 〈응천일기〉
○ 백관에게 수의(收議)하여 정청(庭請)하자는 의논은 유희분(柳希奮)이 출사한 뒤 5, 6일 후만에 나왔다. 대개 대북당(大北黨)은 소북(小北) 박승종(朴承宗)이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해 동안이나 꺼내지 못하였는데 소북 유희분의 한 번의 거취에 따라 결론이 지어졌다. 《정무록(丁戊錄)》
○ 대사헌 이각(李覮)과 대사간 윤인(尹訒)이 합계하기를, “기자헌이 하늘까지 통하는 죄악을 짊어지고도 오히려 영의정의 자리를 차지하고 감히 부도한 말을 주창하여 여러 사람의 귀를 현혹시켜 큰 의논을 저지해 막으며, 대비에게 가담하기를 달게 여기고, 몰래 임금을 배반할 생각을 하고 있으니 종사를 잊고 임금을 저버린 죄를 법에 의하여 처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외딴 섬에 위리 안치시켜 귀신과 사람의 분함을 통쾌히 풀어 주옵소서”하였다.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 기자헌을 공론에 따라 쾌히 처분하도록 청하였다.
○ 기자헌이 먼저 임금에게 의견을 드리고 이내 의정부에 앉아 종친ㆍ외척ㆍ문무 백관을 모아 수의하는데, 수의를 채 마치기 전에 삼사에서 기자헌이 임금을 버리고 역적을 비호한 죄를 논하여 우선 안치(安置)시키기를 청하였다. 기자헌이 기별을 듣고도 나가지 않고 짐짓 앉아서 백관의 수의를 거두어서 보고, “조정 신하 중에 만약 두 서너 사람이라도 바른 의견을 지키는 이가 있으면, 이에 의거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아뢰어 임금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을텐데, 김상용(金尙容) 같은 무리도 또한 옳은말을 주장하지 못하는가. 종친ㆍ외척ㆍ의빈(儀賓 임금의 사위)들처럼 나라와 함께 즐거움과 근심을 같이 해야 할 사람도 시류에 아첨하여 따르는구나.” 탄식하고, 드디어 남여를 타고 서강(西江)으로 나가서 처분을 기다렸다. 《청백당기사》
○ 이때 조정에 백관들이 개미ㆍ벌떼처럼 많이 모여 있었으나 모두 두려워서 감히 먼저 의견을 말하지 못하였다.
백관의 수의(收議)
○ 이때 백관이 수의했는데, 백관은 전임자와 합하여 930여 명이며, 종실이 170여 명이다. 평창도정(平昌都正) 만수(萬壽), 양천군(陽川君) 봉수(鳳壽), 제천령(濟川令) 인수(麟壽), 무림군(茂林君) 선윤(善胤), 운성군(雲城君) 계남(繼男), 영산군(寧山君) 예윤(禮胤), 풍해군(豐海君) 잠(潛), 인성군(仁城君) 공(珙), 순녕군(順寧君) 경검(景儉), 분병조참판(分兵曹參判) 이성길(李成吉), 분병조참의[分兵議] 박사제(朴思齊), 사옹주부(司甕主簿) 성흔(成忻), 전 지평(持平) 홍요검(洪堯儉), 전적(典籍) 신칙(申恜), 지추(知樞) 조흥남(趙興南), 검상(檢詳) 남궁경(南宮㯳), 전 정랑 정감(鄭鑑), 전 형령 정흠(鄭欽), 선공직장(繕工直長) 안홍(安泓), 판관(判官) 여응주(呂應周), 좌랑 정대용(鄭大容), 전 참봉 정대수(鄭大秀), 주부 조정순(趙廷純), 시직(侍直) 김수관(金守寬), 사과(司果) 이담(李憺), 군기정(軍器正) 강린(姜璘), 내승(內乘) 홍걸(洪傑), 사용(司勇) 정승조(鄭承曹),ㆍ이영생(李瀛生)ㆍ이유서(李惟恕)ㆍ김원남(金元男), 현감 신종적(辛宗迪), 판관 안진(安溱), 현감 이운근(李雲根), 교관(敎官) 김휘(金翬), 사첨부정(司瞻副正) 유철(柳澈),성균박사(成均博士) 황상겸(黃尙謙), 부사과(副司果) 박기남(朴奇男), 판관 권령(權聆), 사예(司藝) 박수서(朴守緖), 현감 노망해(盧望海)ㆍ이양휴(李揚休)ㆍ이덕순(李德淳),참군(參軍) 이문헌(李文憲), 감찰(監察) 신수일(申粹一)ㆍ김설(金渫), 부사과 원종(元悰)ㆍ양홍(梁泓), 전적(典籍) 이창정(李昌庭), 학정(學正) 권준(權濬), 판관 윤흥충(尹興忠), 참봉 이몽룡(李夢龍), 학정(學正) 박진(朴瑨)ㆍ오전(吳晪), 감찰(監察) 김광익(金光翼)ㆍ신욱(辛頊)ㆍ유경찬(柳景纘)ㆍ김대해(金大海)ㆍ정민구(鄭敏求)ㆍ강홍정(姜弘定)ㆍ이두남(李斗南)ㆍ조형남(趙亨男)ㆍ이경백(李慶百), 부호군(副護軍) 황유중(黃裕中)ㆍ황경중(黃敬中)ㆍ허완(許完)ㆍ한항길(韓恒吉), 행 사과(行司果) 조의(趙誼)ㆍ김윤신(金允信), 훈도(訓導) 이적(李績), 습독(習讀) 표정보(表廷甫)ㆍ표승계(表承季), 훈련중군(訓練中軍) 원수신(元守身), 사정(司正) 김영남(金穎男)ㆍ유정생(劉挺生)ㆍ전득우(田得雨)ㆍ윤경기(尹景祺)ㆍ이능운(李凌雲)ㆍ홍기남(洪奇男)ㆍ구인경(具仁慶)ㆍ박난영(朴蘭英)ㆍ김원복(金元福)ㆍ이응성(李應星)이 의논했는데, 어떤 사람은, “대비와는 한 하늘 밑에 같이 살 수 없으니 빨리 공론을 따라야 한다.” 하고, 어떤 사람은 “큰 계책을 빨리 결정하여 역적 토벌을 엄하게 해야 된다.”하고, 어떤 사람은, “화근을 빨리 제거하여 종사를 편안히 해야 된다” 하였다. 수의 중에 흉악한 말과 패역한 말을 많이 기록하지 않았으니 다만 그 대개만 들어 말한 것이다.
○ 대사헌 이각(李覮), 대사간 윤인(尹訒), 집의(執義) 임건(林健), 사간(司諫) 남이준(南以俊), 장령(掌令) 한영(韓泳)ㆍ강수(姜燧), 지평(持平) 정양윤(鄭良胤)ㆍ김호(金●), 헌납(獻納) 조정립(曺挺立), 정언(正言) 이강(李茳)ㆍ박종주(朴宗冑)의 의견은, “삼사가 합계한 의견에 다 말했사오니 다시 의논할 것이 없사오며 다만 묘당(廟堂)에서 빨리 처리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예조정랑 채겸길(蔡謙吉)의 의논은, “화근(대비(大妃))이 아직 남아 있어 사람의 도리가 깜깜하게 꽉 막히었고 다른 의논이 함부로 나와서 대의가 없어졌습니다. 그 대비의 죄악을 헤아려 들추어내서 태묘(太廟)에 고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입니다.” 하였다.
○ 행 사직(行司直) 허균과 좌윤(左尹) 김개(金闓)의 의논은, “우리 임금을 헤치려고 꾀하는 자는 곧 우리의 깊은 원수인데, 원수에게 북면하여 절한다면 이보다 통분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초야 유생의 혈소(血疏)도 있으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소서.” 하였다.
○ 행 도승지 한찬남(韓纘男)ㆍ우승지 이창후(李昌厚)ㆍ좌부승지 김질간(金質幹)의 의논은, “여러 사람의 소에다 말씀드렸으니, 이름 절충해서 시행함은 오직 묘당에 달렸을 뿐입니다.”하였다. 우부승지 박정길(朴鼎吉)ㆍ동부승지 백대형( 白大珩)은, “대의를 밝히고 공론을 주창하여 종사를 편안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 직제학 이익엽(李益燁)ㆍ교리 이잠(李岒)ㆍ이상항(李尙恒)ㆍ정준(鄭遵), 신광업(辛光業)ㆍ남명우(南溟羽)ㆍ윤성임(尹聖任)ㆍ서국정(徐國禎), 박사(博士) 조유선(趙裕善)의 의논은, “정리와 예의를 절충하면 은(恩)과 의(義)의 경중이 저절로 소속될 곳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직장(直長) 최응하(崔應夏)ㆍ정연수(鄭袞峀),봉사 구해(具海), 별제(別提) 김형윤(金亨胤), 봉사 김양선(金揚善)의 의논은, “큰 계책을 빨리 결론지어야 합니다.” 하였다. 무겸(武兼) 이인헌(李仁憲)의 의논은, “대사를 의논하는 시기가 너무 늦어졌습니다.” 하였다. 이상은 빨리 대계를 결정하자고 청하는 파들이다.
○ 예조정랑 최호(崔濩)의 의논은, “당초에 서궁(西宮)이 안에서는 무고를 일으키고 밖으로는 반역의 모의에 응했으므로 신이 포의로 있을 때에도 소를 올렸는데, 하물며 지금은 조정과 민간의 의견이 같으니 어찌 감히 다른 의견을 내겠습니까” 하였다.
○ 문학(文學) 한희(韓暿),전적(典籍) 한급(韓昅)의 의논은, “일찍이 포의로 있을 때에 여러 사람과 소를 올려 역적을 성토하다가 흉인 엄성(嚴惺)의 모함에 걸려 모두 과거를 정지 당하고 목 베기를 청하여 그치지 않았으므로 거의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습니다. 살아난 것이 털끝 만한 것도 모두 임금의 은혜이오니 변변찮은 일념을 가질 뿐 다른 생각은 결코 없습니다.” 하였다. 전 사예(司藝) 박홍도(朴弘道)의 의논은, “일찍이 계축년에 대간에 참여하여 분발해서 역적을 성토하였으니, 지금 이 의논에 있어 어찌 감히 이견을 내겠습니까. 묘당에서 대의를 밝혀 종사를 편안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참지(參知) 정조(鄭造)의 의논은, “일찍이 계축년에 대비를 따로 거처하게 해야 된다는 의논을 망녕되이 아룄습니다. 대개 서궁이 몰래 임금을 해치려 하여 지극히 흉악하고 참혹하니 실로 온 나라 신하와 백성의 원수입니다” 하였다. 이위경(李偉卿)의 의논은, “예전에 포의로 있을 때에 벌써 짤막한 소를 올렸으니, 임금을 사랑하는 한 말의 피[斗血]는 비록 홍무적(洪茂績) 등의 신의 머리를 베어야 된다는 청을 만나고도 오히려 용솟음쳤습니다.” 하였다. 검열(檢閱) 이필달(李必達)ㆍ이함(李葴) 등의 의논은, “사국(史局)에 직책을 가지고 있으니 감히 직필로 의견을 아뢰지 않겠습니까. 정론을 쾌히 따르소서.” 하였다. 장악정 이홍엽(李弘燁)의 의논은, “예전에 포의로 있을 때에 감히 대의를 분발했습니다.” 하였다. 군기부정(軍器副正) 정문진(鄭文振)의 의논은, “벌써 소장에 진술했으니 어찌 이견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상은 이전에 폐모론을 주창한 사람들이다.
○ 판윤(判尹) 윤선(尹銑)ㆍ유희발(柳希發), 덕양도정(德陽都正) 충윤(忠胤), 봉래군(蓬萊君) 형윤(炯胤), 능원군(綾原君) 보(俌), 경평군(慶平君) 늑(玏), 경창군(慶昌君) 주(珘), 흥안군(興安君) 식(瑅), 문성군(文城君) 건(健), 전함(前啣) 송석조(宋碩祚), 호군(護軍) 윤기헌(尹耆獻), 전 판관 김여순(金汝純), 필선(弼善) 곽천호(郭天豪), 보덕(輔德) 배대유(裵大維), 검열(檢閱) 안응로(安應魯), 판교(判校) 이유록(李綏祿), 형조참의 정규(鄭逵), 좌참찬(左參贊) 민몽룡(閔夢龍), 설서(說書) 이모(李慕), 승문정자(承文正字) 심지청(沈之淸), 분병조정랑(分兵曹正郞) 이종언
(李宗彦), 봉상주부(奉常主簿) 이재영(李再榮)ㆍ이원엽(李元燁)ㆍ이대엽(李大燁), 겸설서(兼說書) 임흥준(任興俊), 봉교(奉敎) 박종윤(朴宗胤)ㆍ구익환(具益煥), 시교(侍敎) 이경익(李慶益)ㆍ김주하(金奏夏), 사정(司正) 최철견(崔鐵堅), 공조참의 장자호(張自好), 참봉 이간(李簡)ㆍ이영(李英)ㆍ김원(金瑗)ㆍ임기령(任麒齡), 군수 이언직(李彦直), 부정(副正) 이람(李覧), 부사직(副司直) 최위(崔椲), 사직(司直) 이담(李憺), 전 현감 이덕순(李德純), 군수 한형(韓詗), 판관 이덕언(李德言), 예조좌랑 한정국(韓定國), 해신군(海愼君) 이희령(李希齡), 행 호군(行護軍) 유지신(柳止信),전 정(前正) 허경(許儆), 부사(府使) 조명욱(曹明勗), 사과(司果) 조석명(趙錫明), 판관 홍응귀(洪應龜), 부봉사(部奉事) 구현(具玹), 현감 민여현(閔汝賢)ㆍ이경황(李慶滉), 군수 안종길(安宗吉)ㆍ이안민(李安民), 판관 권광환(權光煥)ㆍ주부(主簿) 남수(南燧), 판관 이숭원(李崇元)ㆍ세마(洗馬) 유시립(柳時立), 별제(別提) 윤형임(尹衡任), 사어(司禦) 신수을(愼守乙)ㆍ평시령(平市令) 이문현(李文顯), 사직(司直) 문경홍(文慶弘)ㆍ김정간(金廷幹)ㆍ권극정(權克正)ㆍ김운성(金雲成)ㆍ이정생(李挺生)ㆍ금부경력(禁府經歷) 정결(鄭潔), 직장(直長) 이준익(李俊翼), 내자정(內資正) 금변(琴忭), 별제(別提) 이경후(李慶後), 감역(監役) 성창렬(成昌烈), 주부 민대(閔濧), 직장 최원우(崔元祐), 전적(典籍) 채승선(蔡承先), 학정(學正) 이유일(李惟一), 현령 김조(金澡), 주부 박항길(朴恒吉), 현감 유덕민(柳德民)ㆍ조효원(趙孝元), 상례 이시립(李時立), 형조좌랑 이원여(李元輿), 직강(直講) 정대해(鄭大海), 별좌(別坐) 심숙(沈淑), 별제(別提) 임광후(任光後), 주부 이응철(李應喆), 판관 이숙(李潚), 주부 정종길(鄭宗吉), 봉사 유여성(柳汝惺), 병조좌랑 김우익(金友益), 첨정(僉正) 조계한(趙繼韓), 행 사과(行司果) 정진철(鄭震哲), 사용(司勇) 김효신(金孝信)ㆍ윤인남(尹仁男)ㆍ원유남(元裕男)ㆍ유승서(柳承瑞), 첨지(僉知) 한총(韓叢)ㆍ유황(柳璜), 교관(敎官) 이성석(李聖錫)ㆍ정응운(鄭應運), 전 현감 유효원(柳孝元), 초관(哨官) 신대지(申大枝), 직장(直長) 남궁격(南宮格)ㆍ박찬(朴璨), 봉사 조탁(趙鐸), 참봉 정문회(鄭文晦), 감역(監役) 임석준(任錫浚)ㆍ통례(通禮) 양극선(梁克選), 상례(相禮) 정유번(鄭惟籓), 군기주부(軍器主簿) 윤호(尹昈), 분 병조좌랑(分兵曹佐郞) 박률(朴慄)의 의견에 어떤 사람은, “대사의 의논이 이미 발의되었으니 어찌 감히 이견을 말하겠습니까.” 하고, 어떤 사람은, “온 나라의 공론이니 어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어떤 사람은, “어찌 포의보다 뒤져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이상은, “대사 의논이 이미 발의되었으니 어찌 감히 다른 논의를 할 수 있으랴.” 하는 사람들이다.
○ 예조판서 이이첨(李爾瞻)의 의논은, “신하들은 대비와 한 하늘 밑에 살 수 없는 대의(大義)가 있으며, 전하께서는 끝까지 보전해야 될 사은(私恩)이 있으니 여러 사람의 소를 절충하는 것은 오직 묘당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 영천군(永川君) 유(瑜), 봉산군(蓬山君) 정상철(鄭象哲), 한산군(漢山君) 조진(趙振), 행 동지(行同知) 유간(柳澗), 행 사직(行司直) 조유도(趙有道), 한천군(漢川君) 조정(趙挺), 한평군(韓平君) 이경전(李慶全), 우참찬(右參贊) 이충(李沖), 직강(直講) 유광(柳珖), 사용(司勇) 김응하(金應河), 부호군(副護軍) 남근(南瑾), 형조참의 조국필(趙國弼), 예빈정(禮賓正) 금개(禁愷), 승지 유대건(兪大建), 사정(司正) 전유형(全有馨), 부학(副學) 이호신(李好信), 예조참의 이명남(李命男), 한흥군(漢興君) 조공근(趙公瑾), 지사(知事) 한희길(韓希吉), 전흥군(全興君) 이시언(李時言), 직강 민호(閔頀), 전 사간(司諫) 정도(鄭道), 동추(同樞) 박정현(朴鼎賢), 별좌(別坐) 이성원(李誠元), 학유(學諭) 조희진(趙希進), 전 감찰 황각(黃恪), 송문길(宋文吉), 감역(監役) 홍우직(洪友直), 부호군(副護軍) 이문창(李文菖), 전 도사(都事) 민진원(閔震元), 현감 정혜연(鄭蕙衍), 첨사(僉使) 이효언(李孝彦), 판관 김현(金俔), 봉사(奉事) 박첨(朴瞻), 익위(翊衛) 이평형(李平亨), 봉사 이사민(李師閔), 내섬정(內贍正) 이순민(李舜民), 주부 김연경(金延慶), 훈련정(訓鍊正) 이충선(李忠善), 부정(副正) 이우철(李友哲)ㆍ허정식(許廷式), 병조좌랑 성이민(成以敏), 사과(司果) 이숙(李淑)ㆍ송의수(宋義壽), 호군(護軍) 한찬남(韓纘男), 첨정(僉正) 유일(柳●), 주부 신득일(申得一), 경선예정(慶選禮正) 안경(安璥), 제용정(濟用正) 이시정(李時楨), 별제(別提) 김수정(金守正), 감찰 이영식(李永式)ㆍ박미(朴楣)ㆍ정응성(鄭應星), 사옹정(司饔正) 윤정(尹綎), 감찰 김종진(金宗振), 주부 김덕망(金德望), 형조정랑 홍여일(洪汝一)ㆍ안숭헌(安崇憲), 사맹(司猛) 이욱(李煜)ㆍ허상(許詳)ㆍ신전(申瑑)ㆍ원수남(元秀男), 주부 박수의(朴守誼), 호정(戶正) 김적(金適), 복판(僕判) 유희안(柳希安), 사복정(司僕正) 황익중(黃益中), 별좌(別座) 황식(黃湜), 도사 이국형(李國衡), 주부 이탁(李晫)ㆍ직장 한여헌(韓汝賢)ㆍ우대유(禹大有), 주부 손종하(孫宗夏)ㆍ박안국(朴安國), 봉사 신종근(申從謹), 참봉(參奉) 구준(具濬), 봉사 신순(申楯), 참봉 이유후(李裕後), 주부 김영(金韺), 봉사 이준(李浚)ㆍ정문승(鄭文升), 직장 최응두(崔應斗)ㆍ정응흥(鄭應興)ㆍ형조정랑 나인(羅訒), 활인별제(活人別提) 이사성(李士星), 직장 이사증(李師曾)ㆍ박승안(朴承顔), 행 호군(行護軍) 이득원(李得元)의 의논은 어떤 사람은, “일이 종사에 관계되니 의정부에서 처리해야 합니다.” 하고, 어떤 사람은, “대사의 의논이 이미 발론되었으니 묘당의 처리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고, 어떤 사람은, “여러 사람의 소에서 이미 할 말을 다 했으니 묘당에서 잘 처리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상은, “어찌 다른 의논이 있겠습니까.” 하는 사람들이다.
○ 봉상첨정(奉常僉正) 차운로(車雲輅), 주부 이순(李楯), 참봉 이계해(李繼海), 사과 임위(任瑋), 행 사직 성시윤(成時潤), 승지 한회(韓懷)ㆍ윤형(尹絅)의 의논은, “조정에서 헤아려 처리하여 종사를 편안히 해야 합니다.” 합니다. 이상은 “종사를 편안하게 하라.” 는 의견이다.
○ 행사과(行司果) 황정록(黃廷祿), 병조좌랑 이용진(李用晉)ㆍ신식(申湜)의 의견은, “좌의정 정인홍은 산림(山林)에서 글을 읽어 시초와 거북 같은 어진 정승이니#불러 물어서 의논을 정해야 합니다.” 였다. 유희분은, “반드시 정인홍의 말을 들어야만 큰 변고에 대처하고 여러 사람의 의논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판돈녕(判敦寧) 민형남(閔馨男)의 의논은, “대신 가운데 산림에서 글을 읽은 사람이 있으니 전대의 역사를 널리 상고하여 충분히 서로 의논하여 확정해서 인륜의 변고에 잘 대처하여 임금이 백세의 뒷세상에 가서 물의를 입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다. 박승종(朴承宗)의 의논은, “지난 해 신경희(申景禧)의 공사(供辭)에 반드시 박승종 등을 죽여야 된다는 말이 있었으나, 다행히 밝으신 임금의 덕을 입사와 내버려 두고 신문하지 않았으므로 몸뚱이와 머리가 보전되었으니 털끝 만한 것이라도 모두 임금의 은혜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에는 마땅히 여러 사람의 소를 밖에 있는 대신들에게 내려 보내어 물어서 처리해야 될 줄 압니다” 하였다. 이상은 좌의정에게 묻기를 청하는 의논이다.
○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의 의논은, “조정의 의논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오직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를 다할 뿐입니다.” 하였다. 교리 정흡(鄭洽)의 의논은, “신하의 의리는 역적을 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사오니 잘 처리할 도리를 신은 날마다 바라고 있습니다.” 하였다. 우윤(右尹) 이원(李瑗)의 의논은, “바른 의논이 바야흐로 격렬하니 이에 따라 시행해야 합니다.” 하였다. 경양군(慶陽君) 이사공(李士恭)의 의논은, “유생의 소와 조정의 의논이 이미 다른 점이 없사오니 좋은 방향으로 시행해야 합니다.” 하였다. 행 호군(行護軍) 여인길(呂裍吉)의 의논은, “큰 의논이 이미 발론되었으니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는 그만둘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하였다. 정랑 이정(李涏)의 의논은, “이것은 묘당의 처리하는 데 달려있으니 임금께 번거로이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감역(監役) 이지호(李之豪)의 의논은, “은혜는 가볍고 의리는 무거우니 무거운 것을 따름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봉상주부(奉常主簿) 강문익(康文翼)의 의논은,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살 수 없고 사람마다 목 베어 죽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여우길(呂祐吉) 이선복(李善復)의 의논은, “큰 의논이 이미 발론되었으니 합당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하였다. 사과 이제(李穧)의 의논은, “일이 종사에 관계되니 임금을 사랑하는 의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사과 유홍보(兪弘輔)의 의논은, “다만 종사와 임금이 있음을 알 뿐입니다.” 하였다. 감역(監役) 서탁(徐晫)ㆍ오염(吳焰)의 의논은, “대비의 휘호(徽號)를 깎고 조알(朝謁)을 폐지하고 분사(分司)를 철폐해야 됩니다.” 하였다. 부사과 윤의(尹顗)의 의논은, “위태롭고 망하는 화가 조석에 닥쳤는데, 대신이 어찌 수위를 길 가에서 집짓기처럼 하십니까.” 하였다. 수문장 송일민(宋逸民)의 의논은, “신하와 백성들의 분개가 극도에 달했습니다” 하였다. 유경종(柳慶宗)의 의논은, “대의가 있는 데서 사사 은혜는 돌아볼 수 없으나 일이 중대하므로 반드시 사유를 갖추어 중국에 아뢰어 처리함이 마땅할 듯하옵니다.” 하였다. 이상은 사론(邪論)이다. 간혹 흉악하게 패역한 말이 많으나 다 기록하지 않는다.
○ 박홍구(朴弘耈)의 의논은, “의정부 대신들이 옛날 기록에 있는 일을 상고하여 오늘날에 참작하도록 힘쓸 것이며,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를 다하여 뒷날의 물의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조좌랑 한옥(韓玉)ㆍ황덕부(黃德符)의 의논은, “개인적인 은혜를 보전하는 것은 임금에게 있고 변고에 대처하는 대의는 신하에게 있으며, 여러 사람의 의논을 절충하여 끝까지 잘 처리하여 신하의 도리를 다하는 것은 묘당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박사(博士) 이돈(李遯)의 의논은, “대신들은 수의함으로써 일을 삼고 있으니 자기들의 할 일을 남에게 미루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일에 당하여 대신이 결정하여 처리하는 의의가 어디 있습니까. 많이 물어서 이야깃거리를 만들지 말고 빨리 잘 처리해야 합니다.” 하였다. 행 사과(行司果) 이응성(李應星)의 의논은, “묘당과 삼사에서 사리에 맞게 처리해야 합니다” 하였다. 예조좌랑 유약(柳瀹)과 승문원정자유집(柳潗)의 의견은, “신하들은 세상에 같이 살 수 없는 의리가 있고, 임금은 사사 은혜를 돌아다아야 될 정리가 있으니 오직 묘당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박자흥(朴自興)의 의논은, “나라를 위하는 성심은 남보다 배나 더합니다. 묘당에서 조정의 의논을 널리 수합하여 처리해야 합니다.” 하였다. 판결사(判決事) 박경신(朴慶新)의 의논은 전하께서 듣고 싶지 않다는 교지가 있음이 두 서너 번 정도가 아니었습니다만 다만 큰 의논이 이미 발로되었으니 비록 전하께서도 또한 마음대로 하실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사과 조국빈(趙國賓)의 의논은, “국시(國是)를 준수하는 사람은 모두 의리를 알 것이니, 의리를 알면 처리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하였다. 종부정(宗簿正) 유탁(兪濯)의 의논은, “국시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널리 상고하여 선처하소서.” 하였고 판서 서성(徐渻)의 의논은, “일이 종사의 안전과 위태로움에 관계되니, 신하된 의리로서는 마땅히 죽고 살기로써 해야 됩니다. 하물며 어리석고 용렬한 신 같은 사람은 외람되이 전하의 은혜를 입었사와 나라를 위하는 정성은 몸이 부숴지고 뼈가 가루가 되어도 회피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본디부터 지식이 없을 뿐더러 병들어 폐인이 된 지도 벌써 오래되었으니, 공경들이 두루 의논하여 처리해야 합니다.” 하였다. 한남군(漢南君) 이필영(李必榮)의 의논은, “나라가 불행하여 이러한 전례가 없는 변을 만났으니, 오직 여러 대신들이 경사(經史)를 널리 상고하고 공론을 널리 채택하여 자세히 강구해서 잘 처리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여양군(驪陽君) 민인백(閔仁伯)의 의논은, “나라 일을 근심하는 정성은 다른 사람보다 뒤지지 않습니다. 이 일은 다만 묘당에서 잘 처리해야 합니다.” 하였다. 행 호군(行護軍) 정문부(鄭文孚)ㆍ행 사과 윤안국(尹安國)의 의논은, “천하의 큰 일 중에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보다 어려운 것이 없으니, 은혜와 의리의 경하고 중함을 살피는 것은 오직 묘당에서 참작하여 처리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참판 조탁(曺倬)의 의논은, “대신이 묘당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큰 일의 결단은 오직 묘당에 달려 있습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강구하여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를 다해야 됩니다” 하였다. 장만(張晩), 김유(金瑬), 윤의립(尹毅立), 오천군(烏川君) 굉(鍧), 전유형(全有亨), 최관(崔瓘), 병조참판 이덕형(李德泂), 참의 정립(鄭岦), 판서 김상용(金尙容)ㆍ이시발(李時發), 분 승지(分承旨) 민여임(閔汝任), 사직(司直) 유영순(柳永詢)ㆍ윤휘(尹暉)ㆍ박동선(朴東善)ㆍ이광정(李光庭), 지사(知事) 노직(盧稷), 행 사직 정광성(鄭廣成), 예조참의 윤수민(尹壽民), 주서(注書) 이진영(李晉英), 길천군(吉川君) 권반(權盼), 사직(司直) 경섬(慶暹), 화산부수(花山副守) 이정(李汀), 선성부수(先城副守) 이신원(李信元)의 의논은, “아주 중대한 일을 얕은 학식과 견문으로서 감히 말할 수 없사오니 묘당에서 널리 상고하여 잘 처리해야 됩니다.” 하고 어떤사람은, “아주 중대한 일이니 오직 묘당에서 자세히 강구하여 잘 처리해야 됩니다.” 하였다. 부솔(副率) 조실구(曺實久)의 의논은, “절충해서 처리하는 것은 오직 묘당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분병 조참판(分兵曹參判) 김지남(金止男)ㆍ통례(通禮) 김위남(金偉男)ㆍ사과 김명남(金命男)의 의논은, “마침 동생 전 판관 김계남(金季男)의 초상을 만나 초상 절차를 마치지 못했으므로 정신이 어수선하여 말할 바를 알지 못하오니 묘당에서 잘 처리할 것이요 별다른 의논이 없습니다.” 하였다. 사과 강선(姜璿)의 의논은, “대궐 뜰에 서서 잘잘못을 다투는 것은 대간의 직책이요, 묘당에 앉아서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은 대신의 임무인데도, 서로 자신이 할 일을 남에게 미루어 오래도록 결단하지 못하니 진실로 지위가 낮은 신으로서는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아주 중대하여 조정 전체가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오니, 오직 대간과 대신의 의논에 의거하여 장점에 따라 처리해야 됩니다.” 하였다. 이상은 양쪽에 걸친 사람들의 의논들이다.
○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의 의논은, “의빈(儀賓)은 감히 의견을 드릴 수 없사오니 오직 조정에서 잘 처리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진안위(晉安尉) 유적(柳頔), 일선위(一善尉) 김극빈(金克鑌)의 의논은, “의빈은 정사에 참여하지 않아 일을 듣지 못했사온데 진실로 아는 바가 있다면 누가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길성위(吉城尉) 권대임(權大任)의 의논은, “나이 어리고 배우지 못했사오니 감히 의견을 드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절충(折衝) 이익(李榏), 가선(嘉善) 문희성(文希聖), 절충 구인후(具仁垕), 사용(司勇) 이서(李曙)의 의논은, “무식한 무인이 감히 의논할 수 없사오니 의정부에서 적당하게 잘 처리해야 합니다.” 하였다. 능해군(綾海君) 구성(具宬), 동돈녕(同敦寧) 김극효(金克孝)의 의논은, “병들고 정신이 흐려서 의견을 드리지 못합니다” 하였다. 공성군(功城君) 이식(李植)의 의논은, “정신이 흐려서 살펴보지 못했사오니 의정부에서 공론을 널리 채택해야 합니다.” 하였다. 동지(同知) 김현성(金玄成)의 의논은, “쇠약하고 사리에 어두운 사람이 의논할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사직(司直) 허흔(許昕)의 의논을, “늙고 쇠약한 사람이 끼어들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행 사직(行司直) 박이서(朴彝叙)의 의논은, “죄를 얻어 내쫓기고 병들어 엎드려 있어 질병이 오래도록 낫지 않으니 감히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전 직강 박로(朴●)의 의논은, “어린아이 수준의 금밖에 배우지 못한 소생이 어찌 감히 망녕되이 의논하겠습니까.” 하였다. 한음군(漢陰君) 현(俔), 판돈녕(判敦寧) 박안세(朴安世)의 의논은, “병이 심하여 거의 죽게 되었사오니 감히 의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무겸(武兼) 구굉(具宏)ㆍ신경원(申景瑗), 선전관(宣傳官) 신경기(申景沂), 행 사과(行司果) 유림(柳琳)ㆍ유몽룡(劉夢龍)ㆍ이경호(李景湖)ㆍ박상(朴瑺)ㆍ이눌(李訥)ㆍ김응함(金應緘), 행 첨지(行僉知) 이유성(李惟誠), 호군(護軍) 윤응삼(尹應三)ㆍ오정방(吳定邦)ㆍ고경민(高敬民), 선전관 유파(柳坡), 군기주부(軍器主簿) 심염(沈恬)ㆍ임영(林英)의 의논은, “무식한 무인이 감히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판중추 이정귀(李廷龜)의 의논은, “사가에서 거적을 깔고 귀양을 기다리고 있사오니 감히 거만하게 의견을 드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상은 감히 의견을 드릴 수 없다는 사람들이다.
○ 분승지(分承旨) 목장흠(睦長欽), 공조정랑 박선(朴●), 사용(司勇) 홍진도(洪振道), 사과 윤이지(尹履之), 사재정(司宰正) 송원인(宋元訒), 전적(典籍) 이지정(李志定), 현감 이경엄(李景嚴)ㆍ조직(趙稷)ㆍ구인기(具仁基), 전적 강홍중(姜弘重), 승문권지(承文權知) 박조(朴簉), 병조좌랑 조길(曺吉), 감역(監役) 이민수(李敏樹), 교관(敎官) 정언눌(鄭彦訥), 형조정랑 신득연(申得淵), 군자정(軍資正) 유효립(柳孝立), 사직 민영(閔韺), 부사정(副司正) 정효성(鄭孝誠)ㆍ여원정(礪原正) 이세헌(李世憲), 북부주부(北部主簿) 이시태(李時台), 승문정자 한유상(韓惟翔)ㆍ한윤겸(韓允謙), 사인(舍人) 유충립(柳忠立), 형조좌랑 윤정지(尹挺之)의 의논은, “이 일은 중대하여 소관(小官)들의 의논할 바가 아니오니 의정부에서 잘 처리해야 합니다.” 하였다. 김신국(金藎國)의 의논은, “나라의 큰 계책을 한직에 있는 자가 어찌 감히 말참견을 하겠습니까. 대신이 짐작해 헤아려 잘 처리해야 합니다.” 하였다. 보덕(輔德) 정광경(鄭廣敬), 공조좌랑 이명한(李明漢), 한창군(韓昌君) 이경함(李慶涵)의 의논은, “아주 중요한 일을 미관말직에 있는 자가 감히 의견을 드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사과 심즙(沈諿), 승문정자 홍헌(洪瀗)의 의논은, “이 일은 중대하니 소관이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의정부에서 다시 더 신중히 하여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를 다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조참의 유몽인(柳夢寅)의 의논은, “아주 중요한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에 대해 어찌 감히 말 참견을 하겠습니까. 일찍이 듣건대 조정에 삼정승과 대간과 시종이 고금의 적당한 점을 참작하여 처리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사산감역(四山監役) 윤형준(尹衡俊)의 의논은, “맡은 일은 소나무와 잣나무를 키우는 데 있을 뿐이오니 조정의 큰 의논에는 감히 참여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복천군(福川君) 오백령(吳百齡)의 의논은, “아주 중대한 일이오니 의정부에서 힘을 다하여 잘 처리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상은 소관이 감히 의견을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 서평수(西平守) 이훈(李壎)의 의논은, “예사로운 말도 사리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아주 중대한 의논을 어찌 감히 함부로 의논할 수 있습니까. 경사(經史)에서 상고하고 원로에게 물어서 먼 훗날에 다른 논의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니, 오직 의정부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공조판서 이상의(李尙毅)의 의논은, “인륜의 변고는 예로부터 어렵게 여기는 것입니다. 전하의 효성은 천성에서 타고 나와 여러 임금보다 뛰어났으니 거룩한 덕을 공경하고 우러를 뿐 감히 의논할 수 없습니다. 의정부에서 전대의 역사를 널리 상고하여 자세히 강구하고 살펴서 처리해야 합니다.” 하였다. 송영구(宋英耈)의 의논은, “이 일은 마땅히 의리상에서 충분히 강구해야 될 것입니다. 말할 바는 다만 이것뿐이오니 전체적으로 의정부에서 잘 처리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호군(護軍) 민성휘(閔聖徽)의 의논은, “은혜와 의리의 경하고 중함을 살펴서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를 다해야 될 것이오니 의정부에서 처리하여 적당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사정(司正) 오숙(吳䎘)의 의논은, “나라의 큰 대책은 낮은 지위에 있는 소관의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밝으신 전하께서 적당한 계책을 굽어살펴서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를 다하기를 힘써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형조정랑 권점(權佔)의 의논은, “일이 중대한 데에 관계되니 얕은 학문과 어두운 소견으로서는 경솔히 의논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덕망이 있는 늙은 신하에게 자세히 묻고 학식이 넓은 큰 선비에게 널리 물으면, 예에 의거하고 경서를 상고하며, 자세히 강구하고 명백히 분변하며, 처음에서 끝까지 신중히 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병조정랑 오윤해(吳允楷)의 의논은, “정상적인 일에 대처함은 쉬우나 변고에 대처함은 어려우니 의정부에서 옛글을 널리 상고하여 헤아려서 잘 처리해야 합니다” 하였다. 사섬봉사(四贍奉事) 민선철(閔宣哲)의 의논은, “임금은 효도하고 신하는 충성하여 은혜와 의리의 두 가지를 다할 뿐입니다.” 하였다. 사과 남이웅(南以雄)의 의논은, “우리 임금의 효성으로써 이러한 전에 없는 변을 만났으니 오직 의정부에서 잘 처리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계해년(1623)에 정론(正論)으로써 표창되어 상받은 사람에 전 좌랑 조국빈(趙國賓), 정언 김익(金瀷), 감찰 윤형준(尹衡俊), 판서 이정귀(李廷龜)ㆍ이시언(李時彦)ㆍ윤방(尹昉), 전 감사 오윤겸(吳允謙)ㆍ송영구(宋英耈), 주부 정사온(鄭思溫)이 있었다.
○ 이때 이항복이 동강(東岡)에 은퇴하여 조정에 참여하지 않은 지가 벌써 5년이나 되었는데, 홀연히 큰 우렛소리가 집을 진동시키므로 깜짝 놀라면서, “하늘이 경계해서 알리는구나.” 하였다. 조금 후에 추부경력(樞府經歷) 이사손(李士遜)이 와서 수의하였다. 이항복은 이때 병들어 있었는데 부축받아 일어나서 붓을 들어 쓰기를, “신은 8월 9일에 다시 중풍을 얻어 몸뚱이는 비록 죽지 않았으나 정력은 이미 허해졌습니다. 하늘(임금)을 쳐다보고 구름을 바라다보면서 죽을 것을 스스로 정한 지 지금 거의 반 년이 되어가는데도 아직 병석에 있습니다. 무릇 공사에 관해서는 대답하기 어려운 형편이지만, 이번 일은 나라의 큰 일이오니 남은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병으로 핑계를 삼고 입을 다문 채 잠잠히 있겠습니까. 누가 전하를 위하여 이 계책을 세웠습니까. 임금의 앞에서는 요순(堯舜)의 도 아니면 진술하지 않는 것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밝은 훈계입니다. 순(舜)은 불행하게도 부모가 완악하여 항상 순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순을 시켜 우물을 치게 하고는 흙으로 덮어 버렸으며, 창고를 수리하러 올려보낸 후에는 창고를 불살라 버렸으니 그 위험이 극도에 달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순은 목놓아 울고 원망하고 사모하면서 부모가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아버지가 비록 자식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자식은 아버지에게 효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의 의리에는 자식이 어머니를 원수로 여기는 법이 없습니다. 하물며 급(伋)의 아내가 된 자는 백(白)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니, 효도의 중한 것이 어찌 친모와 계모가 다름이 있겠습니까. 지금 효도러써 나라를 다스려 한 나라 안이 점차 교화되어 가는 조짐이 있는데, 이 말이 어찌해서 전하의 귀까지 이르게 되었습니까. 지금의 도리로서는 순의 덕을 본받아 효도로써 화합하고 지성으로 섬겨, 대비의 노여움을 돌려서 자애로 만들고자 함이 어리석은 신이 바라는 바입니다.” 하였다. 이 의논이 이르니, 들은 사람은 두려워하여 머리털이 꼿꼿이 서고, 간혹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저리(邸吏)가 공의 의논을 기록하면서 손이 떨려 글을 쓰지 못하기까지 하였다. 《백사집(白沙集)》《북천록(北遷錄)》
○ 사과 정홍익(鄭弘翼)의 의논은, “옛날의 제왕으로 인륜의 변고를 만난 이는 순과 같은 이가 없으며 또한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를 다한 이로서 순과 같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 몸쓸 어머니가 선동하여 순을 해치려고 온갖 계책을 다 썼으나 순은 공손히 자식의 직분을 다했을 뿐이오며, 지성으로 섬겨 나중에는 부모를 감화시킨 아름다움을 이루었으니, 이가 인륜의 지극함이 된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동궁에 계실 때부터 어질고 효성스런 명성이 떨쳐져서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전하의 효성이 지극하여 다른 사람에까지 미치게 하는 교화를 우러러 바랐는데, 불행히 인륜의 변고를 만나 아래서 도우는 여러 신하들이 임금의 효성을 도와서 순과 같게 만들지는 못하고 이전에 없는 일을 의논하게 되니 신은 적이 의혹하고 있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밝으신 임금께서 멀리 순을 본받아 효성을 다하시어 대비와 전하 사이가 화기애애하다면 한 나라 신하와 백성들도 모두 어질고 효성스런 교화에 젖어 임금의 거룩하신 덕이 만대에 빛날 것입니다.” 하였다. 《명륜록》 정홍익(鄭弘翼)은, 자는 익지(翼之)이며, 호는 휴헌(休軒)이요, 벼슬은 부제학(副提學)이다. 갑자년에 죽었으며,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다. 진도(珍島)에 위리(圍籬)되었다가 종성(鍾城)으로 옮겼으며, 광양(光陽)에 안치(安置)되었다.
○ 군기시정(軍器寺正) 김덕함(金德諴)은 《춘추(春秋)》와 《예기(禮記)》에 있는 급처 백모(伋妻白母)의 설을 인용하여 초고를 여러 백 자 만들었는데 이항복의 수의를 보고는 탄식하면서, “내가 말하려고 한 것은 오성(鰲城)대감이 벌써 다 말했으니 다시 쓸 데 없는 말을 더할 것이 없다. 또 나라의 정무를 맡은 대신이 다 진술했는데도 그것을 불사르라고 명했으니 내 말이 무슨 도움이 되랴. 옛 사람이 범중엄(范仲淹)과 함께 귀양가겠다고 청한 일이 있으니 이것이 한 번 죽을 만한 것이다.” 하고 드디어 의견을 드리기를, “신의 일편단심 임금 사랑하는 마음은 이항복ㆍ정홍익과 같습니다.” 하였다. 《성옹년보(醒翁年譜)》ㆍ《북천록(北遷錄)》
○ 청풍군(淸風君) 김권(金權)의 의논은, “정신이 어수선하고 아찔하여 정신이 없으니 이처럼 큰 일을 어찌 감히 경솔히 의논하겠습니까. 다만 임금을 잘못이 없게 하는 것이 신의 임금을 사랑하는 지성이요, 시종토록 은혜를 보전하는 것이 전하께서 변고에 대처하는 큰 덕이며, 천 년 후에 전하를 순과 같이 일컬어지게 함이 신의 어줍잖은 소망입니다.” 하였다. 《명륜록》○ 처음에 강계(江界)로 귀양갔다가 후에 무안(務安)으로 옮겨가서 죽었다. 권(權)은 식(湜)의 손자이다.
○ 사용 이신의(李愼儀)의 의논은, “지금 이 큰 의논에 대해 어찌 감히 말을 하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서경(書經)》에, ‘반드시 참음이 있어야만 일이 성취되고, 반드시 용납함이 있어야만 덕이 커진다’ 고 하였습니다. 모든 일은 용납하고 참는 데서 성공하고, 용납하지 못하고 참지 못하는 데서 실패했습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크고 작은 논의는 반드시 인정(人情)과 천리(天理)를 먼저 살펴야만 옳고 그른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대개 인정이 기뻐하는 일은 천리의 당연한 극치이요, 인정이 기뻐하지 않는 일은 천리의 당연하지 못한 극치입니다. 지금 아주 중대하여 지극히 처리하기 어려운 일에 있어 만약 인정과 천리를 살피지 않고 경솔히 행한다면 이는 용납하지 못하고 참지 못한 일 중에서 쿤 것입니다. 그 관계가 극히 중하고도 크니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속언(俗諺)에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기 어려우며, 깨어진 시루는 다시 붙일 수 없다’ 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조정의 의논이 만에 하나라도 실수가 있으면 후에 비록 뉘우치더라도 도움이 되겠습니까. 대저 사람의 마음이 곧 하늘의 마음이며, 하늘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순하면 천리도 또한 순해지고 사람의 마음이 순하지 못하면 천리도 또한 순하지 못하게 됩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자세히 살펴서 인정이 기꺼이 복종하고 천리가 당연한 바를 쾌히 따르게 하신다면 순의 세상이 오늘날에 다시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순의 마음을 본받고 순의 도를 행한다면 귀신과 사람이 기뻐할 것을 어찌 이루 다 말하겠습니까. 외로운 음관(蔭官)이 이 말을 한 번 꺼내면 진실로 목베일 줄 알지마는 양조(兩朝 선조조(先祖朝)ㆍ광해조(光海朝))의 은혜가 망극하니 어찌 감히 입을 꽉 다물고 자신만 보전하면서 전하를 저버리겠습니까. 입을 다물면 살고 혀를 놀리면 죽을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지마는 국시(國是)가 일치하지 않는 이때에 차마 입을 다물고 잠잠히 있을 수 없습니다.”하였다. 《명륜록》○ 처음에 회령(會寧)으로 귀양가서 3년 동안 있다가 흥양(興陽)으로 옮겨 4년 동안 있었다.
○ 사과 권사공(權士恭)의 의논은, “천하의 일이 정상적인 때에 대처하는 것은 쉬우나 변고에 대처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정상적인 도리는 사람들이 모두 논할 수 있지마는 변고에 이르러서는 도를 체험하여 얻은 이가 아니면 이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육식하는 대신이 의정부에서 모의하고 있으니 미천한 소신이 망녕되이 의논할 일이 아니옵니다. 다만 전하께서 일을 처리할 때에는 마땅히 성인을 본받아야 될 것이며 한ㆍ당(漢唐) 이후의 일은 본받을 것이 못됩니다. 옛날의 성인이 인륜의 변고를 만났으나 그 성인된 품격을 잃지 않은 것은 그들의 일을 처리함이 그 도리에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그 도리에 맞는다는 것도 또한 그 천리의 당연한 것을 다하여 그때의 사정에 맞도록 함입니다. 오늘날의 일은 조정에서 다시 상의하여 확정하고 고금의 일을 참고하여 그 경중을 참작해서 처리하되 천리(天理)에 합하고 인정에 맞도록 힘써서 조금이라도 미진한 점이 없어야만 오늘날에도 유감이 없을 것이요, 다음 세상에도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또 옛날 성인의 변고에 대처했던 도리에 부합하여야 만이 후세 사람들의 생각나는대로 처리한 것과 같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세히 강구해서 살펴 처리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이상은 정론(正論)이다.
○ 정자(正字) 김지수(金地粹)의 의논은, “다만 비상(非常)한 사람이라야만 비상한 도리를 다할 수 있사오니 의정부에서 잘 처리할 일입니다. 서캐 같은 소신은 죽을지언정 감히 입을 벌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명륜록》○ 경원(慶源)으로 귀양보내었다.
○ 첨지 오윤겸(吳允謙)의 의논은, “오늘날의 변고에 대처함은 올바른 도리를 다해야 만천하에 떳떳하게 할 말이 있을 것이며, 다음 세상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의정부에서는 옛날 성인의 변고에 잘 대처한 분을 찾아내어 그를 본받아 임금의 효도를 더욱 크게 하고 임금의 덕을 더욱 높도록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명륜록》
○ 이때 병사 오정방(吳定邦)은 대답해 말하기를, “신은 무부이므로 다만 사략 초권(史略初卷)의 ‘순이 지성으로 섬겨 부모를 교화시켰다.’는 한 구절만 읽었을 뿐입니다.” 하였다. 들은 사람이 그를 장하게 여겼다. 《곤륜집(昆崙集)》
○ 전 도사 민환(閔桓)의 의논은,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는 마땅히 성인과 같게 해야 합니다. 이 밖에 무엇을 의논하겠습니까.” 하였다. 《일기(日記)》《기문(記聞)》
○ 호조좌랑 김상□(金尙□)의 의논은, “아주 중대한 일을 지위가 낮은 낭관이 말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변고에 대처할 즈음에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사랑하는 지극한 충정입니다” 하였다. 《일기》
○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 정사온(鄭思溫)의 의논은, “인륜은 지극히 중하고 대의는 환하게 밝으니 인륜을 중히 여기고 의(義)를 밝혀서 변고에 대처하여 도리를 다해야 합니다.” 하였다. 《일기》《기문》
○ 부호군(副護軍) 이시언(李時彦)의 의논은, “이것은 아주 중대한 일이오니 진실로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미천한 신이 정신이 극도로 어둡고 쇠약해졌으니 죽기를 각오한 일념으로 다만 임금을 사랑하는 성심뿐입니다. 신하가 임금을 사랑하되 마땅히 그 도리대로 해야 될 것입니다. 다만 원하옵건대 밝으신 임금께서는 경사를 널리 상고하시고 신하들에게 널리 물으시어 처리하는 데 그 도리를 다하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일기》
○ 전 정랑 이문명(李文蓂)ㆍ전 판관 이문빈(李文薲)의 의논은, “신하된 도리는 다만 의리일 뿐입니다. 도리를 다하여 변고에 대처하는 것은 의정부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이상은 이론(異論)을 세운 것이다.
○ 인성군(仁城君)ㆍ무림군(茂林君)과 이이첨(李爾瞻)ㆍ이몽룡(李夢龍)ㆍ조정(趙挺)ㆍ송석경(宋錫慶)ㆍ임곤(任袞)ㆍ윤신(尹兟)등 수십 명은 대비를 폐해 내쫓자는 의논을 주장하고, 김권(金權)ㆍ정홍익(鄭弘翼)ㆍ김덕함(金德諴)ㆍ이신의(李愼儀)ㆍ권사공(權士恭) 등은 정론(正論)을 지키고, 의창군(義昌君) 정창연(鄭昌衍), 이정귀(李廷龜), 윤방(尹昉)은 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며, 신익성(申翊聖)도 또한 병으로써 의견을 바치지 않았으며, 이광정(李光庭)ㆍ권반(權盼)처럼 평상시에 큰소리치는 사람도 대부분 주저하고 남에게 미루며 곧은말을 하지 못하니, 견식이 있는 사람은 더욱 그들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유근(柳根)은 일이 장차 발론(發論)될 줄 알고 조상의 산소에 성묘한다고 핑계하면서 괴산(槐山)으로 가서 숨어서 나오지 않고, 광정(光庭)은 목욕하러 지방에 나갔다가 창황히 달려 돌아와서 마침내 조정의 의논에 참여하니 사람들이 그들을 침뱉고 더럽게 여겼다. 《청백당 기사》
○ 임숙영(任叔英)은 이이첨(李爾瞻)이 그 의논을 널리 수의하여 다른 사람을 눌러서 모조리 잡을 계획을 한다는 말을 듣고는 수백 자의 글을 초 잡았으니 그 내용은, “임금께서 이러한 일을 여러 신하에게 물으시면서 그 옳지 못한 점을 모르신 것은 간신이 임금의 총명을 가리우는 데 속았고 또한 미처 이 일을 시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일이 이루어지는 날에 임금께서 만약 대비가 너무 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태도와 얼굴을 가리우고 눈물을 지으면서 대궐 밖으로 나가는 형상을 보신다면 자기도 모르게 마루에서 내려와 쫓아가서 붙잡고 대성통곡할 것이며 이 의논을 아뢴 자를 베어 죽이기도 바쁠 것이온데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소암언행록(疏菴言行錄)》
○ 이때 정홍익이 달밤에 뜰에서 산보하다가 지팡이로 땅바닥을 두드리면서, “내일 아침에 이 의논에 이론(異論)을 세울 사람은 오윤겸(吳允謙)일까, 김상용(金尙容)일까. 누가 나와 함께 일을 같이 하겠는가.” 하였다. 《추탄연보(楸灘年譜)》
○ 26일에 생원 진호선(陳好善)이 소를 올려 기자헌을 엄하게 국문하여 사실을 캐내고 수의할 때 이론한 사람과 정협(鄭浹)의 공초에 나온 역적에게 가담한 무리들을 먼저 죽이고 귀양보내며 이내 이항복을 목베도록 청하였다. 유학 한천정(韓天挺)은 소를 올려 기자헌을 목베어 그 목을 매달아 여러 사람에게 보이기를 청하였다. 삼사가 합하여 기자헌의 일로써 세 번이나 아뢰고 옥당에서 두 번이나 차자를 올렸다. 답하기를, “불행하게도 내가 이러한 큰 변고를 만나 매우 근심하고 있는데 어찌 대신의 죄를 다스리겠느냐. 다만 대신이 논핵을 당했으니 형편상 출사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위태한 시기에 정승의 직책을 오랫동안 비워둘 수는 없으니 정승을 바꾸겠다” 하였다. 또 옥당의 차자에 답하기를, “이같이 논핵하여 고집하니 기자헌을 파직하라” 하였다. 삼사가 합하여 날마다 세 번씩 아뢰니 기자헌의 관직을 삭탈하여 서울 문 밖으로 내쫓으라 하고 또 부처(付處)하라고 명하였다.
○ 27일에 유학 김정량(金廷亮)이 소를 오리기를, “한호순을 간곡히 타일러서 만약 명에 좇아 나오지 않으면 기자헌과 함께 목베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28일에 유학 정지문(鄭之問)이 소를 올리기를, “서궁이 선후(先后 선조(宣祖)의 초취(初娶) 박씨(朴氏))에게 요사스런 치방을 했으니 곧 전하의 원수입니다. 빨리 우의정을 불러서 큰 정국을 완성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생원 정충립(鄭忠立)은 소를 올려 김세렴(金世濂) 등을 위리시키고 정청(庭請)을 빨리 행하도록 청하였다. 생원 신서정(申瑞廷) 등은 소를 올려 빨리 어진 정승을 새로 가려 뽑아 국시(國是)를 정할 것을 청하였고 진사 김이일(金以一) 등은 소를 올리기를, 공론을 쾌히 좇아 대의를 밝힐 것을 청하였고 생원 선세휘(宣世徽)는 이항복을 빨리 신문하여 실정을 캐내어 국시를 정하도록 청하였다. 유학 최성(崔晟)은 소를 올려 먼저 조경기(趙慶起)ㆍ정온(鄭蘊) 등을 목베고 다음은 김세렴이 그의 장인 유희발(柳希發)의 사주(使嗾)대로 정론을 방해하고, 기자헌ㆍ이항복이 임금을 배반하고 나라를 저버린 죄를 가지고 모두 목베기를 청하였다.
○ 29일에 박자윤(朴自胤)은 소를 올려 나라를 안정시킬 큰 계책과 훈공을 공정하게 녹훈할 것을 청하였다. 생원 곽유도(郭有道)는 소를 올리기를, “빨리 이항복의 머리를 베어 불충한 신하를 징계하고 김세렴을 먼 변방에 위리(圍籬)시켜야 합니다.” 하였다. 두 번째 올린 소이다.
○ 30일에 생원 여후망(呂後望)이 소를 올리기를, “장차 역모의 곡절로써 중국의 예부(禮部)에 글을 바치려면 먼저 임해군이 위를 사양한 것이라고 예부에 잘못 대답한 자(이호민)를 목베고 아울러 전후에 역적에 가담한 자를 죽이소서.” 하였다. 두 번째 올린 소이다. 유학 이강(李杠)ㆍ이규(李榘)ㆍ윤지임(尹之任)ㆍ한보길(韓輔吉)ㆍ박률(朴嵂)ㆍ김탁(金鐸)ㆍ박준영(朴俊英)ㆍ김정계(金廷啓)ㆍ진사 지성해(池成海)ㆍ김이일(金以一)ㆍ정희립(鄭希立)ㆍ김현길(金鉉吉) 등은 소를 올려 역적을 비호하는 무리를 빨리 목베기를 청하였다. 생원 이홍순(李弘詢)은 소를 올려 정승을 다시 뽑아 빨리 의논해 처리하고, 이어서 기자헌을 목베기를 청하였다.
○ 12월 1일에 유학 이위(李瑋)가 소를 올리기를, “흉한 기(奇 기자헌)는 곧 종사(宗社)의 적이니 신하로서 한 하늘 밑에 같이 살 수 없사온데, 유희분(柳希奮)은 가까운 척속(광해의 처남)으로서 최관(崔瓘)과 함께 말을 나란히 타고 가서 기자헌을 방문하고는 돌아오는 길에 말에서 떨어져 두 사람이 다쳤으니 그들의 임금을 배반하고 역적을 비호하는 마음이 극히 괘씸합니다. 청컨대 엄중한 명을 내려서 다시 내왕하지 못하게 하여 그 가문을 보전하도록 하옵소서. 이항복을 빨리 처형하여 화근을 없애 버리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두 번째 올린 소이다. 삼사의 합계와 옥당의 차자에 답하기를, “오늘날의 일을 시행해 보건대 시종토록 다른 견해를 되풀이하고 핑계대면서 대론(大論)을 담당하지 못하고 다만 좋은 명성만 차지하려고 하는 사람이 어찌 기자헌 혼자 뿐이랴. 위리시키는 것은 너무 지나치니 번거롭게 말하지 말라” 하였다. 유학 양시익(楊時益)ㆍ송승서(宋承緖), 신방진사(新榜進士) 민종(閔悰)ㆍ윤유겸(尹惟謙) 등은 소를 올렸는데, 혹은 빨리 서궁의 지위를 깎고 김세렴ㆍ기자헌ㆍ이항복을 죄주고, 또 유희발(柳希發)이 세상 물정에 어두운 박자응(朴自凝)을 사주(使嗾)하여 병을 핑계대게 했으며, 김호(金昈)ㆍ이강(李茳)은 지위가 대간이면서 큰 의논을 떨쳐 일으키지 않고 경솔히 서궁에 먼저 사은숙배했으니 그 죄를 모두 징계할 것을 청했으며, 혹자는 빨리 기자헌을 목베고 정승을 새로 가려 뽑기를 청하고 유몽인(柳夢寅)이 수의할 때에 되풀이 하면서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니 먼저 귀양보내어 벼슬자리의 수효만 채우는 관원을 징계하기를 청하였고, 혹자는 유충립(柳忠立 )이 당하관을 거느리지 않은 죄와, 원수신(元守身)은 장수와 병졸들이 소를 올리려는 것을 막은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남부(南部)와 동부(東部)에 사는 노인 신인(辛人)ㆍ이봉(李鳳) 등은 빨리 큰 계책을 정하도록 청하였다. 이때 우윤(右尹) 김은(金誾)은 그 방(坊 : 오늘날의 洞과 같은 행정단위)에 사는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고 대장 이시언(李時言)은 군사를 불러모아서 한꺼번에 소를 올려 위로는 임금에게 반대하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보이고는 온 나라 사람들이 모의하지 않고도 같은 의견을 가진 것처럼 속이고, 아래로는 조정 신하들에게 위엄을 보여서 그 뜻을 받들어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도록 함이었다. 그 방에 사는 방민(坊民) 중에 노인들이 점점 도망쳐 버리자 김은이 그들의 처자를 잡아가두니 혹 집을 팔고 멀리 도망하는 사람도 있었다. 《청백당기사》
○ 이후로 조관(朝官)ㆍ유생(儒生)ㆍ방민(坊民)ㆍ악사(樂師)ㆍ별무사(別武士)ㆍ삼의사서리(三醫司書吏)ㆍ기패관(旗牌官)ㆍ화원(畵員)ㆍ각 관아의 담당관원들이 날마다 네다섯 번씩 소를 올렸다. 《조야기문》
○ 기로(耆老) 숭수(崇壽) 이시민(李市民) 등 행 사정(行司正) 표헌(表憲), 군기부정(軍器副正) 정문진(鄭文振), 사역원정(司譯院正) 김경생(金慶生), 선전관 신진(申蓁), 남부의 방민 이봉, 북부의 방민 허평(許平), 중부의 노인 김충수(金忠壽), 서부의 노인 김응학(金應鶴), 훈련도감(訓練都監)의 군사 김춘(金春) 등 2천여 명과 기총(旗摠) 최춘기(崔春起), 전의감정(典醫監正) 유경방(劉景邦), 서리(書吏) 김호성(金好誠), 율학교수(律學敎授) 김천희(金千喜), 산원(算員) 강인경(康仁慶), 양사서리(兩司書吏) 최득룡(崔得龍), 동지(同知) 황윤경(黃允敬), 내수사 별좌(內需司別坐) 한덕량(韓德良), 겸사복(兼司僕) 양응립(梁應立), 전 사과 송영조(宋榮祚), 우림위(羽林衛) 전득춘(田得春), 혜민서주부(惠民署主簿) 조여로(趙汝櫓), 기패관(旗牌官) 김건(金健)ㆍ의정부 서리 박언호(朴彦豪), 의원(醫員) 박홍헌(朴弘憲), 전 사과 황박(黃珀), 행 사용(行司勇) 장예충(張禮忠), 행 사과(行司果) 이상룡(李祥龍), 사자관(寫字官) 이경량(李景良), 서원(書員) 김충신(金忠信), 훈련습독관(訓練習讀官) 이필(李弼), 행 사과 정진철(鄭振哲), 전윤(田潤), 악사(樂師) 임환(林桓), 서부 참봉(西部參奉) 김완(金浣), 별무사(別武士) 황몽륜(黃夢倫), 녹사(綠事) 김윤옥(金潤屋), 행 사정(行司正) 이여해(李汝楷), 역관(譯官) 장응기(張應麒) 등이 소를 올렸다. 유학 이국광(李國光)ㆍ서의중(徐義中)ㆍ황정필(黃廷弼) 등은 소를 올려 기자헌ㆍ한효순(韓孝純)ㆍ김세렴ㆍ이항복ㆍ박홍구(朴弘耈)ㆍ민형남(閔馨男)ㆍ정홍익 등을 빨리 삼사의 청에 따라 처형할 것을 말했으며 또 역적 토벌할 일을 청하였다. 유학 박극(朴極)은 소를 올려 수의할 대에 이의를 말한 사람을 목베도록 청하였다.
○ 4일에 순녕군(順寧君)은 소를 올려, 도당(都堂 의정부)의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으므로 처벌을 기다린다는 일을 말했으며, 무림군(茂林君) 선윤(善胤)은 소를 올려, 물러가 있는 어진 정승(정인홍)을 빨리 불러와서 국시를 정하도록 청했으며, 유학 윤로(尹魯)는 소를 올려 역적 토벌할 일을 청하였다.
○ 5일에 삼사가 합하여 세 번 아뢰기를, “기자헌의 죄는 스스로 만든 것이니 처음부터 그 죄대로 벌을 주었으면 이처럼 중대하고 곤란한 일이 생기지 않았을텐데 전하께서 사정(私情)에 치우쳐서 한결같이 굳게 거절하셨습니다. 위리(圍籬)시키는 것도 제대로 된 처벌이 아닌데 어찌 부처(付處)에 그치고 말겠습니까.” 하였다. 답하기를, “부처와 위리는 같은 귀양살이니 의논하지 말라” 하였다. 《명륜록》
○ 6일에 조관(朝官)의 3품 이하 동반(東班)과 서반(西班)의 문관(文官)ㆍ무관(武官)ㆍ음관(蔭官)이 의정부의 분부로 도당(都堂)에 모여서 의논하여 단자(單子)를 써서 바치었다. 유학 윤로ㆍ진사 곽영(郭瓔)ㆍ성균관 유생 정기(鄭淇) 등이 소를 올려 기자헌ㆍ이항복ㆍ정홍익 등을 목베고 아울러 대신과 대간의 역적 토벌을 지체시킨 죄를 다스리도록 청하였다.
○ 9일에 전후에 수의한 것을 봉해 내려보내니 삼사가 함께 아뢰기를, “삼가 이항복ㆍ정홍익 등의 수의를 보건대 순(舜)의 변고에 대처했던 도리를 인용하여 말하였습니다. 순은 인륜이 지극한 분이니 진실로 본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만약 오늘날의 일과 비교한다면 매우 같지 않습니다. 순은 필부였습니다. 비록 모진 어머니에게 박해를 당했으나 그 화는 한 몸에만 그쳤으니 순이 자식의 직분을 공손히 한 것이야말로 순이 순된 까닭이었습니다. 제왕(帝王)은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이 의탁하는 바입니다. 불행히 변을 만난다면 화가 종사와 신민에게 미치게 되니 제왕이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는 필부와 같이 할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만약 순이 이미 임금의 자리에 있는데 악한 어머니의 화가 이와 같았다면 순은 비록 어머니로써 대우하더라도 순의 신하된 사람은 순이 죄인이 되는 것을 앉아서 보기만 하고 악한 어머니의 죄를 밝히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죽인 것은 사소한 죄인데 고요(皐陶)가 오히려 고수(瞽瞍)를 잡으려는데도 순은 이를 금지시킬 수 없으므로 다만 몰래 고수를 엎고 도망할 계획을 할 것이고,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로써 하고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는 은혜로써 하는 것이니, 대처하는 도리가 어찌 서로 현격하게 다르지 않겠습니까. 성상께서는 비록 몰래 업고 도망가실 의사가 있더라도 신하된 자로서 어찌 고요처럼 잡지 않겠습니까. 이항복 등은 의정부에서 묻는 사항은 언급하지 않고서 감히 협박하고 우겨대는 말로써 전하에게 의견을 드리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본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이른바 ‘급의 아내가 백의 어머니’란 말은 더욱 몹시 놀랄 일입니다. 어찌 신하로서 임금에게 고하는 말이 이처럼 이치에 어긋나고 거만할 수가 있습니까. 김덕함은 이항복ㆍ정홍익과 같다는 것으로써 의견을 드렸으니 마음이 같으면 그 죄는 다르게 할 수 없습니다. 모두 외딴 섬에 위리안치하소서.” 하였다. 답하기를, “이항복은 관작을 삭탈하고 정홍익ㆍ김덕함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다시 아뢰기를, “이항복의 수의한 말은 장황하고 위협조이며 업신여기고 거만한 기색이 문자 사이에 넘쳐흐르니 신 등의 글솜씨로서는 그 만분의 일도 형용할 수 없습니다. 정홍익과 김덕함은 이항복의 졸도(卒徒)로서 이미 그 죄를 받았는데 이항복의 관작을 삭탈하고 말겠습니까.” 하였다. 《북천록》
○ 옥당에서 차자를 올리기를, “기자헌ㆍ이항복ㆍ정홍익ㆍ김덕함은 그 죄가 차이가 없는데 위리시키는 형을 소원하고 미천한 사람에게만 행하고, 귀하고 임금에게 가까운 사람에게는 행하지 않으니, 어찌 난적을 징계하고 인심을 복종시키겠습니까.” 하였다. 두 번이나 차자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진사 최상질(崔尙質) 등은 소를 올리기를, “서궁의 분조(分朝)에서 조알(朝謁)과 공헌(貢獻)을 없애고 자헌ㆍ항복ㆍ홍익ㆍ덕함을 빨리 목베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각 능의 참봉 유증화(柳增華) 등의 소는 빨리 큰 계책을 정하도록 청하였고, 유학 박몽준(朴夢俊)의 소는 호씨(호치당(胡致堂))의 의논에 의거하여 서궁을 처리하도록 청하였다. 유학 이국헌(李國獻)ㆍ이국광(李國光) 등은 소를 올리기를, “서궁이 모반을 꾀한 죄는 춘추(春秋)의 대의와 호씨(胡氏)의 정론(定論)에 의거하여 쾌히 결정해야 합니다. 우의정은 정청은 하지 않고 차일 피일하면서 시일만 보내고 삼사 사람도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으니 삼사를 먼저 다스리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 11일에 삼사가 합계하기를, “부제학 이호신(李好信)이 임관되자마자 갑자기어버이가 병이 있다고 핑계하고는 향리로 내려가서, 나와서 사은하지 않으니 두 마음을 품고 임금을 잊은 것입니다. 관작을 삭탈하고 도성문 밖으로 내쫓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대로 하라.” 하였다. 삼사가 합계하기를, “기자헌은 먼저 주창하였고 이항복은 뒤에서 호응하여 이쪽에서 부르고 저 쪽에서 화답하여 서로 형과 아우처럼 되어 서궁에 가담하는 무리들이 손바닥을 치면서 일어나게 하여 임금의 세력이 더욱 고단해지고 다른 의논이 날로 성하게 되어 장차 예측할수 없는 화를 이루게 되었으니, 이것이 모두 기자헌ㆍ이항복이 먼저 주창해서 한 짓입니다. 빨리 위리안치를 명하소서.” 하였다. 《북천록》
○ 임금이 답하기를, “아뢴 의견 중에는 전은(全恩)해야 된다는 설도 있고, 미명(美名)을 제가 차지하려는 말도 있고, 병을 핑계한 사람도 있고, 태도가 모호한 사람도 있고, 미루고 핑계대는 사람도 있었다. 이 무리들을 모두 다스릴 수 없으니 기자헌만 부처시키고 이항복은 삭출(削黜)하는 것 또한 공론을 존중하는 데서 나온 것이니 형률을 가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삼사가 합하여 세 번 아뢰고 옥당에서 두 번 차자를 올리니 답하기를, “기자헌은 멀리 귀양보내고 이항복은 추방하여 전리(田里)에 돌아가게 하라.” 하였다.
○ 12일에 좌랑(佐郞) 유약(柳瀹)ㆍ승문 권지(承文權知) 유집(柳潗)의 소에는 “수의에 잘못하였으므로 황공하여 처분을 기다립니다.” 하였다.
○ 13일에 삼사가 합하여 세 번 아뢰니 답하기를, “이항복은 중간에서 자원하는 곳에 부처하라.” 하였다. 겅원도 유생 박홍익(朴弘益) 등의 소에, “빨리 두 흉인(兇人 기자헌ㆍ이항복)을 목베고 삼사를 꾸짖으소서.” 하였다. 전라도 생원 이책(李策) 등의 소에는, “큰 의논이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사특한 의논이 날로 성하여 호남ㆍ영남의 요망한 유생들이 장차 임금을 협박하는 소를 올리려 하오니, 빨리 기자헌ㆍ이항복에게 사형시키소서.” 하였다.
○ 14일에 생원 신경업(辛敬業) 등의 소에는, “여러 소와 여러 의논을 서로 비교해 절충하여 난의 계제를 막으소서.” 하였다.
○ 16일에 삼사의 합계에 답하기를, “이항복을 멀리 귀양보내라” 하였다. 이에 기자헌ㆍ이항복을 위리시키는 일은 정계(停啓)되었다. 의금부에서 처음에는 정홍익은 진도(珍島)로, 김덕함은 남해(南海)로 귀양보내기로 결정했다가 이때에 와서 고쳐 결정하여 정홍익은 길주(吉州)로, 김덕함은 명천(明川)으로, 기자헌은 홍원(洪原)으로, 이항복은 흥해(興海)로 귀양보내었다.
○ 18일에 삼사가 합계하기를, “기자헌ㆍ이항복ㆍ정홍익ㆍ김덕함을 의금부에서 마땅히 극히 먼 국경 지방에 귀양보내야 될 것인데, 이에 감히 사정(私情)을 따르고 국법은 지키지 않아서 모두 내지(內地)에 편리한 곳으로 가려서 귀양 보냈으니 당상관과 낭청을 모두 파직하고 네 흉인은 국경 가까운 땅으로 옮겨 귀양보내기를 청합니다.” 하니 아뢴대로 윤허하였다. 이에 21일에 또 다시 결정하여 기자헌은 삭주(朔州)로, 이항복은 창성(昌城)으로, 정홍익은 종성(鍾城)으로, 김덕함은 온성(穩城)으로 귀양보내었다. 처음에 의금부에서 이항복은 용강(龍岡)으로, 기자헌은 정평(定平)으로 결정하니 승지 백대형(白大珩)ㆍ한찬남(韓纘男)이 그 단자를 땅에 던지면서, “이들이 얼마나 심한 죄악을 졌는데도 편리한 땅에 귀양보낸단 말인가.” 하였다. 《북천록》
○이때 양사에서 비밀히 아뢰기를, “남해는 섬 나라의 오랑캐와 아주 가까우므로 반드시 통할 염려가 있으니 북도(北道)로 옮기기를 청합니다.”하였다. 《성옹집(醒翁集)》
○ 대간의 비밀 장계로 인하여 기자헌은 회령(會寧)으로, 이항복은 경원(慶源)으로 옮겨 귀양보내었다. 전교하기를, “이항복을 정홍익ㆍ김덕함 등과 함께 육진(六鎭)으로 같이 귀양보내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니 남관(南關)의 다른 고을로 고쳐 귀양보내라.” 하였다. 이때 허균(許筠)이 평안도 사람을 사주하여 소를 올리기를, “창성과 삭주는 중국에 아주 가까우므로 몰래 화기를 통할 염려가 있으니 북쪽 변방으로 옮기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dl항복이 처음에 경원(慶源)으로 옮겼다가 삼수(三水)로 바꾸어 옮기고, 또 북청(北靑)으로 옮겼으니 여섯 번이나 땅을 바꾸어서 북청으로 가게 되었다. 북천록 일기(北遷錄日記)에는, “지사(知事) 윤선(尹銑)이 굳이 삼수로 고쳐 귀양보내고자 했으니 매우 억울하다” 하였다. 기자헌은 또 길주(吉州)로 옮기었다.
○ 처음에 dl항복이 동강(東岡)에서 청파(靑坡)로 들어와서 처분하는 명을 기다리는데, 문득 급한 심부름꾼이 성중으로부터 달려오는데 기운이 다 빠져 입으로 말을 하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이 모두 놀라서 얼굴빛을 변하며 비틀거리면서 맞이해 보니 사형에 처하기를 청하는 보고였다.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고자 하였으나 목이 메어 머뭇거리며 차마 아뢰지 못하였다. 항복은 이를 다 보고도 조금도 달라진 기색이 없으며 글을 보면서 물리치지 않았다. 조금 후에 들어온 저녁밥을 먹으면서도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밤에 잘 때는 코고는 소리가 우레같았다. 이시백이 홀로 모시고 자는데 근심과 번민이 격해져서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가 새벽에 이르렀다. 닭이 이미 우니 이항복이 잠을 깨면서, “너는 아직도 자지 않느냐.” 하였다. 이시백이 이내 묻기를, “삶과 죽음이 달린 큰 문제인데, 오늘의 일은 비록 곁에서 보아도 또한 스스로 마음을 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에도 선생님께서는 태연한 태도로서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사오니 군자는 죽고 사는 기로에서 이처럼 태연하십니까.” 하였다. 이항복은 웃으면서, “나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에 전후가 있고, 행동에도 순서가 있다. 처음 처형하기를 청하면 임금께서 윤허한 뒤에야 심문을 받게 되고 문초받아 죄목이 결정된 뒤에야 처형하게 된다. 만약 처형하기를 청하는 장주(章奏)만 보고 문득 놀라서 동요한다면 삼목(형틀)이나 사형장의 칼 앞에서는 어찌하겠느냐.” 하였다. 이내 다시 잠자며 마침내 조금도 다른 기색이 없었다. 《북천록》
○ 이항복이 귀양길에 오를 때에 전송하는 손님에게 말하기를, “명년 8월에는 응당 다시 돌아올 것인데 그때에 서로 보게 될런지 알 수 없다.” 하였다. 《일월록(日月錄)》
○ 이호민(李好閔) 등 여러 사람이 산단(山壇)에 와서 작별하는데 좌석에 있는 모든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이호민이 시를 지어 주되,
이 땅에서 해마나 손을 전송하니, 산단에 술잔을 들어 강리(江蘺)를 제수로 제사하였는데, 내 걸음이 가장 늦어 어느 곳에 갈 것인지, 다시는 친구가 와서 작별할 이 없겠네” 하였다. 이항복이 화답하기를, “구름 낀 해가 쓸쓸해서 대낮에도 어두운데, 북풍은 멀리 떠나는 사람의 옷자락을 불어 찢고나, 요동(遼東)의 성곽은 응당 옛날과 같겠지만, 다만 영위(令威)는 가서 돌아오지 못할까 염려로세.” 하였다. 망우령(忘憂嶺)을 지나다가 지은 시는,
모진 바람도 쇠 같은 심간(心肝)은 뚫기 어려우리.
서관(西關) 처음에 창성(昌城)으로 귀양보내려는 명이 있었다. 의 만첩 산은 두렵지 않네.
진암(震巖) 천 길 고개에 말을 멈추어 석양에 돌아다보니 목릉(穆陵 선조능)이 쓸쓸하구나.
하였다. 《북천록(北遷錄)》
○ 철령(鐵嶺)에 올라 노래를 지었으니,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孤臣) 원루(冤淚)를 비삼아 띄워다가, 님 계신 구중 궁궐에 뿌려본들 어떠리” 하였다. 이 노래가 서울 안에 전해 퍼지니 궁인들이 모두 불렀다. 어느 날 임금이 뒤 뜰에서 잔치를 벌이고 놀다가 술이 취했는데, 이 곡조를 듣고는 누가 지었는가를 물었다. 궁인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임금은 슬픈 기색을 띠고 우울해 하더니 이내 눈물을 흘리면서 술자리를 파하고 말았다. 그러나 마침내 이항복을 불러 돌아오게 하지는 못하였다. 《속잡록(續雜錄)》
○ 정홍익이 길을 떠나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순(舜)이 나를 속였구나.” 하였다. 《일월록(日月錄)》
○ 예조에서 아뢰기를, “설날 아침에 조하(朝賀)할 때에 대비전의 조하는 거행하지 않음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신방 진사(新榜進士) 이영구(李榮久) 등의 소에, “신 등이 어제 사은할 때에 감히 서궁에 절하지 않은 것은 차마 우리 임금의 길러 주시는 은혜를 저버릴 수 없으므로 원수의 뜰에 가서 무릎을 꿇고 절하지 아니하고자 함입니다.” 하였다.
○ 19일에 광주(廣州) 유학 김여철(金汝哲)의 소에, “삼사는 먼저 기자헌 등을 논핵하였으나 근본에는 미처 언급하지 않았으며, 의정부는 스스로 먼저 주창하지 않고 백관으로 하여금 각각 의견을 드리게 했으니 모두 일을 논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청컨대 큰 의논이 정해지기 전에 서궁에 엄중히 가두어서 외부와 통할 염려에 대비하고, 삼사와 의정부는 한결같이 선유의 정론에 의거하여 죄를 따져 종묘에 고하고, 기자헌 이하의 전후로 서궁을 비호한 사람은 모두 법에 의거하여 죄목을 정하고, 또 중국 조정에 고하여 뒷날에 다시 윤이(尹彝)ㆍ이초(李初)와 같은 변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 20일에 광릉 참봉 유건(柳楗) 등의 소는 공론을 쾌히 따르기를 청하였고, 유학 이국광(李國光)ㆍ이국헌(李國獻) 등의 소는 큰 의논이 중지되었으니 빨리 공론을 따르기를 청하였다.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동의금(同義禁) 이경함(李慶涵)은, 수의할 때에 태도가 모호하고 일을 남에게 미루었으며, 네 흉인[四兇 기자헌ㆍ이항복ㆍ정홍익ㆍ김덕함]을 귀양보낼 즈음에 제가 수석 당상관으로 여러 의논을 극력 배제하고 편리하고 가까운 곳을 가려 정하였으니, 사정에 따르고 공론을 멸시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관작을 삭탈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 22일에 유학 한보길(韓輔吉)은 상소하기를, “여러 신하의 수의는 이미 마쳤사오니, 청컨대 의정부를 시켜 많은 벼슬아치를 소집하여 각자의 이름 밑에 가부를 쓰도록 해야 합니다. 기자헌은 삭주(朔州)로 귀영보냈으나 땅이 중국과 붙어 있으므로 반드시 몰래 통하여 화를 야기시킬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의금부 당상관이 사정을 따른 죄는 다 같은데 이경함(李慶涵)만 죄주는 것은 또한 온당치 못하니 윤수민(尹壽民)도 아울러 관작을 삭탈하고 기자헌은 다른 도(道)로 옮기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평안도 유학 강호여(康暤如) 등의 소에서는 대의로써 결단하여 빨리 결말을 짓도록 청하였다.
○ 27일에 유학 이국광은 상소하기를, “걸(桀)의 개가 요(堯)를 보고 짖는 것은 모두 화의 근본을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삼사의 여러 신하들이 네 흉인만 성토하고 큰 계책을 정하는 데는 미치지 못했는데, 다행히 한두 명의 사직을 위하는 신하의 힘으로 대의를 밝히고 종사를 붙들었습니다. 그러나 해당되는 직위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政事)를 꾀하기 어렵습니다. 참ㆍ부(參副)의 직위는 충성을 다할 수 없으며 경조윤(京兆尹 한성판윤(漢城判尹))은 대의를 부지할 수 없사오니, 삼가 원하옵건대 이 충렬한 어진 사람을 등용시키고 또 희건(希謇)에게는 형벌을 소급해서 시행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유학 이규(李榘)의 소에, “서궁의 나인을 엄중히 단속하여 조심성 있고 주밀하게 방호하고 두 흉인[二兇 기자헌ㆍ이항복]을 귀양갈 곳으로 빨리 보내고 서궁을 바로 폐해 내쫓아서 종사를 편안하게 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진사 최광필(崔光弼)의 소에, “대사헌 이각(李覮)은 스스로 큰 의논을 주도한다고 일컬으면서 다만 대비를 폐해 내쫓자는 의견을 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위를 깎아내리는 일도 또한 담당하려 하지 않으니, 삼사의 불충한 죄를 다스리고 속히 서궁을 처리하여 흉악한 무리들의 기대하는 마음을 끊어 버리소서” 하였다.
○ 무오년 1월 1일에 유학 최숙(崔淑)은 상소하기를, “이각(李覮)은 이홍로(李弘老)의 심복으로서 간사한 꾀와 비밀 계획에 참여해 알지 못한 것이 없는데도 형벌을 받지 않고 연줄을 타서 높은 관직에 올랐습니다. 제가 마땅히 면목을 바꿔 충성을 다하는 데 힘 써야 하는데 큰 의논을 자기가 담당했다고 거짓으로 칭하면서 네 흉인을 중형에 처하자는 것을 정계(停啓)시키는 데 급급했으며, 마침내 서궁을 폐해 내쫓자는 의논도 꺼내지 않았으니, 이각을 먼저 목베고 다음에 삼사가 서궁을 폐해 내쫓자는 의논을 꺼내지 않은 죄를 다스리고, 서궁을 바로 폐하소서” 하였다. 유학 정지문(鄭之問)의 상소도 대략 이와 같았다.
○ 2일에 삼사가 합계하기를, “나라가 불행하여 변고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발생했습니다. 무고의 저주가 대궐 안에 낭자하고 서궁이 밖으로 반역의 모의에 응한 것이 역적의 공초에 훤히 드러났습니다. 그 모의의 실상이 이미 현저하니 임금을 해치려고 한 죄상은 불을 보듯이 환합니다. 유릉(裕陵)에 치방을 하여 흉악한 짓을 한 절차는 박동량(朴東亮)의 공초에 나타나서 종사에 죄를 얻었으니 실로 신하와 백성들이 함께 성토해야 하는데, 시비가 분명하지 못하고 의리가 꽉 막혀서 사특한 말을 서로 내세워 사람들의 귀를 현혹시켜 인정이 의심을 내고 선비의 마음이 죽은 재처럼 되었으니, 만약 빨리 지극한 계책을 세우지 않으면 불측한 화가 당장 이르게 될 것입니다. 최광필(崔光弼) 등의 소에 의거하여 속히 거행하여 종사를 편안히 하소서.” 하였다.
○ 3일, 광주 유학 홍덕민(洪德民)의 소에, “네 흉인을 빨리 목 베어 큰 계책을 정하소서” 하였다.
○ 우의정이 날마다 차자를 올려 새 정승을 빨리 가려 뽑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가까운 시일에 정승을 세워야 되겠는데, 경이 삼가 협조하여 사직을 편안하게 하라.” 하였다.
○ 성균관 장의(掌議) 하인준(河仁俊) 등이 8도에 보낸 통문(通文)에는, “아, 서궁의 죄악은 말한다면 참혹하다. 요사한 무당을 믿어 의인왕후(懿仁王后)를 저주하여 더러운 뼈를 능 위에 묻어 황천에까지 욕됨이 미치게 하고, 전하의 휘(諱)를 고깃조각에 써서 까마귀와 소리개에게 뿌려 먹였으니 첫번째 죄요, 동자(童子) 의(㼁)를 귀하게 하고자 하여 처방을 행하여 여우의 뼈와 나무인형을 궁중에 두루 묻어 두고 흉한 판수를 몰래 끌어들여 요사한 경문(經文)을 외우고 읽었으니 두번째 죄요, 선왕께서 육체가 불편하실 때 밖으로 유영경(柳永慶)ㆍ이홍로(李弘老)와 결탁하여 서로 의지하고 비밀히 역적 진(珒)과 굳게 결탁하여 임금의 보위를 그에게 전하게 했다가, 의가 장성해짐을 기다려 진을 죽이고자 했으니 세번째 죄요, 비밀히 김제남(金悌男)을 시켜 대군의 처소에 있는 천여 명을 단속하여 몰래 부서를 정하고 급할 때의 쓰임을 기다리게 했으니 네번째 죄요, 내암(萊菴) 인홍의 호이 유영경을 탄핵한 소가 들어오자 감히 간사한 마음을 내어 기회를 타서 세자를 바꾸어 세우고자 울면서 선왕께 권고하여 여러 번 엄한 전교를 내리게 하였으니 다섯번째 죄요, 선왕께서 세상을 떠나시니 유명(遺命)을 거짓으로 꾸며서 여러 재신(宰臣)들에게 의를 부탁했으니 여섯번째 죄요, 성상께서 왕위에 오르신 후로 무당을 시켜 저주를 여러 해 동안 그치지 않았으니 일곱번째 죄요, 김제남을 시켜 서얼들과 결탁하고 무사와 서로 사귀어 틈을 타서 나라를 도모하려 했으니 여덟번째 죄요, 불측한 말을 만들어 내어 성상을 무함하고 그 친족들에게 선언하여 역적들을 시켜 흉악한 격문 속에 그 말을 넣기까지 했으니 아홉번째 죄요, 내탕금(內帑金)을 많이 내어 서양갑(徐羊甲)에게 후하게 주어서 그를 시켜 왜국에 들어가서 결탁하여 외국의 원조로 의를 세우고 난 후에는 중국을 배반하려고 했으니 열번째 죄이다. 당 나라 무후(武后)의 죄악도 이보다는 더하지 않을 것이다. 삼가 원하옵건대 같은 사람끼리 서로 응하여 의리를 주창해서 소를 올려 종사를 편안하게 하소서.” 하였다. 《명륜록》
○ 선세휘(宣世徽)의 소에, “서궁의 우리 나라에 대한 관계는 모판에 피있는 것과 같으며 조에 가래초 있는 것과 같사오니 그 뿌리를 뽑지 않으면 그 해를 제거할 수 없습니다. 삼가 듣자옵건대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이 열 가지 죄로써 조목에 따라 아뢰었다 하오나 다만 그 대개만 들어 말했을 뿐입니다. 우리 성상을 고주(孤注)로 내놓고 임금의 자리에 침을 흘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명륜록》○ 이 밖의 흉한 소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 대비를 폐하자는 의논이 이미 발론된 후에 서울과 지방이 크게 요동하였다. 한효순(韓孝純)이 사람을 보내어 정인홍에게 계책을 물었더니 그 말이 알쏭달쏭하여 분명하지 않으면서 뜻은 폐위(廢位)와 삭출(削黜)의 중간에 있었다. 한효순이 날마다 이이첨의 뜻을 엿보아 정청(庭請)할 기일을 여러번 바꾸어 앞당겼다 늦추었다 하였다. 3일 신시에, 백관이 물결처럼 빨리 대궐로 나아가니 길 가는 사람들이 놀라서 실색하였다. 여러 소가 일어난 후로부터 사대부들이 강개하고 통분하지 앟은 사람이 없었으며, 혹은 분노하여 팔을 휘두르는 사람도 있더니 이때에 와서는 바람에 쓰러지듯이 폐하자는 의논에 따라갔다. 이에 따르는 사람이 많아져서 도리어 따르지 않는 사람을 공격하기를, “나는 때에 따라 변통하는 권도(權道)를 아는데 따르지 않다가 재화를 만나게 되는 것은 망녕일 뿐이다.”하였다. 조정에 모이라는 명이 처음에 대신에게서 나가지 않았는데, 우참찬 유간(柳澗)이 이이첨의 집에서 바로 의정부의 하리(下吏)를 불러 영을 내리니, 우의정 한효순이 어찌할 줄을 모르고 빨리 걸어오는데 뒤뚱거리는 모습이 마치 늙은 개의 형상과 같았다. 《청백당기사》
○ 4일, 햇무리가 서고 지진이 있었다. 우의정 한효순이 백관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서궁이 화란을 쌓아온 것은 고금에 없는 일입니다. 이에 열 가지 죄를 들추어 내어 그 대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역적 의가 출생한 초기에 유영경을 시켜 하례를 빨리 베풀어서 인심을 탐지해 보고, 또 흉한 점쟁이를 시켜 의를 극히 귀히 될 것이라고 칭찬하게 하고, 날마다 요사한 경문(經文)을 외워서 큰 복을 빌게 했으니 죄가 첫 번째요, 선왕께서 옥체가 불편하시자 자기가 낳은 아들로써 임금을 세우고자 하여 유적(柳賊 유영경)과 굳게 결탁하여 언서(諺書)로 몰래 통하고 세자에게 전위하여 섭정함을 막았으니 두 번째 죄요, 초야에 있는 큰 현인(정인홍)이 충성을 다하여 소를 올리니 그 기회를 타서 감히 세자를 바꾸어 세우고자 하여 울면서 선왕께 권고하여 여러 번 엄한 전교를 내리게 하여 미봉(未封 명 나라의 책봉(冊封)을 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등의 말이 여러 사람의 귀를 크게 놀라게 했으니 세번째 죄요, 거짓으로 선왕의 임종의 명이라 하면서 7명의 흉인에게 의를 부탁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보호하게 하여 장성함을 기다려 임금의 지위를 빼앗으려고 꾀했으니 네번째 죄요, 김제남(金悌男)을 비밀히 끌어들이고 흉악한 무리와 많이 사귀며 궁노(宮奴)를 단속시키고 군량과 군기(軍器)를 쌓아 두었으며, 또 서얼들을 시켜 밤에 군사를 훈련하는 것을 이용하여 틈을 타서 난을 일으키려 했으니 다섯번째 죄요, 궁중에 제사를 차리고 손을 뒤집고 손가락을 모으면서 전하의 몸에 저촉되는 말로 빌고 판수 무당의 저주하는 것이 못하는 짓이 없었으며, 열 여섯 가지 치방으로 반드시 계책을 이루려 하였으니 여섯번째 죄요, 선후(先后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朴氏))에게 요사스런 치방을 하여 능을 뚫고 팠으니 일곱번째 죄요, 경준(耕俊)이 격서를 지었는데 그 말이 불측했으며 궁의 담 안에 화살에 글을 끼워서 쏘았는데 그 글이 극히 참혹했습니다. 모두가 만들어 낸 것으로 외간에 전해져서 흉악한 역적들이 그 말을 구실로 삼았으니 여덟 번째 죄요, 북문(北門)에 서신을 통하다가 응상(應祥)이 잡혔고 베개 속의 파자(破字)는 의일(義一)이 공초에서 말하였습니다. 중국 관원에게 하소연하여 명 나라 조정에 화를 얻도록 고자질 하였으니 아홉번째 죄요, 금과 비단을 많이 내어서 서양갑(徐羊甲)에게 후히 주어 왜국에 들여보내고, 또 우영(友英)을 시켜 누르하치(奴兒哈赤)와 몰래 통하여 그 세력을 빌려서 어린아이를 임금으로 세우고 감히 명 나라 조정에 거역하려 했으니 열번째 죄입니다. 당 나라 무후(武后)의 죄도 이에 비하면 오히려 가벼울 것이요, 한(漢) 나라 조후(趙后 조비연(趙飛燕))가 황실의 후사를 멸한 것도 이에 비하면 심하지는 않습니다. 일국에 국모 노릇하는 도리를 잃었으니 신하들에게는 세상에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입니다. 당 나라에서 무후를 죄를 따져 죽이는 것은 비록 행할 수 없어도 한 나라에서 여후를 종묘에서 폐출한 것은 관대한 처분으므로 따름이 합당합니다.”하였다. 답하기를,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서 운명을 기구하고 험하게 타고 나서 무신ㆍ계축년의 변고는 모두 천륜(天倫)에서 벗어났으니 그들을 처단한 이것이 어찌 상정(常情)으로서 차마 할 수 있으랴마는, 종사가 중대하므로 조정 신하의 청을 억지로 따라 마음을 썩히고 속을 상하여 세월따라 심해지는데, 어찌 오늘날에 또 이런 의논이 있을 줄 생각했으랴. 하늘이여 하늘이여 내가 무슨 허물이 있기에 벌을 가혹하게 내리심이 이렇게 극한 상황에 달하는가. 차라리 인간 세상을 헌신짝 벗듯하고 팔을 떨치고 영원히 가서 아무도 안 보는 바닷가에서 살아 여생을 마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명륜록》
○ 한효순이 대궐 뜰에 나아가서 정인홍의 글로써 단안(斷案)을 삼아 드디어 폐자ㆍ삭자 [廢削] 두 글자로써 목표를 삼고, 여러 경재(卿宰)를 불러 앞에 나오게 해서 각기 가(可)자와 부(否)자를 쓰라고 하니 자리에 있는 사람이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역적 김개(金闓)가 제자리에서 나와 큰 소리로, “이 일을 어찌 물을 수 있습니까. 따르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따르지 않은 사람의 의논을 따를 것입니까.”하고 부르짖으니 한효순은 감히 어찌할 수 없으므로 잠잠히 머리만 수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청백당기사》
○ 조정이 떠들썩해지고 곧 흩어져 나가려는 기색이 있었는데 밤은 벌써 사경이었다. 이이첨이 노하여, “이것은 나라의 큰 일인데 주저하는 사람이 있으면 신하가 아니다.”하고, 큰 소리를 질렀다. 이이첨이 계초(啓草)를 지으면서 바로 폐출이라는 말로 글을 만드니 유희분이 큰 소리로 모든 정청(庭請)은 으레 영의정의 의논을 따르는 법입니다. 내암(萊菴 정인홍(鄭仁弘))이 이미 서궁에게 조알(朝謁)을 거두어 치우고 분사(分司)를 폐지하기로 의논을 하였으니 다만 이것으로 글을 만들 것이요, 만약 이 의논으로써 불가하다고 한다면 마땅히 먼저 영의정을 죄주고 그 후에 그 글을 고침이 좋겠습니다.” 하여, 두 정승이 서로 다투어 밤이 되어서도 결정이 나지 않았다. 한효순이 조정에서 모임을 갖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여 이이첨의 뜻에 굽혀 복종하여 마침 폐출로써 계초에 썼다. 파하고 나니 닭이 벌써 울었다. 《북천록》
○ 인성군(仁城君) 공(珙)ㆍ경창군(慶昌君) 주(珘)ㆍ경평군(慶平君) 늑(玏) 등이 여러 종친을 거느리고 대비를 폐하자고 청하니 답하기를, “종친들도 또한 차마 이 말을 할 수 있느냐. 시끄럽게 하지 말라” 하였다. 공ㆍ주ㆍ늑(玏)은 모두 선조의 아들이다. 《명륜록》
○ 이후로 날마다 백관은 세 번 아뢰고, 종실은 두 번 아뢰고, 양사는 세 번 아뢰고, 옥당은 두 번 차자를 올리고, 성균관과 사학은 두 번 소를 올렸다. 성균관 유생은 민심(閔●)ㆍ하인준(河仁浚)이다.
○ 8일, 유학 설구인(薛求仁)이 소를 올려 이각(李覮)을 목 베고, 다음은 양사의 관원을 귀양보내고 서궁을 잡아다가 태묘에 죄목을 세어 잡아다가 호치당(胡致堂)의 의논과 같이 하기를 청하였다.
○ 9일, 전 훈도(訓導) 김대하(金大河)의 소에, “서궁은 죄악이 천지 사이에 가득 찼으니 다만 폐출만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죽여서 화근을 없애야 됩니다.” 하였다.
○ 11일, 유학 김창(金昶)의 소에, “서궁의 일에 대하여 이정귀(李廷龜)는 수의도 하지 않았으며 정청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니 목 베소서.” 하였다.
○ 12일, 유학 윤로(尹魯)의 소에, “한효순이 지연시키면서 즉시 대의를 거행하지 않은 죄을 먼저 다스리고, 다음에는 삼사가 한효순을 비호해 준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다. 진사 하인준(河仁浚)ㆍ민심(閔●)ㆍ정기(鄭淇)ㆍ김상하(金尙夏) 등의 소에, “대궐에 엎드려 연달아 글을 올려 화의 근본을 제거하고자 했으나, 어제 원궤(元簋)에게 전한 흉서를 얻어 보니 신등 네 사람의 성명이 있으며, 예조판서 이이첨ㆍ참찬 허균(許筠)ㆍ승지 김질간(金質幹)ㆍ수찬(修撰) 서국정(徐國楨) 등의 성명도 또한 모두 들어 논하면서 반역을 모의했다고 무함하여 감히 흉서를 봉해 들여보냈습니다. 원궤를 잡아와서 신문하여 흉서의 출처를 캐내어 신 등의 지극한 원통을 씻어 주소서” 하였다. 이에 원궤등을 잡아와서 국문했는데, 잡혀 갇힌 사람이 매우 많았다.
○ 13일, 유학 김윤겸(金允謙)의 소에,“김권(金權)ㆍ이신의(李愼儀)ㆍ유몽인(柳蒙寅)ㆍ황덕부(黃德符)가 전은(全恩)하기를 주장하여 원수를 잊고 역적을 비호한 죄목으로 먼저 그들을 목 베고, 다음은 강수(姜)ㆍ김려(金●)가 세력 있는 이에게는 처벌을 너그럽게 논하였으니 서궁 처단의 의논에 성의가 없는 죄목으로 그들을 귀양보내소서.”하였다.
○ 14일, 유학 김상건(金尙鍵)의 소에, “김윤겸ㆍ홍덕민(洪德民) 등이 시중의 여론이라고 거짓으로 꾸며 선인의 무리를 배척하고 무함하여 사림에게 화를 전가시킨 죄를 먼저 다스리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 18일, 전교하기를, “전일에 좌의정이 판서 민몽룡(閔夢龍)이 크게 쓸 만하다고 힘써 말했으므로, 나는 잊지 않았다. 상신(相臣)의 자리에 빈 자리가 있으니 지금 좌의정의 추천으로 민몽룡을 우의정으로 임관한다.” 하였다.
○ 19일, 4일부터 이날에 이르기까지 백관이 아뢴 지 16일이 되었다. 백관의 아룀에 답하기를, “일이 종사에 관계오니 여러 사람의 의견을 막기 어렵다. 다만 백관을 시켜 대비에게 조알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백관이 아뢰기를, “서궁을 폐해야 된다는 정황은 신들이 말을 다 하였습니다. 비록 조알을 정지시키고, 분사를 거둬 치우고, 공헌(貢獻)을 폐지하고, 존호를 깎아내리고, 또 대비란 명칭을 버리고 서궁이라고 일컬어도 중국에서 받은 고명(誥命)이 아직도 있고, 관복이 아직도 남아 있으면 어찌 폐출의 일을 다 했다고 하겠습니까. 죄는 당 나라 무씨 무후(武后)보다 더한데도 태묘(太廟)에서 수죄(數罪)하지 않았고, 악행은 강씨(姜氏)보다 많은데도 제(齊)로 쫓겨가지 않았으며, 효성(孝成 남북조 때 제(齊) 나라의 효성황후는 죄가 있어 북궁으로 옮겼다)처럼 북궁(北宮)으로 옮기지 않았으며, 염씨(閻氏 위(魏) 나라 염후(閻后))처럼 별관(別館)으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몸이 악행의 괴수가 되었는데도 천지간에 목숨을 붙이고 있으니 전하께서 곡진하게 비호해 주심이 지극하나, 신하와 백성들의 대의는 지금까지 펴지지 못한 셈입니다. 신들이 어제 전하의 비답을 받자와 지극히 인하심을 우러러 흠축합니다. 진실로 서로 거느리고 물러나가서 폐출하는 절목(節目)을 의논하여 정해야 되겠사오나 혈성(血誠)이 이루어지지 못하므로 다급하게 호소함이 더욱 간절합니다.” 하였다. 《명륜록》 《응천일기》
○ 29일에 이르러서 하루에 세 번 아뢰는 것이 26일 째인데, 이날에 이것을 그쳤다. 《명륜록》
○ 기자헌이 탄핵되어 떠난 후에는 한효순이 모후를 유폐시키는 일을 홀로 담당하였다. 수의부터 정청에 이르기까지 일언반구도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반드시 이이첨에게 물은 후에 행하였다. 우윤 김개(金闓)가 중간에서 말을 대신 전달했는데, 매양 사람을 만나면 김 우윤(金右尹)이 무슨 말을 하더냐고 물었다. 《동리소설(東里小說)》
대비를 폐할 때 정청(庭請)에 나아가 참례한 백관의 명록(名錄) 대개 780명인데 미관잡직(微官雜職)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 좌의정 한효순, 우의정 민몽룡(閔夢龍), 좌찬성 박승종(朴承宗), 우찬성 이충(李沖) 우참찬 유간(柳澗), 사인(舍人) 유충립(柳忠立)ㆍ정광경(鄭廣敬), 검상(檢詳) 남궁경(南宮㯳), 사록(司錄) 옥진휘(玉晉輝),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 이광정(李光庭), 한평군(韓平君) 이경전(李慶全), 완창군(完昌君) 이각(李覮), 봉산군(蓬山君) 정상철(鄭象哲), 길천군(吉川君) 권반(權盼), 풍안군(豊安君) 임곤(任袞), 한흥군(漢興君) 조공근(趙公瑾), 한산군(寒山君) 조진(趙振), 한남군(漢南君) 이필영(李必榮), 영성군(靈城君) 신경행(辛景行), 영평군(鈴平君) 윤중삼(尹重三), 완산군(完山君) 이순경(李順慶), 완숭군(完崇君) 이이경(李頤慶), 청릉군(淸陵君) 김신국(金藎國), 여양군(驪陽君) 민인백(閔仁伯), 석흥군(碩興君) 이척(李惕), 하청군(河淸君) 정희현(鄭希玄), 원양군(原陽君) 송강(宋康), 해신군(海愼君) 이희령(李希齡), 익흥군(益興君) 이응순(李應順), 문평군(文平君) 유공량(柳公亮), 석룡군(石龍君) 전룡(全龍), 충훈도사(忠勳都事) 심일명(沈日明), 충익도사(忠翊都事) 엄혜(嚴譓), 판돈녕(判敦寧) 민형남(閔馨男), 도정(都正) 이형욱(李馨郁), 첨정(僉正) 강수곤(姜秀昆), 주부(主簿) 이명백(李明白), 참봉 이몽룡(李夢龍), 판중추(判中樞) 노직(盧稷), 지사(知事) 박홍구(朴弘耈)ㆍ표정로(表廷老), 동지(同知) 장만(張晩)ㆍ박정현(朴鼎賢)ㆍ심열(沈悅)ㆍ박자흥(朴自興)ㆍ이응(李膺)ㆍ장예충(張禮忠)ㆍ방의남(方義男), 첨지(僉知) 한총(韓叢), 도승지 유황(柳璜), 경력(經歷) 이사수(李士修), 도사(都事) 박영(朴瑛), 지사(知事) 한희길(韓希吉), 전흥군(全興君) 이시언(李時彦) 등과 호위(扈衛)한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 일선위(一善尉) 김극빈(金克鑌), 길성위(吉城尉) 권대임(權大任),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 의빈도사(儀賓都事) 이국형(李國衡), 이조참판 유몽인(柳蒙寅), 참의(參議) 유희발(柳希發), 정랑(正郞) 이중계(李重繼)ㆍ윤이지(尹履之)ㆍ김적(金適) 안경심(安景深), 좌랑 윤형철(尹衡哲)ㆍ이지정(李志定)ㆍ정지경(鄭志經)ㆍ홍득일(洪得一), 예조판서 이이첨(李爾瞻), 참판 윤수민(尹壽民), 참의 이명남(李命男), 정랑 안경(安璥)ㆍ채겸길(蔡謙吉)ㆍ최호(崔濩), 좌랑 유약(柳瀹)ㆍ조정생(曺廷生)ㆍ한정국(韓定國), 병조판서 유희분(柳希奮), 참판 이덕형(李德泂), 분참판(分參判) 이성길(李成吉)ㆍ김지남(金止男), 참의 정립(鄭岦), 분참의(分參議) 박사제(朴思齊), 참지(參知) 이원엽(李元燁), 정랑 유진증(兪晉曾)ㆍ이용진(李用晉)ㆍ오윤해(吳允諧), 분정랑(分正郞) 박률(朴慄), 좌랑 김시국(金蓍國)ㆍ강선여(姜善餘)ㆍ유화(柳鞾)ㆍ조길(曺佶)ㆍ이사맹(李師孟), 형조판서 조정(趙挺), 참의 정규(鄭逵), 정랑 홍여일(洪汝一)ㆍ이응천(李應天)ㆍ박광선(朴光善)ㆍ신득연(申得淵)ㆍ나인(羅紉)ㆍ권고(權●), 좌랑 민정(閔瀞)ㆍ남이민(南以敏)ㆍ박수의(朴守誼)ㆍ최진운(崔振雲), 공조판서 이상의(李尙毅), 참판 조탁(曺倬), 참의 장자호(張自好), 정랑 윤정지(尹廷之)ㆍ최탁(崔琢)ㆍ박조(朴簉), 좌장 이명한(李明漢)ㆍ김덕망(金德望)ㆍ경선(慶選), 판윤(判尹) 윤선(尹銑), 좌윤(左尹) 김개(金闓), 우윤(右尹) 이원(李瑗), 서윤(庶尹) 윤희(尹僖), 판관(判官) 신수신(愼守身), 참군(參軍) 홍유형(洪有炯)ㆍ김명응(金命應)ㆍ이종립(李宗立), 대사헌 조존세(趙存世) 삼사(三司)ㆍ승지ㆍ한림(翰林)과 주서(注書)는 들어가지 않았다. 판결사(判決事) 박경신(朴慶新), 사의(司議) 김경열(金景悅), 사평(司評) 황립중(黃立中)ㆍ신경진(申景進), 사성(司成) 민호(閔頀), 사예(司藝) 이창정(李昌庭)ㆍ신충일(申忠一), 직강(直講) 채승선(蔡承先)ㆍ유광(柳洸))ㆍ이숙(李潚)ㆍ윤지양(尹知養), 전적(典籍) 한윤겸(韓允謙)ㆍ황상겸(黃尙謙)ㆍ신식(申栻)ㆍ한급(韓昅)ㆍ홍경찬(洪景纘)ㆍ양시헌(梁時獻)ㆍ이강(李茳), 박사(博士) 오전(吳晪)ㆍ권준(權濬)ㆍ박진(朴瑨), 학정(學正) 이유일(李惟一)ㆍ허돈(許暾)ㆍ조훈(趙壎)ㆍ한정국(韓正國), 판교(判校) 이수록(李綏祿), 교검(校檢) 이경현(李景賢), 정자(正字) 홍헌(洪憲)ㆍ심지청(沈之淸)ㆍ김언(金琂)ㆍ박안효(朴安孝)ㆍ정심(鄭沁)ㆍ유집(柳潗), 좌통례(左通禮) 김위남(金偉男),우통례(右通禮) 금개(琴愷), 상례(相禮) 강홍중(姜弘重), 찬의(贊儀) 유영(柳泳), 인의(引儀) 홍사준(洪師浚)ㆍ조차마(曺次磨)ㆍ유경춘(柳擎春)ㆍ이유(李瑜)ㆍ정연수(鄭兗岫)ㆍ유식(柳湜)ㆍ한사성(韓師聖)ㆍ이흠(李欽)ㆍ윤취빙(尹就聘)ㆍ이정건(李廷楗)ㆍ임취빙(林就聘)ㆍ김복흥(金復興)ㆍ박자원(朴自元)ㆍ가인의(假引儀) 임충좌(任忠佐)ㆍ신준(申俊)ㆍ이승안(李承安)ㆍ장인서(張麟瑞)ㆍ곽계문(郭繼文), 종부정(宗簿正) 유탁(兪濯), 주부(主簿) 서탁(徐晫), 전적(典籍) 남이성(南以聖), 장악정(掌樂正) 이홍엽(李弘燁), 첨정(僉正) 정대해(趙大海), 주부(主簿) 민주(閔澍), 직장(直長) 최원호(崔元祜) ㆍ허항(許恒), 사도정(司導正) 이시립(李時立), 첨정(僉正) 조계한(趙繼韓), 주부 김우성(金佑成)ㆍ정섭(鄭涉), 사옹정(司饔正) 정문진(鄭文振), 주부 성흔(成忻), 직장 박문엽(朴文燁)ㆍ유윤창(柳允昌)ㆍ박승안(朴承安), 봉사(奉事) 이쟁(李崝)ㆍ유여성(柳汝惺)ㆍ 정진(鄭晉)ㆍ이사민(李師閔)ㆍ참봉 심정익(沈廷翼), 상의정(尙衣正) 정도(鄭道), 판관(判官) 이승헌(李承憲), 주부(主簿) 안언길(安彦吉), 별좌(別座) 박효전(朴孝全) 혹은 황효전(黃孝全)이라고 한다. 박안행(朴安行)ㆍ임광준(任光俊)ㆍ황식(黃湜), 직장(直長) 구해(具海), 사복정(司僕正) 황익중(黃益中), 첨정(僉正) 유박(柳舶), 판관(判官) 유희안(柳希安), 주부 한덕윤(韓德允)ㆍ성창렬(成昌烈), 내섬정(內贍正) 이순민(李舜民), 주부 김연경(金延慶), 봉사 최명선(崔命善), 봉상정(奉常正) 이시정(李時楨), 첨정(僉正) 차운로(車雲輅), 판관 조익(趙釴), 주부 박희현(朴希賢)ㆍ강문익(康文翼)ㆍ왕보신(王輔臣), 봉사 김경후(金慶厚), 참봉 김지수(金地粹), 내자정(內資正) 금변(琴忭), 주부 황진(黃津), 봉사 윤성득(尹誠得), 예빈정(禮賓正) 윤정(尹綎), 주부 정사온(鄭思溫), 별좌(別座) 권필중(權必中)ㆍ 윤형임(尹衡任), 직장 이준익(李俊翼), 참봉 이격(李格), 제용정(濟用正) 박효생(朴孝生), 판관(判官) 김현(金俔), 직장 박찬(朴燦)ㆍ박현(朴睍), 봉사 조탁(趙倬), 참봉 정문해(鄭文海), 군기정(軍器正) 강린(姜繗), 부정(副正) 정응정(鄭應正)ㆍ한여징(韓汝澂)ㆍ조수헌(趙守憲), 판관 윤간(尹侃)ㆍ이두망(李斗望), 주부 심이(沈怡)ㆍ윤호(尹昈), 직장 임천수(任天壽), 봉사 이응립(李應立)ㆍ고경서(高景瑞), 참봉 정환(鄭煥), 군자정(軍資正) 유효립(柳孝立), 판관(判官) 윤흥충(尹興忠), 주부 정종길(鄭宗吉)ㆍ김영(金韺), 봉사 이준(李浚), 사재정(司宰正) 송극인(宋克訒), 첨정(僉正) 박천서(朴天敍), 주부 강세경(姜世慶)ㆍ직장 이경민(李慶閔), 참봉 정심(鄭諶)ㆍ사섬정(司贍正) 유철(柳澈), 주부 이탁(李倬), 직장 한여현(韓汝賢), 봉사 민선철(閔善哲), 참봉 한사일(韓師一)ㆍ사포주부(司圃主簿) 윤홍업(尹弘業), 별좌(別座) 이경준(李慶俊)ㆍ김형윤(金亨胤), 장원별좌(掌苑別座) 임성로(任星老)ㆍ김호(金灝), 평시령(平市令) 이원현(李元顯), 직장 이사증(李師曾)ㆍ조지별좌(造紙別座) 김수정(金守正), 금화별좌(禁火別座) 한오(韓晤), 전생주 전생주부(典牲主簿) 박안국(朴安國), 봉사 신종근(申從謹), 참봉 이호(李護), 사축별좌(司蓄別座) 송탁(宋鐸)ㆍ이정신(李廷臣)ㆍ박수형(朴隨亨), 상서직장(尙瑞直長) 최응하(崔應河), 의영주부(義盈主簿) 남궁격(南宮格), 직장 한순(韓㫬), 봉사 허련(許璉), 빙고별좌(氷庫別座) 조심(趙諶)ㆍ임경후(任慶後), 교서교리(校書校理) 정흡(鄭洽), 저작(著作) 이유성(李惟聖), 종묘령(宗廟令) 우정침(禹廷琛), 직장 김효달(金孝達), 봉사 이호직(李好直)ㆍ최홍서(崔弘緖), 사직참봉(社稷參奉) 유노증(兪魯曾), 조국준(趙國俊),전설별좌(典設別座) 민익(閔榏)ㆍ김숙(金橚)ㆍ심숙(沈俶)ㆍ신득의(愼得義), 와서별좌(瓦署別座) 이진영(李晉英), 활인별좌(活人別座) 심훤(沈暄)ㆍ이사성(李士星)ㆍ정항(鄭恒), 귀후별좌(歸厚別座) 장흔(張昕)ㆍ안정(安鋌), 선공첨정(繕工僉正) 이정익(李廷益), 직장 심돈(沈暾), 봉사 신순(申楯)ㆍ 이응명(李應溟), 참봉 이유후(李裕後), 감역(監役) 임석후(任碩後)ㆍ김영구(金永耈)ㆍ홍형(洪逈)ㆍ우시계(禹時啓)ㆍ이경(李㯳)ㆍ이국광(李國光), 풍저주부(豐儲主簿) 하진(河鎭), 직장 최응두(崔應斗), 장흥주부(長興主簿) 우대유(禹大有), 직장 윤인계(尹仁啓), 봉사 김광국(金光國), 광흥수(廣興守) 정근(鄭瑾), 주부 한사덕(韓師德), 봉사 정문승(鄭文升)ㆍ채계선(蔡繼先), 금부도사(禁府都事) 이숭의(李崇義)ㆍ정찬(鄭纘), 전옥주부(典獄主簿) 이순(李楯), 오부주부(五部主簿) 유세증(兪世曾)ㆍ유건(柳鍵), 참봉 윤홍보(尹弘輔)ㆍ구현(具鉉)ㆍ윤보형(尹保衡)ㆍ성대수(成大受)ㆍ김원(金瑗), 동몽교관(童蒙敎官) 정운서(鄭雲瑞)ㆍ이성석(李聖錫)ㆍ 이영의(李榮義)ㆍ최기문(崔起門)ㆍ최구(崔衢)ㆍ이중명(李重溟), 내시교관(內侍敎官) 윤상민(尹商民)ㆍ이일형(李日馨), 훈련교관(訓鍊敎官) 최응문(崔應雯), 사산감역(四山監役) 윤형준(尹衡俊)ㆍ유지호(柳之豪)ㆍ김철(金哲)ㆍ신억(申億) 이민수(李敏樹), 도총 경력(都摠經歷) 이응린(李應麟)ㆍ이동룡(李東龍)ㆍ강작(康綽)ㆍ 변언황(邊彦璜), 분경력(分經歷) 이득가(李得可), 도사(都事) 한기영(韓耆英)ㆍ정국정(鄭國楨) 한창(韓㻛)ㆍ채색(蔡穡)ㆍ박성(朴成)ㆍ박영(朴瑛), 훈련도정(訓鍊都正) 유승서(柳承緖)ㆍ훈련정 이충선(李忠善) 부정(副正) 이우철(李友哲)ㆍ허정식(許廷式), 첨정(僉正) 이대득(李大得)ㆍ최보(崔葆), 판관(判官) 심대항(沈大恒)ㆍ방경복(房景福), 주부 이정언(李廷彦)ㆍ정직(鄭稷), 참봉 배경(裵璟)ㆍ최규(崔叫)ㆍ봉사 한응복(韓應福)ㆍ이석남(李碩男), 선전관(宣傳官) 이중광(李重光)ㆍ이종선(李宗善)ㆍ이곽(李郭)ㆍ이종(李悰)ㆍ정원필(鄭元弼)ㆍ신유(申曘)ㆍ조종의(趙宗義)ㆍ조정영(曺挺英)ㆍ이경하(李景夏)ㆍ이탁(李倬)ㆍ성언길(成彦吉)ㆍ백대진(白大進)ㆍ박곤원(朴坤元)ㆍ박명룡(朴命龍)ㆍ유종립(柳宗立)ㆍ신채(申蔡), 익위(翊衛) 박일현(朴逸賢)ㆍ이언직(李彦直)ㆍ이평형(李平亨), 사어(司禦) 신수천(愼守天)ㆍ최환(崔煥), 익찬(翊贊) 유정립(柳鼎立)ㆍ조성(趙誠), 위솔(衛率) 이운근(李雲根), 부솔(副率) 조실구(曺實久)ㆍ 이호원(李浩源), 시직(侍直) 김수관(金守寬)ㆍ이석망(李碩望), 세마(洗馬) 유시립(柳時立)ㆍ조각(趙珏)ㆍ황길남(黃吉男), 호군(護軍) 이위경(李偉卿)ㆍ유경종(柳慶宗)ㆍ조유도(趙有道)ㆍ정광성(鄭光成)ㆍ유지신(柳止信)ㆍ한덕수(韓德修)ㆍ여인길(呂裀吉)ㆍ유응형(柳應泂)ㆍ최윤조(崔胤祖)ㆍ윤의(尹顗)ㆍ이여검(李汝儉)ㆍ성이문(成以文)ㆍ김정간(金廷幹)ㆍ이득원(李得元)ㆍ이국(李掬)ㆍ이응린(李應麟)ㆍ박서(朴瑞)ㆍ박적(朴寂)ㆍ이여해(李汝諧), 사직(司直) 남근(南瑾)ㆍ송석경(宋錫慶)ㆍ이대엽(李大燁)ㆍ여우길(呂祐吉)ㆍ윤휘(尹暉)ㆍ민형(閔泂) 박이서(朴彝敍)ㆍ 송안정(宋安廷)ㆍ이선복(李善復)ㆍ이경황(李慶滉)ㆍ안륵(安玏)ㆍ우치적(禹致績)ㆍ원유남(元裕男)ㆍ변응지(邊應祉)ㆍ원근(元瑾)ㆍ이백복(李百福)ㆍ조유정(趙惟精)ㆍ이문전(李文荃)ㆍ오정방(吳定邦)ㆍ오순무(吳舜懋)ㆍ정문부(鄭文孚)ㆍ이구징(李久徵)ㆍ윤의립(尹毅立)ㆍ조경진(趙景禛)ㆍ김응함(金應緘)ㆍ구인경(具仁慶)ㆍ박봉수(朴鳳壽)ㆍ박덕린(朴德麟)ㆍ원수남(元秀男)ㆍ조흥남(趙興男)ㆍ이현(李玹)ㆍ 김윤신(金允信)ㆍ이은종(李殷宗)ㆍ정응운(鄭應運)ㆍ조명(趙溟)ㆍ구덕령(具德齡)ㆍ이충길(李忠吉)ㆍ김경서(金景瑞), 사과(司果) 송석조(宋錫祚)ㆍ정진철(鄭震哲)ㆍ조훤(趙暄)ㆍ황이중(黃履中)ㆍ이영남(李英男)ㆍ조충일(趙忠一)ㆍ강홍업(姜弘業)ㆍ김응하(金應河)ㆍ박난수(朴蘭秀)ㆍ이정생(李挺生)ㆍ김수겸(金守謙)ㆍ이시호(李時豪)ㆍ유태첨(柳泰瞻)ㆍ유옥(柳沃)ㆍ고경민(高敬民)ㆍ박지진(朴知晉)ㆍ김원복(金元福)ㆍ노세준(盧世俊)ㆍ윤경기(尹慶祺)ㆍ안용(安容)ㆍ조희보(趙希輔)ㆍ권복길(權復吉)ㆍ안호인(安好仁)ㆍ이식립(李植立)ㆍ홍대방(洪大邦)ㆍ유몽룡(劉夢龍)ㆍ박자(朴梓)ㆍ권사공(權士恭)ㆍ이인귀(李麟貴)ㆍ전윤(田潤)ㆍ이경호(李景瑚)ㆍ홍기남(洪奇男)ㆍ이굉(李鍧)ㆍ한준(韓俊)ㆍ이승형(李升亨)ㆍ심륜(沈惀)ㆍ전효신(全孝信)ㆍ최위(崔㬙)ㆍ박성룡(朴成龍)ㆍ윤안국(尹安國)ㆍ이귀경(李龜慶)ㆍ허완(許完)ㆍ이성(李晟)ㆍ황치성(黃致成)ㆍ조발(趙撥)ㆍ강침(姜沈)ㆍ유창문(柳昌文)ㆍ조국빈(趙國賓)ㆍ유림(柳琳)ㆍ권흡(權洽)ㆍ정침(鄭沈)ㆍ윤기헌(尹耆獻)ㆍ김운성(金雲成)ㆍ조준남(趙俊男)ㆍ남궁인(南宮戭)ㆍ황락(黃洛)ㆍ 김전(金銓)ㆍ이일원(李一元)ㆍ성식(成軾)ㆍ민종량(閔宗亮)ㆍ방천수(文天壽)ㆍ전유형(全有亨)ㆍ정지륜(鄭之倫)ㆍ임석훈(林碩熏)ㆍ이겸(李馦)ㆍ강선(江璿)ㆍ이분(李芬)ㆍ권형(權●)ㆍ최숭(崔崇)ㆍ민항(閔沆)ㆍ홍창세(洪昌世)ㆍ이복형(李福亨)ㆍ 장명응(張明應)ㆍ이중길(李重吉)ㆍ남빈(南贇)ㆍ이대남(李大男)ㆍ안몽윤(安夢尹)ㆍ정승조(鄭承曹)ㆍ정대립(鄭大立)ㆍ조굉중(趙宏中)ㆍ안홍망(安弘望)ㆍ이응망(李應望)ㆍ이유서(李惟恕)ㆍ박기남(朴奇男)ㆍ권근(權瑾)ㆍ이종성(李宗誠)ㆍ김영(金穎)ㆍ성시헌(成時憲)ㆍ송진(宋震)ㆍ조옥건(趙玉乾)ㆍ최한(崔漢)ㆍ유대일(兪大逸)ㆍ윤인남(尹仁男)ㆍ신경류(申景柳)ㆍ김경의(金景義)ㆍ정양(鄭暘)ㆍ허상(許詳)ㆍ 김경운(金慶雲)ㆍ이문창(李文昌)ㆍ김원남(金元男)ㆍ정지한(鄭之罕)ㆍ김유형(金有馨)ㆍ신득자(申得滋)ㆍ권응원(權應元)ㆍ홍걸(洪傑)ㆍ신인민(愼仁民)ㆍ이복광(李復匡)ㆍ한천두(韓天斗)ㆍ李德符(이덕부)ㆍ洪澤(홍택)ㆍ이욱(李●)ㆍ이정(李楨)ㆍ최경춘(崔景春)ㆍ홍룡해(洪龍海)ㆍ한현인(韓顯仁)ㆍ권로(權櫓)ㆍ이신의(李愼儀)ㆍ안숙도(安肅道)ㆍ한항길(韓恒吉)ㆍ조광필(趙光弼)ㆍ권엽(權燁)ㆍ조천종(曹天宗)ㆍ김명남(金命男)ㆍ신용휴(申用休), 사정(司正) 변응항(邊應恒)ㆍ허함(許涵)ㆍ성희구(成僖●)ㆍ오숙(吳䎘),사맹(司猛) 박경범(朴景範)ㆍ홍찬(洪粲)ㆍ홍여량(洪汝亮),사용(司勇) 최수(崔璹)ㆍ이고(李稿)ㆍ이의춘(李宜春)ㆍ김여정(金汝頲)ㆍ신극제(申克濟)ㆍ양두남(梁斗南)ㆍ이숙(李淑)ㆍ황덕영(黃德韺), 훈련낭청(訓鍊郎廳) 이중광(李重光)ㆍ이영달(李英達). 《명륜록》
○ 이항복은 정청이 이미 끝나고 대비의 존호(尊號)를 버리고 서궁으로 일컬으라는 전교가 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였다. “요새 나라에서 역적 다스리기를 자못 엄하게 하나 모두 형적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 이 대비를 폐하자고 청하는 무리들은 실상 대역인 것이다. 내가 사귀는 친구 중에도 정청에 참여한 사람이 많이 있으니 매우 한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옆에 모시고 있던 자가 묻기를,“아무개 아무개는 모두 공의 가장 친한 사람이오니 뒷날에 서로 만나게 되면 그들을 어떻게 대우하렵니까.” 하니 공은, “그들은 모두 협박을 받아 따라간 것이니 그 정상은 비록 불쌍하나 이미 반역에 참여했으니 교분은 벌써 끊어졌다. 뒷날에 만나면 그저 범연히 서로 대할 뿐이다.” 하였다. 《북천록》
○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인원을 초계하여 아뢰었는데, 그 중에 있는 경양군(慶陽君) 이사공(李士恭), 사과(司果) 이계남(李桂男), 사맹(司猛) 이상준(李尙俊), 사과 윤홍(尹鴻) 등의 아들은, 그 아버지가 정청에 참여하였는데 불참이라 하는 것은 원통하다고 하여 소를 바쳤다. 사과 조석명(趙錫明)ㆍ임위(任瑋)는 날마다. 참여하였는데 불참한 초계(抄啓)에 섞여 들어갔으므로 소를 올려 스스로 변명하였다. 《명륜록》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
의창군(義昌君) 광(珖)은 선왕의 아들들이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뽐내며 앞장을 설 때 혼자서 시종 정청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종반(宗班) 30여 명이 참여하지 않았다. 영돈녕(領敦寧) 정창연(鄭昌衍),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 유근(柳根),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 모두 수의(收議)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진창군(晉昌君) 강인(姜絪), 청풍군(淸風君) 김권(金權), 능해군(綾海君) 구성(具宬), 복천군(福泉君) 오백령(吳百齡), 송산군(松山君) 김위(金渭), 풍령군(豐寧君) 조응록(趙應祿), 판중추(判中樞) 이정귀(李廷龜), 지중추(知中樞) 김상용(金尙容)ㆍ신식(申湜), 지돈녕(知敦寧) 박안세(朴安世), 동돈녕(同敦寧) 김현성(金玄成), 첨지중추 오윤겸(吳允謙),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수의(收議)에 참여하지 않았다. 진안위(晉安尉) 유적(根頔), 당원위(唐原尉) 홍우경(洪友敬),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 두 사람은 합계(合啓) 중에 들어갔다. 호군(護軍) 이시언(李時彦)ㆍ이시발(李時發)ㆍ성진선(成晉善)ㆍ윤응삼(尹應三), 사직(司直)ㆍ김유(金瑬)ㆍ권희(權憘)ㆍ송영구(宋英耈)ㆍ정효성(鄭孝誠)ㆍ이경직(李景稷)ㆍ사과(司果) 박동선(朴東善),ㆍ 사용(司勇) 권극정(權克正)ㆍ이담(李憺)ㆍ정사서(鄭思恕)ㆍ유정생(劉挺生)ㆍ정호신(鄭虎臣)ㆍ 정승서(鄭承緖)ㆍ이상(李祥),ㆍ병조정랑 정홍좌(鄭弘佐)ㆍ전적(典籍) 박자응(朴自凝), 승문정자(承文正字) 강석기(姜碩期), 내섬주부(內贍主簿) 민여현(閔汝賢), 풍저봉사(豐儲奉事) 정충전(鄭忠傳), 전생참봉(典牲參奉) 유산립(柳山立) 전옥참봉(典獄參奉) 안홍중(安弘重), 위솔(衛率) 유찬(柳澯), 의장낭청(儀仗郎廳) 정상조(鄭象祖)ㆍ이홍원(李弘源) 등이 참여하지 아니하였다. 《명륜록》
○ 이정귀(李廷龜)가 병으로 조정의 의논에 참여하지 않았던바 유생 김형(金瑩)이 소를 올려 목 베기를 청하였는데 김형은 호서 사람이며 그의 어머니는 이정귀와 일가간이다. 이정귀가 장차 죄를 입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위문하러 왔다가 서울에 이르러서는 허균(許筠)에게 협박당해 이 소를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명함을 가지고 가서 이정귀를 뵈려 하였더니 자리에 있던 모든 손님들의 얼굴빛이 변하고 하인들도 모두 놀라서 피하였다. 이에 김형이 사람에게 물어서 그 이유를 알고서야 울면서, “내가 본래 공을 뵈러 왔던 것인데 어제 저녁 여관에 이르니 허판서(許判書 허균(許筠))가 한 장의 소를 내 주며 ‘이것을 바치게. 마땅히 좋은 일이 있을 것이네’ 했는데 실상 소 속에 무슨 말이 있는지는 몰랐습니다.”하니, 이 말을 들은 사람이 서로 전해 가면서 웃지 않은 이가 없었다. 월사(月沙)의 행장(行狀)
○ 삼사가 합계하기를,“지난번의 정청은 실로 한 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충성을 본발하여 역적을 토벌하려는 의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모든 신하와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과 방민(坊民)과 서리들이 날마다 정성을 쏟아 글을 올렸는데도 오윤겸(吳允謙)ㆍ송영구(宋英耉)ㆍ 이시언(李時彦) ㆍ이정귀(李廷龜)는 끝까지 정청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모두 관작을 삭탈하고 내쫓으소서. 전일에 수의할 적에 이신의(李愼儀)ㆍ김권(金權)ㆍ권사공(權士恭)은 몰래 역적을 비호할 계책을 품고, 감히 대비를 두둔하는 의논을 바쳤으니 관직을 삭탈하고 내쫓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다만 이 네 사람뿐인가. 임금이 주는 밥을 먹고 임금이 주는 옷을 입고도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죄는 대비를 두둔한 무리보다도 심한 죄인데, 법은 이들에게 대비를 두둔한 무리보다 가벼운 벌을 주려하니 책임 때우기 위한 일인 듯하다.”하였다.
○ 삼사가 합계하기를, “오윤겸(吳允謙) 등을 모두 먼 곳으로 귀양보내기를 청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 일은 내가 말을 안하고자 했으나, 양사에서 일을 논하는 사체가 공정한 의논이 아니므로 잠자코 있을 수 없다. 양사는 이 말을 들을지어다. 기자헌과 이항복 등은 대신으로 있으면서 다만 마음에 품고 있는 바를 진술했을 뿐이다. 더구나 대신은 일반 관원과 같지 않은데도 그 때에 삼사가 같은 목소리로 죄를 청하고 하루 동안에 누차 아뢰어 위리(圍籬)의 형을 쓰자고까지 했는데, 지금 이신의(李愼儀)등의 헌의는 기자헌ㆍ이항복과 무엇이 다르랴. 따라서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신하의 의리가 비로 쓴 듯이 없어졌으니 그 죄도 도리어 대비를 두둔한 무리들보다 심한 편이다. 그럼에도 책임을 면하려고 3,4명의 이름만 적어 죄를 청하고, 형을 견주되 내렸다 올렸다 제 마음대로 하여 꺼림이 없으니 양사는 과연 권한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하였다. 또 답하기를, “오늘날의 삼사는 곧 전일에 기자헌과 이항복을 공격한 삼사이다. 그들의 사람을 공격하는 기력이 전에는 장하더니 오늘날에 와서는 어찌 그리 약한가. 기자헌과 이항복의 액운이 편중되어서 그런 것인가.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그 수효가 매우 많은데도 그 중에서 뽑아서 아뢰는 것은 무슨 뜻인가.”하였다. 《명륜록》
○ 삼사에서 다시 합계하기를, “오윤겸ㆍ송영구(宋英耈)ㆍ이시언(李時彦)ㆍ이정귀(李廷龜)ㆍ유근(柳根)ㆍ김상용(金尙容)ㆍ윤방(尹昉)ㆍ정창연(鄭昌衍)은 정청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이신의(李愼儀)ㆍ김권(金權)ㆍ권사공(權士恭)ㆍ김지수(金地粹)는 대비에게 가담하여 의견을 아뢰었으니 모두 먼 곳으로 귀양보내소서. 종실은 의리상 즐거움과 슬픔을 나라와 같이해야 되므로 더욱 참여해야 하는데, 서성도정(西城都正)등 24인이 정청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먼 곳으로 귀양보내소서 한음군(漢陰君)은 노병으로서 참여하지 않았으니 관직을 삭탈하고 내쫓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어찌 내 말로 빌미삼아 논핵을 더하고 형률을 더하려 하는가. 여러 말을 말라”하였다.
○ 또 아뢰기를, “조국빈(趙國賓)은 헌의(獻議)하면서 대비를 비호했으니 먼 곳으로 귀양보내소서. 윤형준(尹衡俊)은 수의할 때에 말이 이치에 어긋나고 조롱하였으니 관직을 삭탈하고 내쫓으소서.” 하였다.
○ 삼사가 합계하기를, “정창연(鄭昌衍)은 왕실의 가까운 척당으로서 벼슬이 대신에 까지 이르렀는데도 당초에 유소(儒疏)를 정부에 내려보낼 때에 병이 위중하다고 핑계하고 열어 읽어 보지 않았으며, 의정부에서 수의할 적에도 낭관이 여러번 가서 나오기를 청하였는데 문을 닫고 꾸짖었으며, 사론(邪論)을 먼저 주장하여 그 자질(子姪)들을 미혹시키고 대비를 비호하는 의논의 주모자가 되었습니다. 큰 의논이 이미 정해진 후에 백관이 정청할 적에도 조금도 꺼림이 없이 고집스레 들어앉아 조금도 미동을 하지 않았으며, 한 달에 걸친 복합상소에도 끝내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매부 김극효(金克孝)의 초상에는 감히 당당하게 가마를 타고 그 집에 가서 조문했습니다. 그러니 병을 핑계하고 일을 회피하며 임금을 저버리고 역적을 비호한 죄를 어찌 다스리지 않겠습니까. 유근(柳根)은 타고난 성품이 간사하여 본래부터 사론을 주장했을뿐더러 유생들의 상소가 처음 들어올 적에 반드시 서궁에 대한 처리가 있을 것을 탐지하고는 빨리 사직을 청하는 단자(單子)를 바치고 고향에 돌아가서 기한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며 병을 핑계하면서 체직(遞職)하기를 청했으니, 그 교묘히 잔꾀를 부려 일을 피한 자취는 불을 보듯이 명백합니다. 윤방(尹昉)은 조상의 묘소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올라와서 대궐 안에서 병을 핑계하여 가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더니 수의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며, 정청에도 또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김상용(金尙容)은 아버지가 병났다고 핑계했으며, 이정귀(李廷龜)와 이시언(李時彦)은 수의할 때에 자기가 병났다고 말하면서 큰 의논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며, 혹은 애매한 태도로 남에게 미루면서 정청에도 또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오윤겸(吳允謙)과 송영구(宋英耈 이상은 팔간(八奸)이라 함)의 수의한 말은 보두 대비를 두둔한 내용이며, 정청에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조국빈(趙國賓)은 수의할 적에 대비를 두둔했으며, 윤형준(尹衡俊)은 수의할 적에 업신여기고 조롱했으니, 그 죄는 8명의 간인(奸人)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시발(李時發)은 장차 큰 의논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말미를 받아 고향에 내려가서 짐짓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으며, 서울에 돌아온 후에도 또한 외부에 오지 않았습니다. 후에 파주(坡州)의 수령으로 임관되자 즉시 하직하고 떠났으니, 끝내 교묘히 피한 자취는 명백히 가리울 수 없습니다. 김유(金瑬)는 아무런 일도 없이 서울에 있으면서 끝까지 자기의 소견을 지키고 있으니, 그 마음이 어디 있는지는 불을 보듯이 환합니다. 박자응(朴自凝)은 몸이 경연(經筵)에 있으면서, 큰 의논에는 꾀를 부려 피하더니 병을 일컬어 즉시 체직되었으며, 전적(典籍)에 임관된 후에는 오래도록 사은 숙배를 미루었습니다. 이경직(李景稷)은 큰 의논이 이미 발론되자 이를 피하여 시골로 내려갔으니, 그 본심을 살펴본다면 그의 죄는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전후에 그 마음과 자취가 김유와 서로 일치됩니다. 박동선(朴東善)은 본래 다른 의논을 한 사람이니 다만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정도가 아닙니다. 심지어는 하리(下吏)가 잘못하여 진(進)자를 쓰니까 스스로 진(進)하지 않았음을 밝혀 절개를 세우는 사람처럼 했으니, 다른 사람에게 비교하면 더 심한 편입니다. 신익성(申翊聖)ㆍ홍우경(洪友敬)ㆍ유적(柳頔)ㆍ박미(朴瀰)는 모두 나이 어리고 병이 없는 사람인데 끝내 정청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정효성(鄭孝誠)은 노인도 아니고 병든 것도 아님에도 본래의 마음씀이 정론(正論)과는 모순이 있었고, 더구나 정백창(鄭百昌)의 아버지로서 조정에서 하는 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고 조롱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죄가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데에 그치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두 먼 곳으로 귀양보내소서.”하였다. 《명륜록》
○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김권(金權)은 강계(江界)로, 이신의(李愼儀)는 회령(會寧)으로, 권사공(權士恭)은 창성(昌城)으로, 김지수(金地粹)는 부령(富寧)으로 귀양보낼 곳을 정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신의의 흉한 글과 사리에 어긋난 말은 정홍익(鄭弘翼) 등과 다름이 없으니 위리안치(圍籬安置) 시키라.”하였다. 《명륜록》
○ 이 때 궁중과 인척 관계에 있는 사람도 같이 귀양보내기를 논하는 중에 있었으므로, 광해주는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대답하고 모든 사람을 즉시 귀양보내지 않고 시일을 끌며 결정하지 않았다. 오윤겸(吳允謙)은 하는 수 없이 나가 토당(土塘)의 분묘 밑에 가서 3년 동안이나 처분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추탄집(楸灘集)》
○ 이 때 의논이 수의할 때에 이론(異論)을 말한 사람은 대비를 두둔했다고 일렀으니, 곧 기자헌ㆍ이항복ㆍ김덕함(金德諴)ㆍ정홍익(鄭弘翼) 등 몇 사람으로서 이전에 귀양보내기로 논한 사람이었다. 또 정창연(鄭昌衍)ㆍ유근(柳根)ㆍ이정귀(李廷龜)ㆍ윤방(尹昉)ㆍ김상용(金尙容)ㆍ이시언(李時彦)후에 직언(直言)으로 고쳤다. 오윤겸(吳允謙)ㆍ송영구(宋英耈)는 팔간(八奸)이라 하고, 김유(金瑬)ㆍ이경직(李景稷)ㆍ박미(朴瀰) 금양위(錦陽尉)ㆍ홍우경(洪友敬) 당원위(唐原尉)ㆍ유적(柳頔) 진양위(晉陽尉)ㆍ정효성(鄭孝誠)ㆍ박동선(朴東善)ㆍ윤형준(尹衡俊)ㆍ신익성(申翊聖) 동양위(東陽尉)은 십사(十邪)라 하였으며 종실 의창군(義昌君) 등 35명은 모두 먼 곳으로 귀양보내기를 청하고, 늙고 병든 재상과 소관(小官)들은 모두 관작을 삭탈하고 내쫓도록 아뢰었다. 《청백당기사》
허균(許筠)이 사형받다 무오년[광해군 10년(1618)] 8월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이 일찍이 경운궁(慶運宮)으로 글을 화살에 매어 쏘아 들여보낸 변고의 장본인이 허균이라고 지적했기 때문에 드디어 허균과 원수가 되었다. 위의 폐대비(廢大妃) 조 아래에 자세히 말하였다.
○ 정사년(1617) 11월 26일에 전 현감 이문란(李文蘭)이 은밀히 소를 올려 아뢰었으며, 기준격(奇俊格)이 몰래 두 번이나 소를 올려 아뢰었으며, 허균도 은밀히 소로 아뢰었다. 《응천일기》
○ 예조 좌랑 기준격의 소에 “나라가 불행하여 역적의 변고가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도 역적의 뿌리는 실상 허균이었는데도 오히려 목숨을 보전하고 있으니, 신은 몹시 마음이 아픕니다. 기유년 겨울에 허균의 집에 갔더니 허균이, ‘의창군(義昌君)은 선왕의 사랑하는 아들로 그를 세자로 세우자고 했으나 너의 아버지가 저지시켰다.’고하였습니다. 신해년 겨울에 허균이 또 말하기를 ‘연흥(延興 김제남(金悌男))이 나를 시켜 심정세(沈挺世)의 딸을 며느리 삼도록 윤수겸(尹守謙)에게 청혼해 달라고 하였다. 연흥은 수겸이 일찍이 훈련도감 군사들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에 결혼하여 큰일을 행하여 두 송장을 끌어내고, 영창 대군을 세우고 대비에게 수렴청정 시키고자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놀라서 묻기를, ‘두 송장은 누구인가?’ 하니, ‘임금과 동궁이다. 같은 날 나와 연흥이 가서 윤수겸을 보고 혼인하기를 청하였는데 윤수겸이 비록 싫더라도 어찌 감히 따르지 않으랴.’ 하였습니다. 신이 묻기를, ‘윤수겸이 무슨 말로서 대답하던가?’ 하니, 망설이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연흥을 통하여 대궐 안의 일을 들으니 임금이 이러이러한 일이 있다.’ 하였는데 대개 차마 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말하기를, ‘내가 지금은 연흥에게 지휘를 받고 있지마는 일이 이루어진 후에는 내가 병권을 모두 쥐고, 때가 되면 무사를 시켜 연흥까지 죽이고 나의 권세보다 높은 사람이 없도록 하고 대비를 끼고 온 나라를 호령하여 다른 사람들은 감히 숨도 못쉬게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고단수이다. 이내 중국에, 아뢰되, 이러이러한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는 말을 나열하고 임금은 적자(嫡子)가 아니기 때문에 폐위시키고 적자 의(㼁)를 세웠다고 한다면 은(銀) 1만 냥까지 쓰지 않아도 일이 순조롭게 될 것이다.’ 했습니다. 또 말하기를, ‘내가 권세를 잡는 것은 좋지만, 심정세의 집이 너의 집을 원망하고 있으니 심정세가 세력을 얻게 되면 너의 집이 크게 패할 것이다.’ 했습니다.
신이 그 말을 듣고 곧 소를 올리자고 했으나 그 당시 온 조정의 동인ㆍ서인ㆍ남인ㆍ북인을 막론하고 모두가 신의 집을 미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 위협하고 도리어 죄를 뒤집어 씌우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여러가지로 생각해 보아도 계책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조희형(趙希珩)을 시켜 그 혼인만 중지시켰습니다. 허균은 선조(先朝) 때에 공주 목사를 파직당하고 부안으로 돌아왔는데 부안 군수는 바로 심광세였으므로 허균이 광세와 이의를 세우고 권세 쥘 것을 모의했습니다. 또 경술년에 죄를 입어 옥에 갇혔고, 신해년 1월에 귀양갔다가 돌아와서는 허균의 집과 광세의 집이 문을 마주 대하고 있었으므로 아침저녁으로 상종하면서 흉악한 모의를 감히 하였습니다. 허균의 천성이 경솔하고 망령된 탓으로 신이 그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허균은 제남(悌男)과 함께 서로 공모하여 도읍을 옮길 의논을 주장하여 참서(讖書)의 본문에 없는 말을 첨가하여 ‘일한(一漢)ㆍ이하(二河)ㆍ삼강(三江)ㆍ사해(四海)’라 하였는데 하(河)라는 것은 교하(交河)를 말한 것입니다. 온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소란하고 난리나 났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한 후에 이내 일을 꾸미겠다고 했으니, 이것도 또한 그가 스스로 한 말입니다. 허균이 공주 목사로 있을 때에 삼영(三營)을 설치하였다는 비방이 있었는데 삼영은 식객 심우영(沈友英)ㆍ윤계영(尹繼榮)ㆍ이재영(李再榮)을 말합니다. 우영은 허균의 처가집 가까운 친족으로서 서로 친하여 한 몸과 같이 친밀한 것은 온 나라 사람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허균이 일찍이 글을 지어 우영에게 주면서, ‘나의 벗은 심군(沈君)이다.’고 했습니다. 허균은 한 평생 정도전(鄭道傳)을 사모하여 항상 현인(賢人)이라고 칭찬하였으며 스스로 선집한 《동인시문》에 도전의 시를 맨 첫머리에 싣고, 우영(友英)의 작품도 아울러 뽑아 넣었습니다. 계축년 후에 허균이 말하기를, ‘내가 복이 있어 남쪽으로 내려갈 때에 우영에게 지어준 시를 문집 속에 넣으려고 모두 가지고 갔는데 이때 마침 우영의 사건이 발생하여 나는 화를 면했다.’고 했습니다. 우영과 양갑(羊甲)은 모두 허균이 품에 안아서 기른 자입니다. 허균이 양갑의 자(字)를 석선(石仙)이라고 지어 주었으며, 매양 말하기를, ‘지금의 영웅은 내가 본 바로는 오직 서석선(徐石仙)만이 있을 뿐이다.’ 했으니 허균이 법망에서 빠져 잡히지 않은 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닙니까. 또 말하기를, ‘역적의 격문은 내가 지었지마는 내가 우영을 시켜 내 이름을 말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드디어 면하게 되었다.’ 고 하였습니다. 매양 말하기를, ‘이이첨의 집에 머리가 큰 뱀이 있는데 영경(永慶)과 직재(直載)의 귀신이라고 하니 오래 안가서 반드시 패망할 것이다.’ 하더니 변고가 난 후에는 몸을 둘 곳이 없어서 드디어 이첨에게 가서 의탁하였습니다.
신이 계축년 가을에, ‘전에는 어찌 대비에게 수렴청정 하도록 하고 이의(李㼁)를 임금으로 세운다고 하다가 지금은 어찌 대비를 폐하자고 말하느냐?’ 하고 물으니 허균은, ‘네가 나이 어리니 무엇을 알겠느냐. 말로를 걷는 사람은 화살이 떨어지는 곳에 과녁을 세워야 세상을 살아 나가는 데 걱정이 없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은 대개 허균이 경솔하고 천박하지 않았다면 신이 반드시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그(허균)도 또한 후회하여 그 일 아는 사람을 반드시 죽이고자 하여, 기회를 타서 화를 꾸미려고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또 말하기를, ‘내가 만약 권력을 쥐고 대비가 정사를 돌본다면 내가 심이기(審食其 한 나라 여후(呂后)의 정부로 궁중에서 늘 거처하였다)가 되는 것도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며, 마땅히 원상(院相)이 되어 궁중에서 온 나라의 일을 결정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렇듯 허균의 불량하고 패려하고 흉악한 죄는 머리털을 뽑아서 죄를 세어도 세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큰 논의가 이미 정해졌으니 비록 허균과 같은 흉악한 도적의 도움이 없더라도 또한 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원컨대, 허균이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하여 의창(義昌)을 임금으로 세우려고 한 죄와 이의(李㼁)를 끼고 대비를 수렴청정 시키고자 한 죄를 추궁하기 바랍니다.” 하였다.《청야만집(靑野謾輯)》
○ 기준격의 두 번째의 소에, “허균은 마음속으로 전하께서 왕위를 반드시 얻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홍로(弘老)에게만 마음이 쏠렸습니다. 홍로는 병오년 후에 심엄(沈㤿)과 혼인했으니 심엄의 아들 정세(挺世)는 바로 김제남의 사위입니다. 홍로가 심엄과 혼인한 것도 또한 제남과 이의를 위한 것으로서, 허균과 홍로가 있는 힘을 다하여 드디어 심엄의 집과 뜻이 합하였던 것입니다. 무신년 무렵에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시니, 심엄이 놀라서 자살했는데 사람들은 목매어 죽었다고 했습니다. 우영(友英)은 허균의 처삼촌이고 광세의 가까운 친족입니다. 허균과 우영이 서로 친한 것은 온 나라 사람이 다 알고 있으니 실상 두 사람은 한 마음이 된 것입니다. 그(허균)가 또 심정세와 윤수겸(尹守謙)의 혼인을 주장했으나, 신 때문에 이루지 못했으므로 신의 집을 두려워하고 미워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계자(啓字)를 찍지 않고 내려 보냈다. 《응천일기》
○ 좌참찬(左參贊) 허균의 소에, “신(臣)이 밖에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어두운 속에서 장정이 울타리 밑에 매복해 있다가 손을 움직이려 하는 즈음에 말 뒤에 있던 종이 이를 알고, ‘도적이야!’ 하고 고함을 치니, 도적이 도망갔습니다. 마음 사람을 모아 수색해 잡았는데 처음에는, ‘문창(文昌 유희분)’ 집 종이라.’ 하더니 다음에는, ‘정승댁의 종이다.’ 했습니다. 어느 정승댁이냐고 강력히 추궁하였으나 대답하지 않기 때문에 포도청으로 송치하였습니다. 어제 일선위(一善尉)의 여종이 풀어주기를 청하면서, 또 그 놈은 문창의 집에 출입하는 털옷 만드는 자[毛衣匠]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이에 신이 ‘내가 폐론을 혼자 맡았기 때문에 원수된 사람이 나를 미워하여 당(唐) 나라 이사도(李師道)가 배도(裵度)를 암살하려던 일을 행하고자 하는 것인데, 어찌 남의 부탁을 듣고 도적을 놓아주겠는가.’라고 여겼습니다. 대장들이 미루면서 지금까지 국문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권세 있는 사람과 굳게 결탁했으며 어떤 일을 하려고 한 정상을 이에 의거해 알 수 있습니다. 신은 기반이 약한 사람으로서 화근을 제거해야 된다는 의논을 힘써 주장했으므로 의논을 달리하는 사람이 신을 죽이고자 한 지가 오래였습니다. 지금 기가(奇家)의 원망과 사주로서 흉악한 소를 올렸고 이각(李覺)은 신과 평소부터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한 사람인데, 지난번의 아뢰는 글에는 임금을 위태롭게 하려고 모의한다는 ‘모위군부(謀危君父)’ 네 글자를 스스로 지어서 신에게 덮어 씌웠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기준격의 소가 내려오지도 않았는데 이각이 어떻게 미리 알고 문득 불측한 죄명을 덮어 씌우는 것인지 의심됩니다. 이에 신이 자진하여 국문을 받아 대질하려고 했으나 자객(刺客)이 횡행하면서 신을 먼저 제거하려고 하니 죽는다면 신의 지극한 원통을 씻을 길이 없습니다. 대개 자헌(自獻)이 반드시 신을 죽이고자 한 이유는 바로 입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계축년에 변고가 일어난 초기에 서궁(西宮 대비)의 흉악ㆍ패역한 정상이 이미 드러났기 때문에 신이 기자헌에게, ‘이는 신하로서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이니, 어찌 대비의 자리에 두어 인륜(人倫)을 멸망시키도록 하겠느냐.’고 하니 기자헌은, ‘이런 말을 하지 말라. 김제남이 사리에 어둡고 유약하니 어찌 비상한 모의를 했으랴. 대궐 안에서 저주했다는 것은 어찌 궁인들이 하고서 대비 앞으로 화를 전가한 것이 아닌지 알 수 있으랴. 하물며 심우영의 공초(供招)에 별다른 말은 없는데 양갑(羊甲)이 응서(應犀)의 계책에 자신이 횡사(橫射)함을 분노하여 나라에 난(亂)을 끼치고자 이런 흉악한 설(說)을 한 것이다. 저들이 비록 반역을 하고자 한들 누가 따르려 하겠는가. 만약 만세(萬歲) 후에 정론(正論)이 일어난다면 비록 오늘날의 이 일을 한 사람의 자손들이라도 어찌 얼굴을 들 수 있으랴. 나의 외조부는 임백령(林百齡)인데, 지금 사람이 을사년의 일을 말하게 되면 내 얼굴이 붉게 되니, 그대는 이런 의논을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기준격의 소는 신이 알지도 못합니다. 기준격이 신에게 배웠으니 가르치는 일 외에는 나이 어린 사람과 시국에 대한 일을 말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이 흉악한 소에 거론된 불측한 말을 그에게 했겠습니까. 그가 만약 이 말을 들었다면 어찌 일찍이 고하지 않고 제 아비가 죄를 입을 때에야 발론한단 말입니까. 신을 기자헌ㆍ이각 등과 함께 옥에 가두어 서로 대면하여 규명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응천일기》
○ 삼사가 합계하기를, “기준격은 허균이 임금을 위태롭게 하려 한다고 글을 올려 반역을 고발했으니, 실제로 그 일이 있다면 허균이 대역죄인이 되는 것이요, 날조하여 무고했다면 준격이 또한 대역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대역죄인이니 역적 토벌하는 일은 일각이라도 늦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준격 소 두 번 올려졌고 허균도 또한 이미 소를 바쳐 자기 변명을 했는데도, 국문하라는 명령이 지금까지 늦추어지고 있습니다. 준격의 소는 실상 자헌이 시켜서 나온 것이니, 기자헌ㆍ준격ㆍ허균을 모두 국문하여 실정을 캐내어 귀신과 사람의 분노를 풀 것을 청합니다.” 하니,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응천일기》
○ 이문학관(吏文學官) 이원형(李元亨)이 은밀히 소를 올려 아뢰었다.
○ 28일에 전 훈도 김대하(金大河)가 소를 올려, 기준격이 거짓으로 꾸며서 소를 바쳐 큰 공신을 무함하고 해친 죄를 다스리도록 청하였다.
○ 호군(護軍) 이문전(李文荃)이 은밀히 허균을 구제하는 소를 올리니 계자(啓字)도 찍지 않고 내려 보내었다.
○ 무오년 1월 14일에 유학(幼學) 김탁(金琢)이 소를 올리기를, “역적을 토벌하는 큰 의리는 지극히 엄하고도 중대하여 죄가 종묘사직에 관계되니, 임금을 해치려고 모의를 했다면 비록 서궁(西宮 대비)의 명칭과 지위로서도 오히려 보전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신하로서 반역을 모의할 수 있겠습니까. 기준격과 허균 등이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한 사건은 대역에 관계되니, 진위의 여부를 마땅히 빨리 추궁해야 될 것인데도 조정의 신하들이 오히려 국문하기를, 청하지 않으니, 우선 삼사가 당파를 두둔한 죄를 먼저 다스리고, 다음은 조정의 훈신, 척신(戚臣)들이 권세 있는 사람에게 겁을 내어 감히 토벌을 청하지 않은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 16일에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이 2품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지난 번에 대간이 합계한 기준격이 반역을 고발한 것과 허균이 자기 변명을 한 상소는 모두 아주 중대한 일이므로 끝내 덮어둘 수 없는 것이지만, 지금은 대론(大論)이 한창 일어나는 시기여서 다른 일은 돌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제 성균관 유생들이 소를 올려 아뢴 바에 의하여 이미 흉서 사건을 대궐 뜰에서 국문하게 되었으니, 전일 사헌부의 장계에 의거하여 기준격과 허균을 아울러 국문하여 사실을 캐어 법대로 다스리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때 성균관의 소로써 원궤(元簋) 등을 잡아 와서 국문했기 때문이다.
○ 18일에 유학(幼學) 유시영(柳時榮)의 소에, “대사간 윤인(尹訒) 등이 피혐한 말은 모두 허균의 죄를 두둔한 것이니, 윤인ㆍ임건(林健)ㆍ한영(韓詠)ㆍ박종주(朴宗冑)가 마음속으로 좋아하며 역적을 두둔한 죄로 목 베이고, 다음은 의정부로 연달아 아뢰지 않고 한번 아룀으로서 체면만 조금 세우려고 한 죄를 다스리고, 아울러 허균과 준격을 국문하여 실정을 캐내어 형벌을 시행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 삼사가 합계하여, 아뢰기를, “역적을 토벌하는 법은 시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어찌 정청(庭請)하는 날이라고 해서 덮어 두고 묻지 않습니까. 기자헌을 잡아다가 허균ㆍ준격과 한꺼번에 모두 국문하여 그 사실을 추궁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전에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한 것은 장차 처치하려는 뜻이 있었다. 선조(先朝) 때부터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전교를 내린 적이 있으나 한 사람의 대관(臺官)도 글을 올려 재촉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지금 준격이 반역을 고발한 일도 반드시 자세히 추궁하여 처리할 것이다. 준격이 10년 후에 고발했으나 준격 등은 이미 도망갈 사람이 아니니 위에서 마땅히 헤아려서 처리할 것이다. 너희들이 대론(大論)과 이것을 조섭(調攝)하여 굳이 번거롭게 한꺼번에 하라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이냐. 누가 이를 주장했느냐. 매우 시끄럽다.” 하였다. 《청야만집(靑野謾輯)》
○ 2월 8일에 유학 박민준(朴敏俊)이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기자헌이 몰래 배반할 마음을 품고 뒷날 제왕이 되는 복을 도모하고자 하여, 그 아내를 백세(百世) 동안이나 임금이 난다는 경주에 장사지내고, 그 집을 천년 동안이나 왕기(王氣)가 끝나지 않는다는 땅에 지었으니, 임금을 잊고 역적을 두둔하는 실상이 이에 모두 드러났습니다. 어사를 보내어 잘 살펴서 무덤을 파고 집을 헐고 이어서 자헌의 삼부자를 목 베어 신하로서 흉악한 소행을 행하는 죄를 경계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청야만집》
○ 이때 대비를 폐하자는 의논이 한창 일어났는데, 허균은 또 이이첨과 승부를 걸고 서로 배척하였다. 위의 폐대비(廢大妃) 조 아래에 자세하다.
○ 윤 4월 3일에 진사 곽영(郭瓔)의 소에 “신이 듣건대, 간악한 적신 이이첨은 경희(景禧)와 굳게 결탁하여 친형제와 같았습니다. 의금부에서 명을 받들고 경희를 이첨의 집에서 잡아 올 때에 두세 번이나 이첨이 경희에게 은밀히 말한 것이 무슨 모의인지 알 수 없으나, 임금의 신임을 받는 중신(重臣)으로서 흉악한 역적과 몰래 결탁하였으며, 또한 ‘내가 죽으면 너고 죽고,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는 말이 경희의 입에서 나왔는데도 시종토록 곡진하게 두둔하여, 왕법(王法)을 폐지하게 만들고, 살아 있을 때는 정상적인 형벌을 집행하지 못하게 하고, 죽고난 후에도 추형(追刑)하지 못하게 하여 반역을 고발한 사람을 죽여서 보복하려는 생각을 하니, 이첨은 경희에게 무슨 사정이 있기에 이처럼 곡진히 비호하는 것입니까. 근래에 서궁에 관한 의논은 더할 수 없이 큰 일인데 애초에는 이첨이 실상 이를 주장하여 논죄하기를, ‘당(唐) 나라 종묘에서 무후(武后)의 죄를 논하는 것(죽이는 것)은 비록 부득이한 일이었지만, 한(漢) 나라 조정의 폐출(廢黜)은 어찌 관대한 은전(恩典)을 따르지 않았던가.’ 했으니, 그 뜻은 대개 바로 폐출하는데에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찌하여 이미 그 의논을 주장하면서 이름만은 도피하고자 합니까. 정청(庭請)이 발론되자 고의로 발뺌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대비의 칭호를 삭탈하려는 즈음에는 거짓으로 우물쭈물하는 뜻을 보였습니다. 뒤의 일로 본다면 앞의 의논을 주창한 것은 역적 토벌에 마음을 쓴 것이 아니며, 앞의 일로 본다면 뒤의 우물쭈물한 것도 또한 대비를 용서하는 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과 뒤가 반복이 되고, 이 일과 저 일에 일정함이 없으니, 신의 견해로 본다면 이첨은 서궁의 살덩어리 하나를 가지고 임금을 팔고 제 몸을 이롭게 하는 기이한 보화로 삼았고, 화의 단서를 남에게 전가하고 폐모(廢母)라는 이름은 임금에게 돌아가게 하여, 슬쩍 자취를 가리고 제멋대로 하여 꺼림이 없습니다. 또 삼가 듣건대, 이첨이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밀지(密旨)가 이와 같으니 내가 장차 어찌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한 번 전해지고 두 번 전해지니 모든 사람이 시끄럽게 떠들기를 ‘서궁에 관한 대론(大論)은 임금께서 하고자 한 것이요, 실상은 이첨이 한 것이 아니다.’ 하니, 임금을 속이고 거짓을 꾸미며 음험하고 간사함이 한이 없어 지금 목베지 않으면 장래에 화가 헤아릴 수 없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중요한 자리에 널리 자리잡고 앉아 권세를 쥐고 있는 자는 모두 이첨의 도당(徒黨)입니다. 과거에서 사정을 쓰는 폐단은 비록 이첨의 작은 허물이나, 나라에서 인재를 뽑는 과거를 사문(私門)의 당파를 심는 도구로 삼아서 선비의 기풍을 떨어뜨리고 나라의 명맥을 해쳤습니다. 따라서 조정은 모두 이첨의 심복이요, 성균관과 사학(四學)은 모두 이첨의 우익(羽翼)이니 혹시 뜻밖의 일이 발생하더라도 누가 전하를 위하여 말하겠습니까. 더욱 마음이 상하고 뼛속까지 아픈 것은 광릉(光陵 세조의 능)에서 오는 사람이 모두 말하기를, ‘익엽(益燁 이첨의 아들)의 집을 지을 적에 능참봉(陵參奉)에게 강제로 명령하여 능군(陵軍)과 능 아래 사는 백성들을 동원해서 능의 나무 수백 여 그루를 베었다.’ 하니, 다른 여러 능도 이로 미루어 보면 알 것입니다. 지금 두 궁전을 건축하는 데 있어 나무 한 개 값이 백냥이나 되고 호서와 관동의 역군들이 서로 잇달아 죽고 상처를 입으면서도 가까운 능(陵)에는 나무를 베지 않았는데, 이제 간사한 놈에게 도둑을 맞게 되어 화근을 만드는 소굴을 짓게 했으니, 나무가 분노의 기색을 띠고 산릉(山陵)이 슬픔을 머금으며 지나는 사람도 눈물을 떨어뜨립니다. 가령 장릉(長陵)의 무덤 흙을 옮기더라도, 누가 이를 금지하겠습니까. 압도(鴨島)의 지역은 경기도 이내의 이름난 곳으로서 조종 때에 선공감에 소속시켰었는데, 이첨은 감히 제가 빼앗은 역적의 물건으로서 국유의 땅(압도)을 몰래 바꾼 뒤 높다란 누각을 지어 경치 좋은 곳을 차지했으며, 섬 옆의 천한 자들에게 관작을 주어 결탁하였으니 이른바 ‘광릉참봉(光陵參奉)’이란 것이 그 중의 하나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장래에 무엇으로서 이첨의 끝없는 욕심을 충족시킬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민인길(閔仁佶)ㆍ기준격(奇俊格) 등의 소에 ‘경운궁(慶運宮)에 글을 던져 넣은 자도 허균이고, 경준(耕俊)의 격문을 초한 자도 허균이고, 홍로(弘老)에게 모의를 통한 자도 허균이다.’ 하니, 어찌 한 사람의 몸에 모든 악(惡)이 모였는지 마땅히 잡아다가 그 사유를 명백히 조사하여 시비를 통쾌하게 결정하여, 여러 사람의 울분을 풀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용납하여 결단을 내리지 않으시니, 신은 전하께서 무엇이 아까워서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혹시 이첨에게 방해를 받아 그러한 것이 아닙니까. 아아, 전에는 경희를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도 형벌하지 않고, 뒤에는 허균을 마땅히 국문해야 하는데도 국문하지 않아서 난신(亂臣)들로 하여금 두려움이 없게 하고 대의를 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대론을 꺼내어 전하를 속였다가 마침내는 슬그머니 물러남으로서 나라 사람들을 속였으니, 지금 도모하지 않으면 장차 속이는 데만 그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신이 듣건대, 임금과 어버이에 대한 의리는 같다고 합니다. 신의 아비는 지난 을사년에 나라의 은혜를 입어 참봉이 되었으나, 영경(永慶)이 나라의 정무를 맡은 것에 분개하여 드디어 멀리 떠나 돌아오지 않고, 산에 들어가 문을 닫고 있은 지가 14년이나 되었습니다. 늙고 병들어 목숨만 겨우 붙어 있으니, 비록 신의 죄는 벌을 받을지라도 늙은 아비에게는 연좌시키지 말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곽영은 풍기(豐基) 사람으로서 참봉 곽진(郭瑨)의 아들이다. 과거에 역적 허균의 집에 드나들면서 여러 번 대비(大妃)를 폐하자는 상소에 참여하니 그 아버지가 크게 노하여 쫓아 내었다. 이에 마지 못하여 이 소를 올린 것이다. 이첨이 곽영을 의금부에 가두었더니, 형을 한 번 받고난 후에 곧이어 마마[痘]에 걸려 옥 안에서 죽었다. 《명륜록》
○ 소명국(蘇鳴國)이 공초에 관련되었기 때문에 잡아다가 국문하였다.
○ 14일에 임금이 기준격의 소를 국청(鞫廳)으로 내려 보내었다. 이에 삼사가 합계하기를, “빨리 잡아다가 국문하여 나라의 형벌을 통쾌히 시행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 17일에 삼사가 합계하기를, “기준격의 소가 아직 내려 오지 않았을 때에는 소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혹시 어떠어떠한 말이 있었지만 중대한 사안이기에 감히 쉽게 죄를 논하지 못했습니다. 소가 이미 내려 온 후에는 패역하고 무도하여 차마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을 수 없는 말이 한없이 낭자하고 무궁합니다. 이에 신하된 자가 불행히 이것을 보고 죄인을 잡기 전에 어찌 감히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습니까. 빨리 잡아다가 국문하여 죄인을 반드시 잡게 하소서. 우참찬 이각(李覮)은 본래 흉악하고 음험하고 패역한 자로서 홍로(弘老)의 심복이 되어 다행히 형벌을 면하고, 다시 재신(宰臣)의 반열에 끼었는데도 오히려 올빼미의 성질을 고치지 않고 뱀의 독기를 부리며, 같은 무리를 끌어들여 여러 흉악한 무인과 굳게 결탁하여 명국(鳴國)을 사냥개로 삼고 곽영(郭瓔)을 앞잡이로 삼아 몰래 귀신의 굴 속에 모여서 나라를 망칠 계책을 부리려고 이이첨에 대하여 밀지를 널리 퍼뜨리고 대론(大論)을 우물쭈물 한다는 말을 만들어 내어, 흉악한 소를 지어 위로는 임금을 불측한 지경에 빠뜨리고, 아래로는 충성스럽고 절개 있는 신하를 망령되게 중상하려다가 간악한 꾀가 미처 이루어지기 전에 흉한 서찰이 먼저 탄로났습니다. 어제 역적 곽영이 자백한 공초에도 이각은 여러 장(長)이 우두머리라 하였으니, 빨리 잡아다가 국문하여 법에 의거해서 귀신과 사람의 울분을 풀어주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14일에 국청(鞫廳)으로 내려 보낸 기준격의 소를 보니, 그 글의 내용이 모두 임금을 침범하려는 대역무도한 것이므로 극히 음흉하고 참혹하여, 차마 말로 할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을뿐더러 뼈가 시리고 머리털이 꼿꼿이 섭니다. 기준격의 말이 만약 옳다면 허균은 마땅히 대역무도의 법률에 의하여 처벌해야 될 것이요, 만약 무고라면 준격을 마땅히 대역무도의 법률로 처벌해야 될 것이니, 국문하여 실상을 내내는 일을 잠시라도 늦출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날에 밀갑(密匣)의 봉함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잡아다 국문하기를 아뢰었으나 잡아오라는 명이 내리지 않았으며, 3, 4일이 되도록 아무런 명이 없으니 신등는 삼가 의혹이 생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노라.” 하였다. 《명륜록》
○ 29일에 삼사가 합계하기를, “허균은 천지 사이의 한 괴물입니다. 경운궁(慶運宮)에 투서한 것과 온갖 반역의 죄상은 이미 민인길(閔仁佶)의 고발에 나타났고, 홍로(弘老)와 굳게 결탁하여 공궁을 해치려고 한 것은 또 기준격(奇俊格)의 소에서 나왔습니다. 허균이 짊어진 죄명은 곧 오늘날의 신하된 입장에서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입니다. 초봄에 2품 이상의 관원이 정청(庭請)한 것과 근일 의금부에서 특별히 아뢴 것도 모두 이런 취지에서 나왔습니다. 신하로서 이런 죄명을 짊어지고 있으니 그 목을 베는 것만으로는 오히려 시원하지 못하고, 그 살코기를 먹어도 오히려 만족스럽지 못한데, 감히 초헌(軺軒)을 타고 구사(丘史 하인)를 거느리고 길에서 벽제하면서 보통의 재상처럼 행동하니, 나라 사람이 모두 분개하고 있습니다. 설령 이런 죄악이 없다고 하더라도 언관의 국청을 기다릴 것도 없이 자청해서 옥에 나아가 사실을 밝혀내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이렇게 할 생각은 고사하고 도리어 천지 사이에 용납되어 형벌을 교묘히 면하려고 죽을 상황에서 살 길을 찾느라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이에 대론(大論)을 거짓으로 핑계대어 반역의 간계(奸計)를 도모하니 사류들도 기만을 당하고 여러 유생(儒生)들도 모두 그 술수 속에 빠졌습니다. 전후의 소장(疏章)을 자신이 스스로 지어 온 나라 공공(公共)의 의논을 가지고 자기의 공을 세우는 터전으로 삼아 위로는 임금의 귀를 현혹시키고, 아래로는 조정을 어지럽혀 공경대신으로 하여금 그 직위를 불안하게 만들고 삼사를 공갈하여 그(허균)의 명령을 듣도록 하게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거의 이루어진 대론이 다시 흔들려지고 정론(正論)을 주장하는 사람이 오히려 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폐출하자는 것이 어떠한 의논이며 난역(亂逆)이란 것이 어떠한 죄상인데 감히 무리를 모아 이익으로서 꾀어 대론을 주장하려고 한단 말입니까. 당당한 국가에서 어찌 이러한 한 도깨비 같은 자를 용납하여 제 마음대로 놀아나고 변활ㄹ 부리도록 맡겨 두어, 이런 극단의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까. 하물며 허균의 일생 동안 한 짓은 온갖 악이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인륜을 문란하게 하고 행실을 난잡하게 하여 다시 사람이라 할 수 없고, 요망한 일을 일으키고 참언을 조작하는 것은 바로 그의 장기로서 이것은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바입니다. 또한 대질하고 신문하기 전에 유생을 사주하여 소를 올리고 감히 요동에 가기를 청했으니, 그 속셈이 어디에 있는지 불을 보는 듯이 명백합니다. 따라서 먼저 허균과 민인길과 기준격의 관직부터 삭탈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명륜록》
○ 형조 판서 허균이 남을 해칠 마음을 품고, 먼저 공을 세워 나라의 권세를 제 마음대로 움직이고자 하여 정사년에 연경(燕京)으로부터 돌아와서 말하기를, “중원(中原)에 《임거만록(林居謾錄)》이란 책이 있는데, 우리나라 종계(宗系)의 무함된 것이 지금까지 개정되지 못했습니다.” 하니 광해군이 놀라며 의혹하여, 즉시 허균에게 가서 개정하도록 명하여, 허균이 금은ㆍ보화를 많이 싣고 갔다가 왔는데, 저쪽과 이쪽의 인장[印]을 조작해 찍어서, 황제의 결정을 얻었다고 보고하니, 광해군은 크게 기뻐하여 대사면령을 내리고 증광시(增廣試)를 설시했으며, 백관들은 임금께 조하(朝賀)하고 존호를 올렸으나, 심정승(沈政丞) 희수(喜壽)는 역적 허균의 실정을 알고 동료에게 말하기를, “이전 기축년에 이미 다 변무(辨誣)되었는데, 오늘날 또 무슨 변무인지 알 수 없고.” 하니, 허균이 매우 감정을 품고 심정승을 무함하여 내쫓았다. 심정승이 성문 밖으로 나가면서 눈물을 흘리며,
벼슬이 버린 것이 아니라 벼슬에서 쫓겨나니,
강산 어느 곳에 의지할고.
작은 배를 사려해도 돈이 없고
상자에는 다만 옛날 입던 조복(朝服) 뿐이네.
[出宮非是棄官歸 回首江山何處依 欲買小舟無片價 傾箱惟有舊朝衣]
하였다. 《속잡록》
○ 이때 서울의 인심이 흉흉하고 조정과 민간에서 시끄럽게 내란이 곧 임박했다고 소문이 전해지면서, 피란짐을 지고 잇달아 성 밖으로 나갔다. 이에 장령 한명욱(韓明勗)의 아룀으로 인하여 하인준(河仁浚)을 잡아서 국문하니 인준이 허균을 끌어들이니 허균이 일일이 공초했는데 대비를 폐할 것을 말하면서 이내 대궐을 범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었다. 《일사기문(逸史奇聞)》
○ 허균은 처신이 요사스러워 상중에 있으면서 기생과 관계하고, 참선(參禪)하고 부처에게 절하여, 남의 이목에 해괴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만년에는 대북당(大北黨)에 들어가서 김개(金闓)ㆍ신광업(辛光業)을 심복으로 삼고 하인준ㆍ황정필(黃廷弼)ㆍ이국량(李國樑)ㆍ서상안(徐尙顔)ㆍ남정엽(南正燁) 등은 그 문하에 몰려들어 열 명씩 백 명씩 무리를 지었다. 《하담록(荷潭錄)》ㆍ《일사기문》
○ 허균은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아들이다. 젊은 나이에 참서(讖書)를 지어 은밀히 세상에 전했는데 모두 흉하고 참혹한 말이었다. 문장은 한 시대에서 남이 따를 수 없이 뛰어났으나, 사람이 경박하여 행실이 좋지 않아 선비들의 공론에 버림을 당하고 말직에서 승진되지 못하였다. 광해군의 정사가 문란하니 이이첨에게 붙고 공중에 붙어 갑자기 참찬(參贊) 벼슬에 오르자, 드디어 끝없는 욕심을 내었다. 무오년 무렵에 북로(北虜)의 침범이 일어나자 중국에서 군사를 동원하니 우리나라는 건주(建州)에서 매우 가깝기 때문에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는데 허균은 긴급히 알리는 변방의 보고서를 거짓으로 만들고 또 익명서를 만들어, “아무곳에 역적이 있어 아무 날에는 꼭 일어날 것이다.” 하여 성 안 사람을 공갈할 뿐만 아니라, 밤마다 사람을 시켜 남산에 올라가서 부르짖기를, “서쪽의 적은 벌써 압록강을 건넜으며, 유구국(琉球國) 사람은 바다섬 속에 와서 매복하였으니, 성 안의 사람은 나가서 피하여야 죽음을 면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또 노래를 지어, “성은 들판보다 못하고, 들판은 강을 건너니만 못하다.” 하였다. 또 소나무 사이에 등불을 달아놓고 부르짖기를, “살고자 하는 사람은 나가 피하라.”고 하니, 인심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아침저녁으로 안심할 수 없어 서울 안의 인가(人家)가 열 집 가운데 여덟아홉 집은 텅 비었다. 그 무리 하인준을 시켜, 새벽에 지평(持平) 한명욱(韓明勗)을 보고 “익명서가 숭례문에 붙었으니 반드시 틈을 노리는 흉악한 도적이 있는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때는 날이 아직 밝지 않아 글자를 보기어려울 시각이었기 때문에 명욱은 마음속으로 의심하여 날이 밝음을 기다려 대궐에 나아가다가 숭례문에 이르러 벽에 붙은 글을 보니, 과연 인준이 말한 것과 같았다. 이에 임금께 청하여 인준을 국문하니, 인준이 그 무리 현응민(玄應旻)과 낱낱이 자백하여 허균과 그 무리들이 모두 옥에 갇혔다. 이첨은 허균을 국문하면 공초가 저에게 관련될까 두려워하여, “인준 등이 모두 자백하여 다시 신문할 만한 사실이 없으니 바로 저자거리에서 목 베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하담록(荷潭錄)》
○ 8월 24일에 허균ㆍ하인준ㆍ김윤황(金胤黃)ㆍ우경방(禹經邦)ㆍ현응민(玄應旻)이 사형당하고, 26일에는 이정필(李廷弼) 등이 사형을 당하였으며, 김우성(金宇成)ㆍ이국량(李國樑)은 모두 처자까지 연좌되었다. 《박몽준(朴夢俊)》도 죽었다.
○ 김개(金闓)는 곤장을 맞아 죽고, 신광업(辛光業)ㆍ원종(元悰)ㆍ이강(李茳) 등은 먼 곳으로 귀양갔다. 계해년에 인조가 반정하고 원종과 이강을 모두 저자에서 목베었다.
○ 숙종 무오년에 병조 판서 김석주(金錫冑)가 아뢰기를, “옛 좌윤이었던 김개는 비록 정청(庭請)에는 참여했으나, 옥에 갇혔을 때 이미 아무런 단서가 없었으며, 또 어둡고 우매한 군주 때 죽었으니, 계해년 후에 사형 받은 죄인과는 다릅니다. 따라서 직첩(職牒)을 다시 내려주심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