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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토) 오후 2시 대전 배재대학교 자연과학관 120호 강의실. 전교조 대전지부(지부장 성광진)와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지부장 이규봉 배재대 공대교수)는 서울대 미대 김민수 교수를 초청해 '상처 난 역사와 치유로서 디자인'이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펼쳤다. 이날 강의에 나선 김 교수는 "디자인이란 삶을 은폐하고 미화하는 장식 행위가 아니다. 디자인은 한낱 '기술적 잔 재간'이 아니라 '마음을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전제하고 "디자인에는 디자이너의 마음에서 우러나와 사용하는 이의 마음으로 전달되어, 개인과 사회 공동체의 마음을 함께 움직이는 놀라운 '에너지'가 존재한다'고 역설했다. 김 교수의 강의 내용을 꼼꼼하게 경청하여 그 중 일부를 싣는다.
대한민국 화폐에 나타난 인물화의 문제점
"주머니에서 만원권이든 천원권이든 아무 것이나 꺼내 보십시오." 청중들은 저마다 지폐를 꺼냈다. 이어 만 원짜리 지폐가 화면에 등장한다. 만 원짜리 지폐에 등장하는 인물은? 세종대왕 어진이다. 어진이란 임금의 초상화를 말한다. 누가 그렸을까? 운보 김기창이 상상하여 그렸다. 문제점이 무엇일까? 하나는 세종의 어진은 진품이 아니라는 것, 또 하나는 일제 친일 화가의 그림이라는 것이다. 친일 행각을 벌인 작가가 그려 대한민국 지폐가 지닌 상징성이 훼손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천 원짜리 지폐를 한 번 보실까요?"
그렇다면 백 원짜리 동전에 그려진 이순신 장군은 누가 그린 그림일까? 이당 김은호의 또 다른 수제자 월전 장우성의 작품이다. 친일화가 월전은 유관순 열사 그림까지 그렸는데, 실제 유관순 열사보다 얼굴이 넓고 마음을 담지 않고 그린 그림이라는 것이 비교 화면으로 뚜렷하게 제시된다. "우리 모두 유관순 열사의 처지로 돌아가 생각해 볼까요? 자신의 모습과 다르지, 친일파가 그렸지, 귀신이 곡할 일 아니겠습니까?"
화폐는 나라의 얼굴이다. 친일화가들의 그림으로 화폐를 장식하다니 도대체 우리의 민족 정기와 정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디자인은 장식이 아니라 마음을 담는 그릇이다. 국가 정체성의 핵심을 문화라고 본다면 우리의 문화는 친일화가에 의해 훼손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화폐에 어떤 인물을 담아야 할까? 김 교수는 "'김구 선생, 유관순 열사, 안중근 의사 등 우리 주위에서 찾아보면 얼마든지 훌륭한 분들이 있다. 그 분들을 기득권층이 '시대에 불온하다'는 정서로 홀대하면서 우리 화폐에 담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김 교수는 부러움에 찬 시선으로 네덜란드의 화폐와 유로화 그림을 제시한다. 그들의 화폐에 담긴 예술가들, 그들만의 문화들, 건축물들,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그린 그림 등 모두가 새롭고 그들 국민의 정서를 반영한 것들이다.
김 교수는 우리의 생활 공간도 삶에서 우러나온 디자인으로 꾸민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우리 주변을 바라보면? 김 교수는 자연스럽게 볼 수 없고 온몸으로 교감할 수 없는 청계천을 놓고 전시행정의 산물로서 디자인으로 보면 문제라고 지적했다. 시내버스 공공 디자인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꼬집었으며, 경찰청 포돌이 포순이의 디자인에 일본 사람들이 그린 눈알 큰 아톰의 이미지가 침투되어 있다고 설파한다. 일본의 스모체를 닮은 듯한 한 소주회사의 글씨체도 도마에 올랐다. "역사교과서 왜곡은 문구를 바꾸면 되지만, 시각 디자인은 사람의 의식 전환을 하는 데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지적이다.
이밖에도 김 교수는 전국 시도별 로고나 캐릭터가 지닌 왜색풍이나 개성 없는 기존의 도안식 디자인에 혀를 내두른다. 깊이 있게 공감하며 청중들의 수긍과 탄식이 이어졌다. 강의 후반 김 교수는 한국 영화의 도약에 감탄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삶의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류 열풍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우리의 진실된 삶의 모습이 다름 사람에게 감동으로 나타날 때 그것이 진정한 한류'라는 것이다. '그 동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보고, 남들이 흉내 내지 못하는 우리만의 정체성을 찾아내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며 김 교수는 강의를 마쳤다. 나를 포함하여 모든 청중들은 힘찬 박수를 보냈다. 끝으로 김 교수가 나누어준 자료집 가운데 일부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김 교수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학맥과 인맥에 얽혀 획득한 기득권과 정치외교술 대신에 실력으로 평가받는 사람이 많아지고 자기보다 새롭고 싱싱한 생각을 하는 이들을 위해 양보할 줄 아는 마음이 이 땅에 존재한다면, 또한 디자인을 통해 일상 삶의 온갖 감정을 자유자재로 추스를 수 있는 다양한 시각언어가 운공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때 세상 사람들은 비로소 디자인이 단순히 무언가를 예쁘게 치장하는 '장식의 잔재주'가 아니라 '삶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문화적 미덕'을 실천하는 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