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보다 아름다운 연기 초년생의 미소
남들은 단 하루만이라도 입어 보고 싶다는 날개옷도 이미 그것을 차지한 주인에게는 벗어 던지고 싶은 때가 있는 모양이다. 대한민국 대표미녀라는 ‘미스코리아’ 타이틀을 위해 지금도 수많은 미용실과 뷰티케어 센터에는 소녀들이 몰려들고 있는데, 김사랑은 그 옷을 벗어 버리겠다고 한다. 지난 2000년도에 미스코리아 진의 왕관을 쓰고 이제 겨우 2년여. 아직은 그 프리미엄을 더 즐겨도 좋을 시간 같은데,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흔든다.
‘미스코리아’의 날개를 접고 진짜 연기자로
“미스코리아 진이 되고 나서 좋은 것도 많긴 많았죠. 어디에서든 알아 봐 주는 것도 기분 좋았구요. 그런데 진짜 원하던 것은 연기자였거든요. 이제는 연기자로 인정받고 싶어요.”
어려서부터 꿈이었던 연기자의 길을 걷게 된 데에도 미스코리아라는 타이틀은 분명 지름길이 돼 줬다. 연기학원을 오가거나 단역과 무명을 거쳐야 하는 각고의 시간도 생략한 채 단박에 주연을 거머쥘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 짜릿한 승리감이 즐겁기도 했다. 아주 잠깐…. 하지만, 달콤한 초콜릿이 어금니의 상아질을 녹여 가고 있다는 걸 눈치챈 똑똑한 소녀처럼 그녀는 금세 그 해독을 경계했다. 연기자에게 필요한 것은 미스코리아표 미소나 완벽하게 다듬어진 황금비율의 외모가 아니라 ‘진짜 연기력’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아직 두려움도 있지만, 이제 그녀는 튜브를 던져 버린 채 맨몸으로 연기라는 차가운 물 속에 뛰어들기로 했다. 남은 선택은 열심히 발을 굴러 떠오르거나 아니면 가라앉는 것, 둘 중 하나. 그녀가 이번에 살아남아야 하는 깊은 물은 SBS 드라마스페셜 [정]. 김석훈, 김지호, 유준상을 비롯해 윤여정, 임예진, 박근형 등 인기와 연기력을 고루 갖춘 선배스타들이 포진해 있는 드라마다. 한창 물이 오른 같은 또래 한채영까지 가세해 김사랑을 더욱 긴장시키고 있다.
김사랑의 새로운 도전, 맨발의 억척소녀 ‘을숙’
이 드라마에서 김사랑이 맡은 역은 여상을 졸업하고 오빠들 뒷치닥거리만 해야 하는 현실에 불만을 지닌, 천방지축 막내딸 을숙이다. 자신을 현실에서 탈출시켜 줄 왕자님을 찾으며 좌충우돌 스캔들을 벌이는 을숙은 김사랑에게 여러 가지 도전을 요구하고 있다.
“감독님이 그러셨어요. 이런 역할을 하고 나면 연기가 확 늘 거라구요. 을숙이는 아주 인간적인 인물이에요. 머리채 잡고 싸우기도 하고 망가지기도 하고 감정표현도 직접적이에요.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요. 미스코리아 출신이 계속 예쁜 척만 하고 나오면 더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겠어요? 좀더 인간적이고 친근한 모습을 보면서 저, 김사랑을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전 오래 할 거니까요.”
오래 가기 위해서는 호흡도 길게 가져야 할 것이다. 기초도 탄탄히 해야 한다. 그래서 그녀는 필요한 모든 것을 찬찬히 준비하고 있다. 아침이면 신문을 큰 소리로 읽어 나가는 요즘 일과도 감독님의 특별 지시에 따른 것이다. 그렇게 또박또박 읽어 ?庸?발음과 발성연습을 하고 있다. 평소 하루도 거르지 않던 운동에 요즘은 댄스강습까지 덧붙였다. 딱 한 신(scene) 나오는 뇌쇄적인 춤 장면을 위해 벌써 한 달째 춤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촬영에 임하는 자세도 많이 달라졌다. 전 같으면 꺼려했을 과감한 장면도 이제 거침없이 나서고 있다. 극중에서 을숙이가 내레이터 모델로 나오기 때문에 짧은 미니스커트와 탱크톱 차림의 아찔한 노출 신도 많다. 어디 그뿐인가?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장면까지 있었다. 이를 악물고 몰입하다 보니 머리카락은 한 움큼이나 빠졌고 무릎은 까지고 팔뚝에는 시커먼 멍까지 들었다. 세 자매의 가운데로 언니와 동생 사이에서 예쁜 옷 한 벌 차지하기 위해서 꼬집고 싸우던 기억으로 열중해 봤다고.
그렇지만 “컷!” 사인이 나고 자리에 돌아온 그녀는 잠깐 걸터앉은 간이의자에서도 허리뼈를 곧게 펴고 턱은 약간 당긴 채 살짝 미소짓는 미스코리아의 우아한 자세로 금세 돌아간다. 탄력 좋은 기능성 속옷처럼 아직은 그렇게 숨길 수 없는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나 보다.
한 발 한 발, 연기자로서의 정점을 향해
이제 그녀는 편하고 빠른 에스컬레이터 대신 맨발에 빨간 생채기가 생기더라도 거친 돌계단을 한 발 한 발 올라가야 하는 그 의미를 알 것 같다. 그래서 김사랑은 하이힐을 양손에 벗어들고 거추장스런 드레스자락은 과감하게 잘라 낸 채, 두 다리로 힘차게 계단을 오르고 있는 중이다. 지금 이 마음이라면 108개쯤 되는 그 계단도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요즈음, 왕관 아래 미소보다 어쩐지 그 건강한 뒷모습이 더 예뻐 보이는 김사랑. 지금은 그녀에게 도전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