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장남에 4대 독자인 아버지인데 그것도 손이 귀한 집에서 아들도 아닌 딸로, 그것도 평범한 아이도 아닌 시각장애인이라는 걸 친척들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너네가 하나님 믿는 다는데 왜 그리 궁색하게 살고, 왜 애는 그모양으로 태어났느냐는 소리는 수도없이 들었습니다. 전에는 이런 이야기 하면 눈물도 많이 났었는데 이제는 그런 눈물도 없는 모양입니다. 저는 그런 환경에서 초, 중학교를 졸업했고 당연히 친구도 없었습니다. 단지 제가 좋아하는 음악 외에는....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시각장애인이 아닌 아주 불쌍한 (?) 동양여자로 생각하고 잘 해 줬습니다. 덕분에 미국 친구도 사귀고 영어도 늘고....그때부터 한국에 대한 모든 메모리를 지우기위해 안간 힘을 썼습니다. 그리고 죽도록 공부했고 결국 명문대 석사, 그리고 박사를 우수한 성적과 전액 장학금으로 마쳤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제가 박사 2년차때 생겼습니다. 불면증에 고생하던 저는 근처 대학병원을 찾아 진단을 받고 놀랐습니다. 격심한 우울증에 공황장애....그리고 몇 칠 뒤 하도 잠이 오지 않아서 수면제 처방약을 다량으로 복용했다가 응급실에서 위세척하고 바로 정신병동에 입원했습니다. 생각보다 저 같은 사람들이 거기 많이 있다는 걸 그때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곳에서 5일을 보내면서 생명의 소중함 그리고 인생의 가치를 다시 배웠습니다. 그리곤 그 다음해 미국인 남자친구를 만나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저의 성격적 결함과 정신적인 문제때문에 지금은 해어졌지만 전 진심으로 그의 앞날을 지금도 축복하고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미국에서 조그마한 2년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강사로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제가 어떻게 될 지는 모르지만 이 글을 읽으시는 분 들....정말 삶을 포기하고 싶을때 혼자서 앓치 마시고 꼭 도움을 청하시도록 부탁드립니다. 신께도...그리고 사람에게도...제가 좀 더 일찍 도움을 청했더라면 지금보다 아마 더 나은 삶을 살 고 있겠죠.
저는 비록 장애인이지만 지금도 하나님 믿는 튼튼한 가정을 이루는것이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 배우자를 안 주실 수도 있겠죠. 하지만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가 어떤이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듯이 "당신이 살 날이 내일 하루 남았다면?....."전 오늘과 같이 열심히 살 것입니다"
--------------------------------------------------------------------------------
'생활비 압박 - 낙태' 22살 자살을 시도하고...
내 나이 22살. 이제껏 살아오면서 돈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사람을 몰아붙이는 줄 몰랐다. 집안 사정도 어려워 20살이 되면서 생활비는 벌어서 썼지만, 간당간당하게 버티며 살았다. 적자의 구름이 조금씩 몰려오면서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불안했다. 언제 알바비가 들어오나... 하루 종일 그 생각 뿐이었지만, 그런 생각과 동시에 각종 생활비가 빠져나가면 또 적자라는 현실이 날 더 불안하고 초초하게 만들었다.
비상금 하나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주식으로 돈을 날린 사람이나, 회사가 부도가 난 사람들 등등 그런 사람들만 돈 때문에 힘들 줄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생활에 쪼들려 사는 것도 피말리는 삶이라고 느꼈다. 설상가상으로 임신이 되면서 그런 부담감은 더 해져갔다.
낙태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돈이 없어 낙태도 힘든 상황이었다. 어찌어찌 수술비용을 마련한 후 수술을 했지만, 돈이 없어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도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상황이 너무나 슬펐다. 며칠 밤을 하염없이 울었다. 그렇게 슬픈 와중에도 밀려오는 돈에 대한 압박감은 더해져갔다.
내 목을 죄면서 서서히 다가왔다. 디자인과라는 특성상 돈을 써야하는 과라서 학교 다니기에도 벅찼다. 친구한테서 만나자는 연락이나, 친구 생일이 다가오는 것이 미치도록 싫었다. 친구가 태어난 날이 다가오는 것이 그렇게 무서웠던 적이 없었다. 두 세달을 그렇게 고달프게 지내면서 나의 생활패턴은 완전히 망가진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자존심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 말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며 지냈다.
어느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으면 모든 것이 없어질 것 같았다.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달콤한 유혹에 빠졌다.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어서 가장 예쁜 옷을 골라 입고 밖으로 향했다. 무작정 큰 도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두 세발만 내딛으면 편안해 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뛰어들었따.
눈부신 라이트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눈이 서서히 감겼다가 서서히 떠졌다. 아이보리색의 하늘이 보이면서 따뜻한 감촉이 손에서 느껴졌다. 엄마가 내 옆에서 손을 잡고 있었다. 그때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그때 이미 나는 차도를 행하고 있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뛰어 드는 것을 본 운전자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다행이 살짝만 부딪친 탓에 작은 찰과상만 남기고 그렇게 끝난 자살시도...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던 나의 바람은 그렇게 끝이 난 것이다.
그 후로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때의 괴로웠던 기억은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행동을 알게 된 가족이나 친구들은 내게 더 많은 관심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런 나에게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 있었다. 야구... 사실 야구와 같은 스포츠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잘하는 운동도 없었고, 요가와 같은 그런 미용수준의 운동도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친구가 스포츠를 좋아하는 터라 가끔 구경 같은 것을 가면서 흥미가 생겼다. 사실 야구는 게임에 뛰는 사람이 아니면 옆에서 관심도 없는 사람이 지켜보기란 지루한 일이다. 나를 배려한 친구가 캐치볼을 하면서 또는 게임에 조금 조금씩 참여하면서 재미가 붙었다. 운동을 하면서 기력을 되찾았고, 생활에 활력이 되었다.
이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면서 점차 내 문제들은 해소가 되었다. 친구나 상담사, 부모님, 교수님의 말 한마디보다 이렇게 밖에서 뛰면서 땀을 흘리는 것이 내 불안한 마음들을 해소시켜주었다. 그리고 하루하루가 희망차 보였으며, 그런 계기로 나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생기게 되었다. 마냥 손 놓고 비관하기 보다는 무엇인가를 하면서 땀을 흘리는 것이 더욱 값진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즐겁고 건강한 웃음으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한다.
혹시 이 세상 어디선가 자살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정말 불행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지금의 심정을 이야기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두려움 때문에 미처 말하지 못했떤 자신을 발견하면 세상에는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괴로운 일이 있어도 그것을 순식간에 극복할 무엇인가도 존재한다고... 그리고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그것을 찾지 못한 것 뿐이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 '그때 내가 죽었더라면' 자살 경험담 들어보니...
오랜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떠보니 사방은 차디찬 회색빛으로 침대 옆에는 작은 오빠가 슬픈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순간 '내가 죽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그럼 나는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참담한 심정이 들었다. 오빠에 대한 미안함으로 차마 얼굴을 쳐다보기가 두려워서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1948년 화성군 안용면 오목천리 조그만 시골농촌에서 2남 4녀의 막내딸로 태어난 나는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부모형제의 따뜻한 귀여움 속에서 자랐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다음해 우리 집은 고향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에 방앗간을 차려 이사했다. 부모님은 늙으셨고, 큰 오빠는 올케와 나에게 일을 맡기고는 정치판과 여자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방앗간 일에는 소홀히 하였다.
그 시대의 부모들 중에는 딸은 상급학교에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았다. 학교를 안보내주는 아버지와 오빠를 원망 할 줄도 모르고 집에서 일만하다가 나는 점점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작은 오빠의 주선으로 서울에 있는 미용실에서 기술을 배우려고 취직을 했지만 숙식 해결을 못해 몇 달 만에 다시 집에 와야만 했다. 방앗간 일을 계속하며 지내다가 출가한 셋째 언니의 도움을 받아 열여섯에 수원고려고등기술학교 양재과에 들어가 양재를 배우고 졸업 후 수원시내 양장점에 취직했다.
1년 쯤 지나서 장래를 생각해보니 이대로는 내 마음 속 지실에 대한 갈망을 채울 길이 없어 보였다. 그 길로 양장점을 나와서 세탁소에 취직하여 수선을 하며 저녁에 잠깐씩 시간을 내어 디자인과 재단기술 개인지도를 2개월쯤 받은 뒤에 세탁소를 나왔다. 이제는 양장점 공장에서 재봉사 밑에서 일하는 제자가 아니라 조그마한 양장점에 취직하여 내가 직접 재단, 디자인, 점원노릇까지 1인 3역을 하면서 기술과 경험을 쌓아갔다.
그 후에 수원, 인천, 대전, 논산으로 점점 커다란 양장점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능력을 어느 정도 인정받게 되었고 양장점의 지식층 고객들과의 대화의 폭을 넓히며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사회성을 직장생활을 하며 배워갔다. 또 틈틈이 한문공부를 해서 아무도 내가 초등학교 졸업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건강에 힘든 고비를 겪게 되었다. 폐결핵에 걸린 몸을 계속 혹사시키니 피곤이 누적되어 결국 간 기능까지 나빠졌고 병원에서 영양주사를 맞아가며 일을 하다가 직장 생활을 더 이상 못하게 되었다. 몇 년 동안 병든 몸을 이끌고 직장에서 번 돈은 치료비와 내 생활에 다 들어가고 모아놓은 돈은 없고 셋방살이하는 작은오빠와 셋째언니는 부모님대신 신세를 많이 진 상태라 더 이상 기댈 수가 없었다.
큰오빠네 집에 가면 아버지는 계시지만 병 치료를 해주지 않고 용돈도 주지 않아 올케와 함께 방앗간 일을 할 수 밖에 없으니 내가 일을 하지 않고 요양할 수 있는 곳은 단 한군데도 없었다. 나는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약국을 돌아다니며 수면제를 사 모았다. 어리석게도 작은 오빠 집에서 약을 먹었는데 이튿날 병원에서 깨어났다.
그 후에 수원과 서울로 자리를 옮겨가며 또 다시 양장점에서 일을 하다가 1972년 목장을 하시는 시아버님의 소개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젖소 목장을 20년간 하는 동안 딸 둘을 낳아서 키우며 나름대로 단란한 가정생활을 이루었다. 결혼 후에 폐결핵은 완치되었으나, 몸의 모든 기능이 약해져 병원에 자주 가고 허리디스크수술을 사정이 있어 못하고 지내다가 다리가 마비되기도 했다.
그 뒤 척추수술을 두 번이나 하여 지금도 한쪽다리 감각신경에 장애가 있다. 불편함이 있지만 그런 것들은 내가 충분히 감수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어느덧 아이들이 자라서 가정을 이루고 나의 가정생활도 안정되었지만, 배움에 대한 갈망은 잠재울 수가 없어서 60살이 다된 나이에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 졸업자격을 얻어 2008년도에 내 나이 61세 환갑에 수원여자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수시로 합격되어 현재 2학년에 재학중이다.
나는 학교생활에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있으며 졸업 후에도 심리학공부에 계속 정진하여 전문상담가가 되고 싶다. 마음은 간절하지만 늦은 나이에 몸이 힘들어 더 이상 공부를 못할까봐 안타깝다. 가끔 어렸을 적, 약을 먹었을 때를 회상해본다. 자살을 하려했던 것이 큰 죄를 지은 것인 양 생각되어 대학에서 심리학 공부를 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게 숨겼다.
하지만 그런 시도가 수치스럽거나 창피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공부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그 시절 나로서는 최선을 다하여 살아오다가 더 이상 이겨나갈 힘이 없어져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변명을 하고 싶어진다. 나는 지금도 가끔 내 몸이 힘들 때면 그때 일을 생각해보며 눈물을 짓는다.
그때 내가 죽었더라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딸들과 손자들 그리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배움에 대한 성취감을 누려보지도 못하고 힘든 삶만을 살다가 보람 없이 죽었을... 어떤 사람이 나에게 죽고 싶다는 말을 한다면, 최선을 다해 살다가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겨낼 수 있는 만큼의 시련만을 주신다는 성경구절을 생각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오늘 밤에 꿈에서라도 내가 다시 태어날 수 있따면 공부를 마음 껏 할 수 있는 가정에서 태어나 법의학을 공부하여 또 다른 삶을 살아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