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A가 5월 13일부터 6월 18일까지 방송한 월화드라마 ‘크래시’를 봤다. 마침 같은 시간대 본방사수하던 KBS 2TV 월화드라마 ‘멱살 한번 잡힙시다’가 5월 7일 끝나 안성맞춤이었다. 12부작 ‘크래시’는 벌써 끝났나 하는 아쉬움이 생길 만큼 그야말로 재미있게 본 ‘노브레이크 직진 수사극’이다. 나로선 처음 본 ENA 드라마이기도 하다.
‘크래시’는 1회 시청률 2.2%(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이하 같음.)로 출발했다. 나무위키(2024.6.20.)에 따르면 2.2%는 ENA 월화드라마 첫 방송 최고 시청률인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2회부터 상승 곡선을 그렸다. 2회 3%, 4회 4%, 6회 5%, 10회 6%대로 갈수록 시청률이 상승했다. 최종회 시청률은 6.6%다. 이는 최고 시청률이기도 하다.
1회에 비해 3배까지 오른 최종회 시청률의 드라마는 흔치 않다. 그만큼 ‘크래시’를 재밌어하는 시청자들이 갈수록 많아졌다는 얘기다. ‘변방의 ENA에서 톱스타도 없이 성공한 드라마’(앞의 나무위키)라는 평가가 그럴 듯한 이유다. 또한 ‘크래시’는 “최고 시청률 17.5%를 기록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2022)를 잇는 두 번째 성적”(스포츠서울, 2024.6.19.)의 드라마가 됐다.
내가 ‘크래시’를 애써 챙겨본 것은 누구나 본의 아니게 교통사고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현실감 때문이기도 하다. 퇴직한 지금이야 1주일에 한 번 핸들을 잡을까말까하는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만큼 체감(體感)할 수 있는 일상적 이야기에 흥미를 느껴 같은 날 시작한 KBS 2TV 월화드라마 ‘함부로 대해줘’를 일찌감치 따돌리고 본 ‘크래시’라 할 수 있다.
충돌 또는 충돌하다란 뜻의 ‘크래시’는 팀장 정채만(허성태), 반장 민소희(곽선영)와 차연호(이민기)ㆍ우동기(이호철)ㆍ어현경(문희)으로 이루어진 남강경찰서 교통범죄수사팀(TCI) 형사들이 교통사고 가해자들을 일망타진하는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팀원들도 현경만 빼고 모두 교통사고와 직ㆍ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뺑소니차에 치여 아내를 잃었거나(채만), 퇴원하는 걸로 나오는 아버지가 중상을 입었다.(소희) 나중에 밝혀지긴 하지만, 카이스트 졸업반이던 연호는 아예 임산부가 죽은 교통사고 가해자로 나온다. 동기는 아버지가 화물차 기사다. 중고차사기 일당 30명을 검거하는 이야기로 시작한 ‘크래시’가 교통사고의 단순 해결에 그치지 않는 사건 설정인 셈이다.
특히 택시기사인 소희 아버지 민용건(유승목)의 경우 교통사고란 게 누구에게나 어느날 갑자기 들이닥칠 수 있다곤 하지만, 굳이 중상을 입는 피해자 설정이 필요한지 의문을 갖게 했다. 그런 의문은, 그러나 다음 회 표명학(허정도)의 아들 표정욱(강기둥)이 운전하는 뺑소니차를 쫓다 그리된 게 펼쳐져 오히려 신뢰로 바뀌었다. 유기적인 구성의 전개임이 확인된 셈이어서다.
그렇듯 ‘크래시’는 궁금증을 갖게하는 짜임새 일품(一品)의 스토리가 있어 흥미진진하게 드라마에 빠져들게 한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 지루해 할 틈이 없다. 강력반도 아닌 교통범죄 전담 형사들이 그렇듯 주먹질을 잘하는 게 다소 의아하긴 하지만, 통쾌한 한 방을 날려대곤 해 스트레스가 싹 사라지는 기분마저 안겨주는 ‘크래시’다.
가령 보험회사 조사관을 하다 경찰에 특채된 연호에게 무술교육을 시키는 소희의 가볍게 상대를 제압하는 쌈질이 그렇다. 차량 여러 대가 엉킨 추격전에서 오토바이를 탄 채 곤봉으로 적들의 백미러를 박살내는 어형사가 멋져 보일 정도다. 여러 차례 나오는 카체이싱은 그야말로 블록버스터급 수준의 액션이라 할만하다.
알고 보니 영화 ‘카터’ㆍ‘베테랑’, 드라마 ‘재벌X형사’ㆍ‘모범택시’ 등에 참여했던 권귀덕 무술감독이 빚어낸 카 액션이다. 그는 중앙일보(2024.6.20)와의 전화에서 “카 액션은 특성상 재촬영이 어려워 사전 준비가 중요했다. 차량 여유분이 충분하지 않고, 안전상 이유로 계속 촬영할 수도 없었다”고 전했다. 대부분 실사로 찍었지만, 일부 장면은 CG(컴퓨터그래픽) 도움도 받았단다.
“승용차가 벽을 타고, 카 캐리어가 전복됐으며, 수십대의 차량이 도로위를 질주하며 토끼몰이를 당하는 액션까지, 드라마에선 본 적 없는 레전드 카 액션은 아직도 시청자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명장면으로 손꼽히고 있다”(스포츠경향, 2024.6.19.)고 할 정도다. 박준우 PD의 “본 적 없는 카 액션이 펼쳐진다”라는 말이 허언(虛言)이 아니었음을 보여준 셈이라 할까.
앞에서 교통사고의 단순 해결에 그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정점에 명학ㆍ정욱 부자가 있음은 깊이 생각해볼 문제다. 지방 경찰서장으로 있으면서 아들의 뺑소니사고를 은폐시킨 걸 넘어 애먼 가해자(연호)를 만들어내고 서울경찰청장에 오르기까지 한 명학과 아들 정욱의 범죄가 또 다른 메시지를 던지고 있어서다.
새겨야 할 메시지는 그뿐이 아니다. 채만은 최종회에서 도로 위의 살인을 살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국민 인식에 일침을 가한다. 정욱에 의해 임신한 딸을 잃은 피해자 아버지인 이정섭(하성광)은 범인 혐의를 벗은 연호더러 “이제 너도 네 인생 살아. 연애도 하고 여행도 좀 다니고. 소리내서 웃기도 하고. 이제 그래도 돼”라고 말한다.
현실감이 떨어지긴 하지만, 정섭의 서울경찰청장 납치도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요컨대 법망을 요리저리 피해가는 가해자들, 무능한 공권력이거나 그 부재에 대한 비판적 환기인 것이다. ‘크래시’가 교통사고의 단순 해결에 그치지 않는 드라마임을 웅변하는 진지한 메시지라 할 수 있다.
뺑소니범죄의 끝판왕이라 할 명학은 말할 것도 없고 이태주(오의식) 같은 경찰에 분노하면서도 “남의 호의에 기댄 그런 자리라면 눈치도 봐야 하고, 내 의지대로 하기도 힘들고”라며 스카우트를 거절한 소희의 결연한 모습은 울림을 준다. 올바른 경찰상 나아가 공직자상을 보여준 것이라서다. ‘크래시’가 의도한 또 다른 메시지로 읽힌다.
한편 악역을 주로 연기하던 허성태와 이호철이 형사로 나오는 캐스팅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허성태의 경우 뭔가 낯섬을 불식시키려는 듯 유머까지 쓩쓩 날리는 캐릭터다. 소희가 “봐, 우리 TCI 인지도가 이렇게 낮다니까” 말하는 등 은근 까는 소릴 하니 “BTS는 어느 나라 경찰이야?”며 자신은 전혀 웃음기 없이 좌중을 웃기는 식이다.
이호철의 경우 아버지 우길순으로 특별출연한 주현과의 대화가 그냥 착한 형사 그 이상이다. 경찰서로 찾아온 길순이 “왜 이렇게 얇아”라는 반응을 보인 용돈 든 봉투를 드려서가 아니다. 동기는 아버지에게 “힘들면 아들에게 기대도 돼요”라 말해 효(孝)를 환기시킨다. 깨우치게 한다. 흐뭇하면서도 뭔가 시큰함을 안기는 캐릭터를 ‘악역 전문 배우’ 이호철이 해냈다.
그러나 “동백꽃보다 먼저 오는 봄은 없다”(1회)라든가 “감동이 와야 되는데, 닭살이 오네”(7회)같이 기억해둘만한 대사와 달리 “나시(낯이→나치) 익은데”(8회), “불비슬(불빛을→불비츨) 봤어요”(8회), “이 창꼬(고)”(12회) 따위 배우들의 발음상 오류는 옥에 티라 할까 아쉬운 점이다. 시즌 2로 돌아오되 그런 건 훌훌 털어 내버리고 시청자들을 만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