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이별로 능성 구씨와 김해 허씨. LG그룹의 오늘을 있게 한 두 집안이 7월1일로 살림을 나눈다. 장장 57년. 엽기적이라 할 만한 ‘동업의 세월’이요, 연구대상감이라 해도 좋을 해피엔딩이다. 靑山 같은 우의, 長江 같은 신뢰가 이어진 LG의 동업 드라마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LG그룹의 두 기둥, 능성(綾城) 구씨(具氏)와 김해(金海) 허씨(許氏) 집안이 유지해 온 두터운 우의와 화목함은 놀랍다. 2004년 7월1일자로 두 집안이 이제 평화로운 분가(分家)를 한다고 하니, 1947년 락희화학(樂喜化學) 창업 때로 역산하여 꼭 57년 동안 동업자 관계를 이어온 셈이다. 가히 엽기적인 ‘동업의 세월’이요,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해피엔딩이 아닐 수 없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업을 같이 했다’는 좁은 뜻에서 57년이지, 실제로 두 집안의 인연은 그보다 훨씬 앞서 1900년대 초 겹사돈을 맺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때로부터 말하자면 구씨와 허씨 집안은 실로 20세기 100년을 풍미한 질긴 관계요, 그들이 상호작용한 동선(動線)을 펼치면 곧 한 편의 대하 드라마인 것이다.
원체 방대한 이야기라 ‘다이제스트’도 쉽지 않다. 각설하고, ‘최가박당 LG 한백년’쯤으로 이름 붙여질 이 드라마는 경남 진주의 한 시골 마을에서 시작된다. 지금은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로 그 이름이 바뀌었는데, 과거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산마을로 불리던 곳이다. 먼저 이 드라마의 첫 장면에서 클로즈업되는 것은 천석꾼 허씨 집안이다.
靑山 같은 신뢰, 長江 같은 우의
허씨 집안이 이 마을에 터를 잡은 것은 1700년대라고 한다. 구씨 집안보다 얼추 200년 가량 앞서 뿌리를 내리고 집성촌(集姓村)을 이뤘다. 천성이 부지런해 지독하게 일은 열심히 하는 반면, 소금이 싱겁다고 혀를 찰 만큼 검약하는 전통을 유지해 온 것으로 호가 났다는 것이다. 그러니 누대(累代)로 동산(動産)과 부동산이 쌓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중에 천석꾼만 10여 명이요, 그중 만석꾼도 둘이나 됐다는 얘기다. 지금과는 또 다른 의미의, 재물이 풍부한 집안, 곧 한자 그대로 재벌(財閥)이었던 셈이다.
반면 구씨네는 문벌(文閥) 쪽이었다. LG그룹 창업자인 연암(蓮庵) 구인회(具仁會)의 조부, 만회(晩悔 具然鎬)공이 과거에 급제해 조선 고종 때 홍문관 교리(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던 자리)까지 이르렀던 까닭이다. 만회공은 1907년 정미7조약에 의해 고종 황제가 폐위되면서 홍문관이 문을 닫자 낙향해 승산마을에 은거하였다.
그래서 구씨네는 마을에서 ‘구교리댁’으로 통했다. 이런 두 집안을 비겨 연암은 자신의 일대기(1984년刊)에서 “허씨 집안은 재(財)로, 구씨 집안은 기(氣)로 살았다”고 적고 있다. LG는 이들 두 집안이 나중에, 그야말로 ‘재기발랄’(財氣發辣)한 기업집단이라고 하겠다.
LG그룹을 창업한 연암 자신부터 허씨 집안에 장가들었다. 1920년, 그러니까 1907년생인 연암이 14세 되던 해 담장을 댄 이웃집 천석꾼 허만식(許萬寔) 진사의 맏딸 을수(乙壽) 양과 혼인한 것이다. 그보다 앞서 두 집안은 이미 허만식의 차남과 연암의 고모가 혼례를 올린 터였다. 진작 겹사돈이 되면서 가뜩이나 복잡하기 일쑤인 전통 시골 마을의 친인척 망(網)에 양가(兩家) 관계가 겹쳤다. 그야말로 외우기조차 어려운 ‘촌수(寸數)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 동네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피차 ‘아재’요, ‘아지매’고 ‘사돈댁’인 지경이었을 것이다.
이 같은 혈연의 네트워크가 ‘비즈니스’ 명목 아래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37년. 연암이 중앙고보를 중퇴하고 사업 길에 나선 지 6년째 될 때였다. 처남 허윤구(許允九) 씨의 회사에 투자한 것이었다. 윤구 씨는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를 나온 엘리트였다. 만주에 마늘과 명태 등을 수출하고 콩 등을 수입하는 무역회사를 운영중이었다. 여기에서 무역과 청과(靑果)·어물(魚物)에 문리가 트인 연암은 포목상에서 사업 영역을 확장, 승승장구해 1941년 진주청과어물조합 대표로 선출되는 등 일약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때 윤구 씨에 대한 연암의 투자는 다분히 단발적인 것이었다. 두 집안이 본격적이고 지속적인 동업 관계로 맺어진 것은 그로부터 10년 뒤다. 연암이 해방과 함께 부산에 조선흥업사라는 무역회사를 차린 이후다. 일본에서 목탄(木炭) 등을 수입했지만 별 재미를 못 봤다. 경남도청에서 화물차 30대를 불하받아 운수업도 해보았지만 이 또한 차량의 고장과 이런저런 말썽으로 손해만 본 채 손을 놓아야 했다. 실의에 빠진 연암에게 어느 날 고향 승산마을의 만석꾼 허만정(許萬正)이 찾아왔다. 3남 허준구(許準九)를 데리고.
‘촌수의 네트워크’라는 표현에서 짐작하듯 이들 또한 이래저래 집안 사람들이었다. 허만정은 연암의 장인(허만식)과 6촌간이었다. 연암과는 사돈지간이다. 또 허준구는 연암의 바로 아랫동생인 구철회(具哲會)의 사위였다. 허준구는 도쿄 간토(關東)중학을 마치고 귀국한 24세의 청년이었다. 허만정은 그때 40줄에 들기 시작하던 연암에게 허준구의 경영수업을 의뢰하면서 동시에 일정 부분 자본을 대겠다는 뜻도 밝혔다. 허씨 집안의 출자(出資)요, 출자(出子)였다. 이를 연암이 받아들이면서 동업은 시작됐다.
許씨 집안의 出資 겸 出子
구씨와 허씨 양자간 역할 분담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가를 보려면 불가불 LG그룹의 어제와 오늘 궤적을 따라 얘기를 풀어나가야 한다. LG그룹은 앞에서 본 것처럼 1945년 9월 연암이 부산 국제시장에서 문을 연 조선흥업사에서 발아(發芽)했다. 이 조선흥업사가 1947년 1월 락희화학공업사(樂喜化學工業社)로 이름을 바꾸고 이후 럭키 - 럭키금성 - LG로 성장했다. 해방과 함께 회사를 세웠던 연암이 1969년 작고했으므로 그 25년간을 1세대 경영기로 잡을 수 있다. 경영권을 이은 장남 자경 씨가 1994년 은퇴했으므로 이 또한 25년간이었다. 지금은 구자경 명예회장의 장남 구본무 회장 체제로, 제3세대 경영이 진행중이다.
1세대 창업기는 ‘동동구리무’로 통칭되는 화장품을 시작으로 플라스틱·칫솔·치약 등 LG그룹의 탄탄한 초기 경영 기반을 다졌다. 주식시장에 회사의 상장(上場)을 실현해 현대적인 기업으로 우뚝 서게 한 시기이기도 했다. 창업자 세대와 활동을 거의 같이해 2세대라기보다 1.5세대로 불리는 경영자들은 전자·전기·에너지·건설·유통 등 LG를 오늘과 같은 굴지의 대기업으로 확장 발전시켜 놓았다. 지금 제3세대 구본무 회장 체제는 세계 일류기업으로 위상을 굳힌다는 전략 아래 ‘다이내믹 LG’를 모토로 전에 없는 공격경영 전략을 펴고 있다.
사람으로 나누면 제1세대는 구씨 쪽에 연암을 필두로 철회·정회·태회·평회·두회 등 6형제가 중심이 되고, 허씨 쪽에는 돈과 아들을 내놓은 허만정 공을 들 수 있다. 먼저 면면을 보면 구씨 쪽 6형제는 이미 세상에 그 이름이 잘 알려진 인물들이다. 6형제 중 첫째인 연암과 둘째 철회(哲會), 셋째 정회(貞會) 등 위로 3명은 고인이 됐다. 넷째 태회(泰會·81) 씨는 LG전선 명예회장, 다섯째 평회(平會·78) 씨는 LG칼텍스가스 명예회장, 두회(斗會·76) 씨는 극동도시가스 명예회장으로 있다.
연암과 철회·정회가 창업 초기 멤버고, 이후 다른 형제들이 모두 달려들어 기반을 닦는 데 힘을 모았다. 여기에 연암의 장남, 2세대의 맏이인 자경 씨가 일찌감치 합류해 부친을 도왔다. 자경 씨와 시기적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허만정 공의 아들들-3남 준구 씨, 2남 학구(鶴九) 씨, 4남 신구(愼九) 씨가 ‘1세대적 1.5세대’로 참여해 구씨네와 일을 도모해 나갔다.
1.5세대의 경우 입사순(?)으로 보면 제1번이 허준구였다. 그런데 허만정 공은 왜 여덟 아들 가운데 장남이나 차남이 아닌 3남 준구 씨를 구씨네 사업 쪽으로 떼밀어 넣었을까. 첫째 정구(鼎九) 씨가 이미 다른 길로 나갔기 때문이었다. 정구 씨는 일찍이 사업에 눈을 떠 만석꾼 농사를 떠나 신교육과 도회(都會)로 돌았다.
그러다 인근 의령 출신인 삼성 이병철 창업자와 의기투합해 삼성에 몸을 담게 됐다. 그는 제일제당·제일모직의 창업 멤버로 활약했고, 훗날 삼성물산 사장을 역임했다. 나중에 독립해 스포츠 기어(신발·장갑) 업체인 삼양통상을 설립했다. 삼양통상은 현재 정구 씨의 장남인 남각(南珏) 씨가 맡고 있다.
장남 정구 씨가 밖으로 돌다 보니 자연스럽게 고향의 농삿일을 마름하는 전반적인 일과 가산(家産) 관리는 둘째 학구 씨가 맡게 됐다. 그래서 허만정 공이 일본에서 돌아온 셋째 준구 씨를 큰인물 만들어 보겠노라, 손을 잡고 부산의 연암에게 찾아간 터였다.
이렇게 해서 조선흥업사에 들게 된 준구 씨는 우선 포목 일을 보았다. 그때 연암의 둘째동생 정회 씨가 혼자 상품을 구입하고 팔고 하느라 동분서주하던 터였는데 준구 씨가 이를 거들었다. 지금 시각으로 구분하자면 영업 쪽에서 일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허씨 집안이 어떤 집안인가. 천석꾼, 만석꾼답게 숫자 계산으로 날이 밝아 숫자로 날을 덮는 사람들이었다. 1947년 아낙네들의 얼굴에 바르는 크림을 만드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한 ‘락희’에서 준구 씨는 곧 장부를 도맡았다. 물품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물론 돈의 출입과 판매 영업까지 준구 씨 책임이었다.
시장바닥에서 리어카를 끌어가며 물건을 팔았고, 장부 일을 해냈다. 1960년대 후반 기업마다 업무 조정과 계획 수립을 위한 종합 기능을 수행하는 사령부 격인 기획조정실이 생길 때 LG의 초대 기획조정실장도 준구 씨가 맡았다. 전자제품이 나오던 초기 판매를 주도하며 회사를 키운 것도 그였다. 주식시장에 LG화학을 상장하는 모든 작업을 지휘해 현대적 기업으로 정착시키기도 했다.
연암의 맏아들 자경 씨보다 두 살이 많고 입사도 4년 먼저 했지만, 그는 자경 씨와 나란히 연암을 모셨고 나중에는 한결같이 자경 씨를 도와 회사를 키웠다. LG화학·LG상사·LG전자·LG전선 등 주요 계열사 CEO를 역임한 준구 씨는 자경 씨와 함께 1994년 퇴진했다. 부친 허만정 공의 손에 이끌려 연암 그리고 LG와 인연을 맺어 55년을 회사에 몸바친 그는 실질적인 허씨 문중의 좌장이었다. LG건설 명예회장으로 있다 2002년 구씨와 허씨, 문중의 애도 속에 작고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 보자. 허만정 공이 점차 전답을 팔아 연암의 회사에 자본을 대면서 상대적으로 고향 집의 가산 관리는 그만큼 수월해졌다. 진주사범을 나와 고향의 지수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자경 씨가 부친의 권유로 사업에 참여한 것이 1950년. 이듬해에는 허만정 공의 2남으로 집을 지키던 학구 씨가 연암의 회사에 합류했다. 연암이 플라스틱 제조업을 시작하면서다.
당초 연암은 화장품(얼굴용 크림)을 떼어 파는 사업을 했지만, 이윽고 기술자를 확보해 직접 화장품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장사에서 기업으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계기였다. 정회 씨가 아이디어를 내 작명한 ‘럭키크림’이 날개돋친 듯 팔리면서 연암은 화장품 용기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용기는 조악한 광물 원료로 만든 것으로, 잘 깨지고 모양새도 볼품없었다. 그러다 피난 간 부산의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플라스틱 제품들을 보고 그것으로 용기를 만들기로 한 것이었다. 플라스틱이라는 말도 없이 합성수지라고만 알려져 있었고, 당연히 국내에는 그것을 만들 만한 기술(자)도 기계도 없던 시기였으니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셈이었다.
전 직원이 동원돼 전국은 물론 일본에까지 사방팔방 수소문하고 자료를 수집해 플라스틱 제조법을 어렵사리 입수했다. 제조 책임은 태회 씨가 맡았다. 책으로만 공부해 제조법과 필요한 설비들을 알아냈다. 원료와 시설만 갖추면 크림통뿐만 아니라 칫솔이나 빗 등 일상 생활용품은 무엇이든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가 벌어지고 전세가 혼미하던 시절이었다. 미국에서 관련 시설을 도입하기로 하고 수개월 동안 자금을 마련하는 등 준비과정을 거쳐 그해 10월 발주했다.
주력부대 具씨, 지원사격 許씨
기계설비는 10개월 뒤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동안 공장을 지어야 했다. 연암(당시 사장)은 공장 설계, 정회 씨(당시 부사장)는 전체 기획, 준구 씨(당시 상무)는 크림 판매 대금 수금을 통한 공장 건설 자금 확보를 맡았다.
앞서 1950년 진주사범을 나와 고향 지수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자경 씨가 합류했지만 공장 설립이 시작되면서 일손이 달렸다. 연암은 허만정 공의 차남이자 준구 씨 바로 윗형인 학구 씨를 불러올렸다. 부산 범일동 현장에서 공장을 짓는 일은 자경 씨와 학구 씨가 전담했다. 1952년 4월 공장이 완공됐다. 우여곡절 끝에 이곳에서 플라스틱이 생산됐고 빗과 비눗갑이 만들어졌다. 수요가 폭발했다.
한국에 플라스틱 시대를 연 이 공장은, 두 젊은이가 내내 지키고 있었다. 이들은 밤낮으로 공장에서 지내면서 관리를 도맡았다. 공장 건설 책임을 맡았던 자경 씨와 학구 씨였다. 직함만 각자 전무·상무였을 뿐 그들이 하는 일은 24시간 풀가동하는 막일꾼과 다를 바 없었다. 연암 일대기에 보면 이들 두 사람이 어떻게 생활했는가를 묘사하고 있다.
‘추운 겨울 밤에도 비좁은 다다미 방에서 군용 슬리핑백 하나로 새우잠을 자야 했다. 새벽 5시면 어떤 일이 있어도 일어나야 했다. 빗은 2,000개 단위로, 칫솔은 500개 단위로 포장해야 했다.
새벽에 일어나 (소매)상인들이 오기 전에 그것을 모두 포장해 두는 일이 숙직자의 몫이었다. 새벽에 몰려오는 상인들…, 그들에게 6시경부터 물건을 내주기 시작하면 7시쯤 가야 일이 끝났다. 7시 반쯤이면 사장(연암)으로부터 어김없이 전화가 걸려 왔다. 시시콜콜한 업무보고와 지시가 오가고…. 이러한 엄한 단련 속에서 두 젊은이는 사업을 영위해 나가는 요령을 하나하나 터득할 수 있었다.’
연암과 형제들, 장남 자경 씨 등 구씨네에 허학구·준구 씨 등이 부산을 중심으로 사업을 하던 차에 허만정 공의 4남인 신구(愼九) 씨가 다시 팀에 가세했다. 전격적인 일이었다. 1953년 연암은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 서울사무소를 두기로 했다.
부산에서 중앙으로 진출하는 계기였다. 지방에서 서울에 들어가려면 도강증(渡江證)을 발급받아야 할 만큼 행정이 까다롭고 어수선한 시기였다. 서울사무소 개설은 우선 태회 씨(당시 전무)가 맡았다. 그는 을지로4가에 방 하나를 얻어 임시 서울사무소를 열었다. 그리고는 동분서주, 요즘 말로 하면 멀티 플레이어로 혼자 뛰었다. 부산 공장에서 만드는 제품을 가지고 도매상 업무, 주문 접수, 배달, 수금에 상공부 등 관공서 출입까지 도맡았다. 태회 씨를 도와 서울사무소에서 일할 사람이 긴요했다.
연암이 떠올린 사람이 바로 신구 씨였다. 부산 동래중학교를 거쳐 부산대를 졸업한 신구 씨는 당시 조선통운에 다니던 터였다. 벌건 대낮에 회사에서 일하다 말고 신구 씨가 연암에게 불려왔다. “나와 일하자”는 연암의 제의에 신구 씨는 “장사라고는 근처에도 가본 일이 없다”고 발을 뺐으나 도리가 없었다.
연암은 신구 씨에게 그날 저녁 기차표와 도강증을 마련해 주었고, 신구 씨는 부랴부랴 서울행 야간열차에 올랐다. 도깨비 같은 일이었다. 을지로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신구 씨는 예의 플라스틱 빗이며 칫솔 보따리를 둘러메고 밖으로 뛰어야 했다. 업무부장이라는 직함이 주어졌고 영업을 전담했다.
매일 새벽부터 밤까지 동대문시장에서 남대문시장까지 뛰어다니며 판로를 개척해 나갔다. 이듬해 자기 밑에 영업직원 한 사람이 입사할 때까지 그는 직접 제품을 들고 시장 바닥을 골목골목 누볐다. 서울은 물론 수도권까지 시장 영역을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장사 근처에도 못 가봤다”던 사람이었지만 열성과 뚝심은 여느 장사꾼(?)에게 뒤지지 않았다. 정부의 외환보유고가 적어 수입업자들에게 한도를 정해 놓고 선착순으로 달러를 불하하던 1950년대, 신구 씨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무것도 오지 않는 날이나, 변함없이 은행 문 앞에 새벽부터 담요를 둘러쓰고 쭈그리고 앉았다 달러를 바꿔 왔다.
1962년 동남아 여행길에 나섰다 태국 방콕에서 아낙들이 빨래할 때 ‘이상한 가루’를 타 쓰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돌아와 그것이 뭔가, 매달려 4년 뒤 마침내 한국 빨래 세제의 대명사 격인 ‘하이타이’를 개발해 낸 사람도 바로 그다.
당시 상무에 올랐던 그는 하이타이의 발견, 개발은 물론 그것을 들고 주부들을 찾아다니며 직접 빨래를 시연하는 등 판매까지 ‘일관 공정’을 해냈다. 럭키는 하이타이를 시작으로 세탁용, 주방용, 피부용 세제까지 내달렸다. 신구 씨는 이후 (주)럭키·금성사·금성사 미국법인·럭키석유화학 등 주요 계열사 사장을 거친 뒤 1995년 LG의 경영 대권이 구자경 회장에게서 구본무 회장에게 넘어가면서 다른 1.5세대와 함께 퇴진했다.
1세대와 1.5세대가 같이 뛰는 동안 이미 구씨네와 허씨네의 라인업은 분명해졌다. 구씨 문중에서는 창업자인 연암을 중심으로 6형제와 장남 자경 씨와 자승(滋升) 씨가 주류를 이루었다. 허씨네는 허준구 씨를 위시해 학구 씨와 신구 씨, 그리고 창업기 엔지니어로 활약한 준구 씨의 자형(姉兄)인 이연두 씨 등이 힘을 보탰다.
구씨 쪽은 정책 결정과 사업 확장 등 경영의 줄기를 잡아 나갔다. 허씨 쪽은 판매와 영업 등 숫자를 다루는 일과 공장 건설 및 설비 등 현장을 맡았다. 물론 사장이든 부사장이든 전무든 상무든 필요하다면 직함이나 직급에 관계없이 궂은 일에도 몸을 던져야 했다. 구씨네와 허씨네는 이처럼 역할 분담, 싫다 좋다 말없이 한 뜻으로 매진하며 LG의 기반을 닦았다.
회사가 커지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누구를 낳고… 하듯 구씨네와 허씨네 창업 멤버들의 연(緣)을 따라 집안 사람들이 속속 회사 일에 참여하게 됐다. 예나 지금이나 LG의 기업문화는 가족적 분위기가 진하다는 것이 정설로 돼 있다. 하지만 집안 사람이라도 일선에서 실무를 통해 능력을 검증받지 않으면 중용되지 못하는 것이 정확한 현실이다. 전체 직원이 600여 명을 헤아리는 큰 회사로 성장한 1950년대 중반 이후 LG는 현대적인 공개채용 시스템을 마련했다. 이후 집안 사람도 이같은 시스템에 따라 인사를 행하는 전통을 이어왔다.
3세대 걸친 尊重과 均分
1세대와 1.5세대를 합쳐 50년에 걸친 두 집안의 화목과 단결은 3세 경영체제가 들어설 때 그 진면목을 보여줬다. 1995년 2월 구본무 회장이 취임하면서 구자경 회장을 비롯해 구태회 LG고문, 구평회 LG상사 회장, 구두회 호유에너지 회장 등과 허준구 LG전선 회장, 허신구 LG석유화학 회장 등 양가 창업세대들이 일제히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것이다. 새로 LG를 이끌어갈 젊은 경영자들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였다. 이 같은 사례는 재계는 물론 우리 사회 전반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더욱이 두 집안이 순순히 뜻을 모았다는 점은 가히 ‘연구 대상’감이다.
선대 경영자들의 그런 전통을 후대에서 소홀히 할 수 없을 것이다. 3세 체제에서도 두 집안간 인화에 바탕한 동업 관계는 작은 마찰음조차 없이 잘 유지돼 왔다. 현재 구자경 명예회장의 장남 구본무 회장을 중심으로 3남 구본준 씨가 LG필립스LCD 부회장으로 있다. 자경 씨의 둘째동생 자학(滋學·74) 씨가 아워홈 회장, 자두(滋斗·71) 씨가 LG벤처투자 회장으로 재직중이며 다섯째동생 자극(滋克·58) 씨가 LG상사 미주법인 회장을 지냈다.
이들 구자경 씨 직계들과 앞서 본 연암 형제의 자제들이 3세 체제의 주축을 이룬다. 먼저 1975년 작고한 철회 씨의 아들 가운데 장남 자원(滋元·69) 씨가 LG화재해상보험 명예회장, 3남 자훈(滋薰·57) 씨와 6남 자준(滋俊·54) 씨가 각각 이 회사 회장과 사장으로 있다. 1978년 작고한 정회 씨 집안에서는 4남 자섭(滋燮·54) 씨가 LG MMA 사장, 5남 자민(滋敏·49) 씨가 LG전자 상무로 재직중이다.
LG전선 명예회장으로 있는 태회 씨의 경우 장남 자홍(滋洪·58) 씨가 LG전선·산전 회장을 맡고 있으며 3남 자명(滋明·52) 씨는 극동도시가스 부회장이다. LG칼텍스가스 명예회장인 평회 씨의 장남 자열(滋烈·51) 씨는 LG전선 부회장, 차남 자용(滋溶·49) 씨는 LG칼텍스가스 부사장으로 있다. 연암의 6형제 중 막내인 두회(극동도시가스 명예회장) 씨의 경우 장남 자은(滋殷·40) 씨가 LG전선 이사로 근무중이다.
이들과 나란히 허씨 집안에서도 LG그룹의 주요 포스트를 맡고 있다. 최초 출자자 허만정 공의 장남 정구(1999년 작고) 씨의 경우 본인이 LG에 몸담지는 않았지만 현재 차남 동수(東秀·61) 씨가 LG칼텍스정유 회장을 맡고 있다. 동수 씨는 자신의 이름보다 ‘테크론’이라는 휘발유 브랜드로 더 유명하다. 연세대 화공과를 나온 뒤 미국에서 화공학 박사를 땄다. 이후 호남정유(LG정유의 전신)에 입사한 뒤 30년 동안 정유 쪽에 매진해 온 전문가다.
특히 LG에서 평생을 보낸 영원한 LG맨, 허준구 씨의 경우 다섯 명의 아들이 대를 잇고 있다. 장남 창수(昌秀·56) 씨가 LG건설 회장, 2남 정수(正秀·54) 씨가 LG기공 사장, 3남 진수(進秀·51) 씨가 LG칼텍스정유 부사장, 4남 명수(明秀·49) 씨가 LG건설 부사장, 5남 태수(兌秀·47) 씨가 LG홈쇼핑 부사장으로 있다. 특히 장남 창수 씨는 경영학(고려대)을 전공해 LG그룹 기조실에 입사했다. 이후 기획과 숫자 쪽으로 잔뼈가 굵은 경제통이다. 공교롭게도 부친의 대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셈이다. 허만정 공의 여덟 아들 가운데 막내인 승조(承祖·54) 씨는 LG유통 사장으로 재직중이다.
허승표 씨는 좀 남다르게 유명세를 탔다. 이 같은 3세 체제에서 구씨 쪽 좌장 격은 역시 구본무 회장이고 허씨 쪽은 계열 주식을 가장 많이 갖고 있다는 허창수(허준구의 장남) LG건설 회장이다. 두 사람은 양쪽을 대표하면서 선대와 마찬가지로 원만한 동업 관계를 유지해 가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들 두 집안이 3세대,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 같은 우의와 화합을 이어 올 수 있었을까. LG 안팎에서는 그 비결을 두 가지로 꼽는다. 하나는 창업자의 한결같은 의지, 다른 하나는 양가의 상호 존중과 배려다.
먼저 창업자 연암은 집안이든 기업이든 인화(人和)를 중시했다. 수많은 형제와 자녀, 친인척이 얽힌 사람의 네트워크를 이끄는 장손으로서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합리적이면서도 원만한 인간관계야말로 연암이 가장 강조한 덕목이었고, 자연스럽게 애초부터 지금까지 LG의 사시(社是)가 돼 왔다.
“기업은 사람이 사람을 위해 하는 활동이다. 기업을 하는 데는 내부 인화가 무엇보다 서야 한다. 인화로 단결하면 무엇인들 불가능하겠는가. 만사가 모두 잘되더라. 인화가 깨지면 결국 망하게 되는 것이 세상의 도리다.”
“사람이 기쁘게 만나기는 쉽다. 그러나 기쁘게 헤어지기는 어렵다. 만나면 되도록 헤어지지 말아야 하고, 할 수 없이 헤어지게 되더라도 따뜻하게 손을 잡고 웃으면서 헤어지도록 하라. 헤어진 뒤 등을 돌리고 사는 것은 졸장부의 짓이다.” (이상 연암의 경영 語錄에서)
다른 한편으로 대대로 유교적 가풍을 이어온 집안 분위기답게 유교적 위계질서를 잘 지켜 온 것도 두 집안의 화합에 힘이 됐다. LG의 경영과 관련한 중요한 일들도 당연히 최고위층에서 결정하게 마련인데, 그동안 이 최고위층을 이뤄온 것이 사실상 두 집안의 어른들이었다. 공식적인 기구를 둔 것은 아니지만, 두 집안이 핏줄로 이래저래 얽혀 있다 보니 어른들끼리 연중행사로 얼굴을 맞댈 기회가 여러 차례 있게 마련. 그 자리에서 합의하고 결정한 일이 일사불란하게 아랫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시스템 아닌 시스템이 작동해 온 점이 있다는 얘기다.
허만정 공의 5남 완구(68·승산 회장) 씨가 LG에 들어갔다 곧 퇴사한 에피소드는 그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회사에 들어갔더니 아재며 형님이며 하는 집안 윗분들이 호통을 치고 나서는 통에 그야말로 아무 소리도 못하고 옴쭉달싹 할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완구 씨는 나중에 고향 마을 이름을 따 (주)승산을 설립했다. 승산은 LG그룹 계열사들의 화물 운송을 맡아 성장했다. 이런 점에서 넓게 보아 완구 씨 또한 LG그룹 방계가족의 일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화와 질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두 가지 덕목이 제대로 발휘되면 관계는 오래가게 마련일 것이다.
LG그룹측에서 완벽한 동업관계의 또 다른 요인으로 꼽는 것이 서로에 대한 양해와 배려다. 구씨 쪽도, 허씨 쪽도 각자가 맡은 분야나 주어진 역할에 만족하면서 최선을 다했다는 얘기다. 그것은 다시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균분(均分)이요, 다른 하나는 겸양지덕이다.
무엇보다 먼저 경영의 주축을 이뤄온 구씨 쪽에서 허씨 쪽에 대해 소홀히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함께 나누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경영의 과실을 나누는 것은 물론 인사 때 자리를 배정하는 문제도 양가에서 충분히 합의하고 배려하여 일을 결정했다는 얘기다. 구자경 회장이 퇴임하면서 허씨 쪽, 그러니까 허준구 씨의 장남 창수 씨를 LG전선 부사장에서 회장으로 일약 승진시킨 것도 구씨 쪽 구본무 회장과 격을 맞추기 위한 파격적 배려였다. 그런 균분의 정신이 면면한 덕분에 불평불만을 삭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일들이 서로 투명하지 않으면 신뢰를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 대단위 투자를 하느라 배당할 돈이 없을 때도 구씨 쪽에서 달러 빚을 내어서라도 허씨 쪽에 투자한 만큼 배당하는 데 신경 썼다는 대목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것은 다른 시각으로 보면 처음 일을 벌인 구씨 쪽에서 나중에 들어온 허씨 쪽에 대해 그만큼 스스로를 낮추었다는 얘기도 된다. 겸양지덕이다. 물론 겸양지덕을 말할 때는 허씨 쪽이 실제로는 훨씬 더 빛난다. 왜냐하면 경영을 끌어나가는 구씨 쪽의 의사를 존중하면서 앞에 나서는 법 없이 이를 잘 보필했기 때문이다.
가령 허준구 씨의 경우 연암의 아들인 자경 씨보다 나이도 많고 회사에도 먼저 들어왔지만 언제나 자경 씨를 예우했다. 그 아들 대에서도 그랬다. 허준구 씨의 장남 창수 씨는 언제나 구본무 회장보다 한 걸음 뒤에서 구회장이 돋보이도록 수행(隨行)했다. 경영에서도 허씨네는 판매와 영업으로, 재무와 숫자 쪽의 역할을 주로 맡았다. 숫자로 날이 새고 지던 옛날 천석꾼 집안 분위기를 반영하듯 안살림과 재정에 그만큼 적격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경영을 주도해 나가는 구씨네의 뒤쪽에서, 카메라 앞에 나서지 않는 그림자 같은 존재로, 그야말로 내조하듯 스스로를 잘 여며온 것이다. 그러면서도 불평불만 없이 진력투구해 구씨네를 도왔기에 오늘날 LG가, 그리고 두 집안의 지속적인 우의가 가능했을 것이다.
한 세기에 걸친 두 집안의 동업 관계는 올 7월1일자로 끝난다. 제조·전자전기·석유화학 등은 구씨 집안이 맡는다. 유통·건설·서비스는 허씨 쪽이다. 동업이 ‘깨지는’ 것이 아니다. 연암의 말처럼 따뜻하게 웃으면서 헤어지는 경우다.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결과다. LG그룹측의 설명에 따르면 “3세 체제에 들어와 원체 구씨와 허씨네 사람들이 많아졌고, 이제는 상황이 변해 빛의 속도로 공격적 경영을 해나가야 하기 때문에 각기 자기 분야를 책임지고 전담해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분리한다”는 것이다.
이제 구씨와 허씨 집안은 오랫동안 힘을 합쳐 보여주었던 시너지, 그 이상으로 각자의 역량을 발휘해 보일 때가 됐다. 둘이 하나로 뛸 때보다 각자 뛰면서 지금보다 훨씬 더 큰 기업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훨씬 더 큰 성과를 거둘지 모른다. 그러나 지난 한 세기 동안 보여주었던 그 아름다운 동업 관계 자체,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교훈은 두고두고 세인의 화제가 되고 귀감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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