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동통신업계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 가운데 하나가 통신요금 인하다. 내리느냐 마느냐, 내린다면 어떻게 얼마나 내릴 것이냐를 두고 관계 당국과 통신사들의 입장이 부딪치고 있다.
통신요금 인하 이슈의 시작은 이명박 정부의 공약에서 시작한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인수위 당시부터 가계통신비를 20% 인하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가계통신비는 유선전화와 이동전화, 초고속인터넷 요금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유선전화와 초고속인터넷 요금은 그 동안 사실상 큰 변화가 없었던 탓에 정부의 가계통신비 인하 정책은 이동전화 요금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됐다.
그러나 통신사들의 대응 방식은 달랐다. 통신사들은 수익성이 높은 이동통신 요금을 인하하는 대신 가족할인, 결합할인 등의 정책을 통해 이동통신 요금을 유지하고 IPTV나 유선전화, 초고속 인터넷 요금을 묶어 파는 방안을 내놓았다.
일부 고객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탓에 제대로 된 가계통신비 인하 방안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과거 10초 기준으로 과금했던 이동전화 요금에 초당 요금제가 도입되는 등 일부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고객 입장에서 실질적인 통신요금 인하 효과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결국 3월부터 방송통신위원회와 공정거래위원회 등 관계 당국이 다시 통신사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현재 논의가 오가고 있는 통신요금 인하 방안을 정리해보면 크게 3가지로 구분해볼 수 있다.
첫째는 휴대폰 단말기 출고가를 인하하는 방식이다. 휴대전화 출고가는 단말기 제조업체가 통신사와 합의해 각 대리점에 납품하는 가격이다. 대부분 소비자들이 통신사 대리점을 통해 휴대전화를 구입하기 때문에 사실상 소비자가격과 다름이 없다.
방통위와 공정위 등 관계 당국은 통신사와 제조사가 출고가를 부풀리고 대신 보조금을 주는 방식으로 시장을 왜곡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최근 공정위가 통신사와 제조사를 대상으로 출고가 담합 혐의를 조사하기도 했다.
두 번째는 스마트폰 요금제 인하 방안이다. 스마트폰 가입자 1천만 시대가 열리면서, 일반폰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높은 스마트폰 요금제는 정부의 공약과 반대로 가계통신비를 더욱 끌어올리는 주범이 되고 있다.
방통위는 통신요금과 단말대금의 개념을 명확히 분리하고, 음성통화 요금과 데이터 요금을 분리해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소비자가 본인 이용 행태에 맞게 음성과 데이터 요금을 각각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요금 인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에는 참여연대가 통신 3사의 스마트폰 정액 요금제에 담합 의혹이 있다며 공정위에 신고하기도 했다. 출고가 담합 의혹에 대한 조사가 요금제 담합 조사로 확산되는 모양새다.
조사 결과 휴대전화 출고가나 스마트폰 요금제에서 담합 등 불공정 사례가 발견된다면 과징금을 부과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는 등 적절한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담합 의혹에 대한 조사와 별개로 정부가 일방적으로 통신사에 요금 인하를 유도하는 정책은 통신사들의 반대 논리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면에서 최선의 방책이 아니다.
이미 통신사업자연합회 등은 "통신비를 인위적으로 인하하기보다는 시장경제 원칙에 맡겨야 한다"는 반대 논리를 펴고 있다. 현실적으로 방통위가 요금 인하안을 제시하더라도 통신사들이 반발한다면 이를 강제할 수 있는 방안도 없다.
휴대폰 출고가가 인하된다 하더라도 실질적인 통신요금 인하로 이어질 지는 미지수다. 출고가를 낮추는 대신 보조금을 줄인다면 소비자들의 실구매가에는 사실상 큰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와 SK텔레콤이 출고가 인하를 위해 협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동시에 SK텔레콤은 4월부터 휴대폰 보조금을 하향 조정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통신 요금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안이 있을까? 마지막 세 번째 방안으로 논의되고 있는 'IMEI 블랙리스트' 도입이 적절한 대안으로 꼽힌다.
현재 통신사들은 3G 휴대전화의 고유번호인 '국제 모바일 단말기 인증번호'(IMEI)를 등록한 후 등록된 단말기만 개통해주는 'IMEI 화이트리스트' 방식으로 단말기를 관리하고 있다. SK텔레콤에서 출시된 단말기는 SK텔레콤를 통해서만 개통할 수 있고, KT를 통해 출시된 단말기는 KT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IMEI 화이트리스트 방식은 특정 단말기를 해당 통신사에서만 쓰도록 강제하기 때문에, 통신사들이 단말기 유통권과 가격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근본 원인이 된다. 2010년 방통위가 USIM 이동 제약에 대한 시정 명령을 내리면서 SK텔레콤과 KT가 사업자간 USIM 이동 절차를 간소화하는 방안을 마련했지만, 개통이력이 없는 신규 휴대폰은 해당되지 않아 미봉책에 그쳤다 .
소비자가 제조사로부터 직접 단말기를 사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제조사는 통신사에 단말기를 납품하고 통신사가 대리점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되파는 왜곡된 유통구조가 만들어진다. 출고가를 부풀리고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대신 비싼 통신요금으로 비용을 회수하는 기형적인 이동통신 시장이 형성된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통신사가 특정 단말기의 대리점 마진을 조정하는 것만으로 휴대폰 시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이와 달리 미국과 유럽 등 많은 국가에서 단말기를 호환이 가능한 모든 통신사를 통해 마음대로 개통할 수 있는 'IMEI 블랙리스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통신사가 기본적으로 모든 단말기의 가입을 허용하고, 분실이나 도난 등으로 사용할 수 없는 휴대폰의 IMEI 번호만 따로 블랙리스트로 관리하는 방식이다.
IMEI 블랙리스트 제도가 도입돼 제조사가 직접 소비자에게 단말기를 팔고 통신사는 요금 상품과 USIM만 판매하게 된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휴대폰 시장이 만들어진다.
소비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단말기를 구입한 뒤 원하는 통신사를 선택해 휴대폰을 이용할 수 있다. 보조금을 받으려면 통신사의 약정 프로그램에 가입하면 되겠지만, 약정이 싫다면 제조사로부터 '정가'에 단말기를 구입한 후 자신에게 맞는 통신사와 요금제를 선택하면 된다. 제조업체가 직접 소비자를 만나기 때문에 출고가 거품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 있다.
단말기 제조업체는 통신사의 요구에 맞춘 단말기를 개발하기보다는 소비자들이 원하는 단말기 개발에 집중할 수 있다. "좋은 제품인데 통신사가 안팔아줘서 실패했다"는 우는 소리를 할 필요가 없이 품질과 가격 경쟁력, 유통 및 마케팅 역량 등 자사의 역량만으로 경쟁할 수 있다.?통신사들은 단말기 지배력을 내놓아야겠지만 '왜곡된 시장 구조의 원흉'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매출의 20%가 넘는 기형적인 마케팅 비용도 대폭 줄일 수 있다.
통신사가 인기 단말기를 독점하며 가입자를 끌어 모을 수 없고 서비스 품질과 요금 상품만으로 경쟁해야 하기 때문에, 통신 요금도 본격적인 경쟁체제로 돌입할 것으로 기대된다. ?통신사의 경쟁력이 서비스 품질과 요금제라는 통신산업의 본질로 돌아가는 셈이며,?통신사들의 요금인하 정책 반대 논리대로 제대로 된 시장경제 원칙이 준수되는 셈이다. 정부가 요금을 인하하라는 압박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가격 경쟁이 이루어질 것이다.
사업자들의 공정한 경쟁이 소비자들의 혜택을 늘린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최근 스마트폰 시장에서 사업자의 경쟁 확대가 어떻게 소비자의 혜택으로 이어지는지를 몇 번 목격할 수 있었다.?지난 3월 SK텔레콤이 아이폰4를 출시하면서 아이폰4 구입 고객들의 교환 정책과 AS 정책이 갑자기 개선됐다. 최근에는 모토로라 아트릭스가 스마트폰 사상 처음으로 KT와 SKT를 통해 동시 출시되면서 양사가 출고가를 놓고 눈치전을 벌이기도 했다.
모든 3G 휴대폰을 양사 모두에서 쓸 수 있게 된다면 경쟁의 혜택이 소비자들에게 돌아갈 것은 자명하다. 앞으로 LTE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LG유플러스도 같은 주파수를 사용하게 된다면 경쟁으로 인한 소비자 혜택은 더욱 커질 것이다.
물론 IMEI 블랙리스트 방식으로 전환하기까지는 준비해야 할 사항이 많다. 지금껏 통신사의 유통 역량에 의존해왔던 제조업체들은 자체 유통망을 확보해야 하며, 휴대폰 오픈마켓을 활성화하는 조치도 필요하다. 통신사들도 새로운 제도에 맞게 관련 시스템과 요금 정책을 개선해야 하며, 도난 및 분실 휴대폰을 관리하기 위한 대책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절차는 과거 잘못을 바로잡고 시장을 건전하게 개선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다. 사실 IMEI 블랙리스트 정책은 USIM 이동을 근본으로 하는 3G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진작에 시행됐어야 할 정책이며, 뒤늦게라도 국내 통신 시장을 글로벌 트렌드에 맞춰가기 위한 당연한 수순이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의 발언에 따르면, 방통위와 기획재정부 등 관계부처가 전담반을 가동해 통신요금 인하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구체적인 방안은 5월 중에 가닥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진정 가계통신비 20% 인하 공약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다면 그 답은 명백하다.?IMEI 블랙리스트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요금 인하가 통신 업계의 최대 이슈로 떠오른 지금이 왜곡된 통신 시장을 바로잡기 위한 적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