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취재> 군위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고장 - 권순진
- 민족의 위대한 기록문화 유산 삼국유사
올해는 단군기원으로 4346년이다. 단군조선이 세워진 BC 2333년을 한민족의 기년으로 보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부터 공식 연호로 단군기원을 썼다. 그러다 5·16 군사정변 후 1962년부터는 단기의 공식적인 사용이 중단되고 서기를 공용 연호로 쓰기 시작했다. 이후 단군조선을 인정치 않으려는 분위기가 사학계에 확산되면서 단군의 존재는 일반의 의식에서도 차츰 옅어져 갔다. 하지만 단군의 존재와 단군조선은 우리 한민족 역사 속에 엄연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그 건국신화를 최초로 기록한 서책이「삼국유사(三國遺事)」이다.
삼국유사는 훈민정음 원본을 비롯해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난중일기, 징비록 등과 더불어 국보로 지정된 자랑스럽고 소중한 우리의 기록문화유산이다. 하지만 현재 전해져오는 삼국유사는 일연이 1280년 경 처음 삼국유사를 집필할 때 붓으로 쓴 원본은 아니다. 지금 전해지는 가장 오랜 판본은 조선 중종(1512년)때 나온 정덕본으로, 경주부윤 이계복이 ‘삼국유사’가 제대로 전해지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중간한 것이다. 이 목판본 5권 2책 가운데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된 권3~5가 2003년에서야 보물 제419호에서 국보 제306호로 변경 지정되었다. 올해가 삼국유사 정덕본 발간 501년이 되는 해이다.
고려후기에 탄생한 삼국유사는 조선시대 내내 허황된 야사라며 성리학에 가려 홀대를 받았다. 학계의 관심을 끈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임진왜란 때 약탈되어 일본으로 건너간 뒤 그곳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은 이후였다. 도쿠가와가 삼국유사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삼국유사의 위상이 지금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란 말까지 나돌 정도다. 삼국유사가 우리 땅에서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최남선에 의해서였다. 1927년 잡지「계명」에 삼국유사를 특집으로 실으면서 그는 ‘조선 상대를 혼자 담당하는 문헌’이라고 극찬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다가 비교적 최근에서야 각광을 받게 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가치는 높아가고 있다.
- 문화콘텐츠의 보고 삼국유사
삼국유사는 고승 일연(一然, 1206∼1289)이 온힘을 쏟아 부어 편찬한 방대한 분량의 역사서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달리 정사는 아니지만 그 못지않은 큰 가치를 지닌 문헌이다. ‘三國遺事’의 ‘遺事’란 정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거나 빠진 걸 수록했다는 뜻이다. 일연은 이 책을 저술하기 위해 청년 시절부터 자료를 수집했다고 전해지며, 집필은 70대 후반부터 84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주로 만년에 이루어졌다. 자료 수집을 마친 일연은 ‘보각국사(普覺國師)’라는 명예까지 벗어 던지고 경북 군위에 있는 인각사(麟角寺)로 들어갔다. 그때 일연의 나이 77세였다.
삼국유사의 고조선과 단군에 관한 서술은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와 민족국가의 시작을 설명하는 둘도 없는 소중한 기록이다. 삼국사기에 없는 가야의 역사를 기록해 역사의 미아가 되었을 수도 있는 고대사의 한 페이지를 살려낸 것도 각별한 가치가 있다. 역사서이면서 다채로운 불교 이야기와 민간설화를 같이 담은 것도 삼국유사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또 이 책에는 14수의 향가가 수록되어 고대문학 연구에 더없이 귀중한 자료가 되며, 고대의 역사, 지리, 문학, 종교, 미술에 걸친 문화유산의 원천적 보고가 되고 있다. 가히 민족의 보물이라 주저 없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으며, 수많은 지성인과 문화계 인사들도 삼국유사를 우리나라 최고의 고전이라 하나같이 입을 모으고 있다.
이 위대한 고전이 고대 한국문화의 원형, 상상력의 보고로 오늘날 재조명되고 있는 것은 마땅한 노릇이라 하겠다. 삼국유사에는 어떤 매력이 있으며 무슨 이야기들이 담겨있을까. 마늘을 먹은 곰이 사람이 되고, 서동은 노래 하나로 선화공주를 꾀어내며, 문희는 언니 보희를 졸라 꿈을 산 후 왕의 여자가 된다. ‘모죽지랑가’란 향가가 아니면 화랑들의 애틋한 동지애를 어찌 느끼겠으며, 아내를 탐한 역신을 노래로 쫓은 처용을, 신조차 욕심낼 만큼 아름다웠던 수로부인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에밀레종의 전설을, 대숲에 들어가 죽기 직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던 두건장이를, 한겨울 얼어 죽어가던 여인을 불쌍히 여겨 안아주고 옷을 벗어준 정수법사의 아름다운 감동 스토리를 어찌 알 수 있었을까. 그리고 홍익인간이란 교육의 이념이 과연 존재하였을까.
일연은 삼국유사를 쓰면서 '다만 기록해 놓을 따름이지 옳고 그름은 후에 똑똑한 선비들이 대들어 해결해 주시라'는 주석을 달아 놓았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종횡무진 펼쳐 보이는 판타지의 세계에 푹 빠져드는 것만으로도 똑똑한 선비가 되는 일이지 싶다. 문화의 시대인 21세기에 문화콘텐츠는 국력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때 스토리텔링의 기원이며 문화콘텐츠의 원천이라 할 삼국유사의 가치는 더욱 빛이 난다. 아름답고 인간적인 144가지나 되는 이야기를 남겨 이 땅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과 상상력을 불러일으켰고, 오늘날 문화산업은 삼국유사로부터 수많은 콘텐츠를 아낌없이 제공받고 있다. 아무리 길어도 마르지 않는 콘텐츠의 바다이며 지적 공동 재산이 삼국유사이다. 지금에서야 비로소 삼국유사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 우리에게 삼국유사는 무엇인가?
온 나라가 몽골 군대의 말발굽에 초토화 되어 황룡사 구층탑도, 부인사(대구 팔공산 소재)의 대장경도 재가 되어버린 때 일연 스님은 의연히 붓을 들고 일어섰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40여 년의 긴 몽고와의 전쟁으로 엄청난 역사 유물이 소실되고, 갖고 있던 고려인의 민족적 자긍심이 상처 받고 중심을 잃은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비록 속세를 떠난 신분이었지만 민족적 자존심을 잃어가던 민중들에게 호국사상과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워 작은 희망이라도 주고자 저술을 결심했던 것이다.
또한 일연은 ‘삼국유사’를 통해 백제, 신라, 고구려라는 삼국을 한데 묶어 인간의 삶의 모습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천년을 이어온 신라와 신라를 이어 내려온 고려가 한 뿌리라는 깊은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뿌리 깊은 주체적 사고로 책 첫머리에 개국설화인 ‘단군신화’를 실었다. 민간 자료가 상당 부분 차지하는 것은 일연 자신이 왕실과 가까우면서도 피지배 계층인 민중에게 더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의 명령에 따라 편찬된 정사인 ‘삼국사기’의 이면에 가려진 왕권 중심의 유교적 통치이념을 비판하였다. ‘삼국사기’에 누락된 고대 사료들을 발굴 정리하여 지식인의 역사에서 민중의 역사로, 사대의 역사에서 민족주체성을 지키는 자주의 역사로 우리 역사를 바꾸고자 하였다.
- 삼국유사의 산실 인각사와 보각국사비
이러한 귀중한 삼국유사를 완성한 곳이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에 있는 인각사(麟角寺)이다. 영천 은해사의 말사로서 신라 선덕여왕 11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비슷한 시기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전해지나 당시 전국에 산재한 거의 모든 사찰은 그 권위를 높이려고 ‘의상’ 아니면 ‘원효’의 창건으로 전해져 아무려면 어떠랴. 아무튼 그 뒤 충렬왕 10년(서기1284)에 일연 스님이 중창하고 이곳에서 임종할 때 까지 5년 동안 ‘삼국유사’를 저술했다. 사찰 뒤편 산줄기가 전설 속 동물인 기린의 뿔 모양을 닮았다 해서 인각(麟角)으로 이름 지어졌다. 사찰 앞에는 수많은 백학이 살아 이름 붙여진 학소대가 있으며, 위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병풍처럼 펼쳐진 기암절벽의 절경을 이룬다.
일연스님은 경산에서 출생하여 78세에 보각국사(普覺國師)에 책봉되고, 청도 운문사 주지를 거쳐 인각사로 이적 후 삼국유사를 본격적으로 집필하였다. 일연이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은 인근에 살고 있던 아흔이 넘은 어머니를 가까운 곳에서 돌보기 위한 효행 때문이었다고 한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완성하고 1289년 84세의 나이로 열반에 든다. 인각사는 고려시대 전국 굴지의 사찰로 이름을 떨쳤으나 조선 후기에 와서는 인근 지역의 백성들조차 절의 존재를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없어졌다. 퇴락해 거의 폐사가 되다시피 했는데, 특히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로 심하게 훼손됐다.
인각사는 사실 이렇다 할 볼거리가 없는 아주 조그만 사찰에 불과하다. 지금은 법당과 두어 채의 건물만 남아 있어 썰렁함마저 느껴졌다. 인각사의 큰 절터는 다만 화려했던 옛 영화를 떠올릴 뿐이다. 인각사 터는 사적 제37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부 건물을 복원한 경내에는 보물 제428호로 지정된 보각국사비와 보각국사탑 등이 남아 있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의 글씨 1,904자를 하나하나 집자해 25년에 걸쳐 만들어진 보각국사비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문에 탁본의 대상이 되어 고난의 역사와 세월을 견뎌야 했다. 게다가 임진왜란 때 자획에 균열이 가고, 또 비석 조각 가루를 먹으면 과거에 합격한다는 속설 때문에 사람들이 비석을 갈아 마신 탓에 형체만 남게 되었는데, 최근 4백여 년 만에 복원된 비가 인각사에 세워졌다. 이 비석에는 무신정권과 몽고의 침입, 원나라의 지배라는 험난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고뇌에 찬 삶을 살았던 일연의 생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삼국유사 속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군위는 삼국유사의 고장으로 우리 정신사의 성지이고, 인각사는 스토리텔링의 보고인 ‘삼국유사’를 낳은 곳이지만, 그 흔적이 생생히 살아있거나 유적지가 뚜렷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삼국유사가 국보로 지정된 데에는 서지학적인 가치보다는 그 안에 담긴 콘텐츠 때문일 것이다. 군위는 공해 없는 깨끗한 자연환경을 자랑하며 전통의 숨결이 배어있는 문화유산이 곳곳에 산재한 곳이지만, 정작 ‘삼국유사’와 ‘일연’의 숨결을 가까이에서 느끼기엔 아쉬움이 많다. 그렇다면 일연의 발자국을 따라 삼국유사의 숨결에 가닿는 고대로의 시간여행은 미미한 흔적을 억지로 더듬거릴 게 아니라 콘텐츠 자체에 곧장 다가가는 일이다. 삼국유사가 세상에 나온 지 7백년, 지난 1백년간 관련논문이 3천 건, 현재 활발히 팔리고 있는 관련 서적만도 번역본을 포함해 3백종이 넘는데도 여전히 대중에겐 외면 받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솔직히 삼국유사의 일독 없이 인각사나 그 주변을 찾아서 삼국유사 속 흔적과 향기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성동격서의 속셈으로 찾은 곳이 산성면 ‘화본역’이었다. 주변 환경과 역사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화본역은 70년 전 옛 모습을 간직한 ‘아름다운 간이역’이다. 증기기관차 시절 급수탑이 그대로 있어 옛 추억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하루 두 번 무궁화호 열차가 지나간다. 이끼가 끼고 담쟁이덩굴에 둘러싸인 급수탑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독일 동화 ‘라푼젤’에 나오는 탑으로 불리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인근 산성중학교 폐교에는 소박한 규모지만 옛이야기들을 전시해 놓았고, 벽화마을 어느 집 벽에 그려진 일연스님과 매화나무는 군위가 분명 일연스님과 큰 인연이 있는 지역임을 새삼 느끼게 했지만 솔직히 삼국유사도 일연의 체취도 느끼긴 힘들었다.
최근 사역(寺域)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과 함께 복원을 위한 기초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삼국유사는 문화적 상상력과 창의력이 살아있는 야사인 만큼 개발 역시 콘텐츠 접근에 유념해야겠다. 흘러가는 개별의 삶이 모여 추억이 되고, 그 추억은 쌓여 역사가 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를 단단히 잇고 있다. 결국 세월이 흘러 뒤에 남은 것은 세상을 벌벌 떨게 한 권력도, 화려하고 장엄한 사찰 건물도 아니었다. 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의 힘'이었다. 그러나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역사로서의 가치가 없듯이 우리는 삼국유사를 끊임없이 재해석하고 재평가하면서 삼국유사의 가치를 확장시켜 후세에 전달할 책무가 있다.
첫댓글 현대판 삼국유사가 많이 나와있는데, 삼국유사에 대한 문인들의 연구와 저서도 꽤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제가 본 것은 시조시인이기도 하고 한문 교수인 이종문이 쓴 삼국유사가 재미나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고운기 시인의 저서도 두어권 있고 공광규 시인도 삼국유사에 관해 꽤 깊은 연구를 했었지요. 그리고 고 지준모 선생의 연구자료 책도 있는데 내용이 너무 깊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