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 박물관
루브르의 연혁
루브르 회화 전시관 단면도
루브르에 보관되어 있는 프랑스 회화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프랑스 회화작품의 수는 이 미술관의 전체 소장품의 절반을 훨씬 넘는다. 그리고 프랑스 회화에 관한 한,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들은 그 수준이나 명성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고로 루브르의 회화작품들을 크게 둘로 나누어서 전반부를 프랑스 회화, 후반을 유럽 회화의 소개를 하였다. 프랑스와 1세(1515∼1547년)는 퐁텐블로성(城)을 꾸미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미술가들을 데려오고 또 이탈리아 회화를 꽤 수집했다. 그는 <물랭의 거장(Master of Moulins)>와 같은 당대 프랑스 미술가들의 작품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들을 선택했다. 이 궁전(宮殿) 컬렉션에서 당시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프랑스 회화라면 가족 초상화 정도였다. 장클루에가 그린 프랑스와 1세 자신의 초상화가 아직 보존되어 있는 그런 작품 중의 하나인데, 지금 이 작품은 루브르 미술관이 궁전(宮殿) 컬렉션에서 출발하여 국립 컬렉션이 되었음을 웅변하는, 루브르의 지속성의 한 상징물이 되고 있다. 그 후 프랑스는 오랜 내란의 시기를 맞았으며, 이 동안엔 그 어느 왕도 특별히 미술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새로이 미술에 흥미를 가지고 그림을 주문하기 시작한 왕이 바로 앙리9세인데, 생-제르멩-앙-레이에 있는 뇌프성(Chateau Neuf)의 장식을 담당한 뒤브뢰이으의 몇몇 작품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 시기엔 회화작품의 수집보다도 장식적 계획의 흔적만이 두드러진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는다. 뒤이어 루이 13세가 시몽 부에에게 작품을 의뢰하고 니콜라 푸생에게는 루브르 미술관 내의 그랑드 갈르리(Grande Galerie)장식을 부탁하는 한편, 대형제단화(祭壇畵)를 주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1세가 선보인 미술후원자라고 하는 전통적인 역할을 열정적으로 다시 수행한 사람은 루이 14세였다. 루브르가 프랑스 회화를 제대로 수집하기 시작한 게 바로 그의 치하에서부터였는데, 이 일은 4명의 예술가에 의해 수행되었다. 로마에서 거주하고 있던 푸생과 클로드 로렝, 그리고 궁정 화가였던 르 부륀과 미냐르가 바로 그들이다. 마자랭 추기경(Cardinal Mazarin)이 1661년에 죽었을 때, 그가 모아두었던 5백 46점의 수준높은 작품들이 이 기간 동안에 국왕에게 팔리거나 헌상되었다. 르 브륀은 사망할 때까지의 직책은 궁정 회화감독이었는데, 최초의 궁정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들에 대한 목록을 만들었다. 그 후 보다 체계적인 목록이 1710년 세밀화가(細密畵家) 벨리에 위해 만들어졌다. 그는 총 2천 3백 76점에 대한 목록표를 만들었는데, 그 중 8백 98점은 복사본이거나 작자미상, 혹은 그림이 어떻게 해서 왕실로 흘러들어왔는지 그 연유를 알 수 없는 것들이었으며 개중에는 르 브륀, 베르디에, 미냐르의 작품도 있었다. 나머지 1천 4백 78점의 회화가 컬렉션의 주된 내용이었으며, 그 대부분이 프랑스인들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젤화가 아닌, 왕실의 여러 성들을 꾸미기 위해 벽면에다 그린 장식용 그림들이었다. 이 시기에 <왕실 미술 컬렉션(the Cabinet du Roi)>이 르 보에 의해 루브르의 한쪽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있던 그림들은 베르사이유 궁이나 여타의 왕실 거주지로 점차 빠져나갔 다. 루이 15세는 동시대의 프러시아 국왕이나 독일의 왕자들 제정러시아의 황후나 스웨덴의 여왕과는 달리 회화에 별다른 감흥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피에르 남작 소유의 전설적인 끄로자 컬렉션이 제정러시아의 캐더린 여제(女帝)에게 통째로 팔려나가기도 했다. 그때가 1770년. 카리냔 부동산을 통해 구입한 몇몇 그림들 외에 이 시기에 왕실 컬렉션이 매입한 것은 왕의 거처를 꾸미기 위해 주문한 타피스트리 밑그림 (tapestry cartoons) 이나 유화 몇 점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다. 부셰, 랑크레, 베르네, 우드레, 반루, 프라고나르 등 쟁쟁한 화가들의 주요 작품들이 다 이 시기에 루브르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왕실컬렉션의 일부를 여러 미술가들과 공중에게 공개하기로 결정한 것도 루이 15세 치하에서였는데, 이는 참으로 새로운 사건이었다. 1750년에서 1779년 사이에 1백 10점의 그림이 뤽상부르궁에 전시되었고, 루벤스 갈르리 (Rubens' Galerie Medicis) 라는이름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한나절 동안 정기적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루브르 미술관의 전신(前身)이기도 한 이 최초의 미술관에서 선보인 다양한 프랑스 회화중에는 11점의 푸생작품, 각 4점의 클로드 로렝과 발랑탱의 작품, 그리고 부에, 르쉬에르, 르 브륀, 리고, 앙트완느, 노엘 콰이펠, 미냐르, 라 포스, 상테르, 비비앙, 르므완느 등의 작품이 각각 한두 점씩 들어있었다. 루이 16세는 선왕에 비해 컬렉션 운영문제에 보다 적극적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하는 위대한 사건이 없었더라도 루브르 미술관의 개장(開場)은 실현되었을 것이다. 1774년 왕위에 즉위하자마자 그는 앙지미예 백작을 궁정 컬렉션까지 관장하는 건축감독직에 임명했다. 앙지비에는 기존의 걸작품들이 프랑스 회화를 소생시키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루브르의 그랑드 갈르리 안에 일종의 미술관을 개설할 계획을 세웠다. 모자라는 작품들을 메우기 위해 조직적인 구입정책을 단행했으며, 이렇게 늘린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분류·정리했다. 미술관 보존 및 전시와 관련된 근대적인 이론들이 프랑스에서는 이때 태동되었다. 프랑스 회화들이 빈번히 구입되었으며, 구입 대상 품목엔 당대 화가들에게 주문한 역사화 뿐 아니라, 17세기 초반의 작품, 특히 성 부르노의 생애를 묘사한 르쉬에 같은 이의 작품도 들어있었다. 국민의회 기간이기도 한 1793년 여름, 마침내 루브르는 <중앙 미술관(the Museum Central des Arts)>으로서 공개되었다. 루이 16세의 컬렉션이 국민 전체의 컬렉션이 되는 한편, 혁명의 지도자들은 여러가지 다른 어려운 문제들에 부대끼면서도 군주제 아래에서 사작된 이 일이 결실을 맺도록 열과 성을 다했다. 전 유럽에 걸쳐 배태되어온 '미술관'이라고 하는 개념이 비로소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러나 루브르가 미술관으로 변신하리라는 건구체제하에선 꿈도 꿀 수 없었던 일이라 놀라움과 기쁨은 훨씬 더 컸다. <왕립회화조각아카데미(Academie Royale de Pienture et Sculpture)> 컬렉션의 작품들은 물론, 교회 수도원 귀족들로부터 몰수한 수많은 작품들이 기존의 궁정 컬렉션에 보태어졌다. 주로 미술가들로 구성된 미술관 관리위원회는 어떤 작품들을 루브르에 소장시킬 것인가를 결정했다. 따라서 미술관이 문을 열었을 때 회화는 다양한 세기와 수많은 유파가 놀랍도록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해내었다. 프랑스 회화로서는 르 쉬에와 베르네의 작품이 여러 점 선보였고, 푸생, 부에, 파텔, 샹페뉴, 발랑탱, 뒤게, 부르동, 미냐르, 쥬브네, 데포르트의 대표작들, 트레몰리에르 작품 두 점, 지금은 그러노블에 있는 비뇽 작품 하나, 그리고 당시에는 망프레디 작으로 알려졌던 투르니에의 작품(이는 지금은 르망에 있음) 등이 함께 선보였다. 그 중에서도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그림은 벵센느의 미님므수도원에서 가져온 小 장 쿠생 작인 ≪최후의 심판≫이었다. 작품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났고 급기야 1793년부터 베르사이유궁에 제 2의 미술관을 만들게 되었다. 이름을 <에꼴 프랑세즈 특별 미술관 (the Musee Special de l'ecole Francaise)>이라고 붙였는데, 주로 아카데미 회원들의 작품들이 소장되었다. 1802년까지 3백 52점이 더 추가되었으며, 이 중 푸생 작품이 23점, 르 브윈 작품이 10점, 미냐르 7점, 그리고 부에, 부르동, 르 쉬에, 클로드 로렝, 라 포스, 쉬블레이라, 쥬브네, 리고, 샤르댕, 드와이앙, 톡케, 반루, 라그르네, 베르네 등의 작품이 각각 포함되었다. 당대 화가들 중에는 프라고나르, 그뢰즈, 그리고 비앙의 작품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1804년에 이 미술관은 문을 닫게 된다. 하지만 루브르가 이때까지 모은 작품들은 앞으로 모일 작품들에 비하면 하나의 시작에 불과했다.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시기인 이때의 승승장구하던 프랑스 군대는 전유럽, 특히 이탈리아나 독일의 궁정 컬렉션이나 종교기관에서 가장 진귀한 예술작품들만을 골라 모조리 빼앗았다. 제국의 시기에 관장이었던 데농이란 인물이 특히 이 일에 열성을 보였다. 그리하여 나중에 <나폴레옹 미술관 (the Musee Napoleon)>이 되기도 한 이 미술관은 잠깐 동안에 유럽의 유산을 가장 많이 소유하게 되었다. 한가지 흥미로운 일은 이 시기의 루브르 미술관이 프랑스 회화를 위해 할당한 공간은 상대적으로 매우 협소했다는 점이다. 그랑드 갈르리의 경우 4개 벽면이 북유럽 회화에, 또 다른 4개 벽면이 이탈리아 회화에 할당된 데 반해 프랑스 회화를 위해선 1개 벽면만이 할당되었을 뿐이었다. 워털루 전쟁이 끝난 후 나폴레옹의 꿈은 허공 중에 사라지고, 미술관에 소장되었던 대부분의 전리품들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러한 조치 때문에 루브르의 자원이 고갈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미술관 운영을 위한 지출을 위한 의회가 승인함으로써 이 문제는 다시 국왕의 직접적인 관심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루이 18세의 치세 동안 귀족 및 교히로부터 몰수한 수많은 작품들이 루브르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어서, 위대한 국가적 명물로서의 위용을 계속해서 자랑하고 있었다. 이때부터는 컬렉션이 프랑스 회화쪽으로 치중하게 되었다. 다비드, 지로데, 게랭 등 당대 화가들의 유화작품들도 구입되어, 당대 미술가들의 작품전시를 위해 1818년 문을 연 뤽상부르미술관에 소장되었다. 루이-필립의 치세기간 중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면 아마 <베르사이유 역사 미술관(Musee historique de Versailles)>의 건립일 것인데, 이로 인해 루브르는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히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1848년의 짧은 공화정이 끝나고, 루브르가 미술관과 국립 도서관 및 주기적인 전시공간을 포함하여 혈명기간 동안에 그러했던 것처럼 '인민을 위한 궁전'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는 여론이 제기되었을 때, 제 2 제정은 이 미술관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기를 맞게 되었다. 이 계획을 밀어주는 황제의 추진력에 힘입어 튈르리 궁전과 루브르 궁전을 잇는 거대한 공사가 기록적인 단시간에 완성되었으며, 살 물리엥, 살다루, 살 데제타 등의 거대한 전시실이 함께 완성되었다. 이 기간 중에도 루브르는 간단하게 지속적으로 새식구를 맞아들였지만, 가장 기록적인 사건은 1868년에 드 노르 라 카즈컬렉션을 통째로 흡수한 일일 것이다. 8백여점의 그림이 들어있었던 이 컬렉션은 루브르에 기증한 여러 컬렉션 중 최고의 것이었다. 라 카즈의 기증품을 제외하고는 17,18세기 프랑스 회화를 논할 수가 없을 정도로 이들은 중요한 작품들이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우린 오늘날 라르질리에르, 와토, 샤르댕, 프라고나르의 작품이 루브르에 전시되어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으리라. 프랑스에 다시 들어선 공화정의 포고와 함께 마침내 루브르는 오늘날과 같은 국립 미술관이 되었다. 왕실기금으로 운영될 때와 같은, 일반 미술관도 아니고 왕의 개인 컬렉션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은 이로 인해 완전히 사라졌다. 이때부터 그림을 구입하는 일도 점차 체계적으로 진행되었고, 미술사 연구가 활발해짐에 따라 새로이 발굴되는 프랑스 회화의 수도 점차 늘어났다. 미술품 수집가들의 기증도 줄을 이었고 유증품도 더욱 늘어났다. 토미티에리(1902), 모로-넬라통(1906), 쇼샤르(1910), 까몬도(1911) 등이 그러한 인물들인데, 이들의 기증은 관청을 통한 공식적인 구매가 채우지 못한 틈을 메워주었을 뿐 아니라 19세기 미술에 관한 한 현재 루브르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의 많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게끔 해주었다. 초기 프랑스 회화를 기증한 주요 기증자의 이름을 든다면 슐리히팅(1914), 로베르(1926), 크로이(1930), 쟈모(1941), 바이스테귀(1942), 구르고(1965), 리용(1961) 등이 되겠다. 특히 1897년에 설립된 <루브르 후원회(the Societe des Amisdu Louvre)>의 놀라운 후원이 ≪아비뇽 피에타≫(1905)에서부터 라 투스의 ≪성 세바스찬≫(1979)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회화사상의 몇몇 놀라운 걸작들을 소장하게 해주었다. 최근에는 상속세를 대신해서 미술품을 기증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 통과되었는데, 덕분에 샹 페뉴, 프라고나르, 쿠르베의 주요 작품들이 확보되기도 했다. 현재 진행중인 두가지 큰 계획이 루브르에 있는 프랑스 회화의 전시형태를 조만간 바꾸 어놓을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오르세이 미술관(Musee d'Orsay)>의 건립인데, 여기에는 지금 루브르 자체 내에 있는 여러 전시실들의 재조정이다. 쿠르 카레(Cour Carre)의 2층엔 현재 살다루실(室), 드농실(室), 몰리엥실(室)에 남아있는 19세기까지의 대형 유화들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두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프랑스 회화의 변천상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메워질 것이다. 이 새 전시실들은 현재까지 보관실에서 잠자고 있는 17, 18세기의 대형 그림들까지 포함해서 컬렉션의 전체적인 풍요로움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해줄 것이다. 현재는 소형 유화들만이 정상적으로 전시가 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 작업이 끝나고 나면 프랑스 회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완전히 뒤바뀔지도 모른다. 프랑스 회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주로 루브르가 선보이는 작품들에 좌우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루브르의 전시공간을 더욱 넓히고 관람객의 접근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보다 많은 이들이 이 '인류의 재산'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우리에게 남겨진 미룰 수 없는 과제이기도 하다. 16세기 이전과 16세기1904년에 있었던 한 대(大)전시회는 순전히 프랑스의 프리미티브 회화만을 위한 것이었 는데, 16세기 이전의 프랑스 미술가들의 독창상과 중요성이 새로이 부각되는 기회가 되었다. 14세기 및 15세기의 이탈리아, 플랑드르, 독일 화가들에 대한 연구는 이전부터 충분히 되어 있었는데 반해 같은 시기의 프랑스 화가들에 대한 연구는 전무한 상태였으며,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은 종종 다른 나라의 유파에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사실 <프랑스의 프리미티브>라는 개념 자체도 금세기 이전까진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반 아이크,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은 <나폴레옹 미술관>에 전시되었으나 푸케나 까르통의 작품은 그러지를 못했고, 루브르 컬렉션의 형성과정을 보더라도 중세 프랑스 미술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최근에야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루이-필립의 치세 중 아주 중요한 몇몇 작품들이 이 국립 컬렉션에 들어 왔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푸케의 《샤를르 7세》와 《기욤 쥬브넬 데 쥐르쟁》과 장 에이의 《피에르 드 부르봉》이 그러한 작품인데, 이 작품들은 당시 국왕이 '프랑스의 영광'에 바친다는 명목으로 설립한 <역사 미술관>이 들어선 베르사이유 궁에 소장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당시에는 이들 그림들이 모델 자신의 중요성 때문에 응미를 끌었으며, 심지어 《샤를르 7세》는 비잔틴적인 요소가 가미된 그리스적인 작품이라는 점이 평가되어 구입되었다. 이 그림들은 나중에 루브르로 옮겨지면서야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게 된다. 19세기 후반기로 접어들어 이들 작품에 대한 역사가 쓰여지기 시작하고 또 이들 프리미티브 화가들의 작품을 사모으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수집가들은 현재 루브르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들로 평가되는 그러한 작품들을 공급했다. 《나르본느 정면 제단화》가 1852년 에 구입되었고, 프레데릭 레제가 1863년에 벨쇼즈작 《성 드니의 제단화》를 기증했으며, 이듬해엔 말루엘의 《피에타》가 구입되었다. 그러나 중세 프랑스 미술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04년의 일이다. 이 해에 루브르는 《부르봉 제단화》, 《파리팔르망 제단화》 및 장 에이의 《봉헌자와 성 막달라 마리아》를 구입했다. 이듬해엔 <루브르 후원회>가 걸장 중의 걸작인 《아비뇽 에비타》를 기증했다. 그 이후로는 작품개척이 대체로 뜸한 편이었으며, 1925년에 《장르 봉 초상화》가 장기대부 조건으로 국립 도서관으로부터 제공되었다. 프랑스 동남주 뷔르귄드의 한 대가가 그린 《성모 마리아》와 장 에이의 《샤를르-오를랑》등, 2점의 매우 드물게 보는 소형 그림은 1942년 카를로 드 바이스테귀가 기증한 컬렉션에 들어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 기간 동안에 상당수가 파괴되고 또 무엇보다 사가들에 의한 정당한 평가가 늦어지는 바람에 프리미티브 회화는 매우 귀하다. 이러한 희귀성 때문에 장 드 보메츠의《카르투지오 수도회의 수사가 함께 하는 그리스도 책형(策形)》, 니콜라 드프르의 《성모의 알현》, 이전에는 루브르에 전시되지 못했던 작가들의 작품들, 그리고 전시가 되긴 하되 2류작품으로서만 취급되던 요세 리페링스의 《그리스도 책형》 등의 작품이 최근 발굴 되었을 때 그 의의는 더욱 큰 것이었다. 그나마 16세기 이전 회화를 전체적으로 일별해 볼수 있는 곳도 루브르 뿐이다. 프랑스 16세기 회화를 수집하기 시작한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하나 두드러진 예외라면 장 클루에가 그린 《프랑스와 1세》초상화인데, 이 작품은 1530년경 완성되자마자 국가의 컬렉션에 편입되었다. 당시 왕실 컬렉션에는 상당히 많은 양의 초상화가 포함되어 있었던 듯하다. 1710년 벨리가 작성한 목록에 의하면 선대의 왕과 귀족들의 가족을 그린 소형 초상화가 2백 51점이나 있었다 한다. 현재 루브르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16세기 작품은 로제 드 게니에르가 유증 (遺贈)한 대형 컬렉션에 들어있던 것들인데, 역사적 사건을 그린 판화와 드로잉이 대부분이다. 1716년 그가 사망하고 나자 그의 컬렉션은 <국립도서관>의 전신인 <왕실 미술 컬렉션>으로 일단 편입되었다. 게니에르는 생전에 16세기의 소형 초상화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던 듯 한데, 현재 루브르에 있는 대부분이 그의 컬렉션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작품들은 혁명기에 <프랑스 기념물 박물관>으로 옮겨졌다가 1817년에 되돌아왔으며, 어떤 작품들은 훨씬 훗날 되돌아왔다. 1908년엔 <루브르 후원회>가 상당히 중요한 작품인 프랑스와 클루에 작 《피에르 퀴테 의 초상》을 기증했다. 코르네이유 드 리옹의 《피에르 에이메릭의 초상》은 비교적 최근에 구입된 것으로, 이 작가의 몇 안되는 초상화의 하나로서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 《어느부부의 초상》과 같은 부부 초상화가 1967년에 매입된 것도 주목할 사건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루브르는 16세기 초상화의 전체 컬렉션도 선보이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모델의 개성 표현을 위한 세심한 배려와 정확성의 추구는 북유럽적인 양식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데, 프랑스 회화의 <상표>로까지 부각되면서 다음 세기까지 계속해서 발전해나갔다. 초기 초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보다 더욱 최근의 일이 매너리즘 미술에 보인 관심이다. 16세기에 프랑스로 흘러들어온 이탈리아 미술가들은 프랑스와 1세의 궁전에다 흔히 신화적인 배경을 하고 있는 매우 우아하고 장식적인 회화양식을 들여옴으로써 미술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취미성향을 크게 바꿔 놓았다. 이른바 '퐁텐블로파'라고 하는 이 매력적인 유파는 그림에다 인위적인 액센트를 부과하는 것이 커다란 특징인데 지난 몇십 년 전부터야 연구되기 시작했고 루브르에 전시되기 시작한 것도 아주 최근의 일이다. 유명한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도 루이-필립 통치 중에 구입된 퐁텐블로파의 작품으로서 작품의 모델이 앙리 2세가 총애한 디안느 드프와티에로 추정되어 흥미를 자아내고 있다. 구르몽의《양치기들의 경배》, 에쿠앙성의 예배댱에서 가져온 뒤브뢰이으의 몇몇 작품들, 벵센느의 미님므수도원으로부터 압수한 소(小) 쿠쟁의 《최후의 심판》 등의 몇몇 작품들을 제외하곤 퐁텐블로파 작품의 컬렉션은 기껏해야 최근 60년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다. 대(大) 쿠쟁 의 《에바 프리마 판도라》는 1992년에 기증되었고, 유명한 《아름다운 가브리엘과 마레샬드 발라니》는 1937년에 구입되었으며, 카롱의 《아우구스투스와 시빌》은 1958년에 들여 왔다. 특히 최근들어 퐁텐블로파의 모든 것을 보여줄 컬렉션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1970년에 구입한 16세기 중엽 작품 《그리스도의 사랑》과 1973년에 구입한 루카 페니작 《오통의 정의》도 들어있다. 17세기루브르 컬렉션의 역사를 주의깊게 살펴보면 17세기에는 회화에 대한 취미상의 변모가 일어나고 복잡·다양한 양상이 전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기증 작품들에 의해 점진적으로 형성되어온 컬렉션은 처음엔 왕들의, 나중에는 미술가들의 편애를 반영하고 있다. 루이 13세는 별로 많은 작품을 모으지는 않았으나 소유하고 있던 작품들은 모두 다양한 목적으로 그려진 것들이었다. 3명의 비유적인 인물이 그려져 있는 부에의 작품 생-제르멩-앙-레이어에 있는 뇌프성(城)의 장식의 일부분이었고, 푸생이 파리시적에 그린 2점의 대형작품의 경우, 《성찬식》은 1640년에 의뢰받은 것으로 역시 생-제르멩으로부터 왔고, 또한 작품 《시간이 가져다 준 진실》은 천장화인데 재상 리셜리외가 죽으면서 왕에게 남긴 것이다. 다음 왕인 루이 14세는 상당한 미술 애호가였다. 미술 컬렉션을 그럴 듯하게 꾸미는 일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의 작품들은 주로 고전풍이었는데, 흔히 로마풍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으로, 힘차고 남성적이며 대비가 뚜렷한 서사시적인 특징을 갖고 있었다. 사실컬렉션 자체가 푸생, 클로드로렝, 발랑탱의 작품들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이 반쯤은 로마사람인데다가 이들 자굼만이 그래도 16·17세기 이탈리아 거장들의 작품과 어깨를 겨룰 수 있었다. 물론 이 컬렉션에는 왕실 전용 미술가였던 르 브윈, 미냐르의 작품도 들어있었다. 지금 루브르에 있는 38점의 푸생 작품 중 31점이 이때 이미 확보되었을 정도로 루이 14세의컬렉션은 굉장한 것이었다. 1665년 리셜리외 공작으로부터 13점의 유명한 유화작품을 사들였는데 그 중엔 《4계절》, 《디오렌느》, 《엘리제와 레베카》, 《아슈도에서의 역병(疫病)》 그리고 르 노트르는 《간음한 여인》, 《사람들에게 세례를 배풀고 있는 성 요한》,《파라오의 딸에게 구출되는 어린 모세》 등의 작품을 바쳤다. 루브르에 있는 클로드 로렝의 작품 중 10점은 루이 14세의 컬렉션에서 왔고, 몇 점은 리셜리외 공작에게서 구입한 데 반해 나머지는 거의 르 노트르가 기증한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때 교회로부터 몰수한 몇몇 작품을 제외한 르 브린의 거의 모든 작품과 대부분의 미냐르의 작품 역시 왕의 컬렉션에서 루브르로 옮겨진 것이다. 그러나 이 컬렉션이 위의 작가들 작품에만 국한되어 있었던 건 아니다. 1710년에 작성된 목록표에 의하면 실로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이 포함 되어 있었던 바, 그 중엔 블랑샤르의 《그리스도의 사랑》, 페리에의 《아시스와 갈라테아》, 부르동의 《알렉산더의 무덤에서의 아우구스투스》, 그리고 지금은 루엥에 소장되어 있는 《성 처녀와성 엔느》와 《미네르바와 뮤즈》를 포함한 스텔라의 작품 3점 있었다. 루이 15세는 장중하고 영웅적인 작품을 좋아했던 증조부의 취미를 그대로 물려받았음을 말해주는 그러한 작품들을 주로 구입했다. 그는 제수이트교단의 지위가 약화된 틈을 타서 1763년 이들로부터 푸생의 대작 《성 프란시스 사비에르》를 헐값에 사들였다. 이 시기에 장 드 줄리엔느는 부에의 《사원에서의 아기 그리스도 알현》을 사들여 이를 아카데미에 기증했는데, 이는 훗날 아카데미 컬렉션과 함께 루브르로 들어왔다. 왕은 1742년 카리냔 대공 소유의 발랑탱 작품 2점도 사들였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17세기 미술의 다른 측면을 높이 샀는데, 이는 이전의 왕실의 미술품 수집가들에겐 무시되어 온 측면이었다. 루이 14세의 로마풍 취미와는 다리 루이 16세와 그의 건축감독인 앙지비예 백작은 흔히 말하는 <파리풍(Parisian)>의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푸생은 여전히 높게 평가되었으나, 보다 절제되고 기묘하며 세련된, 라그르네와 같은 18세기 신고전주의 미술가들의 초기작품들을 연상시키는 맑고 부드러운 색채가 주조를 이루는 이들 파리풍의 작품들을 연상시키는 맑고 부드러운 색채가 주조를 이루는 이들 파리풍의 작품들을 모으는 데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지금은 널리 알려져 있는 오스타슈 르쉬에르 같은 화가가 전형적인 파리풍의 작가였다. 1776년 왕실 컬렉션에 시리즈로 제작된 작품이 두 가지가 들어왔다. 그 하나는 파리 샤르트리즈 수도원에 있던 것으로 22편에 걸쳐 성 브루노의 생애를 묘사한 작품인데 앙지비예백작의 수완에 말려든 승려들이 왕에게 선물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생-루이 서이 랑벨 호텔에 있던 시리즈로 제작된 장식용 그림들로서 <뮤즈의 방(Chambre des Muses)>과 <사랑의 방(Cabinet de l'Amour)>에서 각각 하나씩 가져온 것이다. 동시에 루이 16세는 《한떼의 친구들》이란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 르 쉬에르의 유명한 그룹 초상화와 라 히르의 《읽어버린 우상을 찾기 위해 야곱의 짐을 뒤지는 라방》도 사들였다. 파리풍의 유사한 작품들이 프랑스 대혁명 기간에도 상당히 많이 들어왔다. 대부분이 귀족들로부터 압수한 것들이었다. 라 히르의 소형 유화 2점을 앙지비예 백작으로부터 압수한 것들이었다. 라 히르의 소형 유화 2점을 앙지비예 백작으로부터, 우아하고 개성적인 부르봉의 작품 2점을 팡티에 브리공작과 오를레앙 공작으로부터, 희소가치가 꽤 높은 스텔라의작품 2점을 퀴엔탱-크로포르 컬렉션으로부터 각각 압수하여 들여놨다. 푸생의 《까밀뤼와 팔러리의 교장선생》은 팡티에브르 공작 소유였던 툴르즈 호텔 갈르리 도레(Galerie Doree)의 컬렉션에 남아있던 다른 작품들과 함께 구입되었고, 클로드 로렝의 소형작품 2점은 브리삭 공작으로부터 구입했다. 수도원이나 교회로부터의 차압도 한몫을 했다. 현재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는 필립 드 샹파뉴의 거의 모든 작품과 르 쉬에르, 부르동, 르 브륀, 라히르의 많은 걸작들을 포함한 엄청난 양의 그림들이 그런 과정을 통해 이 혁명기의 국립 컬렉션에 보태어졌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양의 그림들이 유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입작업 역시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서 푸생의 《자화상》같은 작품이 1797년에 정부주도 하에 거래되기도 했다. 19세기의 전반기에는 작품 기증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샹파뉴의 걸작 《어느 남자의 초상》이 미술관장 비방 데농에 의해 1806년에 구입되었고, 샹파뉴의 또 다른 초상화가 1835 년에 구입되었다. 후자는 두 명의 인물이 그려진 초상화인데 망사르와 페롤이 그 모델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푸생의 마지막 작품인 미완성작 《아폴로와 다프네》는 제 2 재정 기간에 구입되었고, 《시인의 영감(靈感)》은 1911년에 비로소 루브르로 들어왔다. 19세기 후반기와 20세기의 초기에는 이른바 '사실주의'라고 일컬어지던 17세기 작품들에 대한 진보적인 입장에서의 재해석이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시각적 각성이 '현실을 그리는 화가들'을 복권시켰다. 라 카즈 컬렉션의 17세기 미술작품들이 주로 사실주의적이었는 데, 여기에는 샹파뉴작인 2점의 대형 초상화와 부르동의 <시골 풍속화> 한 점, 르 넹의 《농부의 가족》와 같은 작품 등이 들어있었다. 1869년과 1915년 사이에 《건초수레》와 《농부의 가족》을 포함한 르 넹 형제의 작품이 7점이나 루브르로 들어왔다. 쿠르베, 밀레, 루소, 등 또 다른 종류의 사실주의를 표방한 19세기 중엽 작가들의 작품이 루브르 컬렉션에 선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의 일이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부터는 프 넹 형제의 작품도 꾸준히 늘려가면서 더불어 정물화도 적극적으로 갖추기 시작했는데, 사실 그때까지 부갱이나 뒤피의 작품을 루브르에서는 볼수 없었다. 조르주 드 라 투르의 작품도 구입했는데, 특히 그의 유명한 《성 요셉과 함께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때쯤 들어왔다. 최근 루브르는 <루브르 후원회>가 라 투르의 유명한 유화작품 2점, 《사기》와 《이레네의 치료를 받고 있는 성 세바스찬》을 기증하면서 더욱 면모를 새롭게 갖추었다. 동시에 《승리》와, 이전엔 《위병소》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었던 《일군의 흡연자들》등 2점의 르 넹 형제의 걸작도 함께 들여왔다. 샹파뉴가 만년에 그린 감동적인 초상화 《아르놀드 당딜리》가 재산세 대신으로 1979년에 들어왔고, 1980년에는 《루브르 후원회》가 부르봉의 서정이 넘치는 작품 《로마 역사의 한 장면》을 기증함으로써 컬렉션의 공백 하나를 메워 주었다. 루브르는 현재 17세기 프랑스 회화의 모든 국면을 보여주는, 비할 데 없이 훌륭한 컬렉션을 소지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보관실에서 잠자고 있는 샹페뉴, 르 쉬에르, 르 브륀, 그리고 푸생의 대형작품들이 조만간 다 같이 전시되면 이 훌륭함은 더욱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형편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채워져야 할 공백은 아직 남아있다. 예를 들어 루브르는 클로드 로렝의 후기 작품과 라 히르의 주요작품을 한 점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발랑탱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카라밧치오의 프랑스인 후계자들의 작품도 지극히 빈약하다. 비뇽이 로마에 머물면서 그린 가장 성공적인 작품 중의 하나인 《어린 가수》와 제노아에서 부에가 그린 《마르카토니오 도리아 왕자》등의 2점의 중요 작품이 그저 최근에 입수되었을 뿐이다. 17세기엔 쟁쟁한 정물화가들도 상당수에 달했으나,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는 것은 몇점 안된다. 현재 이 작품들은 2류로 취급되고 있으나, 이러한 견해는 점차 바뀌고 있는 중이다. 지금은 일류로 추앙받고 있는 조르주 드 라 투르의 경우만 해도, 금세기 초반까지는 그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루이 14세와 통치 말기와 섭정기루이 14세 통치 말기의 미술가들과 그의 조카의 섭정기 미술가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것은 약간 작위적인 냄새를 풍길지도 모른다. 리고의 《루이 14세》와 《시테라섬에서의 출범》은 그 작품들이 생산된 시기의 분위기를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이 두 작품 사이의 격차는 겨우 16년에 지나지 않으나, 전자는 일종의 허세와 엄숙성을, 후자는 세련미와 꿈결같은 우아함을 보여준다. 오랫동안 1700년 전후의 프랑스 회화는 따분하고 아카데믹하며 궁정의 기호에 너무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생각되어져 왔다. 그러나 최근의 활발한 미술사 연구와 루벤스, 티티안 작품에 대한 새로운 재평가에 힘입어 현재는 이 시기 나름의 다양성과 독창성이 크게 인정받고 있다. 라 포스, 쥬브네, 콰이펠, 리고, 라르지리에가 세대차에도 불구하고 청년 와토 및 르므완느 (둘다 젊은 나이에 죽었다.)와 함께 취급되고 있음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기실 그들은 플랑드르파 화가들의 풍요롭고 연한 화풍과 베네치아 화가들의 밝고 경쾌한 색조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루이 14세가 궁전 장식용으로 주문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아직까지 그 궁전에 남아있거나 혹은 다른 곳으로 반출되었다가 원래의 위치로 되돌려지거나 했지만 콰이펠, 라 포스, 데포르트의 몇몇 작품들은 현재 궁전 컬렉션에서 루브르로 옮겨져 있다. 왕의 승전을 묘사한 반 데르 묄랑의 작품이나 파로셀의 작품도 왕실 컬렉션의 일부였으나, 프랑스의 군주정치를 상징하는 리고의 왕의 초상화와 함께 현재 루브르에 있다. 리고의 작품은 원래 루이 14세의 손자인 스페인 국왕 필립 5세에게 줄 선물용으로 제작된 것이었는데, 완성된 그림에 반한 왕이 그 작품은 자기가 갖고 대신 마드리드의 손자에게는 복제품을 보내기로 결정하기로 했다. 루이 15세의 통치기간중엔 다른 작품들이 컬렉션으로 들어왔다. 예컨대 리고는 렘브란트에 크게 영향을 받은 자신이 최후의 작품 《사원에서의 알현》을 왕에게 유증으로 남겼다. 루이 16세는 여전히 콰이펠이나 반 데르 묄랑의 작품을 사 모으고 루이 드 볼로뉴의 유화도 한 점 샀다. 그러나 이때쯤에는 이미 루이 14세의 시기나 섭정기의 작품들에 대한 기호는 한물 갔으며, 그리하여 혁명이 시작되고부터는 새로운 경향의 작품들이 컬렉션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지는 작품이 어느 귀족으로부터 압수한 르므완느의 소형 작품 3점과 파리의 교회들로부터 압수한 쥬브네의 시리즈로 된 작품이다. 왕정복고 때는 리고의 초상화 《보쉬에》와 쥬브네의 초상화 《의사 레이몽 피노》가 구입되었는데, 특히 후자의 작품모델이 루이 14세의 주치의였던 파공이라고 알려져 그 구입이 손쉬웠다. 혁명 기간 중엔 아카데미 컬렉션이 루브르로 들어오면서 이 컬렉션에 들어있던 수많은 걸작들이 함께 들어왔다. 1692년도에 제작을 시작한 리고의 초상화 《데쟈르댕》, 라르질리에르의 《르 브륀의 초상》(1686), 데포르트의 《사냥꾼으로서의 자화상》(1699), 상태르의 《목욕하는 수잔나》와 파테르의 《전원의 축제》(1728)가 이때 들어왔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작품이 바로 와토의 《시테라섬에의 출범》인데, 이 그림은 와토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면서도 오랫동안 루브르에 소장된 그의 유일한 작품이었다. 아카데미 컬렉션에는 다른 중요한 작품들도 있는데, 리고 자신이 아카데미의 유증으로 남긴 작품 《두개의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본 어느 예술가 어머니의 초상》과 쥬브네의 《십자가 강하》가 그러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회화 중에서 현재 루브르가 소장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작품은 1869년 라 카즈 컬렉션의 기증과 함께 수집되었다. 그 자신 화가이자 의사였던 루이 라 카즈는 힘찬 화풍이 지배하는 작품들에 대한 훌륭한 감식안을 갖추었던 사람으로서, 특히 티티안루벤스 렘브란트 등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선호했다. 그의 기호는 앙트완느 콰이펠의 《데모프크리투스》와 르므완느의 《헤라클레스와 옴팔레》에서 잘 보여진다.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는 몇몇 예술가들 작품 컬렉션의 질과 폭은 순전히 라 카즈의 아낌없는 기증 덕분이다. 그의 기증작품엔 라르질리에르의 작품 6점이 들어있는데 개중엔 작가 자신과 그의 가족들이 모델인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어느 가족의 초상》과 같은 작품이 포함되어 있고, 파테르와 와토의 작품도 상당수 들어있다. 한때 나폴레옹 박물관의 관장을 지낸 비방데농의 소유이기도 했던 《파리스의 심판》과 《질레》 등 8점의 와토 작품이 라 카즈로부터 기증되지 않았더라면, 이 시정이 넘치는 프랑스 화가가 지금처럼 루브르에 제대로 구색을 갖추어 선보이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이후론 이 시기 작품으로서 루브르에 들어온 것은 매우 드물었다. 라르질리에르의 작품 몇 점이 가끔 기증되거나 유증되었고, 싸움 현장을 주제로 한 지요의 작품 2점이 1923년 과 1945년에 각각 구입되었으며, 드물게 보는 랑크레의 작품 2점 《심판대》와 《성령의 제전》이 1949년에 구입되고, 와토의 소형 풍경화 한 점이 기증되었을 뿐이다. 최근에는 라르질리에르의 특이한 작품 두 점이 들어왔는데, 1971년에 들어온 조그만 풍경화와 1979 년에 들어온 《장식적 구성》이라는 연극무대를 연상시키는 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라 카즈의 공헌에도 불구하고 아직 와토의 그림들은 부족한 편이며, 《어느 신사의 초상》과 《목욕하는 다이아나》가 최근에 보태어져 약간 상황이 호존되었을 뿐이다. 새 전시실이 문을 열기 전까지는 이 시기의 작품들을 루브르가 얼마나 풍부하게 소장하고 있는지 확실히 평가하기 힘들 것이다. 쥬브네의 작품이 선보이는 광휘에 찬 종교적인 대형 콤포지현, 특히 파리의 <생-니콜라-데-샹>을 위해 그린 《기적의 고기잡이》와 《라자루스의 부활》과 같은 작품은 와토의 시기 중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회화상의 한 단면이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을 웅변해 줄 것이다. 18세기 중엽루이 15세가 미술품을 수집하는 일에 별다른 열의를 보이지 않았던 것은 대단히 유감스런 일이다. 그가 프랑스를 통치하던 시기에 유럽의 다른 나라들의 왕실은 당대의 프랑스 회화를 사들이는데 혈안이 되어있을 정도였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2세가 와토, 랑크레, 샤르댕을 사들인 덕분에 이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샬로텐버그의 영광으로 남아 있다. 그의 누이인 스웨덴의 루이-윌리크는 당시의 프랑스 대사 테생의 조언을 받아들여 부셰나 샤르댕의 작품 중에서도 최고의 작품들만 사들였다. 러시아의 여황제인 케더린 대제는 1770년 남작인 루이-앙트완느 크로자가 죽자 그의 컬렉션을 통째로 사들였다. 전 시대에 걸친 주요작품이 망라되어 있는 이 컬렉션에는 당대의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다른 왕실들의 움직임과는 반대로 루이 15세는 와토나 프라고나르 같은 이의 작품조자 단 한 점도 갖지 못했다. 대신 그는 문 위에 걸어두는 작품을 몇 점 주문했다. 슈와지성의 장식을 위해 샤르댕의 정물과 몇점을 주문했고, 뮈에트성을 위해선 랑크레의 《4계절》같은 작품을 주문했다. 퐁텐블로성을 위해서 반 루의 《사냥 중의 휴식》과 파로셀의 《척탄병의 휴식》을 주문했다. 상당수의 부셰 작품과 《샤에레아스와 카릴휴》란 제목의 프라고나르의 작품 한 점이 루이 15세 통치기간 중에 구입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이젤화가 아닌 타피스트리 카툰이었다. 그래도 그는 다행히 1740년의 살롱 출품작인 《부지런한 어머니》와 《은총》이란 제목의 샤르댕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 두 점을 사들였다. 1751년에서 1774년까지 건축감독이었던 마르퀴드 마릭뉴도 간과될 수 없는 중요한 대형 시리즈물의 제작을 의뢰했다. 요셉 베르네가 1753년에 시작하여 1765년에 완성한 《프랑스의 항구들》이란 시리즈 작품 15점도 그때 의뢰된 것이다. 오늘날 이 작품들은 루브르에 있는 2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마린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루이 16세는 당대 회화에 대해 조부보다 특별히 더 흥미를 가졌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러나 그는 18세기의 가장 세련되고 정선된 미술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 쉬블레이라, 카를반 루, 라우의 작품들을 사들였다. 그는 마르퀴 드 마릭뉴 사망직후인 1782년의 미술품 경매장에서 당시에도 이미 유명했던 《시골신부》라는 그뢰즈의 작품을 사들였고, 위베르 로베르에겐 퐁텐블로성을 꾸미기 위해 《프랑스 유적》을 소재로 한 4점의 대형작품을 의뢰했다. 혁명기에 압수된 작품으로는 앙지비예 백작, 페스트르 세네프 백작, 팡티에브르 공작으로부터 압수한 쉬블라이라 작품 6점이 있었다. 바리 공작부인, 노에 이어 공작부인, 해군재무관 부탱으로부터는 요셉 베르네의 풍경화 몇 점이 압수되었다. 비엥의 작품 두 점과, 당대에 이미 높게 평가되던 그뢰즈의 서정이 넘치는 작품들 중의 하나인 《깨어진 물병》도바리 공작부인으로부터 압수되었다. 아카데미 컬렉션에는 이 시기의 수많은 중요한 작품들이 들어 있었다. 부셰의 《르노와 아르미드》(1734), 샤르댕의 《스케이트》와 《뷔페》, 톡케의 《갈로슈의 초상》과 《르므완느의 초상》(1734), 페로노의 《우드리의 초상》과 《아담의 초상》(1753), 그뢰즈의 《셉티무스 세페루스》(1769) 등이 모두 여기에 들어있었다. 레스투의 많은 작품들이 파리의 교회, 수도원으로부터 가져왔다. 외국에 빼았겼다가 나중에 루브르로 환수된 프랑스 회화 중의 드문 케이스가 쉬블레이라의 대형작품 《시몬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인데, 이 작품은 루이 16세가 12년 전에 손에 넣었던 이 그림을 위한 스케치와 합치기 위해 튀린 근처의 아스티 수도원으로 가져왔다. 한때 '로마인'이었던 쉬블레이라는 엄격하면서도 기묘한 작품을 제작했던 사람으로서 신고전주의 시기에 높게 평가받았던 18세기 전반기의 몇 안되는 화가 중의 한 명이었으나, 루이 15세 시대의 미술가들은 19세기 중반까지도 별로 흥미를 끌지 못했으며, 그들의 작품은 천박하고 부도덕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뢰즈의 작품은 진지하고 도덕적 주제를 많이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방식으로 비난받지는 않았으며, 그래서 《아버지의 저주》, 《배은망덕한 아들》, 《단죄받는 아들》 등 3점 1조로 된 작품이 1820년에 구입되었다. 1849년의 작품 《음악레슨》을 통해 보여준 프라고나르의 재능은 회화에 대한 취미의 변화를 예고해주고 있다. 동일 작가에 의한 작품 《호기심 많은 소녀들》은 1856년의 쇼바죠 선물 (Sauvageot gift)의 부분을 이루었다. 이때쯤 해서 샤르댕의 작품이 특히 높게 평가받았으며, 따라서 루브르가 현재 소장하고 있는 18세기 중엽의 프랑스 회화 대부분을 이루게 된 라 카즈 컬렉션의 기증이 있기 이전인 제 2 제정기에 그의 작품이 7점이나 구입되었다. 라 카즈의 기증을 통해, 루이 15세와 16세가 높게 평가하지 않았던 작품들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올리브 단지가 있는 정물화》, 《구리로 만든 분수식 물그릇》, 《은술잔》을 포함한 샤르댕의 주요작품 13점, 《미역감는 여인들》과 4점의 가공의 인물상 작품을 포함한 프라고나르의 빛나는 작품 9점, 4점의 부셰작품, 드 트로이, 톡케, 위베르 로베르, 라우, 나티에르 및 그뢰즈의 몇몇 작품들이 이때 들어왓다. 곧 일반의 사랑을 받게 된 이 아름다운 작품들은 18세기에는 소형의 매혹적인 작품들만 제작되었다는 인상을 일반인들에게 심어주었다. 라 카즈의 기호에 맞아떨어졌던 이 활기차고 매혹적인 작품들, 주로 수집가들을 위해 제작되었고 또 그들에게 탐욕스러울 정도의 수집열을 불러일으켰던 이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18세기가 사실은 도덕적 역사적 주제를 묘사하는 회화작품, 즉 '고상한 회화' 를 지향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도록 하는 경향이 있다. 라 카즈의 뒤를 잇는 수많은 기증품과 구입작품을 통해 루브르 컬렉션은 계속해서 성장해 나갔다. 《팽이를 가지고 노는 어린이》, 《바이올린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 등 어린이 들을 주제로 그린 샤르댕의 초상화가 1907년 구입되어 곧 유명해졌다. 부셰의 《점심식사》와, 루브르가 지닌 가장 아름다운 작품 중의 하나인 나티에르의 《테생 백작부인》은 1895년 의사 아르실 말레코에 의해 기증되었다. 1915년에는 폴 뷔로에 의해 샤르댕의 《아베의 초상》이 기증되었고, 나타니엘 남작부인과 아르튀르 드 로쉴드 남작에 의해 1899년과 1904년에 그뢰즈 작품 몇 점이 각각 기증되었다. 1915년 바실르 드 슐리히팅의 기증품에는 프라고나르, 그뢰즈, 나티에르, 드루에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었다. 비교적 최근의 경우로는 1945년의 카를로 드 바이스테귀의 기증품 속에 중요한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프라고나르의 《아기천사와 함께 있는 누드》와 《가상의 인물》, 드루에의 가장 세련된 작품인 《드루에 부인, 어느 예술가의 아내》 그리고 나티에르의 대형작품 《청춘의 여신인 쇼르느 공작부인》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소미에의 기증 속엔 흰색과 하늘색이 주조를 이룬 샤르댕의 경이로운 작품 《연필을 깎고 있는 젊은 도안가》가 들어 있었고, 페레이르의 기증 속엔 베르네의 아름다운 풍경화 《나폴리의 정경》이 들어 있었다. 《나폴리의 정경》은 같은 주제를 다른 각도에서 그린 또 하나의 작품과 함께 나중에 짝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리용의 기증 속엔 로베르와 베르네의 유화작품들도 들어 있었 다. 최근들어 가장 주목할 일은 프라고나르의 후기작품 중 핵심작의 하나인 《빗장》을 사들인 일이다. 보다 장중하면서 중요성을 보아 《빗장》에 결코 뒤지지 않는 작품인 쉬블레이라의 《돈 세자르 벤베누티》, 델라포르트의 《보리술이 든 물병이 있는 정물화》, 그리고 부셰의 스케치화 《아브라함의 선물을 받고 있는 레베카》가 1977년에 구입되었다. 기증품으로 들어온 작품들 중에서는 샤를르 앙트완느 콰이펠이 그린 《필립 콰이펠의 초상(필립과 샤를르는 형제임)》(1971년, 프랑스와 하임 기증), 당드레-바르동의 《탄생》 (1972년, 베니토 파르도 기증), 프라고나르의 《하얀 수소》(1976년, 엘렌느 및 미셀 다비드웨이유 기증) 등은 꼭 언급되어야 할 작품들이다. 상속세 대신 미술품을 내는 것을 허락하는 법이 최근에 통과되는 덕분에 루브르 컬렉션은 18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품 3점을 획득하게 된다. 철학자를 그린 프라고나르의 초상화 《디드로》(1974년 접수), 유명한 댄서를 그린 《마리-마들렌느 귀마르》그리고 샤르댕의 《죽은 산토끼가 있는 정물화》(1979년 접수)가 바로 그것이다. 18세기에 루브르의 관장을 지낸 바 있는 위베르 로베르에 의해 시작된, 루브르의 풍경화 수집정책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12년 모르스 페네이유에 의해 한점이 기증되었고, 1946년 이후로는 실내풍경화, 현실적 풍경화와 가상적 풍경화를 망라하여 10점이 구매내지 기증되었다. 이 계획의 하이라이트는 1975년이었는데, 이들 작품은 러시아 제국 컬렉션인 차르스큐-설로 궁전에 오랫동안 소장되어 있었다. 파스텔화는 비록 회화 컬렉션이 아닌 드로잉부에 속하여 있지만 파스텔로 채색된 초상화들이 프랑스 회화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비중 때문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소장작품의 수준이나 양으로 보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루브르 컬렉션은 기존의 왕실 컬렉션, 아카데미 컬렉션, 그리고 19세기와 20세기에 걸친 수많은 구입품과 기증품의 덕분에 생겨났다. 특히 깡땡 드라 투르, 페로노, 샤르댕의 작품들이 포함된 컬렉션의 경우, 그 가치는 필적상대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18세기 중엽의 회화를 루브르 컬렉션이 어지간히 갖추고는 있지만, 그러나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이 시기의 가장 매력적인 것 중의 하나인 초벌 스케치가 거의 없는 편이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17세기 회화와 마찬가지로 18세기 회화도 모든 부면이 다 같이 전시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쿠르 카레에 새 전시실이 들어서면 대형 유화들의 전시가 실현될 것이다. 금세기 초만 해도 관람객들은 지금은 19세기 회화를 전시하고 있는 전시실에서 18세기 회화의 거의 전부를 볼 수 있었는데, 대형·소형·중형 작품들 이 마구 뒤섞여 그림틀이 서로 부딪칠 정도로 촘촘하고 여유없게 전시된 모습이었다. 그러한 북새통은 이젠 허락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대형 작품들을 모두 전시해야 된다는 것이 루브르의 의무이다. 이 의무를 다하는 날 18세기 중엽의 미술에 대한 우리의 시각도 크게 변할 것이 틀림없다. 신고전주의 시대루이 16세 통치의 말년기, 혁명기, 제정기를 함께 포함하는 이 시기를 전통적인 방식대로 세기별로 투박하게 구분하여 이해하던 방식은 새로운 미술사 연구 성과에 의해 오늘날 많이 교정되고 있다. 이른바 '신고전주의'라고 일컫는 이 시기의 회화는 종종 진정한 독창성을 결여하고 있는 차가운 회화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전시물들과 출판물들은 사실상 이 시기가 모순이 가득차고 예술적 개성이 풍부한 지극히 활발한 시기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프랑스 미술가들, 그 중에서도 자크 루이 다비드가 전 유럽에 걸쳐 이 새로운 운동의 기수였으며, 루브르 이외의 그 어느 미술관도 루브르만큼 프랑스에서 신고전주의 회화가 발생·발전해가는 모습을 완전하게 보여줄 수는 없다. 건축감독 앙지비예 백작에 의해 주창된 역사적인 주제를 담은 그림들을 장려하는 정책이 왕으로 하여금 그리스나 로마 역사를 주제로 한 작품을 주문 내지는 구매하도록 이끌었으며, 종종 이는 태피스트리로 제작되었는데 그 중의 여러 점이 현재 루브르에 남아있다. 건축감독은 다비드의 유화작품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와 《브루투스》를 구입토록 했는데 이 작품들은 새로운 조형성과 엄청난 전달력으로 대중과 예술가들을 놀라게 했다. 이는 회화상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해서 퐁텐블로성의 부속 예배당 제단화용으로 주문이 되었던 레뇨의 걸작 《십자가 강하》도 구입했다. 혁명기간 중에 혁명정부는 혁명 이전에 주문되었던 많은 수의 작품들을 사들였다. 다비드의 《미네르바와 마르스의 전투》와 리뇰의 《아킬레스의 교육》(1782)은 아카데미 컬렉션으로부터 입수했다. 페이롱의 《밀티아데스의 장례식》과 마담비제-르브륀의 《딸과 함께 있는 자화상》은 앙지비예 백작으로부터, 고피에의 《야곱과 라방의 딸들》은 베르나르 컬렉션에서, 다비드의 서명이 들어있는 《벨리자리우스》의 복제품은 노에이어 공작부인으로부터 각각 압수했다. 제정기에는 나폴레옹의 치적을 기념하기 위해 당대의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대형 작품들이 많이 주문되었다. 다비드의 《나폴레옹의 대관식》, 그로의 《1799년 흑사병이 휩쓸고 간 야파를 방문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아일로 전장에서의 나폴레옹》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그 중 뒤의 두 작품은 19세기 유럽에 로마풍의 감수성이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최초의 중요한 징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고전주의 시대의 '고상한 회화'의 대부분은 왕정복고 이후 현존하는 미술가들의 작품만을 따로 전시하기 위한 뤽상부르 미술관이 1818년에 설립되어 계획적인 미술품 수집 정책이 실시되면서부터 수집된 것들이었다. 지로데의 《범람》, 《아딸라의 매장》및 《엔디미온의 잠》은 1818년에 사들였고, 1802년의 살롱에서 사들인 《파에드라의 히폴리투스》를 제외한 게링의 나머지 대형작품들은 1871년과 1830년 사이에 사들였다. 제라르의 《큐피드와 프쉬케》는 1822년에 사들였으며, 파리법원용으로 주문되었던 프루동의 《죄를 좇는 정의와 신성한 복수》는 1826년 파리시 당국의 명으로 루브르로 이전되었다. 다비드의 《사빈느의 여인들》과 《레오니다스와 테로모필레》는 당시 브뤼셀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작가로부터 간접적인 루트를 통해 구입되었다. 1823년에는 아르투와 백작이 혁명 전에 이미 다비드에게 주문해서 사들여 놨던 작품 《파리스와 헬렌》을 기증했으며,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은 다비드가 죽은 다음해인 1826년에 열린 그의 작품 경매장에서 사들였다. 19세기 후반기에는 초상화가 루브르 컬렉션에서 구입하는 신고전주의 미술의 주종을 이루었는데, 주로 작가 자신의 후손들이나 초상화의 모델들, 또는 가족들이 기증하거나 유증한 것들이었다. 《딸과 함께 있는 자화상》이 아닌 다른 하나의 《자화상》과 역정과 긴장이 화면 전체에 가득찬 《위베르 로베르의 초상》등 마담비제-르브륀의 걸작 2점을 작가의 조카인 트리피에-르 프랑 부인이 1843년에 기증했다. 다비드의 초상화 《페쿨 씨의 초상》과 《페쿨 부인의 초상》이 그 이듬해에 구입되었고, 1852년에는 제라르가 그린 유진느 이자비 아버지의 초상화 《쟝-밥티스트 이자비》와 다비드의 《자화상》을 유진느 이자비가 기증했다. 1855년에는 몽제 부인이 다비드가 그린 자기 부부의 초상화를 유증했으며, 다비드의 《트뤼덴느 부인》은 1890년 호라스 폴 들라로슈가 기증했다. 그리고 뤼시앙 보나파르트의 첫 번째 부인을 그린 그로의 《크리스틴느 보이예》는 1894년에 입수되었다. 20세기 들어서는 별로 보태진 게 없었다. 그러나 《세리지아 씨의 초상》과 《세리지아부인의 초상》 등 생생하고 싱싱한 이미지를 선보이는 다비드의 또 다른 초상화가 1902년구입되었다. 슐리히팅이 1915년에 기증한 프루동의 《젊은 제피르》, 베른하임 죈느가 1912년 기증한 다비드의 유일한 풍경화 《뤽상부르 공원의 정경》, 그리고 무엇보다 1930년 에스핀느 백작의 딸 크로이 공주가 기증한 에스핀느 컬렉션이 이 시기에 입수된 것들 중에 중요한 작품들이다. 이 컬렉션의 주종은 야외에서 그린 풍경화들인데, 미샬롱의 작품은 27점, 그리고 발랑시엔느의 작품은 놀랍게도 1백 27점이나 들어있었다. 최근 50년 이래로 다비드의 《베르니낙 부인》, 《마이예 씨》, 《보나파르트 장군》, 제라르의 《르세르 부인》, 그로의 《파스퇴르 부인》 등 보다 훌륭한 초상화들이 입수되었다. 신고전주의 미술을 총망라하여 전시하기 위해 최근들어 다른 부분의 작품들이 많이 구입되었다. 게링의 《아민타스의 묘지에 있는 양치기들》, 리뇰의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 그리고 리용의 화가 베리용의 신비한 그림 《꽃이 있는 정물화》가 그런 작품이다. 그러나 보다 깊이있는 컬렉션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작품의 발굴·수집 노력이 여전히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기존의 거장들의 작품은 상당량이 소장되어 있으나 최근에야 재평가되기 시작한 작가들을 포함한 많은 작가들의 작품은 소장되어 있는 경우라도 그 양이 많지 않다. 루브르 컬렉션은 확실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최종 마무리 작업으로서 현재의 공백을 메워, 신고전주의 시기의 모든 뉘앙스를 다 보여주는 보다 완전한 컬렉션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19세기루이 18세와 샤를르 10세의 통치기에는 현존 작가들의 작품을 살롱에서 직접 사들였다. 1819년에 사들인 앵그르의 《로제와 안젤리카》, 1822년과 1824년에 각각 사들인 들라크르와의 《단테와 버질》 및 《키오스 섬의 학살》, 그리고 1828년에 사들인 들라로슈, 드베리아, 슈페 등이 그린 대형 유화들이 이러한 예에 속한다. 전통적으로 왕실은 케케묵고 인습적인 취미의 대변자로 용인되었으나, 이때 구입된 작품들은 그러한 취미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실 때때로 이러한 구입은 용기를 수반하기도 하는데, 엄청난 구설수에 올랐던 제리코의 작품 《메두사의 뗏목》을 사들였던 때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1824년 작가의 사후에 붙여진 경매에서 드드뢰 도르시에 의해 구입된 이 그림은 이듬해 같은 가격으로 루브르 미술관에 팔렸다. 1818년 현존작가의 작품들만을 위하여 <뤽상부르 왕림 갈르리>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뤽상부르 미술관에는 한 대 당대의 모든 회화들이 전시되었었다. 그 작품들은 아주 나중에야 루브르로 옮겨졌다. 왕정복고기에 당대 예술로서 루브르가 확보한 것은 주로 이젤화가 아닌 장식 미술의 영역이었다. 새 전시실들을 한 번 제대로 꾸며보겠다는 열망이 이 건물에 아직도 충분히 연구 되지 못한 인상적인 대형 천정화들을 많이 남겨놓았다. 쿠르 카레의 남익부(南翼部) 1층을 따라 평행으로 길게 늘어선 방들로 이루어진 한 쌍의 통로가 특히 아름다운데, 이는 오늘날 <샤를르 10세 미술실>로 알려진 곳으로 그리스, 로마, 이집트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현재 <오브제 다르 실>로 사용되고 있는, 쿠르 카레 서익부(西翼部)에 있는 사무실의 천정화도 이때 그려진 것이고, 살 페르시에, 살 퐁텐느, 살 뒤샤틀 등 루브르의 중앙 계단 가까이에 있는 방들의 장식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덕분에 천재는 아니었더라도 최소한 성실했던, 그리고 현재 그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그러한 수많은 역사화가들의 야심만만한 작품들이 별도로 구입한다거나 보관실에서 끄집어내어 걸지 않았음에도 루브르에 영원시 전시되고 있다. 이 매머드 장식 계획에 참여했던 작가들 중엔 블롬들, 피고, 알로 M. M. 드롤링, 모세즈와 같은 평범한 작가들도 있지만 마이니에, 하임, 슈네츠, 아벨드 피욜, 쿠데와 같은 일급의 미술가들과, E. 드베리아, A. E. 프라고나르 (장-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아들), L.코니에, H. 베르네 (클로드-요셉 베르네의 손자)와 같은 천재들도 있었다. 재기에 넘치는 작가 바롱 그로의 작품과 화면구성에 극도로 공들인 앵그르의 《신격화되는 호머》 같은 작품도 물론 여기서 빠질 수 없다. 앵그르의 이 작품은 작가의 생전에 철거되었고, 1855년의 만국박람회에 내놓기 위해 이젤화로 변형되었다가, 나중에 발쯔 형제가 그린 복사본으로 대체되었다. 루이-필립 통치기간 동안의 가장 중요한 계획은 베르사이유 성내에 <역사 박물관>을 설립하는 일이었으며, 이 시기의 주요 의뢰작들은 그래서 모두 베르사이유 행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 계획안은 당시까지 유래가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로 실행에 옮겨졌다. 바로이 직전까지 샤를르 10세의 후원 하에 행해졌던 루브르의 장식계획과 맞먹는 거창한 장식 계획은 물론이고, 전시기를 망라하는 완벽한 컬렉션을 루이 14세 이래 최고의 초호화 판으로 꾸밀 계획까지 있었다. 사실 <전쟁의 방>같은 것은 오늘날까지도 일종의 불가사의로 남아 있다. 1885년 루브르는 베르사이유 미술관으로부터 들라크르와의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을 입수했는데, 이상한 서글픔과 비애로 가득찬 이 잊을 수 없는 작품은 베로네제와 루벤스의 위대한 작품들 옆에서 서로 무언의 반향을 주고받으면서 걸려 있다. 들라크르와의 아름다운 작품들은 지속적으로 살롱에서 직접 매입되었는데, 《알제리의 여인들》은 1834년에, 《유태인의 결혼》은 1941년에 각각 매입되었다. 들라크르와 자신의 최고 걸작이자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는 가장 영광스런 그림 중의 하나인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1831년 루이-필립에 의해 구입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작품의 메시지가 주는 영향력이 정부가 보기엔 매우 두려운 것이었기 때문에 뤽상부르 미술관에서는 겨우 몇 주 동안만 전시되었다. 그 후 작품은 작가 자신에게 되돌려져서 1849년 잠시 동안 공개된 이후로는 내내 숨겨져 있었다. 그러다 1855년의 만국박람회 때 다시 햇빛을 보게 되고 1861년부터 뤽상부르 미술관에 재 전시되었다가 1874년 비로소 루브르에 정착되었다. 한가지 역설적인 것은 고전주의 화가로서 라파엘의 성실한 추종자이면서 들라크르와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앵그르는 의외로 정부로부터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그의 작품을 거의 사주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낭만주의 미술의 주창자로서 말썽 많고 혁명적이었던 들라크르와는 앵그르에 비해 훨씬 나았다. 1842년에 앵그르의 초상화 《체루비니》가 구입되었고, 《성찬용의 빵을 들고 있는 동정녀 마리아》는 제작을 의뢰 받았으나 1854년에야 완성할 수 있었다. 루이-필립이 앵그르의 작품으로 루브르 컬렉션에 바친 최대의 기여는, 파리의 <성 페르디낭 예배당>과 드뢰의 <성 루이 예배당>의 창문 스테인드 글라스를 위한 카툰을 부탁함으로써 매혹적인 25점의 카툰을 남기게 한 것이다. 이것들은 1842년과 1844년 사이에 그려졌다. 정부가 제작 의뢰한 쿠튀르의 《로마의 타락》은 1847년에 구입되었다. 단명으로 끝난 1848년의 관대한 공화정 정부는 특히 제리코의 작품을 많이 사들였다. 1849년에 5점을 매입한 수 1851년 루이-필립 소유물의 경매장에서 《총알을 장전하는 황실 근위대 장교》, 《전장을 떠나는 부상당한 황실 근위대 장교》 등을 사들였다. 그러면서 뒤방에게는 <갈르리 다폴롱>의 복원 작업을 맡기기도 했다. 그때까지 완성되지 않은 아치형 천장 가운데 패널은 1850년에서 1851년 사이에 들라크르와에 의해 《피톤을 무찌르는 아폴로》를 묘사한 장면으로 채워졌다. 화면 전체에 걸쳐 서정이 넘쳐흐르는 이 그림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18세기 거장들과 르 브린이 이미 그려놓았던 그림들로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제 2 제정의 미술품 수집 정책은 비교적 절충적이었다. 들로네, 보드리, 카롤뤼-뒤랑, 제롬, 르네퓨, 메소니에 등과 같은 아카데믹한 살롱 미술가들의 작품도 구입되었지만 보다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작품들, 예컨대 코로와 같은 화가의 작품도 구입되었다 그 중 《님프의 춤》을 1851년에, 그리고 <살롱전>에 출품된 유명한 《모르트퐁텐느의 추억》을 1864년에 구입했다. 1867년 뤽상부르 미술관으로 들어간 귀스타브 모르의 《오르페우스》와 같은 작품도 당시에는 전위적인 작품이었다. 그러나 관주도적인 아카데미의 교육을 거부하면서 리얼리즘 운동(Realist movement)을 주창한 위대한 선구자들의 작품은 아직 미술관에의 전시가 허락되지 않았다. 밀레, 쿠르베, 도미에, 트로이옹의 작품은 물론이고 뒤프레의 작품도 아직 전시되지 못한 것이다. 이들 작가들이 죽고 난 다음인 19세기 말엽이 되어서야 이러한 부당성은 차츰 시정되기 시작했다. 쿠르베의 《파도》가 1878년에 구입되었고, 《부상자》를 비롯한 쿠르베의 다른 많은 걸작들이 1881년 그의 화실의 경매를 통해서 구입되었다. 쿠르베의 누이 줄리에트 쿠르베는 같은 해에 작가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의 하나인 《오르낭의 매장》을 기증했다. 밀레의 작품들도 여러 점이 1875년 그의 사후에 붙여진 경매를 통해 구입되었다. 하르트만 부인이 《봄》을 1887년에 , 포메리 부인이 《이삭 줍기》을 1890년에 각각 기증했다. 앵그르의 여러 걸작들이 컬렉션으로 들어온 것도 그의 사후의 일이었다. 리비에르 부부의 의붓딸이 1870년 리비에르 가족의 초상화 3점을, 뒤샤를 백작부인이 1878년 《오이디푸스》와 《봄》을, 모르티에 백작부인이 1886년 《코르티에》를 각각 유증했다. 그리고 《보셰 씨의 초상》은 1878년에, 《발핑송의 요양객》1879년에, 유명한 《베르탱 씨의 초상》과 《오달리스크》는 1899년에 각각 구입되었다. 1911년에 <루브르 후원회>가 《터키 목욕장》을 기증하면서 앵그르 작품의 획득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금세기 초에는 세 개의 커다란 '선물'이 루브르에 날아들었다. 소품 내지는 중품의 그림들이 주종을 이루는 대형 컬렉션들이 루브르로 몰려들면서 드디어 루브르가 코로, 들라크르와, 데캉, 밀레 및 바르비종파 풍경화가들의 작품을 확보·전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02년, 프랑스 태생의 영국인인 파리장 토미 티에리란 사람이 순전히 19세기 회화로만 이루어진 컬렉션을 하나 유증했는데, 여기에는 들라크르와의 《메디아》, 《레베카의 유괴》 및 9점의 소형 유화들과 코로와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수많은 걸작들이 들어있었다. 1906년 에티엔느 모로-네라통이 기증한 컬렉션에는 보다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이 들어있었다. 거기에는 최고 수준에 이른 37점 이상의 코로 작품과, 《바다가재가 있는 정물화》, 《묘지에 있는 어린 소녀》를 포함한 들라크르와의 걸작 수 점,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을 위한 초벌그림 1점, 도미에의 미켈란젤로 풍의 작품 《공화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모로-네라통 컬렉션에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전위적이고 혁신적인 작품으로 용인되던 그러한 작품들이 많이 있었는데, 루브르가 모네, 베르트 모리소, 시슬리, 피사로의 작품들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컬렉션은 오랫동안 <장식 미술관>에서 전시되었으며, 루브르에는 1934년에 들어왔다. 세 번째 선물은 1909년 알프레드 쇼사르의 것으로 코로, 들라크르와, 밀레, 디아즈, 데캉, 뒤프레, 도빅뉴, 메소니에의 작품으로 이루어진 훌륭한 컬렉션이었다. 이 중 어떤 작품은 쇼샤르가 상당한 고가로 구입한 것이었는데, 밀레의 《만종》같은 경우 80만 프랑이나 주고 사들였던 것으로 구입 당시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11년 카몬도란 사람이 유증한 작품 속에도 인상주의자들의 멋진 작품들과 함께 들라크르와, 코로의 걸작들이 들어있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루브르는 특히 19세기 미술에 속하는 작품들을 확보하는 중요한 계기들을 몇 번 맞이했다. 쿠르베의 걸작 《화실》이 여론의 승인과 <루브르 후원회>의 도움으로 1920년에 구입되었고, 낭만주의 미술의 최고 걸작 중의 하나인 들라크르와의 《사르다나팔르의 죽음》은 이듬해에 구입되었다. 자기 선조의 작품이 루브르에 당당히 전시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위대한 예술가의 후손들 및 개인 컬렉션 소유자들의 아낌없는 작품 기증이 이때에도 계속되었다. 첫 번째 범주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누구보다 먼저 바롱 알튀르 샤세리오를 들 수 있다. 1918년의 값진 기증과 1933∼1934년의 유증으로 그의 삼촌테오도르 샤세리오의 작품 43점이 확보되었는데, 이 화가의 천재성이 사장되지 않고 햇빛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조카 덕분이었다. 비슷한 시기인 1926년과 1932년 사이에 있었던 <루브르 후원회>와 <샤세리오 협회>간의 협동 노력이 <쿠르 데 콩트>의 계단에 전시되어 있다가 1871년의 화재로 손상을 입은 그의 작품들을 안전하게 루브르에 소장되도록 해주기도 했다. 최근에는 개인 컬렉션 소유자들의 기증이 자주 있었다. 1942년엔 앵그르의 초상화 《바르톨리니》 및 《판쿠크 부인》과 메소니에의 《바리케이드》를 포함한 소형작품 두 점을 카를로 드 바이스테귀가 기증했고, 1965년엔 코로의 몇몇 작품 및 들라크르와와 도미에의 훌륭한 작품 각 한 점씩을 바론느 구르고가 각각 기증했다. 제임스 N. B 힐은 트로이옹, 코로, 밀레의 작품을 1962년과 1978년에 기증 내지 유증했으며, 쿠르베작인 《피에르-요셉프루동의 초상》과 《프루동 부인》은 프루동의 손녀들이 1958년에 기증했다. 쿠르베의 또 다른 두 점의 작품 《송어가 있는 정물화》와 《개와 함께 있는 누드》는 상속세 대신에 최근에 들어왔다.(1978년과 1979년) 1979년 들라크르와의 작품들로 수놓은 루브르의 현란한 컬렉션에도 불구하고 절실한 필요에 의해 그의 풍경화 《디에프의 벼랑에서 바라다 본 바다 풍경》을 구입했는데, 이 작품은 클로드 모네의 시각이 티티안의 손을 빌어 그린 것 같은 특이한 작품이다. 19세기라는 미술의 광대무비한 영역에 비해 이 세기의 미술은 아직 덜 탐구된 영역이 많이 있기 때문에 19세기를 대변하는 정확한 인상과 19세기 나름의 독특한 혁신성을 강조해 주기 위해 루브르가 무엇을 반드시 전시해야 하는가 하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루브르는 일반적으로 거장이라고 인정된 사람들을 선호할 뿐 아니라, 19세기 후반기의 미술품 수집가들의 취미를 그대로 반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더 큰 다양성과 이 시기의 보다 포괄적인 영역을 포용할 여유가 루브르엔 남아 있으며, 사람들의 작품에 대한 기호 역시도 항상 가변적이다. 유서깊은 <갸르 도로세이>에 19세기 미술만을 따로 소장하기 위한 미술관이 조만간 생기고 나면 현재 루브르가 유지하고 있는 19세기 회화의 균형은 근본적으로 변모될 것이다. 퓌비드 샤반느, 모로, 쿠튀르, 메소니에 및 이른바 아카데미 화가들의 작품은 물론, 쿠르베, 밀레, 도미에 그리고 바르비종파 풍경화가들의 작품도 새 미술관으로 이전될 것이다. 앵그르 들라크르와 샤세리오의 작품도 일부는 이전된다. 그러나 19세기 초반의 주요 작품들, 특히 대형 유화들로 이루어진 독특한 시리즈 작품들은 전세기의 여러 걸작들과 비교 감상되기 위해 여전히 루브르에 남아 있을 것이다.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는 유럽 회화유럽 회화에 대하여세잔느는 한때 "루브르는 우리 모두가 필요로 하는 것, 가장 사랑스러운 것, 그리고 그 이해될 수 있는 그러한 것만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13세기말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회화의 모든 유파를 보여주는 수많은 다양한 컬렉션을 가지고 있으면서, 각양각색의 양식과 포맷을 그처럼 완벽하게 보여주는 미술관은 전세계를 통틀어서 몇 개 안된다. 루브르에 들어 있는 여러 컬렉션은 우리에게 친근한 소형 작품들로부터 기념비적인 대형작품에 이르기까지, 또 프레스코화로부터 완전한 장식용 그림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형의 작품을 포함하는 한편 여러 나라의 다양한 미술 유파들을 빠짐없이 소개한다. 물론 불가피하게 생겨난 심각한 공백과, 공백은 아니지만 다른 부분에 비해 보다 빈약한 그런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루브르 컬렉션이 이처럼 광범위한 영역을 커버할 수 있는 것은 컬렉션의 형성 그 자체가 450여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두고 이루어졌고 또 그것이 독립 미술관이 되기 이전에는 왕실의 컬렉션이었다는 사실 덕분이다. 미술에 대한 기호의 변화와 미술사의 원리에 대한 발견으로 19세기와 20세기에 수많은 새로운 작품들이 입수되었거니와, 기존의 왕실 컬렉션은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거나 별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이 새로 입수된 작품들에 의해 보완이 되고 균형이 잡히게 되었다. 우린 흔히 이 컬렉션이 16세기의 <현대 미술 박물관(Museum of Modern Art)>으로부터 연유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프랑스와 1세는 선왕 루이 12세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는데, 유럽의 모든 왕실이 부러워 할 만큼 시끌벅적하게 당대의 가장 권위 있는 작가들, 혹은 작품을 구입하거나 제작하도록 초청하는 식으로 끌어들였다. 당시의 미술가에 대한 후견인 제도와 왕실 컬렉션을 계속 지탱해주었고 옛 거장들의 작품 역시 구입되었다. 프랑스와 1세의 컬렉션에 당대의 이탈리아 회화가 잔뜩 들어있다는 것은 이 계몽된 왕자의 개인적 기호를 단순히 밝혀주는 정도를 넘어서서 당대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프랑스로 소개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가장 명확한 징표이기도 하다. 앙리 2세와 카트린느 드 메디치가 프랑스와 클루에를 초청했던 것처럼 프랑스와 1세 역시 장 클루에, 쥬 반클레브 등을 비롯한 몇몇 프랑스 및 플랑드르 화가들을 초청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주문했던 그림들은 거의 초상화에만 국한되어 있었던 것 같고, 초상화라면 당시 북구 유럽 미술가들이 최고의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초상화 분야에 대한 북유럽 미술가들의 명성이 왕으로 하여금 자신의 초상화를 티티안에게 의뢰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프랑스 미술가들과 국적은 다르지만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미술가들(앙브로이즈 뒤브와가 그런 인물이었다.)을 가리지 않고 주로 자신의 거처를 장식하는 일을 자주 맡겼던 앙리4세의 통치기간이 끝나자, 왕실이 직접 미술가를 지정·후원하는 짧지만 찬란했던 시기가 마리 드 메디치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녀는 1625년 뤽상부르 궁전 내의 화랑장식을 루벤스에게 부탁했고 동시에 플랑드르 화가 푸르부스, 이탈리아 화가 젠틸레쉬를 고용했다. 이때는 부에, 푸생, 클로드 로렝 등과 같은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프랑스 화가들을 이탈리아에 있었지만 아직 인정을 받지 못할 때였다. 프랑스와 1세의 위대한 전통은 루이 14세에 의해 다시 시작되었다. 1661년 왕위에 오르자마자 왕은 재상 콜베르의 조언을 통하여 왕실 컬렉션을 키우기 시작했으며, 이는 나중에 '태양왕'이라 불린 그 자신의 영광을 증명하는 하나의 상징이 된 것이었다. 이 왕실 컬렉션이 크게 된 이유는 두 번의 작품들을 1662년과 1671년에 각각 사들인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언제나 경탄의 대상이 되어온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걸작들 (다빈치, 라파엘, 티티안, 코레지오, 베로네제 등의 작품들)은 그 대부분이 영국의 찰스 1세 컬렉션으로부터 온 것으로 프랑스와 1세의 컬렉션에 있는 작품들과 합쳐졌고, 카라밧지오나 귀도 레니와 같은 보다 최근 작가의 작품들 역시 왕실 컬렉션으로 들어왔다. 이 왕실 컬렉션은 다른 16세기 회화들, 특히 위대한 베네치아 화가들의 작품과 프랑스 고전주의풍 취미-푸생, 클로드 로렝, 르브륀,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의 작품에 의해 숙성된 취미-에 강력한 호소력을 행사한 로마 및 볼로냐의 17세기 회화들이 계속 입수되면서 더욱 풍요로워졌다. 북구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작품들 역시 홀바인의 인상적인 초상화 시리즈와 베함, 안토니오 모로의 작품을 중심으로 루이 14세 컬렉션에서 잘 전시되고 있다. 네덜란드 플랑드르의 17세기 미술의 입수는 미술품 수집가들과 젊은 예술가들의 취미가 이 세기의 말에 이르러 변화를 겪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렘브란트, 루벤스, 반 다이크와 같은 이상적이고 생생한 표현력을 과시하는 색채가 풍부한 작품들도 여기서 선을 보이게 된다. 수많은 개인 컬렉션들이 루이 15세 치하에서 생겨나서 독일 왕자의 갤러리, 캐더린 대제, 영국의 미술품 수집가들의 작품수집을 위한 금광이 되고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파리가 유럽미술의 중심지의 하나로 부상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이 15세의 컬렉션은 작품을 거의 늘리지 못했다. 1742년에 카리냔 대공의 부동산으로부터 사들인 몇몇 외국작가의 그림들이 보태어졌을 뿐 특별한 구입활동은 없었다. 작품도 대체로 플랑드르나 네덜란드 미술에 영향을 받은 것들이었다. 18세기 중엽쯤부터 사람들은 왕실 컬렉션을 일반에 공개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 오랜 역사의 루브르 궁전 내에 일반 공개용의 고정적인 미술관을 설치하고자 하는 생각이 루이 16세 치하에서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건축 감독 앙지비예 백작은 미술품 수집 계획을 신중하게 세워 이를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의 수집계획은 왕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비싼 작품만을 무턱대고 사들이는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시로는 높게 평가받는 다양한 유파의 작품들을 빠짐없이 보여주고자 하는 사려깊은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른바 '이성의 시대'로 불린 이 시대의 시대정신과 디드로의 '백과전서'적 사유방식이 이러한 노력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프리미티브 화가들은 아직 별다른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혁신적인 일은 스페인 회화가 입수된 일이며, 마침내 왕실 컬렉션에 무릴로 같은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루브르를 공개한다는 계획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확고히 달성되었다. 1793년 루브르에 <중앙 미술관>이 문을 연 것이다. 지금은 국립 컬렉션의 전신인 왕실 컬렉션의 소장품들은 교회 혹은 국외로 이주한 미술품 수집가들로부터 압수한 수많은 작품들에 의해 그 양이 대폭 증가되었다. 그리고 곧 이어 프랑스 군대가 승리를 구가하면서부터는 플랑드르, 네덜란드, 이탈리아, 독일 등지에서 수많은 걸작들을 노획해 들여왔다. 바로 이 작품들을 소장해두기 위해 <나폴레옹 미술관>이란 이름의 전설적인 미술관이 1803년에 건립되었다. 이 미술관에는 주로 외국작가의 작품이 많았었는데, 르네상스와 17세기의 이탈리아 플랑드르 네덜란드 거장들의 작품은 물론, 초기 플랑드르 이탈리아의 거장들, 자칫 영원히 망각 속에 뭍혀 버릴 뻔했던 독일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도 거기에 포함되었었다. 타국의 미술품을 전리품으로 노획하는 일은 오늘날의 국제 관례상으로도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당시에도 국제적인 여론의 화살을 면키 어려웠던 듯하다. <나폴레옹 미술관>은 설립자들의 설립취지에 따라, 특히 이 계획의 주창자이자 감독관이기도 했던 비방 데농의 의지에 맞추어 유럽 제국 시민의 덕성 함양을 위한 <예술의 전당>으로서 성립되었다. 말하자면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함양된 도덕적 지적 진보를 구체화하기 위해, 데농의 말을 빌리자면 '수세기에 걸친 인간 정신의 산물의 상호비교'를 위해 계획 되었던 것이다. 브뤼셀 제네바 마인츠 밀라노 등 유럽의 다른 주요 도시에 프랑스 정부의 자금으로 설립한 미술관들 역시 똑같은 '고상한' 교육적 정책을 따랐다. 워털루 전쟁이 끝나자 연합국에서 파견된 대표들은 1815년 5천 점 이상의 작품을 본국으로 되찾아 갔다. 겨우 1백 점 정도의 작품만이 프랑스 동맹국들에 의해 반환을 면했다. 그러나 기존의 소장품들이 풍부했기 때문에 미술관의 존속은 가능할 수 있었다. 왕정복고 시대와 7월 왕정 시대에는 사람들의 노력이 다른 곳으로 기울여졌다. 즉 루이 18세 치하에서는 당대 미술가들을 위한 <뤽상부르 미술관>의 건립 및 루이-필립 치하에서는 베르사이 유 궁에 <프랑스 역사 미술관>의 건립 및 루이-필립의 스페인 회화 컬렉션을 꾸미는 일이 주된 관심사였다. 그러나 1848년의 혁명과 제2제정 하에서 미술관은 새로운 생기를 부여 받게 된다. 그 이후, 특히 1차 세계대전 때까지 루브르의 큐레이터들은 컬렉션에 결여되어 있는 작품을 구입하는데 주력한다. 그 과정에서 영국이나 독일의 큐레이터들, 나중에는 미국의 미술품 수집가들과도 경쟁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 지금은 공인된 아카데미적 원리가 된 미술사가 초기 르네상스의 거장들로부터 18세기 작가들에 이르는 유럽회화를 새로운 조망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함에 따라 오랫동안 무시되어왔던 작가나 유파가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미술품 수집가들의 끊임없는 작품 구입이 미술품 시장의 작품 품귀현상을 빚기도 했으나, 루브르의 경우 16세기 이전 영역을 비롯한 자신의 여러 결함을 꾸준히 메울 수 있었다. 1863년에 구입한 캄파나 컬렉션의 겨우 14, 15세기 이탈리아 프리미티브 패널화가 1백점 정도나 들어있었다. 스페인 회화, 영국 회화의 양도 증가했으며 18세기 이탈리아 회화도 구입했다. 동시에 미술품 수집가들의 취미 자체가 다양해져서 그들이 기증, 유증한 작품들이 루브르를 자연스럽게 다양화시켰다. 이런 사람 중 제일 먼저 내세우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라 카즈 씨인데, 그의 컬렉션은 1869년 루브르에 입적했다. 19세기에 접어들어 프랑스 회화가 그 양과 영향력에 있어서 전 유럽을 지배하게 되자 미술관 큐레이터들과 프랑스 미술품 수집가들은 더 이상 다른 나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없게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말부터 유럽제국과 미국의 대표적 작품들이 뤽상부르 미술관으로들어오게 되었다. (나중에 이 작품들은 죄 드 폼므 미술관의 현대 외국유파를 위한 특별 전시실로 옮겨지게 된다.) 이때의 수확은 풍성하긴 했으나 고르지가 못했다. 휘슬러의 《예술가의 모친》, 윈슬로우, 호머, 와츠, 펠리짜, 다볼페도의 작품은 구입되었으나 애초에 상징주의를 불러일으킨 장본인들이라 할 수 있는 클림트나 뭉크는 배제되어 있었다. 이 그림들은 다가오는 장래에 모두 <오르세이 미술관>으로 갈 것이다. 1918년 이래로 대규모 구매의 시대는 끝난 듯 했다. 뒤러의 《자화상》은 매입했으나 <루브르 후원회>의 지속적인 도움과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자금의 부족으로 외국의 미술관 이나 미술품 애호가들(특히 미국인들)이 여러 개인 컬렉션으로부터 걸작들을 사 모으는 데비해 루브르는 그러지를 못했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 직전에 다시 한번 '미술관 정신'이 되살아나기도 했다. 광범위한 재조직 작업이 시작되어 전쟁 후까지 지속되었다. 차일드그롤페라이르와 같은 유서깊은 훌륭한 컬렉션들로부터 기증과 바이스테귀 니콜라 리용 살라뱅과 같은 보다 최근에 생간 컬렉션으로부터는 기증이 여러 외국 유파 부분을 살찌웠다. 상속세 대신으로 미술품 내는 것을 허락하는 법령이 공표되고부터 루브르는 필립포, 리피, 루벤스, 고야의 주요작품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새로운 미술품 수집 계획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오늘날 루브르의 전속 큐레이터들은 전임자들과 마찬가지고 새로운 작품을 보태거나 기존의 작품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통해 유럽회화의 완전상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14, 15세기의 이탈리아초기 이탈리아의 거장들이나 프리미티브 화가들은 고전주의에 대한 일반의 편애 때문에 일찍이 르네상스 전성기 시절부터 사람들의 무관심속에 내버려져 있었다. 예컨대 페루지노나 레오나르도 이전의 화가들 작품은 프랑스나 유럽제국의 왕실 컬렉션에선 찾아보기 힘들었다. 14, 15세기 미술가들의 부활은 19세기 초 <나콜레옹 미술관>이 설립되면서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다. 세루 다징쿠르와 같은 몇몇 프랑스 미술학자들과 아르토 드 몽토르, 카쿨 등과 같은 전문적인 미술품 감정가들이 이 시기의 미술을 재발견한 선구자들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독일의 나자렌느파와 프랑스 <트루바도르(중세기 남프랑스의 음유시인) 양식>의 작가들에 대한 찬사도 불러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찬사는 적어도 1825년 경까지는 일반화되지 못했다. 저 아득한 중세 이탈리아 프리미티브화가들의 중요성을 최초로 구체적으로 자각한 인물은 루브르 미술관의 지평을 넓히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던 비방 데농이었다. 1811년 직접 이탈리아로 간 그는 프라안젤리코, 필립포 립피 기를란다이오, 로렌쪼 디크레디 등이 그린 일련의 15세기 플로렌스 제단화를 구입하고. 피사의 성 프란체스코 교회로부터는 더 이전의 작품, 특히 치마부에와 지오토가 그린 제단화들도 구입했다. 그리고 제노아에선 현재 카를로 브라체스코의 작품으로 밝혀진 3폭화(병풍처럼 3폭으로 된 그림)를 구입했다. 나폴레옹 군대에 대항해 싸워 이긴 연합국들이 1815년에 나폴레옹이 빼앗아 간 작품들을 원위치로 돌려보내기 위한 대규모 작업을 시작하였을 때, 다른어느 분야보다 덜 환수된 분야가 바로 14, 15세기 미술분야였다. 《승리의 마돈나》, 성 제노 사원의 패널화 등 만테냐의 작품 몇 점이 루브르에 그대로 남게 되었고, 비방 데농이 모아들인 플로렌스 제단화들도 플로렌스시 당국의 허락으로 그대로 남게 되었다. 그 다음 시기인 왕정복고시대와 7월 왕정시대는 14, 15세기 작품이 거의 컬렉션에 들어온 적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몇몇 구입건은 충분히 언급할 가치가 있다. 성 조르주 코덱스의 거장과 오빌(Ovile)의 거장이 그린 패널화가 트루바두르 풍의 화가 피에르-앙리 레보일 컬렉션으로부터 구입되었고, 1824년에 시뇨렐리의 《성 요한의 탄생》을, 1834년에 시모네 마르티니의 《골고다로 향하는 그리스도》를 사들였다. 마르티니의 작품은 샹프몰에 있는 한 카르투지오 수도원으로부터 왔는데, 다폭화의 한 부분으로서, 나머지 부분들은 안트워프의 <파인 아트 뮤지엄(Fine Arts Museum)>에 현재 소장되어 있다. 이 희귀한 걸작이 몇몇 전문감식인을 제외한 일반인들에게 당시 얼마나 낮은 평가를 받았던가는 이 작품이 팔릴 때의 가격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페루지노, 라파엘의 영향을 크게 받은 움부리아의 2류화가 스파냐의 《탄생》과 같은 작품이 25만 프랑을 호가할 때 이 작품은 단돈 2백프랑에 팔렸다. 제 2 제정기에 캄파나 컬렉션 사건이라고 불린 한 사건이 크게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는데, 이 스캔들이 결과적으로 루브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로마에 있는 한 중요은행의 지배인이었던 마르키 캄파나(1807∼1880)란 사람이 그의 별장에다 고대 유물과 초기 르네상스 거장들의 그림으로 가득찬 유별난 컬렉션을 만들었는데, 작품수집에 열중한 나머지 자기가 근무하는 은행으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빼내서 이를 모두 작품 구입용으로 투자했다. 그러다 1857년 드디어 이 사실이 적발되었다. 캄파나는 체포되어 추방형을 선고받았으며 그의 컬렉션은 경매에 붙여지게 되었다. 유럽제국의 여러 대형 미술관 사이에서 수많은 비밀협상과 치열한 경합이 있은 수, 6백46점의 회화를 포함한 1만1천8백35점의 귀중품으로 구성된 이 컬렉션은 총 4천3백60만4백프랑이란 금액으로 나폴레옹 3세에게 팔려나갔다. 그러나 이후 애석하게도 이 독특한 컬렉션에 들어있던 작품들이 여기 저기로 흩어지게 된다. 1862년 <산업궁전>에서 최초로 일반에게 공개될 때에만 함께 있다가 여러 지방 미술관으로 아무렇게나 갈려나가면서 루브르도 14, 15세기 회화를 약 1백점 정도 확보하게 된다. 앵그르, 들라크르와를 비롯한 당대의 수많은 미술가들의 비난을 무시한 이 지각없는 분산작업의 상처는 그래도 1976년 아비뇽에 설립된 <프티 팔레>에 약 3백점의 프리미티브 회화가 모이면서 지금은 어느 정도 치유된 편이다. 루브르내에 있는 캄파나 컬렉션은 매우 다채로운 편인데, 특히 투스카니파, 베네치아파 및 북구의 여러 유파가 강조되고 있다. 당시 캄파나 컬렉션이 분산되던 시절에 낮게 평가되거나 혹은 지엽적인 것으로 평가되던 여러 작품들이 현재 아비뇽에서 중요작품으로 잘 보관되어 있다. 그 범위도 베르나르도 다디와 같은 지오토의 영향을 크게 받은 플로렌스 화가들로부터 바르톨로메오 비바리니, 만테냐와 같은 화가들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넓다. 그 중 루브르에 있는 걸작들로서 웃첼로의 《산 마리노의 전투》, 코지모 투라의 《피에타》등을 들 수 있다. 이탈리아 프리미티브 회화가 루브르로 들어왔다는 것은 이 그림들이 일반의 무관심과 전투에서 승리했음을 의미한다. 크로웨, 카발카젤, 그리고 베렌슨과 같은 미술사가들의 연구성과에 힘입어 더욱 유명해지기도 한 14, 15세기 미술은 특히 영국의 라파엘전파와 그추종자들에게 크게 추앙받았고, 그때부터 전세계가 열광하는 대상이 되었다. 루브르 당국자들도 컬렉션을 완성시키는 일에 더욱 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쟁 미술관인 <런던 국립 미술관>과 같은 정도의 완전한 모습을 만들어내긴 힘들었지만 그래도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구입했다. 안토니오 다 메씨나, 발도비네티, 야코보, 지오반니 벨리니, 피사넬로, 기를 란다이오 등의 작품이 구입되었고, 피에졸르의 성 도메니코 수도원으로부터는 프라 안젤리코의 우화적 주제를 담은 프레스코화가 구입되었다. 1910년에 에귀페르스시가 《성 세바스찬》을 루브르에 팔았다. 이 작품은 에초 곤자가-몽팡시에 가문의 소유였다. 그 외에도 여러 기증작품이 있었는데, 나타니엘 드 로스차일드 남작부인의 유증이 특히 주목할 만 한 것이었다.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미국의 수집가들 사이에 이탈리아 프리미티브 작품 구입 선풍이 불어 또 한번 주목할만한 작품들이 대량으로 선보이게 된다. 1956년에 사세타의 보르고 산 세폴크로 제단화 3점이 선보였고, 1970년에 이 제단화의 일부인 또 다른 한점이 우연히 발견되어 합쳐졌으며, 1972년에 상속세 대신으로 구입된 작품인 지오반니 벨리니의 《갈보리 언덕》과 필리포 리피의 《에스터 이야기》가 선보였다. 또한 피에르 델라 프란체스카의 충격적인 작품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의 초상》도 발견되었다. 피에르 델라 프란체스카는 그의 부재가 루브르의 한이 되어온 위대한 거장 중의 한명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르코 조포의 《마돈나》가 입수되었다. 16 세기 이탈리아이탈리아 전성기의 르네상스 회화 컬렉션은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루브르 최고의 보고 중 하나이다. 이 컬렉션의 기초는 프랑스와 1세가 닦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당시의 가장 현대적인 미술가들인 이탈리아의 거장들을 자주 초청했다. 그는 그들의 작품이 주종을 이루는 훌륭한 갤러리를 만들었는데, 이 작품들이 그의 개인적인 취향을 위함을 물론 그 자신의 영광과 다른 이들의 삶을 위한 도덕적 교훈으로서의 역할을 해주기를 바랬다. 1516년에 그는 이런 미술가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했던 인물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루이 12세가 한때 이미 그의 후견인 노릇을 한 적이 있다.)를 끌어들이는데 성공했으며 그의 몇 안되는 귀한 작품들을 다시 모으는데도 성공했다. 여기에서 《모나리자》, 《동굴의 성모》(이 작품은 루이 12세의 컬렉션에 이미 소장되어 있었다.), 《머리띠를 두른 아름다운 성모》, 《성 안느와 함께 있는 성모자》, 그리고 나중에 왕실 컬렉션을 떠났다가 17세기에 다시 돌아온 《세례자 성 요한》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동시에 프라 바르톨로메오, 안드레아 델 사르토(그는 1518년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은총》이란 작품을 그렸다.)와 같은 플로렌스의 다른 미술가들 작품도 구입했고, 퐁텐블로성의 장식을 위해서 로소 피오렌티노를 고용했다. 라파엘이 1518년에 《악마를 무찌르는 성 미카엘》과 《성 가족》을 그리고,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가 1521년에 《방문》을 그린 것도 모두 프랑스와 1세의 주문에 의한 것이었다. 그가 컬렉트한 또 다른 중요한 작품들로는 라파엘이 그린 《아름다운 정원사인 성모 (일명, 성모자와 세례자 요한)》와 《친구와 함께 있는 예술가의 초상》, 기울리오 로마노의 《아라공의 요안나》, 그리고 사볼도의 《자화상》이라고 추측되는 그림이 있다. 프랑스와 1세는 티티안에게 자신의 옆모습을 담은 초상화도 부탁했는데 이것은 벤베누토 첼리니가 원형 초상화를 그린 이후인 1538년에 그려졌다. 이상의 기본적인 유산은 오랫동안 퐁텐블로성에 보관되어 있다가 나중에 루브르로 옮겨 졌으며, 루이 14세가 자신의 권위를 상징할 수 있는 화려한 컬렉션을 구상하면서부터 더욱 풍성하게 된다. 1661년에 재상 마자랭의 컬렉션 일부를 합하고 1662년부터 1671년 사이에 은행가 에프라르트 야바흐의 컬렉션을 편입시켜 수준높은 작품들이 다량으로 컬렉션에 들어오게 되었다. 여기에 포함된 작품들로는 코렛지오의 《안티오페》와 《성 캐더린》, 그리고 이자벨라 데스테의 <스튜디올로>에서 온 《우화들》, 라파엘의 《발다사르 카스틸리 오네의 초상》, 《성 조르주》, 《성 미카엘》, 티티안의 《주악》을 비롯한 몇몇 작품들, 특히 《파르도 비너스》, 《그리스도의 강가(降架)》, 《에마우스에서의 저녁식사》, 《장갑 낀 남자》와 베로네제 및 기울리오 로마노의 작품들이 있었다. 이 작품들이 대부분은 찰스 1세의 유명한 컬렉션이 해체되던 1650년경에 런던에서 구입했다. 루이 14세의 컬렉션은 확실히 17세기 초반의 유럽 최고의 컬렉션이었으며, 여기에 들어있던 이탈리아 회화의 상당수는 한때(1627년) 찰스 1세가 거의 통째로 사들였던 만투아에 있는 곤자가 가족 컬렉션으로부터 왔다. 다른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도 루이 14세 컬렉션에 연이어서 들어오게 된다. 브론치노, 로토, 폰토르모, 팔마 벡키오의 작품들과, 애초에 베르사이유의 <그랑 아파트망>의 여러방 중의 하나를 장식할 목적으로 제작되었으나 나중에 단 한 점도 그렇게 되지 못한 야코보바사노의 연작들, 베니스 공화국이 왕에게 기증한 대형 걸작 《시몬의 집에서의 향연》을 포함한 베로네제의 상당수 작품들이 그것들이다. 《시몬의 집에서의 향연》은 나중에 루이15세 통치시적에 건축가 로베르 드 코트가 설계한 베르사이유의 <헤라클레서의 방>을 장식하는 데 사용된다. 루이 15세와 16세 치하에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야신트리고 같은 이는 라파엘의 《베일을 한 마돈나》와 솔라리오의 《푸른 방석과 함께 있는 마돈나》를 카리냔 대공으로부터 사들이라고 충고한 몇 사람 중의 하나다. 이 시기의 또 다른 중요인물인 앙지비예 백작은 왕의 컬렉션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 일반인을 위한 미술관으로 개조하려는 목적으로 체계적인 미술품 수집정책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작품보다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유파나 시기를 밝혀 주는 잘품을 모으는 일에 더 열중하는 상당히 사려깊은 인물이었다. 혁명기와 제국시적에 이탈리아로부터 빼앗은 그림들이 모두 루브르로 들어왔다면 루브르는 확실히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모를 드러내는 '경이의 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한낯 꿈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이다. 1815년 연합국의 대표들은 약탈당한 모든 걸작들을 로마, 플로렌스, 파르마, 베니스, 볼로냐 등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보냈으며 사소한 작품들은 그대로 남겨놓았다. 노트르담에 남겨졌던 틴토렛토의 《파라다이스》, 폰토르모의《성 가족》 티티안의 《가시 면류관》, 바로치의 《할례》 같은 작품들은 1862년에야 루브르로 되돌아왔다. 르 브린의 《시몬의 집에서의 향연》과 교환조로 베로네제의 대형작품 《카나에서의 결혼식》도 남게 된다. 혁명기에 루브르로 들어온 이탈리아 르네상스 작품으로서 계속해서 남게 된 작품은 프랑스 자체 내에서 입수된 것들로 한정되었다. 이자벨과 데스트의 컬렉션에서 온 만테냐, 코스나, 페루지노의 작품들은 리셜리외 성에서 1801년에 압수되었고, 바르톨로메오의 《성캐더린의 신비한 결혼》은 오튄 대성당에서 역시 그의 작품인 《성 토마의 의심》은 리용에 있는 <플로렌스 예배당>에서 각각 압수되었으며, 로소 피오렌티노의 《피에타》는 에쿠엥성의 예배당에서 압수되었다. 19세기에 접어들어 입수된 작품으로는 1857년에 구입된 로토의 《성 제롬》, 《펠루카 별장(Villa Pelucca)》과 《리티 궁전(Palazzo Litti)》, 1853년과 1867년에 각각 입수된 베르나르디노 뤼니의 종교적 주제 및 세속적 주제의 프레스코화 등이 그 중요한 보기들이다. 이 프레스코화들을 통해 뤼니의 회화 컬렉션은 완성되었는데, 그는 조용하고 고요한 우미(優美)를 특징으로 하는 작품으로 많은 19세기 미술애호가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롬바르드 출신의 다른 16세기 초 화가들의 작품 역시 이때 입수되었다. 상당히 많은 작품이 갖추어져 있긴 하지만 아직도 루브르의 16세기 회화 컬렉션은 분명 결함을 지니고 있다. 일반이 매너리즘 미술에 대한 기호를 새로이 가지게 되었지만, 프랑스 미술품 수집가들이 꾸준히 애호해온 르네상스 고전주의 미술에 비해 상당히 빈약한 상태로 루브르에 전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최초의 16세기 작품 구입은 이탈리아 매너리즘 화가들에 대한 다양한 측면을 보다 잘 밝혀내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토록 만들었다. 또한 1966년에 구입된 베카푸미의 《계단 제단화》에 의해 매너리즘 양식이 퐁텐블로파라는 일파에 주도되어 확산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라하를 중심으로 전개된 이 양식의 구체적인 운동양상은 1964년에 구입된 아르킴볼도의 《계절》에 잘 나타나 있다. 15, 16세기의 플랑드르와 네덜란드프랑스와 1세의 컬렉션에 당대 플랑드르 미술가들의 작품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던 사실은 분명한 것 같아 1530년경 퐁텐블로로 온 안트워프의 화가 유스 반 클레베가 왕과 그의 가족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왕실 컬렉션에는 이들 작품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단지 여러 다른 미술관에 흩어져 있는 모작들을 통해서만 이 그림들이 어떠했는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1683년 르 브륀이 작성한 왕의 컬렉션 목록에는 15세기와 16세기 초기의 프랑드르 회화가 서너 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제라르 다비드의 《카나에서의 결혼식》(당시에는 이 작품을 장 드 브루게스 작으로 생각)과 부룬스위크 모노그라미스트와 쥬 반 클레브의 《아브라함의 참회》및 《한 남자의 초상》(당시에는 홀바인 작이라고 생각함) 등이 그런 작품이었다. 한편 <나폴레옹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었던 초기 플랑드르 거장들의 작품으로는 겐트로부터 입수한 반 아이크의 《신비로운 양의 제단화》, 브루게스로부터 입수한 역시 같은 작가의 작품인 《카논 반 데르 팔러의 성처녀》, 그리고 단찌히와 브뤼셀에서 각각 입수한 멩믈링의 3폭화 《최후의 심판》과 《성 크리스토퍼》를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1816년 모두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튀린에서 온 로지에 반 데르 바이덴의 《수태고지》와 오튄 대성당에서 온 얀 반 아이크 작 《로렝 대제상의 마돈나》는 루브르에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다. 이 작품들은 독일 철학자 슐레겔이나 플랑드르 및 독일의 프리미티브 회화 컬렉션을 세우리 했던 부와 세레 형제(이 컬렉션은 지금 뮤니히시의 알테 피나코테크에 있다.) 등 젊은 신봉자들에게는 회화에 있어서의 고딕 양식의 부확이란 이름으로 흥분한 경탄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러한 열광이 널리 확산되지는 못했다. 로마파와 볼로냐파의 이상적인 조화를 추구하는 고전적 취미에 충실했던 스탕달만 해도 멤믈링의 《최후의 심판》이 세속적인 성공을 거둔 데 대해 다음과 같은 시큰둥한 반응을을 보인다.(1814년) "그것은 독일파의 한 서투른 그림에 불과하다... 그것이 성공을 거둔 것은 사람들이 저주받은 자들의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을 보는 걸 좋아하기 때문일 뿐이다." 회화에 대한 전문가들이나 미술사가들 역시 아직 이 유파의 그림을 제대로 알아보는 지식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멤믈링의 《최후의 심판》과 마찬가지로 반 데르 바이덴의《수태고지》와 같은 작품도 종종 독일작가의 작품으로 오해되었다. <나폴레옹 미술관>으로 들어온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작품이라면 1806년 파리에서 구입된 헨틴 메사이스 작 《돈놀이꾼과 그의 아내》를 들 수 있는데, 이 작품엔 특이하게도 작가의 서명이 들어 있다. 왕정복고기와 7월 왕정기엔 별다른 작품이 입수되지 못했다. 다만, 1822년에 《전원에서의 설교》(그림의 배경에 브뤼셀에 있는 성 구들레 교회당이 그려져 있는데, 이 교회당이 작가에게 그와 같은 제목을 부탁했다고 한다.)가 구입되었다. 한편, 1845년에서 1914년 사이에 갑작스러운 구입과 기증이 줄을 잇기도 한다. 예컨대 얀고사에르트의 《카론돌레트 2폭화》는 184년에 구입되었다. 멤믈링은 예외에 속할 정도로 루브르에 대표작들이 잘 전시되고 있는데, 1878년 뒤샤텔 백작부인이 유증한 걸작 《야콥 플로렝과 함께 있는 성모자》, 1860년과 1908년에 각각 구입된 《부활》, 《한 노파의 초상》등 과 같은 작품들이 그의 대표작들이다. 《예레미야의 애가》를 비롯한 디에릭 부츠의 몇몇 작품, 1890년에 구입된 《세다노 3 폭화》와 같은 제라르 다비드의 작품, 퀜틴 메사이스, 쥬 반 클레브, 고사에르트, 프로보스트, 베르나르 반 오를리 등의 작품도 다 이 시기에 들어왔다. 안트워프의 매너리즘 화가들의 작품들, 예를 들어 《롯과 그의 딸들》(이 작품은 오랫동안 루카스 반 라이덴의 작품으로 오해됐었다.)과 1914년 슐리히팅의 유증으로 들어온 《성 요한의 수난》같은 작품들도 루브르 내의 플랑드르 회화부를 더욱 살찌웠다. 1902년 브루게스에서 열린 한 큰 전람회에서 이들 플랑드르 화가들이 당당하게 복권된 것도 이즈음의 일이었다. 마침내 미술품 시장에서의 그들 작품의 희소성을 깨달은 유명 미술관들간의 구매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기시작했다. 루브르의 담당자들은 게르트겐 토트 생 얀의 《라자루스의 부활》과 로지에 반데르 바이덴의 뛰어난 작품 《브라크 3폭화》는 1913년에 구입할 수 있었으나 또 한 거장 휴고 반 데르 구스라의 작품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있다.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매기의 경배》를 소장하고 있던 스페인 몽포르트 수도원은 1914년 이 작품을 심사숙고 끝에 팔기로 하고 내놓았는데 마침 그때 그곳에 도착한 베를린의 카이젤 프리드리히 미술관의 구매사절이 그것을 사가고 루브르 사절단은 그 며칠 뒤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대략 이때부터 이전에는 전시되지 않았던 화가들의 작품이 컬렉션 소장용으로 입수되었다.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미치광이들의 배》가 루브르 관리인의 한 사람이었던 카미유 브누와에 의해 1918년에 기증되고, 양 데 플랑데즈의 《그리스도와 사마리아의 여인》은 1926년에 구입되었다. 이 작품은 미셸 시토우가 이자벨과 공주를 위해 그린 또 하나의 소형 패널화 《성처녀의 대관식》이 그 40년 뒤에 들어오면서 한쌍을 이루게 된다. 영국의 상인 두벵은 요하임 파테니에 작 《성 제롬》을 1923년에 기증했고, 페트루스 크리스투의《피에타》는 1951년에 구입되었으며, 루카스 반 라이덴의 《점장이》는 1962년 르보디의 유증으로 들어왔다. 크리스티안 올라니에가 1973년에 기증한 얀 프로보스트의 진기한 작품 《기독교의 우화》도 주목할 만하다. 16세기 후반기 네덜란드 화가들의 작품을 컬렉션하는데 있어서 여러가지 다양한 기준이 적용되었다. 루이 14세의 컬렉션에 있었던 《비너스와 큐피드》, 《환관(宦官)의 세례》등과 같은 랑베르트 수스트리스의 작품은 당시 가장 권위있는 유파인 베네치아파와 닮은 데가 많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폴 브릴의 수많은 풍경화는 클로드 로렝 및 푸생의 고전주의적이고 이상적인 풍경화와의 연결선상에서 주로 평가되었다. 안토니오 모로의 《추기경 그랑벨라의 난장이》 같은 작품은 왕실 컬렉션에 있었던 반면, 당대 플랑드르 최대의 화가 피터 브뤼겔의 작품은 폴 망츠가 조그맣고 기이한 작품《거지들》을 기증한 1892년까지 한 점도 전시되지 않았었다. 모르니 공작이 1852년에 얀맛시의 작품 《밧세바》를 루브르에 기증했을 때 그는 '점잖치 못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16세기 후반 회화상의 주된 흐름의 하나였던 플랑드르 매너리즘이 결국 루브르에 전시될 수 있었던 것은 코르넬리스 반 달렘의 《농장》(브누아가 1918년에 기증)과 같은 당시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았던 작품이 기증되거나, 오토 반 벤의 《자신의 가족을 그리는 어느 예술가》(1853년 구입), 바르톨로메우스 스프랑게의 《정의》(1936년 구입)와 같은 작품이 구입된 덕분이었다. 17세기 플랑드르플랑드르 회화로서 17세기에 왕실 컬렉션으로 들어온 최초의 작품은 마리 드 메디치의 초청으로 파리에 온 당대 화가들의 작품이었다. 그 중의 한 명이 프란스 푸르부스는 루브르의 《프티 갈르리》에 소장하기 위한 왕비의 공식 초상화와, 교회용인 종교적 주제의 유화 몇 점(여기엔 혁명 중에 압수된 《최후의 만찬》같은 작품도 포함되어 있었다.)을 그렸다. 안트워프의 유명한 거장 루벤스는 프랑스의 앙리에타 공주와 영국의 찰스 1세의 결혼을 위해 1625년에 낙성된 뤽상부르 궁전 《동 갤러리》의 장식그림을 공주의 모친 왕비로부터 의뢰받았다. 그것은 24점의 유화로 구성된 것으로, 플로렌스에서의 출생시부터 그녀의 아들 루이 13세와의 화해를 이르기까지 왕비의 일생 동안의 여러가지 일화들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러 역사적 사실들(어떤 것은 진짜로 일어났던 사건이고 어떤 것은 약간의 가공이 섞인)이 매우 감각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이 작품은 바로크 회화의 최고봉임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당시 프랑스 사람들의 심금을 크게 울리지는 못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당시 파리 사람들의 기호는 이탈리아 고전주의와 그에 대한 진지한 프랑스적 해석이 담긴 그러한 작품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1660년대에 이르러서야 플랑드르 회화가 왕실 컬렉션에 들어왔다. 1661년에 왕실 컬렉션으로 들어온 <마자랭 컬렉션>에 들어있었던 플랑드르 회화 중에는 별로 중요한 작품이 없었다. 그러나 <야바흐 컬렉션>에서 온 플랑드르 회화는 아주 훌륭했는데, 여기에 루벤스의 몇몇 걸작 (《토미리스와 시루스》, 《성처녀와 성자들》)과 반 다이크의 걸작 《팔라틴느의 왕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쯤 파리의 미술계에서는 색채를 중시하는 루벤스파와 고전주의의 이름으로 엄격한 장인 정신의 장점을 지지하는 푸생파 간에 한창 논쟁이 가열되고 있었다. 이 와중에서 로저 드 필르가 루벤스의 뛰어남을 사람들에게 설득력있게 설명하게 되어, 루벤스의 그림을 소장한 <메디치 갤러리>는 새로운 찬미자들을 얻게 된다. 플랑드르 회화 컬렉션이 점점 늘어나고 왕실 컬렉션 역시 새로운 작품으로 보강된다. 《시주자들과 함께 있는 성모》, 《비너스와 불칸》 등의 반 다이크 작품들, 1685년 드오테리브씨에서 사들인 《명절대목장》을 포함한 루벤스의 몇몇 작품, 그리고 폴 브릴과 유스 드 몽페르가 각각 그린 여러 점의 장식용 풍경화가 이때 들어온 작품들이다. 대(大) 얀 브뤼겔의 걸작 《이수스의 전투》는 1693년 르 노트르에 의해 루이 14세에게 남겨진다. 그러나 자기 방에 걸린 테르니에르의 그림을 보고 왕이 "나를 이 허수아비들로부터 벗어나게 해다오"라고 소리쳤다는 일화를 꾸며낸 얘기로는 들리지만은 않는다. 파리의 미술품 수집가들에게 열광적인 인기를 불러 일으켜 많은 젊은 프랑스 화가들이 모방하려 애썼던 북구의 풍속화가 고전주의 미술의 '장려 양식(Grand Manner)'이 여전히 우세했던 베르사이유궁에서는 아직 인기를 얻지 못했음을 말해주는 일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수많은 개인 컬렉션들(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오를레앙 공작의 개인 컬렉션을 들 수 있다.)이 섭정기와 루이 15세 통치기 동안에 생겨나거나 발전해갔음에도 불구하고 왕실 컬렉션은 거의 아무 것도 늘리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히 입수한 작품들은 다들 수준작들이었다. 1741년 카리냔 대공에게서 구입한 루벤스의 《롯의 승천》, 왕실 컬렉션에 들어온 테니에르의 작품으로서 최초의 중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일곱가지 자비》, 반 다이크의 《갈보리》(이 작품은 1749년 한 제수이트파 교회에서 입수되었는데 처음에는 루벤스 작 으로 오해되었었다.), 그리고 1751년 화가 샤를르 요셉 나투와르가 기증한 요르단스의《사원에서 상인들을 내쫒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작품이었다. 앙지비예 백작의 미술품 구입계획에서 플랑드르 회화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개인 수집가들로부터 혹은 상인들(특히 르 브륀)이나 공개 경매장으로 닥치는 대로 사 모은 그의 수집품들은 이제 애초의 컬렉션의 결함을 어지간히 메웠다. 풍속화는 이제 크래스베크와 테니에르의 작품을 통해, 그리고 종교화는 루벤스의 《성 리에뱅의 수난》(이는 플랑드르 제수이트 교회에서의 경매에서 구입되어 1803년 브뤼셀에 있는 한 미술관으로 보내어졌다.)과 《매기의 경배》를 통해 각각 보다 나은 면모를 과시하게 되었다. 요르단스, 반다이크, 그리고 초상화가로서 루벤스의 면모도 각각 《4인의 복음서 저자》, 《찰스 1세》(1775년 뒤 바리 부인에게서 구입), 《헬레나 푸르망과 그녀의 아이들》(1784년 보드레이어 백작의 경매장에서 구입)을 통해 개선되었다. 혁명기에 있었던 귀족들로부터의 재산압수는 풍속화나 소형작품 수집가들(프랑켄, 테니에르, 네에프 등)의 소장품, 그리고 파리의 여러 컬렉션에 상당량이 있었던 정물화들(스니데르, 파이트)의 확보를 가능케 했다. 야콥 반 우스트의 《겐트의 성 마카리우스》(콩티공작으로부터 압수)와 루벤스의 《헤라클레서와 옴팔레》(이 작품은 <오를레앙 콜렉션>이 통째로 영국으로 팔려갈 때 용케 남은 것이다.)등과 같은 종교적이거나 신비주의적인 대형 유화들도 확보되었다. 혁명기에 플랑드르에서 입수된 그림들의 대부분(여기에는 루벤스의 《십자가 강하》도 포함)은 1815년 원래의 나라로 되돌려졌다. 이 극적인 반송이 있고 난 후 루브르이 썰렁해진 벽면들은 무언가로 채워져야만 했다. 그 중 한가지 해결책이 루벤스에 의한 <마리 드 메디치 컬렉션>을 뤽상부르 미술관에서 가져오는 것이었다. 왕정복고기간은 플랑드르 파에 별로 호의적인 기간이 못되었다. 그러나 요르단스 가장 중요한 두 작품《염소 아말테아의 젖을 먹는 쥬피터》와 《어느 남자의 초상》을 이때 구입할 수 있었으며, 《비크 남작의 초상》과 메디치 갤러리를 위한 소묘 한점 등 도합 2점의 루벤스의 신작이 조금 뒤에 구입되기도 했다. 한편, 제 2 제정기에 많은 작품이 들어왔는데, 70점 이상의 작품을 담고 있는 라 카즈 컬렉션이 1869년에 들어온 때문이었다. 파이트와 스니데르의 정물과, 테니에르의 연작, 반다이크의 《성 세바스찬의 수난》, 그리고 특히 루벤스의 일련의 초벌그림과 《인정받은 필로포멘》, 안트워프 제수이트 교회의 천정화를 위한 초벌그림들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지난 100년 동안 루브르로 들어온 플랑드르 회화는 주로 개인이 기증한 것들이다. 빅토르 부케의 《기수》, 아드리앙 부르웨르의 《황혼의 풍경》, 《주노의 꾐에 빠진 익시온》은 슐리히팅이 1914년에 기증했고, 루벤스의 《디도의 죽음》, 반 다이크의 《어느 신사의 초상》은 카를로 드 바이스테귀가 1942년에 기증한 작품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반 다이크 컬렉션에는 제노아의 귀족을 그린 그의 위대한 초상화 작품의 하나가 빠져 있었는데, 이 결함은 에두아르 르 로스차일드 남작의 상속인이 1949년 《마르체사 스피놀라의 초상》을 기증함으로써 메워졌다. 루벤스의 《마차가 배경으로 있는 헬레나 푸르망의 초상》도 상속세를 대신해 이때 함께 들어왔다. 애초 말보로우 공작의 것이었다가 알퐁스 드로스차일드를 거쳐 입수된 이 초상화는 제 2 차 세계대전이래 루브르로 들어온 가장 중요한 보물 중의 하나였다. 17세기 네덜란드17세기 프랑스 사람들은 회화가 다루어야 할 주제 중 최고의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해 <왕립회화조각아카데미>에서도 역사화가 가장 선호되었다. 그래서 일상생활의 하찮은 일들, 요컨대 '저급한' 주제를 주로 그리는 당대 네덜란드의 거장들의 진가는 발견되기 어려웠다. 랑베르 호텔 장식용 풍경화를 그린 (이 그림들은 루이 16세 때 왕실 컬렉션으로 들어옴) 헤르만 반 스와네벨트나 얀 아셀린 같은 몇몇 이태리풍의 네덜란드 화란 풍경 화가들은 당시 프랑스에서 대접을 받고 있기는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이들의 작품이 이상적인 고전주의적 풍경화의 전통과 연결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렘브란트만 해도 그의 생전에는 프랑스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거칠기 짝이 없는 마구잡이 초벌 그림으로밖에 볼 수 없는'(이는 당대의 건축가요 비평가인 펠리비앙 데 자루의 말이다.) 그의 기교에 어리둥절하기 일쑤였다. 나소의 모리스가 1678∼1679년에 외교상의 선물로 왕에게 기증한 프랑스 포스트의 연작 《브라직 풍경》도 그 매력적인 단순성 때문에 오늘날 높게 평가되지만, 당시에는 위대한 예술작품으로서보다는 그저 이국 취향이 돋보이는 하나의 기념물로만 용인되어 <골동품 전시실>로 넘어갔다. 그러나 형편이 이러하다고 해서 루이15세의 구입품 중에 다비즈 데 헴의 훌륭한 작품 《정물》이 포함되어 있는 걸 의외의 일로 치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 뒤를 잇는 모누와이엥과 데스폰르트 같은 작가의 탄생을 예고한 것이며, 후일 마티스에게 영감을 주어 마티스는 이 작품의 모사품을 2점이나 그리기도 했다. 감수성 변화의 최초 징후는 렘브란트의 1660년작 《어느 예술가의 초상》이 작가가 죽은 2년 후인 1671년 왕실 컬렉션에 들어온 때 이미 드러났다. 1684년에서 1715년 사이에 구입된 제라르 두의 몇몇 작품은 보다 의미있는 전환점을 표시했다. 플랑드르 회화의 참맛을 알게 된 프랑스 수집가들은 이때부터 풍경화, 정물과, 그리고 네덜란드의 풍속화도 찾기 시작했으며, 그속에서 그들은 '삶의 진리'나 제작솜씨의 섬세성, 아름다운 빛의 효과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유행을 '렘브란트식 스타일'로 작업하는 젊은 네덜란드 화가들 사이에 급격히 번져갔다. 18세기 전체를 통해 이 유행은 네덜란드 회화가 컬렉션에서 전시되는식으로 나타났으며, 더불어 소형작품이 많았기 때문에 당시 프랑스에 유행하고 있던 '보다 작은 방'들을 꾸미는데 안성마춤이었다. 그래서 우린 샤르댕이나 우리드로부터 프라고나르, 그뢰즈에 이르는 많은 위대한 프랑스 화가들이 그들의 네덜란드 선배들과 가지는 감정상의, 혹은 회화적 취미상의 연관성을 결코 과소평가 할 수 없게 되었다. 1742년 왕실 컬렉션은, 렘브란트의 《토비아스를 떠나는 천사 라파엘》을 포함한 여러 점의 훌륭한 작품을 카리냔 대공으로부터 입수하여 보다 풍부하게 된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매입은 루이 16세 치하에서 있었는데, 르브륀과 같은 상인에 의해 테르 보르흐의 《여인에게 돈을 주는 병사》와 코이프의 《기병대의 출발》이 추가되기도 하고, 일반 경매장애서 구입되기도 했다. 1777년의 랑동 드 브와세 경매에서는 렘브란트의 《에마우스에서의 저녁식사》가, 1784년의 보드레이어 백작 컬렉션 경매에서는 《두 명의 철학자》(그 중 한 명은 사무엘 코닝크로 밝혀졌다.), 《헨드릭케 스토펠의 초상》과 같은 렘브란트의 작품과 야콥 로이스탈의 《태양광선》 등이 구입되었다. 파리의 미술품 수집가들이 네덜란드 회화에 얼마나 매혹당했는지 외국에서 압수한 그림들의 목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렘브란트의 《천사와 성 마튜》 및 2 점의 자화상, 블로에마르트의 《양치기의 경배》, 그리고 테르 보르흐의 《연주회》는 이런 방식으로 들어온 그림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와중에서 18세기 말의 프랑스 회화 역시 네덜란드 회화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브왈리, 마르게리트 제라르, 드롤링은 메츄와 두의 스타일을 재생시켰으며 드마르느와 스베바흐는 우베르만과 베르헴을 모방했다. 혁명기와 제정기에도 몇몇 재미있는 작품들이 들어왔다. 그 중엔 1799년 사보이의 샤를르 에마뉴엘이 기증한 두의 유명한 작품 《수종에 걸린 여인》이 특히 돋보인다. 1795년에 파리로 옮겨진 스타투데르 컬렉션에 있던 작품들 중에선 그 대부분이 1815년 연합국에 의해 제자리고 되돌려졌으나 혼소르스트의 《연주회》와 베르헴, 우베르만, 웨닉스의 몇몇 그림들은 남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거장들에 대한 찬사는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여러 방면에서 주어진다. 프로망탱이 자신의 저서 <지난날의 거장들>(1876)을 통해 표명한 격찬은 그 이전에 발작이 표명했던 견해의 재판이며, 테오도르 루소, 쿠르베, 마네, 르동 등도 네덜란드 미술가들에 대한 격찬을 아끼지 않는다. 19세기 후반은 이러한 찬사가 루브르에 기증품 답지행렬로 결실을 맺는 시기였다. 1857년 렘브란트의 《가죽 벗긴 황소》가 구입되었고, 무관심 속에 내버려졌던 많은 화가들이 최초로 전시되기 시작했다. 1866년 프랑스의 비평가 귀스타브 토레에 의해 그 명성이 소생된 베르메르가 《레이스를 짜는 여자》로 루브르에 들어오고, 홉베마가 《물레방아》라는 작품으로 최초로 전시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필립 코닝크나 얀반 데 카펠러 같은 화가는 아직 이런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그들은 차라리 영국의 수집가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1869년 라 카즈가 기증한 네덜란드 그림들은, 이 훌륭한 미술애호가가 기증한 다른 분야의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최고 수준의 작품들이었다. 이때 들어온 렘브란트의 걸작 중의 걸작 《밧세바》와 프란스 할스의 《집시소녀》, 《어느 여인의 초상》에 비하면 테르보르흐, 반 오스타데, 스텐, 반 고이엔의 작품은 아무래도 한 수 처진다. 개인의 기증 외에 금세기 초 외국의 컬렉션이 통째로 기증된 몇몇 예도 네덜란드 회화부를 살찌우는 데 큰 몫을 했다. 특히 1914년 슐리히팅의 유증과 1930년의 에스핀느 백작 컬렉션의 기증이 유명한데, 후자의 경우 지금은 사무엘 반 후그스트라텐의 작품으로 밝혀진 신비로운 그림 《슬리퍼 한 짝》이 들어 있었다. 최근에는 들어온 그림이 별로 없는 편이다. 그러나 몇몇 기증품과 구입품은 아직 불충분 하나마 몇몇 화가들과 회화운동을 전시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애르트 데 겔데르, 카렐파브리티우스, 테르 브루켄, 쿠르트, 스베르츠와 같은 작가와 매너리즘과 같은 미술운동이 현재 전시되고 있으며, 이전에는 주목받지 못했던 기존 작가의 몇몇 작품 예컨대 솔로몬 반로이스달의 《정물화》등이 현대의 미술사가들의 핵심적 주제로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에 기증된 작품 중에서는 다음의 세 작품이 특히 돋보인다. 1948년 M. 니콜라스가 기증한 렘브란트 작인 《성(城)》(렘브란트의 풍경화는 매우 드문 편인데, 이 작품이 입수됨으로써 렘브란트 컬렉션은 '완성'되었다.) 및 《티투스의 초상》, 그리고 피테르 데 후흐의《술을 마시는 젊은 여인》(이 작품은 원래 알퐁스 데 로차일드의 컬렉션에서 나온 것으로 1974년 피아티고르스키 부인이 기증했다.)이 바로 그것이다. 스페인루이 14세 때까지 프랑스의 왕실 컬렉션에는 스페인 회화가 거의 없었다. 프란시스코 콜랑트의 《불타는 숲》과 벨라스케즈의 《어린 왕녀 마르그리타의 초상》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이것은 필립 4세의 누이인 오스트리아의 앤 왕비가 루브르 궁전 내 자신의 목욕실을 장식하기 위해 걸어둔 것이었다. 루이 16세 치하에서는 《거지 소년》을 포함한 무릴로의 몇몇 걸작품이 르 브륀을 통해 구입되었다. 18세기 중까지는 스페인 회화의 황금시대 화가들이 유럽의 여러 대형 컬렉션에 던진 인상은 그저 미비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무릴로 정도가 환영을 받았으며, 이것도 벨라스케즈에 대한 반발로서였다. 19세기 전반기에 커다란 취향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스페인과 스페인 예술은 크게 유행을 타게 된다. 스페인의 전기소설과 민요가 수많은 작가, 음악가, 그리고 생생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매혹시키는가 하면, 동시에 황금시대 스페인 화가들의 어두침침하면서도 열정적인 작품들이 낭만주의에 싫증나고 아카데미의 공허한 미사여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수많은 젊은 화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많은 스페인 회화가 이 시기에 프랑스로 흘러 들어온 것은 이와 같은 히스파니시즘 (Hispanicism : 스페인의 것을 좋아하고 추구한다는 뜻)의 명백한 증거이다. 여러 중요한 컬렉션이 새로 생겨나고 수많은 스페인 작품들이 나폴레옹 전쟁과 스페인 독립전쟁 기간에 흘러들어왔다. 정치적인 제반상황이 유명한 마레샬 슐 컬렉션을 비롯한 여러 컬렉션의 탄생을 도운 것이다. 1835년 이후에 들어온 작품들은 정상적인 구매를 통해 들어왔는데, 승려계급에 대한 억압과 카를리스트 전쟁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 중엔 금융업자 아구아도의 컬렉션과 스페인 그림만 소장한 루이 필립의 대형 컬렉션(이 컬렉션은 테일러 남작으로 하여금 스페인 전역을 샅샅이 뒤져보게 한 뒤에야 설립된 것으로, 매우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생겨난 것이다.)이 있었다. 루이-필립 컬렉션에는 수르바라, 고야를 비롯한 스페인의 거장들의 작품으로만 수백점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1838년부터 1848년까지 루브르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불행히도 이 그림들 중 현재 루브르에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 1813년 스페인에서 <나폴레옹 미술관>으로 실려온 그림들은 그 2년 뒤 모두 본국으로 되돌려졌다. 1848년 혁명 후에는 <스페인 컬렉션>이 오를레앙가에 되돌려졌다. (그 중 프리미티브 회화 한 점이 우연히 남아있었는데 이 작품은 최근 카탈로니아의 거장 휴게의 작품으로 밝혀졌다.) 이 단명의 독특한 컬렉션은 1853년 런던에서 팔려나갔으며 지금 그 소작품은 전 세계의 여러 미술관으로 흩어져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그 중 한 걸작품이 루브르로 되돌아왔는데, 바로 1908년에 매입된 엘 그레코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이다. 루이-필립의 후원하에 마레샬 슐 컬렉션을 사들이려던 협상은 실패로 끝났으나 루브르는 1858년과 1867년 에 몇몇 주요작품을 힘겹게나마 구입할 수 있었다. 헤레나의 《성 바실》, 무릴로의 《천사들의 부엌》과 《성모 마리아의 탄생》, 그리고 수르바란의 《성 보나벤투라의 생애》 2점과 소형 작품 《성 아폴로니아》가 그것이다. 이 컬렉션의 일부가 1852년 경매에 붙여졌을 때도 루브르는 무릴로의 유명한 작품 《순결한 임신》을 58만 6천 프랑이라는 거금으로 겨우 손에 넣었다. 그런데 1940년 다른 작품과의 교환조건으로 이 작품은 <프라도 미술관>으로 보내졌다. 1865년 최초로 고야의 작품이 루브르로 들어왔다. 《페르디낭 귈러마르데의 초상》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1798년 당시 마드리드에 있던 프랑스 대사가 그 모델로서, 모델의 아들에 의해 유증되었다. 이 작품에 이어 그의 작품은 루브르로 속속 들어왔는데 현재는 고야에 관한 한 스페인 이외의 컬렉션 중에는 가장 훌륭한 컬렉션임을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많은 걸작들을 소장하고 있다. 1902년과 1858년에 각각 구입된 《부채를 들고 있는 부인》과 《페레즈 드 카스트로》, 고야가 그린 여성 초상화 중 최고의 걸작의 하나인 카를로 드 바이스테귀 기증의 《델 카르피오 백작부인상》, 그리고 최근 상속세를 대신해 들어온 《마르께사 드 산타 크루즈》 같은 작품이 현재 소장중인 작품들이다. 19세기 후반기와 금세기의 처음 얼마동안 황금시대 회화는 소정의 목표보다 훨씬 적게 구입되었다. 그러나 라 카즈의 기증작품 중 리베라의 《절음발이 소년》과 같은 작품이 들어있었고, 그 바로 직전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구입되었다. 이 시기에는 프리미티브 회화 붐이 일어 스페인 회화도 프리미티브 회화가 집중적으로 선호되기 시작했다. 1904년 《성 조르주의 생애》(이는 카탈로니아의 화가 마르토렐의 작품으로 나중에 확인되었다.)가 구입되었고, 1905년에는 스페인 혹은 플랑드르 화가의 작품으로 추측되는 작자 미상의 작품 《사제복으로 성 일데퐁소를 축복하는 성모》가 카스틸르로부터, 15세기 발렌치아의 한 다폭화에서 나온 3점의 패널화가 뷔르고 데 오스마 성당으로부터 각각 압수되었다. 바르셀로나 성당을 위해 그렸던 휴게의 제단화 《채찍질 당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그림들은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 방을 최고 수준의 것으로 만들고 있다. 최근에 이제까지 루브르에 빠져 있었던 17세기 거장들-루이스 트리스탄, 후앙 발데스레알, 빈센트 카르두코, 알롱서 카노, 제로니모 야신토 에스피노사-의 주요작품이 들어옴으로써, 또 멜렌데스의 《어느 예술가의 초상》과 《정물화》가 들어옴으로써 불충분하게 나마 18세기가 밝혀져 루브르 내의 스페인 회화 컬렉션은 다양함을 더하게 된다. 어떤 연작들은 빠진 작품이 보충되어 완성되기도 했다. 세르빌에 있는 프란치스카 교회로부터 들어온 무릴로의 작품이 기존에 있던 작품 《천사와 부엌》과 한짝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모든 보물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장대한 보물은 카레뇨 드미란다가 1666년 팜플로나의 트리니태리엔 교회를 위해, 그리고 1964년 카라망 백작부인이 기증한 드라마틱하기 이를 데 없는 작품 《트리니티 교단 설립을 위한 미사》 일 것이다. 17·18세기 이탈리아이탈리아를 비롯한 여러나라의 회화컬렉션이 루브르 내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루이 14세 덕분이다. 그러나 몇몇 현대성을 띤 이탈리아 회화는 이미 루이 13세의 왕실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었다. 마리 드 메디체의 부탁을 받아 오라치오 젠틸레쉬가 1624∼1625년의 프랑스 체류 중에 그린 《지복(至福)》과 같은 작품이 그 한 예이다. 비록 실현되지 않았지만 리도 레니와 그에르시노가 프랑스 왕실의 초청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18세기 말엽까지 프랑스 미술가들에게 지속적으로 영감을 부여한 로마풍 및 볼로냐풍의 장려한 양식에 대한 취미는 1600년대 중엽부터 파리의 미술품 수집가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재상 마자랭의 부탁을 받아 어느 한 화랑(지금 <국립 도서관>이 되었다.)의 천정화를 그렸던 로마의 화가 지오반니 프란체스코 로마넬리는 루브르 내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앤왕비의 <여름의 방(the Appartements d'Ete)>을 프레스코화로 장식해 줄 것을 부탁받았다. 브릴리에르와 루이 필립 포에 의해 1634년부터 1645년 사이에 지어진 한 갤러리와, 그 갤러리를 장식하기 위해 그린 대형유화 연작이 모두 로마의 역사적 에피소드를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보면 당대 프랑스 수집가들의 '장려한 양식'에 대한 편애가 얼마나 심했던가를 알 수 있다. 귀도 레니의 《헬렌의 유괴》와 푸생의 《팔러리 교장》으로부터 시작된 연작을 완성시키기 위해 재상 마자랭은 당시 로마와 볼로냐에서 활동하고 있던 가장 유명한 화가들-구에르시노, 피에트로다 코르토나, 알레산드로 투르치, 카를로 마라타 등-에게 작업을 의뢰했다. 모두 10점의 훌륭한 작품으로 이루어진 이 연작은 혁명기에 루브르로 옮겨졌으나 애석하게도 그 후 여기저기로 흩어지고 말았다. 푸생, 레니, 투르치의 그림들과 각 한점씩의 구에르시노,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작품은 루브르에 그대로 남아있으나, 다른 작품들은 여러 지방 미술관으로 흩어지고 루브르에는 모사품으로 대체되었다. 마자랭 컬렉션과 야바흐 컬렉션이 분산되면서 많은 17세기의 주요작품들이 루이 14세의 컬렉션으로 들어왔다. 여기에는 카라밧치오의 《성모의 죽음》과 헤라클레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귀도 레니의 작품 4 점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귀도 레니의 작품은 만투아의 여러 군주들과 찰스 1세 컬렉션을 거쳐온 것이었다. 그 후 카라치, 레니, 구에르시노, 도메니치오, 프란체스코 알바니와 같은 유명한 볼로냐 미술가들의 그림이 여러 프랑스 및 이탈리아의 미술 애호가들로부터 혹은 구입되고 혹은 기증되어 루이 14세의 컬렉션을 장식하게 된다. 1665년 팜필리 왕자가 카라밧치오의 《점장이》와 함께 안원사 앙드레 르 노트르는 알바니가 그린 자기 소유의 그림을 1693년 역시 왕에게 바친다. 루이 14세 컬렉션에 있는 다른 이탈리아파 그림들 중에서는 페티(그의 작품은 A HREF="159-1.html">《멜랑콜리》가 있다.), 피에르 프란체스코 몰라, 랑프랑코, 바시치아, 카스틸리오네 등의 작품이 돋보인다. 루이 15세의 통치시기인 1741년 카리냔 대공의 유산으로부터 사들인 그림으론 피에트로 다 코르토니, 마라타, 그리고 《사원에서 쫓겨나는 상인들》과 《경배》 등 카스틸리오네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었다. 카스틸리오네는 18세기 프랑스 미술가들이 영감의 주된 원천으로 삼던 인물들 중에는 한사람이었다. 왕실의 <미술관>을 보다 완벽하게 만들 요량으로 루이 16는 앙지비예 백작에 의해 수행된 체계적인 구매작업을 통해 루에르시노의 《라자루스의 부활》을 비롯한 17세기의 그림들과 솔리메나의 《헬리오두루스의 추방》 같은 18세기 초기의 그림들을 입수했다. 18세기에 왕실 컬렉션의 담당자들이 당대 이탈리아 거장들의 작품을 거의 구입치 않은 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었다. 당시 보호무역주의가 성행했는데, 이것이 회화에도 영향을 미친 듯 하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 추세에도 불구하고 세바스디아노, 로사바 카리에라, 지오반니 안토니오 펠레그리니와 같은 베네치아 미술가들이 1716년과 1720년에 파리에 체류했을 때는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엔 오직 <왕립회화조각아카데미>에 있는 그들의 <전신입상>만이 당시으 인기를 짐작케 해 준다. 루이 15세에게 보내진 티에폴로의 작품도 모두 분실되었다. 로마의 거장들 작품이 그들이 당대 프랑스 화가들과 맺었던 강력한 유대관계(이 유대관계가 나중에 신고전주의로 나타난다.)에두 불고하고 역시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당시 프랑스 대사였던 카르디날 드 폴리냑의 수행원이었던 기안 파올로 파니니의 작품만이 남아있다. 혁명기에 우연히 루브르로 들어온 작품으로서 프란체스코 구아르디의 《베네치아의 축제》라고 하는 뛰어난 연작이 있는데, 이것은 1763년에 있었던 총독 알비즈 모세니고의 대관시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 연작들 역시도 제정기에 지방 미술관으로 일부가 이전됨에 따라 흩어져 있는 상태다. 그러나 현재 작품교환계획이 진행 중이어서 이 연작은 곧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17세기 볼로냐 화가들은 <나폴레옹 미술관>에서 잠시나마 영광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대부분은 1815년 본국으로 되돌려졌고, 다행히 남게 된 몇몇 주요한 작품들, 즉 루도비코 카랏치의 《성 히아신스의 눈앞에 나타난 성모》와 안니발레 카랏치의 《성 루케와 성 캐더린의 눈앞에 나타난 성모》, 구에르시노의 《모데나의 수호신》등이 그래도 루브르의 <에밀리안 컬렉션>의 구색을 갖추어 주고 있다. 실제로 볼로냐를 제외하면 이 정도의 작품을 갖춘 컬렉션을 찾기란 쉽지 않다. 전통적으로 프랑스인들이 볼로냐 화가들을 편애하면서도 17세기 유파, 구체적으로 살바토르 로사 같은 이를 제외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롬바르드, 네아폴리탄, 플로렌스 등 이 시기으 다른 유파들 작품은 아주 빈약한 상태로 전시되어 있었으나, 최근들어 이들의 작품을 많이 구입했다. 그러나 아직 여전히 균형이 맞지 않는 상태, 특히 지난 세기 동안 이탈리아 17세기 컬렉션은 늘어난 바가 없으나 18세기부터는 상당히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마리치의 《산타 마리아 경배》(당시에는 카날레토의 작품으로 오해했었다.)가 구입되었고, 루이 필립 치하에서는 파니니의 몇몇 주요 작품들, 지오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의 《최후의 만찬》(1877년에 구입), 그리고 그의 아들 기안 도메니코 티에폴로의 천정화를 위한 초벌그림 《신앙의 승리》가 구입되었다. 티에폴로 부자, 펠레그리니, 세바스티아노 리치, 기암바티스타 티토니 등의 작품과 피아제타의 기념비적인 작품 《성모몽소승천》이 온방의 분위기를 지배하면서 베네치아 컬렉션을 완성시켰다. 《알현》이란 작품을 통해 피에트로 롱기가, 그리고 페레이르와 리용이 기증한 작품을 통해 카날렛토가 각각 마침내 이 컬렉션 내에 자기를 잡게 되었다. 프란체그코 데 무라, 도메니코 몰도의 작품을 통해 네아폴리탄파도 잘 전시되고 있으며, 18세기 초엽 이탈리아 북부의 화가들이 선보인 '어두운' 리얼리즘은 마냐스코가 《보헤미안들의 식사》를 통해 내보이는 전율할 뉘앙스와 크레스피가 《벼룩》을 통해 보여주는 아늑한 친밀감에 의해 잘 드러나고 있다. 독일권 여러나라들독일권 여러나라들의 장구한 회화사를 충분히 보여주기에는 루브르의 소장품이 너무 빈약하다고 우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독일 이외 나라의 미술관이 일반적으로 안고 있는 공통된 문제점이다. 어떤 부분, 즉 독일 회화의 어느 시기에 대해서는 강점을 지니고 있지만, 전 영역에 미쳐볼 때는 고르지가 못한 형편이다. 루브르에 현재 소장되어 있는 독일권 회화 중에 가장 잘 갖춰진 영역은 국제적인 고딕양식의 소형작품들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상당부분이 프랑스 화가의 작품으로 오해되었다는 사실이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크게 일었던 프랑스 프리미티브 회화에 대한 열정적인 관심이 아미 이러한 맹목을 낳았을 것이다. 1400년경의 패널화 《메르세부르그의 주교 오토 폰 호헨슈타인과 함께 있는 장미 화관을 쓴 성모》는 처음에는 프랑스 화가의 작품으로 생각되었으나 현재는 색슨계 미술가의 작품으로 판명되었고, 1420년경의 작품 《책상에 앉아있는 성모》는 오스트리아 미술가의 작품으로 밝혀졌다. 벨기에의 미술품 수집가 카르동이 1921년에 유증한 일명 《샤펠 카르동》으로 불리는 소형 다폭화 역시 라인강 하류지방 미술가의 작품으로 밝혀졌다. 중부 유럽의 가장 세련된 궁정풍의 고딕양식에 속하는 《성모자》는 보헤미아 지방화가의 1420년대 작품이었다. 쾰른에서 활동한 초기 거장들의 주요작품 컬렉션은 《성 불의 기적》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 작품 역시 한때 프랑스 화가의 작품으로 생각되었지만 사실은 스테판 로흐너의 추종자 중 하나가 1440년경에 그린 것으로 밝혀졌다. 이 컬렉션은 회화의 중심지였던 풍요로운 쾰른지방에 살았던 15세기 말엽의 수많은 무명 거장들의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무명의 거장들을 열거해보면 《십자가강하》가 16세기 이래로 파리에 소장되어 있는 <성 바르톨로메오의 거장>, 제단화 《성모 마리아의 일곱가지 기쁨》이 1912년에 구입된 바 있는 <성가족의 거장>, <성 부르노의 거장>, <성 세베리누스의 거장>(그의 작품 《사원에서의 알현》을 1972년 <루브르 후원회>가 기증한 바 있다.), 그리고 <성 우르술라의 거장>(성 우르술라의 생애를 그린 그의 작품 두 점은 연작의 일부분으로서 현재 여러 미술관에 흩어져 있다.)이 포함되어 있다. <성 우르술라의 거장>은 비록 쾰른 태생이지만 《피에타》도 그렸는데, 이 작품은 셍 제르멩 데 프레 교회를 위해 1500년경에 그린 것이다. 그림의 배경으로 아름다운 파리市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르네상스 쾰른파의 마지막 화가인 바르텔 브루인도 1916년에 구입된 대형 초상화 《게일가(家)》를 통해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15세기 독일유파는 거의 전시되지 않고 있다. 독일 프리미티브 회화가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는 걸 보기 위해서는 <디종 미술관>을 방문해야 한다. 이 컬렉션에 있는 여러 패널화 중에는 다음과 같은 작품이 돋보인다. 울름의 거장 바르텔 자이트블롬의 《두명의 성자가 함께 있는 수태고지》(마르세사 아르코나티 비스콘티가 1916년에 기증), 15세기 말엽 라인강 상류지방의 한 거장이 그린 《공주를 구하는 성 조르주》가 그것이다. 1920년에 구입된 신비스런 작품 《어느 여인의 초상》(흔히 《델피의 무당 시빌》로 통한다.) 역시 15세기 작품으로 추측되는데, <플레말르의 거장>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듯하다. 애초엔 이 작품이 16세기 중엽 뮌스터에서 활약한 루드게 톰 링이란 작가의 작품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전성기 르네상스 거장들의 컬렉션을 지배하는 인물이라면 뒤러와 홀바인을 들 수 있다. 루브르가 1922년에 구입한 뒤러의 1493년도 작 《자화상》은 의심의 여지없이 알프스 북부지역 화가가 그린 최초의 독자적인 자화상이다. (루브르에 소장중인, 푸케가 그린 에나멜화 초상화를 제외하고 나면) 뒤러의 작품은 <데생실>에도 두 점 있었다. 1520년경에 그린 《어느 노인의 초상》과 1527년에 그린, 턱수염이 덥수룩한 《청년의 머리》라는 이상한 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루브르 미술관>의 영광 중의 하나인 홀바인의 초상화 다섯 점은 17세기에 왕실 컬렉션으로 들어왔다. 그 중 하나인 《에라스무스의 초상》은 찰스 1세가 처남 루이 14세에게 레오나르도의 《세례자 요한》이라는 작품과의 교환조건으로 준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나중에 루이 14세에게 되돌려진다. 다른 네 작품-윌리암 바르햄, 헨리 와이트, 니콜라스 크라체, 클레브의 앤 등의 초상-은 열성적인 미술품 수집가이자 찰스 1세의 라이벌이었던 아룬델의 백작 소유가 되었다가 나중에 야바흐 컬렉션의 경매 때 루이 14세 컬렉션에 팔렸다. 루이 14세는 마자랭 컬렉션에서도 독일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품을 하나 구입했는데, 브랑덴 부르그의 재상 알베르를 위해 한스 세발트 베함이 그린 것으로, 기묘하고 환상적인 작품 《다비드의 생애》가 바로 그 작품이다. 1806년에 구입된 《비너스》와 1810년에 구입된 《어느 소녀의 초상》을 포함한 루카스 크라나하의 작품도 다수가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다. 크라나하의 작품들은 1807년에 구입된 아우스부르그의 율리히 아프트 작 《매기의 경배》로브터 한스 발둥 그리엔의 우화적인 작품 《기사, 소녀,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16세기 초반의 또 다른 일종의 작품들과는 상당히 구별된다. 그리고 최근에 구입된 볼프 후베르의 《예레미야의 애가》는 다뉴브파 거장들의 짙은 서정성과 시각적 자유를 우리에게 일깨우면서 최근 다시 유행의 바람을 타고 있다. 그 무한한 다양성이 여러 전시회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17세기 독일회화는 게오르그 프레겔이나 고트프리드 폰 베디히와 같은 화가들이 그린 강렬하고도 시적인 정물화들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 최근에 발굴된 일련의 초상화들은 18세기 독일과 오스트리아 회화가 더욱 탐구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모델의 심리를 집요하게 추적해 들어간 발타사르데너와 크리스티안 자이볼트의 작품, 멩스의 공식적 초상화, 그리고 안젤리카 카우프만과 안톤 그라프의 우아한 세기말적 초상화가 선보이는 국제주의적 양식(이 양식은 요한 밥티스트 람피와 러시아 화가 레비키, 보로비코프스키의 작품을 통해 다시 한번 살아나기도 한다.)에 이르기까지 연구의 범위는 상당히 넓다. 독일 제국의 19세기 회화는 마카르트, 보클린, 리베르만 등 19세기 후반기 작가들 작품 만을 볼 수 있다. 이 작품들은 그나마 모두 <오르세이 미술관>으로 옮겨질 예정으로 있다. 19세기 초의 위대한 독일화가로서 유럽 낭만주의를 대변하는 천재 중의 한사람인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경우는 1975년에 구입된 《까마귀들이 앉아있는 나무》라는 작품 하나가 유일하게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을 뿐이다. 영 국영국의 회화는 자국 내의 미술관에나 전 역사에 걸쳐 골고루 균형되게 작품이 소장되어 있지 일단 외국으로 나가면 그 미술관이 아무리 이름있고 규모가 큰 미술관일지라도 영국 회화의 진면목을 보기가 매우 힘들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영국의 미술이 유럽미술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장구한 역사에 걸친 다양한 영국의 유파들은 충분히 보여주기에는 루브르의 소장품 역시 빈약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예외는 있어서, 일정분야에 대해서는 루브르도 상당한 강점을 지니고 있다. 루브르의 영국 회화 컬렉션은 윌리암 스트로트의 《에드워드 6세의 초상》으로부터 시작하여 19세기 말엽까지 지속된다. (19세기 중엽 이후부터의 그림, 즉 라파엘 전파(前派) 이후의 그림은 곧 <오르세이> 미술관으로 옮겨질 것이다.) 영국 회화 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들에 속하는 호가드, 리차드 윌슨의 작품을 비롯하여 윌리암 블레이크, 사무엘 팔머 등의 작품이 빠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알란 라멧이로부터 터너에 이르는 다른 주요작가들의 수준높은 작품은 어지간히 갖추어져 있다. 1849년에 보닝턴의 소형작품 《프랑스와 1세와 에탕프 공작부인》이 구입된 것과 같은 작가의 《베르사이유에 있는 물의 화원》이콘스타블의 작품 두 점과 함께 1872년에 구입된 것이 예외에 속할 뿐 컬렉션의 작품 대부분이 1880년에서 1910년까지의 30년 동안과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의 양대 기간에 걸쳐 루브르에 들어왔다. 첫 번째 시기의 영국 회화가-혹은 적어도 영국 회화의 어느 일면이- 당시 《미술》을 비롯한 몇몇 프랑스 잡지와 찰스 제들마이어 같은 몇몇 상인들에 의해 프랑스에서 붐을 이루었던 시기와 일치한다. 1905년의 바가텔 전람회와 이 시기에 파리 유수의 컬렉션으로 들어온 수많은 영국 회화가 이러한 유행을 증명하고 있다. 그 중 카미유 그롤 컬렉션은 와토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음은 물론, 게인즈보르와 터너의 작품까지 소장하고 있다. 2차 게계대전이 일어난 후의 루브르는 18세기 영국의 1급 초상화가들이 화면을 통해 보여준 우아함과 생기발랄함에 대해 지난 세기 말엽 프랑스 미술품 수집가들이 가졌던 기호를 연상시키는 그러한 그림들을 상당히 입수했다. 바드시대의 걸작으로 로베르 드 로차일드 남작의 재산상속인들이 1947년에 기증한 게인즈보로의 화려한 초상화 《앨스튼 부인》, 같은 게인즈보로의 작품으로서 화면 가득 생의 환희가 넘치는 듯한 《공원에서의 대화》(이 작품은 드물게 그의 초기작품으로 화가 자신과 자신의 아내가 모델인 것으로 추측 되고 있다.), 그리고 로렌스의 《찰스 윌리엄 벨의 초상》이 그러한 작품들이다. 지난 30여년동안은 루브르가 이러한 유산을 좀 더 체계적으로 완성시키려고 노력한 시기였다. 이를 위해 루브르는 우선 이미 소장되어 있는 화가들일지라도 모자라는 새로운 작품을 입수함으로써, 해당 화가에 대한 전시수준을 한층 높였다. 자연에 대응할 때의 작가의 시각적 자유분방함으로 프랑스 낭만주의의 탄생에 지대한 공헌을 한 콘스타블의 경우는 1948년에 구입된 《헬밍햄 공원의 풍경》과 1952년 퍼시 무어 터너가 유증한 《살리스버리의 풍경》에 의해, 로렌스의 경우 <루브르 후원회>가 구입한 《안젤스타인의 아이들》에 의해 각각 작품 수를 보강했다. 그외에도 그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가장 뼈아프게 생각되는 공백을 메우려고 했다. 터너의 경우는 그가 가장 위대한 영국 미술가의 한 사람인데다 클로드 로렝을 매우 존경했다는 점에서 프랑스와의 인연도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루브르에 한 점도 없는 데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애석하게 생각해왔다. 이제서야 가까스로 그는 그의 후기작품 하나를 루브르에 걸어놓고 있다. 이 작품은 형태의 해체를 통해 마치 작품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그만의 개성적인 특징을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내보이고 있다. 영국 회화의 18세기 역사는 가치척도의 변화에 따라 지난 30년동안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오랫동안 무시되어 왔던 스텁, 조셉, 라이트 같은 화가들이 복권되는 한편, 빈약하고 천박한 기교로 당대에 인기를 끌었던 초상화가들은 역사의 후면으로 밀려났다. 조파니의 날카로운 단순성도 재발견되었고, 영국에서 활약한 스위스 화가 퓨슬리의 열정적인 비전도 새 빛을 보았다. 최근에 수입한 라이트의 《너미호수의 풍경》, 조파니의 《아들과 함께 있는 란달 부르그 목사의 초상》, 퓨슬리의 《멕베드 부인》은 18세기 후반이라는 복잡·풍요했던 영국회화상의 한 시절을 다양하게 개관하려는 루브르이 목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는 19세기 미국 회화도 구입되었는데, 1975년에 구입된 낭만풍의 토마스 코올의 1848년도 작품 《고독한 십자가》가 바로 그것이다. 토마스 예킨스, 윈슬로우 호머, 휘슬러-그의 초상화 《화가의 어머니》는 앵글로 색슨계통 회화의 가장 전형적인 이미지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등 1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엽에 걸쳐 활동한 미국 화가들은 <오르세이 미술관>에 앞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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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철나무님 자료 올려 주시어 감사합니다.항목마다 크릭하니 상세한 자료가 유익하고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