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랑 요새에는 지난 며칠간 엄청난 토목 공사를 위해 수많은 인부들이 동원되었다. 타이탄까지 동원된 이 거대한 토목 공사는 그 규모로 봤을 때, 매우 단기간에 끝이 난 역사상 기록에 남을 만한 공사였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얕보면 큰 코 다치십니다. 특히 상대방이 타이찬을 동원하는 만큼 그에 걸맞은 대비를 하셔야지요.
그래도 .
거기에다가 될 수 있다면 로체스터 전하께 연락해서 필요한 만큼의 지원군도 부러야 할 것입니다.
가능하면 지원군 없이 끝낼 수 있도록 해 보게.
예, 그렇게 노력은 하고 있사오나 . 저도 적의 공격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 감히 예상할 수가 없는지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저것만 가지고도 충분하지 않을까?
다리엔 후작은 자신이 계획한 것보다 더욱 규모가 커져 버린 방어 진지에 혀를 내두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근처 요새들을 모두 뒤져 타이탄에 타격을 줄 만한 대형 몬스터용 공격 장비들은 모두 다 끌어 모았다. 그리고 본국에 애걸해 몇 가지 최신형 타이탄 공격 장비도 가져왔다. 그렇게 하고서도 모자라 타이탄들이 빠지기에 충분한 거대한 구덩이를 30개나 팠다. 구덩이 안은 물이 빠져 나가지 않도록 기름 종이로 세심하게 바른 후 물과 지푸라기를 가득히 채워 넣었다. 단순히 물만 채워 두는 것보다 그렇게 만드는 것이 수렁처럼 되어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들기 대문이다. 그런 후 그 위를 튼튼한 나무로 덮고 다시 흙을 깨끗하게 깔아 놨다. 수십 톤이나 되는 타이탄을 겨냥한 함정이었기에 사람이나 마차가 지나 다녀도 상관없을 정도로 튼튼하게 만든 것이다.
후작은 면밀한 계획 하에 함정이 완성되었을 때쯤 이곳에 대한 정보가 흘러 들어가도록 조작했다. 물론 그 조작은 후작이 가한 것이었고, 그 역할을 해야 하는 부하들에게는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기에 일이 잘못될 수도 있었다.
마그레인 백작이 일을 잘 해 주어야 할 텐데 .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후작을 향해 성주는 재빨리 말했다.
잘 될 것입니다. 마그레인 백작님은 대단히 뛰어난 인물이니까요. 솔직히 이런 일에 소모해 버리기에는 아까운 분입지요.
내가 하는 말을 그게 아닐세. 자기가 무슨 영웅쯤이나 되는 듯 입을 다물고 있거나, 또는 자살해 버렸으면 처음부터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말이지. 젠장, 오히려 부하가 술술 털어 놓기를 바래야만 한다니. 이미 예정일보다 하루나 지체되고 있지 않은가? 슬쩍 마그레인 백작의 주둔지에 대해서 놈들에게 정보를 흘렸고, 놈들이 그를 잡아간 것이 3일 전인데, 왜 이렇게 늦는지 이해를 못 하겠군. 나라면 벌써 .
다리엔 후작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예를 잘못 들었던 것이다. 드러내고 자신이 단순 무식하다고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었으니 그로서는 입을 다문 것이 당연했다. 그것을 눈치 챈 성주도 노회한 너구리답게 슬쩍 화제를 돌려 다리엔 후작을 도왔다.
참, 본국에서 도착한 신형 타이탄 병기를 구경해 보시겠습니까? 100대 정도 도착했는데, 도무지 신뢰가 안 가더군요. 보통 보던 것보다 덩치가 너무 작아서 .
성주의 말에 다리엔 후작도 흥미를 느꼈다. 타이탄을 때려 잡는 병기는 예로부터 몇 종류 되지 않았다. 거대한 나무 말뚝에 강철 촉을 붙여 놓은 것을 발사하는 대형 쇠뇌라든지, 대형 투석기 등등 대부분이 공성전(攻城戰)에서 자주 사용되는 병기들이었다. 보통 기계 장치의 덩치가 크면 클수록 파괴력이 좋아지기에 대 타이탄용이라면 성이나 요새에나 배치할까 들고 다니기에는 벅찬 병기들뿐이었다. 그렇기에 어느 사이엔가 타이탄용 공격 무기라면 거대한 덩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모두들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입니다, 각하.
신무기를 처음 본 다리엔 후작의 소감은 이랬다.
흐음 . 괴상하게 생겼군.
아무리 신형 무기라도 타이탄을 향해 발사하는 도구로 똑같았다. 2미터는 됨직한 큼직한 나무 말뚝의 끝 부분에 강철로 된 거대한 촉이 붙어 있는 초대형 창 같은 것을 날리는 것이다. 그런데 신형 무기는 거청한 기계 장치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 강철은 쇠로 된 원통 같은 곳에 꽂혀 있었는데, 그 원통은 나무틀로 만들어져 있는 곽 같은 것에 고정되어 있었고 움직이기 편리하게 밑에는 몇 개의 바퀴가 붙어 있었다. 그것을 보면 쇠로 된 원통 같은 것만으로 그 거대한 창을 날리는 모양이나 믿음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 저 작은 장치로 과연 타이탄을 박살낼 만한 힘과 속도를 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예, 신무기와 함께 조작 인원도 200여 명 정도 함께 도착했사온데, 그들의 설명으로는 대단한 위력이라고 하더군요. 그들의 말로는 여기 있는 이 심지에 불을 붙이면 날아간다고 했습니다.
다리엔 후작은 의심스런 표정으로 그것을 훑어보며 말했다.
흐음 . 이거 발사 시험이라도 거친 제품인가? 도저히 이 따위 걸로 타이탄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구먼.
글쎄요, 그건 모르지요. 실전에 배치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가? 역시 그로체스 공작 전하셔. 최신 무기라면 동부 전선으로 우선 배치되어야 할 텐데도 이곳으로 먼저 보내 오신 것을 보면 말이지. 아무튼 놈들이 언제 공격해 들어올지 모르니 발사수들은 항시 대기하라고 일러라.
옛, 각하.
자신의 지시를 전달하기 우해 총총히 사라지는 성주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리엔 후작은 신형 무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봐도 믿음이 가지 않는 모양새였다. 사실 부하의 앞이기에 애써 좋은 방향으로 해석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부하의 입에서 그만큼 이쪽 전투가 중요하지 않다든지, 아니면 그로체스 공작의 힘이 약하니까 아직 테스트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 나올 염려도 있었기 때문에 원천 봉쇄를 한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튼 머리 하나는 비상한 놈인 것 같으니까 말이다. 사실 이런 공인되지 못한 시험 무기는 신뢰도가 매우 떨어지기에 가급적이면 지휘관들이 사양하는 품목 중의 하나였다.
저기가 미투랑 요새인가?
옛, 전하.
산꼭대기에 잘도 만들었군.
예, 엄청난 인력이 동원된 작업이었다고 들었사옵니다. 산을 깎아서 만든데다가 북쪽과 동쪽을 40미터 정도 뇌는 절벽이 막아 주고 있는 천혜의 요새입지요. 요새 부근의 나무들은 가지 치기를 해 놨기에 기습을 당할 염려도 없사옵니다.
겨우 몬스터나 상대하려고 만든 규모가 너무 크구먼. 돈이 남아도는 모양이야.
슬슬 준비를 하라고 지시할가요?
그러세. 일단 다섯 대만 꺼내라고 하게.
공작의 지시에 따라 오너들은 각자의 타이탄을 불러 냈다. 그에 따라 대량 생산을 위해 단순한 형태를 한 타이탄 테세우스들이 그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성 밑 저 먼 곳에서 갑자기 타이탄들이 튀어 나오는 것을 본 성의 경비병들은 요란하게 경종을 울려 댔다. 적군이 아니라면 이렇듯 타이탄을 끄집어 낼 이유가 없었기에 울려 댄 경종이었고, 성내의 모든 인원들이 그 경종이 뜻하는 바가 뭔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들이 담당할 지역으로 신속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물론 새벽에 울린 갑작스런 경종이었기에 모두들 자다가 일어난 듯 복장들이 엉망진창이라는 것은 당연했다. 유독 복장 상태가 엉망인 사람들은 대 타이탄용 공격 무기를 다루도록 지시받은 인물들이었다. 일반 병사들이나 기병들은 침착하게 자신의 무장을 갖춘 후에야 자신의 구역으로 이동했다. 물론 이런 일이 벌어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타이탄의 이동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기 때문이었다.
적의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후작 각하.
어디?
저곳에 있습니다. 여기 이걸 사용하시지요.
투르넨 후작은 성의 상당히 높은 위치에 마련되어 있는 중앙 지휘탑에 서 있었다. 이곳은 매우 높은 위치였기에 사방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전망이 좋았고, 또 성의 각 곳에 마련되어 있는 각종 무기들과 병력을 총괄 지휘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져 있는 곳이었다.
성주가 내미는 망원경을 받아 들고 후작은 여명 아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느 ㄴ타이탄들을 관찰했다. 성을 중심으로 반경3킬로 주위로 낮은 관목 정도만 남겨 두고 키 큰 나무들은 전분 없애 버렸고, 그나마 1킬로 정도에는 그런 관목조차도 엇애 버렸다. 그렇게 해야만 교활한 오크들을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엇다.
후작은 성주가 가리키는 곳을 자세히 관찰해 본 결과 여명 아래 숲을 뚫고 솟아 올라 있는 다섯 개의 시커먼 물체들을 볼 수 있었다.
겨우 다섯 대뿐인가?
그렇습니다.
으음, 투르넨 후작을 불러라.
투르넨 후작을 불러 오라고 지시할 누군가를 찾기 위해 뒤를 돌아 보던 성주는 수해원 두 명을 거느리고 느긋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투르넨 후작을 보고 급히 다리엔 후작에게 속삭였다.
저기 오고 계십니다, 각하.
그래?
다리엔 후작은 뒤를 돌아보며 느긋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시오, 투르넨 후작. 기사단에 준비하라고 지사하고 오는 길이오?
투르넨 후작은 다리엔 후작의 속을 태우려고 일부러 늑장을 부리면서 천천히 나타났는데도, 상대가 그걸 무시하고 준비 운운하자 인상을 찡그렸다. 상대가 이런 식으로 말을 하고 보니꼭 자신이 다리엔 후작의 충실한 부하인 듯 들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늑장을 부리다가 왔다고 맞받아 말하기도 껄끄러웠다. 상대는 명목상이기는 했지만 자신의 상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투르넨 후작은 일부러 다리엔 후작을 무시하고 옆의 수행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찰조로부터 보고는 없었나?
자신의 말이 묵살 당하자 다리엔 후작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지만 투르넨 후작은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아직까지는 없었습니다.
수행원은 급히 답한 후 그들의 앞쪽에 삐죽 나와 있는 금속제 관(管 : Pipe)이 있는 곳으로 재빨리 다가섰다. 금속제 관은 두 개나 솟아 나와 있었는데, 혹시나 비가 올 때를 대비해서 위쪽에 작은 뚜껑이 붙어 있었다. 관을 통해서 대화하면 말을 훨씬 더 멀리 전달할 수 있기에 이런 장치를 붙여 놓은 것이다. 물론 아무리 관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 거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기에, 중앙 지휘탑 내에 위치해 있는 통신실과 사격 통제실, 이 두 곳에만 연결되어 있었다.
관 위의 뚜껑은 벗겨져 있었기에 그는 관에 대고 곧장 외쳤다.
통신실! 정찰조로부터 들어온 보고가 있소?
그러자 관 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정찰조로부터의 보고로는 적은 70명 정도로 구성된 부대라고 합니다. 아직 주위가 어두워서 적들의 정확한 구성은 알 수 없답니다.
관 속에 들려 온 말을 수행원은 재빨리 복창(復唱)했다. 그 말을 들은 다리엔 후작은 미간을 찡그렸다. 적군의 정확한 구성을 모른다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70명? 그렇다면 70기의 타이탄을 거느리고 왔다는 말인가?
하지만 투르넨 후작은 얼토당토않은 말을 꺼내는 다리엔 후작에게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대는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니 인원 구성을 이해하기 힘들거요. 보통 타이탄 한 대가 움직이려면 최소한 두 명의 기사와 한 명의 마법사가 타이탄을 서포트 하기 위해 움직이게 되지. 그러니까 대략 네 명에 타이탄 한 대라고 보면 맞을 거외다. 물론 이것은 통상적인 전투에나 맞는 인원 대비이고 이렇듯 목표가 단순하게 정해져 있는 경우에는 정찰을 위한 인원이 감소한다고 보면 맞겠지.
투르넨 후작의 태도가 별로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일단 그에게서 정보를 획득해야만 했기에 다리엔 후작은 최대한 분노를 억누르며 물었다.
경의 의견대로라면 17기 정도라는 말이오?
투르넨 후작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간단하게 답했다.
아니, 열일곱 대 이상이라는 말이오.
일부러 말을 짧게 끝내는 바람에 자신이 계속 질문을 하도록 만드는 상대를 향해 다리엔 후작은 짜증 어린 어조로 다시금 물었다.
그렇다면 상한선은 얼마요?
돌아가기 위해 최소한 마법사 한 명,. 그렇다면 적 인원이 70명이라면 69기가 되겠지.
흐음, 17에서 69라. 오차가 너무 크군. 좀 더 오차를 줄일 수는 없소?
이번에 돌아온 대답은 좀더 길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리엔 후작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투르넨 후작은 이번 작전이 자신을 제외하고 다리엔 후작 혼자서 몇몇 부하들만 데리고 쑥덕 공론을 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에 강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며칠 전부터 대규모 토목 공사를 하면서 적의 타이탄이 이곳에 쳐들어온다는 간단한 통보만 나에게 했었소. 그토록 야단법석을 부리며 준비했을 정도라면 적 타이탄이 이곳에 쳐들어온다는 정확한 정보를 그때 입수했다는 말일 것이오. 만약 경이 정보부에서 그런 정보를 얻어 들었다면 나에게도 통보가 왔을 테데, 정보부에서는 아무런 보고도 듣지 못했소. 그렇다면 경 혼자서 일을 벌인 것이 분명한데, 도대체 무슨 공작을 한 거요? 나도 정보가 있어야 그놈의 오차를 줄일 수 있을 것 아니오?
이쪽이 본거지라고 정보를 흘렸소.
다리엔 후작도 상대의 질문에 간단하게 답했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예의에 어긋날 정도로 투박한 것이었다.
당신 정신 나갔소? 그렇게 하면 놈들은 최고 정예를 이끌고 이곳으로 와 쑥대밭으로 만들 게 분명한데.
물론 제정신이오. 대신 놈들은 이곳에 대 타이탄 병기라든지 또는 타이탄을 상대하기 위한 그런 준비는 없다고 들었을 거요.
다리엔 후작은 변명하듯 주절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니 슬며시 자존심이 상하는지라 따지듯 투르넨 후작에게 말을 이었다.
나도 이곳이 본거지라고 알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소. 하지만 당신의 그 잘난 부하들이 패배한 것도 모자라서 몇 명 생포 당했으니 자연히 이쪽 정보는 샐 것이 분명하단 말이오. 그런데 딴 곳이 본거지라고 거짓 정보를 흘렸다가는 금방 들통 날 것이 아니겠소?
내 부하들은 입이 무거운 놈들이오. 겨우 고문 정도 한다고 해서 그렇게 정보를 술술 얻어 낼 수는 없소.
투르넨 후작은 급히 변명을 했다. 하지만 다리엔 후작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상대를 몰아 붙였다. 이제는 주도권이 완전히 자신에게 넘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는 고문을 하겠지. 그동안 자살하지 않았다면. 결국은 불게 되어 있소. 마법사들은 폼으로 기르고 있는 줄 아시오?
마법사까지 동원한다면 당연히 불 것이다. 그건 의지와는 상관 없는 고문술이니까 말이다. 투르넨 후작은 할 말이 없어지자 슬쩍 화제를 바꿨다.
으음 . 그때라면 나머지 은십자 기사단이 도착하기 전이니까, 대략 50기 정도의 타이탄이 있다고 한 거요?
물론이오. 은십자 20기에 철십자 30기라고 했지.
그렇다면 50기 이상 69기 이하로 보면 비교적 정확할 거요. 놈들이 자신들의 실력에 자신감이 있다면 50기 정도만 가져 왔을테고, 그렇지 않다면 좀더 가져 왔겠지.
그런데 왜 다섯 대밖에 안 보이는 거요?
그거야 당연히 이 좁은 곳에서 치고 받기가 힘들 테니까 적은 숫자만 꺼내 놓고 이쪽을 꾀고 있는 거지. 그건 그렇고, 대 타이탄 공격 무기는 얼마나 준비했소?
다시 화제가 바뀌자, 다리엔 후작은 상대의 저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며 퉁명스게 답했다.
그게 지금 중요하오?
물론 중요하오. 아무리 쟈크렌 요새에 남아 있던 기사단이 며칠 전에 모두 도착했다고 하지만 철십자까지 전부 다 합쳐도 70대뿐이오. 그 중에서도 은십자는 50대밖에 없다는 말이오. 그런 상황에서 이쪽 50대를 확실하게 박살내겠다고 온 부대라면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왔을 테니 대략 짐작해 본다면 빠듯한 전투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만약 대 타이탄 공격 무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면?
다리엔 후작의 물음에 투르넨 후작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저 아래로 내려가서 싸워야지. 그래야 위험하면 후퇴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다리엔 후작으로서는 매우 황당한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인원들은 어쩌라는 말인가?
여기 있는 모든 인원들을 버려 놓고 탈출하겠다는 말이오?
당연히. 당신도 전황을 지켜보다가 여차하면 이동 마법으로 튀면 될 것 아니오?
그렇다면, 방어 무기가 제대로 갖춰져 있다면 어쩔 거요?
그렇다면 당연히 여기서 싸워야지. 그편이 훨씬 더 유리할 거요.
요란한 경종이 울려 대면서 성 위쪽으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데도 정작 상대방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공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타이탄이 나와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글쎄요 . 혹시, 성내 전투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옆에 서 있는 마법사의 말에 공작은 무표정하게 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성내 전투라 . 성 안에서 싸우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 것은 없지만 어떤 대비가 되어 있는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뛰어드는 것이 과연 현명한 행동인지 조금 생각해 봐야겠군.
하지만 대 타이탄용 방어 장비도 없다고 알려진 성이옵니다.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야. 대 타이탄용 공격 무기가 없다면 왜 구태여 저 좁은 성에서 싸우려고 들겠나? 저렇게 좁은 곳에서는 만약 전세가 불리해져도 도망 치기가 아주 힘들 텐데.
하지만 타이탄이라면 저 높은 절벽에서라도 뛰어내려 탈출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물론 40미터 정도의 절벽이야 뛰어 내릴 수가 있겠지. 하지만 웬만한 실력자가 아니라면 그 충격을 소화하기 힘들어. 그리고 뒤어 내리면서 타이탄의 몸체가 절반 이상 땅바닥에 푹 박힐 텐데, 그건 어떻게 처리할 건가? 전투중이 아니라면 상관 없겠지만, 적을 코 앞에 두고 그 따위 짓을 한다면 위험 천만하지.
그렇다고 여기서 계속 있을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쩝 , 이런 식으로 일이 전개될 줄 알았다면 로니에르를 데려오는 건데 그랬군. 그렇다고 지금 불러 오기도 뭣하니까 강행 돌파를 해보기로 하지. 마법을 준비해라.
예? 마법이라 하시면?
공격 마법 말이다. 마법사이면서 공격 마법 한 가지도 할 줄 모른단 말이냐?
저 , 알고는 있습니다만, 타이탄을 상대로 한 마법은 거의 소용이 없는지라 .
마법사의 말에 공작은 한심하다는 어조로 질책을 했다.
누가 타이탄을 잡으라고 했나? 저기 있는 성을 박살내란 말이다. 무론 대 마법사라고 해도 성을 완전히 박살내기는 힘들다는 것은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자네들의 실력으로도 저 성에 어느 정도 타격을 줄 수는 있지 않은가? 그런 다음 녀석들의 반응을 보기로 하세. 놈들이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면 타이탄을 꺼내서 밑으로 달려 내려올 거야.
옛, 전하.
곧 마법사들은 저마다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전번의 사건 이후로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기사단에 투입되는 마법사들의 수는 최소한으로 줄었지만, 그 질은 월등하게 상승했다. 신참 마법사들은 모두 본부에 배속되거나 타이탄 공장에서 잡무를 보는 식으로 대폭적인 교체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마법사들이 저마다 날려 댄 마법으로 미투랑 성은 굉음을 발하며 폭발을 일으켰지만, 요란함에 비한다면 그리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몇 명인가 병사들이 불에 타 죽기도 하고, 성벽의 위쪽 일부가 훼손되기도 했기에 처음 잠시 동안 허둥지둥하는 것같이 보였던 크루마 병사들은 금세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성 위에서 붉은 화염 덩어리들이 직격하듯 공격대를 향해 쏟아졌다.
콰앙!
굉음을 내며 터지는 화염 덩어리들을 보며 공작은 생각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기사들은 어떤지 몰라도 마법사에 있어서는 상대방이 질과 양에서 한 수 위였던 것이다.
겨우 여섯 개의 화염 덩어리를 날리고 마치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수십 개를 두들겨 맞았으니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니었다. 먼저 꺼내 놨던 다섯 대의 타이탄들이 날아오는 화염 덩어리를 보고 재빨리 막아 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상당한 곤욕을 치를 뻔했던 것이다.
마법사들은 적들의 엄청난 반격에 질려서 아예 마법을 구사할 의욕조차 상실한 듯 더 이상의 공격을 시도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되로 주고 말로 받았으니까 말이다. 그들 중에서 그래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마법사가 어물쩍 공작에게 다가와 송구스럽다는 듯 말했다.
공격을 재개할까요? 전하.
아니, 그래 봐야 별 소용도 없을 것 같군.
실망스런 어조로 공작이 말하자 마법사는 대안을 제시했다.
본국에 마법사들을 지원해 달라고 연락을 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아니, 이 정도 대 부대를 이끌고 와서 마법사를 지원받는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 또 그런 요청을 해 봐야 토지에르에게 더욱 무거운 짐을 지우는 일이 될 뿐이야.
노 마법사에게 그렇게 대댭해 준 뒤, 공작은 뒤쪽에 서 있는 기사들 중의 한 명을 호명했다.
이보게, 하인드!
옛, 전하.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한다. 모두들 타이탄을 꺼내라고 지시하도록! 내가 앞장서겠다. 이쪽에서 위력 제압으로 나간다면 무슨 꿍꿍이 속인지 곧 알 수 있겠지.
적들이 타이탄을 모두 꺼낸 것 같습니다. 수호는 50여 기 정도!
망원경으로 적진을 관찰하고 있던 다리엔 후작의 수행원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걸 듣고 투르넨 후작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겨우 꺼내는 정도의 행동인데도 저렇듯 놀라다니, 실전 경험이 없는 다리엔 후작과 마찬가지로 그 부하들도 역시 실전 경험이 없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 수행원이 자신의 부하였다면 당연히 질책을 했겠지만, 다른 사람의 부하였기에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망할 녀석은 상관의 부하였기 때문이다. 투르넨 후작은 자신의 명령을 참착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듬직한 자신의 수행원에게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다.
전 기사단 성내 전투 준비. 걸리적거리는 것은 뭐든지 박살내도 상관 없다. 마음껏 싸우라고 전해라.
옛, 각하.
수행원은 이번에는 사격 통제실로 연결된 관에다가 외쳤다.
사격 통제실! 전 기사단 성내 전투 준비!
그렇게 외친 후 그는 재빨리 옆쪽에 마련된 탁자로 다가갔다. 그 탁자 위에는 종이와 펜, 그리고 잉크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곧장 펜을 들고는 투르넨 후작의 명령을 휘갈겨 썼다. 그런 후 종이를 구겨 가지고는 아래쪽으로 던졌다. 아래쪽에는 그 종이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연락병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그 종이를 펴 본 후 명령을 전해야 하는 곳으로 곧장 달려갈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후작의 명령을 들은 사람이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가는 것보다 훨씬 빠르기에 취해진 조치였다.
이렇게 자세한 전달 사항에 종이를 이용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사격 통제실은 성의 각 지점으로 연결된 로프가 집결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약속된 신호에 따라 로프를 잡아 당김으로 인해 명령이 효율적으로 전달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치열한 성내 전투가 벌어지고 나면 곧장 그 명령 체계는 박살날 것이 분명했지만, 그 정도 상황이 벌어질 정도면 이미 외곽의 타이탄 공격 무기는 필요 없어지기에 상관없는 일이었다.
혹시나 하고 있었지만 막상 투르넨 후작이 명령을 내리는 것을 듣고 성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투르넨 후작의 명령은 최악의 경우에나 내리는 것으로, 전투만 우선시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런 식으로 되면 인정 사정 없이 싸우는 아군 타이탄에 깔려 압사하는 병사들이 발생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런 성주의 표정은 본 체 만 체하고 투르넨 후작은 다리엔 후작에게 단도 직입적으로 물었다.
지휘는 계속 그대가 할 거요? 이건 병정 놀이가 아니니 본인에게 양도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만.
귀공은 기사단을 인솔하는 것에나 신경 쓰시오. 내 지휘권까지 넘보지 말고.
정 그렇다면 좋을 대로 하시오.
투르넨 후작은 슬쩍 비웃음을 흘린 후 수행원들을 이끌고 아래족으로 내려가 버렸다. 여기에 있어 봐야 별로 할 일도 없을 게 분명했고, 더군다나 똥고집이나 부려 대는 녀석 근처에 있고 싶은 마음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
투르넨 후작이 내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격 진형을 갖춘 적의 타이탄 부대들이 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리엔 후작은 거대한 적 타이탄이 돌진해 오는 것을 창백한 안색으로 바라보았다. 상대와의 거리가 1킬로 정도 남았는데도 땅바닥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 전장에 선 그로서는 거대한 적 타이탄들이 돌진해 오는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중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후작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타이탄이라면 이쪽에도 많았고, 또 철저하게 준비까지 되어 있지 않던가? 만약 저 많은 타이탄들을 제압할 수만 있다면, 아예 전세가 역전되는 정도를 넘어서서 크라레스의 항복까지도 받아 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모든 사수 발사 준비.
후작의 말에 따라 수행원은 떨리는 어조로 사격 통제실로 연결된 관에다가 외쳤다.
사격 통제실! 모든 사수 발사 준비!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다리엔 후작은 창백한 표정으로 외쳤다. 이제 적 타이탄은 거의 코 앞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발사.
발사!
그와 동시에 벼락 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소리에 놀란 다리엔 후작은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뭐냐?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놈들이 또 마법을 쓴 거냐?
다리엔 후작은 성벽의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을 보며 놈들이 뭔가 화염계 마법을 써서 공격을 가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수백 개도 넘는 거대한 나무 말뚝들이 상대방 타이탄들을 향해 날아갔다. 적들도 이 요란함에 놀랐는지 다급하게 방패로 상체를 가리면서 자신들을 향해 곧장 날아오는 말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갑자기 날아든 말뚝의 양은 엄청난 숫자였고 몇 대의 타이탄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 휘청거렀다. 장갑이나 방패에 심각한 타격을 받은 타이탄도 있었다.
하지만 쟈크렌 요새처럼 처음부터 타이탄을 막기 위해 만든 요새의 경우 엄청나게 많은 타이탄 공격 무기를 보유하고 있기에 이 한 번의 공격에 치명상을 입는 타이탄이 나올 가능성도 있었지만, 미투랑 요새는 그렇지 못했다. 다리엔 후작이 급히 무기를 끌어 모았다고 하지만, 거의 태반 이상 몬스터 퇴치용이었기에 타이탄들에게 치명적일 정도의 타격을 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쏟아지는 화살 비. 혹시나 상대방 타이탄의 머리 쪽에 나 있는 구멍을 통과해서 기사를 다치게 할 수 없을까 하는 망상에서 쏘아 대는 것이었다. 물론 기사가 맞을 확률은 정말 적었지만 수천개가 날아드니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상대방 타이탄들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달려들었다. 괜히 지체해 봐야 화살 세례나 대 타이탄 병기들의 세례를 한 번 더 맞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던 순간, 거의 일곱 대 정도의 타이탄들이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렸다. 파 놓은 함정이 제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것은 타이탄의 발목을 잡고, 그 안의 기사를 익사시키려는 의도였다. 다리엔 후작과 성주의 의도대로 물과 지푸라기로 뻑뻑해진 물에 잠긴 순간, 타이탄은 거기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엄청난 쇳덩어리의 무게에다가 물이라는 속성 때문에 높게 도약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동료들이 빠지고 나자 적들은 더욱 진격 속도를 높여서 달려들었다. 이것 외에는 동료를 살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저렇게 물 속에 빠진다고 해서 마법 생물인 타이탄이 익사할 리는 없었고, 그것을 꺼낸다고 난리를 칠 필요도 없었다. 그냥 공간의 저편에서 기다리게 한 다음 그 구덩이에서 탈출해서 다시 불러 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탈출한 기사가 물 위로 나올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왜냐하면 이때가 가장 좋은 화살의 먹이가 되기 때문이다. 놈들의 궁수들은 기사들이 물 위로 생쥐마냥 기어 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동료들이 탈출하기 전에 적의 궁수들을 침묵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알프레드는 이 성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둘러서 수리를 했다고 하지만 이 성은 처음부터 몬스터 정도만을 막을 수 있도록 구축된 곳이었다. 그렇기에 타이탄을 상대하기에는 성벽이 좀 약하다는 것은 둘째치고, 너무 비좁아서 초대형 병기들을 놔 둘 만한 장소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병기를 수납할 공간도 별로 넓지 않은 이곳 73보루(堡壘)에 무려 8개의 대형 쇠뇌와 7개의 신형 무기르 쑤셔 넣어 놨으니 비좁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좁은 장소에서 버적거리니까 초가을인데도 땀 방울이 절로 흘러 내리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신형 무기는 발사할 때 꼭 불을 필요로 했다. 그렇기에 보루 내는 이미 한증막을 연상시킬 정도로 찜통이 되어 있었다.
땡땡땡 땡땡땡 .
약간의 시간 간격을 두고 종이 두 번 울리자 발사수들은 모두들 긴장하며 작자의 물기를 발사할 준비를 했다. 이것은 발사 준비의 신호였고 보루의 벽 틈새로 적이 먼 곳에서 돌진해 오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알프레드는 신형 무기의 발사수였기에 오른손에 횃불을 들고 있었다. 이제 종이 한 번 더 울리면 그때 발사하면 되는 것이다.
땡땡땡 .
종이 울림과 동시에 알프레드는 큼직한 쇠통의 위쪽에 삐죽이 솟아있는 심지에 불을 붙였다.
푸지지직 .
묘한 소리를 내면서 심지가 타들어 가자 먼저 설명을 들은 신형 무기 사수들은 모두들 귀를 틀어 막았다. 독 이어 굉음이 울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쇠뇌의 사수들은 얘기가 달랐다. 그들은 곧이어 굉장한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옆의 동료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손으로 귀를 틀어 막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발사와 동시에 다음 발사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쇠뇌 발사수들이 발사를 끝내고 막 시위를 뒤쪽으로 당기기 위해 애쓰고 있는 그때 천지가 뒤집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면서 신형 무기가 발사되긴 했는데, 그건 여섯 발뿐이었다. 나머지 하나 남은 신형 무기는 발사되기는 커녕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파편과 충격을 주위로 퍼드렸다. 알프레드는 운 좋게도 자신의 옆에 있던 동료가 그 파편을 막아 주는 그야말로 인간 방패의 역할을 해 줬기에 충격만 받고, 옆쪽으로 밀리다가 벽을 들이받고 기절해 버렸다.
쾅! 쾅!
거대한 성벽을 허물듯 박살내고 돌진해 들어오는 적 타이탄들을 향해 성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타이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달려 들었다. 이제 성 안은 그야말로 나장판이 되고 말았다. 상호 100대가 넘는 타이탄들이 집단전을 벌이는 통에 성 내부가 무사할 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기사단을 책임지고 있던 트루넨 후작은 생각해 보지 않은 몇 가지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돌진해 들어온 적들 중에서 가장 거대한 타이탄의 존재였다. 그 거대한 타이탄은 단순 무식하게 싸우고 있었지만, 방패로 막고 검을 휘두르는 타이밍이 매우 정교했기 때문에 순식간에 다섯 대의 은십자 기사들을 피의 제물로 삼아 버렸다. 아무리 봐도 자신이 직접 상대하기는 벅찬 괴물로 보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는 기사들의 실력은 어떤지 몰라도 상대 타이탄의 덩치와 출력이 이쪽보다 월등하게 우세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넓은 대지 위에서 치고 받는다면 숫자가 월등하게 많은 이쪽이 유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좁은 성 안에서 치고 받자니 자연히 장애물이 많았고, 큰 덩치와 함께 그에 따른 강력한 파워를 지닌 타이탄이 월등하게 유리하게 되는 것이다.
성내 곳곳에서는 아직 생존해 있는 대 타이탄 무기들이 적 타이탄을 향해 공격을 가하고는 있었다. 그 중 몇 대의 신형 무기는 발사 때 폭발을 일으키며 사수들을 전멸시키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런 좁은 공간에서의 공격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뒤쪽에 처진 적 타이탄들이 공성 무기를 하나하나 찾아 내어 박살내기 시작했고, 눈에 띄는 병사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기 시작하면서 대타이탄 무기들은 하나하나 침묵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 가자 트루넨 후작은 억눌렀던 분노를 터뜨렸다.
제기랄! 탁상 공론이나 하던 놈이 생각해 낸 작전이니 뻔하지.
그는 슬쩍 타이탄을 돌려 오른쪽에 솟아 있는 곳곳에 상처가 생긴 중앙 지휘탑을 바라봤다. 타이탄 몇 대가 그 덩치를 가지고 비비적거렸으니 멀쩡할 리가 없었다.
벌써 도망 쳤나? 이런 식의 전투라면 여기서 개죽음 당할 필요가 없잖아?
트루넨 후작은 탑 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슬며시 분노를 느꼈다. 아무리 명목상이라고 해도 사령관이 도망 쳤다면, 자신도 여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울 이유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타이탄을 몰아서 좀더 앞쪽으로 나간 다음 적 타이탄과 접전을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자신이 나설 단계가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지금 한 가지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기에 앞으로 나선 것이다. 투르넨 후작은 적과 몇 차례 검을 겨누다가 상대의 검이 묵직한 공격을 가했을 때, 그걸 기회로 뒤쪽으로 밀리는 듯 쿵쾅거리며 후퇴하여 그대로 중앙 지휘탑을 등판으로 밀어 버렸다. 보통 타이탄이 상대의 검에 밀려 중심을 잃은 것이였다면 여태까지처럼 탑에 큰 충격을 주지 않고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투르넨 후작은 아예 탑을 박살내려고 힘껏 뒤로 밀어 붙였기에 탑은 그 엄청난 중량을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 졌다.
트루넨 후작은 아예 내친 김에 뒤로 자빠지면서 밀어 붙인 후 다시 일어서면서 탑의 잔해를 지근지근 밟아 버렸다. 혹시나 다리엔 후작이 도망 치지 않고 탑 안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투르넨 후작은 자신의 행동이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목격자들에게 아주 우연히 벌어진 일인 것처럼 보였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자신은 나중에 그걸 상부에 적 타이탄의 힘에 밀렸기에 벌어진 매우 불행한 사고였다고 진술할 생각이었다.
투르넨 후작은 완전히 탑을 박살내 버린 후 마나를 힘껏 끌어 모아 외쳤다.
전원 후퇴!
트루넨 후작은 후퇴하라고 외쳤지만 정작 자신은 앞으로 나섰다. 이렇게 많은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목격자가 한 둘은 살아 남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그것을 생각한다면 자신은 후퇴하면서 가장 모범적인 상관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투르넨 후작과 몇몇 기사들이 사력을 다해 막고 있는 사이 부하들은 뒤로 빠지면서 일부 성벽을 허물어 버리고는 아래로 뛰어 내리기 시작했다. 40미터 정도의 높이의 절벽이었기에 상당한 충격이 오기는 하겠지만, 그건 각자가 지닌 재주껏 억누르면 되는 것이다.
부하들이 차례로 빠져 나가는 사이 투르넨 후작은 정말이지 후퇴 작전에 있어서 모범적인 상관으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거기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적의 사령관이 탑승했을 것으로 보이는 그 거대한 청색 타이탄을 직접 막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수들은 고수들끼리 겨뤄야 서로 간의 피해가 줄어든다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투르넨 후작도 저 청색 괴물하고 싸워서 이길 자신은 아예 없었다. 그리고 또 잘못해서 상대가 상상 이상의 고수라면 자신은 그놈에게 발목을 잡혀서 아예 탈출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가능성마저 있었기에 그는 일부러 거대한 청색 타이탄의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
3분의 2가 넘는 부하들이 절벽 밑으로 뛰어 내린 후 그들의 퇴로를 지켜 주던 후작도 아래로 뛰어 내렸다.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탈출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는 물론 자신의 부하들처럼 타이탄을 타고 그대로 뛰어 내릴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타이탄에 탄 채로 땅바닥에 박혀서는 해답이 안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는 뛰어내리기 직전 타이탄의 머리를 뒤로 젖혔고 타이탄이 땅바닥에 격돌하려는 순간 타이탄에서 위로 뛰어 올랐다. 그런 다음 땅바닥에 처박혀 있는 자신의 타이탄에게 공간 저편으로 들어가라는 말을 남기고 쏜살같이 도망 쳐 버렸다.
크라레스의 기사단은 끝까지 퇴로를 사수하고 있던 상대방 타이탄 다섯 대를 해치운 후 절벽 쪽으로 달려갔다. 상당수의 타이탄은 벌써 구덩이를 빠져 나와 도망 쳤지만 아직 몇 대 는 도망 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먼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검이나 철퇴 등의 무기를 아래쪽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타이탄들을 향해 던졌다. 그런 후 성벽의 일부를 뜯어 내어 그대로 아래쪽을 향해 던지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다섯 대의 타이탄이 아래쪽으로 뛰어 내렸고, 드디어는 여섯 대의 적 타이탄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일단 더 이상 적 타이탄을 상대할 필요는 없었기에, 크로아 공작은 자신의 타이탄 프루토에서 서둘러 내려왔다. 공작은 타이탄이라면 더 이상 탑승하는 것조차도 질린다는 듯 끔찍한 표정으로 프루토를 바라봤다. 로니에르는 청기사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 걸까 .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던 크로아 공작이었다. 그만큼 프루토는 지독스럽게도 말을 듣지 않는 타이탄이었기에 공작은 눈 앞의 적과 프루토를 함께 상대해야 했기에 다른 전투보다 피곤이 배로 몰려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공작은 프루토에서 내리자마자 부하들에게 피곤한 우렁찬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쓸 만한 서류가 있는지 뒤져라. 그리고 적의 마법사나 기사가 보이면 생포하도록! 그리고 그 외의 포로는 필요 없으니 모두 본보기로 처형하라.
옛, 전하.
부하들은 공작의 명령에 따라 뿔뿔이 흩어져 그야말로 사냥을 시작했다. 몇몇은 타이탄에 탑승한 채였지만, 대부분은 성안을 뒤지기 위해 타이탄을 돌려보낸 후 였다. 사방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공작은 자신의 옆에 서 있던 부하를 향해 말했다.
참, 그 우레 소리를 내던 적의 대 타이탄 병기 기억하나?
예, 전하.
혹시 파괴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 있는지 뒤져봐라. 그리고 사수들 중에서 살아 있는 녀석도 몇 명 잡아와라.
옛, 전하.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로체스터 공작에게로 남부 전선의 지휘권이 넘어온 것은 미투랑 전투가 끝난 후 정확히 이틀 뒤였다. 그 전투에서 살아 남은 투르넨 후작이 전투 도중 지휘권을 내팽개치고 도주한 다리엔 후작을 고발한 후, 코린트의 황제는 끝내 단안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잘못된 작전으로 인해 무려 48기의 타이탄이 손실되고 성 한 개와 1개 사단급의 병력이 몰살한 것은 둘째치고, 지휘자가 전투중에 도주했다는 것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탈출에 성공한 기사들과 몇몇 생존한 병사들의 증언에 따라 최후까지 부하들의 퇴로를 마련해 주기 위해 분투했던 트루넨 후작은 간단한 징계만 받을을 뿐, 자신의 직위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징계를 받은 이유는 부사령관이라는 위치에 있으면서 사령관인 다리엔 후작이 잘못하고 있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리엔 후작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 처형되었다. 그리고 그의 목이 날아가는 것과 함께 그로체스 공작의 꿈도 박살나 버렸다. 모든 군권(軍權)이 로체스터 공작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로체스터 공작은 남부 전선이 자신의 관할 하에 들어오자마자 근위 기사단과 발렌시아드 기사단을 제외한 남은 모든 여유 전력을 이끌고 남부 전선에 도착했다. 하긴 여유 전력이라고 해 봐야 철십자나 동십자 기사단은 직접적인 대 타이탄 전투에 사용하기에는 무리였기에 금십자와 은십자 기사단이 주축이 되었지만, 한때 200기에 이르던 막강 전력은 이제 겨우 80기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생각 같아서는 근위대의 일부라도 돌리고 싶었지만 근위대 또한 오랜 전쟁으로 인해 막심한 피해를 당해, 제1 2근위대를 통합하여 제1근위대로 만들어 제임스에게 맡겼고, 제3근위대는 제2근위대로 명칭을 바꾼 상태였다. 한때 최강의 타이탄 36기로 구성되었던 근위대는 지금 불과 15기 정도로 감소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개편된 제2근위대의 경우 비밀 임무를 위해 크라레스에 들어가 잇는 상태가 아닌가? 불과 적기사 2기로 이루어진 제2근위대라고 해도 갖춰진 전력은 엄청난 것이었고, 더 이상의 전력을 근위대에서 빼낸다는 것은 어려웠다.
로체스터 공작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쟈크렌 요새에는 발렌시아드 기사단을 배치하고, 이제 새로운 수도로 확정된 케락스 시에 제임스가 거느리고 있는 제1근위대를 배치했다. 그런 후 곧바로 모든 전력을 거느리고 남하했던 것이다.
사실 로체스터에게는 이제 더 이상의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지금의 전력으로는 전쟁을 지속한 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정보에 따르면 크라레스는 정규 급이 거의 100여 기, 크루마는 130여기가 남아 있었다. 그에 비했을 때 코린트는 모두 다 합한다면 정규 급 118기, 그것도 발렌시아드 기사단까지 합해서 말이다. 이런 최악의 상태에서 그나마 두 나라 모두 견제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을 때 재빨리 휴전을 하고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것은 당연했다.
공작은 전선에 도착한 후 크라레스에 잠입해 있는 까미유를 불러냈다.
안녕하셨사옵니까? 공작 전하.
오, 갑작스런 호출이었는데 빨리 도착했군.
옛, 전하. 이번에 남부 전선까지 총괄하게 되신 것을 경하(敬賀) 드리옵니다.
경하는 무슨 . 처음부터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지. 그건 그렇고, 그 멍청한 다리엔 녀석이 50여 대에 이르는 타이탄을 손실한 덕분에 이제 크라레스와는 한 판 하고 싶어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원통할 뿐이지. 자네가 있었는데도 그 낌새를 채지 못했나?
예, 로니에르 공작은 이번 전투와는 무관하옵니다. 얼마 전에 어딘가로 여행을 다녀왔다고 들었사온데, 그 외에는 대부분 자신의 천막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지낸다고 하옵니다. 그 때문에 그의 시중을 드느라 제스터는 별로 돌아다닐 여유가 엇다고 하더군요. 사실, 제스터도 그날 거의 70명이 넘는 기사들이 공간 이동한 것을 저에게 보고해 오기는 했사옵니다. 하지만 그들이 미투랑을 공격하러 간 것인지는 알 수 없었사옵니다.
흐음, 오히려 쓸데없이 정보 수집한다고 돌아다니지 않는 게 더 좋겠지. 또 그 작전은 나에게도 보고되지 않았을 정도로 다리엔 혼자서 세운 작전이었다. 만약 이쪽에 도움을 청했었다면 사정이 약간 틀려질 수도 있었지. 그건 그렇고, 이번 패전으로 더 이상 크라레스와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쯤에서 손을 터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예? 그렇게 된다면 코린트의 명성은 무너지고 말 것이옵니다.
하지만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리한 전쟁을 지속하다가 나중에 크루마에게 뒤통수라도 얻어 맞는 날이면 명성 유지는 고사하고 멸망할 가능성마저도 있다. 그만큼 본국의 전력은 형편없이 떨어져 있어 크루마는 그때 수거한 고철 타이탄들로 새로운 타이탄들을 생산 중이다. 하지만 지금 본국은 그것마저도 어려워. 생산 시설을 다시 복구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아마도 내년 봄이나 되어야 새로운 타이탄 생산이 가능해질 거란 말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예.
현재까지 입수된 가장 정확한 정보에 의하면 크라레스의 타이탄 총수는 150기를 넘어서고 있다. 물론 그 중에서 70기 정도는 루시퍼나 푸치나 같은 별 볼일 없는 타이탄이야. 하지만 그 외의 것들은 거의 대부분이 1.3의 출력을 지닌 카르록시아나 그에 준하는 출력을 내는 것으로 조사된 알파 급, 그리고 거대한 덩치와 상상하기도 힘든 출력을 지닌 최신형 베타 급이다. 조사된 바에 의하면 베타 급은 2기 이상, 아마도 5기 이하일 것으로 추측된다. 로니에르가 가지고 있는 것 1기, 그리고 미투랑 전투에서 투입된 1기. 정보에 의하면 미투랑 전투는 크로아 공작이 지휘했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크로아 공작이 베타 급을 가지고 있겠지. 그 외에는 많아 봐야 3기 이하일 것으로 추측된다.
대단한 전력이옵니다, 전하.
그렇지. 그에 비해 본국의 전력은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격감했다. 이제 은십자 기사단과 금십자 기사단을 합쳐도 겨우 78기. 철십자나 동십자 기사단의 전력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아. 발렌시아드 기사단 10기에다가 근위대 총 전력 17기. 이 상황이라면 크루마나 크라레스 보다는 약간 우위에 서겠지만 그 둘이 한꺼번에 침공해 들어온다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
설마 그렇게 까지야 .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것이 좋겠지. 한 가지 네가 명심해야 할 것은 크루마보다는 크라레스 쪽이 더 강하다는 사실이다. 키에리를 격패시킬 정도로 강력한 기사가 존재하는 한, 크라레스는 무시할 수 없는 상대야. 그래서 자네를 불렀네. 자네가 사신으로 가 주겠나?
예?
자네에게 여태껏 상황을 자세히 설명한 이유가 바로 그거야. 현실적인 힘의 균형을 잘 이해해 달라는 것이었네. 내가 자네를 사신으로 선택한 이유는 자네라면 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크라레스에 많은 것을 양보하지 않고 종전시킬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지. 지금 크라레스도 너무 많은 영토를 폭식(暴食)한 덕분에 소화 불량에 걸리기 직전이야. 아마도 협상이 어렵지는 않을 거야. 해 주겠나?
옛, 전하.
처음부터 내 의견대로 크라레스를 게릴라전으로 발목을 잡고, 그 사이에 크루마를 박살내 버렸으면 이런 사태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정말이지 원통하구나.
안녕하셨사옵니까? 공작 전하. 이번 미투랑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신 것을 축하 드리옵니다.
축하라고 할 것 있겠나? 테세우스 12기가 파괴되고 기사 두 명 사망, 여덟 명이 중상을 입었는데 말이야.
그래도 오랜 전쟁에 쐐기를 박는 멋진 승리였사옵니다.
내가 자네를 부른 것은 공치사나 듣자는 것이 아니고 보여 줄 것이 있어서네.
토지에르가 궁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공작은 괴상하게 생긴 물건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것은 이번 미투랑 전투에서 노획해 온 적의 최신 무기였다.
이게 뭔지 알겠나?
크로아 공작의 물음에 토지에르느 한참 생각한 후 대답했다.
그, 글쎄요. 이게 무엇이옵니까? 여기 나 있는 구멍은 또 무엇이지요?
공작이 가리킨 물건의 용도를 토지에르는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제법 크고 둥그런 구멍이 뚫려 있는 길이 1미터 정도의 원통형 쇠 막대기가 놓여 있었고, 그 쇠막대는 나무로 만든 틀로 견고하게 묶여 있었다. 그리고 그 틀의 아래쪽에는 바퀴가 붙어 있어 어느 정도 움질일 수도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런 해괴한 물건은 토지에르로서는 난생 처음 보는 터라 그 용도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게 무엇이옵니까? 전하.
자네도 모르는군. 이게 이번에 미투랑 요새에 배치되어 있던 신형 대 타이탄 병기지. 이름은 뭔지 잘 모르겠고.
이게 대 타이탄 병기라구요? 그렇다면 여기 뚫려 있는 이 구멍으로 뭔가를 쏜다는 것이옵니까?
그렇네, 열 번 설명하는 것 보다 한 번 보는 것이 좋겠지. 이봐.
그러자 공작의 뒤에 서 있던 장교가 즉각 대답했다.
옛, 전하.
발사 준비를 하라. 그리고 포로들도 데려오고.
옛!
명령을 받은 장교가 성큼성큼 어디론가 가 버린 후 공작은 토지에르에게 설명했다.
어떻게 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기에, 이걸 쏘던 녀석 몇 명을 잡아왔지.
아, 예.
토지에르가 흥미진진한 눈길로 바라보는 사이, 포대(布袋)로 덮어 두었던 큰 화살이 운반되어 왔고, 흑색의 가루가 잔뜩 들어 있는 통도 날라져 왔다. 그 통의 내용물을 흘끗 바라보던 토지에르는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빛내며 그곳에 다가간 후 내용물을 집어서 만져 보다가 급기야 냄새까지 맡아 보고 있었다.
이게 뭔지 알겠나?
예, 이건 화약이라는 것이옵니다. 거의 100년쯤 전에 개발된 것이온데, 불이 붙으면 금방 타들어 가면서 짙은 연기를 내지요. 낮은 수준의 마법사들이 높은 분들 앞에서 연출 효과를 내기 위해 주로 애용하는 물건이옵니다. 그 외에 화염계 마법을 사용하면서 좀더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 수련 마법사들이 사용하기도 하지요.
흐음 , 이게 폭발하기도 하나?
예? 폭발이라고요? 글쎄요. 이건 어떤 특수한 조건을 만들어 주지 않는 한 폭발하지 않습니다요. 아주 맹렬하게 타들어 간다고 보는 것이 옳겠습죠. 한 번 보시겠습니까?
토지에르는 통 속의 화약을 한 주먹 가져다가 흙 위에 올린 후 불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그 화약은 순식간에 타들어 가 버렸고, 재도 거의 남지 않았다. 연기는 엄청나게 솟아 나왔지만, 토지에르의 말대로 폭발한다고는 할 수 없었다.
자네의 말대로군. 그런데 이게 굉음을 내면서 저걸 쏘아서 날리더라구. 좀 있다가 포로들이 도착하면 자네도 알 수 있을 걸세.
곧 이어 포로들이 도착했다. 포로들은 이걸 발사해 보라는 지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사 목표를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산 쪽으로 잡은 후 그들은 숙련된 동작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그 쇠통 위의 작은 구멍에 심지를 박아 놓은 후, 화약이 들어 있는 통 속에서 작은 통 세 개 분량의 화약을 떠서 쇠통에 집어 넣은 후 적당히 다졌다. 그런 다음 그 쇠통에다가 대형 화살을 집어 넣었다.
그런 다음 포로들은 잠시 쑤근거리더니 한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그 쇠통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후 귀를 틀어 막았다.
귀를 막으십시오.
이 광경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던 토지에르가 발사하려는 것을 갑자기 중지시키며 물었다.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멀찌감치 떨어지는 것인가? 그리고 거기에 불을 붙이려는 자네의 손은 왜 그렇게 떨리는 거지?
포로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이번에 폭발 사고가 몇 번 있었습니다. 발사되는 것도 있었지만, 그대로 폭발하는 것도 있었죠. 이게 폭발하면 근처에 있는 사람은 다 죽습니다.
포로의 대답에 토지에르는 놀랍다는 듯이 그 쇠통을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매우 튼튼하게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는데 이게 터져 나갈 정도라면 화약에는 과연 자신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대단한 힘이 있는 모양이었다. 토지에르는 일단 그 힘을 구경해 보기로 작정했다. 그는 그 쇠통을 중심으로 방어 마법을 펼친 후 말했다.
이제 쏘아 봐라.
그 마법 방어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기에, 포로는 눈 앞의 이 늙은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었고, 그렇기에 또다시 부들부들 ㄸ러리는 손으로 심지 쪽으로 불을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쾅!
발사는 성공이었다. 엄청난 굉음 덕분에 주변에 있던 나무에서 새들이 기겁을 하며 날아 올랐다.
흐음, 1킬로는 족히 날아가는 것 같은데?
예, 웬만한 쇠뇌들도 그 정도는 화살을 날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덩치에 있습죠. 저 정도로 작다면 더욱 좁은 면적에서 더욱 많은 쇠뇌를 적 타이탄을 향해 발사할 수 있을 겁니다. 저건 정말 혁신적인 무기군요.
나도 그게 놀라워서 가져온 것이지. 하지만 포로의 말대로 가끔식 폭발한다면 그 점은 개량해야만 하겠지.
방금 본 대로라면 저 화약이 쇠통의 내부에서 폭발하면서 그 힘으로 쇠뇌를 밀어 붙이는 것이겠지요. 아마도 저 쇠통은 화약이 그냥 타들어 가지 않고 폭발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는 모양이옵니다. 아주 혁신적인 물건이라 할 수 있습죠. 그런데 문제는 일단 화약이 타 들어가 폭발하도록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쇠통이 그 폭발력을 버티지 못하는 것이겠죠. 아마도 제 생각으로는 저 쇠통의 두께를 좀더 두껍게 만든다면 상관 없을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그렇다면 자네가 좀 연구를 해 보게. 이제 영토가 비약적으로 늘었으니 영토의 방어를 기사단에만 의존하기는 힘들거야. 전략적 요충지에는 적의 타이탄 부대를 저지할 만한 강력한 요새들을 건설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겠지. 그땔르 위해서 이런 무기는 필수적이지 않겠나? 좀더 개량한다면 , 예를 들어 더 많은 화약을 넣어 폭발력이 강해진다면, 지금보다 더욱 강력한 파괴력을 얻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한번 연구해 보겠사옵니다, 전하.
쇠뇌를 발사하는 쇠통은 훗날 대포 라고 불리게 된다. 그리고 예로부터 타이탄을 상대하는 무기는 화살 종류였고, 쇠뇌에서 발사하는 것도 큼직한 나무 통이었기에 대포에도 탄환으로 나무 통을 넣어서 쏜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가서야 몇몇 선지자들이 구태여 그렇게 큰 나무 통을 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대포의 탄환은 작아지기 시작한다.
초기의 대포가 폭발할 확률이 높았던 것은 쇠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두께의 균일함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포의 두께가 일정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타이탄 제작 기술에 힘입어 대포를 주물로 제작했기 때문이다. 일정한 틀을 만들고 거기에 쇳물을 부어서 만드는 방식으로는 대포를 크게 만들면 만들수록 그 두계를 일정하게 만들기 어려워진다. 거기에다가 주철은 깨지기가 쉽고, 또 대포 내부에 기포 같은 것이 생길 여지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한쪽이 약해지면 손쉽게 대포가 폭발하는 참사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은 훗날 주물이 아닌, 포신 안쪽을 커다란 드릴 같은 것으로 깎아 내는 신 기술이 개발되면서 어느 정도 해결이 된다. 그렇게 해야만 포신의 두계를 균일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대포는 적에게 강력한 위협이 되는 무기였지만, 동시에 아군에게도 생명의 위협을 주는 괴상한 무기였던 셈이다.
마스터들의 협상
전하,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이 왔사옵니다.
노 마법사의 표정이 매우 밝은 것에서 공작은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원하는 만큼의 영토를 집어 삼킨 크라레스로서는 이제 휴전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녀석들이 휴전 제의를 해 왔는가?
옛, 전하. 휴전 협상을 위해 사신을 파견한다고 하옵니다.
오오, 드디어 녀석들도 이 지긋지긋했던 전쟁을 끝내려고 하는구먼. 그래, 누가 파견되어 온다고 하던가?
예, 까미유 드 코로데인 후작이 다섯 명의 협상단을 거느리고 온다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까미유 드 크로데인이라 . 코린트의 유명한 무가(武家) 크로데인 가문의 태생이라면 상당히 실력이 있는 인물이겠군. 그래, 그 인물에 대해 조사는 해 봤나?
예, 전하. 전쟁의 신전에 알아 본 바로는 7년 전에 그래듀에이트 시험을 통과한 뛰어난 인물이옵니다. 추정 나이 42세. 리사 드 크로데인 후작 부인의 아들이옵니다.
뭐? 이번에 전사한 소드 마스터인 리사를 말한 건가?
옛, 전하. 크로데인 후작 부인이 전사했기에 후작의 작위를 물려 받은 것이죠.
으음. 생각 외의 거물을 보내 오는군. 상대가 크로데인 가문의 적자(嫡子)라면 예의상 이쪽에도 그에 걸맞은 인물을 보낼 수밖에 없지 않겠나?
예, 그것 때문에 토지에르 각하께서는 그를 전하께서 맡아 주셨으면 하고 연락을 보내 왔사옵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협상 장소는 어딘가?
예, 국경에 위치한 라벤트라는 작은 마을에서 이틀 후에 할 것이옵니다.
좋아, 준비는 자네가 책임 져 주게.
옛, 전하.
협상 당일이 되었을 때, 라벤트 마을 주위에는 유령 기사단 인원의 절반이 깔려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다. 라벤트 마을은 작은 마을이었기에 마을 공회당 같은 대화를 나눌 만한 장소가 없었기에, 술집을 징발하여 이용했다. 하지만 테이블이나 의자, 양탄자까지도 본국에서 가져왔기에 술집 내부는 꽤 근사한 협상 장소로 바뀌어져 있었다.
까미유 드 크로데인 후작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병사의 보고를 받은 후 10분 정도 지나자 문제의 인물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등장했다. 천천히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술집 안으로 들어서는 젊은이를 보며 크로아 공작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겨우 삼켰다. 과연 코린트 최고의 명문인 크로데인 가문의 적자(嫡子)다웠기 때문이다. 까미유 후작의 자신감 넘치는 눈동자를 쏘아보며 크로아 공작은 상대가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더욱 대단할지도 모른다고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먼 길에 수고하셨소.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예, 반갑습니다.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처음 뵙는군요. 까미유 드 크로데인 후작이라고 합니다.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이라고 합니다. 그 이름 높은 크로데인 가문의 귀재(鬼 )를 만나 뵐 수 있어서 나야말로 영광이지요.
적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지만, 까미유는 서둘러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인사는 이쯤에서 생략하고, 그래 그쪽의 조건이나 먼저 말해 보시오.
으음, 협상을 제의해 온 쪽은 그쪽으로 알고 있는데요. 귀하가 먼저 말하는 것이 예의가 아닐지?
상대는 과연 나이 값을 하는 능구렁이라고 생각하며 까미유는 즉각 준비해 온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좋소, 우선 국경선부터 확정 짓고 시작하는 것이 좋겠지요. 본국에서는 지금 현재 양국의 군세가 대치하고 있는 곳까지를 그대들의 영토로 인정해 주겠소. 그리고 서로 간의 전쟁 배상금이니 뭐니 복잡한 것은 붙이지 맙시다. 우선 휴전부터 하기로 하고, 이 조약의 유효 기간은 5년으로 합니다. 5년 단위로 다시 만나 조약을 갱신하기로 하는 것이 좋겠소. 그러다가 서로간에 신뢰가 쌓이면 종전 협정이나 아니면 불가침 협정으로 확대하는 것이 순서겠지요.
상대의 의견을 듣고, 공작은 상대가 속임수가 아닌 진짜로 휴전하려는 것임을 깨달았다. 결코 무리가 없는 조건이었고, 또 휴전시에 꼭 논의해야만 할 필요한 사항을 먼저 말했기 때문이다.
구태어 그렇게 복잡하게 할 필요가 있겠소? 그냥 휴전 협정으로 하고, 휴전하기 싫다면 어느 한쪽에 그 사실을 통보하는 것으로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물론 통보는 전쟁이 벌어지기 최소한 3일 전에는 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말이오. 5년마다 한 번씩 만나서 협상을 하는 것은 번거로운 짓이기 때문이오.
크로아 공작의 말에 까미유는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절차를 상당히 간소화시키는 것을 좋아하시는 모양인데, 굳이 그렇게 말한다면 3일 전에 통보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니겠소? 상대의 병력 이동 상황만 봐도 전쟁을 벌일 의향이 있는지 없는지 금방 알 수 있소. 그런데 구태여 상대에게 쳐들어갈 것이라고 선전 포고를 할 필요는 없겠죠. 또 일단 휴전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중요할 뿐이지, 다음 전쟁의 시작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요. 어떻게 협약을 맺어 둔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그것을 지킬 마음이 없다면 이건 휴지 조각일 뿐이니까 말이오.
그건 그렇지요. 그렇게 봤을 때 귀국과 본국은 너무나도 서로에게 상처를 많이 줬다는 것이 사실이오. 동맹국이었던 본국을 갑자기 기습 공격해서 멸망에 가까운 타격을 입힌 코린트를 믿기는 참으로 힘든 노릇이지요.
크로아 공작의 가시 돋친 말에도 까미유는 침착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건 피차 마찬가지 아닐까요? 본국이 크루마와 전쟁중일 때를 틈타서 선전 포고도 없이 뒤통수를 친 것 또한 사실이지 않소? 서로가 국제 관례를 한 번씩은 어겼으니 대충 비긴 것으로 하죠. 이번 전쟁을 통해 귀국은 잃었던 영토를 다시 되찾았으니 이제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겠소? 그 다음 역사는 또 어떻게 쓰이게 될지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지요. 일단 본국은 지금 이 전쟁을 지속해 나갈 여력이 없는 것이 사실이오. 그리고 귀국 또한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기 힘들 것이오. 그렇다면 상호 적당한 조건으로 전쟁을 마무리 짓고,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다음을 기약하자는 대목에서 까미유의 눈동자가 이상하게 빛나는 것을 보며 크로아 공작은 섬뜩함을 느꼈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코린트의 기둥은 키에리, 로체스터, 리사, 그라세리안이었다. 세 명이나 되는 마스터를 거느리고 있었기에, 코린트는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모두에게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전쟁이 마감되면서 그들은 로체스터를 제외한 두 명의 마스터를 잃었다. 하지만 정보에 따르면 그들 외에도 숨겨진 마스터 급은 존재하고 있었다. 키에리가 전사하던 그 전투에서 추격전을 벌이던 미네르바를 죽음의 위기까지 몰아넣을 뻔했던 붉은색의 타이탄 두 대. 그것을 보면 까미유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가 숨겨진 마스터 중의 한 명임을 확신했다.
일단 협정을 맺기에 앞서 실례되지 않는다면 귀공의 직책을 알고 싶소.
크로아의 말에 까미유는 싱긋 웃음을 떠올렸다.
자신부터 먼저 드러내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소?
흐음, 나는 스바시에의 총독이며, 유령 기사단 단장이고, 크라레스 전군 총사령관이라는 소임을 맡고 있소.
상대의 말에 까미유는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근위 기사단 단장은 누구란 말이오? 혹시 로니에르 공작인가요?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 대공이 코란 근위 기사단 단장이었듯, 모든 국가들의 경우 최고의 실력자는 근위 기사단 단장 직을 겸하고 있었기에 물어 본 말이었다.
근위 기사단은 프로이엔 폰 로가르트 백작이 맡고 있소.
그렇다면 로니에르 공작은?
하지만 크로아 공작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을 돌렸다.
그녀에 대해서는 알 것 없고, 나는 이미 말했으니 그대가 말할 차례요.
현재 미흡하긴 하지만 제2근위대 대장 직을 맡고 있소.
흐음, 그런가요? 그렇다면 약간의 세대 교체가 있었다는 말이겠군요. 답변해 주셔서 고맙소.
상대의 말에서 크로아 공작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로체스터 공작은 당연히 제1근위대 대장에서 근위 기사단 단장으로 진급했을 것이다. 평상시라면 빈 자리를 놔 두고 권력 투쟁이 오간다고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 둘 가능성도 존재했지만, 지금은 전시였다. 그러니만큼 키에리와 리사라는 거목들이 뽑혀 나간 빈 자리를 그냥 놔 둘 수는 절대로 없었다.
그런데 까미유가 로체스터의 제1근위대를 넘겨 받지 못하고 리사의 제2근위대를 넘겨 받았다는 것은 제1근위대를 넘겨 받을 또 다른 한 명이 더 존재한다는 말과 같았다. 그러니까 코린트가 보유하고 있는 마스터 급의 검객은 모두 세 명인 것이 확실했다. 저 격전을 거친 후 코린트는 아마도 15기 내외의 근위 타이탄밖에 남지 않았을 테니, 세 토막을 칠 수는 없었고 아마도 두 토막이 되었을 가능성이 컸으니까 말이다.
서로간에 대충 이해 관계는 정리가 된 것 같고, 나머지 세부적인 협의 사항은 수행원들끼리 처리하면 될 것이오. 서로가 될 수 있는 한 빨리 휴전에 합의하려고 한다면, 구태여 서로에게 난해한 조건을 제시해 불필요한 힘 겨루기를 할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오. 서로간의 토의는 수행원들끼리 어느 정도 의견을 맞춘 후 다시 재개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그럽시다.
여기에 온 김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혹시 만남을 주서해 주시겠소?
누구를 말하는 거요?
로니에르 공작.
만나게 해 드리고 싶지만, 그녀는 이곳에 없소. 또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그녀 또한 할 일이 많기에 이곳으로 불러 내기도 어렵소. 이해해 주겠소? 이건 부드러운 거절이었다. 까미유는 입맛을 다시며 쌍방의 수행원들끼리 토론을 벌이는 시끄러운 술집에서 나와 자신의 숙소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안녕하셨사옵니까? 공작 전하.
그래, 크라레스 쪽의 반응은 어떻던가?
예, 그쪽도 휴전에 꽤 적극적이옵니다. 사실 양쪽에 다 휴전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있고, 또 서로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세부 사항을 협상하는 것도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연락을 드린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한 가지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옵니다.
그래, 뭔가?
협상 장소에 나온 크라레스 쪽 대표는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으로서 스바시에 지역 총독이자 유령 기사단 단장, 그리고 전군 총사령관이라는 직책을 가진 대단한 인물이옵니다. 그의 실력은 직접 검을 나눠 봐야 확실하게 알 수 있겠지만 대충 저와 동급 정도로 짐작되옵니다.
흐음, 로니에르 공작은 총사령관이 아니라는 말이군. 그렇다면 그녀는 근위 대장이자 부사령관인가?
근위대 대장은 외부에 알려진 대로 론가르트였사옵니다.
그렇다면 유령 기사단이 뭔지를 파헤치는 것이 의문을 풀어 나가는 기준점이 되겠군.
예, 전하. 아무래도 제 짐작으로는, 이번 전쟁에서 갑자기 튀어 나온 크라레스가 지닌 여분의 전력이 모두 유령 기사단에 집결되어 있는 것 같더군요. 아마도 모든 알파 급과 베타 급을 보유하고 있는 크라레스 최강의 기사단이 그곳이 아닐까 하는 짐작이옵니다.
아마도 그렇다고 보는게 옳겠지. 그런데, 그가 갑자기 유령 기사단의 존재에 대해 자네에게 말한 저의가 뭔지도 생각해 봤나?
예? 글쎄요. 이제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기 때문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렇지. 아마도 전쟁이 끝나고 나면 크라레스의 기사단들은 대대적인 재편성에 들어가게 될 거야. 베타 급들은 근위대에, 알파 급은 그대로 유령 기사단에, 그리고 새롭게 생산되는 타이탄은 뭐가 될 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유령 기사단이나 제3의 기사단으로 보내겠지. 그런 후에야 크로아 공작이나 로니에르 공작이 근위대 대장으로 나서게 될 테지.
하지만 로니에르 공작이 전면에 나설 가능성은 없어 보였사옵니다. 그녀에 대해서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으니까 말이옵니다.
참, 지금 어뜻 떠오르는 게 있는데, 그녀의 실력은 모두가 공인하는 바야. 그런데도 왜 그녀의 실력에 합당한 직위에 올리지 않는 거지? 총사령관이든지, 근위대 대장이든지 뭐 그런 직위를 줘야 함에도 그러지 않고 있어.
그거야 그녀의 나이가 .
까미유의 의견에 공작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겉모습에 드러난 나이를 믿지 않아. 그 정도 경지에 올라가려면 엄청난 세월을 검술에 바쳤다고 봐야 해. 그녀에게 그런 지위를 내리지 않는 이유는 따로 봐야지. 자네는 짐작이 가나?
죄송하옵니다. 소신이 미흡하여 .
아닐세. 지금 떠오른 건데, 보는 시각의 방향을 조금만 바꾼다면 답이 나오지. 실력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신뢰도로 보는 거야.
그렇다면?
크라레스는 그녀를 믿지 않아. 무슨 이유가 있어서인지 모르지만 그녀를 이용할 수 있는 단계까지는 문제가 없어. 하지만 믿을 수는 없다는 거겠지. 제스터가 그녀와 크라레스 사이의 연결 고리를 빨리 알아내 준다면 그 고리를 부술 방법도 자연히 알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때가 우리들의 복수가 시작되는 날이겠지. 안 그런가? 크흐흐흐 .
변화하는 제국의 질서
코린트의 협상 사절이 도착한 다음 날, 코린트와 크라레스는 전쟁이 꽤나 오래 끌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타국들을 비웃기나 하듯 전격적으로 휴전 합의에 성공한다. 코린트나 크라레스 양국 모두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다는 것이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에 서로 의견이 일치했던 것이다. 코린트로서는 크라레스와 계속 전쟁을 수행하려니 옆쪽의 크루마라는 존재가 거슬렸고, 크라레스로서도 더 이상 땅 덩어리를 집어 삼켰다가는 식중독에 걸릴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양국 모두 조금만 더 군사력을 키운다면 서로를 잡아 먹으려고 들기에 충분할 정도의 저력을 갖춘 국가들이었기에 이 휴전 합의가 양국간의 영원한 평화를 가져올 거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 평화는 예상 외로 오래 갈 수도 있었다. 만약 이게 두 국가간의 일이라면 어느 한쪽의 힘이 커지는 순간 전쟁이 발발하게 되겠지만, 쿠루마를 포함한 세 국가 간의 일이었기 대문에 한족이 두 나라를 제압할 만한 힘이 있지 않고는 다시 전쟁이 재개되기는 힘든 게 사실이었다. 그 어느 쪽도 한쪽의 힘이 강해지기를 원치 않았기에 결과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게 되고, 그 덕분에 평화를 지속시킬 수 있는 것이다.
양국 간의 전쟁이 종료되자 크라레스 황제는 승전을 기념하여 전국민들에게 일주일 동안의 휴일을 선포했다. 크로나사 수복의 일등 공신으로 책정된 두 명의 공작들은 각기 스바시에와 치레아를 공국(公國)으로 하사받고, 개인 기사단까지 가지게 되는 영예를 얻었다. 토지에르도 작위가 한 등급 올라 공작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수도는 유성 공격으로 인해 흔적만 남아 버린 옛날의 수도였던 크라레인 시로 천도하겠다는 것도 이때 발표되었다. 그 덕분에 새로운 크라레인 시를 건설하기 위한 대규모 토목 사업이 시작되었다.
기사단의 편제도 대대적으로 바뀌었다. 가장 큰 변동을 보인 것은 역시 치레아와 스바시에에 있던 친위 기사단들이었다. 제1친위 기사단은 스바시에 기사단으로 개명되었고, 10기의 카프록시아와 10기의 테세우스가 배당되었다. 물론 차후에 10기의 카프록시아를 더 생산하여 테세우스와 교체시킬 예정이었다. 제2친위 기사단은 치레아 기사단으로 개명되며 10기의 미가엘과 10기의 로메로를 지급받았다. 물론 추후에 겉모양을 더욱 근사하게 개장시킨 카프록시아 급의 타이탄 20기로 교체해 준다는 약속 하에서 말이다.
상당히 색다르게 생긴 카프로니아 급 타이탄 두대는 수거된 후 근위대에 소속되어 황실의 전시용으로 사용될 예정이었고, 유령기사단은 대폭적으로 개편되어 국가의 중앙 기사단으로서 위치를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10기씩을 1개 전대씩으로 묶어서, 두 명의 공작에게 지급하고 남은 모든 정규 급 이상의 타이탄을 유령 기사단에 배치했다. 그리고 콜렌 기사단은 평상시에는 변방에 주둔하면서 몬스터 토벌과 타국에 대한 전쟁 억지를, 전시에는 유령 기사단의 보조 기사단으로서의 임루를 수행하는 처지로 격하되었다.
다크는 오히려 전쟁이 끝나면서 더욱 바빠졌다. 오랜만에 전쟁터에서 돌아와 보니 자신의 영지에는 그녀가 처리해야 할 사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얼마 전까지 그녀의 영지는 말토리오 산맥 한 귀퉁이에 있던 아름다운 로니에르 마을이었고, 그녀의 직책만 치레아 총독이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녀의 영지였던 로니에르 마을은 황제에게 반납되었고, 대신 그녀는 치레아를 그녀의 영지로 받았다.
하지만 그 영지가 크라레스라는 한 국가에 포함되는 영토가 아닌, 완전한 하나의 독립된 국가라고 볼 수 있는 공국(公國)이었다. 공국은 일족의 속국이라고 할 수 있는 형태였기에 너무나 많은 것이 바뀌어야만 했다. 우선 새로운 법률도 만들어야 했고, 자신에게 주어진 공국의 각 지방을 다스릴 영주들도 뽑아야 했으며, 공국을 지킬 군사력도 독자적으로 새롭게 정비해야 하는 등 처리해야 할 일들이 한꺼번에 엄청나게 발생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일을 몽땅 자신이 처리하고 앉아 있을 멍청한 다크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처리해야 할 일의 태반을 어거지로 그녀의 오른팔이 되어 버린 비운의 사나이 카알 폰 카슬레이 백작에게 떠 넘겼다. 그리고 그녀의 친구들이나 심지어는 그녀의 게으른 아버지에게까지도 억지로 하나씩 더맡겨 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분산을 시켰는데도 그녀는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고,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가을이 깊어 가고 있었다.
미네르바는 말토리오 산맥에 다녀온 후 오랜 시간 혼자서 사색에 잠기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날도 집무실의 책상 앞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때 문득 옆에서 조금 가벼운 기침 소리가, 그러다가 좀 지나서는 조금 더 큰 기침 소리가 들려 왔다. 미네르바는 흠칫 놀라면서 그쪽으로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나이가 지극한 두 명의 인물들이 약간은 무안한 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
미네르바는 부하들이 방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도 그들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기에 자연히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그 때문에 두 인물들은 더욱 쩔쩔매기 시작했다. 상대는 크루마 최고의 권력을 지닌 미네르바였으니까 말이다. 그 중 한 사람이 미네르바의 마음을 딴 곳으로 돌리려는 듯 재빨리 용무를 꺼냈다.
예, 전하. 방금 코린트와 크라레스가 휴전했다는 정보를 입수했사옵니다.
부하의 말에 미네르바는 크게 놀랐다. 그만큼 두 나라의 휴전은 의외의 정보였던 것이다. 미네르바로서는 그 둘을 좀더 치고 받아 줬으면 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뭣, 그게 사실인가?
예, 전하.
놀라운 일이군. 사력을 다해 한 판 할 줄 알았는데 .
예, 갑작스레 시작되었다가 끝난 미투랑 전투에서 코린트가 저희들이 예상한 것 이상의 피해를 입은 것이 확실하옵니다. 그렇기 않고서야 오만한 코린트가 얌전히 꼬리를 내릴 리가 없다고 사료되기 때문이옵니다. 그리고 미투랑 전투 직후, 코린트 남부 집단군 사령관이었던 다리엔 후작이 공개 처형 당했고, 로체스터 공작에게로 지휘권이 넘어간 지 불과 며칠 만에 양국은 휴전을 했사옵니다. 그 때문에 베일에 쌓인 미투랑 전투에 대해 아직 조사를 계속하고 있사오나 워낙 보안이 철저해서 그 피해 규모를 정확히 입수할 수는 없었사옵니다. 만약 피해 규모가 저희들의 예상대로라면 아마도 코린트의 전력은 본국보다 낮을 거라고 .
순간 미네르바는 이블리스의 말을 막았다.
아니, 괜히 그런 거 조사한다고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다. 타이탄 전력이 이쪽보다 낮다고 해도 지금 코린트와 전쟁을 벌일 수도 없고, 또 벌여 봐야 이쪽이 상대가 안 돼. 저쪽은 로체스터 공작을 위시하여, 뛰어난 기사들이 많기 때문이야. 결코 타이탄의 수만으로 서로의 전력을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이다.
미네르바는 패퇴하는 코린트 군을 추격할 때 자신을 상대했던 두 대의 붉은 타이탄을 떠올렸다. 만약 그 가운데 하나라면 자신이 상대 할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그 둘을 함께 상대하는 것은 그녀로서도 무리였다. 그만큼 강한 기사들을 보유하고 있는 한 코린트의 힘은 크루마를 앞서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그건 그렇고, 테시온 자네는 이블리스와 함께 웬일인가?
그러자 테시온은 서류 뭉치를 미네르바에게 건네며 즉각 대답했다.
예, 전하. 어제 지시하셨던 신형 타이탄의 생산 계획서를 가져왔사옵니다.
미네르바는 그것을 받아 들며 치하했다. 미네르바는 테시온에게 앞으로 1년 동안 크루마가 생산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타이탄 생산량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으음, 수고했네.
예, 1개월 후 생산 시설이 좀더 확충되면 전하게서 원하시는 만큼의 타이탄을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잘 되었군.
미네르바의 칭찬에 테시온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예, 그렇게 되면 내년 여름쯤에는 60기 정도를 추가로 보유, 코린트보다 분명 우위에 설 수 있게 될 것이옵니다. 앞으로 6개월 분의 타이탄 생산 계획은 전하의 분부대로 안티고네 7기, 에프리온 30기, 카마리에 20기 이옵니다. 그리고 일단 1차 생산이 완료도니 시점에서 57기가 납품되고 나면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게 되기에 그 다음부터느 ㄴ안티고네 30기, 에프리온 20기를 추가로 생산할 계획이옵니다. 2차 생산까지 끝나고 나면 본국은 헬 프로네 1기, 안티고네 40기, 에프리온 50기, 카마리에 70기, 골고디아 76기, 로투스 52기를 보유, 타이탄 총 수 289기, 정규 급 이상 237기로서 코린트를 압도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현재 회수 및 노획량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것보다 더 많이 생산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2차 생산만 완료되어도 최강으로 군림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좋군. 조사한다고 수고했네.
미네르바는 테시온을 치하한 후 이블리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보게, 이블리스. 크라레스의 타이탄 생산 계획에 대해서는 조사가 된 것이 있나?
미네르바의 물음에 아무래도 정보 쪽으로 관련이 있는 듯 보이는 이블리스가 즉시 대답했다.
예, 크라레스는 정보에 따르면, 지금 대대적으로 카프록시아를 생산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옵니다. 막대한 양의 노획품이 있으니까 당연한 결과겠지요. 아마도 노획품을 대략적으로 추정해 봤을 때 놈들은 카프록시아 200기 정도를 추가로 보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사료되옵니다. 하지만 본국이 2차 생산을 완료했을 때, 크라레스는 아무리 많이 만든다고 해 봐야 100기 내외일 것이옵니다. 애초에 상대가 안된다고 봐야지요.
현재 크라레스의 군사력에 대해서는 알아 봤나?
예, 알아 봤사옵니다.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사옵고, 아마도 로니에르 공작이 사용하던 그 거대한 타이탄은 5기 내외가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옵니다. 지금까지 그 타이탄이 사용된 것은 단 두 번. 모두 가장 중요한 전투들뿐이었사옵니다. 그것도 단독으로 투입되었지요.
그리고?
예, 근위대가 보유중인 카프록시아가 10기. 카프록시아의 대량 생산용 변형이 아마도 50기 내외. 총독용의 카프록시아 변형이 2기, 미가엘이 20기 내외, 로메로가 10기 내외, 그 다음 루시퍼 35기, 푸치니 33기이옵니다. 그래서 대략적인 추정 전력은 타이탄 총165기 내외. 그 중 정규 급은 100여 기 정도라고 추정되옵니다.
100기라 . 그렇다면 거기에 100기를 더 생산할 수 있다면 200기로군.
그렇다고 봐야 하옵니다. 물론 40기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난다는 것은 사실이오나 그 등급에서는 차이가 엄청나게 나옵니다. 겨우 카프록시아 정도는 안티고네, 아니 카마리에와도 비교가 안 되옵니다.
으음 . 비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예?
이블리스가 의아한 듯 의문을 표시했지만, 미네르바는 그걸 무시하고 테시온을 향해 말했다.
자네는 바쁠 테니 먼저 가 보게나.
테시온은 자기들끼리 비밀스런 대화가 있으니 나가라는 미네르바의 은유적인 표현에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예, 전하. 그럼 물러가겠사옵니다.
테시온이 물러가고 난 후 미네르바는 이블리스를 향해 낮은 어조로 물었다.
자네라면 말일세, 엄청나게 강력한 국가, 그러니까 도저히 이쪽에서 힘을 키운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을 정도로 강대한 국가가 상대라면 어떤 작전을 쓰겠나?
예? 그렇게 강대한 국가라면 코린트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그렇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네.
그야 전에 써 먹었던 방법을 다시 써야겠죠. 이번에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그로체스 공작은 숙청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옵니다. 하기야 그로체스 공작은 할 일을 다 했으니 이제 사라져 줘도 상관 없습죠. 우리들의 기대대로 키에리를 없애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으니까 말이옵니다. 이제 또 다른 인물, 그러니까 로체스터를 없애 줄 만한 실력과 야망을 겸비한 인물을 키워야 하옵니다. 원래가 욕심에 눈이 멀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것이 인간이 아니옵니까? 강대한 제국은 밖에서 무너뜨릴 수가 없사옵니다. 하지만 안에서부터라면 얘기가 틀립지요.
역시, 그 방법 외에는 도리가 없는가?
예, 코린트의 권력 층에 대해서 조사해 둔 것이 있사옵니다. 그 중에서 적임자가 세 명 있사온데 적당히 충동질을 하면 나머지는 자기들이 알아서 하게 되어 있습죠. 작전을 시작해 볼까요?
아니, 그보다도 먼저 크라레스의 권력 층이나 권력 구조에 대해서는 조사해 둔 것이 있나?
예? 조사해 두긴 했사옵니다. 하지만 크라레스는 약간 이상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별로 강력한 국가가 .
그건 자네가 아니라 내가 결정할 일이야.
옛, 송구스럽사옵니다. 전하.
크라레스의 권력 층을 뒤져 봐. 그렇다면 뭔가 허점이 나올 거야.
전하, 크라레스의 권력 층은 꽤 재미난 구석이 있어서 상당 부분을 이미 파악하고 있사옵니다. 일단 최고 권력은 황제가 잡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그 밑에 세 명의 인물이 있사옵니다. 첫째가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 둘째가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 세 번째가 토지에르 폰 케프라 후작입죠. 앞의 두 인물이 겉으로 드러나면서 크라레스의 힘을 과시하는 존재라면 토지에르는 뒤에서 모든 잡무를 처리하고 있사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토지에르가 어떤 면에서는 앞의 두 사람을 제어하고 있다고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이옵니다. 총사령관인 루빈스키 공작이 뭔가를 지시했다고 하더라도 토지에르의 허가가 있어야지만 그게 행해진다는 식이죠. 물론 대부분의 경우 토지에르는 불허한 적이 없었고, 그 때문에 루빈스키의 권력이 강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숨은 실력자는 토지에르입니다. 그는 이상하게도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뒤에 숨어서 황제를 위해 열심히 충성하는 것만이 삶의 보람인 듯한 괴상한 녀석이옵니다.
그렇게 욕하지 말게. 진짜 충신이라고 불러도 아깝지 않은 인물이 아닌가? 그런 인물에게 경의를 표하지 못할망정 욕을 해서는 안되지.
옛, 전하. 송구스럽사옵니다. 하지만 적국의 입장에서는 아주 눈에 거슬리는 녀석임에는 사실입죠.
그건 그렇겠지. 토지에르? 처음 듣는 이름인데도 그렇게 권력이 막강하다는 말인가?
예, 전하. 열심히 뒷조사를 하는 것이 제 임무 아니겠사옵니까? 거의 정확한 정보이옵니다. 토지에르는 마법사이므로 암살하기도 그렇게 어렵지 않사옵니다. 토지에르를 암살하든지, 아니면 토지에르를 밀어 낼 새로운 인물을 키우든지, 그것도 아니면 토지에르와 두 명의 대공들 사이를 이간질하든지, 그 세 가지 모두가 가능성을 안고 있습지요. 어떤 것을 택하시겠사옵니까?
그 세 가지를 한꺼번에 추진해 봐. 그것들 중에 하나만이라도 성공하면 좋은 것 아닌가? 그리고, 전에 말했었던 것은 시행했나?
예?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이온지 .
크라레스 황태자를 세뇌시카는 작업.
아, 예. 한밤중에 살짝 해 놓았사옵니다. 지금은 표시가 나지 않겠지만 서서히 그 효과가 나타날 것이옵니다.
좋아. 우리 쪽에서 코린트를 칠 일은 없을 거야.
예? 그건 무슨 말씀?
코린트는 크라레스에 대한 방패야. 쓸데없이 코린트를 건드려서 방패를 약화시키지 말고 내 지시를 기다리도록 해. 지금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크라레스니까 말이야.
미네르바의 말에 이블리스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대답은 시원스러웠다. 자신은 지시하는 대로만 행동하기 되기 때문이다.
예.
크라레스는 전쟁 후 대대적으로 전력을 증강시키기 시작했다. 우선 드넓은 대지를 방어하기 위한 병력들을 모집하고, 군사 훈련을 시작했으며 노획 물자들을 동원하여 테세우스들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다음에 벌어질 전쟁은 코린트나 크루마 같은 강대국만을 상대로 해야 하기에 출력이 약한 타이탄은 사실상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드래곤 하트가 없으니 청기사를 제작할 수도 없었고, 남은 선택은 오로지 카프록시아뿐이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 출력의 엑스시온은 카프록시아의 것이었고, 그 때문에 그들은 카프록시아의 변형들을 계속 생산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크라레스에 비했을 때 크루마는 그래도 형편이 조금은 나은 편이었다. 새로운 엑스시온을 만드는 것이 엄청나게 어렵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저 옛날 위대한 대 마법사 안피로스에 의해 대단히 많은 엑스시온들이 설계되었고, 지금도 그 설계도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 설계도에 의지하여 고출력을 자랑하는 안티고네나 에프리온, 그리고 카마리에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네르바의 특명에 의해 에프리온의 생산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었다. 코린트에 비했을 때 기사들의 질이 떨어지는 크루마로서는 그 외에는 선택의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크루마가 이렇듯 군비 증강에 열심인테, 코린트라고 손을 놓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코린트는 코린티아가 파괴된 지 한 달 만에 새로운 타이탄 생산 공장 시설을 갖추는 놀라운 재주를 부렸다. 일단 타이탄 생산 시설이 갖춰진 후 로체스터 공작이 생산을 명령한 타이탄은 놀랍게도 발렌시아드 기사단이 보유하고 있는 미노바-P형과 흑기사였다. 물론 적기사도 몇 대 더 생산할 예정이었지만 적기사의 형태상 특성에 따라 집단적에는 흑기사가 더 유리하다는 점이 작용했기에 생산이 재개된다고 해도 2~%기 정도일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미노바-P형의 경우 외장을 매우 아름답게 만들었기에 생산하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그렇기에 미노바-P2형이라는 모델을 새롭게 설계했다. 미노바-P형의 외관은 크라레스의 주력 타이탄 테서우스처럼 아주 탄순한 외관을 가진 대량 생산형 모델이었지만, 그 엑스시온은 미노바-P와 같은 1.5라는 고출력을 뿜어 내는 타이탄의 심장이었다. 그리고 로체스터 공작의 명령에 의해 적기사를 흑기사와 같은 집단 전용 형태로 개작하는 작업도 비밀리에 추진되고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 크루마가 자랑하는 신형 타이탄 안티고네를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일단 전쟁이 완전히 종료된 후 각국은 전쟁 때 노획, 또는 수거한 대량의 타이탄들을 이용해서 엄청난 양의 신형 타이탄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주변의 아르곤 제국이나 마도 왕국 알카사스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저마다 강력한 군비 경쟁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신형 타이탄들을 개발, 또는 구입하는 데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다음의 전쟁은 어떤 형태로 벌어질지 아무도 알지 못했으므로 .
닥쳐 온 운명의 시간
코린트 제국의 새로운 수도 케락스. 케락스는코린토비아 지방과 스와덴 지방의 경계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코린트 제2의 도시였다. 과거 스와덴이 코린트의 영역에 편입되기 전, 양국의 모든 산물이 교류되는 요지였기에 엄청난 기세로 발전했었다. 그러다가 스와덴이 코린트에 병합된 후에도 그 기세를 잃기 않고 발전을 거듭해 왔고, 코린트가 낳은 위대한 대 마법사 그라세이란 코타스가 케락스에 마법 방어진을 설치한 후 더욱 발전했다. 전시라면 몰라도 평상시에는 마법 방어진으로 흘러갈 마나를 실생활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관례였기에 생활의 편의성에서 근처에 있는 타 도시들을 훨씬 앞섰기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케락스가 두 번째 수도로 정해지게 된 데는 또 다른 실리적 측면이 있었다. 케락스는 작기는 하지만 황제의 별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황실은 케락스로 이사를 왔고, 그와 함께 별궁의 신축 작업이 한창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로체스터 공작의 집무실에는 매일 공사하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 오고 있었다.
예?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사옵니까?
상대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로체스터 공작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럴 수가 있지요. 현재 본국에는 귀국에 타이탄 구입 대금을 지불할 여력이 업소. 그리고 지금 본국이 안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신형 타이탄을 제작하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이 점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소.
그럴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그 당시 본국에서 타이탄을 구입하면서 10분의 1은 선불로, 나머지는 20년 분할 상환으로 못박지 않았사옵니까? 그런데 처음 주기로 했었던 선금도 전쟁중이라며 물건만 가져갔을 뿐, 대금은 며칠 후에 지급한다고 말씀하시고서 차일피일 지급을 미루고 있으니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코린트나, 공작 전하를 믿을 수 있단 말이옵니까?
열이 올라서 씩씩거리는 알카사스 사신의 얼굴을 보며 로체스터는 한껏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 미안한 마음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가 그 돈을 떼어먹겠다는 것이 아니지 않소? 다만 지금 상황이 안 좋으니까 조금 더 연기해 달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에 따른 이자도 지불해 줄 용의가 있소. 몇 년만 기다려 주시오. 모든 구입 대금과 함께 이자까지 톡톡히 지불해 드리리다. 그리고 이건 귀하에게 드리는 내 자그마한 성의니 받아 두시오.
로체스터 공작이 내미는 작은 가죽 주머니를 바라보며 사신은 약간은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이게 뭣이옵니까?
열어 보면 자연히 알게 될 텐데, 뭘 묻고 그러나? 돌아가는 여비에나 보태 쓰게나. 내 작은 성의일세.
가죽 주머니 안에는 여러 가지 색상의 보석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뭔가 형태가 있는 세공품이라면 몰라도 이런 식의 보석 알맹이의 경우에는 팔아 먹기도 쉬웠고, 또 꼬투리가 잡힐 염려도 거의 없었다. 그리고 보석의 양으로 봤을 때 평생 쓰고도 남을 정도로 막대한 액수인 것은 틀림없었기에, 사신의 눈빛은 슬며시 탐욕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자자, 빨리 집어 넣게나. 물론 그때 발생한 타이탄 구매 대금은 이자까지 합쳐서 나중에 줄 테니 몇 년만 참아 달라고 자네가 윗사람들에게 말을 잘 전해 주게.
하, 하지만 전하. 이러시면 .
내 방의 주위에는 수십 명의 그래듀에이트와 마법사들이 경비하고 있다네. 결코 자네에게 누가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야. 내가 그 돈을 떼어먹겠다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이자까지 모두 다 상환해 주겠다는데 무슨 딴 말이 필요하겠나? 자네는 몇 년만 뒤로 상환 시일을 늦춰 주면 돼. 그리고, 내가 들은 정보로는 요즘 알카사스에서 주력 타이탄을 가이아 급으로 대체하고 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알카사스는 최근 강대국들이 치열한 군비 경쟁을 시작했기에 그에 위협을 느끼고 주력 타이탄을 노리에(1.02)에서 가이아(1.32)로 교체하는 작업을 한창 진행시키고 있었다.
예? 예, 그렇사옵니다.
으음, 그렇다면 거기에서 대체된 노리에 급 타이탄들은 어떻게 한다고 하던가?
예? 물론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듯이 판매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걸 본국에다가 판매해 달라고 주선을 좀 해주게. 자네도 여기에 오기 전에 아마 말을 들었을 게야. 코린트에 이제 쓸 만한 타이탄은 100여 대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말일세. 지금 크루마와 크라레스가 힘을 합쳐 밀어 붙인다면 우리 나라는 망할 수 밖에 없지. 안 그런가?
공작이 솔직하게 털어놓자, 사신은 의외라는 듯이 그를 바라봤다. 코린트가 이번 전쟁을 치르면서 엄청나게 약화되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말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예, 소인이 알고 있는 바로도 그렇사옵니다. 하지만 코린트에는 아직 세 명의 마스터가 있고, 또 뛰어난 기사들이 많지 않사옵니까?
사신의 말에 로체스터 공작은 일부러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허, 그게 아닐세. 두 나라가 함께 공략해 들어온다면 마스터의 숫자도 비슷해지지. 크라레스에 두 명이 있고, 크루마에 한 명이 있으니까 말이야.
크라레스에 마스터가 두 명이나 있다는 말에 사신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로서는 그런 정보를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크라레스에서 뭔가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코린트를 침공했을 것이고, 또 코린트는 그 막대한 땅 덩어리를 뺏기고도 휴전을 할 수밖에 없는 지경까지 들어간 것이 아닐까?
사실이옵니까?
그럼, 내가 왜 자네에게 거짓말을 하겠는가? 오히려 우리 코린트가 반석과 같이 안전하다고 떠들어 대는 것이 거젓말이겠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코린트가 망하면 귀국은 우리 나라에 타이탄을 판매했던 대금을 어떻게 회수할 건가?
그야 .
그 막대한 금액을 날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신을 향해 공작은 차근차근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알겠나? 자네들이 판매 대금을 받아 내려면 본국이 망하지 않게 도와 줘야 한다는 것을 말이지. 내 말이 거짓인지 사실인지를 조사해 보면 알 걸세. 본국은 지금 개국 이래 최악의 상태에 직면해 있네. 지금 우리들을 도와 줄 수 있는 것은 자네들뿐이야. 이제 몇 년 지나지 않아 코린트는 다시금 힘을 회복할 거야. 그때는 결코 자네들의 도움을 잊지 않을 것이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나?
예.
노리에 급을 우리에게 판매할 수 있도록 손을 써 주면 내가 방금 줬던 보석의 두 배를 자네에게 줄 거야. 그러니 힘을 좀 써 보게나. 자네만 믿겠네.
로체스터 공작은 보석 주머니를 품 속에 소중히 감추고 문을 나서는 사절의 뒷모습을 보며 비웃음을 흘려 보냈다.
멍청한 녀석 .
물론 로체스터 공작은 이번 거래가 성사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만큼 지금 코린트는 최악의 상태였고, 또 알카사스는 원금이라도 회수할 목적으로 코린트를 도와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안그러면 그 막대한 금액을 통째로 날릴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코린트는 원체 저력이 있는 국가였기에, 조금만 도와 주면 다시 일어설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원래가 빚이라는 것은 웃기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 부채가 작을 때는 채권자가 채무자를 들볶을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마련이다.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 채무가 늘어났을 때는 정 반대의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채무자가 큰 소리를 치게 되고 채권자는 제발 원금이라도 돌려 주거나 아니면 원금의 반이라도 돌려 달라고 사정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로체스터 공작은 키에리가 알카사스에 만들어 놓은 이 막대한 부채를 상환할 생각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빚을 더욱 불려 놓을 생각이었다. 그런 수, 코린트의 힘이 다시금 막강해졌을 때, 그 빚을 갚건 그렇지 않건, 그건 그때 가서 마음 내키는 대로 처리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가을도 이제 늦었는지라 아침 저녁으로 제법 찬 기운이 돌았다.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오늘도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차라리 레어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적적한 레어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활발하기 그지없는 이 신생국에 머무르는 생활이 훨씬 더 자극적인 것은 사실이었기 그는 일부러 아들에게 투덜거리면서도 남아 있었다. 아들 녀석은 처음에 아프티어스에게 갖은 아양을 떨며 몇 가지 일을 시켰다. 그녀로서는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아르티어스는 그녀의 애교에 홀딱 넘어가서는 전혀 할 생각이 없었던 일을 떠맡고 말았다. 이렇게 된 이상 후닥 해치우고 쉬자는 생각에서 아르티어스는 그 일들을 빨리빨리 처리했다. 안 해서 그렇지, 일단 하려고만 들면 어떤 일이든 처리하지 못할 것이 없는 아르티어스였다. 그는 드래곤이었고, 드래곤의 머리가 뛰어나다는 것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지금에서야 그때 왜 자신이 그토록 열심히 일을 했었는지 후회 막급인 심정이 되었다. 일단 자신이 일을 잘 처리한다는 사실을 알아 챈 아들 놈은 그 다음부터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애비에게 중노동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끝도 없을 것 같은 일에 질려 버렸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다음 찬장을 열고는 미네르바가 뇌물로 갖다 바친 포도주를 꺼내 맛을 음미하면서 한 잔 마시기 시작했다. 포도주의 그윽하고도 풍요로운 맛과 향이 그를 매료시키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그 지독한 레드 드래곤을 마셔야만 했다는 것이 그로서는 악몽과 같이 느껴졌다. 그것도 다 자신과 술에 있어서는 극과 극의 취향을 지닌 아들 놈의 탓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겨울도 머지 않았군. 이제 조금 더 지나면 .
그러다가 아르티어스에게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요즘 너무 바쁘다 보니 그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오늘이 그날인가? 가만 있자, 계산을 해 보자구.
한참 머리를 굴리던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르티어스는 아들의 방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