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계획하셨거나 허락하신 일들이라는 이 믿음 위에서 불만이란 생각할 수조차 없다. 이 확신 위에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그의 권면이 가능해진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비극적인 일이나 즐거운 일들은 하나님께서 삶을 디자인 해 가시는 원재료들이다. 하나님께 인생의 사건들을 아뢰면, 혼란으로부터 질서가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환경은 하나님께서 정하신다. 우연 같은 것은 없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제대로 받기만 한다면, 모든 시련의 경험들은 “선”으로서 제 몫을 감당할 것이다. 신체적 고통이나 약함은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게 한다.
*실수와 실패들은 우리의 교만을 겸손하게 한다.
*인생은 베틀에서 짜여지는 색색의 실로 수놓은 비단과 같다. 아름다운 옷감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색깔들이 모든 같은 빛깔이어서는 결코 안된다. 어떤 것은 밝고 아름다워야 하고 어떤 것은 어둡고 칙칙해야 한다. 이것이 모두 합력하여 아름다운 옷감을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성경의 기록들을 연구해 보면 무척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한 경우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이상을 본 사람들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자신을 낮추고 있다. 그 순간들은 황홀함이 아닌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그 이상이 강할수록 하나님 앞에 더욱 완전히 굴복하였다.
*하나님의 임재 체험은 개인의 거룩함을 증가시키고 사역의 범위를 확장시키기 위한 서곡이었다.
*하나님께 미완성이란 있을 수 없다. 일단 시작하신 것은 꼭 완성하신다. 만일 한 세대가 응답을 거절하면, 하나님께서는 참을성 있게 다음 세대와 다시 시작하셨다.
*야곱의 뒤틀린 성격은 오히려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보여주고, 약한 자녀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태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시적인 편안함보다는 우리의 영적인 성장에 더 관심이 많으시다.
*우리의 성품은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어려운 일들과 어려운 사람들로 인해 완성되고 풍성해진다.
*서원을 잊어버리거나 헌신을 철회하는 것은 그 대가가 매우 크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바로 그 실패로부터 더 넓은 사역을 창조하심으로써 사탄을 역습하신다.
*이 생의 삶은 천국의 유치원에 불과하다. 이제 우리는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다는 초급 과정을 이수했다. 멍에를 메어 보지 않으면 쉼을 즐길 수 없다.
*모든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사용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남달리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기꺼이 아무 것도 아닌 것(nothing)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전부(everything)가 되신다.
*인간의 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데 가장 좋은 조건이 된다.
*자신이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 드려 그분의 무기로 사용하시도록 하는 교회나 영혼은 그 어떤 것으로도 파괴할 수 없다.
*모세는 왜 하나님의 뜻대로 할 수 없는지 7가지 이유를 댄다. 모두 자신의 나약함과 무능력함에 근거한 것이었다. 능력이 없고(출3:11), 전할 말이 없고(3:13), 권위가 없고(4:1), 입이 뻣뻣하고(4:10), 보낼 만하지 않고(4:13), 이전에 성공한 경험이 없고(5:23), 이전에 받아 들여지지 않았던 것(6:12)이다.
*사실 자신의 무능력함을 보여주기 위해 모세가 제시한 변명들은 하나님이 그 일을 위해 모세를 선택하신 바로 그 이유였다.
*기드온 군대의 철저한 약함이 하나님의 승리의 무기가 되었다.
*겔 28:11-19, 사 14:12-15. 이 말씀들은 본래 두로왕과 바벨론왕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다. 이 구절들은 그 언급된 역사적 인물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구절들은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런 방법으로 진리를 게시하는 방법은 성경의 다른 곳에도 있다. 예를 들어 메시야 시편을 기록한 시편 기자는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기록하긴 했지만 전적으로 메시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이 이차적인 적용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지키고 보호하는 높은 직책을 가졌던 사탄에 대한 말씀이라고 적용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게 된다. 사탄은 의로운 태양 가까이에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를 차지했던 계명성이었다. 무엇이 그를 타락시켰을까? 바로 교만이라고 하는 근본적인 죄, 즉 자기 자신의 보좌를 하나님보다 높이려고 한 죄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따라 하나님의 보좌를 지키는 대신, 사탄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도전하고 그 보좌를 빼앗으려고 시도했다. 교만으로 인해 자아를 드러내는 자기숭배(self-exaltation)에 빠지게 되었다. 그의 죄의 본질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교만은 오직 자유로운 독립을 갈망하는 이기적인 영적 자기충족(self-sufficiency)이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 대신에 자기 자신을 보좌에 앉히려는 근본적인 죄이다.
*우리도 모든 죄의 뿌리에 놓여있는 근본적인 죄인 교만으로 타락한다. 그 죄는 곧 우리 자신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욕망이다.
*교만은 자신을 신격화 하는 것이다. 교만은 자신의 위치를 본래보다 더 높다고 믿는 것이다. 교만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영광을 그 자신에게 돌린다.
*교만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것은 아담의 범죄의 본질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하나님과 같아지려 했고, 결국 전 인류에게 파멸을 가져왔다. 교만은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은혜 입은 것을 싫어한다. 전적으로 자기 자신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긴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5:30)고 말씀하신 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분은 아버지를 의지함으로써 아버지를 높였다. 교만은 자신의 힘으로 이룬 것으로 스스로 영광을 더한다.
*교만은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과 같이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18:11) 교만은 다른 모든 존재들을 하찮은 것으로 여긴다. 교만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뛰어남을 보여주기 위한 배경으로 이용한다.
*“지식은 자만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지적인 교만이 생긴다. 특히 이것은 자신들의 지적 우월함을 자랑스러워하는 똑똑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유혹이었다. “우쭐거리다(puffed up)”라는 표현이 사용된 여덟 개의 본문 가운데 일곱 개의 표현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타난다.
*말을 할 때면, 교만은 비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비판은 항상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교만은 자신을 과장하고 주변의 것을 축소한다.
*교만이 당신 안에서 죽지 않으면 하늘의 어떤 것도 당신 안에서 살 수가 없다.
*믿음의 길은 꽃이 뿌려진 길이 아니라 핏자국이 나 있는 길이다.
*바울은 고난으로부터 벗어난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견디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고난을 모르고 자기 만족에 빠진 교회는 영적인 영향력도 거의 없다.
*우리는 “주의 길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대량 생산의 원칙을 적용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어떤 사람들은 시련으로부터 구해내시지만, 어떤 사람들은 시련으로 인도하신다. 우리가 가진 영적 사전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단어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는 방법을 우리가 언제나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일을 설명하실 책임도 없으시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우리의 판단과 달리 온전한 지식에 근거하고 있다. “내가 네 행위를 안다”는 것은 주님께서 일곱 교회들에게 주시는 반복적인 보증이며, 모든 공로가 인정될 것이라는 보장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유리하든 불리하든 그 어떠한 것도 온전한 지식을 가지신 주님의 눈 앞에서 감출 수 있는 것은 없다.
*주님께서는 교회의 주인이시며 지지자가 되시며, 또한 그들의 보호자와 버팀목이 되신다.
*주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이 장래의 모든 심판에 대한 근거가 될 것이다. 검은 주님의 판단하시는 권위와 힘의 상징이다. 그 말씀은 삶을 쪼개고 죄를 드러내며, 거기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을 도려내고, 또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닌 모든 것들을 파괴한다. 심판하실 때 그리스도께서는 온전한 분별력을 드러내신다.
*주님으로 인해 죽음은 단지 더 풍부한 생명으로 가는 통로다.
*그리스도는 사자라고 소개되었지만 그분은 어린양의 모습을 하고 있다. 구속은 단지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리신 희생을 통해 얻어진다.
*그분의 자격은 무엇일까? 다섯 개의 상처, 즉 주님께서 인간의 잃어버린 유산에 대한 대가를 완전히 지불하셨고 빚을 완전히 청산하셨다는 무언의 증거들이다. 이 상처들은 천국에서도 고통과 죽으심의 흔적을 간직하고 계신 그리스도의 인상적인 모습인 동시에 그분의 신적 특권과 특성을 증거하고 있다. 일곱 뿔은 그분의 전능함을, 일곱 눈은 그분의 전지함을 상징한다. 세상에 보내어진 일곱 영은 그분의 무소부재하심을 나타낸다.
*찬양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우리가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신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다.
*첫째 아담에게 하신 말씀은 “네가 정녕 죽으리라”였다. 이 말씀은 마지막 아담이 “죽임을 당하였다”는 말로써 효력을 다하였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 대하여 그 임무를 성실하게 세심하게 자키는 사람을 묘사할 때 공통적으로 쓰인다.
*우리 주님은, 비록 죄는 아니지만 쉽게 죄로 변질될 수 있는 우리의 결점과 약함을 공감하실 수 있다. 공감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경험이 마치 자신의 경험인 것처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다. 공감은 그 사람이 같은 경험으로 고통을 받았을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구원은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로, 마태복음에서 이 단어는 네 가지 의미로 쓰였다. 그것은 바로 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남(1:21), 위험으로부터 벗어남(8:25), 질병으로부터 벗어남(9:21),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벗어남(10:23,24:13)이다.
*죄에 대해 완벽하고 완전한 희생을 치르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존전에서 우리를 변호하시고 중보하신다.
*중보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간구하는 행위이다.
*일년에 한 번씩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피와 향을 들고 들어갔다. 그는 피를 속죄소에 뿌렸다. 그는 향로에 향을 채워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였다. 우리의 대제사장께서도 정확히 그렇게 하여 승천 후에 지성소 휘장 안으로 들어가셔서 당신의 희생의 피를 뿌리셨다. 그리고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삶을 사심으로써 향기로운 향을 드리셨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절정이다.
*주님의 중보는 소리가 아니다. 즉, 들을 수 있도록 말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매년 행하던 대 속죄일에 지성소에서 아론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속죄일에 말씀하셨던 것은 아론이 아니라 그 피였다. 그 피는 우리 중보자의 실체이다. 그분은 우리를 대변하시는 승리의 증거를 그 몸에 지니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 보좌 앞에 살아 계신다.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5:10)
*아버지의 뜻과 목적에 온전히 부합하신 주님을 통할 때만 진정한 기도가 된다. 우리의 믿음의 기도는 홀로 올려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공로에 흠뻑 적시어져서 강력한 능력을 갖게 된다.
*“복을 받았다”는 말은 신약을 통해 고상하게 된 말이다. 이것은 헬라어의 “칭찬받다”라는 맏에서 유래하였으며 영어의 “행복”과 같은 말인데, 그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연, 기회, 행운이라는 의미가 있다. 원래 이것은 그리스 신들과 인간들에게 쓰였지만 대개 외형적인 번영을 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단어에 영적인 부유함이라는 뜻을 부여하여 새로운 중요성을 부가하셨다. 이 말은 “부러움을 사는, 축하 받는, 최고로 행복한, 영적으로 부유한, 부러울 만큼 운이 좋은, 빛나도록 기쁨이 넘치는”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가난한”으로 변역되는 단어는 두 개가 있다. 하나는 환경에 의해 가난한 노동자에게 사용되고, 또 다른 하나는 선택에 의해서 가난한 거지에게 사용된다. 노동자는 남는 것이 없다. 거지는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말하는 영적인 가난은 후자에 속한다. 영적으로 거지가 되는 것은 탐낼 만한 태도이다.
*“애통”이라는 단어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회개를 나타낸다. 이 단어는 영적인 좌절이나 실질적인 범죄로 인한 후회를 나타낸다.
*온유: 그것은 비축하여 놓은 부드러운 힘이지 유약함이 아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영광이나 천국의 유익이 걸려있을 때에 강하고 힘있게 싸울 수 있다. 본질적으로 온유는 자신이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마음 가짐이며,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항상 자신의 특권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온유는 하나님의 계획을 기쁘게 받아들이기 위해 항상 자기 자신의 계획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온유는 하나님께서 높게 평가하시는 은혜라고 격찬하신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3:4)
*우리는 대중을 같은편으로 만들이 위해서 우리의 요구사항을 줄이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당신을 따르는 것을 몹시 어렵게 만드심으로써,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일부러 줄이셨다.
*“제자”라는 말은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이 말은 배운 것을 행동에 옮기려는 목적을 가진 사람이라는 개념을 함축하고 있다.
*“미워한다.”는 말은 절대적 의미가 아니라 상대적 의미로 쓰인다. 이것은 “덜 사랑한다”는 의미다. 혈연적인 사랑이 주님에 대한 사랑보다 우세하냐 아니냐가 마지막 테스트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수치와 고난과 죽음을 뜻한다. 그 십자가는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하는 것의 상징이다. 자기 십자가라는 것은 당신의 십자가에서 수치와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와 완전히 동일시 하는 것을 암시한다. 주님을 위하여 경멸과 증오와 세상의 따돌림을 기꺼이 받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버리다”는 말의 의미가 “관계를 끊다, 권리를 양도하다, 포기하다, 작별을 고하다”로 확장되어 있다.
*“물질”은 우리 위해 군림하는 끔찍한 독재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부를 함께 섬길 수 없으며, 두 주인에게 충성할 수 없다. 마음이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을 때 제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셨던 교훈은 우리는 우리 소유물의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것은 다름 아닌 교회의 존재 목적에서 실패한 것이다.
*“처음 행위를 가지라” 이것도 명령법이다. 그들은 예전에 했던 일들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새롭게 덧입어야 한다. 사랑은 감정의 문제인 동시에 의지의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물을 언제나 아낌없이 주신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이라면, 그것은 “지식에 뛰어난 사랑”이다. 혹 그것이 기쁨이라면,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다. 혹 평화를 주신다면, 그것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이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최상의 하나님이시다.
*믿음은 영적인 삶의 혈액이며 믿음이 제대로 작용하지 못할 때에 영적인 빈곤이 피할 수 없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성령”이라는 단어가 라틴어 스피리투스(spiritus; 숨, 호흡)로부터 유래되었다. “성령”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뉴마’ 역시 바람이나 호흡을 의미한다. “성령”을 지칭하는 히브리어 ‘루아흐’ 역시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다.
*변화의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보는 것”이다. 현혹시키는 것에 대항하여 절망적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집중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 그리고 성령님께서 변화시켜 주실 것을 확신하며 의지하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보는 그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 바로 삶의 법칙이다. 보는 것은 삶과 인격에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도 역시 주님의 영광을 반사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의 경험이 고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다. 우리 앞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는 것은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노력과 행동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도록 내버려 두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것들은 “벗어 버리고” 어떤 것들은 “덧입어야” 한다.
*우리가 진심으로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훼손하는 모든 것들과 기꺼이 결별해야 한다.
*우리의 인격이나 행실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로 작정할 때, 끝까지 우리를 도우시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시는 강력한 보혜사를 모시게 된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그 빛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빛에 반사된, 파생된 빛이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성령께서 우리의 전인격을 소유하고 통제하시도록 맡겨드리고 주님의 주권 아래 우리 전인격을 드릴 때,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 인격의 중심에서부터 통제하기 시작하신다.
*모든 영적 은사를 주시는 것은 성령의 주권적인 권리이다(고전12:11). 따라서 어떠한 은사도 권리로서 청구될 수 없다. 우리는 성령님께 어떤 영적 은사를 달라고 지정할 수 없다.
*은사 자체를 위하거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구하는 은사는 어떤 것이든지 가짜이며 속임수이다.
2024.1.16 완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