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방가르드Avantgarde, 혹은 미래파의 모험
김동원 시인 · 평론가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
M․칼리니스쿠(의『모더니티의 다섯 얼굴』)에 의하면, 모더니티Modernity에는 모더니즘(Modernism 근대주의), 아방가르드(Avant-Garde, 전위예술), 데카당스(Decadance, 허무주의), 키치(Kitsch, 천박한/대중취의),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탈현대주의/ 해체주의)의 다섯가지 범주가 있다. 이들 모두가 각기 양상은 다르지만 새로움의 추구와 방법적 실현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 특히 아방가르드의 경우 이성과 합리주의에 대한 거부는 물론, 진보적인 입장과 태도에 따른 현실 변혁의 정신과 사상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하여 다분히 실험적이고 전복적(顚覆的)인 상상력으로 전통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정신의 첨병으로서 아방가르드는 관습적인 독자들의 감성에 충격을 주며 지배적 부르주아 문화의 규범에 도전하며 모호성, 불확실성, 주체의 붕괴와 비순수와 반예술 운동의 기치를 내건 바 있다. 순수 미술이 현실을 외면하고 세계와 외면한 작품 세계에만 몰두하는 것에 반발하여 발생한 아방가르드는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던 시기에 스위스로 전쟁을 피해 피신한 예술가들을 통해 시작되었다.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로 아방가르드가 탄생했듯이, 아방가르드에 대한 반발, 더 나아가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로 포스트모더니즘이 탄생하고 보면, 예술은 끊임없는 부정의 생성이자 산물이다. 아방가르드는 다다이즘, 입체파,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으로 분화되어 회화와 음악, 문학 분야에서 다양하게 시도되며, 시적 언어의 혁신, 전통적 형식의 거부, 새로운 미래 사조의 옹호 등 전방위적으로 확산된다.
“서구의 수많은 철학자, 사회학자, 역사가들은 왜 예술에 주목하는가? 푸코, 리오타르, 바르트, 들뢰즈, 데리다, 로티, 에코 등 많은 탈근대론자들은 왜 아방가르드 문학에 열광하는가? 아마도 이들은 자신들의 철학적, 이론적 기본 가설을 위해 예술가들의 이론과 실천에서 어떤 통찰력을 얻어 내는 것이리라. 이들은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저항, 위반, 개입, 전복, 쇄신, 차이, 비판, 창조 등의 정신을 얻어내고 있다. 이들은 심지어 예술적 광기, 비-이성, 추상화, 초현실화, 극소화 등을 통해 기초담론 질서와 체계, 더 나아나 소위 “근대적 기획”에 “탈”을 내어 탈근대로 나아가려는 것은 아닌가?” (정정호 편,『들뢰즈 철학과 영미문학 읽기』, 도서출판 동인, 2003.) 한편, 반(反)예술적 부정주의로서 아방가르드와 예술적 부정주의로서 모더니즘을 구분하는 유럽과 달리, 미국의 경우는 따로 구분하지 않으며 동의어로 쓰고 있어 모더니즘의 한 특징으로 편입시킨다. 그 결과 위트와 풍자의 천재로 지목되는 오스카 와일드(아일랜드, 1854~1900)의「아서 새빌 경의 범죄」, 페미니즘의 주창자 헨리크 입센(노르웨이, 1828~1906)의「인형의 집」, 일상의 추(醜)와 악의 미를 추구한 보들레르(프랑스, 1821~1867), 순수시와 관념성을 표방한 말라르메(프랑스, 1842~1898), 감각의 착란과 견자(見者)의 시를 주창한 랭보(프랑스, 1854~1891), 순수의 시정신과 추상에 몰입한 폴 발레리(프랑스, 1871~1945), 초현실주의와 무의식의 자동기술법을 시도한 앙드레 브르통(프랑스, 1892~1966), 통합성의 시론과 탈개성화를 추구한 T.S 엘리엇(미국. 1888~1965), 미래파이자 20세기 러시아 최고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러시아. 1893~1930), 아우슈비츠가 낳은 비극의 시인 파울 첼란(루마니아. 1920~1960), 리듬의 시를 발견한 언어의 연금술사 옥타비오 파스(멕시코, 1914~1998)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에서 시작된 아방가르드 운동이 러시아와 이탈리아의 미래파에 이어 오늘날 이렇듯 다양하게 분화된다.
한편, 한국시의 경우도 모더니즘Monernism 의 하위 범주로 주지주의modernism와 이미지즘imagism, 초현실주의surrealism(또는, 다다이즘dadaism, 아방가르드avangarde)가 있다. 앞의 두 경우가 비교적 온건한 모더니즘에 속한다면 마지막 초현실주의 계열은 과격한 모더니즘으로 볼 수 있다. 최초의 아방가르드(적인 모더니즘)시는 이상(1910~1937, 서울 출생)의「오감도烏瞰圖」연작시로 볼 수 있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필적할 세기적인 작품(조용만, '이상 시대, 젊은 예술가들의 초상')으로 거론한 ‘오감도’는 1934년 7월 24일《조선중앙일보》를 통해 15회 연재되다가, 난해하여 독자들의 거센 비난을 받고 중단된다. 아방가르드적인 이 시의 중요한 특징은 “실험적 시각시이자 초현실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며, 회화적 기법을 통해 미적 자율성을 구사한다. 또한 이 시는 피카소와 뒤샹이 시도했던 큐비즘의 관점을 취하고 있으며,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와 겹친 레이어(layer) 기법을 시에 사용하고 있다.”(박상순,『나는 장난감 신부와 결혼한다』, 민음사, 2019) 식민지 지식인의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그의 실험정신은, 활자의 크기와 배치, 도형과 그림의 결합, 숫자를 거꾸로 사용한 기상천외한 시법에 잘 나타나 있다. 하여 그 이전까지는 경험하지 못한 한국시의 새로운 영역이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상,「오감도(鳥瞰圖) 시(詩)제1호」전문
숫자 13의 상징과 알레고리를 통해 일제 강점하의 불안과 공포를 차이와 반복의 리듬과 이미지, 의미로 드러낸 이 시는 일견 현대의 퍼포먼스와 유사하다. 이후 오감도는 세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비평가에 의해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백가쟁명식의 비평은 “13인의아해”를 ‘정자들의 무서운 질주’(마광수)로 독해한 의외성의 경우도 있다. 반면 경제 침탈 및 수탈의 목적으로 건설된 “도로”와 “막다른골목”은, 식민 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일제의 비열한 수단을 암유하기도 한다. 지금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오감도烏瞰圖」는 이상이 만든 조어로서 조감도(鳥瞰圖)의 새 조(鳥)를 까마귀 오(烏)자로 바꾼 것이다. 그럼 왜, 건축기사였던 이상은 ‘새 조(鳥)를 까마귀 오(烏)자’로 바꾼 것일까. 1896년(고종 33년)에 조선은 8도에서 13도로 개편된다. 혹, “13인의아해”는 식민지 치하의 막다른 길에 내몰린 조선 13도의 불행한 민초를 상징한 것은 아닐까. 하여, 까마귀를 조사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조선 사람은 까마귀를 흉조라고 생각하지만, 일본인들은 길조라고 불렀다. 추측건대 이미 이상은, 백 년 전 조선을 영구적으로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하려는 일제의 무서운 침략 야욕을 꿰뚫고 있었으며,「오감도烏瞰圖」를 통해 ‘까마귀로 상징된 일본이 조선 13도를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섬뜩한’ 시로 예언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가장 실험적인 방법으로 드러낸 셈이다. 그러나 현실적이고도 실험적인 의미망을 구축한 ‘오감도’ 연작은 여전히 그 해석의 지평이 열려 있다.
미래, 미래파 시
미래파 젊은 시인들의 시는 “중언부언을 중요한 발화의 방식으로 만들었다. 단형의 틀에 우겨 넣기에는 시의 전언이 너무 풍부하다. 그들은 음악을 위해서 전언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미지가 풍요롭다. 그들은 여러 화자를 무대에 올린다. 사회와 역사에 대한 통찰은 존재론적인 통찰에 자리를 물려줄 때가 되었다. 추(醜)와 불협화음은 처음부터 미(美)의 범주였다. … 다시 말하면 새로운 세대가 생산하는 시들은 결코 요령부득의 장광설이거나 경박한 유희의 산물이 아니다. 그들에게서도 시는 여전히 생생한 체험의 소산이며, 감각적 현실의 표명이며, 진지한 고민의 토로다. 세대가 바뀌면 그 세대에 통용되던 미학과 세계관이 바뀐다. 그런데 비평은 늘 작품보다 늦되다. 비평이 작품을 선도할 수는 있으나 오도해서는 안 된다.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은 믿는다. 먼 훗날, 이들의 작품이 낡았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다르게 말해서 이들의 작품이 가까운 미래에 우리 시의 분명한 대안이라는 것을 인정할 날이 올 것이다. 어차피 우리 시의 미래는 이들이 적어 나갈 것이다. 이들에게는 1980년대 시인들이 걸머져야 했던 역사와 시대에 대한 채무 의식이 없고, 1990년대 시인들이 내세운 그럴듯한 서정, 고만고만한 서정이 없다. 이들의 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재미있다.” ―권혁웅 비평집『미래파』(문학과지성사, 2005) p149, p171 발췌
2000년대 스마트폰의 등장은 신인류 포노사피엔스의 디지털 혁명을 불러왔다. 태어나면서부터 인터넷 공간에서 사는 이 세대의 본질은, 가상현실과 무한의 상상력으로 집약된다. 기존 인류의 생존 방식은 무너지고, 4차, 5차 혁명으로의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지금까지 거의 모든 인간의 학습 방식은 순식간에 무용(無用)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인공지능(AI)·빅데이터·사물인터넷·5G·자율주행 등 디지털 기술이 미래를 대체한다. 컴퓨터는 인간 뇌를 확장시켜 로봇과 공존하는 사회가 되었다. 유튜브, 넷플릭스, OTT 등의 스마트폰 영상시대는 첨단을 달린다. “디지털 문명을 거부해왔던 기성세대도 강제로 온라인 소비 세계로 이동”(최재봉,『포노사피엔스』, 샘앤파커스, 2019)하고 있으며, 이제 스마트폰은 신체의 일부가 되었다. 심지어 AI는 컴퓨터에서 인간과 같이 사고하고 생각하고 학습하고 판단하는 지능을 갖는다. 인간의 뇌를 모방한 신경망 네트워크는 기존 머신러닝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2016년 구글의 바둑 인공지능(AI) 알파고와 이세돌의 세기의 대결은 큰 충격을 주었다. 미래 사회는 포스트휴머니즘(Post Humanism)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새로운 생명과 기술, 더 나아가 모든 사물(무생물)과 연결된 감성이 중요하다. “20세기가 은유의 시대라면 21세기는 환유의 시대다.” 라깡의 말처럼 “차이, 흔적, 시뮬라크르, 증식, 복제 등의 키워드로 변주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감수성에 닿아있다.”(정끝별『시론』, 문학과지성사, p160)
바야흐로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기계와 대화하는 시대가 열렸다. chat GPT(언어생성지능)의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2022년 미국 콜라라도 미술대회 디지털 아트 부문에서 게임 기획자가 미드저니 인공지능으로 그린 그림이 1위를 차지했다. 이제 쳇 GPT는 예술의 창의적 활동뿐만 아니라, 회계사, 변호사, 의사, 엔지니어 등 전문적 영역까지 확장하고 있다. 이런 대화형 쳇 GPT는 거짓말도 그렇듯 하게 꾸며낼 수 있다. 최근 생성 AI 모델 감별사란 업종도 생겼다. 인간이 그렸는지, 기계가 그렸는지 감별(구별)해 주는 새로운 직업이다. 앞으로 예술은 표절로 인해 창작 생태계가 상당한 혼란기를 겪을 것이다. 왜곡된 내용과 편견으로 오염된 데이터는, 전혀 다른 차원의 거짓 예술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chat GPT는 끊임없이 진화할 것이다. AI 연주자, AI 가수, AI 시인·소설가·화가 등이 전면에 등장할 것이다. AI 시인의 시집을 사람들이 서점에서 사서 읽게 될 것이다. 아니, 벌써 인공지능 시아SIA가 쓴 시집『시를 쓰는 이유』가 서점에 나와 있다.
이런 시대적 변화 속에서, 2000년대 이후 일군의 젊은 ‘미래파’ 시인들은 본능적으로 ‘디지털 플랫폼’으로 시(詩) 공간을 옮긴다. 2005년 평론가 권혁웅에 의해 본격화된〈미래파〉(『문예중앙』봄호) 논쟁은, 한국 시단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이 글을 통해 미래파 젊은 시인들을 옹호하며, 낯선 어법, 새로운 상상력에 주목하였다. 그들이야말로 미래 한국시의 대안이며, 대중문화를 흡수한 새로운 스타일의 아방가르드임을 분명히 하였다. 시인·소설가인 필리포 마리네트(이탈리아, 1876~1944)에 의해《미래파 선언》(1909년, 파리 르 피가로Le Figaro지 발표) 이 주창된 이래, 미래시는 과거 유산과의 결별, 형식의 해체 및 언어의 절대 자유, 산문시의 실험, 낯선 어법, 새로운 상상력을 표방하였다. 그러나 미래시는 시 형식의 획일성과 내용의 장광설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기존의 구문법을 파괴한, 구두점을 무시한 절름발이 언어로 비춰졌다. 서술 구조의 단절과 행간의 비약은 소통 불가인 상태이다. 한편 미래시는, 저간 한국 근현대시에서 도외시되었던 ‘무의식과 기표의 놀이’(황병승), ‘코믹잔혹극과 유머’(김민정), ‘낯선 세대 감각’(유형진), ‘접신된 흐름과 놀라운 비약’(김경주), ‘세기말의 불안과 미래 사회의 동경’(여정)이 중의적 화법과 언어유희를 통해 새롭게 제출되었다. 현대시에 그들이 접목한 성도착과 음습한 귀기와 몽환, 부조리한 사회악적 상징기호와 언어를 음절까지 해체한 시법은, 낯설고 신선했다. 특히, 언어 지층에 각인된 연대기를 우주적 상상으로 확장한 힘은 환상적이다. 미래시는 전시대 인식의 벽을 깨부수는 힘이 있다. 주체의 복화술과 사물의 타자화, 존재의 역설과 유령 이미지가 그것이다. 미래시의 다성성(多聲性)과 내러티브는 환유적이면서도 알레고리컬하고, 불연속적이면서도 그로테스크하다. 그것은 언어의 해체 너머 표현 추상의 극에 가 닿는다.
미래시는 근대 이상의「오감도」와 같은 일군의 초현실주의와 전위예술에 뿌리가 닿아있다. 묘사는 인디indie적이고, 탁월한 부조(浮彫)의 언어는 전면적 균열을 내보인다. 닫힌 열림의 추상과 가능태이다. 최근 미래파 시들은 불안한 심리와 주술적 감응, 무서운 질주로 궤도 이탈이 감지된다. 그야말로 파격에서 파격으로 치닫고 있다. 이제 미래시가 시(詩)냐 비시(非詩)냐의 담론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소통과 해독이 불가능한, 실험만을 위한 실험 위주의 시는 나름의 한계가 있다. 미래시의 반동으로 출현한 디카시(digital camera詩)는, 디지털 시대에 편승하여 현대인의 이성과 감성에 접속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디카시는 사진 기술을 매개로 사물의 시적 형상을 포착하여 압인(押印)한 시로서 멀티 언어 예술이다. 하이쿠와 같은 짧은 시구로 바쁜 현대인의 눈길을 사로잡은 디카시의 시성(詩性)에 대한 근본적 질문은 차치하고라도, SNS로 소통하는 디지털 환경에서 누구나 창작하고 향유할 수 있는 새로운 시(詩) 놀이를 제공한 점은 긍정적 측면이 있다.
이제 이 장에서는 이상의「오감도烏瞰圖」를 기점으로 아방가르드의 개성적 세계를 열어젖힌 6편의 시를 분석 감상해 본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경계에서 줄곧 언어해체를 시도해온 박상순의「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번째는 전화기」(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 민음사, 1994), 미래파의 선두주자로 바코드화된 현대사회의 부조리를 찌른 여정의「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시집『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 민음사, 2016), 시니컬한 언어의 이미지를 집요하게 오려 붙인 권기덕의「포토그래프몽타주 No.-6 지하철」(시집『P』, 중앙북스, 2015), 세계와의 불협화음을 소리의 세계로 전복(顚覆)한 김사람의「디스토션」(『나는 이미 한 생을 잘못 살았다』, 천년의 시작, 2015), 축제를 빌어 근대적 ‘꼰대 의식’을 까발린 황성희의「할로윈 무도회」(『앨리스네 집』, 민음사, 2005), 사적 상징 언어를 통해 새로운 상상의 자동기술법을 구사한 최백규의「나의 세상에 온 걸 환영해」가 그것이다.
박상순, 혹은 기표와 기의 사이
박상순(1962~, 서울 출생)의「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번째는 전화기」는 언어가 무의식을 불러낸 시이다. 이 시는 “시니피에로부터 이탈한 시니피앙의 유희를 통해 기존 시의 관념을 전복시킴으로써 주체의 자기 동일성을 해체하고 억압된 타자성을 복원한다. 분석적 비평의 도전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박상순의 시세계는 낯선 이미지와 그로테스크한 풍경을 추상화의 기법으로 보여준다.”(오형엽,「반복, 변주, 변신, 생성」)「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번째는 전화기」는 해체와 무의미시의 경계 지점에 놓인다. 언어의 해체를 통해 이미지로 재구성한다. “그에게 시의 대상은 현실이 아니라 언어, 혹은 기호이다. 그는 현실을 노래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재현한 현실, 말하자면 기호의 세계를 노래하고, 다시 기호화하고, 그런 점에서 헛것, 환상, 2차 현실을 노래한다. 그가 대상으로 하는 것은 영화, 만화, 포르노, 회화, 상품 기호 등이다. 뿐만아니라 기법의 측면에서도 그는 만화, 그림,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문자와 이미지의 경계 해체를 노린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그의 시는 이상의 시처럼 난해한 듯하면서도 결코 난해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듯하면서도 이해가 가능하다. 그리고 서정적이면서도 그 누구도 쉽게 모방할 수 없는 독창적이면서도 독보적인 문체를 구사한다. 박상순의 시는 변신을 도모한다. 시의 내외, 아니 시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얼굴을 바꾸며 여하한 존재의 규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박상순의 시는 이렇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그렇지 않은 다른 것’이 된다. 하여 박상순은 G․들뢰즈가 말한 분리와 이음의 결연 관계로서 “리좀적 존재”(오형엽, 같은 글)이다. 다음 시를 보자.
첫 번째는 나
2는 자동차
3은 늑대, 4는 잠수함
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열 번째는 전화기
첫 번째의 내가
열 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2는 자동차, 3은 늑대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 번째는 나
열 번째는 전화기
―박상순,「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번째는 전화기」전문
시,「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번째는 전화기」는 박상순의 세 번째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민음사, 1994)의 표제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삶이 그렇지 않은가, 의미가 탈락된 상태에서 제멋대로 연결되는 무의식의 삶, 그것은 정신분열증적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런 시는 부르주아 문화를 지배하는 고상한 인문주의자들, 선험적 관념적 자아를 믿는 정신주의자들의 세계관을 미적으로 비판한다는 특성을 보여준다. 이런 부정의 극한에 남는 것은 일종의 절망의 놀이이다. 시 속에서 열 개의 장난감이 나온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 <나>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장난감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이라는 시행들이 암시한다.(…) 이 시는 이성적 사고니 의식이니 하는 것들이 사라지는 시대의 황폐한, 끔찍한, 그러나 해학적인 <나>의 초상이다.”(이승훈 해설)
우선,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는 시행간의 의미를 독자가 굳이 몰라도 따라 읽으면 덩달아 즐겁다. 시행의 반복과 리듬이 주는 경쾌함 뿐 아니라, 기수와 명사로 된 시어에 뒤이어 서수와 명사가 갖는 은유의 ‘낯섬’은 수수께끼 같은 의미의 궁금증을 한껏 증폭시킨다. 이런 은유에 대해 “‘A는 B’라는 반복으로 이루어진 시다. A와 B의 관계는 무연하고 또 우연하다. 인과관계가 없는 ‘관계 맺기’ 혹은 ‘이름 바꾸기’ 놀이다. 그러니 왜 첫 번째가 나이고 6이 나무이고 7이 돌고래인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독자들도 A에 혹은 B에 마음껏 다른 단어를 넣어 읽어도 무방하다. 또한, 이 시는 앞에는 숫자가, 뒤에는 낱말이 새겨진 아이들의 카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6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나무라고 씌어 있고, 7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돌고래라고 씌어 있다. 십진법에 따르면 세상 혹은 세상의 모든 숫자는 1부터 10까지의 숫자로 환원된다. 현실과 언어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숫자와 낱말의 관계도 무연하고 우연한 약속에 불과하다면, 세상의 모든 관계도 그러하다는 것일까?”(정끝별,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1권 민음사, 2008) “은유는 배우거나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다.”(아리스토텔레스) 아니, 우주는 그 자체가 은유이다. 은유를 통해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비밀을 화자와 동일시한다.
그러고보면,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라는 시가 마치, 어린 아이의 언어 유희적 상상력이 무의식적으로 빚어낸 게 아닌가 싶다. 즉 기의와 기표 사이엔 어느 하나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자의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술작품에서 개인과 세계에 대한 불만족과 갈등은 질량체인 몸을 통해 드러난다. 대개의 경우 창작자는 이런 몸을 소재로 그 사회의 굴곡진 단면을 예리하게 파헤쳐보고 싶은 미적 욕망에 사로잡히곤 한다. 혹자는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에서 “첫 번째는 나”라는 생뚱맞은 은유를, 현대인의 ‘욕망’과 화자 ‘나’를 동일시한 화법으로 본다. 즉, ‘나’야말로 욕망덩어리의 주체인 셈이다. 화자는 연이어 “2는 자동차”라고 단정적 은유를 썼다. 이런 은유적 시작 태도를 통해 현대인의 욕망의 기표를 ‘자동차’로 규정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동차는 개인 간의 부의 가치 척도이자, 생과 사를 함의하는 현대사회의 비틀린 속도와 경쟁의 상징성을 띤다. 시인은 이런 현대사회의 부조리와 구조적 모순을 은유와 풍자로 비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우리는 어떤 사물이 좋기 때문에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욕망하기 때문에 좋다고 판단한다”(스피노자, 에티카). 이는 곧 욕망은 결핍에서 촉발된 필요악이란 뜻이다. 그런데 시인은 1연 3행에서 단호히 “3은 늑대, 4는 잠수함”이라고 직설 화법으로 치고 나온다. 현대인의 욕망의 가면을 벗기면 주린 창자를 채우려는 ‘늑대’들의 교활한 눈빛이 번득이겠다. ‘잠수함’ 역시 익명성 뒤에 숨어 온갖 사회악을 재생산해내는 은유적 상징이다. 시인은 “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 / 8은 비행기 / 9는 코뿔소, 열 번째는 전화기”라고 열거와 반복으로 시의 호흡을 급박하게 밀어 올린다. ‘구찌’로 대표되는 무자비한 명품 소비를 부추기는 욕망을 ‘악어’로 상징했으며, 현대인이 서로가 서로에게 속고 속이는 교묘한 위장술을 ‘나무’라는 소재를 통해 드러낸 것은 욕망의 의표를 찌른 멋진 표현이다. 물론, ‘돌고래 쇼’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열망이자, 삶이 궁극엔 한 편의 ‘쇼’임을 비유한 것이겠다. 그러한 욕망덩어리는 자꾸 덩치가 불어나 절제할 수 없는 거대한 ‘코뿔소’로 변형된다. 한편, 한국 사회의 ‘빨리빨리’ 문화는 ‘비행기’를 타고 전국토의 구석구석 급속히 퍼졌다. 이런 자본주의의 악습이 결국 이 사회가 정신적 분열증에 병들었다는 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기형의 ‘욕망 공화국’으로 바뀐 셈이다. 현대의 톱니바퀴 속에 끼인 개체로서의 나는, “전화기”를 들고 밤낮 누구에겐 가로 끊임없이 자신을 알려야만 하는 병적 도착으로 장난감 같은 삶을 살다 죽어간다. 시인은 그 끝을 서로가 서로의 “살”을 뜯어먹고 끝내 함께 사라져버리는 ‘욕망의 아귀’ 지옥의 사슬로 보았다. 하여, 시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는 현대사회의 ‘인간 욕망’의 ‘참과 거짓’을 깊이 성찰한 작품으로 규정된다.
여정: 점묘 그리고 쇠라
여정은 어느 대담에서 2시집『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미술을 많이 알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내 시의 형식은 신인상주의 화가 조르주 쇠라(1859~1891)의 점묘법에 기초하고 있다. 내 시에서의 점묘는 인터넷이 가져온 파편화와 그 혼란의 와중에서 생겨난 당대 현실을 반영한다. 쇠라가 빛과 점, 선과 색채의 조합을 통해 현실을 캔버스에 담았듯이, 나 또한 단어와 기호를 전면적으로 재배치한 시를 쓴다.”
점묘는 19세기 후반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인상주의 미술을 추진한 유파에 그 뿌리가 닿아 있다. 대상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린 인상주의는, 태양 아래서 빛과 색채, 대기의 변화무쌍한 양상을 미묘하게 묘사했다. 1874년 나달의 사진관에서 8회의 전시회를 연, 모네, 드가, 모리조, 기요맹, 고갱, 시슬레, 르누아르, 세잔은 인상파로 불려진다. 이 유파는 또, 세잔, 반 고흐, 고갱의 후기 인상파(신인상파)로 진화하면서 조르주 쇠라의 점묘에서 정점을 찍는다. 쇠라의 점묘는 햇빛 아래에서 펼쳐지는 당대의 일상생활 특히 여가의 모습을 화폭에 담은 점은 인상주의와 같으나, 다채로운 원색을 그대로 캔버스 위에 작은 붓 터치로 찍어서, 관람자의 눈을 통해 혼합된 색의 세계를 정지된 화면처럼 보여주었다. 쇠라를 이은 시냐크는 이러한 기법을 색채 광선주의라고 불렀고, 색채를 섞지 않고 나누어서 칠한다는 의미로 분할주의, 무수한 색점(色點)을 찍는다는 의미로 점묘법이라고도 했다. 쇠라가 그림의 형태, 구성, 색채를 중요하게 생각했듯, 여정(1970~, 대구 출생)의 시「178피스 퍼즐;「불면」―조르주 쇠라의 점묘법을 기념함」에서 또한 점묘법을 “한 텍스트에서 의미를 품은 언어들을 점(point)으로 독립시키고 있다. 신기하게도 점점이 토막 난 단어들의 묶음에서도 의미의 연쇄는 생겨난다.”(권혁웅) 그리고 시「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역시 점묘법의 한 갈래로, 반복된 쉼표를 통한 순수하고 정확한 언어 분할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한다.
나는 새벽 5시에 게임 종료된 하루살이백수다, 나는 낮 12시에 개켜진 이불이다, 빈집이다, 나는 전기밭솥에서 금방 꺼낸 밥공기다, 냉장고에서 꺼낸 밑반찬이다, 수저다, 나는 개수대에 던져진 빈 그릇이다, 지저분해진 수저다, 나는 소화기관에서 배설기관까지 걸어 다닐 운동화다. 운동화에 걸쳐진 셔츠다, 모자다, 나는 짤랑거리는 동전이다, 자동판매기에서 금방 꺼낸 커피다, 주머니에서 꺼낸 담배다, 연기다, 나는 심심해서 나를 만지작거리는 핸드폰이다, 음성변조 장난 전화다, 귀신 목소리다, 나는 휴지통에 버려진 종이컵이다, 꽁초다, 재다, 나는 낮 1시를 걸어가는 길이다, 티셔츠에 그려진 2개의 해골바가지다, 나는 홈플러스 남대구점이다, 승객을 기다리는 개인택시들이다, 테이크 아웃 커피 전문점이다, 나는 KG&G 대구 본부다, 뼈다귀 해장국집이다, 나는 음식물 쓰레기통 주변을 서성이는 하얀 고양이다, 맛있어 보이는 카키색 깃털의 양무새다, 새빨간 입술이다, 남자다, 나는 낮 1시30분에 앉아 있는 벤치다, 노곤함이다, 지루함이다, 갈 곳 없는 바람이다, 갈증이다, 나는 버튼에서 방금 태어난 캔 음료다, 찌그러진 빈 깡통이다, 나는 찌그러진 허공 속을 걸어가는 낮 2시다, 앞산에서 내려오는 황사 마스크다, 나는 2개다, 3개다, ……나는 다세대주택이다, 희미하게 나를 지우는 자동문 유리다, 나는 버려진 책들에서 건져 낸 뭉크/칸딘스키/아소르/마그리트 공동 화집이다,《현대세계미술대전집》11번이다, 금성출판사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는 불안이다, 절규다, 뼈가 있는 자화상이다, 즉흥 19다, 즉흥 30이다, 나는 푸가다, 노랑=빨강=파랑이다, 나는 밝은 땅 위의 형상이다, 비통해하는 사나이다, 지옥의 행렬이다, 나는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춘 대문 열쇠다, 현관문 손잡이다, 나는 나를 통째로 먹는 거짓 거울이다, 과대망상광이다, 최후의 절규다, 나는 낮 2시20분에 다시 돌아온 내 방이다,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영역 Ⅷ이다, 나는 개켜진 이불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티셔츠다, 모자다, 공동 화집 표지다, 나는 가면들에 둘러싸인 자화상이다, 충혈진 눈이다, 야비한 웃음이다, 왼쪽 눈으로만 흘리는 피눈물이다, 나는 제임스 시드니 앙소르다, 나는 낮 2시50분에 새로 생성된 제임스앙소리다, 나는 다시 처음이다
―여정,「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전문(강조 원문)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의 문장 잇기의 은유 놀이는 언어의 기하학적 체계를 떠올리게 하며, 작품의 다층적 깊이를 섬세하게 확보한다. 언어와 언어가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연결 방식은, 행간 속에서 유장한 내재율을 만들어, 문장의 독특한 느낌을 연출한다. 이런 시법은 쇠라가 점묘법을 통해 보여준 대비의 효과를 극대화할 뿐 아니라, 문장의 형태와 윤곽을 점묘로 찍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의 시 속 화자는, 우주의 ‘반물질’처럼 언어인 사물과 함께 태어났으나 충돌하여, 행간 속의 빛으로 소멸한다. 하지만, 여정의 시가 현대의 기호(언어 기호, 음악 기호, 그림 기호, 영상 기호…)로 가득하다 할지라도, 시니피에(기의)와 시니피앙(기표) 사이에 존재한다. 시의 행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촘촘히 점묘의 이미지로 연결되어 있으며, ‘쉼표’의 언어가 보이지 않는 은유 너머로 사라진다. 어쩌면 라깡의 말처럼 그의 시적 무의식은 ‘언제나 의식의 터진 틈 사이에서 흔들거리며 제 모습을 나타’내는 지도 모른다. 미래시의 첨단에 서 있는 여정의 시는, 기존 서정시를 새로운 방식으로 드러내 또다른 아바타를 생성해 낸다.「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은 수십 개의 개체로 분할된다. 코드를 뽑는 순간 ‘나’는 “게임 종료된 하루살이백수”이다. “새벽 5시”까지 화자를 따라가며, 이 시대의 바코드를 만들었다. 아니, “낮 12시에 개켜진 이불”이 된 여정을 생각했다. 빈집에서 혼자 밥이 된 그는, 기막힌 은유다. “전기밭솥에서 금방 꺼낸 밥공기”였다가. “냉장고에서 꺼낸 밑반찬”이었다가, 금새, “수저”로 변신한다. 시는 갖은 입구이자, 갖은 출구이다. 날줄과 씨줄로 엮인 하루의 거미줄은, 시 속 화자의 겹이미지이자, “동전”이며, “커피”이며, “휴지통에 버려진 종이컵”이다. 그 모든 것이자, 아무 것도 아닌 시가 곧「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이다. 이런 현대인의 다층적 이미지는,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벗겨도 벗겨도 또 나오는,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틈’이다. 알고 보면「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은 한 개인의 하루를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생(生)과 사(死)의 바코드이자, 현대사회의 안팎의 문제이며, 현실세계와 가상현실의 모순의 경계이다. 또한 바코드화된 자연의 비유이며, ‘나’의 또 다른 은유이자 환(幻)이다.
하여, 우리는 여기서 묻게 된다. 한 평자(김석준)의 말을 빌리자면, “예술이 표현할 수 있는 기호의 본질은 무엇인가? 레디 메이드와 미니멀리즘 그리고 팝 아트가 횡행하는 현대의 예술은 서정의 영기가 존재하지 않는 그저 단순한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철저하게 자본의 묘리에 종속되었으며, 마침내 코드로 무장하기에 이른다. (…) 현대 예술은 ― 너, 나 그리고 우리는 비트적거리는 게걸음을 걸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예술혼을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해받기를 원하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미지의 기호에 함몰된 채, 모든 것은 환유적 기호의 운동으로 환원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각자 자기만의 몽상의 세계에 귀의한 채 미적 기호를 아주 내밀한 의식의 코드로 무장한 채 이해의 저편에 예술을 위치시키게 된다.” 다시 여정은 말한다. 나는 “새빨간 입술이다.” “찌그러진 깡통이다” 끝없이 분열하는 “2개다, 3개다” 결국 시인은 화자를 통해 현대인의 ‘불안’과 ‘절규’를 지옥의 행렬로 은유한 것이며, 과대망상광이 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불확실성의 알레고리를 드러낸다. 하여, 오비디우스의『변신이야기』처럼, 현대의 군상들은 모두 “가면들에 둘러싸인 자화상”이자, 아침마다 대문을 열고 나오는 슬픈 시의 변신이라 하겠다. “나는 다시 처음이다”
권기덕: 무정형(無定形)의 언어
2000년대 이후의 시를 읽으면, ‘시는 존재하는 것인가’란 질문에 맞닥뜨린다. 표현과 기교의 형식은 뛰어나지만, 왠지 내용은 공허하게 다가온다. ‘기려(綺麗)와 조탁(雕琢)’만이 판치는 현대시의 이미지는 범람 직전이다. 시와 비시를 떠나서 최근 젊은 시는 의미와 사상이 불분명하다. 한편, ‘시가 꼭 의미가 있어야 하나?’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무의미 시’를 경험한 필자임에도 불구하고, 미래시의 ‘무정형의 언어’는 낯설다. 동일성의 시학이 교조적이라면, 미래시는 쓸모없는 대상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작업처럼 보인다. ‘시는 규정하는 순간 썩게 되?’(고은)지만, 현대시의 주체는 ‘미완성의 완성’을 고집한다. 미래시는 언어와 언어 사이에 크레바스(crevasse)가 존재하며, 위험과 긴장, 정형과 무정형, 안과 바깥의 대칭적 사유가 존재한다. 하여, 2000년대 이후 현대시는 이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 암흑물질처럼 언어의 입자는 ‘중첩깨짐’ 상태에 놓였다. 하여, 현대시는 난해하다. 기괴하다. 기존 “통념에 전면적인 균열을 내었고, 시단의 주류는 전복되었다. … 권기덕(1975~, 경북 예천 출생)의 시는 최근 ‘젊은 시’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예각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종전의 리얼리즘 전통, 경험 현실이 감각적 보편성에 근거하여 재현되고 재구성된 세계가 아닌 시인의 내적 감각, 내면 현실에 핍진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언어는 이 경험을 담아내는 참한 그릇이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무정형(無定形)의 형상으로서 작용한다.”(『저녁의 시인들』, 2018, 대구문화예술회관. 김문주 평론가)
지하철문이 닫히고 사람들 머리가 잘린다
발목이 잘린다 끌려온 길들이 잘린다
출입문 비상콕에
철썩,
흔들리는 손잡이에
철썩,
맞은편 할머니마스크에도
철썩,
철썩, 철썩, 그림자가 달라붙는다
버킷백과 장갑, 스마트폰이 뒤바뀌고
애인의 문자메시지는 낯선 남자의 귀에 걸린다
당신 하이힐은 점퍼에 어울리고
당신 목도리는 열차바닥에 더 적합하다
있어야 할 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지하철은 우리를 오려붙이기 위해 땅속을 달린다
철썩,
당신의 상상은 그의 온몸을 조각내고 있군요
하지만, 이곳은 평화로운 흑백사진
당신은 나에게 말한 적 없고
당신은 나를 살인한 적이 없어요
누군가를 그리워해본 사람은
철썩,
열차의 창문에서 내 표정은 더 선명해지고
바람은 거꾸로 불어온다
철썩,
당신은 당신이 아니라 작은 바람이고
당신의 무릎 사이 누군가의 신발이 포개질 때
숨바꼭질놀이는 다시 시작된다
숨어도 찾지 않는
철썩,
나를 찾을 수 있겠어요?
―권기덕,「포토그래프몽타주 No.-6 지하철」전문
시간은 내가 어디에 있는가, 어떤 상황에 있는가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 시가 젊다는 것은 질문에 강하기 때문이다. 우선, 권기덕의「포토그래프몽타주 No.-6 지하철」(중앙북스, 2015, 시집『P』)는 시가 갖는 시적 인식이 다르다. ‘구체적 현실’을 ‘추상적 현실’로 옮겨놓은 듯하다. 달리나 샤갈의 감성이 아니라, 오히려 피카소와 같은 입체적 시선이라고나 할까. 언어유희를 통해 풍경의 뒷면을 뜯어 붙이고 있다. 이런 이미지의 병렬과 시적 비유는 미래시의 특징이기도 하다. 새로운 관점에서 언어를 지적 놀이로 집요하게 휘몰고 있다. 감각적이고 시니컬하다. 미술 전공자인 그는 현상의 이미지를 시 행간에 오려 붙여 화면처럼 펼치고 있다. 행간의 시적 모호성은 도리어 현실을 또렷하게 보여주며, 해독 불가능한 세계를 가능태로 연결한다. “지하철문이 닫히고 사람들 머리가 잘리”는 순간 이미지는, 영화의 오버랩 기법을 사용한다. 특징적인 몇 가지 장면들을 분할해서 행과 행, 연과 연을 유기적으로 결합한다. 또한 이 시는 독특한 시집 제목『P』로 인해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P』는 일반적으로 사람의 ‘피’일 수도 있고, ‘파킹’의 의미도 된다. 혓바닥을 상징하기도 하고, 인칭으로서의 P, 포토몽타주기법의 P로도 해석할 수 있다. 다분히 시인의 다의적인 의도성이 깔려 있다. 실제로 그는 많은 시에서 ‘중의적이고 중첩된 겹의 이미지’를 시도한다. 시인 이규리는 그의 시를 평가하면서 ‘이거나 아니거나, 있거나 없는 모두이면서 아무도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아주 적확하게 표현한 바 있다.
미술과 시의 접목은 오래전부터 현대시의 한 전경이다. 이상의「오감도」는 건축과 초현실주의를 (리)믹스한 것이며, 이하석의「부서진 활주로」는 팝 아트와 하이퍼 리얼리즘을 시 속에 접목했다. 권기덕 역시 사물 속에 깃든 ‘미적 인식’을, 시인의 내적 감각과 버무려 이미지화한다. 그것은 정신세계 또는 삶의 어떤 특이점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 변용된다. 그의 시는 결과적으로 시어의 형태로 나왔지만, 어떨 때는 그림을 ‘언어로 그린다’는 느낌이다. 하여, 그가 본 지하의 풍경은 “발목이 잘린다 끌려온 길들이 잘린다 / 출입문 비상콕에 / 철썩, / 흔들리는 손잡이에 / 철썩, / 맞은편 할머니마스크에도 / 철썩, / 철썩, 철썩, 그림자가 달라붙는다”. 파편화된 사물의 이미지들은 서로 몸을 바꿔가며, 끝내 “버킷백과 장갑”이 스마트폰으로 뒤바뀌는 현상이 일어난다. 그의 시적 상상력은 여기에서 머물지 않는다. “지하철은 우리를 오려붙이기 위해 땅속을” 달리기도 하고, “당신이 당신이 아니라 작은 바람”으로 치환되기도 한다. 결국 시인은 느낌으로 어떤 순간을 복원하는 몽타주 기법을 통해, 현대사회 인간을 향해, 잃어버린 ‘나의 길 찾기’를 모자이크하고 있다. 지금의 ‘나’를 찾는 데는 아닌게 아니라, 어둠과 환상, 부정과 사이, 그리고 코드가 필요하다.
김사람, 소리를 만지는 시인
카오스는 그 자체가 소리이다. 미래시는 질서보다 혼돈에 기대어 산다. 교란과 비약, 난해와 전복의 한 복판에 서 있다. 은폐된 우주의 다중의미를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언어 사용은 즉흥적이자 즉발적이다. 하여, 대상과 언어 사이는 그다지 밀착되어 있지 않다. 미래시의 언어는 무수한 요소가 상호 간섭하는 복잡계(complex system)에 해당한다. 관념과 상상력은 호기심과 흥분을 자아낸다.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도달하고자 할 때 환각을’(이수명) 보듯, 미래시는 존재하지도 않는 환타지의 세계이다. 어떤 측면에서 시의 모든 소리는 환청이자 오해일 수도 있다. 실재 세계와 인간이 만든 상상의 세계는, 반드시 모순이 존재한다. 소리야말로 모순의 극치이다.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에서 소리를 듣다 보면, 불규칙한 아름다운 소리 무늬가 생긴다. 김사람(1976∼, 경북 의성 출생)의「디스토션」은 시집『나는 이미 한 생을 잘못 살았다』(천년의시작, 2015)에 수록되어 있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디스토션’(distortion: 변형, 일그러짐, 뒤틀림)의 시적 현실은, 세계와의 불협화음이자, 기존 시적 체제에 대한 반항이다. 시인은 음과 리듬의 문제를 인간의 정신과 영혼의 문제로 시 속에 편입시킨다.
음악을 만진다
폐병 환자의 한 모금 담배처럼
당신 주위로 스미는
트럼펫의 마지막 호흡
자기를 조소하지 않고서는 감히
밤새워 저 꽃을 틔울 수 없다
아스팔트에 핀 들국화는
죽어버린 여자를 사랑했다고 믿기로 한다
음이 나뉘는 순간 닿을 수 없는
분열된 사랑에게 고독을 느껴온
일렉기타 그리고 나
전류로 이어진
들국화와 여자 사이
허공을 찌그러뜨리며 나비가 난다
별이 소리 없이 하늘을 박는 동안
나는 땅에 박히며
침묵을 완성할 때까지
음악을 눈동자에 담아둬야 한다
눈을 자주 깜빡일 것
눈물 한 방울에
음표 하나씩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아픈 사랑은 하지 말 것
머리카락이 긴 짐승의 글씨체를 상상하며 연필을 쥔다
아름다운 것은 치명적일 것
어떤 일에도 덤덤해져야 한다
더듬이 하나 잃은 귀뚜라미
서쪽으로 기우는 하늘을 삼킨다
낮아지는 세계
올려다본 당신은 울고
처녀의 속살보다 여린
밤의 속살 때문에
오늘 밤은 내내 환청이 필요하다
―김사람,「디스토션」전문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세대에 따라 현실이 달라 보일 수 있는지 무척 흥미롭다. 또 어떤 면에서는 세대 간 전도된 언어의 문제는 굉장한 부담으로 작용한다. 시적 소통에 장애가 발생하는 경우도 다르지 않다. 이 시의 첫 행은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하다. “음악을 만진다” 는 표현은, ‘음악을 듣는다’에서 한 발짝 더 깊숙이 찌른 표현이다. 베이스 기타리스트로서의 김사람의 스타일을 짐작할 수 있다. “폐병 환자의 한 모금 담배”로 은유화된 모습은 숨막히는 규율이자 억업의 기제로 작동한다. 즉,「디스토션」은 일상의 악보에 철저하게 따라 사는 기계화된 인간을 비판한다. 그런 사회는 “자기를 조소하지 않고서는 감히 / 밤새워 저 꽃을 틔울 수 없다” 만약 그 악보에서 한 음이라도 잘못 누르면, 연주 자체가 뒤틀려버리는데 이는 수직적 사회의 붕괴를 의미한다. 하여, 그는 “음이 나뉘는 순간 닿을 수 없는 / 분열된 사랑에게 고독을 느껴온 / 일렉기타 그리고 나 / 전류로 이어진 // 들국화와 여자 사이 / 허공을 찌그러뜨리며 나비”가 된다. 개인의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사회,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모두 디스토션이다. 그래서 그는 이 세계가 과연 완벽하게 잘 짜인 것인지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겉으로 잘 포장된 세계일수록 부조리와 모순이 판을 친다. 그런 것들을 김사람은 역으로 뒤집기도 하고, 어떻게 바꾸면 내가 바라는 세상이 올지를 “머리카락이 긴 짐승의 글씨체를 상상하며 연필을 쥔다”. 어느 대담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디스토션」을 쓰면서, 국가 폭력, 사회 억압, 직장의 규율이란 가면을 쓴, ‘지휘자를 걷어내자.’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삶의 교향곡에 즉흥적인 자신만의 애드립을 가미하고 싶었다. 이 세상이 규율과 감시 속에 통제되는 것은 ‘지휘자’ 때문이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결국 교향곡처럼 완벽해 보이는 기존 시의 벽에 나름대로 균열을 가해 나의 목소리를 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시인에게「디스토션」은 이렇게도 비유된다. 록음악 연주를 할 때 기타와 연결된 페달을 밟으면 부드러운 기타 소리가 찌그러진다. 흔히 말하는 헤비메탈의 쇠 긁는 소리로 효과음을 내는 것인데, 이는 도리어 록밴드의 음악을 완성한다. 그러니까, 김사람의 시는 바로 이 세계 자체를 찌그러트리면서, 불협화음도 하모니가 될 수 있다는 새로운 인식을 보여준다. 시의 도입부는 <본 투 비 블루>라는 영화의 음악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쳇 베이커의 트럼펫 연주를 새벽에 듣는데,’ 그 소리가 시인의 앞에서 하얀 연기가 돼서 부서지는 모습이 그것이다. A.N.화이트헤드에 있어서 변형이 주체의 지각과 관련된 장소라면, 결국「디스토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 밤은 내내 환청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딴은, “침묵을 완성할 때까지 / 음악을 눈동자에 담아둬야 한다” .
황성희: 축제의 언어, 주체의 행방
실패한 시를 가장 많이 쓴 시인만이 새로움에 근접한다. 의외로 시에 있어 진위의 구별은 어렵다. 그런 면에서 미래시는 사물과 언어 사이의 은유, 아니 찢음의 시다. 현대시의 중요한 지점은, 어떤 문으로 들어가고 나오든 언어의 자유에 있다. 현대시는 시인이 언어를 소유하지 않고, 언어가 시를 소유한다. 그런 점에서 결코 이룰 수 없는 ‘불가능의 시’이다. 끝없이 새로운 시가 등장하고 신선한 시어들로 차고 넘친다. 시는 현재이면서 과거이고, 과거이면서 미래이다. 하여, 시의 이전과 이후는 같거나 다르다. 저간의 서정시가 줄곧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성에 집중했다면, 황성희(1972~, 경북 안동 출생)의 시「할로윈 무대회」는 주체와 타자의 전복을 통해 다의성을 추구한다. 존재의 부재성은 부정과 역설을 통해 모순을 극복해 가는 과정을 보인다. 결국 그녀는 할로윈 축제의 특별한 복장, 속임수, 유령의 은유를 통해, 전시대 마초들의 페르소나(가면을 쓴 인격)를 까발리고 있다. 이런 역사 속의 말 걸기 혹은, 인물의 드러냄과 감춤, 사라짐을 통해 자신만의 시의 ‘무도회’를 연다. 시집『4를 지키려는 노력』(민음사, 2013) 속에 수록된「할로윈 무도회 」는, “일상적 현실 속의 권태와 불안, 현대적 주체의 불안정한 의식에 관한 보다 예리한 시적 언술”(심사평-김기택․이광호)의 주체로 인정받은 바 있다.
패리스의 첫 남자가 궁금해? 회색의 방문 앞을 서성이는 독고준. 싫은 건 싫다고 말하렴. 승복의 입에 돌을 넣고 꿰매는 빨간 모자. 옥수수 낱알 위로 검은 피를 흩뿌리는 바스키아. 알리바바와 40인의 김신조, 아직 못 읽었다고? 널브러진 흑백의 시체들 따라 롱 테이크. 아리랑이 삽입되자 킬빌의 닌자들 발끈 솟아오르고. 상투 하나 잘랐을 뿐인데 어제는 벌써 옛날이 되다니. 예를 갖추라. 물렁물렁한 캔버스 방패삼아 나타난 달리. 단단한 채로 썩고 싶다는 거겠지. 고뇌와 기만 사이 납작 갇힌 채. 어찌 이토록 아무 문제없사올지. 길동 읍소하며 가로되. 율도를 세울 명분을 주옵소서. 그때, 가다마이 입고 나타난 모던 보이. 윙크하는 그에게 제대로 된 인사 가르쳐 주마 화장실로 불러내는 단재. 두루마기의 실용성을 가르쳐주겠다는 다산. 발음이 수상쩍다며 모던보이를 신고하자는 독수리 훈련병. 나만 졸졸 비춰줄 미러볼을 원하는 것은. 확성기 높이 쳐 든 레지스탕스. 반역입니다. 모조리. 깡그리. 다 이름 붙여 버릴 거야. 담요로 태양을 가린 채 해변의 모래알 세고 있는 개구리 왕눈이. 마릴린은 숨이 턱에 차 뛰어든다. 늦었다고 걱정 말아요. 도무지 끝날 줄 모르는 파티. 알몸이면 어때. 어서 같이 흔들어요. 이 텅 빈 여백 천지 속. 뭐라도 되어 길이길이 남아 보자고요.
―황성희,「할로윈 무도회 」전문
“교양 체험에 기반한「할로윈 무도회」는 다양한 텍스트와 캐릭터들(패리스 ․ 독고준 ․ 승복 ․ 바스키아 ․ 김신조 ․ 달리 ․ 길동 ․ 단재 ․ 다산 ․ 마릴린)이 등장한다. 그런 다성성(多聲性)의 시적 내러티브는 어떤 순일함이 아닌 하이브리드(hybrid)의 세계를 지향하며, 끊임없는 수다와 할로윈(Halloween) 축제의 무도회 장면을 연출한다. 하여 어떤 이념과 현실, 명분과 실질, 미적인 것과 실용적인 것의 구분은 더이상 의미가 없다. 고금(古今)의 시간과 동서(東西)의 장소도 매한가지다. 언어라는 춤의 다양성과 그로테스크한 상상은 “텅 빈 여백 천지 속”을 배경으로 해서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시간과 이야기의 비밀은 서로 다른 사건과 인물들, 고전과 현대를 새롭게 잇는 원리와 방법으로서 알레고리와 리믹스(remix)에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시의 모더니티는 ‘~되기’ 또는 회색의 점이지대(transition belt)에 있다.”(김상환,「비非의 시학-황성희와 김수상의 시」)
황성희의 초기 시는, 현실의 지루함, 권태, 현대 사회의 불안, 가상현실에 대한 혼란 등을 중요한 시의 테제로 삼았다면, 시「할로윈 무도회」는 축제를 통해 근대적 ‘꼰대 의식’을 까발리고 있다. 시는 ‘시간의 점(들) spots of time’이다. W․워즈워스의 이 말은 ‘기억 속에 떠오르는 깊은 이미지나 풍경’을 뜻한다. 황성희의 시 행간은 어쩜, 수다의 점들로, 인물간, 세대간, 몸 바꾸기로 읽힌다. 이런 이미지의 연결은 시간의 점자처럼 더듬거리기도 하고, 점묘처럼 흩뿌려지기도 한다. 시와 비시의 경계를 조금 다른 각도로 바라보면, 호감과 반감 사이쯤이다. 황성희의「할로윈 무도회」는, 소위 기성 시에 대한 반감, 보편화된 예술의 전복을 꿈꾼다. 이러한 일탈, 혹은 낯선 사유는, 사회에 대한 반감, 나아가 체제나 작품, 고전에 대한 반감으로까지 확산된다.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의도적 시 쓰기의 전형이다. ‘가장 비시적인 것으로 가장 시적인 것’을 추구한다. 보통 이런 작업은 역사 속의 사건들이 개입되며, 상상력과 어우러져 희화화된다. 시「할로윈 무도회」는 결국, 현대를 비판하기 위해, 다양한 근대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패러디한 것이다. 의도와 모호 사이에서, 그녀의 의미들은 상충되며 재배치된다. 이런 엇의 미학과 다층적 시어, 이미지는 김상환 평론가의 지적처럼, 주체와 대상, 현실과 환상, 언어와 실재, 형상과 질료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모험이다. 하여 이 시는, 사회적 병폐와 체제의 선전을 비판적 시각으로 뜯어보게 하는 풍자이자, 당대 젊은 시인들의 정체성 혼란의 표징이다. 미학적 모더니티의 산물이다.
최백규: 불편한 진실 혹은 고양이의 노래
젊은 시인 최백규(1992~, 대구 출생)에게 몸은 이미지이다. 욕망을 통과한 화인火印이다. ‘여기’와 ‘너머’를 질주한 언어다. 그는 대상과 대상을 전복顚覆시킨다. 그의 언어는 연대기적 시공간의 휨이다. 이미지는 풍경의 상처다. 사라졌다 나타나는 비극의 징조이다. 그의 시적 창조는 체험적이다. 실존을 관통한 피안이다. 하여, 발화는 전격적이다. 몸은 사물의 타자화이다. 그의 시는 미완이다. 굴절된 현재에 비친 거울이다. 주체 혹은, 타자와의 불확정성이다. 존재의 부재이자 역설의 직진이다. 주체의 유령이자 현대성의 불안이다. 다성多聲의 시적 내러티브는 환유적이다. 그로테스크한 원초적 관능은 압권이다. 그의 시적 사건은 불연속적이자 알레고리다. 언어의 해체는 표현 추상이다. 행과 연은 환幻이자 비약이다. 대상과 대상 간은 떨림과 울림이다. 비시非詩적 언어이자 불가능의 통로다. 모호와 난해의 포즈이다. 그의 언어는 ‘보다’와 ‘죽음’ 사이의 틈이다. 언어의 살점은 고통의 절규이다. 시어와 시어 사이의 은폐는 비밀번호이다. 하여, 그의 시는 불편한 진실과 새로움이 있다.
초기 최백규의 언어는 소리를 만진다. 행간은 절벽과 절벽 사이다. 연과 연은 비약과 판독의 불가다. 미래시의 이목구비가 아방가르드적이듯, 그의 시도 그렇다. 시적 의미 또한 유니크unique하다. 인상적인 제목은 카피적이다. 불현듯 나타나 홀연히 사라지는 디지털 언어다. 느낌과 감성은 몽환적이자 수다적이다. 다 읽어도 시의 뒤태는 오리무중이다. 그의 시는 쉽게 다가오지도, 다가설 수도 없는 질문이다. 집중하면 할수록 행간은 심하게 굴절된다. 상상의 자동기술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다. 날것의 감각은 시적인 것에 갇혀있다. 서정시가 정서와 의미의 대상이라면, 미래시는 언어와 느낌의 대상이다. 묘사적 이미지는 거미줄의 미로 같다. 행과 연의 관계망은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다. 하여 ‘사이, 혹은 틈새’의 시학으로 명명된다. 최백규의「나의 세상에 온 걸 환영해」는 ‘같으면서도 다른’ ‘다르면서도 같은’ 이 시대 젊은 세대의 사랑앓이다. “나”는 “너”의 틈이자 비밀이다. 보이지 않는 공중에서 무언가를 엿듣게 한다. 말의 감촉, 그 느낌, 그 향기를 맡는다. 이별하는 것은 모두 엇각이다. 시간만이 언어의 눈물을 말릴 수 있다. 사랑은 언제나 떨림과 울림으로 반응한다. 하여, 이 시는 ‘나’의 떨림이 ‘너’의 울림으로 사라지는 방식이다.
나는 숨을 쉬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빗나간 입술
비어있는 공간을 굳이 채워 넣을 필요는 없다
거리의 밀도가 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뒤돌아서는 그때의 너를 오후의 크기에 더했다
너와 처음 여행을 다녀오던 날에도 나는 쓰레기였다
그저 네 고양이의 단면이 얼마나 흘러내리는 모양인지 알려주고 싶은 것
떠나간 자리에서 남아 있는 날개의 흔적에 글자를 그렸다
니야옹, 니야옹
우리가 아직도 한 우주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별의 최소 유통기한은 4년
너는 달의 공전 주기를 뒤적이고 나는 지구의 나이를 달력에 표시했다
4월의 꽃잎들을 잘게 찢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구부러진 햇살 ㄷ자로 웅크린 거실의 오후 4시
공중을 떠다니던 먼지들도 소파의 안으로 점점 파고들 것이다
이곳은 내가 없어져야 모든 것이 완벽하다
매일 거울 앞에서 이빨을 하나씩 뽑아 선반에 얹었다
면도를 할 때마다 창가의 꽃병들은 어째서 죽어가야만 하는지 궁금했다
의사가 먼지보다 많은 이곳인데!
아직 마르지 않은 세면대의 상처에 물기로 뒤덮인 심장을 가만히 맞춰본다
핏줄을 타는 붉은 것 너무 뜨거워 나의 마음은 언제나 4도 화상
너는 숨 쉬는 대신에 휘파람 부는 법을 마지막 가르쳐 주었고
내가 노래를 완성했을 때 너의 모든 것은 나의 세상이 되었다
머리 위로 기차가 지나갈 때, 한껏 벌린 가랑이 사이를 기어나갈 때
여름의 한복판을 거니는 고양이의 소리로 실컷 울었던 것도 같다
막다른 골목의 담벼락에 천천히 ‘굿바이, 로맨스’라고 긁는다.
―최백규,「나의 세상에 온 걸 환영해」전문
시의 첫 행은 비밀의 화원이다. “나는 숨을 쉬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이별의 끝을 지나고 나서야 열린 나의 세상은 역설이다. “빗나간 입술”은 비극의 전주곡이자 환유이다. 상실의 사랑법이자 충격의 마침표이다. “막다른 골목”에서 “뒤돌아서는 그때의 너를 오후의 크기에 더”한 절망의 은유는 참으로 아름답다. 이런 시법은 제목에서 첫 행까지 이어지던 긴장감을 빗겨나가게 한다. 심리적 굴곡은 시선을 대담하게 확장 시킨다. 인파 사이로 사라진 ‘너’와 거리 한가운데 남겨진 ‘나’의 대비를 통해 ‘홀로 남겨졌다’는 아픔을 부각한다. 과거 회상(여행)을 보여주며 이별까지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추측케 한다. 고양이의 소리를 연결고리로 과거(거리에 남겨진 나), 현재(여행을 회상하는 나), 미래(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나) 는 통시적으로 연결된다. ‘4’를 의도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운율을 형성하고, ‘죽음’을 연상케 한다. “봄꽃”, “구부러진 햇살” 등의 교차는, 인생의 순간성과 니힐리즘을 극대화한다. 이것은 욕실(개인적 공간)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의 자해(이빨을 뽑거나 몸에 상처 내는 것)를 통해, 망가져 가는 개인의 고립을 클로즈업시킨다. “휘파람”이란 명사는 “고양이의 소리”에 연결되어, 시 전반의 음악적 무대 효과음으로 작용한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기차”와 “한껏 벌린 가랑이 사이”는 성적 메타포이자, ‘나’와 ‘너’의 애증의 블랙홀이다. 하여, 타자화된 주체는 “담벼락”에 ‘굿바이, 로맨스’를 긁음으로써, 이별의 감옥에 갇혀있는 ‘나’를 해방시킨다. 최백규는 첫시집『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2022, 창비)에서, ‘청춘, 사랑, 죽음’ 이미지를 물고 놓지 않는다. 그는 삶을 가장 명징하게 드러내는 유일한 기제를 니힐리즘에 두었다. 무(無)를 빌려 인간사의 비극을 발설한다. 그는 바람의 말을 은유로 재빨리 나꿔챌 줄도 안다. 사물, 그 ‘너머, 혹은 호기심’을 직관한다. 묘사를 통해 놀라운 비약과 우주적 상상력을 확장한다. 기성 언어의 전복(顚覆)과 전면적 균열을 시도한다. 불가능의 시학을 뚫고, 해체와 실험의 틈을 찌른다. 언어를 혹독하게 검열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전 시대의 시를 타살하고 있다. 언어를 통해 언어를 버림으로써,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세계에 근접한다. 하여 그의 시는, 그 자체가 ‘낯선’ 풍경이다. 언어의 바깥을 통해 언어의 안을 파내고 있다. 현대시의 알레고리와 모니터의 무한 풍경을, 최백규는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리고 “니야옹, 니야옹” 고양이의 슬픈 울음소리는 어느 모로 주술적 감응과도 같이 막다른 골목에 놓인 한 영혼을 구원한다. 이제 “모든 것은 나의 세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