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英國 (United Kingdom) : 유럽 대륙 서쪽에 있는 섬나라.
영국 연합왕국이라고도 한다. 정식명칭은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이다. 영국을 흔히 잉글랜드
(England)라고 하지만 잉글랜드는 그레이트브리튼의 일부이며, 그 밖에 웨일스와 스코
틀랜드가 모여 그레이트브리튼을 형성한다.
연합왕국의 유래는 엘리자베스 1세가 죽은 후 제임스 1세 치하에서 스코틀랜드가 잉글
랜드와 동군연합(同軍聯合)을 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정식으로는 1801년의
합동법(合同法)에 따라 아일랜드가 그레이트브리튼과 연합왕국을 형성했을 때부터이다.
그후 1921년의 분리법(分離法)에 따라 에이레가 아일랜드 자유국이 되었을 때 북(北)
아일랜드가 영국의 일부로 남음으로써 현재의 연합왕국이 생겼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잉글랜드와는 별개의 행정이 행해지며,구왕국시대의 수도 에든버러는
고유의 국립도서관 ·국립미술관 ·발권은행인 국립은행 등을 가지고 어느 정도 수도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점에서는 북아일랜드는 스코틀랜드만한 독자성이 없으나, 반대로
스코틀랜드가 고유의 의회를 가지지 못하고 런던의 상원(上院)에 16명, 하원에 71명의
대표를 보내는 데 비해서 북아일랜드는 수도 벨파스트에 별개의 의회를 가진다. 단지, 그
권한은 북아일랜드의 내부문제에 국한된다.
영국에는 제도로서의 국화(國花)는 없으나, 장미·엉겅퀴·클로버가 전통적으로 각각 잉글
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민족적인 꽃으로 되어 있다.국기 유니온잭(Union Jack)은
1707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가 정식으로 합동했을 때 흰 바탕에 붉은색으로 된 잉글
랜드의 성(聖)조지 십자와 파란 바탕에 흰색으로 된 스코틀랜드의 성(聖)앤드루 십자가
합쳐졌으며,아일랜드와의 합병 때 흰 바탕에 붉은색으로 된 아일랜드의 성(聖)패트릭
십자가 겹쳐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국가(國歌) 《하느님, 국왕(여왕)을 지키소서 God Save the King(Queen)》는 16세기의
민요에서 비롯된다고 하는데,1946년에 조지 6세가 가사를 부분적으로 수정한 다음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세계 최고(最古)의 국가이며,그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국가의 한 전형이
되어 있다.
영국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은 일곱 바다에 군림한 대영제국(大英帝國)의 속령
중에서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잇따라 자치권을 인정받
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26년의 영국의회 선언을 계기로, 영국국왕에 대한 충성
의무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본국이 자치령과 대등한 지위에 선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연합체를 구성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인 1949년 인도가 대통령을 원수로 하는 공화국이 된 뒤에도 영국연방의
일원으로 남는 것이 인정되었으며,그후 파키스탄 ·가나 ·키프로스 ·나이지리아 등이 인도의
예를 따랐다.또 그 후에도 식민지의 독립으로,연방은 1991년 영국 본국을 포함하여 70개
국이다. 1966년 노동당(勞動黨)의 윌슨 내각 때 식민지성(植民地省)이 폐지되었으며,
현재는 연방성(聯邦省)이 식민지행정을 겸하고 있다.또 공화국 가맹제를 승인한 후로 영국
본국에 대한 충성 의무가 폐지되었으며,연방의 성격은 원칙적으로 ‘평등한 제국(諸國)의
우호적 통합’으로 일변하였다.연방제국과 본국 사이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던 주민 및
물자의 출입에 관한 특혜관세제도는 1973년 영국이 EC(유럽 공동체)에 가맹함으로써
폐지되었다.
선사시대 : 선사시대의 영국에 관해서는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브리튼섬이 유럽 대륙과
이어져 있던 5만 년 전에 이미 혈거수렵(穴居狩獵)의 종족이 살았으나,빙하의 확대와 함께
떠난 것으로 보인다.영국해협의 함몰로 대륙과 떨어지고 난 뒤 갈리아 ·발트해 연안 등의
지방에서 새 종족이 건너왔으며,이어 신석기시대에 이베리아인 등 비(非)아리안계 인종이
이주해 수렵 ·목축과 원시적인 농경에 종사하였다.그후 청동기시대부터 철기 시대 초기에
걸쳐 대륙의 켈트 제족이 침입하여 선주민을 제압하고 정착하였으며,북부에 거주한 게일
인보다 남부에 거주한 브리튼인이 진보한 문화를 가졌다.그들은 물고기와 짐승고기 외에
밀 ·보리 ·귀리 등을 먹었으며, 짐승가죽 외에 삼[麻]과 양모의 직물을 착용하였다. 또
다신교를 믿고,소부족으로 갈라져 서로 독립해 있었으며,딘 또는 둔이라고 하는 방벽을
만들어 생활하였다. 런던(London)이라는 지명은 소택지의 성을 뜻하는 켈트어 린딘
(Lyndyn)에 기인하며,나중에 로마인이 이를 라틴어로 론디니움(Londinium) 이라고
말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영국과 로마인 점령 : 영국 브리튼섬의 켈트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로마 지배였다.
갈리아 지사(知事)로서 프랑스에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방의 종족이 브리튼
인의 지지를 받아 저항했기 때문에 BC 55년과 BC 54년에 두 차례에 걸쳐 이 섬을 원정
하였다.브리튼의 부족들은 연합하여 대항하였으나 카이사르는 이를 격파하고 템스강
주변의 일부를 제압하였다.그러나 그는 그후 본국의 정치 때문에 3개월 만에 떠났으며,
로마인의 본격적인 공격은 약 1세기 후까지 연기되었다.
제정시대(帝政時代)의 클라우디우스는 43년 원정군을 일으켰고,80년대에는 로마 군대가
스코틀랜드까지 침공하였다. 그후 로마인은 타인 하구에서 솔웨이만까지 브리튼 섬을
동서로 횡단하는 장성을 구축하였으며,현재의 잉글랜드 전체에 해당하는 지역을 약 4세기
동안 지배하였고,런던이 상공업의 중심이 되었다.당시의 유적은 여러 군데에 있는데,런던
등지에 남아 있는 성벽의 일부와 바스에서 발굴된 온천이 특히 유명하다.
랭커스터 ·맨체스터 ·윈체스터 ·체스터 ·레스터 ·글로스터 ·우스터 등의 지명의 어미는
당시의 병영지(兵營地)를 나타내는 라틴어의 성(城:Castra)에서 유래한다. 당시 켈트인의
비극으로는 이케니 부족의 여왕 보아디케아의 반란과 참패의 비화가 유명하다.
영국과 앵글로색슨 : 영국은 4세기 후반까지 픽트인 ·스코트인 등 북방계 켈트인의 침입과
함께 게르만인의 침입이 시작되어 로마인의 지배를 위협하기 시작했는데, 그후에도 색슨
·앵글 ·주트 등의 게르만인의 침입이 잇따랐으며 대륙에서의 게르만의 민족이동, 특히
고트인의 로마침입에 따라 5세기에 로마의 군대가 철수하자 로마의 지배는 완전히 끝났다.
침입한 게르만인은 원주민인 브리튼인과 싸웠으며, 6세기 말에는 현재의 잉글랜드에서
북부와 동부를 앵글인,템스강 이남을 색슨인,켄트주(州)와 와이트섬을 주트인이 차지하고,
켄트 ·에식스 ·서식스 ·이스트앵글리어 ·마시어 ·웨식스 ·노섬브리어의 7개 왕국을 건설
하였다. 로마시대의 그리스도교는 게르만적 다신교에 의해 구축되었으나, 7왕국 시대에
성(聖)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다시 도입되었다.
생활의 중심은 농촌으로 옮겨지고,로마시대의 도시는 일부를 제외하고 폐기되었다.주민은
장로 ·자유민 ·노예로 나뉘었고,노예는 죄인 또는 채무불이행자였다.장로의 권력은 큰 것
이었으며,국왕을 세워도 절대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후일의 마그나 카르타는 이 전통에
기인한다.
부족은 혈족공동체였으며,가장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공산생활(共産生活)을 하였다.
사우샘프턴(Southampton) ·버밍엄(Birmingham) ·햄스테드(Hampstead) 등의 지명의
어미는 가족이 사는 곳을 의미하며, stead는 독일어의 Staad(도시), ham은 독일어의
Heim(집)과 어원이 같다. 7왕국은 약간의 성쇠를 거쳐 9세기 전반에는 웨식스왕 에그
버트에 의해 통일되어 잉글랜드 왕국이 성립하였으며,전 잉글랜드가 그 지배에 복종하게
되었다. 잉글랜드란 앵글인의 토지라는 의미이다.
8세기 말부터 시작된 북방 데인인의 침입은 9세기 중엽부터 규모를 더하였으며, 웨식스
지배하의 각 왕국 중 동쪽의 여러 나라는 데인인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에그버트의
손자 앨프레드와의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으며, 그후 그의 아들 에드워드, 손자 에셀스
탠은 각각 데인 지방까지 세력을 확대하여 전 잉글랜드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10세기
말부터 데인인은 조직적 ·국민적 침입을 시작하였으며, 11세기에는 웨식스왕 에셀레드
2세가 노르망디로 망명하고, 데인인 카누트왕이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영국과 노르만정복 : 영국의 카누트가 죽은 뒤 데인 왕조는 2대에 걸쳐 계속되었는데,그후
에셀레드의 아들 에드워드 참회왕이 노르망디에서 돌아와 앵글로색슨 계통의 왕가가
부활하였다.그러나 1066년 에드워드가 죽은 뒤 의동생 해럴드 2세가 왕위에 오르자 노르
망디공(公) 기욤이 왕위계승권을 주장하여 진격해 왔으며,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군을 격파, 윌리엄 1세(정복왕)가 되었다.
이것이 영국사에서 말하는 노르만정복(Norman conquest)이다. 그는 대륙의 봉건제를
채택하였으며, 앵글로색슨인의 토지를 노르만 제후에게 봉지(封地)로서 나누어 주었다.
또 전 잉글랜드의 토지 ·인구 ·가옥 등을 기재한 둠즈데이북(Domesday Book)을 작성
하여 왕실재정의 기초를 굳히고 중앙집권적 봉건제를 시작하였다.둠즈데이란 그리스도
교의 최후의 심판날을 의미하는데 이 장부의 기재사항이 최종적 권위라는 뜻에서 그렇게
명명하였다고 한다.후일 지주와 지배계급에 반항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봉건적 억압을
‘노르만의 멍에’라 하여 저주하고,옛날의 앵글로색슨 사회를 이상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윌리엄 1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와 대립하여 교회에 대한 국왕의 관리권을 주장하고
주법정(州法廷)과 교회법정을 분리하는 등 왕권을 신장시켰다. 교회재판권을 둘러싼 헨리
2세와 대주교 토머스 베케트의 싸움, 또 후일의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한 영국
국교회(英國國敎會) 확립의 연원(淵源)도 여기에 있다. 헨리 1세가 죽은 뒤 즉위한 조카
스티븐과 딸 앙주 백작부인 마틸다 사이에는 왕위계승권이 계속되었는데, 스티븐이 죽은
후에는 결국 마틸다의 아들 헨리 2세가 프랑스에서 와서 왕위에 올랐으며,이에 플랜태저넷
(앙주)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는 내란으로 세력을 회복한 제후를 누르고, 재판제도의 정비,
관료제와 용병제(傭兵制)의 확립 등으로 절대적 권력을 장악하였다.그러나 십자군으로
유명한 다음의 리처드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조카 존왕[失地王]은 헨리 2세 이래의
대륙 영토의 절반을 잃고 중세를 과하는 등 실정을 거듭했기 때문에 귀족들은 1215년에
러니미드에서 존왕에게 49개조로 된 마그나 카르타(Magna Charta:대헌장)에 서명하게
하고, 왕권을 제한하였다. 이 헌장은 봉건제후의 권력 확보를 목적으로 한 것이지만, 런던
이하의 자유시(自由市)의 특권을 인정하고 자유민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조항도 포함
하고 있기 때문에 영국적 자유주의의 기원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의 아들 헨리 3세도 남은
대륙령(大陸領)을 상실하고 실정이 많았기 때문에, 귀족들은 주대표(州代表) 몽포르를
지도자로 내세워 반항하였으며, 그 밖에 시민대표도 포함시킨 회의를 열었다. 이것이
영국의회의 기원이며, 3명의 에드워드왕 시대에 더욱 발전하였다. 특히 에드워드 3세 때
주와 도시의 대표가 왕에게 청원서를 내고 이를 귀족과 고위성직자가 심의하는 관행이
생겼으며, 상하 양원제의 기초가 만들어졌다.한편 플랜태저넷 왕조에서 대륙령을 잃었기
때문에 왕권을 웨일스와 스코틀랜드를 지배하려고 했는데,웨일스는 곧 잉글랜드령이
되었으나 스코틀랜드는 1313년에 에드워드 2세군(軍)을 대파하여 독립을 확보하였다.
십자군 十字軍 (crusades) :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전후 8회에 걸쳐
감행한 대원정.이에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이 원정을
십자군이라 부른다.십자군에게서 종교적 요인을 강하게 느끼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와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을 간단히 종교운동이라고 성격
지을 수는 없다.봉건영주,특히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지배의 야망에서,상인들은 경제
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하였다.그 밖에 여기에는 호기심,모험심,약탈욕 등 잡다한 동기가 신앙
적 정열과 합쳐져 있었다.대체로 십자군시대의 서유럽은 봉건사회의 기초가 다져지고
상업과 도시의 발달도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어서 노르만인의 남(南)이탈리아 및 시칠리아
정복, 에스파냐의 국토회복운동, 동부 독일의 대식민 활동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주변 세계
와의 경계를 전진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배경에서 십자군도 정치적 ·식민적 운동의
일환이 될 수밖에 없었고,종교는 이 운동을 성화(聖化)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십자군의 원인 : 고대 로마제국이 동서로 양분된 후 시리아는 동로마 통치하의 속주가되고
7세기 전반에는 이슬람교도인 아라비아인에게 정복되었을 뿐 아니라 638년 성도 예루
살렘이 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한편 유럽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전파와 더불어 예루살렘을
성도로서 숭앙하는 생각이 점차 높아졌는데, 11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많은 그리스도교
도가 개인 또는 집단을 이루어 성지 순례를 떠났다. 그 무렵 동방의 이슬람 세계에서는
셀주크투르크가 세력을 신장시켜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 영내에까지 진출하고 시리아
·아르메니아 ·소아시아를 지배하고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였다. 1092년 셀주크
왕조의 통일이 깨어지고 그 영토는 왕족간에 분할되었다.이 기회에 비잔틴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비잔틴제국의 재흥을 꾀하여 군사적 원조를 청하는 사절을 로마 교황청
으로 보냈다.이에 대한 대답으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최초로 십자군을 제창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알렉시우스의 요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왜냐 하면 우르바누스
2세는 성직서임권투쟁(聖職敍任權鬪爭)의 와중에 있었는데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4세
보다 우위에 있었다.그래서 그는 동방원정이라는 어려운 사업을 통하여 유럽에서 교황권
을 확립하고, 비잔틴에서의 그리스정교회를 로마교회 산하에 통일하려 했던 것이다.
제1회 십자군 : 1095년 11월 27일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공의회 회의석상에서
십자군에 관한 연설을 했다. 그는 성지 해방전쟁을 성전(聖戰)이라고 명명하고 종군하는
군사들에게 신의 구원을 약속하였다.그 후 교황의 호소를 전하기 위하여 각지에 사람이
파견되었다.교황이 계획한 십자군은 주로 기사(騎士)들로 편성할 예정이었다.각 지방에
파견된 사람들과는 달리 멋대로 십자군에 대한 열을 부채질하고 다니는 자도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은자(隱者) 피에르는 십자군 사상의 창시자로 불릴만큼 전설적 인물이었다.
동쪽을 향해 떠난 것은 농민을 대부분으로 하는 민중십자군이었다. 우선 고티에가 이끄는
일단, 이어서 은자 피에르를 따르는 한 부대가 출발했다.양군은 헝가리·불가리아를 통과할
때 이미 그곳에서 식량이 떨어져 약탈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럴수록 심한 보복 공격을
받았다. 양군은 합동하여 소아시아에 건너가 투르크군과 싸움을 벌이기는 했으나 결과는
대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이밖에도 3개의 민중십자군부대가 이어졌는데, 그들에 의해서
유대인 박해가 개시된 것이다. 특히 라이닝겐의 백작인 에미코의 박해는 처참하였다.
십자군에 대한 지나친 열성이 일찍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단 유대인에게로 쏠렸는데,
거기에는 부유한 유대인에 대한 경제적 증오심도 깃들어 있었다. 이 3개 부대는 헝가리
인의 공격에 의해 괴멸되었다.정규 십자군은 1096년 여름부터 4개 부대로 나뉘어 출발,
육해(陸海) 양로를 지나 이듬해 봄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하였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큰 군세였는데 비전투원을 포함하여 5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 중 주력을 이룬 것은
프랑스인과 노르만인이었다.합류한 십자군은 니케아 공략을 시작으로 동쪽으로 진군했는
데, 그 길은 험난했다. 소아시아를 진군하는 동안 투르크인의 공격, 그리고 심한 더위와
굶주림등으로 상당수의 인원과 말을 잃었다.시리아에 도착해 첫 공격목표인 안티오키아의
공방전에만 8개월이 걸렸다. 점령 후에도 전력 회복과 주변지역을 정복하는 데 6개월을
소비했으며 그 동안 유행병에도 시달렸다.그 지역 지배권을 둘러싸고 지휘자들이 분쟁을
일으킴으로써 부하들의 불평을 싹트게 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 전면에 도착, 1099년 7월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거기서 처참한 유혈극이 벌어졌다. 십자군 병사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열광적인 신앙과 이교도에 대한 격한 증오심이 한
덩어리가 되어 십자군의 정신을 형성한 것이다.당초의 목적을 달성한 뒤에도 십자군 병사
들의 일부는 시리아에 정주(定住)하였다.정복지에는 예루살렘왕국 ·안티오키아후령(侯領)
·트리폴리백령(伯領) ·에데사백령 등 4개국이 들어섰다. 또 왕국 안에는 요한기사단 ·템플
기사단, 조금 늦게 독일기사단 등의 종교기사단이 편성되어 성지 방위의 주요 군사력이
되었다. 영주는 성을 거점으로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상인은 도시에서 특권을 얻어 이익을
증대시켰으나 농민은 희망도 없이 예속 상태에 놓였다. 교회와 수도원이 건립되고 교회
조직도 정비되어 유럽의 제도와 관습이 그대로 옮겨졌다.
제2회에서 제4회까지 십자군 : 1144년 에데사가 이슬람군에게 탈취되자 제2회 십자군이
파견되었다. 프랑스왕 루이 7세와 독일왕 콘라트 3세가 지휘자가 되었다. 시리아에서
다마스쿠스 공격이 계획되었으나 시리아 주재 십자군 병사가 적측의 감언에 속아 전열을
이탈했기 때문에 중도에서 좌절되었다.그리하여 두 국왕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귀국했다.
12세기 후반에 이집트의 명군(名軍) 술탄 살라딘이 하틴전투에서 그리스도교군에게 승리
를 거두자 그 여세를 몰아 각지의 도시와 요새를 점령하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함락
시켰다. 이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제3회 십자군이 파견되었다. 이번에는 신성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 프랑스왕 필리프 2세, 영국왕 리처드 1세 등이 참가하였다. 프리
드리히는 소아시아의 키리키아강에서 빠져 죽었고 남은 군사만 시리아를 향해 진군했다.
현지에서는 아콘 포위작전이 벌어졌는데도 필리프왕은 1년 8개월 늦게 이 전투에 참가
하였다. 게다가 그는 아콘 공략 후 곧바로 귀국해버렸다. 리처드왕은 키프로스섬 정복
때문에 필리프왕보다 2개월이나 늦게 도착했다. 그 후 리처드는 살라딘과 교전,몇 개의
도시를 탈환하지만 예루살렘 해방은 끝내 이루지 못한 채 그리스도교도의 성도 순례와
안전을 보장하는 것으로 그쳤다.그 후 아콘은 시리아에서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제4회 십자군은 교황권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 의해 발동되었다.
군단의 편성은 프랑스인을 중심으로 하였는데, 황제나 국왕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이
점에서는 최초의 십자군과 비슷하였다. 다만 먼젓번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이슬람군의
거점이된 이집트가 원정의 목표로 결정되었다.이에 대해 군대 수송을 담당한 베네치아는
이집트와의 평화적 교역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한 수송비가 모금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십자군은 베네치아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그들은 우선 달마티아의 츠아라를 치고
이어서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진군하였다. 전부터 베네치아는 비잔틴제국 내에 유리한
상업상 특권을 누리고 있었는데, 최근의 정변으로 그것을 잃은 상태에 있었고 제노바와
피사에 눌려 있었다.1204년 십자군은 정정(政情)의 혼란을 틈타 비잔틴제국를 무너뜨렸다.
수많은 성유체(聖遺體)와 보물을 약탈당하고 수도의 일부와 항만과 섬은 베네치아 영토가
되었다.그 밖의 비잔틴 영토도 십자군의 지휘자들에게 분할되어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라틴제국이 성립되었다. 이 제국은 약 반세기 동안 존속하였다.
제5회 이후의 십자군 : 제5회 십자군은 또다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제창으로 이루어
졌다. 이 십자군은 아콘으로부터 이집트에 원정하고, 다미에타를 포위하였다. 작전은 성공
하였으며 이슬람측은 다미에타와 시리아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이를
거절하고 카이로에 진격하였으나 격퇴되었다. 제6회 십자군은 신성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행해졌는데 이제까지와는 다른 특징을 가진다. 프리드리히는 ‘세례를 받은
시칠리아의 술탄’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라비아의 풍습에 매혹된 황제였다. 그는 무력이
아닌 외교수단으로 이슬람측으로부터 예루살렘과 그 밖에 영토를 양보받았다.그러나 그가
돌아간 뒤에는 시리아 주둔 십자군 병사들 사이에 내분이 격화되어 그 사이에 예루살렘도
잃었다.그리하여 프랑스왕 루이 9세가 이끄는 제7회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루이 9세는
키프로스섬에서 이집트로 건너가서 다미에타를 점령했다.이때도 이슬람측은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의 교환을 제안해왔으나 전과 같이 이를 거부하고 카이로를 향해 진군했으나
만슬러전투에서 대패하여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잠시
시리아에 머물면서 약간의 항구와 요새를 탈환하고 철수하였다.그후 안티오키아가 이슬람
군에게 함락되자 루이 9세는 최후의 십자군을 이끌고 출발하였는데, 튀니스를 공격하였을
뿐 그곳에서 죽었다. 시리아에서는 요새가 잇따라 함락되었고, 1291년 아콘마저 빼앗기자
십자군 국가와 그 운동은 종말을 고했다.
십자군의 실패원인 : 제1회 십자군의 성공은 이슬람 세계가 정치적 분열을 한 데에 큰 이유
가 있었다. 그 후 이슬람 세력이 통일되자 반격을 당하는 상태가 되었다. 십자군은 전력도
충분하지 못하였지만 시리아 주둔 십자군 병사와 종교기사단, 새로 도착한 십자군병사,
상인 등은 상호간, 또는 각 내부에서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거기에는 영토문제와 경제적
이익의 문제가 있었고, 또 형성되어가고 있던 국민적 감정 등에 의한 대립이 얽혀 있었다.
또 십자군 국가에서는 소수의 정복자가 많은 피정복민들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그 기초는
항상 흔들리는 상태였다.그러나 유럽인은 무지와 광신과 편협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슬람
교도들의 증오심만 부채질하였다. 그리스도교도를 성지로 가게 한 서유럽의 팽창운동은
그 자체의 정체와 더불어 십자군도 종말을 고하였다.
십자군의 영향 : 십자군운동은 우선 유럽에서 교황권의 후퇴, 국왕 권력의 강화와 중앙
집권화,도시와 상업의 발달,이슬람문화와의 접촉에 의한 문화의 발달 등 모든 일과 관계가
있다.즉 교황에 의해 제창된 운동의 실패는 그대로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켰다.전사에 의해
단절된 귀족가의 소유영지는 왕령(王領)에 편입되어 왕권의 기반을 강화하였다. 십자군
운동으로 최대의 경제적 이익을 본 것은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였다. 십자군에 참가한
유럽인들은 미지의 이질적인 세계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향을 과대하게 평가
할 수는 없다.왕권의 강화는 봉건사회 내부 전개에 기본적 요인을 가지고 있었다.봉건적인
분열상태에 있을 때에만 유럽세계를 관념적으로 통합할 수 있었던 교황권은 왕권에 의한
중앙집권화와 더불어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도시와 상업의 발달은 십자군운동의 전제조건
이었다.그렇지않으면 대규모의 군대를 먼 곳까지 보낼 수도 없었고 다량의 식량과 무기를
모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동방문화 유입의 중심지는 시칠리아와 에스파냐였다.
유럽인은 이교문화(異敎文化)에 접하면서도 최후까지 관용의 정신을 배우는 일이 없었다.
또한 제4회 십자군에 의해 와해된 비잔틴제국은 다시 부활하지만 이미 소국에 지나지
않았으며 몰락은 결정적이었다.그 때문에 비잔틴제국은 이제까지 수행해오던 유럽의 방벽
역할을 잃게 되었다.이슬람세계에 대한 영향도 컸다.이슬람교도는 관용 정신이 풍부했다.
그러나 십자군의 공격을 받게되자 그들 사이에 점차 비관용성과 민족의식이 고취되었으며,
성전(聖戰)에 대한 정열은 높아갔다.
영국의 왕위계승시대 : 프랑스에서는 샤를 4세가 죽은 뒤 카페 왕조가 발루아 왕조로 바뀌
었는데, 이에 영국은 카페가(家)의 혈통을 가진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면서
1337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개시하였다.이것이 1453년까지 계속된 백년전쟁의 발단이며,
왕위계승전인 동시에 사실은 일찍이 상실한 앙주령(領)을 회복하고 최대의 양모시장인
플랑드르를 쟁탈하기 위한 전쟁이기도 하였다.전반에는 영국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한때는 프랑스령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나,헨리 6세 때 오를레앙 전투에서 패배한 후로는
계속 패배하여, 마침내 칼레 외의 모든 대륙령을 상실하고 전쟁은 끝났다.백년전쟁의 2년
후에는 국내의 왕위계승권을 두고 1455년부터 30년간 내전이 계속되었다.에드워드 3세의
셋째 아들의 아들인 랭커스터공(公)이 장남의 아들인 리처드 2세를 대신하여 즉위, 헨리
4세로서 랭커스터 왕조를 세운 이래로 그를 지지하는 랭커스터파와 에드워드 3세의 막내
아들의 손자 요크공(公) 리처드를 옹립하는 요크파가 대립한 것이다. 이 전쟁은 양가의
문장(紋章)이 각각 붉은 장미와 흰 장미였기 때문에 장미전쟁이라 불렀다.리처드가 전사한
후 요크파가 승리하자 헨리 6세는 망명하고,에드워드 4세가 요크왕조를 열었다.그의 아들
에드워드 5세 때,왕이 어린 것을 틈타서 에드워드 4세의 동생 리처드가 왕과 그 동생을
런던탑에 가두고 왕위에 올라 리처드 3세가 되었는데, 랭커스터가의 유일한 왕위계승권자
인 웨일스의 튜더가(家)의 헨리가 리처드 3세를 격파하여 헨리 7세가 되고,튜더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그 동안, 노르만 때문에 앵글로색슨적 자유를 박탈당하고 농노화된 농민의
지위는 14세기에 들어서부터 차츰 향상되고, 농민의 계층문화가 진행되었다.특히 1348∼
1349년의 흑사병은 인구의 1/4 이상을 죽이고, 남은 농민의 지위를 높였다. 영주계급은
농업노동력의 확보를 위해 억압을 강화하였으며, 이에 와트 타일러 등의 농민봉기가 일어
났다.이 봉기는 실패했으나 농민의 감소로 부역의 폐지와 지대의 인하,영주직영지의 대출
등이 부득이했으며, 장원(莊園)의 붕괴를 초래하였다.한편,14세기에 영국의 무역은 양모를
중심으로 발전했으며,머천트 스테이플러스가 일종의 상인 길드로서 무역독점권을 가지고
왕실재정의 한 기둥이 되었다. 그러나 곧 스테이플러스의 규제에서 벗어난 모험상인의
활약이 뚜렷해졌으며, 15세기에 들어서자 모험상인회사가 등장하여, 모직물 무역의 독점
권을 가지게 되었다.
백년전쟁 百年戰爭 (Hundred Years' War) : 중세 말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전쟁.
프랑스를 전장으로 하여 여러 차례 휴전과 전쟁을 되풀이하면서,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단속적(斷續的)으로 계속되었다.
[원인] 영국은 1066년 노르만왕조의 성립 이후 프랑스 내부에 영토를 소유했기 때문에
양국 사이에는 오랫동안 분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328년 프랑스 카페 왕조의 샤를 4
세가 남자 후계자가 없이 사망하자,그의 4촌 형제인 발루아가(家)의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올랐다.이에 대하여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모친이 카페 왕가 출신(샤를 4세의 누이)
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왕위(王位)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양국간에 심각한 대립을
빚게 되었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하여 플랑드르에
수출해오던 양모 공급을 중단하고, 그 보복으로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인 기옌,지금의 가스코뉴 지방의 몰수를 선언하였으며,1337년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게 공식적인 도전장을 띄우게 되었다.원래 플랑드르는 프랑스왕의 종주권아래에
있었지만, 중세를 통하여 유럽 최대의 모직물 공업지대로서 번창하여, 원료인 양모의 최대
공급국인 영국이 이 지방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기옌 역시 유럽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였으므로, 프랑스왕들은 항상 이 두 지방의 탈환을 바라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의
근본적 원인은 이 두 지방의 쟁탈을 목표로 한 것이다.
백년전쟁의 제1기 : 백년전쟁은 1339년 플랑드르와 북프랑스에서 양국군 사이의 사소한
다툼에서 비롯되었다.1340년 영국 함대는 라인강의 하구에 있는 슬로이스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한 뒤, 1345년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맏아들인 흑태자 에드워드와 함께 노르
망디에 상륙하였다.이듬해 크레시전투에서 장궁대(長弓隊)를 활용하여 전력이 우세한
프랑스 기사군을 격파하였으며, 그 여세를 몰아 칼레시로 진격하여 이 성을 완전히 포위
하였다. 칼레시민들은 완강하게 계속 저항하였으나,1347년 마침내 영국군에게 항복했다.
그뒤 양국에 페스트가 유행한 데다 재정 사정도 악화되어 한때 전쟁이 중단되기도 했으나,
1355년 흑태자는 다시 남프랑스를 침입하였다. 1350년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6세가 죽고
그 뒤를 이어 장 2세가 즉위하였으나, 1356년 흑태자는 장 2세가 인솔한 프랑스군을
푸아티에전투에서 격파하고 장 2세를 포로로 잡았다. 이처럼 전쟁 초기에 거둔 영국군의
일방적 승리는, 독립적 자영농민을 주력으로 한 보병의 장궁대 전법이 프랑스의 봉건 기사
군의 전법에 비해 우수하였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전쟁의 참화와 영국군의 약탈로
농민의 피폐가 격심하여, 1358년 농민반란인 자크리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즉시
진압되었지만, 프랑스는 매우 심한 궁지에 빠졌다. 그 결과 양국 사이에 브레티니 화약이
성립되어, 프랑스는 장 2세의 석방보상금으로 300만 크라운을 지불하고, 아키텐 지방
전부와 칼레시(市) 등의 영토를 영국에게 할양하였다.
백년전쟁의 제2기 : 1364년 프랑스에서는 장 2세가 죽고 샤를 5세가 즉위하였다. 그는
내정의 정비와 재정의 재건에 착수하였으며, 아키텐의 귀족들을 선동하여 영국의 지배에
반항하게 하였으므로, 양국 사이가 다시 악화되어 마침내 전쟁이 재개되었다. 1369년
흑태자의 아우 존 오브 곤트가 이끈 영국군이 프랑스로 침입했으나 프랑스군의 분전으로
패배하고, 영국 해군 역시 카스티야 해군과 동맹을 맺은 프랑스 해군에게 잇달아 패전했다.
따라서 브레티니화약에서 영국에 할양한 영토의 대부분을 탈환하고, 1375년 부르지에서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 뒤 1377년 영국에서는 에드워드 3세가 죽고 리처드 2세가
왕위에 올랐으며, 프랑스에서도 1380년 샤를 5세가 죽고 그의 아들 샤를 6세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두 왕이 모두 미성년이었으며,특히 영국에서는 1381년 와트타일러의 난이
일어난 데다가, 더욱이 리처드왕의 지배에 대한 귀족의 반항까지 겹쳤기 때문에,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오랫동안 중단되었다.1399년 영국에서는 리처드왕이 폐위되고 랭커스터가
(家)의 헨리 4세가 왕위에 올라 프랑스에 대한 전쟁을 재개하였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종종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샤를 6세를 대신해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려고 한 귀족들이,부르고뉴
파와 아르마냐크파로 나뉘어 내란 상태에 빠졌다.
백년전쟁의 제3기 : 1413년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영국왕으로 즉위한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내분을 이용하여 부르고뉴파와 결탁하고, 1415년 맹렬한 기세로 노르망디를 진공(進攻),
아쟁쿠르전투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을 대패시켜 북프랑스의 여러 도시를 탈취
하였다. 헨리 5세는 이를 배경으로 1420년 트루아 조약을 맺고, 스스로 샤를 6세의 딸
카트린과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승인시켰다.그러나 샤를 6세의
황태자 샤를(샤를 7세)과 이를 지지하는 아르마냐크파는,이와 같은 영국측의 강요를 인정
하지 않은 채 중남부 프랑스에 거점을 두고 전쟁을 계속하였다.1422년 영국의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나이 어린 헨리 6세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국왕을
자칭하고 나섰고, 프랑스에서는 황태자가 샤를 7세로서 프랑스의 왕위에 올랐음을 선언
하였다.이에 영국군은 1428년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을 포위하였으므로, 샤를 7세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이같이 불리한 전황을 승전으로 전환하게 한 것은 바로 잔 다르크의
출현이었다.그녀는 적은 수의 프랑스 병사로 오를레앙의 영국군을 격파하였으며, 그 뒤
항상 선두에 서서 영국군을 격파하였다.그 결과 그 해 샤를 7세는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
하고 적법한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따라서 샤를 6세가 영국과 맺은
트루아조약은 사실상 그 뜻을 상실하였다. 그 다음해인 1430년에 잔 다르크는 부르고뉴파
에게 체포되어 영국측으로 인도된 끝에, 1431년 마녀재판을 받고 화형에 처해졌다.그러나
이 무렵 전황은 이미 프랑스 쪽으로 기울어졌으며, 1435년 동안이나 항쟁을 계속한 부르
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도 아라스에서 화의를 맺음으로써 프랑스의 내란은 끝을 맺었다.
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으나, 1444년 툴에서 휴전이 성립
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프랑스 내에 멘 ·보르도 ·칼레 ·노르망디 등의 영토를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백년전쟁의 종결 : 1445년 영국과 프랑스의 외교적 교섭이 원만히 타결되지 못하였으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영국 지배하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1450년에는 노르망디 전역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패전으로 영국에서는
랭커스터왕가의 지배에 대한 요크가(家)의 반항이 일어났다. 프랑스의 샤를 7세는 이와
같은 영국 내의 혼란을 틈타 기옌의 회복에 나서 영국군을 격파하고, 1453년에는 영국군
최대의 거점인 보르도시를 맹공격, 이를 점령하였다. 따라서 영국은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의 모든 영토를 잃었다.잔 다르크의 출현 이후 프랑스의 승리는 장기간에 걸친 영국군의
가혹한 지배와 약탈행위로 인해 프랑스의 시민과 농민들 사이에 반영감정(反英感情)이
고조된 점과, 샤를 7세에 의하여 보병 ·포병을 주력으로 한 프랑스 국왕군(國王軍)이 강화
되었던 점 등이 그 원인이었다. 양국간의 최종적 강화(講和)는 1475년에 체결되었지만,
보르도가 함락된 1453년에 백년전쟁이 사실상 끝난 것으로 본다.
백년전쟁의 의의 : 프랑스는 장기간에 걸친 백년전쟁과 내란에 의해서 봉건귀족 세력이
극도로 약화된 반면, 국왕의 권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샤를 7세는 자크 쿠르를 등용하여
왕실의 재정을 정비하고,국왕의 상비군을 강화하며 귀족세력을 누르고 중앙집권제를 추진
해 나갔다. 한편 영국에서는 전쟁이 끝난 뒤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30년 간에 걸친
장미전쟁(1455~1485)이 일어났으나, 이것은 프랑스에서 돌아온 귀족들의 생존 경쟁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함께 쓰러지는 결과를 초래하여, 헨리
7세에 의한 중앙집권화의 기초을 굳혀주었다. 한편 영국은 프랑스 내의 영토를 상실함
으로써 그 이후 유럽 대륙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문제들에 휩쓸리지 않게 되어, 독자적인
국민국가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의 공포를 피하여 기술직이민들이
플랑드르로부터 영국으로 이주함으로써,플랑드르를 능가하는 모직물 공업이 발전하게
되어 경제적 발전의 기초가 다듬어졌다.즉, 백년전쟁의 결과, 영국과 프랑스 모두 봉건
기사의 세력이 무너지고 농민해방의 진전, 부르주아 계급의 대두, 왕권의 확대 등을 초래
하였다.
영국의 절대왕정에서 시민혁명으로 : 영국에서 장미전쟁으로 귀족세력이 쇠퇴하자 헨리
7세는 귀족이 가신단을 거느리는 권리와 재판권을 박탈하고,향신과 시민을 추밀원에 기용
하였으며, 해운법을 제정해 상인을 규제하고 왕실재정을 단단히 하는 등 절대주의 정권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어 헨리 8세는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문제를 계기로 1534년 수장령
(首長令)을 내리고 직접 교회의 수장이 되었으며,이에 복종하지 않는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그 영지를 몰수하였다. 그가 처형한 대법관 토머스 모어의 작품 유토피아가 양모가격의
등귀에 따른 인클로저운동과 함께 이들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유명한 일이다.헨리의
아들 에드워드 6세 밑에서 섭정이 된 서머싯공(公)과 그의 실각 후의 워릭 백작은 카톨릭에
따르던 교지(敎旨) 내용마저 신교화함으로써 헨리의 사업을 철저히 하였다. 그러나 에드
워드의 사후에 즉위한 누이 메리는 교황과 화해하여 카톨릭으로 돌아갔으며, 수장령을
폐지하고 신교도를 박해했다. 메리의 사후에 즉위한 여동생 엘리자베스 1세는 두 종파의
반목에서 오는 정정(政情)의 곤란성,특히 몰수 수도원령을 차지한 신흥계급의 반감에 대처
하기 위하여 에드워드 6세 시대의 정책을 부활시켰으며, 새로이 수장령과 통일령을 제정
하고(1559) 신앙개조(信仰箇條)를 정비하여 영국국교회를 명실공히 확립하였다. 여왕은
가신단의 해체,수도원령의 몰수,인클로저운동 등으로 생긴 빈민대책으로서의 구빈법의
제정,도제조례(徒弟條例)의 제정 등 국내정책을 충실히 하는 한편 식민사업도 추진했으며,
러시아회사 ·레반트회사 ·동인도회사의 독점권을 설정하는 등 중상주의 정책을 밀어나가고,
에스파냐 함대를 격파하여 절대왕정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절대주의는 엘리자베스시대를
정점으로 하여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여왕은 독신으로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사후에는
스코틀랜드왕 제임스가 혈연에 따라 잉글랜드왕을 겸하여 제임스 1세가 되고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는 1605년의 가이 포크스 등 카톨릭 교도의 화약음모사건을 계기로
카톨릭을 탄압하였으며, 엘리자베스시대부터 세력을 키워온 칼뱅파(派) 청교도도 박해하
였다. 청교도가 많은 의회와 왕권신수설의 (절대주의 국가에서 왕권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왕은 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며, 인민은 저항권 없이 왕에게 절대 복종하여야
한다는 정치 이론.) 제임스의 대립은 뒤를 이은 찰스 1세 시대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
1628년 의회가 공채(公債)나 조세는 의회의 찬성을 요한다는 것,함부로 백성을 체포·투옥
하지 못한다는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권리청원을 통과시키자 왕은 의회를 해산시켰다.
왕은 재원조달을 위해 1640년에 의회를 소집하였으나 선출된 청교도가 이를 반대하자 곧
해산해 버렸다.이것이 단기의회이다.같은 해에 소집된 장기의회에서 왕과 의회의 반목이
더욱 격화되었으며, 1642년부터는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의 국내전쟁이 일어났다. 이 내전
은 1647년에 이르러 의회군의 승리로 돌아갔으나, 청교도는 온건주의 장로파와 급진주의
독립파 및 평등파로 분열하였다. 왕은 스코틀랜드의 장로파와 결속하고 각지의 왕당파의
지지를 얻어 다시 국내전을 일으켰다.그러나 제2차 내전은 독립파와 평등파의 승리로 끝나
1649년 찰스는 처형되고 올리버 크롬웰을 지도자로 하는 공화정부가 성립했다. 이 청교도
혁명으로 상원은 폐지되고, 장로파와 토지배분을 요구하는 빈농·군인·직인 등 평등파도
탄압되었다. 크롬웰의 정부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대한 원정, 해운법에 의한 네덜
란드의 제해권에 대한 도전,에스파냐 함대의 타파 등 대외정책에서는 성공하였으나,대내
적으로는 엄격한 종교정책과 군사독재로 국민의 불만이 커졌다.그가 죽자 1660년 의회는
신교의 자유, 마그나 카르타와 권리청원의 존중을 브레다 선언에서 맹세한 선왕의 아들
찰스를 망명처 네덜란드에서 맞아들이고 왕정을 부활시켰다.새 의회는 소수의 장로파와
다수의 왕당파로 이루어졌으며, 다수파는 국교도만이 국왕이 될 수 있다는 심사율의 제정
을 비롯하여 국교주의의 재건에 주력했으나,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밀약을 맺은 찰스 2세와의 대립이 표면화하였다. 이윽고 의회는 카톨릭 교도인 왕제(王弟)
제임스의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휘그와 토리의 두 파로 분열·항쟁하였는데, 찰스가 죽자
신왕 제임스 2세는 카톨릭주의와 절대주의 정치의 부활을 꾀하여 휘그뿐만 아니라 토리
와도 적대하였다. 두 파는 협정하여 1688년 제임스의 딸 메리와 그 남편 윌리엄을 네덜
란드에서 맞아들여 여왕과 왕으로 만들었다(메리 여왕과 윌리엄 3세).제임스는 프랑스로
망명하였으며, 이에 이른바 의회 내 국왕을 원칙으로 하는 명예혁명이 성립하였다. 왕은
의회의 승인 없이 법의 정지 또는 면제, 금전의 징수, 상비군의 유지 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한 권리장전(權利章典)이 이듬해 1689년에 의회를 통과 하였으며,
그때부터 이는 마그나 카르타, 권리청원과 함께 영국헌법의 근간을 이루었다.
영국의 정치혁명에서 산업혁명으로 : 영국의 정치혁명의 시대는 끝나고, 윌리엄 3세는
제임스가 프랑스의 지원으로 복위를 꾀하자 1690년 네덜란드·독일·에스파냐와 협력하여
1697년의 강화 때까지 프랑스와 싸웠다. 전비조달 방법으로 1692년에는 국채제도가 시작
되었으며, 1694년에는 잉글랜드 은행이 설립되었다. 또 전비재원 ·화폐개주(貨幣改鑄) ·
무역차액 ·법정이자율 등의 문제를 두고 중상주의 논객들 사이에 활발한 논의가 전개
되었다.윌리엄 치세 말기인 1702년부터 의매(義妹) 앤의 치세인 1714년까지의 에스파냐
계승전쟁의 결과 영국은 에스파냐와 프랑스로부터 뉴펀들랜드 ·노바스코샤·허드슨만(灣)
지방·지브롤터·미노르카 등을 획득하였으며, 절대왕정 이래의 식민지체제를 확대해 국내
상공업자의 이익을 증진하였다.또 그 동안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었던 스코틀랜드와 합동
하여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이 되었다. 윌리엄과 앤 시대에 휘그와 토리는 교대로 정권을
잡았으나,앤이 죽은 뒤 독일의 하노버가(家)에서 즉위한 조지 1세와 그의 아들 조지 2세의
치세는 휘그의 전성기였으며, 특히 1721∼42년의 월폴 정권과 1756∼62년의 대(大)피트
정권은 그 대표이다. 월폴은 책임내각제를 확립하였으며, 토리와도 협조하여 남해포말
회사(南海泡沫會社) 사건 후의 경제재건에 성공했다.피트는 7년전쟁에서 프랑스 식민지를
공격하였으며, 1763년의 강화로 캐나다, 미시시피 동쪽을 영유하는 영국 제국의 길을
열었다. 1760∼1820년의 조지 3세 재위기간에는 토리 정권이 계속되었는데, 이 시대는
산업혁명으로 영국 산업자본주의가 성립한 시기이기도 하다. 사실 18세기 후반부터 19
세기 전반에 걸쳐 산업의 전분야가 일변하였다. J.하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 R.
아크라이트의 수력방적기, S.크롬프턴의 뮬 방적기, E.카트라이트의 역직기(力織機) 등이
잇따라 발명된 데다 J. 와트의 개량 증기기관도 가세하여 면공업의 비약적 발전이 달성
되었다. 또한 새 기술은 제철 ·채탄에도 파급하였고, 나중에는 철도부설에까지 이르렀다.
농촌에서도 제2차 인클로저운동,비료개량,탈곡기의 보급 등에 따라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 동안 농촌의 탈곡기 파괴 운동과 도시의 방직기 파괴 운동 등이 있었으나,
이러한 반항도 자본주의의 진전을 막지 못하였다. 사회과학면에서도 J.벤담의 정치학, A.
스미스, D. 리카도의 경제학 등 자유주의 사상이 중상주의를 대신하여 새시대의 요청에
따랐다. 프랑스가 18세기 말의 정치혁명으로 기도한 사회를,영국은 경제혁명에 의해 실현
하였다고 할 수 있다.1832년의 선거법 개정,1846년의 곡물법 폐지, 1849년의 해운법 폐지
등은 모두 산업자본의 이익을 표현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산업자본의 발전은 노동자의
희생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에 노동자의 단결도 불가피하였다.1799년의 단결금지법,1819
년의 피털루 사건 후에 있었던 6법 등의 탄압 입법도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으며,
1837년의 공장법, 1847년의 10시간법 등 보호입법이 실현되었다.노동조합의 결성도 진행
되어 1834년에는 전국 노동조합대연합이 만들어졌다. 매년선거 ·비밀투표·보통선거 등의
요구를 내건 차티스트는 1830년대와 1840년대에 걸쳐 대청원운동(大請願運動)을 벌였는
데 그 결과, 선거법은 1867년과 1884년의 개정을 거쳐 소시민과 노동자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하였다. 조지 3세 시대의 영국의 발전은 조지 4세, 윌리엄 4세 시대를 거쳐 1837~
1901년에 이르는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절정에 달하였다. 국내적으로는 글래드스턴의
자유당과 디즈레일리의 보수당 등 2대 정당간의 정권교체에 의한 전형적 의회 정치가 행
해지고, 선거법 개정과 1871년의 노동조합법 제정 외에 교육 ·군사 ·사법 제도의 개정 등
근대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등 백인 식민지의
자치령화를 실현시키면서도 한쪽에서는 인도를 식민지화하고, 아편전쟁과 애로호(號)
사건을 계기로 중국시장에도 진출하였으며, 기타 수에즈 운하를 매입하고 이집트를
보호령화하는 등, 영국 제국주의를 발전시켰다.
산업혁명 産業革命 (Industrial Revolution) :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기술상의 혁신
과 이에 수반하여 일어난 사회 ·경제 구조상의 변혁.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유럽
제국(諸國), 미국 ·러시아 등으로 확대되었으며,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동남 아시아와
아프리카 및 라틴아메리카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산업혁명을 광의로 해석
하여 농업중심사회에서 공업사회로의 이행이라고 보는 한 산업혁명은 인류 역사에서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이 광의의 산업혁명은 흔히 공업화라고 부르는 것
으로서, 이를 간단히 정의하기는 곤란하지만 물질적 재화의 생산에 무생물적 자원을 광범
하게 이용하는 조직적 경제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공업화의 기원을 18세기 산업
혁명에서 구하지만, 산업혁명은 A.토인비가 말한 바와 같이 격변적이고 격렬한 현상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시작하여 온 점진적이고 연속적인 기술혁신의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대영제국의 붕괴 : 영국의 제국주의적 발전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였다.
독일과 미국 등 후진국의 세계시장 진출과 더불어 1873년에는 공황과 불황이 잇따라 일어
났으며, 이에 따라 수출은 감퇴하고, 실업인구는 증대하였다.또 숙련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직업별 노동조합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자 비숙련노동자의 조직과 사회주의운동이 고개를
들었다. 1884년에는 쇼와 웹 등의 페비언 협회, 모리스와 하이드맨 등의 사회민주연맹이
결성되었으며, 1893년에는 번즈와 하디 등의 독립노동당이 형성되었다.1900년에는 노동
조합과 사회주의 단체의 대표들에 의한 노동자선거위원회가 실현되어 1906년에 노동당
이라 개칭되었으며, 그 해 선거에서 29명의 의원을 당선시켰다. 자유당 내각은 이에 대응
하기 위하여 노동쟁의법 ·노인연금법 ·국민보험법 등의 사회정책 입법을 하였으며, 특히
1908년의 재무장관 로이드 조지의 예산안은 대토지 소유에 대한 중세(重稅)를 사회정책의
재원으로 삼았기때문에 지배계급에 충격을 주었다. 이 법안은 하원을 통과한 후 상원에서
부결되었으며,자유당 정부는 1911년 상원의 권한을 크게 제한하는 국회법을 성립시켰다.
독일의 확장 정책으로 지위를 위협받은 영국은 프랑스·러시아와 손잡고 대항하였으나
1914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17년 독일의 잠수함작전과 러시아혁명으로
인한 러시아의 연합국 이탈 때문에 영국은 한때 궁지에 몰렸으나, 참전한 미국과의 협력
으로 1918년 독일에 승리했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미국과 자치령 등의 지위가 향상되고,
상대적으로 영국의 지위가 저하되었다.특히 1931년의 웨스트민스터 조례(條例)는 본국
의회의 입법이 자치령의 동의 없이는 자치령에 적용되지 않음을 승인하였으며, 이에 대영
제국은 사실상 붕괴의 길을 걷게 되었다.노동당은 전후의 불황을 배경으로 착실한 약진을
계속했으며, 1922년의 선거에서는 142명의 당선자를 내어 보수 ·자유 양대 정당의 대립을
무너뜨렸다. 노동당은 1923년에는 191명의 의원을 확보, 1924년에는 처음으로 소수당
이면서도 노동당 단독내각을 성립시켰다. 1926년에는 보수당 정부하의 노동자 총파업이
패배하여 총파업은 불법화되었으나, 1928년에는 여성참정권이 확대되어 남자와 대등한
정치적 권리가 실현되었다.1929년에는 노동당이 제1당이 되어 제2차 노동당 내각이 탄생
하였다.1929년의 세계공황은 세계의 정세를 일변시켰다.미국은 사회자본의 증가로 공황을
극복하였고,영국은 연방제국과 경제블록을 결성해 이를 타개하였다. 그러나 이 공황으로
독일·이탈리아·일본 등의 군국주의 경향이 두드러졌으며, 1930년대 독일에는 나찌 정권이
대두하여 또 다른 확장정책을 노골화하였다.보수당 정부의 J.체임벌린 총리는 독일에 대한
융화정책을 계속하고 전쟁 회피에 주력하였으나, 1939년에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략하자
프랑스와 함께 대독(對獨)전쟁에 돌입하였다.1940년에 영국은 처칠 총리의 거국일치 내각
을 만들었으나 프랑스가 항복한 후의 전국은 갈수록 불리해졌다. 그러나 1941년의 독일
·소련전(戰) 발발,미국·일본 개전에 따른 미국의 참전으로 전황은 유리하게 돌아갔으며,
1943년에 이탈리아를 항복시키고,1945년에 독일 ·일본을 항복시킴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종결에 성공하였다.노동당은 독일 항복 후의 선거에서 처음으로 절대다수의 의석을 얻었
으며, 포츠담회담에서 처칠 대신 새 총리 애틀리가 참석하였다.노동당 정부는 잉글랜드
은행·민간항공·탄광·철도·철강업 등을 잇따라 국유화하고, 국민건강보험제도의 철저화로
복지국가정책을 취하였으나, 전쟁에 따른 경제적 곤란, 식민지의 연이은 독립, 미·소 양
블록의 긴장으로 인한 재군비 등 때문에 정권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으며, 1951년의 처칠
정부하에서 사회보장제도는 완화되고 국유화 정책도 역전되었다.1955년 처칠이 은퇴하자
그 뒤를 이은 이든 정부는 이듬해의 수에즈 사건으로 국위를 더욱 손상시켰다. 이어 H.
맥밀런,A.F.흄의 두 보수당 정부도 미국과 소련의 발전 때문에 영국의 국제지위 향상과
경제발전을 실현시킬 수 없었으며, 1964년에는 정권을 윌슨의 노동당 정부에 넘기고
말았다.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공동시장의 발전으로 영국은 유럽 내의 상대적 지위
마저 저하되었다.이러한 현실을 앞에 두고 영국에서는 노동당 정부에 이어 E.히스 보수당
정부도 EC 여러 나라와 가맹교섭을 속행하였으며,마침내 영국연방 국가와의 관계,농업
보호문제,국민감정 등 곤란한 문제를 남기면서도 EC 내의 한 나라로서의 활로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