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묘사시와 진술시의 차이점
시의 초보자임을 금방 알 수 있는 글들의 구분법은 간단하다. 본 대로 느낀 대로 쓴 글들은 거의가 초보자들이 쓴 것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사물을 본 대로 느낀 대로 쓴 것, 인간사에서 누구나 겪었음직한 일상사를 써 놓은 것이 시가 된다면야 우리가 무슨 고민을 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글은 보통 서술에 머무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일기와 같은 것이다. 시는 본 것이나 느낀 것에다 시적인 정서와 시적인 언어, 언어 뒤에 숨어있는 의미를 조합하여 감동을 창조하는 말로 그리는 그림이다. 또한 이 말 그림은 다른 사람이 똑같은 표현을 한 적이 없는 것이어야 시로서의 생명과 감동이 더하게 된다.
현대 시에서의 서술(敍述)이란 생각이나 사건을 차례대로 말하는 것인데 묘사(描寫)와 비슷한 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서술과 묘사에는 시적 화자(話者/진술하는 사람)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시에서 자기 주장이 없는 약점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감정이 드러난 시는 실패한 시 이지만 자기 주장이 없는 시는 죽은 시'라고 평론가들은 말한다. 시적 화자가 없다는 것은 시에 진술이 없다는 뜻이다. 시의 전개는 진술을 하기 위해 묘사를 하는 것인데, 묘사는 사진과 같은 것이라면 진술은 나의 생각이 담겨있는 말로 그린 그림이다. 진술에는 자기 주장, 즉 자기 철학이 담겨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시가 더 깊어지도록 하려면 다의적(多義的) 진술을 넣을 수 있어야 비로소 시를 잘 쓰는 시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묘사만으로도 시는 된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묘사는 정물화와 같고 진술이 들어간 시는 작가의 생각을 곳곳에 숨겨놓은 추상화 같은 것이다.
묘사시와 진술시의 차이점을 비교해보자.
낡고 외진 첨탑 끝에 빨래가
위험하게 널려 있다
그곳에도 누가 살고 있는지
깨끗한 햇빛 두어 벌이
집게에 걸려 펄럭인다
슬픔이 한껏 숨어 있는지
하얀 옥양목 같은 하늘을
더욱 팽팽하게 늘인다
주교단 회의가 없는 날이면
텅 빈 돌계단 위에 야윈 고무나무들이
무릎 꿇고 황공한 듯 두 손을 모은다
바람이 간혹 불어오고
내 등 뒤로 비수처럼 들이댄
무섭도록 짙푸른 하늘.
- 노향림, <어떤 개인 날>전문
위 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묘사 시인으로 꼽히는 노향림 시인의 시다. 송재학, 김기택 시인과 더불어 묘사시의 전형을 보여 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음은 진술시 두 편이다.
안 가고 보지 않아도
뒤안의 목단꽃은
내 발 아래 뚝뚝 떨어지는데
해 지고 산그늘 내리면
차마 뒤안에 나는 못 가오
행여, 행여나
나 볼 때 꽃잎이라도
내 발 아래 뚝뚝 떨어진다면
참말로 떨어진다면
어떻게 그 꽃 본다요
두 눈 뜨고 그 꽃 못 보오
그 꼴 나는 못 보오
- 김용택, <그 꽃 못 보오>전문
1
정충보다 더러운 곳에 버려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휴지에 싸서 더럽기 그지없는 쓰레기통에
냄새나는 무책임한 하수구에
때로는 변기속에 머리를 처박고
죽음의 유영을 할 것이다
폐기된 욕망의 찌꺼기는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곳에 버려지는 법
의심하지 마라
세상에서 가장 큰 쓰레기 통이
그대 머리 위에 있음을
2
정충보다 안락한 곳에 놓이는 것도 없을 것이다
따뜻한 양수 속에
자잘한 물방울들이
이유도 없이 뽀글거리며
산소를 터뜨려 주는 어머니의 자궁,
골고다의 언덕보다 단단한 골반이
생명을 보장하는 그곳
태고의 미역줄기들이 하염없이 떠도는 그곳
따서 먹으면 세상의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그곳
의심의 눈초리가 가득한 몸뚱어리를
안심하고 터억 맡길 수 있는 그곳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그곳
3
봄비를 맞으면서
정충처럼 남산을 걸어갈 때
나는 보았다
하늘 아래 가장 많은 십자가들이 반짝이는 서울의 붉은 밤을. 신생의 아침은 혼돈 속에 오는 것. 세상은 좀더 썩어야 할 것이다. 역사도 사랑도 이데올로기도 좀더 썩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더 이상 썩을 것이 없을 때, 혼돈의 종결자가 더 이상 두드릴 배신의 뒤통수가 없을 때, 신생의 아침이 정충처럼 꿈틀거리며 서울의 자궁을 두드릴 것이다
아,
어느 님이 버리셨나
하루가 천 날 같은,
천 날이 하루 같은, 혼돈의 꽃다발을…….
- 원구식, <서울야곡>전문
두 종류의 시를 비교해 보면 묘사와 진술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묘사도 시적 감성을 잘 입히면 좋은 시로 기억 될 수는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시단엔 넘쳐나는 시인으로 인하여 다층적, 중첩적, 자신의 철학을 내포하지 않은 시는 살아남기 어려운 구조로 가고 있다는점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위 김용택 시인의 시는 전달하려는 내용과 느낌을 시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꽃은 피었을 때는 아름답지만 낙화가 되어 바닥에 뒹굴다가 사람에게 짓밟히는 가엾은 존재가 될 때면, 그 초라한 모습이 민망하여 차라리 보지 않겠다는 시인은, 꽃이라는 대상의 관찰을 통해 자기의 생각, 생명 철학적 사상을 담아내고 있는데 이런 것이 바로 진술이다. 본 대로 느낀 대로 쓴 것이 아니라 이미지의 형상화를 통해 시적인 짜임새가 단단하고 감흥을 불러오는 자리에 놓이게 하는 이런 진술의 기법은 시 창작에서 꼭 익혀야할 기법이다.
원구식 시인의 시는 좀더 입체적이고 다층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시는 서정적이면서도 현대시가 요구하고 있는 사유(思惟)의 깊고 넓은 공간을 제공하고 있는데, 가장 더러운 곳에 버려지는 것이 가장 귀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역설, 혼돈스런 서울의 밤은 더 타락할 것이고 도저히 더 썩을 것이 없을 때, 결국 신생의 아침이 어머니의 자궁에 착상하듯 올 것이라는 광야의 소리처럼 예언되고 있다. 시인은 시대의 선각자이자 예언자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렇게 말의 덩어리를 형상화 시킨 중층묘사와 철학적 진술은 산속 옹달샘에서 물이 솟아나듯 퍼내어도 또 새로운 맛으로 시가 고이게 되는 것이다.
-이어산, <생명시 운동>
묘사시를 쓸 것인가?
진술시를 쓸 것인가?
지호진님의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