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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 '시비가 있으면 본마음을 잃는다'
조주선사가 시중(示衆)하여 설했다.
"시비가 있기만 하면 어지러이 본마음을 잃는다고 했는데 여기에 대답할 만 한 사람이 있느냐?"
나중에 어떤 스님이 낙포(洛浦) 선사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낙포 스님은 이를 딱딱 부딪쳤다. 다시 운거(雲居)선사에게 말하자 운거스님은"뭘 그럴 것까지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와서 다시 말씀드리니 선사가 말했다.
"남방에 큰 사람이 있으니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다."
"이에 대해 큰스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조주선사가 무어라고 하려는 차에 그 스님이 옆 스님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스님은 밥을 다 먹었는데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조주선사는 거기서 그만두었다.
'시비가 있기만 하면 어지러이 본마음(本心)을 잃는다.'
마음 속으로 조금이라도 옳으니, 그르니 시비(是非)가 일어나면 마음이 동요되어 헝클어지고, 본심(本心), 본래의 근본 마음을 잃어버리게 된다. 무심의 경지에 들지 못한 사람은 무슨 작은 일이라도 닥치면 좋으니 나쁘니, 옳으니 그르니, 분별심에 휩쓸려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들뜨게 마련이라고 3조 승찬대사의 신심명(信心銘)에 나오는 글이다. 조주는 이 말씀에 대하여 누가 한마디 대답해 보라고 했다.
나중에 한 스님이 낙포(洛浦, 834~898)선사에게 조주가 이야기하신 뜻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아래 위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그 스님은 다시 동산양개의 제자인 운거(雲居, 미상~902 )선사에게 가서 조주의 위 법문과 낙포가 이빨을 갈은 사실을 말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운거는"뭘 그럴 것까지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것은 낙포(洛浦)는 단지 이빨을 긁는 행동으로 본마음을 잃지 않는 도(道)가 무엇인지 보여 주었고, 운거(雲居)는 낙포가 이빨을 긁은 사실에 대하여 사람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데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책망하는 모습이다. 그렇다고 낙포를 인정하지 않고 나무라는 뜻은 아니다.
그 스님이 조주에게 돌아와서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니, 조주는 '남방에 큰 사람이 있어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다.'고 했는데, 이는 낙포와 운거를 지칭하여 낙포가 이빨을 부딪치고 운거가 '뭘 그렇게까지' 라고 말한 뜻을 아무도 알아채지를 못해, 세상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신실명(傷身失命, 몸을 다치고 목숨을 잃는 것)으로 비유한 말이다.
이 스님이 다시 조주에게 한 말씀 해 달라고 했다가, 선사가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에 옆에 있는 한 스님을 가리키면서"이 스님은 밥을 다 먹었는데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라고 한 장면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충격적인 반전을 이룬다.그동안 조주, 낙포, 운거선사를 찾아다니면서 법문을 듣고 문답을 하면서 어느 틈에 깨쳤는지 모르겠는데 지금까지 계속 큰스님들의 말씀만 늘어놓다가 막판에 스스로 한 방 크게 터뜨렸다.
옆에 있는 스님이 밥을 다 먹은 것과 자신이 깨친 것은 본래 아무 상관도 없지마는 이 스님은 이미 조주선사의 속을 꿰뚫어 봤으니 더 이상 말씀하지 말라는 것이다.조주도 여기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어 그만두었다. 여러분 가운데 몇 분이라도 지금까지의 상황을 알아차린다면 강의하는 보람을 조금이라도 느낄텐데, 벽에 대고 말을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도 없고 너도 없고, 나가 너고 너가 나다. 네가 밥을 먹었으면 나는 차를 마셔야 하겠지?' 깨침은 밥 먹는 것이고, 차를 마심은 수행을 지속하는 것을 암호화했다.'모든 시비를 단숨에 내려놓아라!'
442. '금강경의 뜻은?'
조주선사가 금강경(金剛經)을 보고 있을 때, 한 스님이 문득 물었다.
"모든 부처님과 그분들의 위 없는 깨달음이 모두 이 경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는데, 무엇이 이 경입니까?’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한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에 계셨다...."
"그게 아닙니다(不是)."
"내 스스로 경의 뜻을 어쩌지 못한다."
금강경(金剛經)은 대승경전 중의 하나로 현재 우리나라 조계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 즉 근본 가르침으로 수행자들이 의지하는 경전이다. 기록을 보면 달마대사는 제자들에게 능가경을 기본 경전으로 의지하라고 했는데, 달마의 4대 손자뻘인 5조(祖) 홍인조사때부터 금강경이 기본 경전으로 전승되어 6조(祖) 혜능조사도 금강경의 가르침을 통해 깨달았다고 한다.
이 경은 600권의 대반야경(大般若經) 중에서 제577권인 능단금강분과 같은 것으로, 석가모니공(空) 사상의 가장 기초가 되는 반야경전의 대표격이며, 금강경의 완전한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 또는 능단반야바라밀경이라고 한다.
여기서 금강(金剛)은 금강석, 곧 다이아몬드를 말하는데 가장 단단하기에 무엇이라도 부술 수 있고,가장 예리하기에 무엇이라도 자를 수 있으며,가장 반짝이기에 어둠을 밝게 비출 수 있다는 금강석을 확철한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반야의 지혜에 비유한 것이다. 능단(能斷)이란 말은 모든 번뇌를 능히 끊어버린다는 뜻으로 능단금강분이란 금강과 같은 지혜로 번뇌를 완전히 끊어버린다는 뜻이다.
위 질문에서'모든 부처와 그 분들의 위 없는 깨달음이 모두 이 경으로부터 나왔다고 한다'라는 말을 몇 마디로 쉽게 말하긴 어렵지만, 붓다가 말씀하기를, 역대 모든 부처는 이 금강경에 담긴 바와 같이 모습 없음(無相), 머물지 않음(無住) 등의 공(空)의 이치를 우리 마음이 본래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반야의 지혜로 밝게 비추어 보아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고, 번뇌를 완전히 끊어버린 열반의 세계에 들어가 부처가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싶다.
무상(無相), 무주(無住),공(空) 도리에 대해서는 별도로 공부하기 바란다. 조주선사의 말대로 이 경을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이라 하고,처음에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한 때 부처님이 사위국에 있을 때'란 말로 시작된다.
그런데 이 경에 대하여 질문한 그 스님은 '그게 아닙니다.'라고 강력히 부정한다. 금강경의 완전한 이름과 경전이 처음에 어떻게 시작되는지 물은 것이 아니라, 이 경에 담긴 큰 뜻이 무엇인지 가르쳐달라는 말이다. 아니면 경(經)이 곧 본심(本心)임을 안 것일까? 나로선'금강경은 단지부처(마음)의 그림자일 뿐이다'고 대답했으면 한다. 모든 경전은 이 마음을 말로써 가리킨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조주는 이것을 "내 스스로 경의 뜻을 어쩌지 못한다."라는 한마디로 말했다. 여기서 '경의 뜻'이란 바로 자기 마음을 가리킨다. '내 본심이 따라가는 대로 따라가 비출 뿐이다.' 붓다의 경전도 마음이 드러나 비추는 것일 뿐이란 뜻이다. 이 뜻을 알아채야 하는데 경전의 4구게를 골똘히 의심하면 문득 다가올 수도 있다. 의심나는 한 마디,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443. '나는 한 마리 나귀'
한 스님이 떠나려고 인사하자, 조주선사가 말했다.
"그대가 밖에 나갔을 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조주를 보았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그저 보았다고만 말해야 되겠지요."
"나는 한 마리 나귀인데 그대는 어떻게 보느냐?"
그 스님은 말이 없었다.
한 스님이 관음원에 얼마 동안이나 지냈는지 모르지만 조주선사와 작별인사를 할 때, 조주는 '다른 곳에서 누가 조주선사를 만나 보았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이냐?'고 물으니, 그 스님이 "그저 만나 보았다고만 말해야 되겠죠."라고 하니 조주는 겁이 덜컥 난 것처럼 보인다.
그 스님과 같이 지내는 동안 볼 때마다 깨달음의 눈을 뜨게 해주고자 했으나 한 마디의 뜻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 수행자가 제방에 나가 잘못 말하면 도(道)는 허공 중에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그래서 조주는 "나는 한 마리 나귀인데 그대는 어떻게 보느냐?"라고 물으니, 그 스님이 아무 대답을 못했다.
여기서 조주가 이렇게 말한 의도는 무엇인가? 바로 그 스님에게 다른 곳에서'그저 조주를 본 적이 있다고 말하지 말고, 차라리 조주 자신이 한 마리 당나귀라고 했다'고 전해달라는 뜻이다. 그러면 수행자들 사이에 조주가 왜 '나는 한마리 당나귀다' 라고 했을까 하고또 시끄럽게 왈가왈부 하면서 서로 다툴 것이다.
조주는 그것을 노리고 있다. 당나귀면 어떻고, 소고우(물소)면 어떻고, 원숭이면 어떠하겠는가. 그 틈바귀 속에서한 명이라도 눈을 뜨는 사람이 나오면 그만이다. 그런데 조주는 진짜 당나귀가 되었는가? 마른 풀을 많이 준비해야 되겠구나. 헐!
444. '조주의 돌다리'
조주선사가 새로 온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남방에서 왔습니다."
"조주의 관문이 있음을 아느냐?"
"관문을 상관하지 않는 자가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조주선사는"이 소금 암거래하는 놈아!" 하고 꾸짖고는 다시 말했다.
"형제들이여! 조주의 관문은 통과하기 어렵다."
그러자 그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조주의 관문입니까?"
"돌다리다(石橋是)."
새로 온 신참 스님에게 온 곳을 물으니 "남쪽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우스갯소리로 남쪽이 전부 다 제 집인 것처럼 말한다. 조주가 다시 "조주의 관문이 있음을 아느냐?"하고 물으니, 그 스님은 아주 호기롭게 "관문 같은 것에 상관하지 않는 자도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관문(關門)이란 어느 목적지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을 뜻한다.
그러므로, 조주의 관문이라면 마음을 확실하게 깨닫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 절차, 좀 어렵게 말하자면 조주의 한 마디에 대한 바른 안목을 내보이는 것이요, 말씀(言) 이면의 뜻을 잘 알아채는가 하는 것이다.
그 스님은 자기는 관문 같은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지만, 조주의 한 마디에 질질 끌려 다니는 나귀와 같은 신세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조주는"이 소금을 암거래하는 놈아!"라며, 깨닫지도 못한 놈이 사람을 속이려 한다며 그 자를 호되게 야단치고 있다. 조주 정도 되면 단 한 마디에 상대편의 속셈을 다 알아챌 수 있다. 그러면서, "형제들이여! 조주의 관문은 통과하기 어렵다."고 설한다. 앞의 스님은 이미 그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다고 단언한 것이다.
그러자, 그 스님이 다시"조주의 관문은 무엇입니까?" 물으니 "돌다리(石橋)다."라고 대답했다. 조주가 주석하고 있는 관음원으로 오는 길목에 있는 돌로 만든 다리, 바로 사물(事物)에다 깨달음의 통과 절차, 그 도리(道理)를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화엄학에서 말하는 이사무애(理事無碍), 즉 본체(理)와 현상(事)은 둘이 아니라 마음 하나뿐이며, 서로 걸림 없는 평등한 관계라는 것을 나타낸다.
풀어 쓰면, 조주지방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관문은 조주 석교(石橋)임이 분명하지만 돌다리란 사물도 조주의 마음이 없다면 결국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서 사물과 마음이 한 몸이라, 넓게 보면 이 우주 전체가 한 몸일 뿐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완전히 깨쳐야 이해할 수 있는 도리일 것이다.
445. '불법은 남방에 있다니'
한 스님이 설봉(雪峰)에서 왔는데 조주선사가 말했다.
"그대는 여기에 머물지 말라. 나의 이곳은 다만 피난하는 곳일 뿐 불법은 모두 남방에 있다."
"불법에 어찌 남북이 있겠습니까?"
"그대가 아무리 운거(雲居)나 설봉에서 왔다 하더라도 판대기를 진 놈일 뿐이다."
"저 쪽의 일은 어떻습니까?"
"그대는 왜 어젯밤 자리에 오줌을 쌌느냐?"
"깨치고 난 뒤에는 어떻습니까?"
"다시 똥까지 쌌군."
당나라 때 조주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설봉의존(雪峰義存, 822∼908) 선사는 덕산선사의 제자로 1,500여명의 스님을 거느렸던, 아주 명망이 높은 선지식이다. 선종의 다섯 집안(五家) 가운데 운문종, 법안종의 두 가문이 이 설봉선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듯이 역대로 매우 높은 도력으로 존경받는 선사이다. 오늘은 한 스님이 설봉선사로부터 왔다고 하는데, 조주는 "상좌(上座)는 여기에 머물지 말라. 내가 있는 이곳은 다만 난을 피하는 곳일 뿐 불법은 모두 남방에 있다."고 말했다.
조주가 주석했던 관음원은 현재 중국의 하북성(河北省)에 있는데, 이 지역은 북경시를 둘러싼 북부지방이다. 그러니까 조주의 말씀은 말 그대로 보면, '내가 있는 이곳 북쪽은 단지 내란을 피하기 위해 머무는 곳이다. 불법은 설봉선사가 머무는 남방에 있으니 거기로 다시 돌아가라'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했다간 조주의 참된 뜻과는 천리만리 어긋날 것이다. 이 말은 이 스님을 시험해 보는 법문이자, 직지인심으로 바로 마음을 가리키는 한 마디이다. 이 말의 뜻을 잘 알아채야 한다.
힌트를 드리자면, 선사의 말씀 중에서 '남방'은 이름 그대로의 남쪽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느 남방을 가리킬까? 이 남방은 동서남북 방향이 없는 남쪽이다. 달리 말하면 남방은 남방이 아니요, 남방 아닌 것도 아니다. 계속 여러분들을 헷갈리게 하려는 게 아니라 이런 식의 언어 전개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직 깨달음에 도달하기 멀었다. 사구백비를 벗어나 중도의 이치를 깨쳐야 이런 말이 제대로 읽혀지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이 남방은 어디를 가리키는가? 바로 여러분의 마음이다. 이 마음에 모든 불법이 담겨 있으니, 조주는 그 스님에게 북쪽 관음원에도 머물지 말고, 남쪽 설봉산으로 가더라도 거기에도 머물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내가 있는 곳은 다만 난을 피할 곳일 뿐'이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내가 이처럼 직지인심으로 깨달음의 모티브(동기)를 제공해 줄 수는 있지만, 직접 깨닫는 것은 여러분 스스로 할 수 밖에 없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조주의 이 말 두 마디는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뜻이 없는 것으로 스쳐 지나갈 수도 있겠지만, 참으로 중요한 선(禪)의 이치를 가르쳐주고 있다. 이 도리를 마음속에 꽉 잡아채야 도(道)에 가까워질 수 있으니 재삼 강조하고 싶다.
설봉선사에게서 제대로 가르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지 그 스님은 조주의 법거량에 KO 당했다. 그러니 "불법에 어찌 남북이 있겠습니까?"라는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다. 그래서 조주가 화가 좀 났는지,"그대가 아무리 운거, 설봉에서 왔다고 하더라도 판대기를 짊어진 놈일 뿐이다."라고 나무란다.
제자(라고 할 수도 없지만)때문에 설봉선사가 큰 욕을 먹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판대기 짊어진 놈(擔板漢)'이란 뒤를 볼 수 없는 커다란 판때기를 짊어졌다는 뜻으로 진짜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그 스님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그러면 저 쪽의 일, 피안(彼岸), 불법의 세계, 깨달음에 관해서 한 말씀 해주십시오"라고 청하는 꼴인데, 조주는 그 스님을 '어젯밤 의자에 오줌을 싼 철부지 오줌싸개'라고 치부하고 있다. 이미 버스는 지나갔고, 화살은 신라로 날아가 버렸다는 말씀이다. 옛날 중국에서 꽃을 피운 선종의 불교는 이제는 우리나라로 전부 넘어왔다고 말한다. 도(道)의 줄기와 산맥이 동(東)으로 옮겨졌다는 이야기이다.
그 스님은 그래도 순진하게 다시 "깨달은 뒤에는 어떻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런데 조주는 여전히 냉정하게, "다시 똥까지 쌌구나"라고 이렇게 매몰차게 몰아붙이고 있다. 참으로 노파심이 많은 조주는 그래도 끝까지 설봉의 지도를 받은 그 스님에게 자신을 찾을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오줌싸개야! 똥싸개야! 하는 충격적인 한 마디를 통해서 퍼뜩 제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다. 이 모든 말씀이 직지인심으로 마음을 바로 가리키는 것이니 그것만 알아채면 만사(萬事) 오케이, 끝이 나는 것이다. 참으로 쉬운 깨달음인데 왜 이것이 그렇게 어려울까? 오늘 정말로 중요한 가르침을 받았으니 금방 잡아채라. 여러분! 억!
446. '사자와 사자 새끼’
시중(示衆)하여 설했다.
"여기 내게는 굴에서 나온 사자도 있고굴속에 들어가는 사자도 있는데, 다만 사자
새끼를 얻기가 어렵다."
그때 한 스님이 손가락을 튕겨서 응수하자 선사가 물었다.
"그게 뭐냐?"
"사자 새끼입니다."
"내가 사자 새끼라고 부른 것도 벌써 허물인데, 그대는 한술 더 떠서 뛰기까지
하는구나."
오늘의 법문 제목은 '사자와 사자 새끼'라고 지어 본다. 사자를 백수(百獸), 온갖 짐승의 왕이라고 하는데, 선에서는 법(法)의 왕인 마음에 자주 비유한다. 조주가 설법하기를, "여기 내게는 굴에서 나온 사자도 있고 굴속에 들어가는 사자도 있다. 다만 사자 새끼를 얻기가 어렵구나"고 했다. 굴에서 나온 사자는 모든 번뇌망상의 장애를 벗어난 깨달은 자이고, 굴속에 들어가는 사자는 아직 깨닫지는 못하고 참선 수행을 지속하고 있는 자들을 말할 것이다.
그런데 '사자 새끼를 얻기가 어렵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바른 법(法)을 들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깨닫을 정도로 상당히 특출한 기질을 가진 이를 보기가 어렵다는 말일 것이다. 6조 혜능조사는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듣고 바로 깨쳤다고 하지만 그런 인물이야 세상에 몇 명이나 태어나겠는가.
그때 한 스님이 손가락을 탁 튕기니, 조주가 그게 무엇이냐고 묻는다. 한번 기대를 가지고 스님의 입을 주시하고 있다. 그런데 "사자 새끼입니다"라고 대답하니 조주는 맥이 탁 풀리는 모양이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구나 하고 생각했을까? 이 놈 어디서 선사의 행동을 훔쳐보고는 여기서 흉내를 내고 있으니, "내가 사자 새끼라고 부른 것만도 허물인데 더욱 날뛰기까지 하다니."하고 꾸지람을 하는 듯하다.
그런데 조주는 어쩌면 그 스님을 조금 더 시험해 보기 위해 이렇게 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뒤의 장면이 궁금한데 전혀 언급이 없다. 그 스님이 조주가 던지는 공에 역전타를 날리려면 어떻게 하면 좋았을까? 만약 제대로 눈을 뜬 수행자라면 "큰 스님을 정말로 한번 크게 물겠습니다." 정도로 다시 응수했다면 조주의 반응에 따라 이 선문답은 다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447. '온 세계는 선지식의 외눈이다'
조주선사가 새로 온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설봉에서 왔습니다."
"설봉은 무슨 법문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던가?"
"스님께서는 늘 말씀하시기를, '온 시방세계가 사문(沙門)의 외눈(一隻眼)인데 너희들은 똥을 어디에다 싸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대가 돌아가는 편에 괭이(鍬子)를 갖다 주어라."
오늘도 설봉선사에게서 한 스님이 새로 왔다. 그러니 조주가 설봉의 근황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설봉은 사람들에게 무어라고 가르치던가?"라고 물으니, "온 시방세계가 사문(沙門)의 외눈(一隻眼)인데 너희들은 똥을 어디에다 싸겠는가?"라고 가르친다고 말했다.
이 말을 글자대로 풀이하면, '온 세상, 이 우주가 깨친 선지식(큰스님)들의 한쪽 눈(眼)이다. 부처가 눈으로 모두 지켜보고 있는데 너희들은 똥을 어디에다 싸겠느냐?' 라고 해석된다. 이 온 세상은 모두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하늘도 땅도, 산도 물도, 사람과 가축도, 번뇌도 보리도, 모든 생각과 법(法)도 예외가 없다. 그러면 어디에다 똥을 싸야 하느냐는 설봉의 법문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겠는가? "큰스님이 외눈에 똥을 싼다면 제가 뒤를 닦아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하겠다.
이 말을 듣자 조주는 말하길, "그대가 돌아가는 편에 괭이(鍬子) 한 자루 갖다 줘라."고 했는데, 괭이(鍬子)는 가래 종류의 농기구를 말한다. '설봉에게 곡괭이 한 자루 갖다 줘서 부처가 보이지 않는 곳에 똥 쌀 구덩이를 파게 해라.' 이 뜻인 것 같다. 어떻게 나의 대답과 조주의 법문은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여기서 일척안(一隻眼), 외눈, 한쪽 뿐인 눈은 깨달은 마음을 뜻한다. 두 눈(眼)이라면 육신의 2개의 눈을 말하는 것이지만, 왜 한쪽 눈을 마음이라고 할까? 의심나는 것은 그냥 넘어가서는 안된다. 오직 마음의 눈으로 계속 이게 무슨 뜻일까 하고 의심해 봐야 한다. 절대로 머리로 이해하려 해서는 천리만리이다. 머리는 절대 쓰지 말라.
448. '무얼 입겠느냐?'
조주선사가 옷을대중에게 나눠주니 한 스님이 물었다.
"큰스님께서는 모두 다 주고 나면 무얼 입으십니까?"
선사가"호주자(湖州子)야!" 하고 불렀다.
그 스님이 "예" 하고 대답하자 선사가 말했다.
"무얼 입겠느냐?"
오늘은 어디서 누가 많은 옷을 공양했는지 조주는 스님들에게 옷을 나누어 주고 있다. 그런데 조주선사 본인의 옷은 하나도 남겨두지 않고 모두 나누어 주니까 한 스님이 묻는다. "큰스님, 그렇게 모두 나누어 주고 나면 스님께서는 무얼 입으십니까?" 그러자, 조주는 그 스님을 부른다. "호주자(湖州子)야!" 호주(湖州)라는 지역에서 온 스님인 모양이다. 그 스님이 응답하자, "무엇을 입겠느냐?"하고, 본분의 일을 바로 밝히라고 한다.
'호주자(湖州)야! 너는 호주자가 아니고 다만 이름이 호주자일 뿐이다. 그래서 그대를 호주자라고 하지만 그대 자신을 찾아서 바로 입어라. 현상의 옷 따위에 신경쓰지 말고 그대 마음을 열어 깨닫는데 모든 걸 쓰라. 오직 그것뿐이다.' 한 가지 천기 누설로 선에서는 깨달음을 '옷을 입는다' 라고 한다.
449. '무너지지 않는 성품'
조주선사가 시중하여 말했다.
"세계가 있기 전에도 이 성품은 있었고, 세계가 무너질 때에도 이 성품은 무너지지 않는다."
한 스님이 묻기를, "무엇이 이 성품입니까?"
"5온(五蘊), 4대(四大)이다."
"이것은 역시 무너지니 무엇이 이 성품입니까?"
"4대, 5온이다."
오늘은 조주가 말하기를, '세상이 생기기 전에도 이 마음이 있었고, 이 세상이 무너져 없어질 때에도 이 마음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설한다. 완전히 깨치면, 즉열반(涅槃)에 들면 4가지 덕(四德)을 갖춘다고 하여 소위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나고 없어지는 변천함이 없이 항상하고, 생사의 고통을 떠나 무위(無爲) 안락하고, 자유자재하여 걸림이 없는 참된 나(我)이고, 번뇌의 더러움이 없는 깨끗한 품성을 지니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우주가 사라진다고 해도 이 마음은 영원무궁하다는 말이다. 잘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한 스님이"무엇이 이 성품입니까?"하고 묻는다. 답하기를, "5온(五蘊)과 4대(四大)이다"라고 한다. 5온(五蘊)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우리의 몸(色)과 마음, 즉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인식하는 정신작용을 말하고, 4대(四大)는 흙(地), 물(水), 불(火), 바람(風) 등 우리 육체를 구성하는 4가지 요소를 말한다. 그러니 5온과 4대란 바로 '우리 몸뚱이와 마음'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이 스님은 "5온 4대, 이것은 역시 무너지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 성품입니까?"하고 다시 묻는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모두 인연에 따라 생겨나고 없어지는 화합물로서, 이러한 인과의 법칙에 따르는 모든 현상과 사물은 모두 생주이멸(生住異滅)의 길을 걸어 결국은 무너져 없어지는 것인데, 이것을 무너지지 않는 성품이라고 한다면 도저히 맞지 않는 말이라고 반박하는 것이다.이 말도 너무 어려운 것 같다. 말은 아무 소용도 없으니 그냥 건너뛰어라.
그러니 그런 농담 같은 말씀은 하지 마시고 이러한 생멸(生滅)을 벗어나 세계는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을 성품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똑바로 가르쳐달라고 하는 말이다. "4대, 5온이다." 조주는 '5온과 4대'를 거꾸로 뒤집어 사람을 농락하듯이 우리 성품(마음)이란 4대, 5온이라고 대답했다. 그대가 아무리 그래봤자 이 마음은 사대오온, 오온사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 말이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이것은 도대체 말로써 그 이치를 풀이하기가 어려운 문제다만 그래도 말로써 풀어야 할 것이다. 세상 모든 법은 평등하다. 생멸이 열반이요, 열반이 생멸이다. 여기서 남이 없는 무생(無生)의 도리를 꽉 잡아채야 하는데, 인연에 따라 생겨난 4대 5온은 자체 성품이 없어 인연이 없었으면 존재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 그 모습이 없고(無相, 무상), 텅 빈 것이며,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법은 인연에 따라 생겨난다. 그러므로 모두 본질적으로 생겨남이 없다(無生). 생겨나지 않으니 없어질 리도 없다. 바로 불생불멸이다. 생긴 게 아니므로 모든 법은 그 존재성이 없다. 이를 허공에 비유하여 텅 빈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텅 빈 것은 또한 아무 모습이 없다(無相). 모든 법은 무상(無相)이다.
'모든 법은 무생(無生), 즉 불생불멸이요, 무상(無相)이다.' 이 도리가 바로 도(道)이다. 붓다의 8만 대장경이 모두 이것만을 말하고 있다. 무생, 무상의 법만 온 몸과 마음으로 통달하면 저절로 무심, 무념의 열반세계로 접어들 것이다. 화두 등으로 깨친 사람도 이 도리를 철저히 마스터해야 한다. 그러면 모든 법이 모습이 없고 텅 비어 모두가 평등할 것이다. 생멸이 열반이고, 번뇌가 보리고, 중생이 붓다이다.
바로 위 법문에서 말한 성품이 5온 4대요, 4대 5온인 것이다. 이 도리를 다른 말로 진공(眞空)이라고 한다. 모든 법의본질이 공(空)하고, 마음도 역시 모양이 없어 공(空)함, 다른 건 그만두고 이 도리만 철저히 꿰뚫는 데에온 노력을 기울이라. 이것이 모든 분별심을 떠날 수 있는 비밀스런 법이다.
450. '경율론은 불법이 아니다’
정주(定州)에서 한 강사(座主)가 찾아오자 조주선사가 물었다.
"무슨 공부(業)를 익혔는가?"
"경율론(經律論)은 듣지 않고도 강의할 수 있습니다."
조주선사가 손을 들어 보이면서 "이것도 강의할 수 있는가?" 하니, 강사가 어리둥절하며 무슨 말인지 몰라 하자 선사가 말했다.
"설령 그대가 듣지 않고 강의할 수 있다 하여도 그저 경론이나 강의하는 사람일 뿐이니 불법이라면 아직 멀었다."
"큰스님께서 지금 하신 말씀은 불법이 아닙니까?"
"설령 그대가 묻고 답할 수 있다 하더라도 모두 경론(經論)에 속하는 것이요, 아직 불법은 아니다."
그 강사는 아무 말이 없었다.
문답에서의 좌주(座主)란 불교경전을 많이 배워 강의하는 강사를 일컫고, 경율론(經律論)이란 불교 경전을 세 가지로 나눈 경·율·논의 3장(三藏)을 이르는 말이다. '경'은 붓다가 설법한 교법(敎法)을 모은 경전이며, '율'은 붓다가 제정한 계율을 모은 율장이고, '논'은 경과 율에 대하여 불제자들이 연구하여 풀이한 것을 모은 것이다.
한 강사가 조주를 찾아와서 경율론은 듣지 않고도 강의할 수 있다고 하니 모든 경전을 읽고 외우고 다 통달한 모양이다. 그러나 조주가 손을 들어 올리면서 "이것도 강의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즉 한 손을 들은 이것을 강의할 수 있는가 질문하니 그 강사는 도대체 무슨 뜻인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니 조주가 한 마디 더한다. "그대가 듣지 않고서 강의할 수 있다 하더라도 경율론(經律論)이나 강의하지, 불법은 아직 멀었다." 이 말은 '그대는 8만 장경 속의 글자만 뚫어지게 읽고 외워서 마치 앵무새처럼 죽은 말만을 강의할 수 있는 것이지, 펄펄 살아있는 마음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라고 부연 설명한 것이다.
그러자 그 강사는 뭔가 마음에 집히는 게 있는지, "큰 스님께서 지금 불법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까?"라고 한번 넘겨짚어 본다. 조주의 다음 말씀은 매우 의미심장한 뜻을 품고 있다. '설령 그대가 일문일답에 능수능란하더라도 이것은 모두 경론(經論)에 속할 뿐이다. 불법은 아직 아니다.'
붓다가 설한 말씀을 달달 외워서 경전을 아무리 잘 강의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단지 우물 속의 물을 보는 것이지 그 물을 마셔본 것이 아니란 뜻이다. 불법(道)은 마음을 스스로 느껴 체감해 보아야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인데, 머릿속에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아 놓고 그것을 때때로 뽑아 써본들 이는 마치 마술사가 갖가지 눈속임으로 사람들을 우롱하는 것처럼 헛된 가르침밖에 되지 않는다.
이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강사는 더 이상의 말이 없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붓다가 아무리 좋은 말씀한 것을 경전에 담았더라도 그 숨은 뜻을 알아챌 수 없다면 이것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이것을 통째로 모두 외운다 하더라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어렵다. 깨닫기 전에 경전을 탐독하면 차라리 독이 될 수 있다. 불법이 아니라 불법에 대한 지식을 채우는데 재미가 들려 도(道)는 요원하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6조 혜능조사처럼 금강경 한 구절에 바로 깨치는 사람도 있을 수는 있다.
소위 최상근기라는 이런 인물들은 예외로 하고(지금까지 몇 사람이나 이런 사람이 태어 났을까? 손꼽을 정도이다), 최소한의 기초 불법 지식을 갖추고 난 뒤에는 선사의 말 한 마디를 계속, 오직 마음으로(절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제발 머리를 쓰지 말고) 의심해야 한다. 내 경험을 보면 마음으로 의심하는 반복 훈련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깊이 체득하는 계기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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