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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3초 만에
하길남
내가 늘 웃음을 잊고 살아서
세상인심은 늘 업을 심는다
요단강 물결이 노을 속에
장시를 쓰면서 웃고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의 무게만큼 사랑하고
사랑의 불씨만큼 사랑하여라
묘향산 수행선사는
모래 위에 삼십 년 동안
이렇게 쓰다가 열반했다
어디선가 나비 두 마리가
나타나서 ‘사랑’을 물고
선덕여왕 신방에서
윷놀이라도 즐기자는구나
모. 윷. 도. 신발 속에 꽃씨라도 심자는구나.
동백꽃
이우걸
1.
나도 한 번쯤은 부르고 싶은 이름이었다
누천년 바닷물이 깎아 세운 절벽 앞에서
제 젊음 다 꺾어들고
낙하하는 저 순명을,
2..
엄동에도 살아 청청한 아름다운 메타포여
벼린 검처럼 서슬퍼런 잎 사이로
농염한 입술을 내미는
아, 남도의 그리움.
독도
정목일
네 이름은
밀려오는
그리움의 파도
가슴 적시는 사랑
네 이름은
동해의 붉은 심장
겨레의 가슴에 떠오르는
눈부신 해
네 이름은
민족의 푸른 폐
영원을 맞아들이는
푸른 숨결
네 이름은
눈물 솟구쳐
뜨겁게 사무치는
불꽃 노래
마른 수건
예시원(예외석)
황혼에 혹 하나 짊어진 할매
기름 빠진 삭신이 오늘따라 더 무겁다
짐 하나 벗어던지기 무섭게
생의 혹 하나 얹혀져
간신히 버티던 무릎이 빠지직 위태롭다
내 속으로 배 아파 낳은 자식
물고 빨고 가진 것 다 내어 주고도
그 자식이 낳은 자식을 여전히 물고 빤다
내 새끼, 내 강아지
물기 없는 마른 혀, 마른 입술로
사랑스럽게 물고 빤다
마른 수건을 비틀고 비틀어 다시 짜는 할매
기름 빠진 골수가 무너져 내리고
내리사랑은 강물 되어 흐른다.
단어(單語)
하영갑
해가 바뀌어도
보기도
읽기도
쓰기도 싫고
꼭 잊고 싶은 단어들...
『강간, 개, 공포, 극치
니뽄도〔日本刀〕
다케시마의 날(竹島の日 2월22일)
만행, 무차별, 매달다, 목
수장(水藏), 생체실험, 서대문형무소, 선혈
세균, 생매장, 살상, 시범실습, 신사
야산, 양민학살, 애원, 음부, 의병장
작두, 잔학, 진열, 절규
정신대, 집단학살, 제국주의
처형(處刑)』...
지진과 태풍
해일이 웃고 있다
양심적 사죄만이
죄인이 살 길인 것을.
시거리
김명이
삼배저고리 다 해진 몽당치마
갱물에 뛰놀다 시거리가 되던 검정고무신
꽁보리밥에 호박꽃, 초롱 반딧불이 켜놓고
때가는 줄 모르고 깔깔거리던 순남이 희정이
은하수가 밤새도록 지켜보았지.
갱물에 발 담그면 엉겨 붙던 시거리
툭툭 치면 파랗게 피어나
물수제비 타고 새처럼 날아가던 야광빛
시거리야 시거리야 어디로 갔니.
물수제비 타고 다시 새가 되어 날아오렴.
삼배저고리 다 해진 몽당치마
때 묻지 않은 검정고무신
은하수가 읽다 잃어버린
연애편지 한 장.
*갱물: ‘바닷물’의 경상도 방언
**시거리: 플랑크톤이 내는 야광
오동나무
이처기
저만치 아버지가 텃밭에 서 있다
손짓하면 마디 하나 늘고 흰 속살 차고
보랏빛 연 오동 꽃잎
또 한 잎
피고
지고
벤 통나무 속살로 장롱을 만들었다
시집가는 꽃가마 보며 뻐꾸기도 우는 나절
가야금 뜯어 울리는
아버지의
쉰
울대
재즈(1)
강위석
마산만 바다는
돌아온
밀물 차있고
작은 것이 좋아
앨토 색소폰
흐르지 않네
물 위에 풀어지는
드럼 소리 그림자
가만가만 출렁거리네
가득 찬
작은 것이 좋아
잃어버린 것을
잊었으니
난 모르네
마산만으로 다시
언제 오려나
친구여, 아직 살아 있는가
부용 잔상
감태준
부용이 다 졌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눈 내리는 저 천변에서
여름 며칠 연분홍 꽃으로 살았을 뿐
큰 비에 뿌리째 뽑히고 말았지만
두 눈에 박힌 형상
그 여름 한창때 얼굴 지워지지 않는 한
당신이 다 갔다고 생각할 수 없듯이
흐르는 강물
서인숙
강은 조용하다
어디선가 흘러오는 음악의 울림 따라
흐르고 흐르는 물줄기
닿을 수 없어
그냥 가버리는 먼먼 어디인가
물 깊이에서 솟아오른 갈대들의 꿈
적막보다 짙은 침묵 속에 흐르는 물빛
사랑의 맨 처음 사랑 같은...
아무도 붙들지 말라
어느 것 흐르고 변치 않은 것이 있을까
말이 없어 물로만 말하는
저기! 저 강물을 보아
아프다 못해 스러지는 마음
숲의 마음
조병무
보고 싶은 사람
그리워질 때면
단풍나무 물들어 눈부신
그 숲 찾아가자.
떨어지는 낙엽 한 잎
내 어깨에 닿으면
보고 싶은 그 사람
따뜻한 손길로 느끼자.
내 발길에 스치는
낙엽 밟는 소리 들리면
그리운 사람이여,
그대의 목소리로
내 마음에 담아 두자.
밤하늘 서신
靑鶴 허상회
멀고 긴 인생살이 성공의 길, 가는데는
결 거친 숨소리를 밤하늘로 띄우며
오색 빛
크고 깊은 소망
속가슴에 키운다.
만학도 고달픈 희망, 거울 앞에 선 한 사내
좌절하며 고갤 숙여 깊은 밤 헤매다가
고단한
어둠별 홀로
희망 키울 책상을 찾아,
가는 봄을 붙잡으며
성선경
저 버들 꺾고 싶네
네 손모가지 부르질 게다 그래도
저 능청 휘늘어진 버들
꺾고 싶네. 가는 봄을 잡지도
못한다고 저 능수버들 휘늘어진 가지
꺾지 못하겠냐? 손모가지
비틀어진대도 저 버들
꺾고 싶네. 담장 밖
저 꽃 좀 보소. 나는 언 듯
손이 움츠러들지만 내 마음 벌써
저 꽃 꺾어들고 희희낙락
코끝에 내음을 맡고
볼비빔을 하고, 네 이놈
네 손모가지 부르질 게다 그래도
꺾고 싶네. 가는 봄을 잡지도
못한다고 저 꽃을 보지도
못한대서야. 움츠러드는 내 손을
마음이 끌고 가 볼비빔을 하는
능수야 버들 휘늘어진 가지
담장 너머 저 환한 꽃
잡지도 못하고 봄날이 가네.
신발
김미정
굳은 살에 티눈
못난 발을 감싸고
가고픈 곳 어디든 데려다 주십니다
진흙이나 모래땅, 딱딱한 시멘트길
걸림 많은 자갈길도
늘 함께한 고마운 길동무여
목숨 다하는 그날까지
바라는 한 가지
가서는 아니될 곳으론 이끌지 마셔요
사람의 향기와 품격
무너지는 곳은 아니 되십니다
예까지 맨발을 감싸준 당신 그대
곤고함 잘 견디시는 삶의 동지여
새들의 생존법칙
김복근
설계도 허가도 없이
동그란 집을 짓고 산다
작은 부리로 잔가지 지푸라기 물고와
하늘이 보이는 숲속에서 별들을 노래한다
눈대중 어림잡아 아귀를 맞추면서
휘어져 굽은 둥지 무채색 깃털 깔고
무게를 줄여야 산다
새들의 저 생존법칙
대문도 달지 않고 문패도 없는 집에
잘 익은 달 하나가 슬며시 들어와
남몰래 잉태한 사랑 동그란 알이 된다
울타리 없는 마을 등기하는 법도 없이
비스듬히 날아보는
나는 자유의 몸
바람이 지나가면서 뼈 속마저 비워냈다
한계령에서
문덕수
꼬불꼬불 그 버스 산속의 팽이다
팽팽히 돌아 아찔아찔 어느 새 정수리 올라섰네
아슬한 절벽의 한 점 벌레, 뉘 몰래 밀어 올렸나?
아까시 꽃
김용복
새잎 푸른 숲속
새하얀 꽃술
따스하고 포근한
그 향기,
팔에 안겨 잠이 들던
어머니 향기.
아까시 꽃 피는
오월 숲길은
뒤늦은
그리움에
부질없이 서럽다.
사랑하는 나무로
김교한
심오한 인연 앞에 신명을 다 바치어
남루한 기억을 떨고 백골이 부상하는데
오늘은 섭리를 받은 누군가 곁에 있다.
풍상을 내리 초월한 선각자로 우뚝 서서
그 청춘 낙엽지도록 기원하여 별을 달고
점점 더 사랑하는 나무로 멀어지는가.
단단하고 부드러움*
김연희
초상화 뒷짐에 잠든 아버지의 회초리
무더기 풀꽃뿌리
끄덕이는 눈웃음의 어머님 손길
둥글게, 둥글게
가슴 저미다
점 하나 안에 뭉클한 눈물
우리 끈끈한 사랑도 그러해야지
우주 한 공간 한 톨 먼지로 떠돈다 할지라도
초승달 곡선 위 한 점 물방울로 산다하여도
하늘 툇마루 먼 빛
들숨 날숨 길목
그 단단함과 부드러운 등불의 힘
*러시아 태생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의 작품명에서 따옴.
빈집에 드는 달
홍진기
댓돌에 걸터앉아 멍할 때가
더러 있다
저절로 열리는 문 적막한
달개지붕
달빛은 누인 모시필
물비늘을
털고 있다
주인을 기다리겠지 오늘처럼
또 내일도
용구새
골이 패어
바람만 돌다가는
울 엄마 다듬이 소리에 별이 지던
안마당을
*용구새 : 초가집 용마루를 따라가며 마무리로 덮는 이엉
비오는 날
박일춘
빗방울 머리 풀고
청산을 헤매일 제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갈팡질팡 길을 잃고
할 일 잃은 일꾼들은
한낮에 선술집서
고장 난 테이프처럼
돌고 도는 이야기 꽃
가는 길을 잃고 앉아
술병잡고 울부짖네
가을앓이
강천
우두커니 무진정 툇마루에 홀로 앉았습니다. 토닥토닥, 나뭇잎을 적시는 가을비를 하염없이 바라봅니다. 연못에 내려앉은 곱디고운 가을 사이로 빙그르르 물 동그라미가 퍼집니다. 언뜻, 짧았지만 행복했던 지난날의 가을 이야기들이 나타났다가는 일그러집니다.
남사마을의 끊일 듯 이어진 ‘돌담길’
귀뚜라미 소리와 함께했던 그 둑길의 ‘달그림자’
안개 자욱한 날, 둘만의 밀어를 엿들었던 늙은 ‘감나무’
‘코스모스’
‘허수아비’
‘저녁노을’
오늘처럼 가을비 서럽게 울던 날
‘우산’
‘낙엽’ 그리고 별리.
비 그치면, 이 가을도 그녀처럼 훌쩍 떠나버릴 것입니다. 그리움에 젖은 샛노란 은행잎 하나, 소슬바람에 멀어져 갑니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 꾸깃꾸깃 가슴에 새겨 봅니다.
- 수필 「가을앓이」 중에서
음표와 콩나물
서영수
콩나물은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반찬이고, 음표는 살아가는 이유다. 피아노 앞에서 아이들과 함께 음표로 요리하는 순간이 가장 즐거운 시간인 것이다. 앙증맞도록 예쁜 음표로 만든「남촌」을 노래한다.「내 맘의 강물」,「강 건너 봄이 오듯」,「돌아오라 소렌토로」까지 조리를 마치면 음표는 어느새 학생들의 심금을 울리는 음식이 되고, 보약이 된다.
음표와 콩나물, 이 녀석들이야 말로 모든 이의 몸과 영혼을 울리는 최상의 요리 재료인 셈이다.
-수필 「음표와 콩나물」중에서
수정포(水晶浦)
최강렬
죽전 안녕 사이 깊이 들면 양․음달 마을 사람 반기고
긴 포구 들어서 밀물 때는 모래문지도 낚더니
옛날 썰물 때는 반자지락 캤으니 진상칠읍 들고 말고
바닷물 수정 같아 그 물이 맑으니 수정이라 부르네
안녕포(安寧浦)
앞바다 초록빛이요 긴 연안 모래는 햇살에 조을고
마산항 드나드는 화물선 굴뚝연기 날리는 바람
물새 한 마리 나래치며 노닐고 내 또한 날고 싶어라
안씨 입조 마을 안녕 소원 담아 안녕이라 하더라
죽전포(竹田浦)
마을은 한가하다 바다와 마을 화폭에 담은 듯
울창한 송림 볼 만하나 대나무 많던 골 흔적만 남고서
풍경에 풍류 옲조릴 만하니 나그네 마음 설레네
예부터 대나무 많은 곳이라 하여 대밭끝이라 불렀다
실종
김현우
그는 누워 천장을 보며 아무 생각도 않으려 했다.
그런데 눈에서 눈물이 흘러 귀로 들어갔다.
방바닥이 그대로 지하 수백 미터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한동안 그는 모든 세상 일이 아득한 저편에 있는 듯했다. 아니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실감이 나 지 않았다.
모두 허상이었다.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공허,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신통하게도 배가 쓰리고 쏘고 따갑고 아픈 증세는 여전했다. 귓속의 초 고음으로 우는 수만 마리 매미도 전과 다름없이 들어 앉아 있어 그 파열음만은 더 컸다.
-단편소설 「완벽한 실종」 중에서
강⦁산이 만나서
이종광
강물을
못 건너서
청산은 높이 높이
청산을
못 넘어서
강물은 낮게 낮게
강산은
그렇게 만나
신비한 산수화를
벚꽃 밥상
이월춘
봄이 왔다는 것은
그래서 꽃이 핀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군항막걸리나 점도다리쑥국에 둘러앉은
아이들 젖니 같은 저 꽃들
온 세상의 하루가
먼 별들의 손뼉소리에 맞춰
난분분 난분분 꽃멀미를 하며
춘궁(春窮)의 마을마다 밥상을 차리기 때문이다
봄이 왔다는 것은
실로 위대한 밥상에 대한
가장 숭고한 시간의 숟가락질이다
처음 그 소리 .3
임신행
세상은
소리와 소리가 이루는 화음 속입니다.
누구나
사랑에 물들기 시작하면 직유에서 온유로 갑니다.
말에도
따스한 온기가 낮게, 낮게 물이 듭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소리이기도 합니다.
레이찰스의
‘I Can't Stop Loving You
사랑을 위한 소리!
사랑은
온유를 건너 비유입니다.
靜觀(정관)을 통해 중심으로 서는 비유의 소리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비유의 소리입니다.
바위 2
우홍순
머문 곳
노천도량
다리 없는 가부좌로
팔 없이
두 손 모아
입 없는 독백염불
전천후
불면장좌로
영겁 넘는 중생제도.
허리 숙인 개나리
김영락
꼿꼿하고 자랑스런 네 모습
검은색 초루 뒤엉킨 가지뿐이네
부드럽게 허리 숙인 네 자태
봄 물기 머리에 얹고 다소곳하네
늘어진 허리 하도 부드러워
나는야 고운 눈길 주고 싶다네
고개든 너는 제자리 고집인데
저 개나리는 마냥 땅을 마시네
숙여진 풍요가 봄향기에 젖고
오가는 사연이 곱기만 하네.
꼬부랑 허리
이숙자
아픔을 안은 노인들의 마음을 알고
꼬부랑 쪽배 두웅 떠 있는 네 모습
굽어진 할머니들 허리 언제 펴질지 모를.
한 많은 평생을 가득 담은 그 꼬부라진
언제나 펴지려나, 언제나 펴지려나
네모 창 속의 초승달 펴질 날 있으리.
봄동갑의 시샘
이영자
어젯밤
봐요 봐요 저기 저 쪽달
부풀고 부풀어 쟁반 같아지면
나는 생일이야 생일
가지 부여 잡고 속살속살 자랑할 때
귀 먹은 척 하더니
앞집 송아지 태어나자
귀 열고 눈도 뜨고 활짝 웃는
산수유 정말 가관이다
논두렁에 놀러 나온 어린 것을
지켜보는 순한 눈매
어미마냥 포근하여 샘나도록-
오늘 낮
이봐요 나좀 봐요
너나 / 나나 / 송아지나
환갑 세월 같은 거 그것만 지우면
동갑내기라고
나는 우긴다 한사코
산수유 지겨워하든 말든
봄바람
주선화
보아라!
꿩의 바람꽃이 웃지 않느냐
나도 바람꽃이 울지 않느냐
쇳빛부전나비 알락거리고
벌, 벌, 벌 날아와
웃어라!
너도 봄바람이니까,
아름다운 진실향기
문석주
좋은 님 만나려면 좋은 향기 지니고
좋은 벗 사귀려면 신뢰 향기 가득히
술에서 맺은 벗 진실향기 피지 않고
잔 향기 사라지면 안개처럼 사라진다
욕심 많은 벗님은 받기만을 좋아하니
찾아드는 벗님 없어 외로움에 빠져들고
나의 향기 받은 님 받은 향기 보답에
하나둘 찾아들어 여정 길 밝혀준다.
남도일기
김미윤
쏟아지는 별빛에 온몸을 내맡기고
물빛 든 남풍 따라 우포 늪길 걷는 날
나는 너일 수 없고 너는 나일 수 없고
저 비켜선 세월의 푸른 등고선 아래
끝내 접지 못할 호젓한 맘 추스르면
산수유 철 느직이 봄밤을 밝히나니.
봄비
손연식
꽃샘추위 사이로 소란스런 발소리가 온다
노루귀, 산자고, 매화 꽃잎 살짝 밟고 가는
빨간 고무 대야에도 풍덩 빠지는
밤새도록
잠 못 드는 이 창가에 서성거리다
어디로들 몰려가는지
흘러가서는 돌아오지 않는지
발자국 찍어두고 간 목련 봉오리
뽀얀 속살 쬐끔 내보이는 곳으로
귀를 열어둔다
바람난 목련
안화수
계절 잊은 삼월 눈발
꽃눈을 괴롭혀도
상가 건물 노래방 화단에 목련꽃 피었다
봄기운에 흔들리며
뛰는 가슴 누르지 못해
살며시 창문 열고 바깥을 엿보는데
실오리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색색거리던 목련나무
쭉 뻗어 내미는 손끝에 매달린
분 바른 아가씨의 파닥이는 미소
학창 시절 추억의 문틈 사이로
곰실곰실 빠져 나오는
민소매 차림의 가느다란 팔뚝
지금도 만지고 싶다
봄, 봄
김민철
봄은 희망의 환희
달거리 붉디붉은
동백꽃, 생명이다.
열여섯 소녀의 순백한
하얀 벚꽃, 사랑이다.
밤새 일렁이는 은빛 너울
말없이 우는 봄비야
툭툭 떨어지는
노란 꽃잎, 아픔이다.
멍울진 상처마다
움튼 초록의 기적
성난 가시를 뚫고 오월은
붉은 장미를 부르고 있다.
춘자 바보
안웅
서원곡 오르는 골목 담벼락에
맺힌 응어리 풀어 내리듯
뻗칠 곳 한껏 내 뻗쳐 긋고
꺾을 곳 야무지게 꺾어 올린 낙서 하나
“춘자 바보”
막막한 자모음 사이사이를
이리저리 부딪히며 울려오는 저 종소리
잊힐듯 가물가물 멀어져 간 그때
더 높고 단단하던 그 수녀원 담벼락에
삐뚤삐뚤 갈겨쓰고 싶던
그 “춘자 바보”
마산
이외율
마산을 더러는 말뫼라고도 하지만
제35대 경덕왕 16년(759)에
골포현인 마산을 합포 혹은 합포현으로 고쳤다가
광무9년(1905)에 마산으로 이름 지어지기까지는
변화무쌍했고 선인들은 그 이름을 기리기 위해
수많은 시구와 노래를 남기기도 했다.
서쪽으로는 무학산 천주산, 반룡산(팔룡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남쪽으로는 국제미항에 선박은 그대로 드나드는데
어느 때 누군가에 의해 그 이름 사라졌구나!
그 땅과 전설과 기질과 모습은 그대로인데
그 이름 마산을 목이 터져라 불러도
합포와 회원이란 새끼만 친 채 대답이 없다.
왜냐고 물어도 서로 떠넘기며 책임질 사람은 더더욱 없고 변명만 늘어놓는다.
애향 고인이나 출향 선배님들께 무슨 말을 할꼬?
-수필 「아! 마산이여」 중에서
달나라 이면으로 갈거나
배대균
오늘 지리산 54km 종주를 하루 만에 끝내었다.
모두들 이 나이에 안 된다고 했는데.
비교할 바 아니지만 100년 전 남극의 아문센과
40년 전 달나라에 간 암스텔담을 떠올리면서 힘을 내었다.
애기야, 달도 자전을 하니 우리 그믐밤에
계수나무 그 뒤쪽 나라로 가보지 않으려나.
아름다운 것에 대하여
백남오
바람과 천둥이 떠난 9월의 지리산정에서 자신만의 향기와 색깔로 은은히 서 있는 구절초와 쑥부쟁이의 고고함
아무도 보는 이 없는 깊은 자빠진골, 온몸을 다해 고적한 꽃 한 송이 피워내는 수달래의 자존심
-수필 「아름다운 것에 대하여」 중에서
매미 소리를 들으며
강선자
여름의 끝자락에 밤도 깊었는데 매미가 울어댄다. 이제는 떠날 날이 다가왔음을 알고 자기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절규하듯 내는 소리가 왠지 처연하게 들린다.
바람은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하여 자기를 나타내고, 강물은 흘러가면서, 바다는 출렁이면서 자기를 알린다. 작은 풀 한 포기, 이름 모를 들꽃들도 모양과 색깔과 향기로 자기를 나타낸다.
나는 훗날 다른 사람에게 어떤 존재로 기억될까.
-수필 「매미 소리를 들으며」 중에서
슬로길
ㅡ청산도
정동진
발끝에 돌 차인다
발끝 아플 때
하늘 한번
갈매기 춤 한번 보면
좋지 않겠느냐고.
나뭇가지 옷 잡는 길
천천히 걸을수록 눈에 띄는
작아서
더욱 예쁜 풀꽃 있다.
놓쳐 버리며
살아온 날
듣기만 하던 새 울음
새타령 불러 주며
어깨 한번 들썩이며 걷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꽃
공정식
이것이
그래 사랑일까
모두 얻지 못한 채
혼자 끙끙 앓다가
그리움에
터져버린 너의 순수함이여!
흠도
티도
금도
하나 없는
맑고 밝은 自然의 神秘
孕胎의 아픔
피는 너의 모습이여!
기다림
김 근 숙
악인과 선인에게 고루 비춰주는
햇살의 포근함으로
손가락 적실 만큼만 고여도
제가 머물 낮은 곳 찾아
길을 내는 물의 겸손함으로
품어주고 참아내는 어머니 마음의
아주 작은 한 조각
그 그림자만 지녔더라도
한 번쯤은 살아볼 만한 세상 될 텐데
갈수록 흐려지는 하늘
외면하고 싶은 소식들
계절도 발걸음 내딛기가 조심스러운지
해마다 봄은 더디 오고 싶은가 보다
신발
이정숙
푹푹한 먼지 속에
예약 없이 휘어진
새끼발가락,
아버지, 어머니
평생을 함께한
지독한 인생 반려자
내 꿈은 쉴 수 없어
신호등에 달려 있고
오늘도 구석진 먼지 털며
햇볕에 말려본다.
망월동 백일홍
김정희
“무쇠를 녹이리라”
“무쇠를 녹이리라”
망월동 무덤가를 달구는 저 불가마
장대비 백날을 쏟아져도 불길은 끌 수 없고.
천둥 번개 내리치던
아수라 지옥의 날
사태진 언덕 위에 불기둥으로 솟아
허공에 빛을 뿌리고 몸을 사룬 혼백들.
내 눈물 땅에 묻고
돌아서는 이 길목
은은히 들려오는 우렁찬 저 종소리
에밀레, 종치는 나무여 네 울음에 발이 묶인다.
병산 우체국
서일옥
이름 곱고 담도 낮은 병산 우체국은
해변 길 걸어서 탱자 울을 지나서
꼭 전할 비밀 생기면
몰래 문 열고 싶은 곳.
어제는 봄비 내리고 바람 살푼 불더니
햇살 받은 우체통이 칸나처럼 피어 있다.
누구의 애틋한 사연이
저 속에서 익고 있을까
조장(鳥葬)
-어머니
하순희
마음 쓸쓸히 헐벗은 날
그 목소리 들린다.
잘 있제? 잘 하제?
감싸며 잘 살거라이
핑 도는 눈시울 너머
떠오는 맑은 하늘
내 죽으믄 무덤 만들지 말거라
말짱 태워서 곱게 가루 내어
찹쌀밥 고루 버무려 새한테 주거라
때 없이 헛헛해 오는 저린 손을 비비면
바람 소리 물소리 선연한 풍경 소리
깊은 뜻 새소리로 남아
젖은 길 날아오른다
마음이 푸른 모든 이의 달
서연우
나는 치명적이다.
홀로 쪼그려 앉은 베란다엔 바람 한 점 없는데
검은 바다에는 달빛 파랑 일고
어둠이 머드팩처럼 마른다.
얇은 잠, 얼굴 크기 추상화로 깨어나면
꿈꾸다 깬 사실조차 꿈이라는 이중구조
한 장롱에 다른 옷을 건다는 것이 무엇의 의미인지
일찍이 알아버린 방학도 퇴직도 없는 일생
흐르기를 반복하는 시간의 행위에 쓸려
아무리 팔을 휘둘러도 벗어나지 못하는 수렁 속
매일매일 흙빛으로 널뛰는 몸
달빛을 들으며 달빛을 보며 달빛을 마신다.
지구는 딱 알맞은 힘으로 달을 끌어당기고
달빛은 어둠이 무서운 내 생명주기에 흔적 지우기를 한다.
야카모즈로 푸른 것들은 모두 무장해제다.
*야카모즈(터키어)는 ‘물속에 비치는 달빛’ (the reflection of the moon in the water)
수선화 꽃잎 사이로
김계자
귓불 스치는 바람 아직은 시린 2월
따슨 햇살 마중나선 군산 답사길
벽화길 모퉁이 작은 꽃가게
연두색 꽃대 위에 황금 왕관 올려놓고
환하게 웃는 네 모습에 반해
우리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앙증스런 조막손 살며시 펴서
남쪽으로 난 창을 쪼금 열어놓고
기지개 켜는 네 모습이 눈멀게 한다
노오란 꽃잎 사이사이로
딸들의 어린 모습 수시로 드나들고
그 사이사이로 드나드는
손녀들의 꽁지머리에도
아롱아롱 무지개 피어오른다
늦은 저녁이 달다
하 영
늦은 저녁
현관 앞 초코허브
눈빛 향기롭다
고마워서,
숱이 많은 머리를 어루만지며
귓불을 살짝 건들었을 뿐인데
그 아이,
가진 향기를 몽땅, 내 손에 건네준다
그 손으로 먹는 늦은 저녁이
달다
그래그래, 오늘은 네가
고단한 내 하루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말랑말랑한 스펀지다
칠흑의 어둠을 뚫고 나온 협궤열차의 기적소리다
정성껏 등피를 닦고 심지를 갈아 끼운 램프 불빛이다
달다, 혼자 먹는 늦은 저녁밥.
무학의 기상
박태남
창을 열며 돝섬이
꿈틀꿈틀 기지개를 캔다
황금 돼지가 되어
무학으로 오르려는 전초전인..
삼십여 년 마산 사람이지만
무엇 하나 마산인의
희망을 보지 못하고
그렇게
본향으로 돌아 갔다
하지만 가족은
태어나고 자란 곳이
가포의 다이빙대가 있던
물동네 그곳에서 유년을 보냈다고
미련없이 그곳으로 가잔다
이제는
눈으로 보이는 기계소리 자욱한
그곳으로
공기가 맑아 휴양지라 했는데
의지의 도시, 국립 3.15 민주묘지가 있는데
무학의 기상은
지금 어디에서 울렁한 포효를 하고 있는지
사랑하자 사랑하자
마산 사람들
예전에 빛났던 무학의 그 기상을,
지팡이
이창규
내가 어릴 때
할머니가
나를 키워 주셨다.
나들이 할 때에도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다녔다.
내가 커서는
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다닌다.
나들이할 때마다
할머니는
나를 붙잡고 다닌다.
산벚나무
조은길
어머니가 도망가는 꿈을 꾸다
울다 지쳐 잠 깬 날
머리맡에 돌아앉아
손거울 들고 뽀얗게 분단장하시다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
분내 숨이 막히던
연분홍 어린 어머니
그런 날엔 읍내 머리하러가는
동네 처녀들 속에 섞여
집을 나가곤 하셨다
어머니의 기도 7
조현술
일생을 지고 왔던 고뇌의 시간들을
긴 생의 빨랫줄에 하나둘 걸어보면
숨었던 뜨거운 울음들 깃발처럼 나부끼오
불면의 겨울밤을 한숨으로 담금질하며
지구를 도는 달처럼 내 꿈속에 돌았었다
시퍼런 가슴의 멍을 구석구석 젖은 채로
깊은 밤 깨어 있는 어머니 눈가에는
길 잃은 자식의 마음 그 길을 밝히느라
촘촘히 사랑을 태워 하늘마다 별을 단다
남명매
이한영
검은 등걸
뻗은 가지가
아직도 기운차다
하얀 꽃잎
멀리 천왕봉을 바라보며
고아하게 피었구나
불매향!
선생의 올곧은 기개
꽃봉오리마다 서려 있네
산천재 뜨락에 감도는
그윽한
암향이여
매화 피고지고
김병수
내 집 뜰의
매화 향에 취하다 보니
수작할 벗들
술 익는 줄 알겠다
매화가지에 앉아
봄을 흔드는 산새
날 불러 낼 적에
새벽 뜰을 밟다가
춘설인 듯 보고 또 보는데
내 마음의 길이
절로 하얗다.
동백 연가
강호인
그 잎새 청류 흘러 사계 내내 청청하고
꽃이야 망울 멍울 삼동 품어 여는 단심
신산한 풍진의 일월
꿋꿋 오롯 한결 같네
내생에 꽃 된다면 동백이 될까 보다
나무에서 땅에 져서 그리운 그대 맘에서
꿈에도 선연 아련한
동백이나 될까 부다
진땀
오하룡
어둡고 삭막한 길을 걸어왔다.
딴 길을 걷고도 아는 길을 걸은 척 했다.
멀리 두르고 둘렀는데도 지름길로 온 척 했다.
손해를 보고도 오히려 이득을 본 척 했다.
마음에 없으면서 있는 척 다소곳이
예라고 대답한 적 있다. 아니 많다.
그 말로 내가 아닌 내가 되게 했다.
지금도 내가 아닌 나를 나라고
생각하면 진땀난다.
청해진을 읽다
김연동
불립문(不立文) 섬과 바다 만 갈래 시름 벌을
첩지나 받은 듯이 성채 짚어 휘달리며
맨발로 꽃밭을 일군 푸른 고전 받쳐 든다
너울 치는 그리움을 갑주 속에 접어 넣고
시린 칼 그 절제로 무두질 하던 대륙
더운 피 매운 결기로 써내려간 서사시를,
비린 가슴 비워내면 길 위에 길이 되나
꿈을 펼쳐보라는 듯 열어젖힌 물길 위에
아득한 천년의 햇살 염장(鹽藏)하듯 뿌린다
꽃살문
배소희
지느러미가 붉다
잠시 흔들리다 가라앉는
힘겨운 숨 고르기
수면 위로 떠오른 거품 사이로
꽃이 핀다 물고기
등부터 꼬리까지
잠이 든다 문득 물잠
그물망 사이로
당신이 빠져나간다
늦가을 찾아간 선암사
연화문살에 비친 물고기
들물에 꽃이 핀다.
마산灣
김차순
여름 오는 길목이
왜 이리 시린지
왼 종일 키질하는
환한 볕 불 끌어
시간의 빗장을 푸는
흙집마당 그립다
조선무 속살 같은
어미의 젖무덤이
만조로 출렁이는
누런 갱지 위에
섬처럼 떠 있는 상형문자
뚜벅뚜벅 다가온다
*경남 창원시 마산
그도 거기서
노여심
내가 여기서
이렇게 이렇게 살아가듯이
그도 거기서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겠지
아침마다 냄새 좋은 쌀을 씻고
좋은 사람끼리 모여 앉아 밥을 먹겠지
밤이면 어김없이 현관문을 잠그고
사랑하는 사람과 살을 부비며
식지 않은 하루를 얘기하겠지
내가 여기서 이러하듯이
가끔은 유리창 너머 예쁜 별을 보다가
어느 별 어느 골짜기를 노래하면서
그도 거기서 그렇게 살아가겠지
행복
최영지
할머니~
하머니~
맨발로 현관문 앞
깡충깡충 뜀뛰기를 한다.
어디에 간들
누가 날 이렇게 반기랴
여섯 살배기 지안이
발렌타인 데이라며
초콜릿 두 알
내 손에 꼭 쥐어준다
마산 계시는 할아버지께
꼭 전해주란다
세 살배기 지유
아직 말문이 트이지 않은 채
온몸으로 하머니 부른다
두 아이 재롱
진종일 웃음
얼마 만에 이렇게
웃어본 것인가
할머니 하룻밤
지안이랑 자고가라고
내 목 껴안고
응석부리지만
밤늦게 딸네 집
나오고 말았네.
아이가 있어
사랑이 꿈꾸고
행복이 너울
춤추는 게 아닌가.
시인(詩人)
청송 최대식
세상 살며
보이는 사물은
숨소리까지 듣고 싶다
감성으로 채집한
갈무리
온몸으로 노래를 부른다
긴긴 밤
영혼의 노래
눈물은 하늘로 오르고
별들은 땅으로 내린다
화두․26
강지연
뭇 꽃들은 저 혼자 피고 지고
무심한데
내가 꽃 보며
눈물짓고 웃고 서러워
하는 것은 아닌지
햇볕 길어진 봄날
연꽃 속처럼 환해지기 위해
화두 지팡이 길게 끌고 나선
소요길
흩어진 동백꽃만
객혈처럼 붉다.
합포만에서
양계향
어버이 큰 사랑을
바다에다 비기지만
넓디넓은 마음으로
온갖 응석 받는다고
오염된
온갖 폐수를
함부로 버리는가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가락 실린 물결
*노 화백 화폭 속에
살아나던 꽃게들을
언제쯤
이 바다에다
다시 풀어 놓을까
*노 화백: 꽃게를 즐겨 그리시던 마산의 최운 화가
짝사랑
박성임
닫혀 있는 블로그
흐를 수 없는 강
거미줄 연미복만
먼지 속에 걸려있다
피울 수 없는 먼 내일
언제쯤 바늘햇살 눈뜰까
밤사이 부운 바람
떨어지는 붉은 깃털
남아있는 부스럼
지워지지 않을 흔적
별똥별 그대 마당에
자꾸 떨어지고 있다
여름·7
맹천 승만석
씨끌이더니 뚝 멈추고 동정을 살피는 어림이 팔월 강바람 같은 참매미소리
늙은 고욤나무 그늘이 평상에 내리면
낮잠은 제 맛이다
덕이는 검은빤쭈 하나로 여름을 배기는 나와 동갑내기인데
나무를 곧잘 타 매미를 참 잘 잡았다
잡은 매미를 긴 손톱으로 슬슬 아랫배를 긁으면
날개를 파닥이며 자지러지는데
우리는 마주하며 마구 웃어 댔었다
맑은 저녁 우화(羽化)하는 날개가 명주 같았다
흘린 술이 반이다
이혜선
인사동 포장마차에서 그날 술자리의 화두는
‘흘린 술이 반이다’
연속극 보며 훌쩍이는 내 눈 들여다보며
‘우리 애기 또 우네’ 일삼아 놀리던 그이
요즘 들어 누가 슬픈 얘기만 해도
그이가 먼저 눈물 그렁그렁
오늘도 퇴근길에 라디오 들으며
한참 울다가 서둘러 왔다는 그이
새끼제비 날아간 저녁밥상에 마주 앉은 희끗한 머리칼
서로 측은히 건네다 본다
흘린 술이 반이기 때문일까
아직 함께 마셔야 할 술이
술병에 반나마 남았다고 믿는,
그 착한 바다
이광석
키 작은 파도가 나다니는 곳
기차가 잠시 머무는 바닷가
때로는 심심한 햇살이
갯바람과 수다를 떠는 곳
이유 있는 좌절이 촌수가 먼
희망과 어쩌다 잠시 스쳐 갔던 곳
이젠 아무도 가보려 하지 않고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먼 기억 속의 낯선 간이역
그래도 쇠주 한 잔 동행 길
짜고 매운 아귀찜 얼큰한 복어 매운탕
우리 삶의 뱃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삼랑진 발 기차종점 옛 마산역 기적 소리
최운* 게 그림 화폭에 아직도 낮게 출렁이는
그 착한 바다
*게 그림으로 유명한 60년대 화가
퇴행성 관절염
민창홍
고사리 꺾으러 산에 가서
고사리는 꺾지 않고
할미꽃 한 뿌리만 캐왔다는
어머니
다시 못 볼까 봐
아픈 무릎 움켜쥐고
꽃만 캐 왔다는
어머니
한 평도 못 되는
담장 밑에
자줏빛 한복 입은 할머니처럼
고개 숙인 꽃 한송이
보고 싶을 때 보라고
할미꽃은 말하는데
무릎이 아프다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숙이고
할미꽃을 닮아가는 어머니
영락없는 할미꽃
사랑 실 무늬
민병기
은행잎 노랗게 깔린 벤치에 마주 앉아
가을빛 고운 햇살로 묶은 꽃다발 건네면
가슴에 숨긴 사연도 환히 비치던 부끄럼.
황혼에서 여명까지 불살라 버린 모닥불
너와 나를 혼동하며 춤춘 광란의 축제
잊혔다 문득 생생해지는 칼칼한 그 목청
아직도 세월 창가에 얽힌 사랑실 타래
실밥도 풀리지 않게 오래 간직하리니.
추억사 오래될수록 사랑의 윤은 빛나리.
단상
성정현
고속열차 따라서
시간이 쫓아간다
윤슬 지는 유채꽃밭
휘돌아 지날 때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문득
뒤돌아보는
늦은 편지
서성자
꽃 지려나 벚나무, 꽃잎이 들썩인다
안녕? 잘 지내지
뜻밖의 안부를 묻듯
캄캄한 밑둥치에 핀
뒤늦은 몇 꽃송이
유통기한 지나버린 옛사랑이 그랬을까
데면데면한 햇살에
핑그르르 흔들리는
네 마음
엿들은 죄로
귓속이 웅웅
울었다
민들레
김영미
우주를 받쳐 들고 한 생을 섬기려나
저 홀로 꿈을 꾸며 숨 죽여 걸어온 길
어느덧 군무(群舞)로 피는 소용돌이 꽃이여
새싹
김재순
너, 여기 있었구나.
햇살이
등을 톡! 치는 순간
술래에게 들킨 아이처럼
깜짝 놀라 일어서며
파랗게 웃는구나.
저 파란 웃음을
흙더미 속에서
어찌 참고 있었을까
고래
하종숙
뭍을 거닐던 시절
고양이만 했으나
넓고도 먼 바다를 가로질러서야
날아라 고래!
사는 것이란 쌩쌩하게 비린내를 풍기는 것
비좁은 우리 삶의 비공
그 자글거리는 물살을 세차게
속시원하게 뿜어내는 것
날아라 고래!
친정 엄마
박귀희
살면서 누구에게도 말 못할 심정일 때가 간혹 있다.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친정엄마이다. 찾아가는 곳이 비록 병원이라 할지라도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편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해도 살아계셔서 크게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처럼, 마음이 헛헛해지는 날이면 이젠 어디로 가야할까.
-수필 「친정 엄마」 중에서
그대
고방규
오늘도 그대의 사무친 아픔은
또록또록 그리움으로 영글어갑니다
진정
입모초 사랑은 이렇게 아픈 건가
맨발로 거친 삶을 살아도 사랑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뭔가 그토록 잊으려 애써 깎고 찍어 지워 버리려도
불꽃처럼 스쳐가는 그대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제는 불꽃을 끄고 싶어도
꺼지지 않은 것이 사랑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비바람 몰아쳐도 사랑은 속살을 드러냅니다
다빈치의 그림 속에서도 사랑의
아픈 상처가 보입니다
물결처럼 휘감듯
아픔도 기쁨도 함께 숙명처럼 안고 갑니다
제 몸을 드러내지 않는 바람결처럼-
옥탑방 일기․1
이달균
하늘엔 지친 눈, 쉼 없이 달려왔지만
땅에 닿기도 전 빗물이 되고 마는,
일순간 생이 바뀌는 이 절망마저 사랑하라.
결핍이 날 살게 한다.
결핍이 날 쓰게 한다.
갈망의 우물 속으로 두레박을 내리고
마침내
혼곤히 젖은
우울을 베고 잠든다
언어의 경제학
변승기
내가 시(詩)에 처음 눈 뜬 것은 권기호 시인을 만나고서였다. 나는 그때 경남대학 상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박정희를 비판하다 경북대학에서 쫓겨나 우리 대학 국문학과에 출강하고 있었다. 몇 밤을 지새우며 간신히 시 한 편 써서 건네면 힐끗 난도질하면 그 뿐.
나는 언어의 경제학이라는 말을 그때 처음 들었다.
바람이 키운 산
나순자
명사산(鳴砂山)의 바람이 모래를 깨운다
바람이 일으킨 모래가
칼로 자른 듯한 날렵한 선을 가진
건축물을 세우고 허문다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깊을 대로 깊어진 바람이
잠들지 않은 명사산의 밤을 보챈다
살아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땅 타클라마칸의 바람이
명사산을 기른다
비단결 같은 모래산을
뜨거움에 푹푹 빠지며 내려오던 날
모래 속에 뜨거운 늪이 있다는 걸
모래 속에는 식지 않는 심장이 있어
오늘을 산다는 걸 알았다
명사산의 모래를 깨워 울게 하는 이
다시 울던 모래 제자리에 갖다 놓는 이가
바람이라니
이따금 잠들지 못하는 밤에 듣는 가슴의 바람소리는
그 때의 뜨거운 늪이 내 속에 들어 와
몸부림치는 소리일지 모른다
*명사산: 둔황의 모래산
天文 1
-강아지는 어디에 있는가
전문수
파란 철대 문 앞 강아지 집
목에 쇠줄 고리를 찬 강아지는
들고나는 주인 내외에게
꼬리를 치며 이 집을 지킨다
눈치껏 강아지 먹이를 노리는
까치, 참새 두 마리가
지붕 위에서 내려 보고 있다
큰 길을 따라 나간 골목길 옆
손바닥만 한 채소밭이
활짝 펼쳐 쥔 강아지의 하늘
강아지는 지금
어느 것들의 위와 아래,
그리고 좌우, 전후에
실존하는가
아니, 강아지는
내가 지금 베껴 쓰고 있는
이 풍경문(風景文)에
단어로 한 개로 들어 있는가
큰 길을 따라간 골목길
아직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했을 터
구름처럼 강아지는
부유(浮遊)하고 있는가
커피, 그 유혹에 빠지다
박귀영
요즈음 나는 커피를 즐겨 마신다. 오감을 자극하는 그 맛을 깊게 음미하기 위해 직접 물을 내려 커피를 뽑는 핸드 드립을 해서 마시고 있다. 원두를 분쇄한 후 뜨거운 물줄기를 뿜으면 거품이 끌어 오르면서 한 템포 쉬었다가 다시 맑고 뜨거운 물을 두른다. 드리퍼 아래로 조르르 흐르는 커피의 향이 사방으로 퍼진다. 뜨거운 물속에서 자신의 향과 맛을 내려놓는 커피, 오늘도 나는 그 커피 한 잔을 함께 마실 사람을 생각하면서 행복의 미소를 짓는다.
커피는 내 삶에 그리움과 설렘을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수필 「커피, 그 유혹에 빠지다」 중에서
고양이 나비
김태두
길고양이와 어울리던 집고양이 나비
동무가 좋은지
그만 집을 나가버렸다.
가물가물 잊혀질 무렵
야옹! 문밖에 귀에 익은 소리
반가워 뛰어나갔다.
어, 그런데 이상해.
가까이 오지 않는다.
먹이를 주니 먹고는 가 버린다.
몇 달이 지나도 왜 재롱둥이가 되지 않을까?
길고양이가 뭐라고 했기에 저럴까?
나비야! 제발 되돌아와 줘.
봄날
윤미향
햇살 한 줌을 모아
뻥튀기 할아버지한테 간다
사람들 볼세라 슬쩍 집어넣는 봄바람은
할아버지만의 오래된 단맛 레시피
뻥이요! 목청과 함께
벌써 할아버지가 튀겨 낸 올해 봄은
명이네 골목 벚나무 일곱 그루와
랄랄라 왈츠 두 곡
그리고 모듬나물 세 바구니째다
“제 몫의 봄은 얼마나 될까요?”
턱을 괴고 앉은 명이 조바심 위로
연신 쏟아지는 할아버지 쪼글한 웃음도
봄이 되는 봄날,
돌탑
배종애
허 그 참
이제 돌도 한자리에 못 있게 하네
대지의 젖을 먹고,
더 무럭무럭 자라야할
어린 돌들까지
돌탑의 꼭짓점을 향하여
줄을 세우네
세상은
무엇을 쌓아야
공든 탑이 되는지 모른다
거꾸로 쌓는 돌탑
허숙영
해운대 바닷가에는
돌탑을 거꾸로 쌓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질주하는 바람을 돌려세우고
파도의 투정도 달래줘야 가능하다.
세상의 중심에 스스로를 세우는 일이니
마음의 중심부터 잡으라는 길손의 묵음(黙音) 주문에
돌 무게로 주저앉으려는 맘
벼려가며 탑을 쌓고 있다.
하늘이 가까울수록
돌의 옆구리에 날개가 돋는 듯하다.
내 어깨도 덩달아 덜썩인다.
깨어 있는 시간
임채수
다리가 아파 꿈에서 깨어보니
깊이 잠든 아내 다리가
내 허벅지에 얹혀있다
나를 짓누르는 아내의 다리를
슬쩍 옆으로 비껴내었지만
아린 자리는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짓누르는 사람은 모르지만
짓눌린 사람은 아픈
나는 어느 사람의 허벅지를
짓누르고 있지나 않았는지
뚜벅뚜벅 걸어오는 새벽을 맞으며
맑게 깨어 있는 시간
어디선가 어두움의 껍질을 벗기는
닭 울음소리 들린다.
나를 깨우는 우주의 소리
月河日記
류경일(柳景日)
까마귀 울음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메마른 도시의 하천에 낮달이 떴다
물소리를 잃고 흐르는
세월의 냇가에
하천 복원을 꿈꾸는 사람들이 심은 유채꽃
출렁이는 꽃물이 꿈결 같은데
유채꽃발에 밟혀 흐르는 물은
하천의 무릎에 고름처럼 고인다
갈대숲 쪼그라든 폐에도 물이 차올라
강과 바다 그 죽음의 경계에 선 하천
풀벌레 소리를 품고 흐르던
참 맑고 차가웠던 젊은 그의 손을
한 번 더 잡아보겠다고
바다 어귀까지 흘러내려간 노인들
갯벌에 넋 놓고 앉아
죽어가는 하천의 불알을 만지고 있다
봄 한낮
김경분
바람은 봄의 산파
자귀나무 귓가에
동백나무 눈시울에 앉은 햇살
논둑으로
물가로
퍼뜨려 놓는 걸 보았다
오늘은 창 밑 라일락에 다녀가셨나 보다
그 발소리 혼자 듣는 봄 한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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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름 7
5행 (매미 사냥꾼이다)를 (매미를 참 잡았다)로
6행(긴 손톱) 앞에 (잡은 매미를) 삽입
8행은 한 줄로 부탁합니다.
여러모로 수고가 많으십니다.^** (승만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