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홈커밍데이 / 이진우
이름을 부른 것도 아닌데
여름이 온다
어른이 되기도 전에 벌써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감각들이 유빙처럼 떠내려갔지
애인을 기다리며 마시는 커피의 얼음이 녹는 속도라든지 그 사람과 이별한 후 마시게 될 맥주의 온도라든지
우리는 우리의 이마와 코끝이 얼마나 가까운지도 알지 못했지
앨범에 넣어둔 사진이 눅눅해지는 건지도 몰랐지
그때 네가 입고 있던 반팔 티는 무슨 색이었나
벽지에 말라붙은 모기의 핏자국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장마처럼 햇볕이 쏟아진다
운동장엔
새로 자란 그림자들이 무성하다
다음 여름도 그랬으면 좋겠다
여름이 오는데
여름에 죽은 친구의 얼굴이 기억나질 않는다
▲경희대 연극영화과 졸업
▲영상 촬영 프리랜서
■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묘목원 / 권승섭
버스를 기다린다 신호가 바뀌고 사람이 오가고
그동안 그를 만난다
어디를 가냐고
그가 묻는다
나무를 사러 간다고 대답한다
우리 집 마당의 이팝나무에 대해 그가 묻는다
잘 자란다고
나는 대답한다
그런데 또 나무를 심냐고 그가 묻는다
물음이 있는 동안 나는 어딘가 없었다
없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무슨 나무를 살 것이냐고 그가 묻는다
내가 대답이 없자
나무는 어떻게 들고 올 것이냐고 묻는다
나는 여전히 말이 없다
먼 사람이 된다
초점이 향하는 곳에 나무가 있었다
잎사귀로는 헤아릴 수 없어서
기둥으로 그루를 세야 할 것들이
무수했다
다음에 나무를 함께 사러 가자고
그가 말했다
아마도 그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그를 나무라 부른 적이 있었는데
다시금 지나가는 비슷한 얼굴의 나무는
▲2002년 경기 수원시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2학년 재학
■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버터 / 박선민
추우면 뭉쳐집니다
펭귄일까요?
두 종류 온도만 있으면
버터는 만들 수 있습니다
뭉쳐지는 힘엔 추운 거푸집들이 있습니다
마치 온도들이 얼음으로 바뀌는 일과 흡사합니다
문을 닫은 건 오두막일까요?
마른나무에 불을 붙이면
그을린 자국과 연기로 분리됩니다
창문 틈새로 미끄러질 수도 있습니다
문을 꽉 걸어 잠그고 연기를 뭉쳐줍니다
고온에 흩어지는 것이 녹는점과 비슷합니다
초록색은 버터일까요?
버터는 원래 풀밭이었습니다
몇 번 꽃도 피워 본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들은 집요하게도 색깔을 먹어 치웁니다
이빨에 파란 이끼가 낄 때까지
언덕과 평지와 비스듬한 초록을 먹어 치웁니다
당나귀일까요?
홀 핀이 물결을 반으로 가릅니다
개명 후 국적을 바꾼 귤이 있습니다
노새는 두 마리입니다
한쪽의 양이 너무 많거나
갑자기 차가운 밖으로 밀려나면
두 개의 뿔이 돋아납니다
그래서 당나귀의 울음은 무게를 느끼지 못합니다
저울의 일종일까요?
버터는 뜨거운 프라이팬의 바닥에서 녹습니다
녹기 전에는 잠시
사각의 모양이었습니다
다방면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만
책상과 주로 이별에 쓰이는 인사를 닮기도 했습니다
안녕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안녕의 모양은 제각각이라
한평생 뒤집어도 맞는 짝을 연속해 찾기란 어렵습니다
자신과 다른 모양을 가진 인사에
분명 트집을 잡고 있을 것입니다
부서졌군, 다른 말로 교체해달라는 뜻입니다
삐뚤어졌군, 새 말로 달라는 뜻이고요
밀항선을 타고
전 세계로 스며들었습니다
버터 한 덩어리에는 항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난파된 배에서 떨어져 부유하다가 유빙처럼 발견된 버터도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유빙이 가로지른 국경선을 분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시간에 걸쳐
버터가 녹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창문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버터가 사각인 이유는
창문에 넣고 굳혔기 때문입니다
악천후를 뚫고 달리는 창문은
격렬한 속도입니다
▲1997년 경기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볼트 / 임후성
코끼리를 보라
코끼리끼리는 볼 수 없는 코끼리를 보라
꼬리를 위해 서 있는 네 번째와 세 번째 다리를 보라
걸음을 뗄 때 발을 남기고 벗겨질 것만 같은 발의 접힌 거죽을 보라
달라붙어 있지 않고
그것은 끌려다닌다
우리의 난제였던 바깥이다
실체는 헐렁헐렁하다
그 안에서 기관을 해체하는 망치질 같은 코끼리의 걸음을 보라
눈앞에 직접 정의된 코끼리를 보라
걸을 때마다 부서지고 있지 않은가
간신히 어금니로 연결되어 있지만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지 않은가
코끼리 안으로 들어가지 마라
안과 바깥은 서로에게 통증이 그지없다
뒤쪽 숲을 보라
나뭇잎들이 가지에 붙어 벌어졌다 오므라들었다 한다
나무 주위를 맴돌며 탈출이 어려운
바람의 원숭이들을 보라
가장 가까운 붉은색을 볼 수 없는 원숭이의 눈을 보라
저 영특한 종족은 의혹의 못에 박힌 매혹이다
이때 고개를 돌려 완전한 불의 형태로 시간을 태우는 대관람차를 보라
오전의 하품 같은 간격을 보라
회전의 무의미 아래 네게 권해지는 네 머릿속을 보라
주차장에서 마주친 사 년 전 그 사람을 보라
하천이 흐르는 대로변에서
다리 아래로 유혹해
교량의 접합부마다 극렬하게 박힌 볼트를 해가 질 때까지 함께 보았던 그 사람을 보라
볼트 하나를 빼 보고 싶었던 그 사람을 보라
그가 너를 찾아 나섰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볼트 하나를 갖고 있다
그와 상관없이 혼자서 한 번 더 다리를 건너라
다리는 흔들거린다
그 아래를 보라
조그만 구멍을 남기고 녹슨 생략이 있다
■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 이예진
금값이 올랐다
언니는 손금을 팔러갔다
엄마랑 아빠는 이제부터 따로 살 거란다
내가 어릴 때, 동화를 쓴 적이 있다 내가 언니의 숙제를 찢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언니도 화가 나서 엄마의 가계부를 찢었고 엄마는 아빠의 신문을 찢고 아빠는 달력을 찢다가, 온 세상에 찢어진 종이가 눈처럼 펄펄 내리며 끝난다
손금이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집에 남고 싶은 것은 정말로 나 하나뿐일까? 언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더는 찢을 것이 없었다 눈이 쌓이고 금값이 오르고 검은 외투를 꽁꽁 여민 사람들이 거리를 쏘아 다녔다
엄마는 결국 한 돈짜리 목걸이를 한 애인을 따라갔지 아빠는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오겠다고 했다
따로 따로 떨어지는 눈과
따로 노는 낡고 지친 눈빛을
집이 사라지고 방향이 생겼다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재학 중
■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드라이아이스 / 민소연
-결혼기념일
평생 함께하겠습니다
짙은 약속을 얼떨결에 움켜쥐었을 때
새끼손가락 끝에 검붉은 피가 모였을 때
치밀한 혀를 가지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어떤 밤엔 마침내 혀를 쓰지 않고도 사랑을 발음했다
맺혔던 울음소리가 몇 방울 떨어지고
태어나고
수도꼭지를 끝까지 잠갔다
한밤중엔 그런 소리들에 놀라서 문을 닫았다
너무 규칙적인 것은 무서웠다 치열하게
몸을 움직이는 초침 소리나
몸을 웅크린 채 맹목적으로 내쉬는 너의 숨소리가 그랬다
거듭 부풀어 오르는 뒷모습을 보면서 호흡을 뱉었다
어쩌면 함께 닳고 있는 것 같았다
박자에 맞춰 피어오르는 게 있었다 입김처럼
희뿌옇고 서늘했다
숨을 삼키다 체한 밤이면 너를 깨웠다
내기를 하자고 했다
누가 더 먼저 없어질 것 같은지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해보자고 했다 너와 나는 모두
내가 먼저일 거라는 결론을 내려서
우리는 오래도록 같은 편이 되었다
내가 죽은 척을 하면 너는 나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등 뒤에서 각자의 깍지를 움켜쥐었다
영원한 타인에 대해 생각했다
손끝에 짙은 피가 뭉치면
동시에 숨을 전부 내쉬었다
품안에서 녹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살갗이 들러붙었다
▲한양여대 문예창작학과 재학
■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당산에서 / 신나리
비 오는 새벽 요강을 몇 번이나 비워낸 할머니는 내가 잠에서 깰까 아침이면 부엌에 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약을 많이 먹어 몸에서 쓴 내가 났다 나한테는 미묘한 매실 냄새가 비가 퍼붓는데도 두 냄새가 멈추지를 않았다
푸른 논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뚫린다던 엄마는 절대 할머니 곁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시골에 살면 우울증에 걸린다나 나 어릴 때 친구 하나가 너희 엄마 불 꺼진 매장에 혼자 앉아있더라 전해 준 적이 있다
할머니는 방에 걸린 무수한 액자들과 함께 살고 있어 나는 양심이 없으므로 엄마에게 몇 마디를 했다 얼마나 불쌍한지 외로운지 결국은 심심한지 할머니가 엄마는 고집 있고 성질 나빠 아빠랑 살기 어려웠을 거래 우리는 웃다가 콧물을 흘렸다
다음날 어떻게 잘 지낼지 생각하느라 도통 밤에 잠을 못 잤다 희망을 벗어날 길 없어 욕망을 추스를 틈 없이 이른 아침 아이돌 노래에 맞춰 산책하다 고추밭에서 누군가 칼로 난도질한 복권 여러 장을 발견하기도 했다
내가 죽은 삼촌 방에 앉아 뭘 하는지 할머니는 모른다 노래기 잡고 거미랑 싸우며 그냥 해보는 데까지 해 보는 겁니다 이를 갈면서도 이를 숨기느라 진을 빼고
같이 목욕을 하자더니 결국 혼자 손으로 몸을 문질러 닦았다 나가 있으래서 나가 있었다 할아버지 생전에 할머니가 비누로 씻고 밥을 차리면 비위 상해서 못 먹겠다고 상을 물렸다고 한다 그깟 소리 듣기 싫어서 그때부터 물로만 문질러 닦았다는데
이도 없고 밥 먹고 솟아야 할 기력도 권태도 없어 보이는 할머니와 저녁을 먹는다 기름 친 음식이 먹고 싶어 우유에 탄 진한 커피도 마시고 싶어 죽겠는 와중에 어김없이 체한다 할머니가 내 커다란 배를 문질러 준다
늙은 엄마를 사랑하지 못할까 눈물 찔끔 흘리는 내게 희망이 절망이 될까 한 글자 쓰는데 벌벌 떠는 내게 마을의 수호신 장승처럼 너무나 큰 할머니 끈질긴 여름밤 비는 쏟아지고 미물들이 발광을 한다
할머니 옆에 꼭 붙어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 우뚝 선 자존심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1991년 서울 출생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극장의 추억 / 이상록
기억의 성채도 언젠간 무너지지만 내 인생극장은 막을 내릴 수 없다네
삼팔장은 파장 흐느끼는 뽕짝 무대래야 장터 마당 우리는 들뜨지 학교에선 기죽던 강둑 아래 녀석도 나방처럼 설치지 노란 등 꺼지고 영사기 소리 밤하늘 긁으면 어김없이 죽죽 장대비 내리지 매가리 없는 삶 눈물처럼 때도 없이 내리지 사랑해선 안 될 사람 통통배는 서울로 가는데 소나무에 기대 바라만 보는 여인 아, 문 희, 눈물도 예쁜 저런 여자라면 삶이 한두 번 속여야지 그래도 지금 여자 갸름한 목덜미는 꼭 닮았다네
촌구석에 극장이라니 거무죽죽 지붕 사이 우뚝한 국제극장 김일 박치기를 단체로 볼 줄이야 허장강도 도금봉도 막걸리 안주 희갑이는 애들도 만만하게 보는데 장돌뱅이로 돌고 돈 필름은 장꾼들 셈처럼 자꾸만 끊어져 하필 두 입술이 닿을 찰나에 건달들 ‘도끼’ 고함에 다시 이어져도 꼴도 보기 싫은 놈 자르고픈 컷, 컷, 정말 도끼로 뭉툭 도려내고 사는 맛도 있어야지 ‘한 떨기 장미 꽃잎이 젖을 때’라나 아직도 콩닥거린다네
범일동 시궁창 강구 군단도 촌놈 부산 구경 못 막았지 가무잡잡 삼화고무 앳된 처자들 삼일극장이 비좁네 뽕도 딸 겸 들어서면 분내 땀내 찐득거려 삼성극장으로 건너가면 지린내가 폴폴 따라붙지 헛헛하지 액션으로 한 방 멜로로 또 한 방 동시에 달래주곤 남진까지 불러다 구장집 봉순이 봉긋한 가슴에 바람 넣더니 바람과 함께 사라진 봉순인 태화고무 고무신처럼 어디서 질기게 살아갈 테지 그 보림극장도 문을 닫았다네
▲1958년 경남 밀양 출생
▲경북대 국문과 졸업
▲제1회 사하모래톱문학상
■ 경남도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산책 / 차수현
환상적인 날씨입니다 혀 내밀고 내달리기에
나는 줄을 당겨 바람을 가릅니다 간신히 기어 나오는 웃음
좋은 날입니다
죽어가는 사람 목줄 채우기에
느껴봐 온통 살아 있는 것 투성이야
냄새만 맡아도 꿈틀대는 흙, 돌, 풀, 눈 뜬 벌레, 죽은 자의 혀가 잘린 그림자,
산 사람의 입을 뗀 발자국 그곳에서 영靈을 찾는 발자국 발자국들
천사 같은 아이들이 하나둘 따라붙어 나팔을 붑니다
터져버릴 풍선 같은 주인 여잘 놓칠세라 나는 줄을 힘껏 당깁니다
봄눈의 생사가 움찔대는 건 입춘이 지나서라지
마지막 의자에 앉아 잠시 쉬어가는 노파가 말합니다
검은 새들이 나란히 나란히 그 중, 유일한 흰 새 한 마리 보입니다
검은 눈들이 나란히 나란히 그 중, 유일한 흰 눈 한 알 보이지 않습니다
유일한 ㅁ ㅗ ㄱ을 그었거든요
달리는 남자 위로, 만보 걷는 여자 위로, 쌩 지나가는 자전거 위로,
갑자기 우산을 펴는 여학생 위로 뚝 뚝
서둘러 서둘러야 했어
나는 더 이상 당겨지지 않는 바람을 가릅니다
그처럼 깨끗하게 죽은 사람 처음 봤다지 어찌나 핥아줬는지
얼굴이 말갛더래 봄꽃 마냥
주인 여자와 어깨를 부딪친 노파가 입을 뗍니다
자,
당신의 앞발을 들어보세요
그리고 서둘러 두드리세요 그녀가 사는 옆집 대문을
똑 똑 똑 산책할 시간입니다
▲서울출생 대전 거주
▲한남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활어 / 황사라
속이 보이지 않는 것은 싱싱해요
벌려지지 않는 조개는 살아 있는 거래요
나를 단단히 여미고 싶을 땐 시장에 가요
횟집 옆 원단가게 사장님은
둘둘 말아 놓은 천을 풀어 보여주시는데
아득한 바다가 출렁대는 줄 알았어요
바위에 붙어 있는 게 굴만 있겠어요
저기 좌판 한 자리에 앉아
수십 년 동안 곰피를 팔아 온 할머니
손등 위에 물결무늬가 깊게 새겨졌네요
흥정은 늘 미끄럽기 마련이지요
손 안의 물고기처럼
자칫하면 놓쳐버리고 말아요
하루하루 쳐지는 나의 감정도
얼음조각으로 덮어 놓으면
조금 더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바위에 수없이 부딪치면서도
제자리를 찾아가는 파도
물길을 잃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데요
골목의 해류를 따라가다 보면
지느러미를 펄떡이는 물고기들
나는 잊었던 기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아요
■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청벚 보살 / 이수진
개심사 청벚나무 가지에 연둣빛 꽃이 눈을 떴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왔던 것일까
가지 하나 길게 내밀어 법당에 닿을 듯하다
꽃이 맑다
매화나무는 목탁 두드릴 때마다
꽃잎으로 법구를 읊고,
청매화는 동안거 끝에 심욕의 수피를 찢어
꽃망울 터트린다
저토록 신심(信心)을 다져왔기에
봄이 일주문에 들어설 수 있다
가지마다 허공으로 낸 구도의 길
제각각 가부좌 틀고 참선의 꽃들을 왼다
전각에서 내리치는 죽비소리
제 몸 쳐대며 가람으로 흩어지는 풍경소리
합장하듯 꽃잎들 맞이하고 있다
법당은 꽃들의 백팔배로 난분분하다
부처가 내민 손바닥에
청벚꽃잎 한 장 합장하듯 내려앉는다
이제 어렴풋이 나만의 시 짓게 됐다
■ 동양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외갓집 / 윤연옥
낡은 일기장에는
작은 파편들이 널려있고
가을이 데려 온 바람
놀다간 자리서 햇볕 냄새가 난다
툇마루서 뒹굴던 고슬한 추억
손바닥으로 만지고 쓸어보면
햇살처럼 보드랍고 따뜻해
속절없이 내려놓는 한조각 그리움
찬바람 불어 시린 속
일상 허기 달래면
동강 난 필름
마주보고 웃는다
장독대 항아리 속 웅크리고 있던 홍시
외할머니 손에서 단내를 풍기고
까치밥 쪼던 까치
한낮 풍경이 되다
꼬물대며 하냥 기어가는
사랑의 자취들
우화의 날갯짓 소리에
불빛 찬란하게 몸 바꾼 뜨락
가뭇없이 떠나가는
파편 한 조각 집어 들고
무심의 공덕이라
해조음에 하늘만 본다
■ 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결빙 / 윤계순
큰 강에 얼음이 얼 때
얼음은 일사불란하게 얼지 않는다
얼었다가 다시 무수한 조각으로 부서지길
몇 차례 반복한 다음에야
평평하고 두껍게 언다
단단한 것들은 경전(經典)의 고리처럼
파륵 파륵 넘겨지다가 다시 한 권으로 뭉친다
티베트 승려들의 논쟁엔 손뼉을 치는 주장이 있어
셀 수 없는 의견으로 나눠지고
다시 이어 붙는 합의
그런 일들의 끝에 큰 강은
하나의 얼음판으로 얼어붙는다
얇은 추위에 몇 겹의 추위가 달라붙고
쩡쩡 얼음 조각들의 합의가 밤을 울린 다음에야
흐름이 멈춰 서듯 얼어붙는다
그런 물도 추우면 저희끼리
쩡쩡 뭉치지만
분분한 의견의 투합이 겨울을 건너와
지탱했던 제 몸을 다시 풀면 봄이다
그러니 녹는 순서는 그저 얼음 밑
흐르는 속도에 맡겨두면 되는 일이다
햇살이 조각나는 일을 두고
나뭇가지들은 저의 일직(日直)인양 분분하지만
지상의 결빙이 풀려야 비로소
햇볕도 해동한다
▲충남 청양군 장평 출생
▲대전대학교 대학원
▲2022년 고산문학대상 신인상 수상
■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구 일째 / 황정희
구 일째 울진 산불이 타고 있다
한 할며니가 우사 문을 열고
다 타 죽는다 퍼뜩 도망가래이 퍼뜩 내빼거라 꼭 살거라
필사적으로 소들을 우사 밖으로 내몰고 있다
불길이 내려오는 화면을 바라보며
밀쳐놓은 와이셔츠를 당겨 다린다
발등에 내려앉은 석양처럼 당신은 다가오려 했고
나는 내 발등을 찍어 당신이 집나간 지도
구 일째
주름진 당신의 얼굴이 떠올라 매매 반듯하게 기다리고 있다
똑 똑
똑똑 똑똑
똑똑똑똑똑똑
빗소리다
쏟아지는 빗소리가 진화를 몰고 와
우산을 쓰고 돌아온 당신 속으로 질주하는 나는 맨발
날 밝아
체육관으로 피했던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다 타버린 우사 앞에서 할머니를 기다리는 소들의 모습이 비쳤다
▲1962년 경북 영주 출생
▲경희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제1회 경북여성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