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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역사이야기] 스크랩 여순사건의 배경과 전개과정(안종철)
대백제주인장 추천 0 조회 202 16.08.27 10: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여순사건의 배경과 전개과정

                                                     

안종철(광주시 5.18전문위원)

  목   차      


1장  서 론


2장  여순사건의 발생 배경

 1. 직접적 배경

   1) 여수 14연대의 창설과 구성

   2) 군과 경찰의 갈등

   3) 남노당의 침투와 숙군 작업

 2. 간접적 배경

   1) 전남동부지방의 정치상황

   2) 여수, 순천지방의 정치 사회적 상황과 여순사건


3장  여순사건의 전개과정

 1. 14연대의 반란

   1) 여순사건의 발발

   2) 순천과 인근지역으로의 확산

 2. 진압군의 출동과 진압과정

   1) 토벌사령부의 설치와 순천지역의 탈환작전

   2) 여수와 인근지역의 탈환작전

 3. 반란치하의 여순지방

   1) 반란군의 초기 활동

   2) 반란군의 인민행정 실시

 

4장 여순사건의 결과

 1. 여순사건의 영향과 피해

   1) 반란군 및 동조세력 처벌

   2) 여순사건의 피해상황

 2. 여순사건의 정치적 함의

   1) 우익세력의 조직화

   2) 여순사건이후의 정세

   3) 여순사건의 진상규명을 제언



1장 서  론


 1998년 올해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지 50주년이 된 해이다. 그 동안 수십년간의 군사정부에서 문민정부를 거쳐 국민의 정부로 발전되면서 대한민국정부의 정통성이 상당히 많이 확립되기 시작하였음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도 남북으로 분단된 국가적 상황뿐만 아니라 국내정치적 상황에서는 동서로 나뉜 정치가 아직도 안정적인 정치지형을 만들어내기에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것은 정치불안을 야기하는 중요요소로 작용되고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국가권력의 정통성 문제로 제기되기도 한다. 국가권력의 정통성은 국민들의 지지를 어떻게 확보하고 얼마나 많이 확보하느냐 하는 문제가 척도로 작용한다. 국가권력이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국가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가권력은 폭력성을 나타낼 수 밖에 없어진다. 그 폭력성은 곧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심대한 해를 끼쳐 인권침해로 나타나게 되고 국가와 사회의 비인간화로 귀결된다.   

  한국현대의 정치는 이러한 국가정통성의 문제로 끊임없는 갈등과 대결의 연속이었다. 해방 3년의 미군정시대를 거치고 제 1공화국이 수립된 후 이에 대한 국가 정통성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그것은 해방이전 모든 민족운동이 독립된  통일 조국을 건설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였으나 결국은 해방이후 분단국가로 귀결됨에 따라 국민의 좌절은 이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1948년 제 1공화국이 수립되자 제 1공화국의 정통성확보가 확립되지 못함으로서 이에 대한 저항과 체제위기로 인해 여순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의 발발배경과 원인을 엄밀하게 규명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여순사건이 직접적으로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의 반란으로 촉발되었지만 그것이 여수와 순천 그리고 인근 지방으로 신속하게 확산되었던 상황을 고려해본다면 당시 여순지역 일반주민들의 의식상태와 계급적 상황까지 분명하게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본 글은 전문적인 학술논문이 아니므로 여순사건의 발발배경을 직접적인 배경과 간접적인 배경으로 나누어 통사적 측면에서 평이하게 서술하기로 한다. 사실 이렇게 직접적, 간접적 배경으로 나누는 것은 많은 위험부담을 갖고 있으나  설명을 쉽게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방법을 채택할 수밖에 없다. 또 당시를 기록하고 있는 여러자료들중 서로 상반되게 기록하고 있는 부분들은 엄밀한 검토를 통해 가장 객관성이 크다고 입증되고 있는 부분을 취하기로 한다.

  여순사건의 발발원인을 기존 연구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여순사건의 명칭을 규정하는 개념도 이러한 입장에 따라 달라지게 됨은 물론이다.

 첫째, 돌발적인 사건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것은 제주도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14연대의 일부 병력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자 좌익세력들이 반란에 대한 준비를 완벽하게 갖추기도 전에 돌발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남로당 중앙당에서도 미리 계획을 세웠다는 증거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추후에 이를 수습하는 상황이었고 남로당 전남도당에서는 이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는, 14연대의 독자적인 결정으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는 주로 미군사고문단의 입장이다.

 둘째, 압력분산설이다. 당시 제주도 유격대에 가해지고 있던 정부 당국의 압력을 분산시켜 제주도의 혁명을 성공시키고 이와 더불어 본토에 제 2전선을 형성함으로써 전국적인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좌익세력들이 계획적으로 발발시켰다는 관점이다.

 셋째, 미국의 결의 실험설이다. 이 것은 정치적인 요인에 더 많은 비중을 두면서 당시 반란을 남노당에서 세웠던 계획의 일환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미국의 개입정도가 어느 정도일 것인가를 시험해 보는 동시에 새롭게 등장한 대한민국정부의 정통성을 기초부터 흔들어 놓겠다는 일련의 봉기로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주장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당시의 상황을 면밀하게 검토해 보기로 하자.


2장 여순사건의 발생배경


1. 직접적 배경

1) 여수 14연대의 창설과 구성

 1945년 해방으로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남한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점령기의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한국인에게 권력을 이양하기 위한 일련의 준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미군의 철수후를 대비한 한국군 창설이 서둘러 시작되었으며 전국 각지역에서는 美軍事顧問官이 지휘하는 가운데 한국군의 각 연대가 창설되었다.

 미군정청은 해방직후 우후죽순처럼 분출하였던 수십개의 사설군사단체와 좌익 군사조직들에게 군정법령 28호이었던 사설군사단체 해산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1946년 1월 12일 국군준비대 등의 사설군사단체를 해산하고 국방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를 창설하였다. 국방경비대는 군정법령 제 42호에 따라 태능에 있는 일제때의 육군지원병훈련소 자리에 총사령부를 두고 각 지방에 향토연대를 창설하였다. 그리하여 국군준비대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일반 병사들은 국군준비대의 해체로 인하여 상당수가 국방경비에 가입하게 되었다.

 국방경비대는 당초 미군정청이 경찰의 예비 병력임을 표방하면서 창설하였기 때문에 경찰예비대 또는 향토경비대라고 불리웠다. 따라서 경찰의 하부조직 같기도 하고 군대 같기도 한 애매모호한 성격 때문에 일반인들의 기피 현상도 있었고 군대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충원에 어려움이 많아 1개 연대를 편성하는데 몇 개월씩이나 걸리기도 하였다. 그래서 경비대의 충원은 거의 가두 모병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또 당시에는 정치적 상황이 좌우의 구별이 확실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지원자의 경력이나 정치적 성향을 따질만한 여유가 없었으므로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던 좌익활동가, 일반 우범자, 먹고 살기 어려운 실업자들이 손쉽게 가입할 수 있었다.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던 자들은 경찰의 체포를 피하기 위한 보호막으로 경비대를 이용할 수 있었고 실업자들은 당시의 생계유지가 극도로 어려운 상태에서 배고품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생활수단으로 국방경비대를 이용하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국방경비대원들에게 애국심이라든지 민족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광주에서는 46년 2월 15일 국방경비대 제 4연대가, 국군준비대의 임시 병영이었던 광산군 극락면 쌍촌리의 일본군 해군 豫科練의 병사에 창설된 A중대의 모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46년 12월 말까지 3개 대대로 편성이 완료되었다. 초대 창설지휘관은 金洪俊부위(만군중위,경북상주출신), 金英煥 참위(학병출신 일군소위), 趙岩 참위(학병출신 함북경성), 최홍희 참위(함북길주 출신), 김현수 참위 등이었다. 미군정청의 루빈대위가 고문으로, 마그넬 중위가 경리책임자로 일했다. A중대에 입대한 대원 가운데 김점곤(학병출신,경비사관 제 1기), 임충식(만군준위,경비사관 제 1기), 전부일, 김재명, 신동금, 김종관, 김련, 한진영(경비사관 제 2기) 등이 있었고, 그 외에도 징병으로 일본군에 갔다온 귀환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4월경에는 B중대가 편성되어 최홍희참위가 중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5월에는 C중대가 창설되어 오규범참위(군사영어학교,만군출신)가 중대장으로 임명되었고, 8월경에는 D중대가 창설되어 백인엽 참위가 임명되었다.

 8월경의 4연대 편제는  A중대장 김동빈, B중대장 이영규, C중대장 오규범, D중대장 백인엽 참위였다. 이로써 4연대는 우선 1개 대대의 지휘체계로 출발하였고 당시 4연대 병사는 창설 초기에는 구 일본군 병사를 그대로 사용하는 한편 구 병사 옆에 6개월간의 공사를 진행한 끝에 새로운 병사를 지어서 사용하였다.

  정일권 정위는 6월말경  연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실제 발령날짜는 5월 25일이었으나 부임할 당시의 사소한 사건으로 적십자병원에 3주간 정도 입원하였다가 제 4연대로 보직을 받았기 때문에 6월말경이 된 것이다.

 당시 4연대 내에는 이질적인 하사관들이 섞여 있었고, 또 일제때의 경력을 앞세우는 고참 하사관들이 많이 있어서 장교들에 대한 태도가 불량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하극상과 같은 사건들이 빈발하고 있었다. 또한 좌익계 병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무반의 안팎에는 공산주의를 찬동하는 삐라들이 널려있기가 다반사였다. 이들은 동조자를 포섭하기 위해 비밀리에 회합하는 등의 행위들을 많이 보였지만 당시의 사정으로는 이들을 제어할 수 있는 법적 근거도 없었고 상층부의 책임장교들은 관심도 두지 않은 상태였다. 이 모든 것이 당시에는 좌익활동이 공공연히 진행되기도 하고, 설립될 국가의 성격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4연대의 창설요원들은 각 경찰서와 군청의 협조를 받아 모병활동에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국민학교 교정 등에 청년들을 모이게 한 다음  입대연설을 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는데, 이들은 진도, 완도까지 순회하는 모병작업을 벌였지만 목표는 달성할 수 없었고 80%정도만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이에는 경찰의 예비대라는 인식이 모병을 어렵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 때 270여명이 선발되었는데 여기에는 해방전의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장교 또는 하사관 출신과 중학교 이상의 학력자를 우대해서 선발된 것이다. 선발과정은 신체검사와 구두시험이 전부였고 그 중 신체검사는 도립병원(현 전남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최상채 박사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훈련은 초기에는 일본군식으로 진행하다가 얼마 후에는 미군식으로 개편되어 진행되었는데 훈련이 엄하여 이를 견디지 못한 상당수의 훈련병들이 도주하는 바람에 1백여명이 줄어들게 되었다.

 정일권 소령이 1947년 1월에 경비사관학교의 교장으로 전출되자 행정관인 조암대위가 대대장이 되었다. 이어서 1946년 12월 14일 경비사관 2기로 임관한 이종국, 조운학, 오익경, 정인규, 임익순, 이관식, 최석락, 김희준, 오익경, 정지웅, 박율선, 김윤원, 계창율, 노영목 등이 충원됨으로서 제 2대대의 편성에 착수하였다.

  오일균 대위는 2대대장으로 1947년 9월부터 12월 초까지 재직하면서 경비사관학교 구대장 시절에 의기투합했던 3기생 홍순석, 김지회 소위와 가깝게 지냈다. 제 4연대가 3개 대대의 완전 편성을 마친 것은 1948년 1월 10일이었다. 4연대는 48년 5월 1일에 창설된 제 5여단에 예속되었고 5월 4일 여수에 제 14연대가 창설되자 제 1대대장 이영순 소령이 연대장으로 보임되면서 안영길 대위 이하 1개 대대병력이 제 14연대로 전출되었다.

 1947년 5월 21일 제 4대 연대장으로 부임한 이한림 소령은 48년 8월까지 재직하였고 그 뒤를 이어 이성가중령이 연대장에 부임하였다. 제 4연대는 여순사건이후 11월 20일 제 20연대로 개편된다.

 미군정청이 광주에 4연대 그리고 여수에 14연대를 창설한 것은 주한미군의 철수에 대비하고 한국의 반공국가로서의 안정적인 기반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 14연대를 창설할 때도  처음에는 4연대에서 차출된 기간요원중에서 하사관 출신 50여명이 근간이 되었다. 여순사건의 주동이 되는 지창수도 그 중의 한명이었고 그 역시  광주의 4연대 모병 때 입대한 것이었다. 14연대를 창설할 때 광주의 4연대 대원중에서 평소에 까다로운 행동을 하거나 사상이 의심스러운 구성원들이 대부분 14연대의 창설요원이 되었다. 우선 14연대의 신설 대대장으로 보내진 안영길 대위(일본군 해군 主計 중위)부터가 후에 숙군의 대상이 되는 좌경혐의자였고 상당수의 하사관들도 좌경활동을 하고 있다고 판단되는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14연대는 광주의 4연대와는 다르게 처음에는 제 4여단에 배속되었으나 6월 1일자로 다시 5여단으로 예속이 변경되었다.

 14연대의 창설요원으로 뽑힌 800여명의 병사들은 차출 케이스로 뽑혔다는 사실만으로도 동료의식을 느끼고 있었으며 사상적으로도 동질성을 가질 수 있었다. 14연대의 병영은 여수읍에서 4Km쯤 떨어진 여수반도 남단에 위치한 신월리에 있는 구 일본군 항공기지(지금의 한국화약자리)에 자리하였다. 일제하에서 일본군이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농민들의 마을을 강제로 징발하여 사용하고 있던 곳이 미군의 재점령으로 14연대의 부대 소재지가 된 것이다. 광주로 부터 열차로 800여명의 기간요원이 도착하자 신병모집이 시작되었다. 약 2000여명의 신병을 모집하여 3개 대대를 편성할 목적이었다. 제헌의원선거가 실시된 직후였기 때문에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운동에 가담하였던 청년들이 경찰의 추적을 피해 14연대의 모병에 응해옴으로써 상당히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됐던 군대 편성이 의외로 신속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초대 연대장 이영순 소령은 한달 남짓 근무하다가 6월 18일자로 김익렬 소령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김익렬 소령도 얼마후 경질되어  7월 15일 오동기 소령이 부임하였다. 오동기 소령은 얼마후 혁명의용군사건으로 서울로 소환되어 구속당하는 운명이 되는데 실제로 그는 광복군출신으로 군인정신에 투철한 장교였다. 그는 평소에 군장교의 부패 타락을 개탄하면서 군대의 개혁을 외쳤었다. 여수의 14연대의 연대장으로 부임하자마자 당시 송호성 육군 총사령관이 독점하고 있던 군대 부식의 납품을 여수 시내 상인들의 공개입찰로 바꿔서 사병 부식의 향상을 도모하는 조치를 취하고, 장교들에 편중되어 있던 부식비 배정을 모든 장병들이 균등하게 혜택이 되도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그동안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던 기존 상인들과 장교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고 이것이 결국은 혁명의용군사건이라는 조작된 사건에 연루되어 서울로 소환되는 운명이 된 것이다. 오동기 소령은 9월 28일 송호성장군의 소환을 받고 상경했다가 10월 1일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결국 오동기 소령은 이렇게 구속되어 10년형을 언도 받게 되고 대신 나이 많은 일본군 출신 박승훈 중령(일본 육사 제 26기)이 10월 7일자로 14연대장에 부임해왔다.

 이상과 같이 14연대는 출발부터가 좌익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되었으며 그들간의 연대의식은 대단히 강했다.


2) 군과 경찰의 갈등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방경비대는 경찰예비대라는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경찰도 군대도 아닌 애매한 성격의 것이었다. 경찰은 국방경비대를 자신들의 예하기구로 보고 멸시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것은 경찰들은 일정교육을 받은 당당한 치안관리인데 반하여 경비대는 실업자와 우범자가 모인 잡동사니 집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방경비대 병사들은 상당수가 한글도 깨치지 못한 문맹이었고 농촌의 머슴이나 관공서의 사환 등 경찰로서는 하찮게 볼 수 있는 기층민들이 상당수 있었다. 또한 국방경비대의 복장이 경찰의 복장과 비슷했고 장비에서도 경찰장비가 우수했기 때문에 우월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처럼 경찰이 국방경비대를 멸시하는 태도를 갖고 있었음에 반해 국방경비대원들은 경찰에 대해 역시 다른 이유로 멸시하고 있었다. 국방경비대원들은 대부분의 경찰들이 일제하의 친일경찰 출신들이고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위해 민족과 국가를 팔아먹은 매국노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또한 ‘군은  경찰의 우위에 있다’는 군국주의적 사고가 그대로 답습되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보다는 우위에 있다는 우월감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객관적 상황과  더불어 국방경비대내에는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는 범법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체포하려는 경찰과 국방경비대간의 마찰이 있을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여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갈등은 사소한 문제로 폭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예로는 영암, 구례, 순천 등지에서의 국방경비대와 경찰간의 무력 충돌들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결국 군사고문단과 상급기관의 중재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었다.

 영암의 군경충돌은 1947년 6월 1일 발생했다. 휴가 나온 국방경비대의 하사관 한명과 신북지서의 지서원들 사이에  사소한 시비가 벌어졌는데 그것은 지서 경찰들이 국방경비대원들이 쓰고 있던 모표가 일본의 사꾸라와 비슷하다는 야유를 보내자 하사와 경찰들간에는 싸움이 벌어졌고 영암경찰에서 출동한 경찰들은 국방경비대의 하사를 입건해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광주의 4연대 경비대원들은 구속된 하사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9명이 영암으로 출동하여 경찰간부들에게 하사의 석방을 요구하자 도경찰청의 지시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말에 광주로 귀대하는 도중에 신북지서 앞에서 20 여명의 경찰관들에 의해 출동한 경비대원들이 구타를 당하게 되고 인솔자인 2명의 장교가 시멘트바닥에 무릎을 꿇은 상황으로까지 급진전되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4연대의 병사들은 6월 2일 저녘 하사관들을 중심으로 8대의 차량에 270명의 병사들을 동원하여 영암경찰서로 출동하였다. 그들의 당초 목표는  영암경찰서를 포위하여 위협함으로서 구속된 하사관을 석방시키고 구타를 주동한 경찰들을 연행하여 혼내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암경찰서를 포위하여 위협하는 도중 서로 총격전이 벌어져 6월 3일 새벽 3시부터 7시 30분까지 무려 4시간 반이나 상호간에 총격전이 계속되었다. 긴급히 출동한 4연대장과 영암군수, 영암경찰서장의 개입으로 중지되었지만 경비대의 하사 2명과 경찰 1명이 전사하고 수명이 부상당하는 결과로 끝나게 되었다.

 구례사건은 1948년 9월 24일 구례읍내의 한 이발관에서 술에 만취한 구례경찰서 수사계 김모 경사가 이발관 주인의 인사가 불손하는 이유로 그를 마구 구타하자, 휴가중 이발관에서 휴식중이던 14연대 소속 장병이 이를 중재하였다. 이에 화가난 김경사는 전서원을 비상소집하여 구례읍내에서 휴가중이던 14연대 사병 9명을 모두 구금하여 구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14연대에서는 즉시 헌병들과 일부병력이 구례로 출동하여 경찰서장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동시에 구속중에 있던 사병들을 인수하는 사건이 있었다.

 함평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48년 7월 12일 국방경비대원 18명이 함평군 학교면 학교지서를 무장한채 습격하여 전화선을 절단하는 동시에 지서원을  철봉과 장총으로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무려 3시간 동안이나 난타하여 경찰서원 2명이 전치 2주의 중상을 입히는 사건이 있었다.

 전남지방에서의 이상과 같은 국방경비대와 경찰간의 갈등 양상은 전국적으로 빈발하고 있었다. 부산역 사건, 장택상 수도청장과 최홍희 소령의 충돌, 대전의 사건, 경북 영일군의 사건, 철도경찰과의 충돌사건, 서북청년단과의 살륙전 등이 전국 각지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3) 남노당의 침투와 숙군 작업

 해방직후 좌익세력은 자신의 武裝力을 갖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국군준비대를 창설하여 자신의 무장력을 갖고자 하였으나 미군정의 해산명령에 따라 자신의 군사조직을 상실하게 되자 미군에 의해 창설되는 국방경비대를 자신들의 이용가치로 생각하여 침투공작을 시작하였다. 국방경비대가 창설되면서 남노당 중앙당은 道黨, 郡黨을 통해 조직적으로 좌익인사들 특히 청년, 학생들을 국방경비대에 침투시키는 공작을 진행하고 있었다. 남노당은 군대침투공작을 위하여 중앙당에 특수부를 설치하고 장교책과 사병책을 두었고 그 하부에 육군책과 해군책을 두어 공작을 분담케 하였다.

 남노당의 군부에 대한 침투공작은 다음과 같은 몇개의 수단으로 진행되었다. 장교들에 대한 침투는 1) 실력으로 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임관되는 방법이었는데 육사 3,4기 중의 좌익장교들의 대부분은 사병중에서 소속부대장의 추천으로 충당되었다. 2) 추천으로 입교하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서 정부, 군, 정계의 유력인사를 이용하여 추천을 받게 했다. 3) 당 수뇌가 군내 당조직에게 추천하여 사관학교에 입교 침투시키는 방법이 있었다. 4) 사관학교 직원으로  있는 세포를 이용하거나 혹은 그들을 매수하는 입교 방법이 있었고, 5) 기성장교의 신원과 인적 배경을 조사하여 접근의 소지나 잠재성분을 내재시키고 있는 자를 포섭하는 방법,그리고 6) 기성장교들의 대인관계나 지연,혈연,인연,동기동창관계 등 한국의 토착적인 바탕을 이용하여 포섭공작을 확대시키는 방법 등이 있었다.

  사병들에 대한 침투공작수단은 1) 부락에서 당성이 강하고 성분이 좋은 분자를 적극적으로 추천하여 입대케 하는 방법, 2) 좌익계 활동에서 노출된 자들을 단위당 - 리, 면, 군, 도 - 를 거쳐 각부대의 조직책에게 추천하여 침투시키는 방법, 3) 경찰과 적대관계나 혹은 반감이 있는 자들을 입대시키는 방법, 4) 기성사병에 대하여 부대내에서 조직에 가담하고 있는 장교나 하사관으로 하여금 포섭케 하는 방법, 5) 조직에 직접 가입시키지는 않더라도 접근의 소지를 가지고 있는 사병들에 대하여 조직에 있는 지휘관이나 하사관 혹은 동료로 하여 인간적 관계의 형성으로 그들을 감화하여 동조케 하는 방법 등이 사용되었다. 또한 그들은 우익계 사병의 군대내 침입을 막기위하여 혹독한 훈련을 강요함으로서 계속 군에 머물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중에서 도망병이나 탈영자가 나올 경우 이의 보충을 좌익계로 충당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실질적으로 장교는 중앙당의 특수부에서 직접 공작 책임을 맡게 하고 사병은 도당의 군사부에서 공작을 위임받아 침투시키는 이원적인 방법이 이용되었다. 장교의 포섭이 주로 중앙당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장교의 임관과 배치가 국방경비대의 중앙사령부에서 관할하고 있었으며 장교들의 근무지도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었고 근무지의 이동도 자꾸 변경되었기 때문에 중앙당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반면에 사병들은 도단위로 모병되어 향토연대에서 수용하고 훈련시킬 뿐만아니라 연대간의 이동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지역당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도당 군사부는 각 시.군당 군사부에 연락하고 시.군당 군사부는 면.리의 조직에 연락하여 적합한 인물을 선출하여 그들의 명단을  시.군당을 거쳐 도당에 제공하였다. 도당 군사부에서는  이를 각 연대에 침투시켜 놓은 조직책에게 하달하여 입대케 함으로서 침투시키는 방법을 취했다.

  남노당의 국방경비대에 대한 침투는 경북지역과 전남지역에 집중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경북지역의 1946년 10월 사태와 기타 지방의 2.7 구국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지역이 공작을 가능하게 한 지역이었다.

 전남지방의 경우 광주의 4연대와 여수의 14연대 사병가운데 반수 이상은 남노당 전남도당에서 침투시키고 있었다. 이미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장교와 사병에 대한 침투가 각기 다른 방향에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조직내에서도 장교와 사병들은 자신들 외에는 누가 南勞黨員인지를 알 수가 없었고 이러한 점조직으로의 조직상황은 여순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반란을 일으킨 하사관과 사병들이 남노당에 연결되어 있던 다수의 장교들을 무차별적으로 사살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마는 현상이 되었다.

  미군정당국은 1948년 3월부터 남노당의 국방경비대에 침투공작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의 남노당은 좌우연합모색, 미군철수주장 등 정치선전공세를 주로하고 야산대, 선행대 등 실력투쟁은 그 보조수단으로 하고 있는 정도였다. 따라서 미군정은 숙군작업을 신중히 준비하고 있었다.

  14연대가 창설될 때도 기존 광주의 4연대내에 문제가 있는 병사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 가운데는 정보기관에 의해 모종의 의심을 받는 하사관들과 사병들이 다수 끼어 있었다. 또한 14연대 병력중에서 제주도에 파견할 1개 대대의 병력을 구성할 때도 14연대내의 구성 대원들 중에서는 문제가 많은 하사관과 사병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14연대의 하사관그룹 중에서 지창수, 정락현, 최철기, 김근배, 김정길 등이 대표적으로 남노당과 연결된 인사들이었으며 이들은 서로간에 신분을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승만정부에 반대적 성향을 갖고 있는 동질적 인사들이었다.

 장교그룹중에서는 김지회, 홍순석 등이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는 인사들이었고 그외 다수가 남노당 중앙당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이들은 하사관, 사병 그룹과 전혀 연결이 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14연대 반란이 일어났을 때 하사관과 사병들의 장교살상에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이다. 14연대내에 파견된 도당 조직원은 박태남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연대 인사계에 지시하여 대대, 중대, 소대로 조직원들을 배치하였기 때문에 연대 인사계에 대한 침투, 포섭공작이 가장 먼저 진행되었다.

 국방경비대내에서 좌익인사에 대한 사찰을 시작한 것은 태능에 있는 제 1연대에서 부터 시작되었다.당시 연대장인 이성가 소령은 부대내에 침투하고 있는 좌익인사를 색출하고자 경비사관 3기로 임관한 김창용소위(관동군 헌병출신)를 발탁하여 정보주임보좌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정보소대를 편성케하여 부대내의 사상사찰을 전담시켰다. 이 정보소대내에는 과거 경찰출신이나 헌병출신의 특기자들을 채용하는 등 활동가들을 모아 우선 연대내의 좌익인사들을 색출하는 일을 맡았다. 이 부대가 후에 특무대의 골간이 된다.

 김창용은 제 1연대의 선임대대장인 이병위소령을 추적하였다. 그는 정보소대원을 개성, 문산, 포천, 의정부, 인천, 수원 등지에 배치하고 거미줄을 쳤다. 그리하여 노재길, 정국환 등 부대내의 푸락치활동을 하고 있다는 단서를 잡은 8명을 검거하고 문산 다리밑에 숨겨둔 무기등을 압수하였다.

 그런데 배후인물인 이병위소령은 1947년 3월 18일자로 초대 군기대장, 지금의 헌병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병위소령이 5월 21일 청주의 제 7연대장으로 부임하자 정보대원들은 청주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청주에 부임해오는 이병위소령을 체포하였다. 그리하여 이병위 등 좌익계인사들은 미군정 재판에 회부되어 5년형을 받았고 1947년 10월 2일 파면되었으며 대원들은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47년 8월 15일 해방 2주년 기념식 행사에 제 1연대가 시가행진을 하게되었는데, 부대내의 푸락치들은 장병들이 낮에 행사에 참가하면 자연히 물을 마시게 되므로 사전에 연대우물에 독약을 타면 이들이 그 물을 수통에 넣어가지고 갈 것을 예상하고 독살할 음모를 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김창용은 최희섭일병 등을 극렬 좌익분자로 위장침투시켜 행사 3일전에 일당을 검거함으로서 독살계획을 미연에 방지하였다. 이와 같이 1연대내에서는 연대장의 신속한 조치로 좌익세력들을 숙청하고 있었으나 다른 부대에서는 정보과가 하등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김창용대위는 남노당 군사부 책임자 이재복의 비서겸 연락책임자인 김영식을 서울 삼청동에서 체포하였다. 그로부터 압수한 비밀문서 속에서 군내부에 침투한 남노당을 위시한 좌익계 500여명의 명단이 나왔다. 이 명단에는 좌익적 성향의 고급장교 대부분이 노출되고 있었다. 당시 육사 생도대장 오일균소령,교수부장 조병건소령, A중대장 김학림소령, 제 4여단장 대리 김종석중령, 제 15연대장 최남근중령, 오규범소령, 최상빈소령, 나학선소령 등 군사영어학교 출신을 위시하여 100여명이 조직상에 나타났다.

 육군사관학교 세포책인 오일균소령은 그들의 군내에 및 민간인 푸락치를 육사에 입교시키는 공작을 하였고 입교후에는 생도들을 포섭시키는 임무를 수행케하거나, 이를 조종하였다. 그는 1946년 9월부터 1년간 육사교관을 하면서 2기생 3기생에 대한 포섭공작에 큰 역할을 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3기생 가운데 약 60여명이 좌익으로 숙청된 숫자는 이를 증명하는 사실이다. 제 4여단장 대리 김종석 중령은 최기덕기자에게 반란음모의 정보를 제공하고 행방을 감추고 있었다.

 군대내의 좌익인사들을 체포하는데 결정적인 공을세운 김창용은 김영식의 체포와 좌익명단을 입수한 공로로 대위가 된지 2개월 10일만인 1948년 11월 5일 소령으로 특진하였다. 그는 이후 한국의 반공체제를 구축하는데 많은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4.3사건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제주도에서 제 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48년 6월 18일 문상길중위에게 피살당하자 연대내의 좌익인사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었고 그것의 여파는 여수 14연대에도 미치고 있었다. 연대장 오동기 소령은 여단 정보처로 부터 김지회중위가 요시찰 인물이라는 비밀 통보를 받고 당시 연대 작전주임보좌관이었던  김지회를 대전차포 중대장으로 임명하여 57mm대전차포의 교육을 위해서 여단에 파견하였다. 당시 14연대에는 대전차포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송호성 준장과 정일권참모부장에게 김지회를 구속하도록 건의하였다. 그러나 불충분한 증거로는 체포할 수 없다고 하자 부연대장 이희권소령과 정보주임 김래수 중위에게 증거를 보강하라는 지시를 하는 한편 헌병대장 이갑수 대위를 서울까지 출장을 보내 김지회의 구속을 호소하였으나 승인을 받지 못하였다.

  오동기 연대장의 김지회에 대한 이러한 조치를 내막적으로 알게된 김지회와 지창수 등의 좌익세력들은 자신들에 대한 감시가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고 숙청과 구속이 임박해 오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숙청은 더욱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2. 간접적 배경

1) 전남동부지방의 정치상황

 해방초기 전남의 대부분 지역은 46년 전반기부터 우익의 우세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미군의 진주로 인민위원회 조직이 해산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조선공산당이 불법화되면서 전남지역에서도 좌익세력이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전남의 동부지방은 해방초기부터 사회경제적인 조건 등의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우익세력에 비해 좌익세력의 힘이 약한 지역이었고 이러한 영향으로 좌익세력이 별다른 활동을 벌일수 없었기 때문에 미군에 의한 탄압 역시 미미한 정도였다. 따라서 동부지방에서는 좌우익간의 공존관계가  1948년 초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전남동부지방의 좌우익간의 갈등과 공존 관계는 계속되는 인플레, 강제적인 미곡수집 등의 누적으로 일반대중의 삶의 조건이 극도로 악화되고 동시에 분단의 기정사실화되기 시작한 1948년 봄부터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1948년 2월 6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저지당함으로써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거의 확실해지자 민전과 남노당은 2월 7일을 기해 유엔 한위반대 남조선선 총파업위원회의 명의로 전국적인 파업과 파괴, 시위, 맹휴 등을 선전 선동해나갔다.

 경인지역 일대를 비롯하여 경남북, 전남북,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인 규모로 파업, 파괴, 시위, 맹휴 지역이 확대되어 갔으며 이에따라 전국적인 교통과 통신망, 각 생산기관, 행정기능이 일시 마비되기도 하였다. 2.7구국투쟁시기에는 주로 파업, 파괴, 맹휴, 삐라살포, 시위 등이 주를 이루었으며 경남 일대와 수원에서는 경찰서 및 관공서 습격, 우익 테러로까지 발전하였다. 이 시기에 전남지방에서는 습격과 테러사건과 같은 큰 사건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이 기간동안 전남에서 발생한 확인 가능한 사건은 광주에서의 조선운송, 미창, 인쇄공장의 노동자 파업, 학생 3천명 맹휴, 삐라 52만장 살포 등의 사건, 목포에서 해운, 미창, 대동고무공장 파업, 여수에서  철도와 조선운송노동자 5천명 파업, 삐라 2만장 살포 등의 사건이다. 그외에는 장성탄광과 화순탄광의 노동자들의 파업과 목포의 기상관측소 일부직원이 파업을 한 정도이다.

 그러나  2월말에 들어서면서 전국적인 소요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2월 26일 유엔총회에서 선거가 가능한 지역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한 것을 전후해서 전국적으로 경찰서 및 면사무소 습격, 우익인사에 대한 테러가 속출했다. 25일 부터 27일 사이 전북에서만 34건의 경찰지서 습격사건이 발생했고 2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전남에서는 3.1절 국경일에 주한미사령관 하지 중장이 남한내에서의 총선거를 실시를 발표하는 것과 때를 맞추어서 폭력적인 소요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전남에서의  폭력사태는 3월 1일에서 8일 사이에 그리고 3월 13일에서 27일 사이에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남동부지역에서도 소요는 일어나고 있었다. 사건이 발생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군중들의 습격목표는 경찰지서,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 민주학생연맹 소속의 학생이었으며 그외 지방관리와 지방유지, 한민당원, 미곡창고에 대한 습격, 테러사건도 빈번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주목할 점은 한독당원이나 사무소에 대한 테러나 습격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황남준,전남지방정치와 여순사건,󰡔���해방전후사의 인식 3󰡕���,한길사,1987,439쪽) 이것은 한독당의 노선이 통일정부를 지향하는 입장이었고 김구 등이 남북협상운동에 나서고 있었기 때문에 단선과 단정을 반대하는 인사들로 부터 피해를 입지 않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군중들은 수백명에서 수천명 정도가 집결해서 유엔한위반대, 양군동시철수, 단선반대, 인공만세 등의 구호를 외치며 돌, 곤봉, 죽창, 도끼, 일본도, 그외 휘발유,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여 경찰지서를 습격하였으며 이때 총과 탄약이 탈취되는 사례도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 외에 구례에서는 3월 1일 지서 습격 2건, 테러가 3건 발생하여 대동청년단원이 4명 부상, 군중 측에서는  사망 12명, 중상 7명, 경상 2명의 사상자를 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3월 14일에는 산동면 예안리에서 50명의 군중이 10명의 경찰과 투석전을 벌여 경찰의 발포로 1명이 사망하였다.

 순천에서는 3.1절 기념식 행사를  마친 남로당원들이 주동이 되어 대대적인 데모가 벌어졌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순천중학을 비롯 각 남여 중학교의 민청학생들이 단독선거반대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나와 학련 학생들과 대치, 남노당에 선동된 농민, 노동자들은 삽, 곡괭이, 몽둥이 등을 들고 순천중의 학련 학생들을 포위했다. 사고 현장에 긴급출동한 경찰의 발포로 2명의 남노당원들을 사살함으로서 사태는 가까스로 수습되었다.

  5.10 제헌선거를 위한 유권자 및 입후보자 등록이 1948년 3월 30일부터 시작됨으로써 남노당을 중심으로한 단선단정반대투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2월과 3월에 걸쳐 전개한 이른바 구국투쟁은 주로 유엔한위 및 미군정에 단선불가를 주장하는 방어적 측면이 강조된 것이었으나 4월에 들어서는 선거를 강행하려는 미군정과 이승만 한민당의 우익세력에 정면으로 대항해서 실력으로 단독선거를 저지한다는 공격적 측면이 강조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노당은 이러한 전술적 전환 그리고 구국투쟁과정에서 생긴 조직력의 손실을 감안해서 정상적인 당조직과는 별도로 중앙당의 지시를 받는 선전선행대와 도당의 지시를 받는 유격대, 백골단, 인민청년군 등과 같은 특수조직을 4월 1일부터 편성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미군정의 경무부장 조병옥은 예상되는 남노당의 단독선거파괴공작을 효과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4월 중순 선거를 한달 가량 앞두고 향토방위를 견고히 하기 위해 외래의 불순분자 내지 모략선동의 여지를 봉쇄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각 경찰지서 혹은 동리 가로 단위로 경찰보조력으로써 향보단 설치를 지시했다.

 전남지방에서 남노당의 선거저지투쟁은 4월 5일 부터 시작해서 4월 29일 까지 3월에 비해 비교적 산발적으로 나타났다. 공격대상은 초기에는 선거등록 사무소 습격, 후기에는 우익 및 지방관리에 대한 테러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경찰지서 습격은 상대적으로 덜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었고 경찰서를 습격하는 경우 3월과 마찬가지로 총과 탄약을 탈취해갔다. 습격군중의 규모는 수십명에서 수백명 규모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같은 시기에 전남동부지방에서는 구례군에서 3건의 테러사건이 있었다. 4월 28일 구례군 토지면에서 숫자 미상의 군중이 우익인사를 타살했으며 동일 광의면에서는 숫자 미상의 군중이 대동청년단 단장과 선거사무원을 습격했으며 4월 29일에는 구례군에서 20명의 군중이 4명의 우익인사의 집을 습격하여 타살했다.

 남노당은 남북연석회의의 결정에 따라 남조선단선반대투쟁 전국위원회를 각 시군에 조직하고 선거저지공작을 2단계로 펼쳐나갔는데 선거실시전까지는 선거를  파탄시키는 투쟁을, 선거가 실시되면서부터는 무효화투쟁으로 전개해나갔다.

 본격적인 5.10선거 저지공작은 김구, 김규식 등 단선을 반대하는 우익, 중도계 정당 사회단체들이 남북연석회의에서 돌아온 직후 김구, 김규식 명의로 공동성명서를 발표한 5월 6일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남노당은 5월 7일을 전후해서 전국적인 파업, 파괴, 맹휴, 시위, 삐라 살포, 경찰서 습격, 투표소습격, 우익요인 및 청년단 테러 등을 통해 격렬한 선거저지투쟁을 선전 선동해나갔다.

 전남지방에서는 5월 초부터 5월 말까지 전화선 전선 전신수 절단, 입후보자 선거요원 우익인사 청년단원 향보단원에 대한 테러, 투표사무소 경찰지서 습격사건이 계속되었다. 전남도내에서는 2부 13군에서 발생했으며 수십명 규모의 군중은 카빈총, 일제식 소총, 공기총, 권총 등의 총기류까지 사용하여 선거사무소, 투표소, 경찰지서 등을 습격하였으며 선거사무소 및 투표소 습격, 우익인사에 대한 테러가 경찰서 습격보다 더 빈발하게 나타났다. 나주와 보성군에서는 조직적인 무장단체가 경찰지서, 투표소 등을 습격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산악지대에 본거지를 두고 훈련까지 받고 있던 이들 단체는 남노당이 4월 초에 조직한 선전선행대 혹은 백골단, 유격대 등이었던 것 같다. 이들 무장단체는 산악지대 혹은 경찰지서에서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5월 전남동부지방에서는 순천, 광양, 여수에서 습격사건이 발생하였다. 순천의 경우가 가장 빈번하게 나타났는데 5월 19일 새벽 1시경 상사면에서 숫자 미상의 군중이 대동청년단의 집을 습격하여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같은 시각 별량면에서는 마을 유지의 집이 습격당하여 유지가 살해당하고 그의 아내와 아들이 구타당하고 집이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다른 곳에서도 새벽 1시 40분경 10여명의 군중이 향보단원의 집을 습격하여 방화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광양의 경우 5월 9일 새벽 4시경 20명의 군중이 지서를 습격하여 경찰 2명을 부상시키고 2정의 카빈총과 1정의 일식 장총을 탈취 도주하였으며 군중측에서는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여수의 경우 5월 10일 돌산면 죽포리에서 수십명의 군중이 투표소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경찰이 출동하여 30명이 체포되었다.

 한편 전남동부지방에서는 구국투쟁과정의 구례, 순천을 포함한 4개군에서 5.10선거 저지투쟁이 발생하였다. 즉 1948년 3.1절을 계기로 구례의 경찰지서 및 우익습격사건, 순천의 시위군중과 우익학생과의 충돌사건을 계기로 전남동부지방의 군중들은 점차 급진화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5월 10일 제헌 선거를 전후로 해서 더욱 촉진되고 있다. 5월에 들어 3.1절에 격렬한 대규모 시위양상을 보인 순천은 우익테러로까지 발전하고 있었으며 1946년 가을항쟁과 1948년 구국투쟁과정에서 거의 아무런 군중의 폭력사건이 나타나지 않았던 광양과 여수에서는 경찰지서와 투표소 습격사건까지 발생하였다.

 나주에서는 5.10선거를 전후하여 살인 방화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민족청년단 나주군 단장 朴基緖를 살해한 것을 위시하여 삼도면 국민학교장 柳在文을 살해하였으며 5월 18일 봉황지서를 습격하여 소실함과 동시에 경관 4명, 민단원 1명, 지서장 부인 등 6명을 살해하였다.  나주경찰의 체포노력으로 다시면 죽산리 밭에 있는 아지트를 급습하여 무기 다수를 압수하는 한편 문편면 학동리에 거주하는 인민유격대 소속 소대장 奇德範(22)을 체포하였다.

 고흥에서 48년 3월 29일 새벽 3시에  安在貞, 高興南, 李某 등 3명이 대서면지서를 습격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들은 9월 3일 수도청 경찰청에 의해 체포되었다.


2) 여수, 순천지방의 정치 사회적 상황과 여순사건

 해방직후의 전국적 상황과 같이 일반 농민, 주민들의 생활상은 대단히 궁핍한 상황이었다. 해외에서 돌아온 귀환동포들의 급작스런 증가도 원인이었지만 미군정의 미곡 수집령으로 군정당국에 대한 원성이 높아가고 있었다.

 여수에서는 48년 7월 하순 부터 8월 상순 까지의 2기분 배급을 주지 않아서 8만 여수읍민의 원성이 높은 실정이었다. 식량영단 당국은 2기분 배급식량으로 백미 2,900포 잡곡 4,200포 등 합계 7,100포를 도정하여 분배하여야 하나 도정공장에서 이윤이 박하다 하여 도정을 하지 않아 여수 군민의 생계가 어려운 실정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식량영단이 가공을 의뢰한 공장에서는 쌀을 빼돌리고 대신 모래를 보충하는가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천가마니씩을 착복하는 사건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또한 비료값에도 미치지 못하는 싼 값으로 공출한 쌀을 양정당국의 부주의로 부패시키는 등의 실정을 농민들이 직접 목격함으로써 양식을 굶주리고 있는 상황이었던 여수시민들의 원성은 대단히 높은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행정당국의 실정과 더불어 48년 7월의 수해로 각 지방에 이재민들이 무더기로 발생하여 많은 재산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에 순천인근의 주민들은  동정을 요구하고자 救濟會를 조직하고 구제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순천에서도 아래와 같이 금품을 기탁하여 왔는데  일반군민의 따듯한 동정이 있기를 당국에서는 요망하고 있었다.

 대한민족청년단 순천읍단부에서 4240원, 순천전매서직원들이 1000원, 순천상공회에서 5000원을 기탁할 정도로 당시의 수해의 피해는 대단히 컸다. 이러한 수해의 피해로 여수에서는 1948년 7월 7일 벼 707가마가 폭풍우로 인하여 손상당함으로써 여수읍민들의 식량사정이 대단히 좋지 않은 실정이었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전남동부지방은 1948년초까지 도내 다른 지방에 비해 좌익과 우익이 어느정도 공존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지역이었다. 따라서 5.10선거 저지투쟁 과정에서 이 지방에서는 군중들의 습격과 테러사건의 빈도가 다른 지방보다 높지는 않았다. 따라서 해방이후 인민위원회와 그에 연계된 조직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고 계속 온존할 수 있었던 전남동부지방에서는 다른 지방에 비해 1948년 중반기의 시점에서도 온건좌익세력 혹은 그 동조세력이 적지 않게 존재하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 이러한 측면은 여순사건 직전 여수와 순천은 빨갱이의 소굴이었다는 기록을 설명해줄 수 있는 단서가 된다.

 1948년 전반기의 정치투쟁을 여순사건의 진원지인 여수에 국한시켜 볼때 민전과 남노당이 주도한 2.7 구국투쟁의 전국적인 총파업에서 철도 및 항만노조 5천명이 대규모로 참가하였을 뿐 폭력사건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후 남노당이 주도한 5.10선거 저지투쟁과정에서 5.10선거 당일 투표소 습격사건 1건이 기록되고 있을 뿐이며 그나마 군중동원의 정도나 폭력의 정도에 있어서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맹휴는 다른 지방에 비해 매우 조직적이고 광범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는데 5.10선거 직전에 전남에서 13개 학교가 맹휴에 참가할 정도로 학생들의 동향은 맹렬한 편이었는데, 이는 여순사건 폭발시 학생들이 선동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1948년 전반기의 정치투쟁과정에서 여수지방은 전남도내 다른 지방에 비해 온건 좌익  및 동조세력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남노당의 영향력이 미약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여수지방의 온건좌익 및 그 동조세력은 5.10선거 후 남노당의 이른바 지하선거, 9월 이후 본격화되기 시작한 이른바 인공기 게양투쟁과 양군철수 주장을 통해 어느 정도 급진화되었던 것 같다.

 한편 5.10선거 이후에도 6월과 7월에 걸쳐 군중들 혹은 무장단체들의 경찰서 습벽, 우익테러가 계속 나타나고 있었는데  이러한 사건들이 빈발하던 지역에서는 5월 22일 향보단이 공식적으로 해체명령을 받은 이후에도 평화유지단, 의용단 등으로 계속 존속했는데 여수에서는 이러한 경찰보조력 혹은 민간통제조직이 존속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점은 여순사건 발발시 여수에서 군중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할 수 있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다.

 48년 2월 24일  여수읍내 군청 및 학교 및 2층 건물국기게양대에 인공기가 게양되었으며 전신주 등에도 작은 인공기가 부착되고 있었으며 벌교와 인근의 30여곳에서도 인공기 불온삐라가 살포되고 있었다. 역시 10월 2일 오후 2시 동순천역 전구감시초소 위에  게양대까지 설치하여 인공기를 게양할 정도로 좌익세력들의 활동은 대담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경찰서에 대한 습격사건도 발생하고 있었다. 순천 주암지서에서는 48년 10월 1일 주암면 오산리 부락에 폭도가 잠복하여 지서 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어 본서 형사 8명을 동원하여 주암지서원 4명과 합류하여 이날 오전 6시쯤 오산리 부락을 포위, 수색하여  잠복중인 범인 趙東燮, 趙采燮, 趙龍勳 3명을 체포하여 그 부락 입구에 崔學奎 순경을 시켜 감시중 세 범인이 반항하여 최순경의 카빈총과 탄환 15발을 탈취하여 도주할 즈음 순천경찰서 남순경이 이를 발견하고 즉시 발포하여 조용훈은 즉사하고 조채섭은 중상을 입고 조동섭은  카빈총과 탄환을 가지고 도주하였는데  2시간만에 총은 회수되고 범인은 체포하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단정단선반대투쟁이 절정을 이루었던 데다가 춘궁기까지 겹쳤던 1948년 5월초에 광주의 4연대 1개 대대를  기간으로 하는 14연대가 여수에 창설되었다는 점이다.



3장  여순사건의 전개


 1. 14연대의 반란


 1) 여순사건의 발발

 이미 살펴보았듯이 1948년 전반기의 순천 여수지방은 전남도내 다른지방에 비해 온건좌익 및 그 동조세력이 광범하게 존재하고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남노당의 영향력이 미약한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1948년 5월 초에 광주의 4연대 1개 대대를 근간으로 하여 여수에 14연대가 창설되었는데, 이것이 여순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당시 전국 각 지역에서 벌어졌던 군과 경찰의 갈등으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열세에 놓여있던 군대 내에는 경찰에 반발하고 있던 사병들과 지창수를 비롯한 김지회,홍순석 등 좌익계의 하사관과 장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던 데다가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었던 좌익 동조자들과 일반 범죄자들까지도 경찰의 추적을 피해 쉽게 입대가 가능하였기 때문에 경찰에 대한 적대 감정이 높을 수 있었다.

 이러한 14연대의 좌익세력들은 10월 들어 동요하고 있었다. 제주 4.3 사건 당시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11연대장 박진경중령의 암살을 계기로 미군정은 숙군작업을 시작하여 정부수립이후에도 계속 진행해오고 있었으며, 이는 여순사건 직전 14연대에도 파급되어 이미 전 14연대장이었던 오동기 소령도 이른바 혁명의용군 사건으로 구속되어 있었다. 숙군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를 알게된 김지회,지창수, 홍순석 등의 좌익세력들은 대단히 불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4연대내의 하사관과 사병들은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마다 모임을 갖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있었지만 별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었다. 10월에 접어들면서 이들의 모임은 더욱 빈번해지면서 그대로 숙군의 대상으로 당하기 보다는 집단 탈영 등을 통해 목숨을 보존해야 한다는 등의 의견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집단행동을 할때 여기에 동조할 수 있는 동조자가 얼마나 될 것인지가 불안한 요인이었다. 또 하나의 큰 불안 요인은 집단행동을 할 때 타지역의 군인들이 얼마나 가담해줄 것인지도 알 수 없는 것이 었다. 아직은 입증되지 않았지만 좌익계열 인사들의 집단행동에 대해 남노당 전남도당에서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0월 15일 14연대장 박승훈 중령에게 육군총사령부로부터 제주도에 파견할 1개 대대를 조속히 편성하여 대기하라는 작전명령이 내려왔다.

연대참모부는 즉시 작업을 개시하여 이튿날까지 1개대대의 편성을 마쳤다.  14연대에는 미군으로 부터 신식무기와 풍부한 탄약 폭탄이 지급되어 있었으며 무기고에는 반납해야할 3000여정의 구식무기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제주도로 파견할  1개 대대를 편성하는 과정에서 14연대내에서 문제성을 갖고 있는 다수의 병사들이 주로 차출되었으며 숙군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병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지창수와 장락현은 포함되지 않았었다. 이러한 편성작업은 극비리에 진행되었으나 연대본부의 인사담당 선임하사관이었던 지창수는 이러한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었으며 이것은 곧바로 좌익성향의 하사관과 병사들에게 알려졌다.

  지창수는 곧바로 10월 16일 밤 긴급히 남노당과 연결되어 있거나 이승만정권에 불만을 품고 있던 하사관 그룹을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들의 논의에서 제시된 방법은 대체로 3가지로 정리되었다. 첫째, 일단 제주도까지 간다음 제주도의 반란군과 합류하는 것,둘째,출동을 거부하고 연대내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것, 세째, 제주도로의 운송도중 해상에서 선상반란을 일으켜 북으로 향하는 것 등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제주에서 반란에 합류하는 것은 제주도가 좁은 섬이라는 불리한 점도 있지만 다른 부대로의 확산도 힘들뿐만 아니라 자멸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도 제시되었고, 연대내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남노당 중앙당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것,선상반란은 성공가능성이 크지만 단지 자신들의 도피 이상의 의미를 찾기가 힘들다는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논의로 밤새도록 토론을 벌렸지만 결론이 나지 않자 상당수의 참가자들이 선상반란을 찬성함에 따라 대강은 결론이 난 셈이었다.

 육군총사령부의 작전은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제주도 출동예정일이 19일이라는 것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지창수는 남노당 전남도당의 연락책임자와 연결을 하여 선상반란의 계획을 밝히고 도당의 긴급지시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남노당 전남도당은 당시 경찰의 탄압때문에 거의 와해된 상태에 있었고 결국은 도당에까지 보고되지 못함으로써 지창수 중심의 14연대 좌익세력들의 단독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1948년 10월 19일 아침 7시에 우체국을 통한 일반전보로 ?LST는 19일 20시 출항하라.제주 경비사령관 김상겸대령에게 통보필?이라는 내용의 전보가 14연대장 박승훈 중령에게 전달되었다. 지극히 비밀을 요하는 작전명령이 일반전보로 전달됨으로써 14연대장은 비밀이 세어나갔을 것을 염려하여 출항시간을 2시간을 늦추어 저녁 10시로 확정하였다.

 14연대장은 오전부터 출동부대의 군장검사를 시작하였다. 저녁무렵에야 군장검사를 마친 출동부대 병사들은 부대내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여수항구로의 이동을 대기하고 있었다. 한편 반란의 주축세력이 되는 하사관그룹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지창수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남노당 전남도당과 연결을 갖지 못한 지창수는 선상봉기를 포기하고 연대내의 반란으로 애초의 계획을 변경하고 10시 10분전 출항직전에 세발의 총성과 비상나팔을 신호로 해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음에 따라 14연대중의 1개 대대의  제주도 출동은 14연대내의 좌익계 사병들에게 동족상잔을 위한 제주로의 파병이라는 문제와 이러한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는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결과가 되고말았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대한민국 육군정보국에서 자문역을 맏고 있던 전직 미군사고문단 단원은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2, 메릴,침략인가 해방전쟁인가,과학과 사상,1988, 198쪽)

 “공산주의자들은 곤경에 빠졌다. 그들은 출동시간보다 앞서서 반란을 일으키던지 아니면 모든 것을 잃든지 양자택일을 해야만 했다. 일단 그들이 제주도로 가게 되면 연대병력이 재편될 것이고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의 세포조직이 붕괴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장차 있을 유격대 투쟁에 필요한 가능한 한 많은 양의 무기와 탄약을 탈취하여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이 결정을 내리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 상륙용 주정은 제주도로 파견할 제 1대대 병력을 승선시키고 있었다.”


 남노당 세력들이 반란을 모의하고 있는 시각에 장교들은 장교식당에서 출동장교들의 환송을 위한 환송파티가 열리고 있었고 이는 저녁 7시경 끝났다. 출동부대 장교들은 대대본부에서 승선시간을 기다리며 쉬고 있었으며 연대장과 부연대장 등은 부두의 승선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여수항으로 나가 있는 상태였다.

 한편 지창수를 중심으로 한 반란주도 하사관그룹들은 지창수의 인사계사무실에 모여 최종적으로 반란논의를 하고 있었고, 여기서 지창수는 이미 계획하여둔 상황을 알려주었다. 중심적 하사관들에게 각자가 해야 할 일들을 주지시키고 자신의 위치로 가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준비과정에서 중심적인 인물은 지창수였고 김지회나 홍순석의 활동은 전혀 부각되지 않았다. 이러한 발발과정중, 김지회 등의 남노당 장교그룹은 전혀 반란에 대한 모의와 준비가 없었다는 주장이(이태,여순병란 상하,청산,1994) 있음에 반해 김계유씨 등은 장교그룹과 하사관그룹간에는 역할 분담이 있었다는 주장이(김계유,1948년 여순봉기,󰡔���역사비평󰡕��� 15호.1991) 상반되고 있다. 역할분담론의 입장은 사건의 발발과 여수의 뒷수습은 지창수가 책임을 맡으며 순천과 전국으로의 확산은 장교그룹에서 담당하도록 함에 따라 사건이 순천으로 확산될 때도 지창수는 순천으로의 동원부대에 가담하지 않고 신월리의 14연대에 본부에 남아 여수상황을 책임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제주로 출동하는 제 1대대의 사병들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군장을 갖추기 시작하였고 여수에 잔류하는 부대는 출동부대의 뒷처리와 휴대할 도시락을 준비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윽고 10시 10분전쯤에 비상나팔 소리가 울리자 연병장에는 출동부대와 잔류부대의 전대원  2700여명의 장병들이 집결하였다. 출동부대는 출발이 한시간 앞당겨진 것으로 생각하고 연병장에 모여 총기의 지급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갑자기 지창수가 연단으로 뛰어 올라가 ?지금 경찰이 우리한테 쳐들어온다.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우리는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원한다. 지금 조선인민군이 남조선해방을 위해 38선을 넘어 남진 중에 있다. 우리는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으로서 행동한다?는 등의 선동을 하자 대부분의 사병들이 ?옳소?하면서 찬성을 하였고, 이를 반대한 3명의 하사관은 즉석에서 사살되었다. 이로써 14연대 반란은 발발하였다. 이미 탄약고는 지창수의 명령에 따라 좌익계 하사관들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고, 실탄은 반란군들에게 최대한으로 지급되어 휴대하게 함으로써 반란은 폭발되고 만 것이다.

 이렇게 반란군으로 변해버린 출동부대에 나머지 2개 대대도 합류하여 반란군은 2500명으로 불어났고, 영내에서 반란이 성공하자 이미 연락을 받고 14연대 부근에 잠복하고 있던 수산학교 학생  23명이 합세하여 이른바 인민군으로서의 편성을 끝마치고 자정무렵 여수시내로 진격해 들어갔다.

 23명의 수산학교 학생들은 신월리에서 하숙하고 있던 학생들이였는데 대부분 좌익계 조직이었던 민주학생동맹의 맹원들로서 가끔 14연대에 놀러와 사병들과 자주 어울렸었다. 그러던중 14연대의 반란이 터지자 이들은 여수시내의 지리에 밝은 이점을 이용하여 반란군들을 인도, 삽시간에 여수시내를 점령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반란에 성공한 지창수는 스스로 인민해방군의 연대장에 취임하고 하사관동조세력들을 대대장,중대장,소대장,분대장으로 임명하여 반란군의 조직을 정비하였다. 곧이어 책임지역을 나누어 영내에 숨어있는 장교들을 수색하여 군의관 등 이용가치가 있는 장교는 우선 창고에 감금하고 기타 다른 장교들은 사살했다. 이때 사살된 장교는 20여명이었다. 차량에 분승하여 여수시내로 향한 반란군은 가장 먼저 여수시의 입구에 있던 봉산파출소를 습격하여 경찰들을 학살한 후 20일 새벽 여수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시내에 진입한 후 이미 연락이 취해진 여수시내의 좌익단체 및 학생단체 600여명에게 무기를 지급하였다.

 반란군들의 첫째 표적은 경찰서였다. 여수시내로 진격한 반란군은 가장 먼저 새? 3시경 여수경찰서를 점령하였다. 19일 저녁 11시 30분경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정보를 입수한 고인수 여수경찰서장은 경찰관 200여명으로 방어작전을 폈지만 숫적인 면이나 장비면에서 반란군과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M1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반란군을 99식 소총이나 칼빈소총으로 무장한 경찰로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20일 새벽 3시 30분경에 이미 경찰서는 수십구의 경찰시체만을 남기고 반란군에 점령당하고 말았다. 반란군에 의해 유치장이 열리게 되자 50여명의 수감자들은 그대로 반란군과 합류하게 되었고 이들은 더욱 기세를 부리며 경찰관만 보면 무자비하게 잔인한 보복을 자행하였다. 14연대의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던 신식무기와 구식무기 3000여 정이 여수시내의 반란동조세력에게 지급되었다.

  새벽 5시경 여수시내에 밀어닥친 반란군은 좌익단체의 인도에 따라 군청, 시청, 관공서, 은행, 신문사 등 중요기관을 서둘러 점령하였다. 9시경 여수의 전시가지는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갔고  반란군들은 좌익 청년단체들의 선도로 피신한 경찰, 우익요인, 우익청년단 등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체포당한 경찰관과 각 기관장, 우익단체원, 지방유지 등은 반동분자로 몰려 여수 경찰서 뒷뜰에 결박당했고 그 중 반란군에 대해 반감이 심했던 극우적인 인사들이 즉결처분되었다. 거리에는 인공기가 계양되기 시작하여 오후에는 전시가지가 인공기의 물결을 이루었다. 경찰서와 군청에는 오전 10시경부터 보안서 및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반란을 일으킨 14연대병력은 역할을 분담하여 일부는 여수시내를 점령하는 일을 담당하고 반란군의 주력부대는 반란의 확산을 담당하여 순천으로 출발하였다.


 2) 순천과 인근지역으로의 확산

 여수를 점령한 반란군 가운데 약 700명은 오전 8시 30분 순천행 통근열차로 출발하고 1300여명은 각종 차량으로 순천으로 향했다. 20일 새벽 1시경 여수의 교환원으로 부터 14연대의 반란의 소식을 들은 순천경찰은 양계원 경찰서장이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순천으로 들어오는 철도를 절단하고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전략에 따라 비상경계태세에 들어갔다. 그러나 철도를 절단하는 일은 상부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중대한 사항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위급한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8관구 경찰청으로부터 철도절단에 대한 승인을 얻지 못함으로서 애초의 방어 계획을 수정하여 순천경찰은 경찰서원 전원을 소집하여 여수와 순천의 관문을 차단하기 위해 해룡지서를 사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아침에 여수쪽에서 척후병을 세우면서 천천히 올라오는 반란군대열을 보고는 도저히 대적할 수가 없다는 판단하에 철수하고 말았다.

 순천으로 철수한 순천경찰은 인접 군인 벌교, 보성, 고흥, 장흥, 광양, 구례, 곡성 경찰병력의 지원을 받아 약 500명의 경찰력으로 반란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한편 순천의 기관장들과 유지들은 여수에서 군인들에 의한 봉기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처음 듣고 당시 빈번하게 발생하던 군경간의 단순한 충돌사건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공공기관의 기관장 및 지방유지들을 소집하여 군..민의 친선을 도모하는 주연준비를 논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란의 자세한 소식이 전해지자 단순 충돌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혼비백산하였다고 한다.  당시 순천에는 경찰력과 더불어 순천경비임무를 띠고 파견된 14연대 소속의 2개 중대(선임중대장 홍순석 중위)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오전 9시 30분경 반란군 700여 명이 기차로 순천역에 도착하자 순천을 경비중이던 2개 중대가 반란군에 합류하였다. 순천에 파견된 2개중대의 선임중대장이었던 홍순석 중위는 자신이 남노당과 연계되어 있었다는 정보가 누설되어 숙군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언제 체포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속에 지내다가 여수에서 반란이 발발했다는 소식에 부대를 순천역 부근에 이동시켜놓고 여수에서 올라오는 반란군을 기다리다 반란군에 합세하였다. 이같이 홍순석도 김지회와 같이 하사관들이 주동이 된 반란의 모의과정에는 참여하지 못하다가 반란이 발생한 후에 참여하게 된다.

  반란군이 순천역에 도착하였을 때는 순천역을 지키고 있던 철도경찰은 혼비백산하여 이미 도망하여 버리고 난 후였기 때문에 어떤 세력으로부터도 저항을 받지 않았다. 통근열차와 군용트럭으로 순천역에 도착한 반란군들은 홍순석의 순천파견 2개 중대와 합류하여 순천의 각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반란군에 밀린 순천경찰 500여명은 대부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피신했으며 일부는 전투중 사망하고 나머지 약 50명은 경찰서로 후퇴하였다.

  광주를 출발하여 오전 10시경에 도착한 4연대 지원병력도 경찰과 합동작전을 전개하여 동천을 사이에 두고 반란군과 대치하고 있었으나, 전투를 벌이지 않고 있다 얼마후 반란군에 합세함에 따라 반란군의 기세는 크게 오름에 반해 경찰 등의 방어대는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광주로부터 진압차 내려온 4연대의 1개 중대병력도 ?군인끼리 싸울수 없다, 상관의 전투명령이 없다? 라면서 반란군에 합세하고 말았다. 당시 군인들에게 국가의 보존이라는 측면보다 개인적인 친분관계가 더 중요한 상황이었고 그만큼 당시의 이승만정부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순천은 오후 3시경 반란군에 완전 점령되었다. 순천시내의 좌익세력들도 반란군이 순천에 도착하자 반란군으로 부터 무기를 지급받고 함께 경찰,우익 요인,청년단원들을 습격하고, 우익인사들을 적발, 처분하는 데 앞장섰다.(광복 30년,124-5쪽)

 순천을 점령한 반란군은 3개부대로 재편성하여 주력 1천여명은 구례, 곡성, 남원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학구쪽으로 진격해나갔고, 일부는 광주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벌교, 보성, 화순 방면으로, 나머지 일부는 경상도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해 광양, 하동 방면으로 진격해나갔다. 남원방면으로 진출한 반란군은 20일 저녁 19시 45분 3연대 1개 대대와 순천에서 북쪽으로 10Km 떨어진 학구에서 전주에서 출동한 진압부대와 조우하였다. 광주방면으로 진출한 반란군은 보성인근에서 20일 밤과 21일 새벽 광주에서 진압차 출동한 4연대 2개 중대병력을 매복 기습하였으며, 하동방면으로 진출한 반란군은 광양 동쪽 8키로 지점에서 21일 아침 15연대 1개 대대 병력을 매복 기습하였다.

 여순사건은 지역적으로 급속히 확산되면서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즉 반란군이 진출한 중간지점에 위치한 군들에서는 반란군이 도착하기전 경찰관 및 우익인사들이 미리 도주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다른 지방 토착 좌익들은 군중들을 선동해서 경찰서를 공격하는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20일 저녁과 21일 사이 남원에서는 반란군의 일부가 도착하자마자 폭동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구례구경찰지서는 토착좌익들에 의해 폭동군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수명의 경찰이 피살되어 점령당하고 있었으며 보성에서는 지방토착좌익들이 경찰서를 공격하여 경찰 및 우익요인들이 피신하자 폭동군에 의해 무혈점령당했다. 또한 사건 파급과정에서 벌교와 조성사이에 있는 새제 터널을 경비하는 제 14연대 병력 그리고 보성에 주둔하고 있던 제 4연대 1개 중대병력이 폭동군에 합류하였다. 고흥에서는 순천에서 진입해들어온 반란군과 그에 동조한 지방민들이 행동을 같이하여 고흥읍을 점령하고 그에 저항하는 경찰관 7명과 주민 6명을 총살 혹은 타살하였다.(광주신보 48.10.31)


2. 진압군의 출동과 진압과정


 1) 토벌사령부의 설치와 순천지역의 탈환작전

 광주의 제 4연대 부연대장 박기병 소령은 20일 새벽 1시경 광주 8관구 경찰청으로 부터 여수사태에 대한 연락을 받고 제 2대대의 1개 중대 병력을 먼저 긴급 출동시켰다. 당시 광주의 5여단장 김상겸대령은 제주도 경비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아직 후임이 임명되지 않은 상태였고, 참모장 오덕준 중령은 여수 14연대의 출동을 독려하기 위해 여수에 출장중이었다. 제 4연대장 이성가중령도 서울에 출장중이었다.  따라서 경찰청으로부터 14연대의 반란소식을 접한 14연대 부연대장은 시급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기병소령은 우선 총사령부에 보고하는 한편 미고문관과 협의하여 즉시 비상소집을 하여 예하 부대를 비상대기시키고 1개 중대를 차출하여 학구를 경유하여 순천으로 진격하도록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러나 이 출동부대가 화순을 거쳐 순천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경이었고 이부대는 순천에서 반란군과 교전을 벌이지 않고 있다가 반란군에 합세하게 된다. 출동한 이부대에 남노당과 연결된 하사관과 병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순천에 도착하자 마자 장교들을 사살하고 반란군에 합류해버렸다. 그들은 얼마전까지 동료였던 반란군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는 심정적 요인도 함께 작용하고 있었다.

   한편 20일 새벽 철도경찰대의 경비전화로 여수 14연대의 반란소식이 서울에 전해지자 당국에서도 반란군들을 진압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주한 미군사고문단장인 로버츠장군은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한 긴급회의를 소집하였다. 국방장관 이범석을 비롯하여 오전 9시 국방부에서 긴급대책회의를 열었다.국방부 참모장 채병덕,육군참모부장 정일권,정보국장 백선엽 등이 참석한 대책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우선 현지의 실정을 파악하기 위해 채병덕이 지휘하는 선견대를 광주에 파견하여 사태를 파악하게 하는 것이었다. 현지보고를 받은 뒤 21일 미군사고문관인 하우스만 대위는 오후에 특별반을 이끌고 광주에 도착하였다.그는 반란진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젊은 장교였다. 육군총사령부는 10월 21일 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령관에 송호성준장을 임명한후 21일 광주에 파견함으로서 본격적인 반군토벌작전계획이 수립되었다.

 이와 더불어 20일 오전 11시반 국방부장관 이범석은 기자단을 통해서 여순사건의 발발배경을 ?14연대장에 대한 체포로 인해 일어났다?고 발표하고 국군당국의 이에 대한 조처 및 경과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상당히 긴 내용이지만 당시의 상황을 정부당국에서는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되기 때문에 전문을 인용한다.


 전남여수에 있는 국군 제14연대의 반란봉기가 있어 방금 광주 등지에서는 폭도측과 이를 진압하려는 국군 사이에 맹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1. 사건 발생 경과--전남 여수에 우리 국군 제14연대가 주둔하고 있는 20일 상오 2시경 공산주의계열의 오랫동안의 책동과 음모로써 반란이 발생되었다.처음에는 약 40명에 가까운 사병이 무기고를 점령하고 그 다음에는 교묘한 선동과 위협으로서 일부분 병사를 선동시켜 야반에 다른 병사를 무기로  위협하고 장교 대부분을 살해한 후 곧 여수에 있는 치안 관계 철도 경찰, 일반 경찰을 공격하였는데 동일 상오 10시경에는 여수를 거의 다 점령하였었다. 그리고  반란군은 그 지방의 공산주의자들과  합하여 또 철도 시설을 점령하여 순천행 학생통근 열차  6량에 탑승하여 순천으로 동진중 역에서 철도경찰과 충돌한 후  지방 경찰을 습격하였는데 이것이 반란 당일인 20일 사태이었다.

 2.폭도 성질 -수삭전에 공산주의자가 극우 정객들과 결탁하여  반국가적 책동으로 수명이 반란을 책동하였다.불행하게도 군정 이양 전 그 중 한명이 교묘한 방법으로써 국군의 소령이되어 정부전복을 책동하였고 그자가 여수 14연대장이 되었든  것인데 그는 방금 심문을 받고있는 吳東起다. 吳는 여수에 가서 기회를 포착하여 단순한 청년들의 심리를 선동하고 극우 진영,해외에서 돌아온 국내에 있는 반동분자와 간접으로 연결을  취하여 10월 혁명 전후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기습적 반란을 책동하였든 것이다.이것이 군정이양을 받기 20일전에 吳의 체포로 탄로 되었던 것이며 그후 속속 관련자를 체포하고 있었든 것이다.이상이 금번 반란의 배경인데 이에 관련된자들이 다소 공포심을 느끼고 있었으며 그중 혐의가 농후한 1개 대대를 모종의 사명을 주어서 다른  곳으로부터 주동적 책동으로 발동하였던 것이다.(광주신보, 48.10.22)

 3.반란경과 - 그리하여 일부는 여수,순천을 점령하고 학살 방화 약탈을 감행하였다. 전남 광주에  있는 3개 중대를 순천으로 증파하려 하였으나 시간상 거리가  먼 관계로 순천 역시 20일 하오 10시  10분경에 들어온 정보를 보면 반란군에 점령당하고 있지만  또 밤에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순천의 대부분을 점령한 반란군은 오합지졸을 모아서 약 2천명이  두길로 나누어서 1중대는 남원으로 또 1중대는 광주로 전진 하였던 것이다.국군은 20일 하오 1시에 비행기로 전방지휘부 인원을 광주에 수송해서 정보 거래시간을 단축시키고  일방으로 정보수집의 정확성을 기하여 사태 진정에 노력하고 있는 중인데 한 부대의  보고에 의하여 급한 조치로서 광주 남원에 병력을 급파하여 내습하는 적 세력의  대부분은 격퇴되고 반군은 主動으로 부터 被動이 되었으며 반군의 방향을 지리산으로 들어가고 있다.

4.군당국의 조치. 국군은 이것을 사전에 상상하였기 때문에 산악지대에 강력한 군대를 배치하고 남원과 광주서 이남의 폭도를 서남 해안으로  압박하는 동시에 경남 하동방면으로 부터  적의 배후를 기습하고 있는 중이다.그리하여 순천 여수폭도는 연락이 끊어졌는데 불원간에 반란군을 박멸하고 치안은 회복될 것이다.그리고  폭도들의 죄상은 아직 숫자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최근 부임한 연대장 이하 수십명을 학살하였고 순천에서 경찰 과반수 이상을 학살하였고 또 일부  양민과 수많은 청년을 살해하고 가진 잔악한  형벌을 가하고 있으며 건물 파괴, 민간의 모든 것을 약탈, 강간을 감행하고 있는데 여수도 순천과 같은 현상에 있다. 이 신인공노할 공산주의 도당의 죄악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극우진영이 시대를 몰각한 이 죄악적 해동을 조장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려 함은 더욱 가증하다고 아니 할 수 없다.정의에 입각하여 세계사조에 배합해서 인민의  자유와 평화를 파괴하고 폭동으로써 정치적 기도를 달하려는 이같은 세력이 자고로 성공한 적이 없다. 이 죄상이 앞날에 전부 폭로되는 날 우리의 대중은 더욱 경계하게 될 것이며 정부는 국가 민족과 자유 평화를 교란하는 도배들의 행동을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사태는 급격히 축소되고 진압은 속한 기간내에 되리라고 확신한다. 이러한 불상사가 발생한 것은 본관의 책임적 입장에서는  건국전도를 위하여 대단히 미안하고 유감되는 바이지만 그 질에 있어서는 극소수의 불순분자가 계획적으로 기도한 것이니 만큼 군은 비교적 단순한 청년들로서 조직되어 있고  방종과 개인의 자유를 어느정도 억압하고 있는 까닭에 선동에 민감성을 가지고 있다. 또 속한 시일내에 철저히 숙청할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호남신문,1948.10.22)


 이처럼 여순사건에 대한 발표를 하면서 정부당국은 당시 15개 연대 약 2만 5천명의 육군병력 가운데 3.8선을 방어하는 8개연대를 제외하고 7개 연대를 여순사건지구에 파견하였다. 육군총사령부는 10월 21일 반군토벌사령관에 소장 송호성을 임명하고 다음과 같이 토벌대를 구성하였다.(전사편찬위원회,한국전쟁사 1,1967,459쪽)


  전투사령관: 육군준장 송호성

  제 2여단장: 육군대령 원용덕

  제 5여단장: 육군대령 김백일

  비행대장:   육군대위 김정렬

  수색대장:   육군대위 강필원


 작전부대

제 3연대  (전주 2개 대대)  연대장: 중령 이성가

제 4연대  (광주 3개 대대)  연대장: 중령 함준호

제 6연대  (대구 1개 대대)  연대장: 중령 김종갑

제 12연대 (군산 3개 대대)  연대장: 중령 백인기

제 15연대 (마산 1개 대대)  연대장: 중령 최남근

L형 연락기 10대 및 장갑차부대 30대

그후 2연대(대전 1개 대대) 5연대(부산 1개 대대)가 추후 투입되었다.


 이처럼 총 10개 대대병력,장갑차부대,항공대를 광주,남원,하동에 집결시켜 동일 18시경 반군을 완전 포위하는 한편 한국인 장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군사 고문관들에 의해 재편된 제 4연대 1개 대대 병력이 순천점령을 위한 요충지인 학구에서 21일 자정 무렵 폭동군과 조우함으로써 진압작전은 시작되었다. 평소에는 14연대를 맡고 있었지만 반란이 발생한 날에는 우연히 광주에 머무르고 있었던 3명의 미군사고문관들이 제 4연대 병력과 행동을 같이 하고 있었다. 광주를 떠나기 전에 3명의 군사고문관들은 4연대 중대장과 그 지역 경찰서장의 자문을 맡아 반란군의 북진을 막을 수 있도록 동천강 하안선을 따라 병력을 배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순천에 도착한 모어중위는 경찰이 설치한 전투지휘소 근천에서 제 4연대 병력을 하차시킨 후 켈소중위와 트럭을 광주로 돌려보냈다. 모어중위와 그린바움중위는 경찰병력과 제 4연대 1개 중대병력을 산개시켰고 순천시내로 들어오는 길목이 되는 다리를 지키기 위해 하상을 따라 기관총과 여러가지 자동화기를 배치하여 방어선을 구축했다. 모어중위는 그당시 4연대 병사들은 당황하고 있던 상태로, 이는 반란군 병사들이 다리를 건너오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었을 뿐만아니라 서로 대화를 나누고 음식물까지 나누어 먹을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모어중위와 그린바움중위가 사태를 정확하게 판단하기도 전에 방어군들은 동료들이라고 생각했던 반란군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살해당하고 있었다. 모어는 경찰본서를 방어할 수 있는 정도의 병사들과 경찰관들을 끌어 모아보려고 했으나 곧이어 그 시도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순천전화국으로 후퇴한 모어와 그린바움은 얼마남지 않은 방어군으로 그곳을 방어하려 하였으나 이들은 곧바로 반란군에 체포되었다.

 전투가 일시 멈추었을 때 두 미군사고문관들은 반란군 병사들에게 항복한다는 확실한 표현으로 백기를 흔들면서 걸어나왔다. 그들은 반란군들에게 체포되었지만 통역관이었던 유창남상사의 기지로 선교사의 사택으로 무사히 피신할 수 있었다. 미군사고문관들이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게 된 것은 아직은 당시 반란군들이 미군에 대한 적대의식을 갖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반란군들의 주 타격대상은 경찰과 이승만정부였고 미군에 대한 적개심은 소수의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한 다수의 반란군들에게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여순 반란 기간동안에 선교사의 사택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었고 선교사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집에다 성조기를 걸어두고 문밖 출입을 삼가면서 피해있을 수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반란진압군들의 원래 목표는 광주, 남원, 하동에서 출동하여 폭동군의 주요 활동무대인  여수반도를 포위하여 산악지방으로의 도피를 차단하고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20일 저녁 7시 45분경 남원에서 출동한 제 3연대 1개 대대가 약 1천명의 폭동군과 남원 남쪽에서 조우하여 21일 새벽 5시 30분경 순천방면으로 후퇴시키기는 했으나 그나마 진압작전에 소극적이었다. 보성방면에서는 20일 광주에서 파견된 제 4연대 2개 중대 병력이 보성 북쪽 4km지점에서 폭동군의 매복기습을 받아 서쪽 포위망이 무너졌으며 광양방면에서는 20일 밤 하동에서 도착한 제 15연대 1개 대대가 21일 아침 광양 동쪽 8km 지점 옥곡에서 폭동군의 매복기습을 받아 심각한 타격을 받았으며 연대장 최남근 중령과 제 1중대장 조시형 소위가 반군에게 포로가 됨으로서 동쪽의 포위망도 무너지고 있었다. 즉 21일 오후 반군토벌사령부가 광주에 도착했을 때 진압군 내부에서는 작전진압체계 및 통신의 불비, 지휘 능력과 전투능력의 미숙,인접부대와의 협동이 부조한 상황과 더불어 일종의 병력붕괴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쌍방간의 전투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왜냐하면 진압군과 폭동군 양쪽에는 몇 개월 전까지 같은 전우였던 병사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22일 오전까지 초기 진압작전은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음에 따라 정부는 22일 여순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엄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한국전쟁사 1,460쪽)


 本官에게 부여된 권한에 의하여 10월 22일부터 別命時까지 左記와 如히 戒

 嚴令을 선포함.만일 위반하는 자는 군법에 의하여 사형 기타에 처함.

 1. 오후 7시부터 翌日 아침 7시가지 일절 통행을 금함.

 2. 옥내외의 일절 집회를 금함.

 3. 유언비어를 造出하여 민중을 선동하는 자는 엄벌에 처함.

 4. 반도의 소재를 알시 본여단사령부에 보고하여 만일 반도를 隱匿하거나

    반도와 密通하는 자는 사형에 처함.

 5. 반도의 무기 기타 一切 軍需品은 본사령부에 반납할 것.만일 隱匿하거

    나 秘藏하는 자는 사형에 처함.


 여순사건에 대하여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은 23일 반란군에 고하는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발표하였다.(호남신문, 48.10.26)


 즉시 투항 귀순하라.-

 제군은 지금 불행히도 민족적 양심과 군기를 무시하고 일부 그릇된 공산주의자와 음모정치가의 모략적 이용물이 되어 실로 천인공로의 죄과를 이미 범하였고 또 아직도 범하는 중에 있다. 제군은 상관을 살해하였고 관유물을  약탈 또는 방화소실케 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구한 우리의 다수 동포를 학살하였다.

 제군은 정부의 기관을 폭력으로 점령한 후 제군 자신조차 신뢰성이 없고 또 인민이 원치않는 정치 제도를 강요하고 양민과 어린학생을 무력으로 규합하여 반란을 발성하였으니 기반란적 죄상은 국법이 도저히 용서치 못하는 것이다 관은 즉시 제군의 반란행동을 단시일내에 진압키 위하여 용감하고도 애국적인 압제적인 병력을 동원하여 북은 남원, 곡성, 서는 화순, 보성 동은 하동방면으로부터 대부대가 진격중에 있을뿐만아니라 지리산과 남해안 일대를 안전포위 봉쇄하는 동시 일부병력은 기타 남부해안으로 부터 상륙중에 있다. 여수는 벌써 회복되고 해군은 행동을 같이하는 수천의 반군이 투하되는 중이다. 제군의 운명은 시간적 문제이다.

제군에게 내리는 국가의 판죄는 필히 준열 엄격할 것이며 추후의 관용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관은 제군의 대부분이 전도요원한 청년이며 또 단순 무지한 병사이며 행동의 동기도 피동적이었음을 안다. 또 전체가 결코 반도가 아님도 잘 안다. 지금은 제군들도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고 자기들의 행동을 반성한 후 회원하여 눈물로써 심려하고 있는 제군의 부모와 처자와 또는 친척을 생각할 때 본관은 최후로 한번 제군이 총살당하지 않을 기회의 여유를 주는 것이니 제군은 즉시 반성하여 한시간이라도 급히 하기의 수단을 취한후 항거를 중지하고 사죄의 뜻을 표하라. 이것만이 제군이 살아나가는 길이요 제군이 가족이 바라는 방법이요 우리국가가 요구하는 태도이다.

 1. 제군은 동지와 상의하여 단체로든지 또는 개인단독으로든지 제군의 양심이 허용치 않는 현재 반란의 지도자를 즉시 총살하고 사과의 뜻을 표하라.

 2. 제군이 부득이한 때에는 반군의 폭행에 이용되는 총기, 화약,탄약 및 기타 군용품을 즉시 파괴한 후 탈주하라.


 진압군 사령부는 최초 탈환목표를 순천으로 정하고 이를 세방면으로 나누어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다음과 같이 전투부대를 편성하였다. 주공격은 김백일 부대를 중심으로 하여 학구에서 순천으로 진격하고, 오덕준부대는 보성을 경유하여 벌교쪽에서 순천을 공격하며, 최남근부대는 하동에서 광양을 경유하여 동쪽에서 순천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반란군은 진압하는데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학구전투에서 군경진압부대가 반란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무사히 방어전을 치룸으로써 반란군의 기세는 꺾이게 되었으며 그 시기부터 전세가 역전되어 반란군이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였다.

 순천 탈환공격은 군산에서 출동하여 광주에 도착한 병력이 작전을 전개하기 위하여 다시 기차편으로 이리를 경유하여 전라선으로 학구 인근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으나 이미 학구 인근에는 제 3연대와 4연대의 선발 출동부대가 반란군과 교전중이었다. 군산에서 출동한 제 12연대의 2개 대대(백인엽 소령 지휘)가 학구에서 폭동군과 교전하면서 대치하고 있던 3연대, 4연대를 지원하여 합동작전을 개시하였다. 진압군의 대규모 반격이 시작되자 반란군은 일부가 투항하고 주력부대는 순천으로 퇴각하였다. 학구가 장악되자 4연대 병력은 학구지역을 계속 잔류하기로 하고 12연대의 주력부대와 3연대병력은 순천으로 추격하여 오후 3시경 순천 외곽지역에서 반란군과 대치하였다. 4연대 병력을 학구에 잔류시킨 것은 이미 4연대의 일부병력이 반란군과 합류한 상태였던 데다가, 4연대는 반란을 일으킨 14연대 병력과 얼마전까지 동료였기 때문에 사상적으로 의심할 수 밖에 없어서 순천탈환작전에 참여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22일 오후 3시 제 12연대 2개 대대가 순천읍 공격을 개시하고 1시간 후 남원 방면에서 도착한 제 3연대 1개대대 병력이 가세하였다. 이때 순천은 약 2개 대대의 폭동군이 방어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진압군과 약 2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로 순천을 지키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진압군은 전투를 중지하고 순천 북방입구를 점령한 채 폭동군과 200내지 300미터 사이를 두고 대치했다. 이러한 대치상태에서도 폭동군은 진압군에 선전 혹은 타협안을 제시하면서 진압군 내부의 붕괴를 유도하고 있었으나 진압군은 동요가 없었다.

 이튿날 새벽까지 제 2연대 1개 대대, 제 4연대 1개 대대,장갑차 부대,경찰부대로 증강된 진압군은 순천 주변의 산과 이른바 인민군사령부로 되어 있던 동순천역을 일시에 포위하고 박격포사격과 정찰기의 지원하에 장갑차부대를 선두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미 진압군의 총공격을 예상한 폭동군은 수적으로나 장비면에서 대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하에 정규적인 직접대항을 포기하고 산악지역에서 유격전을 감행하기 위해 김지회 등의 반군지휘관과 순천의 주요 좌익간부들로 구성된 주력부대는 이미 광양방면의 백운산과 지리산 줄기의 인근 산악지대로 도피한 상태였다. 따라서 순천읍내에는 14연대의 정규병력은 이미 도피하고 총과 죽창으로 무장한 치안대,민애청원,학생들만이 치열한 시가전으로 맞서고 있었다. 결국 적은 수의 잔류병사들만이 남아서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몇시간에 걸쳐서 시가전을 전개한 결과 진압군은 고립된 병사들의 저항을 손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전투 결과 해질무렵에 순천시의 대부분은 진압군들에 의해 탈환되었지만 밤에는 다시 퇴각하여 시 외곽의 보다 안전한 지역에서 숙영하였다.

 23일 아침 증원된 1개 대대병력과 장갑차로 보강된 진압군은 아침 일찍 순천을 다시 공격하였다. 장갑차를 앞세운 진압군은 청년들과 좌익세력의 미미한 저항을 받았지만 이를 쉽게 격퇴하고, 오전 11시경에 순천시내의 전역을 탈환하고 오후에는 시가지 소탕전을 완료했다. 순천을 완전 점령한 진압군은 1개 대대병력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여수를 탈환하기 위해 여수를 향해 떠나고 나머지 진압군은 반란에 가담했던 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시내 가옥들을 하나하나 수색하기 시작하였다.

 순천에서 주둔하였던 진압군은 백운산으로 도피한 반란군을 소탕하기 위하여 2개 대대병력을 광양으로 보냈다. 백운산의 반란군은 진압군을 분산시키기 위해 광양읍내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교란작전을 펼치면서 산악지방으로 도주하였다. 이들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진압군은 서로 다른 방면에서 공격을 시작하였는데 상호간에 적으로 오인한 채 치열한 교전을 벌려 아군끼리  막대한 피해를 입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벌교지방도 순천에서 급파된 2개 대대병력의 진압군에 의해 탈환되었고 이어서 보성지방도 10월 24일 아침에 탈환되었다. 구례와 곡성도 제 3연대 1개 대대가 순천탈환에 합류하는 과정에서 22일 오전 11시경과 15시경 각각 탈환되었다.

 한편 여수에서는 부산에서 파견된 해군부대와 이부 국방경비대 병력이 10월 23일 아침에 육해군 합동으로 여수항구를 통해 상륙하려 했지만 반란군의 반격을 받고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2) 여수와 인근지역의 탈환작전

 이미 앞에서 살펴본대로 순천탈환에 성공한 진압군은 광양방면의 폭동군 주력을 섬멸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사건의 진원지인 여수를 탈환하는 동시에 벌교,보성방면의 폭동군을 진압하려 했다. 이에 따라 순천에서는 제 2연대 및 제 4연대 1개 대대를 잔류시켜 경비를 담당케 하고 광양방면 공격에는 제 12연대 2개 대대와 하동에서 재편성한 제 15연대의 2개 대대로 광양 부근을 협격하여 반군주력을 철저히 추격 토벌케 하였다. 또한 여수 공격을 위해서는 제 3연대 1개 대대와 장갑차 부대를 준비하였으며,  벌교 보성 방면 공격에는 제 4연대의 1개 대대를 재정비하여 파견하였다.

  여수에 대한 공격은 23일 오전 9시 30분에 부산에서 급파된 해군 LST함의 선상 박격포사격 및 제 5연대의 1개 대대의 상륙작전으로 시작되었다.그러나 박격포사격의 부정확과 폭동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많은 사상자를 냄으로써 오후에는 공격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24일의 제 2차공격은 송호성 사령관이 진두지휘하여 공격을 실시하였으나 반란군의 매복작전에 걸려들어 반란군이 발사한 총탄에 의한 송호성 사령관의 부상과 동행했던 외국인 종군기자의 사망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육해군합동 작전으로 여수에 상륙하려던 작전에 실패하게 되자 일반 국민들은 새로운 의혹과 불안이 조성되었다. 이제 정부는 더 이상 반란을 진압할 능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여수탈환작전의 시작이 미평전투에서 부터 실패를 거듭하게 됨에 따라 새로 출범한 제 1공화국은 국내외적으로 그 존립자체를 의심받게 될 정도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이에 따라 여수탈환은 초미의 정치적 관심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부당국에서는 공보처장으로 하여금 23일 다음과 같이 여순사건의 진압상황을 발표하여 초미의 관심이 되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해 국민들을 안심시켜야 했다.

 ?여수시는 23일 상오 8시 30분에 순천은 동 6시 30분에 각각 완전히 정부군이 탈환하였다.그러나 아직도 퇴산중인 반란군은 광양과 보성 등지로 몰리고 있다고 하나 일량 일종으로  완전히 점멸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서울지방에서까지 비상경계를 펴고 있었고 서울의 수도청에서는 지난 20일 오후  6시 부터 전래에 없는 삼엄한 청정 비상경계를 실시 하였다.?


 국방부에서도 23일 오전 10시 여수 순천 방면 사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광주신보, 48.10.24)

  1.22일 하오 4시 30분 제 5여단장 김백일중령 휘하 정예부대는 순천을 완전 점령하여 목하 사태를 수습중에  있으며 순천에는 질서 회복중에 있다.전과는  폭도 약 600여명 수용하였다.

  2.여수는 22일 상오 3시 30분 탈환하였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3.여수 순천의 포위망을 탈출한 반란군은 보성에  약 200여명 광양에 약 400여명 방황하고 있는데 국군은 이를 포착하고 격파 중에 있다.

  4.전주 순천간 철도는 반란군의 북진을 저지하기 위하여 파괴하였는데 반란군의 봉쇄작전이 완성후 복구 개통케 되었다.

  5.항공대는 반란군의 정찰  수색과 귀순 권고문 살포등으로 활약  중인데 그 공적은 지대한 것이다.

  6.해군 함정은 전남지구 해안선 일대를 봉쇄


 이러한 상황에서 진압군사령부에서는 여수를 탈환하는데 역량을 총 집중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25일 반군 토벌 사령부에서는 광양방면에서 폭동군 주력을  추격하고 있던 당시 최정예부대인 제 12연대 2개 대대를 여수탈환작전에 전용시키기로 하였다. 그 결과 광양과 순천인근의 산악지역에서 김지회 등이 지휘하는  주력부대는 진압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섬진강을 건너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입산함으로써 장기적인 유격전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24일 밤 여수반도의 폭동군 주력 일부는 미평전투의 패배로 여수반도의 진압군 포위망이 무너진 틈을 타서 지리산과 벌교 방면으로 탈출하게 되었으며, 여수읍내는 제 14연대 반란군 일부 약 200여명, 무장좌익세력 약 1천여명의 좌익 청년,학생,노동자 등이 방어하게 되었다.

 한편 24일까지 다른 지역에서의 진압상황은 어느 정도 진척을 보이고 있었다. 보성방면은 24일 12시 30분 제 4연대와 수도경찰대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벌교방면은 제 6연대와 제 3연대에 의해 13시 50분경 탈환되었다. 고흥방면은 25일 오전 9시경 보성과 벌교방면에서 진압군이 들어와 폭동군을 섬멸함으로서 25일 10시 탈환되었다.

 광양은 24일 17시 20분 제 12연대와 제 4연대에 의해 탈환되었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은 직접 여순사건에 대해 여순지구의 국민들에게는 경고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타지역의 국민들에게는 해명한다는 생각으로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이 지하에 정당을 부식해서 내란을 일으켜 전역을 혼란에 빠지고 남북을 공산주의국으로써 타국에 부속을 만들려는 계획이 오래 전부터 농후해 가는 것을 세인이  아는 바이다. 불행히 몸에 천진한 분자들이 혹은  국군의 혹은 어떤 단체에서 겨서 반란을 빚어내고 있다가 정부를 기만하고 국권을 말살하려는 음모로 여수 순천 등지에 반란을 일으키고 있으나 국군의 결사적 전투공세로 반도들은 진압하여 가고 있다. 그러나  극소수의 잔존한 반도들이 혹 도망하여 숨어  있는 도당을 꾀어서 방화와 약탈을 강행하여 치안을 방해할 터이니 방위상태의 방책을 취하지 않고는 후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정부에서는 단호한 태도를 취하여 치안을 유지하여 인명을 보호 할 것이다.각지방 남녀 노소는 질서와 안녕을 범하는 자가 없도록 조직적 행동을 하여 주기를 경고하는 바이다.(광주신보, 48.10.26)


 제 3차 여수 탈환작전은 25일 아침 550명의 병력으로 재개되었다. 진압군은 박격포사격의 지원을 받으며 공격을 시작하자 여수에 남아 여수를 방어하고 있던 1000여 명의 반란군들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미 반란군의 주력부대는 여수반도를 빠져나와 산악지역과 백운산지역으로 피해버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진압군은  강력한 저항을 받지 않으면서 오후 늦게 여수읍 외곽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으며,장갑차를 앞세움으로서 폭동군의 치열한 저항을 받았지만 여수읍내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지자 진압군은 곧 철수하였고 외곽고지는 다시 폭동군에 의해 재점령되었다.

  이때 진압군이 철수한 상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첫째, 전날의 병력손실에 덧붙여 아직 병력증강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둘째, 진압군이 진군 도중 촌락마다 수색해야 할 정도로 다른 지방에 비해 좌익동조세력이 광범위했다는 점 세째, 배수진을 친 폭동군의 저항이 결사적이었고, 네째 전날과 같은 매복기습을 염려했다는 점 때문인 것 같다.

 최후의 본격적인 여수탈환작전은 26일 정오경 광양으로 부터 전용한 제 12연대 2개 대대,순천경비중이던 제 4연대 일부병력,제 3연대 1개 대대,제 2연대 1개 대대, LST에 승선중이던 제 5연대 1개 대대,장갑차부대,경찰지원부대, L-4 항공기 10대,진해에서 급파된 충무공호를 비롯한 6정의 경비정이 여수반도를 포위한 가운데 개시되었다.

 장갑차부대를 선두로 제 12연대 2개 대대가 주공이 되어 시가지 동쪽을, 제 3연대 1개 대대는 옹호부대로서 종고산을,제 2연대 1개 대대는 예비대로서 해안 방면을 경계하면서 시가지로 진격하였다. 당시 호남지구 전투사령부의 발표에 따르면 여수에는 반란병사 200여명,민간무장폭도 1천여명,동조세력까지 합쳐 총 1만 2천여명이 진압군에 대항하고 있었다 한다.

 15시경 구봉산,장군산, 종고산 등지의 외곽고지를 장악하자 진압군은 곧이어 시가지에 대한 박격포사격을 고지와 바다로부터 개시하였다. 이 박격포사격으로 진압군의 일부가 살상당하기도 했으며 여수읍내의 서동과 교동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주택가로 번져 여수시가지는 잿더미로 변하였다.

 박격포사격에 이어 제 12연대는 장갑차를 선두로 시내에 돌입하였고 제 2연대와 제 3연대는 여수읍을 압축하면서 민가를 닥치는대로 수색하였다. 진압군은 대대별로 소탕전을 전개하여 시민들을 서국민학교,혹은 진남관 같은 공공시설 등으로 집결시키면서 소탕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시내에는 아직까지 폭동군 동조세력이 적지 않게 존재하여, 반란병사 1명이 민간폭동군 10명 내지 20명을 지휘하는 식으로 매우 조직적이고 결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으므로 밤이되자 진압군은 소탕전을 중지하고 본부를 서국민학교에 두고 지역경계에 들어갔다. 이때 반란군 일부와 여수 좌익지도자는 미평쪽으로 퇴각했다.

 27일 새벽 12량의 장갑차를 선두로 진압군은 여수읍 한복판에 위치한 이른바 인민군사령부를 향하여 4방면에서 포위 공격을 개시했다. 한편 아직 부두에서는 여전히 폭동군의 저항이 치열하여 제 5연대가 승선한 LST가 상륙을 못하고 있었으며 제 5연대는 작전상륙을 위해 81MM 박격포 2문을 갑판위에 설치해 놓고 사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갑판의 반동으로 탄착점이 형성되지 않아 여수읍내를 더욱 초토화시켰을 뿐만아니라 진압군측의 사상자까지도 내게 되었다. 결국 제 5연대는 진압이 완료된 후 무혈상륙을 하게 되었다.

 폭동군은 진압군의 공격에 의해 읍사무소 자리에 설치되어 있던 인민위원회 보안서 쪽으로 몰리면서도 저항을 계속하여 중앙동,교동 방면으로 도주하였다.백인엽소령이 지휘하는 제 12연대는 폭동의 진원지인 제 14연대 병영으로 돌입하였다. 여수는 15시 30분경 시내가 점령되고 18시 소탕전이 완료됨으로서 완전히 재탈환되었다. 진압군은 여수시내에서 10여명의 반란병사와 민간폭동군 50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렇듯 여수 진압을 마지막으로 여순사건 진압은 일단락되었다. 경찰은 보성 24일 14시,벌교 25일 오전 10시,고흥 25일 오전 10시,광양 26일 19시,구례 27일 14시,여수 28일 오전 8시에 각각 업무를 재개할 수 있었다.

 진압을 하는 중간단계에 김백일 여순지구 토벌 사령관은 다음과 같이 여순사건의 진압성과를 발표하였다.


  김백일 작전 지휘사령관 발표-순천지구  전투를 개시.동 4시 30분경 적의 병력 일천에 대하여 아방은 600의  병력으로써 순천시내에 돌입.당시 적의 주력은 순천에 없었고 그 중 일부는 보성  광양에 있었는데 총병력은 반란군 1500명 일반폭도 500명 총 2000여명 정도였다.순천에 진입한 최 선봉 부대는 백인엽 소령이 지휘하는 군산 제12연대의 약 2개대대  600여명의 병력이었는데 본관도 동시에 진입하였다.전투에서 적 사망 100여명,포로 200여명,총기  150에 달하였다.그리고 아방에도 귀중한 전사 3,부상 7의 손해.한편 동일 4시 30분경 남원으로 부터 송석하소령이 지휘하는 제 3연대 1개대대도 순천에 돌입하여 전투는  계속 되었으나 밤이되어 시내 소탕전은 중지하고 순천 북방 출입구를 점령한채 200~300m를  사이에 두고 적군과 대치.23일 오후 7시 아군은 순천 주위의 산과 적의  사령부로 되어있는 동순천역을 일시에 포위 섬멸코저 돌격하였다. 그때까지 적은 퇴각하지않고 모략 선전으로 아군의 반란을 유혹코저 노력하였으나 제3 제12연대장병의  사기는 더욱 왕성하여 모략  선전에 오히려 분개하고 일층 적개심을 높게하였다.총공격 개시후 시가전을 전개 하였는데 반군외에 무기를 소지한 적의 치안대 학생 민애청원들도 대항하였으므로 가가호호를 수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이리하여 오전 11시경 순천시내를  완전히 탈환하였는데 적의 일부는 포위망을 일탈하여 광양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본관은  미리서 그것을 예상하고 이정일 중령이 지휘하는 광주 4연대 1개 대대를  광양에 배치, 공격하여 적의 일부는 하동으로 일부는 해안선으로  도망갔다.이전투에서는 일대 시가전과 혼전을 전개하였는데 이때부터 적은 상호 연락을 잃고  혼란상태에 빠져 그들은 하동으로 부터 분산하고 순천 구례 하동간의 삼각지대에 있는 백운산 방면으로 다시 도주하였다.적군의 수괴-김지회(중위) 23세는 현재 백운산에 잠복하고 있으며 동일의 전과는 포로 300,총기 300에 달하였다. 24일 백운산 방면에 도주한 적의 주력을 포착코자 여수 공격을 일시 중지한 아군은 적을 탐색하여 동일 저녁까지에 포위태세를 완료코 포위권내에 있는 적군에 대하여 25일 오후 소탕전을 개시한다.별양 보성방면의 적은 약 300인데 그중 100은 벌교에 있다한다.24일에는 이 적에 대하여 우경으로 제3연대 3개 중대 좌편에 제6연대 일부가 진격하여  오전 11시 벌교도 완전 탈환하였으며 이에  앞서 보성은 23일 밤 광주부대가  점령하고 보성 벌교간의  연락을 완결하였다.이전투에 있어서 300의 적병을 포로로 하였으며 적은 현재  300~500 정도이다.현재까지의 총전적은 적병 800을 포로로 하였고 죽은 적의 총병력은 800,일반폭도가 수천이다.무기 노획은 포로수와 동일하고 소총경기는 대부분  탈환하였다.현재 백운산의 적은 식량  부족으로 기진 맥진하여 총기를 버리고 방황하고 있는데 이로써 본 작전은 대개 일단락 지었다.따라서 하동 방면 적군의 투항은 목전에 있는 것이다.지금까지 아군의 손해는 전사 10,부상 30명이고 적이 살상한 양민의 수는 300~500정도로 추상된다.


 그러나 무장폭동군은 진압군에 사살,체포되기도 하였지만 주력 부대는 지리산 방면으로 나머지는 주변 산악지대로 도주해서 유격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광양방면의 폭동군은 지리산 방면으로 순천,별교,보성,고흥,여수 방면은 주변 산악지대 및 해안지방으로 도주하였다.이에 따라 정부는 여순지역에 국한해서 선포했던 계엄령을 11월 1일을 기해 전남북일원으로 확대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군정보고서에서는 11월 16일 현재 여순지구 무장폭동군이 백운산 방면에 350명,별교 200명, 고흥 150명,보성 300명 정도가 산재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이들은 주로 단선단정반대투쟁과정에서 입산한 유격대와 합류 군경우익요인에 대한 숩격을 계속 전개하였으며 1949년 초순에 들어서는 군경의 추격으로 점차 소규모화되어 진도와 무안 등의 섬지방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전남 일원에서 출몰하고 있었다.


 진압작전을 전반적으로 평가해 볼 때 미군사고문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창군된지 얼마 안되는 경비대는 군장비 특히 통신장비의 부족,부대전투능력의 부족,유능한 지휘관의 부족,부대간의 협동작전의 부조,부대내의 좌익침투,장교와 사병간의 일체감 부족 등에도 불구하고 미군사고문관의 작전지원과 장비지원에 힘입어 여순사건을 그나마 신속하게 종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비대의 이념적 조직적 취약성,제 1공화국의 정치적 취약성은 결국 반군 주력이 지리산으로 도주할 수 있게 함으로써 유격전구를 마련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국군은 여순사건을 통해 대규모 군사훈련 이상 가는 실전 경험을 쌓게 되었으며 동시에 사건 직후 계속된 숙군작업으로 이념적 조직적 취약성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3. 반란치하의 여순지방


 반란지역으로서의 여수순천지방 상황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공통적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첫째, 폭동군이 경찰서를 공격하여 한 지역을 점령한 뒤 토착공산주의 세력과 합세하여 경찰, 우익요인, 우익 청년 학생 등을 색출하여 즉결처분하거나 혹은 주요 경찰간부 우익요인 등은 구금하여 며칠 후 인민재판을 통해 처분하는 양상을 띠었다. 둘째, 그 직후 폭동군은 남로당 및 지방좌익과 합세하여 이른바 인민위원회, 보안서, 의용군 등을 구성하였으며 폭동군과 의용군은 전투를 담당하고 인민위원회는 이른바 인민행정과 인민재판을 실시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폭동군 및 공산주의자들의 이러한 행위들,특히 가장 조직적으로 보였던 인민행정조차도 사전의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실시된 것이 아니었다. ?38선이 터져서 남조선 해방은 눈앞에 다가왔다? 등과 같은 허위선전을 은폐 합리화할 필요성에서 그리고 진압군의 진압진척상황에 대응해서 나타난  즉흥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세째, 위의 두과정에서 강압에 의해서건 자발적이었건 간에 군중이 대규모로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을 중심으로 반란치하에서의 여순지방을 정리해보기로 한다.


 1)  반란군의 초기 활동

 여수의 경우 폭동군이 좌익청년학생들을 앞세우고 본격적으로 경찰, 우익요인, 청년 등을  색출하기 시작한 것은 20일 새벽 3시 여수경찰서를 점령한 후 7시간 가량 지난 오전 10시부터였다. 경찰은 군중들에게 잡히면 마구 밟히거나 구타당하여 살해되었고 반란병사에게 잡히면 그 자리에서 총살당하기 일쑤였다. 체포당한 사람중 극우에 해당하는 자는 경찰서 유치장에 나머지는 읍사무소 2층에 가두었다. 그러나 체포된 경찰이나 우익인사들이 모두 처형된 것은 아니었다. 즉결처분이나 인민재판에 의해 죽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이 이른바 악질반동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로서 평소에 충돌이 잦았던 자이거나 경찰간부였으며, 23일 밤에는 즉결처분 혹은 인민재판에서 처형을 면한 경찰과 우익요인 등 약 200여명이 석방되기도 하였다. 폭동,반란군의 여수점령기간중 즉결처분 및 인민재판에 의해 피살된 인원수는 200여명이었으며 그중에는 경찰 74명이 포함되어 있다.

 순천의 경우는 여수보다 점령기간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900여명의 관민이 사망했으며 그중 경찰은 전사자를 포함하여 400여명이 피살되었다. 폭동군은 시내에 숨어있던 경찰관들과 우익인사들을 체포하는데 도움을 얻기 위하여 좌익계 학생들과 교사들을 일본제 소총으로 무장시켰다. 폭동 반란군에 의해 피살된 대부분의 경찰은 주로 신참 혹은 인접군의 응원 경찰들로서 순천지역의 지리와 상황을 잘모르는 주변지역 출신으로서 체포를 피하지 못한 경찰들이  대부분이었고 고참경관이나  간부는 대부분 피신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즉석에서 사살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후에 인민재판소에 넘겨져 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 죄가 있다고 판명되거나 단지 경계대상이라고만 판결을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처형당했다. 일단 반동분자라고 낙인 찍힌 사람들은 점령 첫날 은행 앞 광장에서 처형되었다. 순천경찰서장도 두눈이 뽑히고 온몸이 꽁꽁 묶인채 차꽁무니에 묶여 끌려다니다가 화형당했다. 여수보다 순천에서  경찰 혹은 우익요인이 더욱 무참하게 살상되었다.

 제일 먼저 반란군에게 체포됐던 경찰관들은 무조건 총살되었으며 나중에 체포된 70여명의 경찰관은 순천경찰서 앞마당에서 군중들을 모아놓고 집단학살을 하였다. 또 반도들은 체포된 경찰관을 산채로 모래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기도 했다. 모래구덩이에 묻힌 뒤 미처 죽지 않고 꿈틀거리는 경찰관은 위에서 죽창으로 푹푹 찔러 죽였다. 여수 보다 순천에서 피살된 경찰의 수가 더 많고 더욱 비참하게 살해된 이유는 순천의 반란군들이 이미 신분이 노출된 상태였기 때문이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또, 해방이후 여순사건에 이르기까지 여수보다 순천에서 정치적 갈등이 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한편 여수와 순천을 제외한 나머지 군들에서 경찰, 우익요인, 청년단원들은 폭동 반란군의 처형소식을 듣고 대부분 도주하였다. 따라서 벌교, 고흥, 보성, 광양 등지의 경찰서는 폭동군 혹은 지방 토착좌익에 의해 무혈 점령당하였으며 그만큼 여수와 순천보다 피해가 적었다. 이 중에서 보성방면의 피해자수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데 경찰은 전사 5명, 피살 39명(이중 벌교서 관내 조성지서에서 나체로 총살된 30명 포함) 총 44명이, 민간인은 15명이 피살되었다.


 2) 반란군의 인민행정 실시

 여수와 순천을 점령한 제 14연대 병력은 그 지역의 좌익인사들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인민위원회와 인민재판소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행정조직이 형성되기 이전에 이미 20일 아침부터 여수의 중앙동에는 벽보판마다 ?미군철수??제주도출동거부 병사위원회 성명서??인민해방군만세??여수인민에게 고함??인민군 38선 돌파??이승만 일본도망??여수인민위원회 성명서??토지는 농민에게? 등의 벽보들이 붙기 시작하였다. 또한 중앙동 광장에서 1000여명이 모인 군중대회가 열렸다. 여기에는 여수의 좌익인사들이었던 이용기, 이창수, 박창래, 주원석, 유목윤, 김상렬, 김현수, 강대훈, 박채영, 문성휘, 김귀영 등이 참여하였다. 남노당 여수군당위원장은 이용기였으며 군중대회에서 지창수가 인사말을 했다. 지창수는 14연대의 일부병력이 순천으로 떠났으나 자신은 여수에 남아 여수를 총괄하고 있었다. 중앙동의 여수시민 군중대회에서 여수의 인민위원회를 이끌어나갈 의장단으로 이용기, 유목윤, 박채영, 문성휘, 김귀영, 송욱 등 6명이 뽑혔다. 이 자리에서 구성된 인민위원회에서는 6개항의 혁명과업을 채택하여 시민들로부터 승인받는 형식을 취했다.

  인민위원회의 혁명과업 6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인민위원회가 여수지구 행정기관을 접수하는 것을 인정한다. 2.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 3. 대한민국의 분쇄를 맹세한다. 4. 대한민국의 모든 법령을 무효로 한다. 5. 경찰관,친일파,모리간상배,한민당,독립촉성국민회,서북청년단,대동청년단,민족청년단 등 반동분자들을 철저히 처단한다. 6.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의한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등이었다.

 여수인민위원장 이용기는 취임사에서 인민위원회가 실행해나갈 사항들을 제시했는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첫째, 친일파, 모리간상배를 비롯하여 이승만도당들이 단선단정을 추진하는데 앞장섰던 경찰, 서북청년단, 한민당,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 등을 반동단체로 규정하고 그들 중 악질적인 간부들은 징치하되 반드시 보안서의 엄정한 조사를 거쳐 사형, 징역, 취체, 석방 등의 네 등급으로 구분하여 처리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악질경찰은 제외하고는  사형만은 될 수 있는대로 없도록 노력할 것 이며 만부득이하게 될 경우에도 최소화 할 것이다.

 둘째, 친일파, 모리간상배들이 인민의 고혈을 빨아 모은 은행예금을 동결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할 것이다.

 세째, 적산가옥과 아무 연고도 없는 자가 관권을 이용하여 억지로 빼앗은 집들을 재조사해서 정당한 연고권자에게 되돌려줄 것이다.

네째, 매판자본가들이 세운 사업장의 운영권을 종업원들에게 넘겨줄 것이다.

다섯째, 식량영단의 문을 열어 굶주리는 우리 인민대중에게 쌀을 배급해줄 것이다.

여섯째, 금융기관의 문을 열어 무산대중에게도 은행돈을 빌려 줄 것이다.


 인민위원장의 취임사가 있은 후 박채영의 선창으로 인민공화국 만세삼창이 있은 뒤에 시가행진에 들어갔는데 도중에 많은 사람이 끼어들었다. 이 대회를 계기로 여태껏 지하에서 활동중이던 민애청, 민청, 학동, 여맹, 합동노조, 철도노조 등 좌익청년단체들 600여명이 자발적으로 인민의용군을 조직하여 무기를 들고 경찰과 우익진영 인사들의 체포와 재산몰수 활동을 벌였다.

  여수에서는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인민위회가 조직되어 여수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였다. 인민위원회는 좌익세력들 뿐만 아니라 그동안 군청과 각 면사무소에서 일하던 행정경험자들 중에서 군수, 과장급, 계장급을 해임하고  우익단체에 가담하지 않았던 하위직 인사들로 하여금 출근케 하여 계속적인 행정활동을 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반란지구에서는 대부분 인민위원회와 보안서가 조직되었고 인공기가 게양되었다.  인민위원회는 친일파와 모리 간상배들의 은행 예금고를 조사하고 적산가옥 불하대장을 조사했다. 또, 각 동별로 극빈자를 조사햐여 인민증을 끊어주고 그 소지자에 한해서 식량영단에서 1인당 3홉씩을 배급하기도 하였으며 각 금융기관에서는 정상적으로 문을 열어 사건 전에 대출수속이 끝난 사람들에게 대출을 하였는데,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새로운 신청서가 쇄도하여 혼잡을 빚기도 하였다. 각 사업장에서는 종업원들이 직장 자치위원회를 조직하여 주인들로 부터 운영권을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인민위원회와 보안서는 반역자 처벌을 위한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숙청대상자를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처형하게 하였다. 이 때 강경파와 온건파간에 처형인사의 대상을 대폭으로 할 것인가,소폭으로 할 것인가의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악질적이라고 판단된 우익인사 8명과 사찰계형사 2명이 처형되었다. 처형된 우익인사는 김영준(천일고무사장, 한민당 여수지부장, 일제때 비행기 헌납), 차활언(독촉국민회 지부장, 5.10선거 출마자), 김창업(대한노총 부지부장), 이광선(미 CIC요원), 김수곤(미 CIC요원), 김본동(사업가), 서종형(사업가) 등이었으며 경찰관은 박귀남(사찰계형사), 박창업(사찰계형사) 등이었다. 양심적이라고 판정되었던 20여명의 경찰관들은 석방되었다. 반란군치하의 여수 순천지방의 상황을 여러 자료를 종합하여 날짜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10월 20일 : 폭동군과 좌익에 의해 여수 전시가 점령되자 제일 먼저 읍사무소 자리에 보안서가 설치되고 10시경부터 폭동군은 좌익청년 남녀학생, 그리고 라이터 돌이나 양담배 등을 파는 날품팔이 소녀 등의 안내로 이른바 반동경찰, 반동분자라고 그들이 부르는 경찰과 우익요인등의 수색에 나섰으며 각 동에서는 적발 고발이 들어오기 까지 했다. 체포당한 경찰은 흥분한 군중에게 밟히거나 몰매를 맞고 폭동군에게 잡힐 경우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하기까지 했다. 경찰의 가산은 개방되어 마음대로 가져가게 했다. 또한 인민위원회 간판도 나붙고 각 기관이 좌익들에 의해 접수되기 시작했으며 거리에는 인민대회 포스터, ?제주도출동거부 병사위원회?의 성명서가 나붙었다. 오전에는 이따금씩 보이던 인공기가 오후에는 전시가지에 휘날렸다.

 병사위원회는 여수시를 반란군이 장악하고 있던 시기에 발간되었던 ?여수인민보?에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게 된 동기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설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병사위원회는 ?외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조국을 수호하고,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정부를 팔아먹으려는 이범석, 이승만 등을 처단하기 위하여 봉기를 일으켰다?고 성명서에 밝혔다. 이 성명서에는 제주도 출동 절대반대, 미군도 소련군을 본받아 즉시 철퇴하라, 인공수립 만세 등의 요지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제주도 인민들은 제국주의 정책에 대항하여 지난 4월에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며 조국을 수호하는데 목숨을 바치고 있다고 한다. 병사위원회는, 여수에 있는 모든 장병들은 제주도 인민들을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며, 앞으로도 제주도 파병에 응하지 않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위원회의 주장에 따르면 이번 반란이 진정한 조선인민의 군대로 참여하기 위하여 그리고 고국의 진정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일어선 것이라고 한다.

  오후 3시 반경 중앙동광장에서는 지하에서 비합법적으로 활동하던 민애청, 학통, 민주여성동맹, 합동노조, 교원노조, 철도노조 등이 깃발을 들고 참석한 것을 비롯하여 약 3만여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인민대회는 추도가, 해방의 노래 등으로 시작되었다. 이어 노동자 대표 학생대표, 여성대표, 남로당대표 등이 번갈아 “이제 38선은 터졌습니다” 하는 선동연설을 할 때마다 박수가 있었고 청중 가운데 우는 사람도 허다하였다. 그들은 순진하게 남북이 정말 터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이용기, 박채영, 김귀영, 문성휘, 유목윤, 송욱 등 인민위원회 의장단과 간부가 선출되고 인공에 대한 수호와 맹세 등 6개 항목의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또한 민청원, 남녀학생,30세 내외의 장정들에게 경찰의 총 약 200정, 제 14연대에서 트럭 3대로 날라온 총을 마구 분배하여 소위 의용군을 조직하였다. 마지막으로 최후의 결전가로 대회를 끝마치고 군중시위로 들어갔다.

 10월 21일 :  인민위원회가 기능을 시작, 친일파 모리배 등의 은행예금 동결령 및 재산몰수령이 내려지고 이른바 반역자 적발 색출이 계속되었다. 보안서에서는  한독당을 제외한 한민당, 독촉, 대청, 족청, 서청의 간부 혹은 단원의 문초가 시작되었다. 인민위원회에서는 인구조사와 적산가옥조사를 실시했으며 초저녁에는 경찰서 뒤뜰에서 고인수 서장 이하 사찰계 형사 등 약 10명에 대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이날 2시간의 여유를 준다는 국군의 귀순전단이 살포되었지만  38선이 터졌다는 허위선전에 워낙 흥분한 시민들은 동요가 없었다.

 10월 22일: 식량영단의 창고를 개방하여 1인당 쌀 3홉씩 배급을 시작하였다. 이날도 이른바 반역자의 체포와 문초가 계속되었다. 군청 이하 전 행정기관의 접수를 끝마쳤는데 과장급 이상의 관리는 파면시켰다. 여수역 대합실에서  철도노조의 대회가 있었는데 회의 도중 신성한 대회를 악질 반동을 섞은 채 할 수 없다 고 하여  그들을 추려내어 보안서에 고발하였다. 이날 비로서 국군의 해군함선이 모습을 나타냈다.

 10월 23일: 오수 2시 이른바 최고심사위원회에서 처단 반역자로 결정된 우익인사의 사형이 오후  2시 보안서 앞에서 거행되었다. 처형된 사람은 김영준(천일고무 사장) 박귀환(대하노총 여수지구위원장), 연창희(경찰서 후원회장), 차활인(한민당 간부), 이광선(미군방첩대 여수주재원),최인태(CIC 요원), 김수곤(상동), 박창길(사찰계 형사), 박귀남(사찰계 형사) 등 9명이었다. 한편 체포된 경찰관과 민간인 200여명이 일단 석방되었다. (후에 국군의 공격이 치열해지자 일부는 재구속되어 즉격처분됨) 쌀배급을 계속했으며 이른바 인민군, 의용군 공무원 등에게 천일고무 창고에서 찌까다비를 분배하였다. 각 금융기관에서는 융자까지 했으며 산업기관은 종업원에게 운영권을 위임하기도 했다. 폭동군에게 전매국에 있는 담배를 배급했으며 돌산도에서는 인민재판이 열렸다.

 10월 24일 : 순천방면으로 부터 국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폭동군이 워낙 압도적이어서 국군은 꽤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몇명은 포로가 되었다.  폭동군 측에서도 피해가 있었는데 그 중 탄약을 운반하던 민주여성동맹원 정기덕이 사망하였다. 이날도 식량배급이  계속되었으며 각 기관의 사무인계가 완료되었다. 이날 여수인민위원회를 발행인으로, 박채영을 편집인으로 한 ?여수인민보?라는 신문이 21일자로 발행되었다.

 10월 25일 : 국군의 본격적인 공격이 이날로 개시되었는데  맹열한 교전 끝에 일단 후퇴하였다. 폭동군은 병력을 보강 전력을  재정비했으며 오후 1시 보안서 앞 광장에서 정기덕의 이른바 인민장이 수천명의 시민이 동원된 가둔데  진행되었다.

 10월 26일: 국군의 맹공격으로 가장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었다. 읍주변의  미평, 오림리 부근의 주민들은 피신을 해야만 했다. 폭동군은 국군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구례방면으로 퇴각했으며 여수시내는 대부분 좌익 청년, 학생들이 지키게 되었다. 밤이 되자 여수쪽 하늘이 붉었다. 이날 밤 시장동 일대가 잿더미로 변했다.

 10월 27일: 26일 저녁부터 불이 계속 타오르는 가운데 오전 10시에 국군의 장갑차가 시내로 돌입하였다. 총알과 박격포탄에 죽은 사람, 다친 사람이 속출했으며 집이라는 집에는 모두 구멍이 뚫렸다. 반란병사들은 거의 다 없어지고 학생, 청년들  10명 내지 20명씩 한조를 맡아 지휘하는 극소수가 남아 있을 뿐이다. 오후  2시경 시내를 완전 탈환하고 3시 반경 전 여수읍이 재탈환되었다.


4장  여순사건의 결과


 여수와 순천이 탈환되었다고 해서 여순사건이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진압부대에 의해 읍소재지 및 그 주변지역은 탈환되었지만 폭동, 반란군은 그 주력 및 중요간부들이 주변 산악지대로 도주해서 지속적인 유격전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1949년 전반까지 계속 진행되었으며 이에 따라 전남지방은 경직된 반공체제로 구축되어 갔다. 이 반공체제는 여순지역 탈환직후의 철저한 폭동군 및 부역자 색출과 처벌, 국가통제 및 우익단체의 강화, 남노당을 위시한 좌익세력의 붕괴 등의 과정을 거쳐 완성되어갔다. 이 과정에서 민중들의 민생고는 더욱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다.


 1. 여순사건의 영향과 피해


 1) 반란군 및 동조세력 처벌

 여순지역이 재탈환되자 군경은 계엄령 하에서 가장 먼저 폭동군 및 이에 가담한 부역자를 철저하게 색출하는 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폭동군 및 좌익지도부는 대부분 산악지대로 도주했기 때문에 폭동지역내에는 주로 소수의 폭동군 잔류자와 민간인협력자 소위 부역자가 남아 있었을 뿐이다.

 폭동군치하의 부역자가 적지 않은 상태에서 제 1공화국의 철저한 처벌정책은 민중을 보호의 대상이 아닌 진압의 대상으로 취급했다. 이와 더불어 중요한 문제점은 민간인 참여자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누가 부역자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경찰 우익요인, 청년단원 등 폭동군 치하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집단들에 의해 색출 및 적발작업이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외모, 고발, 강요된 자백이 중요한 근거가 되었으며 여기에다 개인적 감정, 혹은 정치적 중상모략 까지 겹쳐져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거나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폭동군 및 부역자 색출작업은 2단계로 진행되었다. 제 1단계로 시가지를 탈환하면서 거의 전 읍민을 학교 또는 공공시설에 집결시켜 주로 외모(머리가 짧은 자, 군용팬티를 입은자, 손바닥 총을 든 흔적이 있는자,흰 지까다비를 신은자 등) 와 경찰관, 청년단원, 학련생, 우익요인 등의 적발을 통해 폭동군과 부역자를 색출해냈다.폭동군의 즉결처분에 가담하거나 인민재판에서 처형에 앞장섰다고 적발된 자는 즉석에서 곤봉, 개머리판, 체인 등으로 무참하게 타살되거나 혹은 총살을 면치 못했으며 나머지는 따로 수용되어 재심사를 받거나 계엄군이나 경찰에 넘겨저서 심문과 재판을 받았다. 제 2단계 작업은 제 1단계에서 애매하다고 판단된 자, 그후 고발된 혐의자를 대상으로 행해졌으며 이들은 재심사 혹은 심사를 받아 즉석에서 총살되거나 군경에 이첩되거나 아니면 석방되었다. 이 과정은 수개월간 계속되었다.

 순천의 경우 23일 오전 약 5만 명의 읍민이 순천북국민학교 교정에 집결되었다. 먼저 40세 이하의 남자 중 군용팬티를 입은 자, 머리가 짧은 자가 따로 분리되어  경찰, 대동청년단, 학련생 등에 의해 폭동군 및 부역자가 적발되고 그 다음 각 동네별 지방유지, 우익인사에 의해 부역자가 적발되었다. 부역자는 제 1급(인민재판에 적극 참여자) 제 2급(소극적 참여자) 제 3급(애매한 자)로 분류되어 처벌 혹은 재심사를 받았다. 이중 경찰은 악질적이라고 판단한 12명(박창길 검사 포함)을 10월 25일 순천농업중학교 교정에서 총살하였다.

 여수의 경우 27일 오후 여수읍민 약 4만 명을 서국민학교와 인근 국민학교에 분산 수용하여 생존경관, 관공서원, 청년단원, 학생연맹원들에 의해 폭동군 및 부역자가 색출되어 일부는 교사 뒷편에서 즉결 총살당하고 백두산 호랑이로 소문난 제 5연대 김종원 대대장이 교정의 버드나무 밑에서 일본도를 휘둘러 즉결 참수처분을 하기도 하였다. 혐의자들은 다시 동국민학교, 종화국민학교, 진남관, 공설운동장,오동도 등에 재분리되어 심사를 받았으며 그 중 다수는 만성리로 가는 터널 뒷쪽에서 집단 총살되어 그 수효를 헤아리기 힘들었다고 한다.

 28일 여수군청에 계엄사령부가 설치되어 본격적인 부역자 색출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방법은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종산국민학교(중앙국교)로 잡아온 장정들을 닥달하여 자백을 받아내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들의 제보를 받아내는 일이었다. 취조과정은 인간이하의 대접을 하는 잔인한 방법이 사용되었다. 취조관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생사를 결정하는 불법적인 심사가 진행된 것이다. 개인적인 원한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모함적인 투서에 의해 좌익 부역자로 몰려 죽임을 당한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일부의 자료에서는 여수여자중학교의 송홍교장이 인민위원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것은 그것은 잘못된 기록이며 송홍은 오히려 우익인사였으나 개인적인 감정을 갖고 있던 인사의 모함에 의해 목숨을 잃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박창길 검사가 사이가 좋지 않던 경찰들에 의해 좌익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경우 그리고 황두연 국회의원이 인민재판의 배석판사를 지냈다는 이유로 죽음 일보직전에 구출된 경우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적발된 폭동군은 계엄군에 넘겨져서 주로 대전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민간 혐의자는 경찰에 넘겨져서 심문을 받아 일부는 즉결사형을 받기도 했다. 재판은 광주,여수 순천 등 현지에서 진행되었으며 총살형은 공개적으로 진행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방식에 의해 무리하게 조직된 가담자들은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으나 당시의 신문보도에 의하면11월 3일부터 11일까지 전남도경에 검거된 가담자는 모두 3539명이었고 그중 여수출신이 3279명이라고 발표되었다. 순천에서 열린 고등군법회의에서 결정한 판결결과는 총 458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190명이 양민으로 판명되어 석방되었고 102명이 사형,20년징역이 75명,5년 징역이 79명,무죄가 12명이었다.

 육군사령부는 1949년 1월 10일 여순사건과 관련하여 군사재판에 회부된 반란군 혐의자의 재판결과를 발표했는데 총 2817명이 재판을 받아서 410명 사형,568명 종신형,나머지는 유죄 혹은 석방되었다고 한다.


 2) 여순사건의 피해상황


여순사건때 인명피해나 물적피해를 정확하게 기록한 자료는 아직 없고, 또 사건 자체가 정확하게 알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14연대의 주동세력이 백운산,지리산으로 도피한 상황이고 관변측 자료와 시민측 자료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14연대 치하의 인민공화국하에서는 경찰관이 72명,민간인이 16명이 피살되어 모두 88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군의 진압과정은 토벌위주의 강압적인 진압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피해가 있었다. 해군함정의 무차별한 함포사격으로 인해 그리고 2차공격때 무차별한 사격으로 시내의 전건물이 파괴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상당수의 시민이 사망했으리라는 추론은 쉽게 내릴수 있다. 계업사령부에서 발표한 여순사건의 피해상황은 다음과 같다.


여수지구의 피해상황                     순천지구의 피해상황

 반군에게 피살된 관민  1,200명           사망      1,134명

 중상을 입은 관민      1,150명           행방불명    818명

 소실 파손된 가옥      1,548동           전파가옥     13동

 이재민                9,800명


전라남도 보건후생부에서  이재민의 구호자료로 발표된 피해 상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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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 명 피 해              󰠐���     가옥,재산 피해                  󰠐���

󰠉���󰠏���󰠏���󰠏���󰠏���󰠏���󰠏���󰠏���󰠏���󰠏���󰠏���󰠏���󰠏���󰠏���󰠏���󰠏���󰠏���󰠏���󰠏���󰠏���󰠏���󰠏���󰠏���󰠏���󰠏���󰠏���󰠏���󰠏���󰠏���󰠏���󰠏���󰠏���󰠏���󰠏���󰠏���󰠏���󰠊���󰠏���󰠏���󰠏���󰠏���󰠏���󰠏���󰠏���󰠏���󰠏���󰠏���󰠏���󰠏���󰠏���󰠏���󰠏���󰠏���󰠏���󰠏���󰠏���󰠏���󰠏���󰠏���󰠏���󰠏���󰠏���󰠏���󰠏���󰠏���󰠏���󰠏���󰠏���󰠏���󰠏���󰠏���󰠏���󰠏���󰠏���󰠋���

󰠐��� 지역   사망   중상  경상  행방불명󰠐���  소실   전파   반파     피해예상액 󰠐���

󰠉���󰠏���󰠏���󰠏���󰠏���󰠏���󰠏���󰠏���󰠏���󰠏���󰠏���󰠏���󰠏���󰠏���󰠏���󰠏���󰠏���󰠏���󰠏���󰠏���󰠏���󰠏���󰠏���󰠏���󰠏���󰠏���󰠏���󰠏���󰠏���󰠏���󰠏���󰠏���󰠏���󰠏���󰠏���󰠏���󰠊���󰠏���󰠏���󰠏���󰠏���󰠏���󰠏���󰠏���󰠏���󰠏���󰠏���󰠏���󰠏���󰠏���󰠏���󰠏���󰠏���󰠏���󰠏���󰠏���󰠏���󰠏���󰠏���󰠏���󰠏���󰠏���󰠏���󰠏���󰠏���󰠏���󰠏���󰠏���󰠏���󰠏���󰠏���󰠏���󰠏���󰠏���󰠋���

󰠐��� 여수  1,300   900   350     3,500  󰠐���  1,538          198     37억 3천만원󰠐���

󰠐��� 순천  1,135   103             818 󰠐���     13                     1,350만원󰠐���

󰠐��� 보성     80    31    30         7 󰠐���            3      2          200만원󰠐���

󰠐��� 고흥     26    42     8           󰠐���                                     󰠐���

󰠐��� 광양     57                       󰠐���                                     󰠐���

󰠐��� 구례     30    50   100           󰠐���           38               1,460만원󰠐���

󰠐��� 곡성      6     2                 󰠐���            4      6          450만원󰠐���

󰠉���󰠏���󰠏���󰠏���󰠏���󰠏���󰠏���󰠏���󰠏���󰠏���󰠏���󰠏���󰠏���󰠏���󰠏���󰠏���󰠏���󰠏���󰠏���󰠏���󰠏���󰠏���󰠏���󰠏���󰠏���󰠏���󰠏���󰠏���󰠏���󰠏���󰠏���󰠏���󰠏���󰠏���󰠏���󰠏���󰠊���󰠏���󰠏���󰠏���󰠏���󰠏���󰠏���󰠏���󰠏���󰠏���󰠏���󰠏���󰠏���󰠏���󰠏���󰠏���󰠏���󰠏���󰠏���󰠏���󰠏���󰠏���󰠏���󰠏���󰠏���󰠏���󰠏���󰠏���󰠏���󰠏���󰠏���󰠏���󰠏���󰠏���󰠏���󰠏���󰠏���󰠏���󰠋���

󰠐���  계    2,634  1,128  488    4,325  󰠐���  1,550    45    206   37억 6,460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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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현지를 답사하고 쓴 일선 기자의 글인데 이는 여순반란사건의 참혹성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해준다.

 “ 인심좋은 순천(順天)은 역천(逆天)되고 山高水麗하다던 여수(麗水)는 악수(惡水)로 변했지라우, 군인의 거리가 되어버린 듯한 순천을 찾아든 기자는 이런 말을 먼저 들었다. 구멍난 유리창은 종이로 발리워졌고 시내에 즐비한 시체는 화장,매장,혹은 거리 밖으로 다 처치되었다. 지나가는 완장찬 학생에게 그 전날의 사태가 어떠하였는가를 물어보았다. 단번에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반만 열어 놓은 한약방을 찾아 인사를 나눈후 같은 말을 물어보았다. 역시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조무래기들을 보고 한번 더 물어보앗다. 서로들 얼굴만 처다볼 뿐 주저주저한다.너희 집은 별고 없는가 하고 유도 질문을 하여 보았다. 한 아이가 고개를 푹숙였다. 다시 한 아이는 고개숙인 아이를 가리키며 아버지가 죽었다고 말한다. 다음 아이는 저집 아저씨도 죽었다고 길 건너 집을 가리킨다. 이 애도 저 애도 연이어 말문을 연다. 저 집 2층에서도 저 길에도 이 옆집에도 죽은 이가 있다고 말한다. 너희 아버지가 순사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말한다.왜 죽었느냐고 물으니 마루 밑에 숨어 있다가 날아 온 총알에 맞았다고 한다. 다시 발을 옮기어 반란군이 들어왔을 때 처단받았다는 경관복 입은 시체를 보았다. 남편 시체 옆에서 넋잃고 우는 젊은 아내의 목매어 부르짖는 소리는 갈까마귀의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고막을 무자비하게 두드리는 것이다. 왜 시체가 아직도 남았느냐고 물은 즉 경관이 죽기는 죽었으나 죽은 이는 다른 곳에서 응원온 이가 더 많아 유가족 오기를 기다려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2. 여순사건의 정치적 함의

   1) 우익세력의 조직화

  폭동군이 산악지역으로 잠입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자 정부는 여순지역에 국한해서 선포했던 계엄령을 1948년 11월 1일을 기해 전남북지역으로 확대 선포하였다. 또 여순지역에서는 폭동군 치하에서 해체되었던 정당,사회단체들이 재조직되기 시작하였으며, 우익 청년 학생단체는 강화 혹은 신설되기 까지 했고, 5.10선거를 전후해서 존속했던 향보단과 같은 경찰보조단체는 민보단 혹은 의용단이라는 명칭으로 재조직 강화되었다.

 순천의 경우 충무부대가 신설되었다. 이 단체는 순천경찰서 사찰과 산하의 단체로서 학생연맹과 청년단 출신의 대원 총 79명으로 구성되었으며 한민당,대한부인회 등의  지원과 협조하에 폭동군에 대한 정보 입수,척후 탐지 등을 통해 군경진압부대를 지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광주의 경우  학련결사대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군정보처와 밀접한 협조하에 광주시내의 좌익학생들의 동향에 대한 정보보고,광주에까지 잠입한 폭동군에 대한 색출작업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또한 여순지구에 원정하여 좌익학생들에 의해 파괴된  학련동지를 재규합하고 군사령부 직속으로 정보교환,민애청 등의 좌익학생 색출,진압군의 후원(의복,음식제공,침식제공 등) 등의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여수의 경우 폐허화된 여수재건을 위해 10월 28일 여수부흥기성회라는 민간단체가 조직되었다. 회장에 문균,부회장에 정재완,총무부장에 정경수,재무부장에 박홍근, 선전부장에 장기 등이 중심이 된 이 단체는 주로 군관민의 교량역할을 하였다. 계엄사령부 관계자들의 숙소, 식사 등의 뒷바라지는 물론 시민들의 희생을 줄인다는 목적과, 중앙에 건의하여 복구자금을 타내는 활동을 벌렸다. 또한 부흥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시민사상선도에 앞장섰으며 부역자 색출과정에서 궁지에 빠져있는 우익 지방유지를 구출하기도 하였다.

 한편 제 8관구 경찰청장 김병완은 11월 11일 시장, 군수, 중등교장 및 각 정당, 사회단체장과의 합동회의 석상에서 여순사건의 사후대책을 논의하였는데, 그 주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찰력을 대규모로 증원하여 각 경찰서에는 50명 내지 100명,각 지서에는 20명정도의 결사기동대를 설치하고,

 둘째, 각 군마다 민보당을 결성 경찰력을 보조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11월 23일 광주에서 1635명의 단원으로 구성된 의용단 결성을 필두로 12월 중에 전남도내 각군에 의용단이 결성되었다.

 이와 같은 우익단체 및 국가통제력의 강화는 전남도내에서 인민위원회 간판이 가장 늦게까지 걸려 있었고 게릴라들의 내습이 가장 빈번했던 지역중의 하나인 구례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구례에서는 1949년 1월 현대 대동청년단 산하에 18세 이상 45세 이하의 성인남자 1600명의 읍민이 800명씩 격일제로 동원되어 죽창을 들고 군경의 경비업무를 보조하고 있었으며 구례읍 주변의 언덕과 동산에는 경비선이 내외선으로 깔려 있어 그야말로 완전 전시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또 구례군의 모스크바로 불리었던 산동면의 경우 일반 부녀자들로 구성된 부녀죽창부대까지 등장하고 있었다.


2) 여순사건이후의 정세

  막대한 인명과 재산피해를 낸 제주도 4.3사건과 여수반란사건이 있은 후 좌익은 이제까지의 국지적인 무장투쟁을 남한전역으로 확대하기로 결정하고, 1949년 7월에는 ?남조선인민유격대?를 조직하고 7월과 9월 두차례에 걸쳐 소위 ?7월공세?와 ?9월공세?라는 대규모 무장유격전을 전개했다. 이러한 무장유격전은 민중봉기를 유도하는 한편 정부병력을 공비준동지역에 고정 배치토록 함으로써 38선 지역의 국군병력이 약화되도록 하려는 목적을 띠고 있었다.

  좌익세력은 이상과 같은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동시에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총선이후 그 결과를 부정하고 단독정부수립을 비난하는 집회.시위.동맹휴교 등 각종 소요를 주도했던 것이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단정반대를 주장하던 좌익은 1948년 9월 9일 북한공산당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을 공식적으로 (?인공?은 실제로는 남한의 단정수립 이전부터 기능하고 있었다.) 선포하자 ?인공지지투쟁?으로 전환되었다. 좌익은 북한의 인공이 한반도 전역으로 통치권을 확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또 북한공산정권의 노선을 지지하기 위해 그러한 투쟁으로 전환한 것이다. 좌익의 인공지지투쟁은 인공기게양투쟁, 인공지지파업, 정치인 포섭 등 여러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좌익세력의 이승만정권의 체제전복을 위한 폭력적. 정치적 도전은 역으로 이승만 정권으로 하여금 더욱 극심한 반공주의를 내건 국가로 공고화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사정 속에서 우익정치인사들로 구성된 국회와 행정부는 반공노선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고 1948년 12월의 국가보안법이 그 구체적 예로서 나타나게 되었다.


 3) 여순사건의 진상규명을 제언

1998년 국민의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동안 잠복해있던 정치적 미완의 문제들이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다. 그동안 군사정부의 반공정책으로 인한 삼엄한 분위기하에서는 도저히 제기할 수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들이 돌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발?추어 해당지역의 국회의원들도 50년전의 해원을 위해 많은 노력들을 하고 있으며 특별조사단을 구성하여 당시의 상황을 규명하려는 노력들을 하고 있다. 함평, 영광, 나주지역 등 각 지역들이 독자적으로 노력을 하고 있지만 보다 바람직한 방향은 지역들간의 연대를 통하여 총체적으로 풀어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그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는 노력이 기본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 일차적으로 당시를 경험한 분들이 고인이 되기 전에 그들의 생생한 증언을 시급히 수집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80고령에 접어든 분들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잘 아는 전문가들이 동원되어야 하고 이들의 엄밀한 검증을 통한 증언 채록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제주의 4.3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들은 민간차원의 연구소를 만들어 자체적으로 그동안 많은 자료집을 출간하였고 이를 통해 국제연대활동 뿐만아니라 국제학술회의까지 수차에 걸쳐 치루었다는 점은 여순지방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광주 전남지방은 다른 지방에 비해 개방적인 분위기가 강한 지역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당시를 체험한 분들의 이야기를 이끌어내기가 좋은 환경이다. 또한 많은 인사들이 생존해 있음을 본인의 경험으로 확인하였다. 이들의 겸험을 대중화시켜 역사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면서 이들의 활동을 복원시켜주어야 한다. 언론의 역할은 이러한 분야에 집중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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