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칠팔 년이 훌쩍 지난 일이다. 그해 늦봄에 기침과 함께 가래에 피가 섞여 나왔고, 왼쪽 가슴 상부가 우리이-하게 아팠다. 동아대병원 암 전문의에게 시티와 엑스레이를 찍어보았더니 다행이 폐암은 아니라고 한다.
나는 6.25사변 피난통에 폐렴을 앓았다. 고교 때는 장티푸스에, 또 그 재발로 3달을 죽다 살았다. 대학 때는 자고 나면 언제나 등 자리에 식은땀이 축축했지만 병원이고 약이고 생각도 못했다. 그럴 돈 있으면 친구와 술 한잔 더 한다는 주의였다. 국립사대 의무발령 전에 국공립 병원(대구의 경우 적십자 병원)에서 료 결핵검사를 받는데, 그 때서야 결핵으로 왼쪽 허파 상부에 구멍이 3개 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행히 자연치유가 되었다고 했다. 기록으로는 ‘비활동성 폐결핵’으로 나왔다. 비활동성이 다시 활동성으로도 되느냐고 물으니, 약 투여 없이 나았기 때문에 그럴 염려는 없다고 했다. 돈 없어 약 못 먹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기 전문의는 내 이런 병력이 나이가 들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하면서 좀 두고 보자고 했다. 그래서 2주정도 지나니 좀 괜찮아졌다. 하지만 산 넘어 또 산이다. 드디어 집사람에게 척추협착이 왔다. 할매의 푸석푸석해진 뼈로 만 2년을 노가다 일 한 댓가가 결국 온 것이다. 눕지도,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그저 고통의 신음만 계속이다. 병원 약을 먹고 진통주사를 맞아도 별 차도가 없다. 하루 24시간 내내 그토록 아프니, 나 역시 죽을 지경이다.
이 와중에 나는 벼르고 벼르던 비뇨기과에 갔다. 몇 년 전부터 내 고환이 세 개인 것처럼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 누구는 삭부랄이란다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삭부랄이 뭔지도 모르면서 내가 바로 삭부랄인 가부다 생각하고 그냥 지냈다. 이제 나이가 나인지라 혹시나 싶어 가까운 비뇨기과에 같더니,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하면서 얼른 대학병원에 가보라고 진료의뢰서를 써준다. 와락 걱정이 든다. 하지만, 도저히 시간이 나질 않는다. 10월과 11월 상순에 이사가 제일 많으니, 10월 내에는 꼭 일을 마쳐야 한다는 요청 때문이다. 그래서 비뇨기과 문제는 11월로 미루고, 주말이고 휴일이고 없이 시멘콘크리트작업을 연거푸 10일정도 했다. 이제 집사람은 빠지고, 나 혼자 해야 하니 하루에 해내는 일 양이 얼마 못 된다. 이 판국에 또 가슴이 우리이-하기 시작하더니 다시 객담에 객혈이다! 완전 설상가상이다. 몇일 내에 실외 콘크리트작업을 마쳐야 하니 바로 병원에 갈 수가 없다.
미루고 미루다가 어제와 오늘 부산대병원에 가서 큰 돈 들여 기관지 시티촬영, 기관지 내시경 검사를 했다. 오늘 기관지 내시경 검사, 우화- 위 내시경 검사는 저리 가라다, 억수로 힘들었다. 오후 1시부터는 어제 저녁부터의 금식을 풀고 물,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간혹 어떤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으니 이틀 정도는 몸조리 잘 해야 한다고 해서, 점심 묵고는 좀 누워 쉬려고 했다. 그런데 물과 식사로 좀 살 만하니, 멀리 나가서 하는 일이 바빠 미루어 두었던, 내 사는 고물 집의 이런저런 일들 생각이 나를 압박해왔다. 그것들을 어서 해치워야만 하루라도 빨리 내 공부방에 들어앉을 수 있다는 생각에 쉬기를 생략하고, 저녁밥 때를 넘겨가며 열나게 뚝딱거렸다. 아침 일찍 병원스토리부터 시작해 오늘 온 종일 분주 복잡 정신없이 바빴다.
늦은 저녁식사를 마치고는 이제야 좀 쉬려고 하는데, 집 사람이 허리가 아파 꾸부정하게 식후과일을 들고 오면서 느닷없이 묻는다. “당신 오늘 무슨 날인지 아시우?”
“날은 무슨 날… 와 카는데?”
“노래 가사에 있지 안수 왜, ‘10월의 마지막 밤’이라고… 오늘이 바로 10월의 마지막 밤이유”.
“아- 그래?” 하면서 식탁 바로 옆에 걸려있는 작은 달력을 보고는 나도 몰래 탄성이 나왔다. “아하- 그러네. 오늘이 바로 이용이 부른 <잊혀진 계절> 바로 그 ‘10월의 마지막 밤’이네!” 순간 내 마음 한 구석에서 삼삼한 정서가 피어 오르기 시작한다. 하루 세 때 끼니가 힘들 때도 많았지만 우정에 배부르고, 사랑으로 가슴 설레던 기쁜 우리 젊은 날! 마치 꿈결처럼 떠 오르는데…
그런데 집 사람 왈 “10월에 당신이 한 게 뭐가 있수?”
‘어 이거 무슨 찬 물?’ 로맨틱이랄까, 멜랑콜리랄까 삼삼한 정서가 싹 가셔진다. 잠깐 생각과 침묵.
다시 집 사람 왈 “옆에 그 신문 스크랩 한 번 보슈”.
나는 목을 오른 쪽으로 돌렸다. 순간 나는 “아-하, 참 기가 찬다” 하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그 작은 달력의 여백과 조금 겹치도록 집게로 집어서 고개만 달력 쪽으로 돌리면 바로 보이도록 해 둔 스크랩을 들여다 보았던 것이다. 우리 구청신문 <내고장 사하>에 10월의 주요 문화행사가 나와있었는데, 행사 일이 모두 14일이나 되었다. 책과 필을 놓은 지가 오랜지라, 이번 10월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일 틈틈이 속살을 좀 찌워야겠다는 생각에 이것만은 반드시 참석할 결심으로 빨간 사인펜으로 표시를 해 둔 스크랩이다:
**10일, 을숙도 명품콘서트 <베버의 클라리넷 협주곡 제1번>
**17일, 김수우 시인의 <공감의 상상력을 위하여>
**18일, 을숙도문화회관의 제9회 부산국제합창제
**31일, 정형진의 <고대문화 새로 읽기>
그래서 어떻게 됐는가? 부끄럽고, 한심하게도 단 한 곳도 참석하지 못했다. 아니, 참석은 커녕, 그 스크랩을 드려다 본 기억조차 없다! “10월에 당신이 한 게 뭐 있수?” 이거 정말이다. 도대체 10월이 다 가도록 내가 무얼 했단 말인가… 이카다가는 늙어가민서 머리 속에 ‘10원짜리’로만 더욱 꽉 차게 되는데…… 바로 좀 전의 그 삼삼한 정서와는 정반대로, 자괴감이 마음 깊수우-욱이 들면서 복잡미묘한 감정이 밀려온다: 아름다웠던 젊은 날들이 꿈결처럼 피어 오르고; 뒤이어 낭떠러지 같은 느낌의 허탈함과 자괴감이 들었으며; 뒤이어, 속절없이 그 스크랩을 떼 내어 휴지통에 넣으면서, 뭐라고 형언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에 든다. 곧 이어 무거운 궁금증이 뒤따른다: 몇일 후 객혈검사 결과가 나오는데, 과연 어떻게 나올지… 조만간 또 대학병원에 가서 붕알 정밀검진을 받아야 하는데, 별 것 아니어야 할 텐데……
아- 어찌 이리도 복잡.다난.미묘한 심상의, 10월의 마지막 밤이란 말인가! 젊은 날의 그 아리삼삼하던 10월의 마지막 밤이 엊그제 같은데…… 깡술로 피를 여러 번 토하면서도 평생을 술로 살아온 이 인생, 오늘같은 밤 어찌 한 잔 술생각이 없을 손가. 병원의 그 당부는 없었던 것으로 하고 소주 몇 잔을 기울인다. 역시 나에게는 술이 구원이다: 토셀리의 세레나데가 귓전에 들려오는 듯하다, 가슴 저며오는 이 아름다움이여!
사랑의 노래 들려온다, 옛날을 말하는가 기쁜 우리 젊은 날
금빛같은 달 빛이 동산 위에 떠오면
그 때 자미롭던 그 때 그 때가 꿈결과 같이 지나 가건만
내 마음 속 깊이 새겨진 그대!
아-그리워라, 사랑아...
과연 아름다운 감정은 활기(活氣)를 불러오는가. 느닷없이, 그냥 제목만으로 아는 헤밍웨이의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가 생각난다. 그렇다. 내일이면 11월의 첫 해가 떠오른다. 이제 이삼 일이면 급한 일은 끝난다. 11월의 내 가을은 보다 힘차고, 아름다울 것임을 꿈꾼다: 구미에 사는 손아래 친구와 직지사 일대 단풍구경 하기로 했고, 또 서울.대구 동기들과 다맛하야 단풍으로 물든 문경세제를 걷기로 되어있고, 또 여기 부산동기들을 따라 가을산을 하루 즐길 것이고, 또 최근에 노처녀 막내딸 치운 서울 의형님이 놀러 오신다 하셨고, 또 안동 친구집에 2박 하면서 청송 주왕산 일대 단풍구경 댕기기로 했고, 또 멀리 런던의 딸애가 대전 카이스트에 일로 왔다가 집에 들린다 하고, 또 여름에 와서 호사스럽게도 링컨컨티넨탈로 이 영감.할마이를 2박3일 지리산 남부 일대 구경(나로서는 20년도 넘게 처음) 시켜주고 간 서울 손아래 친구는 중부지역 어디에 단풍구경 가자고 날짜를 잡고 있는 중이고, 또 바로 옆에 을숙도문화회관에서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케빈 케너화 함께 정경화 바이올린 리사이틀이 있으니 꼭 가 볼 것이고… 이번 가을의 맨 끝자락, 11월의 마지막 밤에는 과연 어떤 결산이 나올까?
문득 내 기억 데로의 푸쉬긴 시가 떠오른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너무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
과거는 항상 아름다운 것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그러나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2020년, 10월의 마지막 밤에
강 학 순
첫댓글 학수이 가을이 나하고 엇비슷하네 ㅋ
나도 병원과 친하면서 가을이 휘~익 지나갔는데...
이마트에서 칠레산 G7 반값 세일 때 10병 사놓고 오늘도 한 병 까서 취하고 있네.
학수이 이 글 보니 한 병 더 까야겠네...
정표, 시적 함축인 행간을 읽었네...
난도 오늘 막걸리 한 통 비울 것일세.
한 통으로 될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