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덕흥리에 있는 벌명당 반남 朴氏 시조 호장공 朴應珠의 묘입니다.
묘역 원경
조금 당겨서 본 묘역
묘역 정면도
묘역 입구에서 본 모습
앞의 묘가 시조 호장공 박응주의 묘이고, 뒤에 묘는 손자 박윤무의 묘입니다.
작명등 구멍으로 본 시조 묘
묘 전경
卯.甲으로 들어온 우선룡에 좌선수의 자리로 甲입수, 卯坐酉向
묘역 전경
전순과 명당
고려 호장 박公 응주 지 묘
좌 청룡 45도 방 모습
조안산 전경
내수가 左水到右하여 당을 지나 우측의 물과 합수되어 다시 당전을 지나 좌전방으로 파구되어 나갑니다.
우 백호 45도 방의 모습
외백호가 잘 감싸주고 있는 형국으로 외백호 끝이 안대를 하고 있습니다.
우 백호 90도 방에 금체의 기봉이 특별해 보입니다.
주변이 모두 낮은 산으로 된 지형에서는 이정도의 기봉도 큰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뒤쪽의 손자 박윤무 묘 (이런 경우를 역장이라 하지요.)
박윤무 묘 앞에서 호장공 묘로 이어지는 입수에 석맥이 박혀있는 것이 보입니다..
펑퍼짐한 입수룡의 단점을 일거에 씻어내는 변화의 모습으로 호장공 묘로 입수하는 기운으로 사료됩니다.
박윤무 묘비
조선 초기에 묘를 쓴 것으로 후손이 벼슬을 하여 증직을 받은 것입니다.
다시 보는 묘역 전경
평야지대로 내려온 평강룡이 결작한 편안한 福地로 앞쪽의 시조(박응주) 묘가 정혈에 들었습니다.
萬代 富貴吉昌之地의 평온한 복지에 조상을 모셨기에 그 후손에게 음덕이 대대손손 이어지나니....
반남 박씨의 번창함은 시조 호장공 묘에서부터 시작 되었음을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시조 묘와 더불어 후대에 와서 경남 합천군 묘산에 있는 박소의 묘가 명당이며, 그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됩니다.
* 벌명당 호장공 묘에 얽힌 전설
반남 朴씨의 시조는 고려 때 호장을 지낸 박응주인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박의는 이웃마을에 사는 박씨 성을 가진 지관을 모셔다가 명당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박지관은 고개 너머 자미산(자미산성이 있는 산)의 느긋한 산허리를 둘러보더니 덕흥리 동쪽에 묘자리를 잡아주었다.
풍수지리라면 박의도 조금은 아는데 자신이 보기에는 박지관이 잡아주는 자리보다 차라리 그 밑이 더 좋을 듯 싶었다. 그러나 워낙 유명한 박지관이 정해주는 곳이라 우선 표를 찍어놓고 속으로는 아무래도 의심스러워 박지관의 뒤를 밟아 보았다. 집으로 돌아간 박지관이 부인의 마중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가자 박의는 재빠르게 마루 밑으로 기어 들어가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부인이 "호장어른 묘자리는 괜찮은 데로 잡아 드렸나요?"라고 묻자 박지관이 "기막힌 자리가 있었는데 그 자리를 가르쳐 줬다가는 아무래도 천기를 누설한 죄로 화를 입을 것 같아 그 자리를 살짝 피해 좀 위쪽에 있는 자리를 잡아주었지. 그 자리도 무던합디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를 들은 박의는 이튿날 박지관이 말한 천하의 명당에 무덤을 쓰기로 하고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이를 도와주려고 고개를 넘어온 박지관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가 박의에게 "왜 내가 잡아주는 자리는 피하느냐"고 물었더니. 이 자리가 더 좋을 듯 싶어서 약속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박지관은 "이것은 모두가 운명일세. 사실 자네가 파는 이 자리가 명당일세. 내가 화를 입을 것같아 입을 다물었는데 자네가 알아냈으니 자네 가문의 복일세"라 말하고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런데 박의가 다시 구덩이를 파려고 하니 구덩이에서 새만큼이나 큰 벌이 솟아 나오더니 고개로 넘어가던 박지관의 뒤통수를 쏘아 죽였다고 한다. 그후 고려 때의 아전이었던 박응주의 후손은 현손 박상충이 예조정랑에 이르고 이어 벼슬실이 끊기지 않아 조선시대에 반남 박씨는 명문거족이 되었다. 이를 두고 후손들은 명당의 발복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박지관이 벌에 쏘여 죽은 고개를 '벌고개'라 부르고, 박응주의 묘자리를 '벌명당'이라 부르고 있다. 박씨 문중에서는 벌고개 바위에다 이를 기려 '峰峴'(봉현)이라 새기고, 오늘날까지 매년 시월 보름날 박지관의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 한다.
나주군청 홈피의 글입니다.
* 벌명당의 전설은 반남 박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울 사당동 동래 정씨, 전북 완주 산정마을 진주 소씨 선영도 이와 비슷한 벌명당 전설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벌명당’이란 뒷산(주산)의 우뚝 솟은 봉우리가 멍덕(재래식 벌통 위를 덮는 뚜껑. 짚으로 틀어서 바가지 형태로 만듦) 모양이면서 주변 형세가 꽃의 이미지를 띤 것을 말하는데, 이곳에 무덤을 쓰면 벌떼처럼 자손이 번창하고, 또 그 벌떼들이 부지런히 꿀을 모으듯 재물과 명예가 엄청나게 쌓이는 소응(昭應·감응이 또렷이 드러남)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반남 박씨뿐만 아니라 진주 소씨, 동래 정씨를 위해 벌명당을 소점해준 지관은 모두 벌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으로 전해 옵니다.
* 아래에 반남 박씨의 유래와 발자취를 펌글로서 소개합니다.
[반남박씨의 발자취]
박씨는 가장 순수한 혈족을 이어온 씨족으로 약 2,000여년 전부터 한반도 동남부 지역에 살았던 배달민족의 후예로서 오랜 역사를 지녔는데,모든 박씨는 혁거세를 시조로 하여 여러 본으로 갈라지었다. 반남박씨는 호장공(戶長公)『박응주 朴應珠』를 1세(世)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라 국운이 쇠퇴해질 무렵 정국혼란으로 박씨들은 각지방으로 흩어져 반남,고령,죽산,밀양등지로 분산(分散)거주(居住)하는 동안 약 280 여년간을 형제지간(兄第之間)에도 연락 하지 못했다. 호장공은 반남에 거주 하였으므로 본관을 반남으로 하였고,신라 경애왕(景哀王 ?-927)으로부터 호장공 까지는 약 280 여년간이 상거(相距)했다.
이 기간의 사적(史蹟)은 상고(祥考)할 길이 없어 계통(系統)을 밝힐수 없으나, 4세 밀직공(密直公)의 계축호적(癸丑戶籍)을 기초로하여 상계(上系)로 호장공 까지의 계통(系統)을 밝힐수 있으나 호장공 상계(上系)은 선인(先人)들도『기선(其先)은 부지(不知)』라하였고,현존하는 반남박씨의 성을 가진 사람은 모두가 호장공 한분의 자손인 까닭에 호장을 시조로 모시는 연유(緣由)인 것이다.
호장공의 생존년월은 정확하게 전해 내려오는 것은 없으나 4세손 밀직공(수秀)의 호적에 의하여 추정할수 있으니 호장공께서는 고려 희종(1205-1211)초 서기 1200년대에 반남에서 생장(生長)하시어 고려 고종(1214-1259)때에 반남 호장(戶長)으로 계시면서 반남박씨의 가문을 열으셨다.
호장공의 묘역은 반남박씨의 성지이다. 호장공의 묘역은 조선 세종때 박은( 평도공)께서 묘역 보호를 위하여 현 상로재 북편 언덕에 석천암(石泉庵)을 건립하였는데 1739년(영조15) 10월 화재로 소실되었고 중건할때 현재의 석천리로 옮겨 중건하였다. 한편 인성왕후(인종).의인왕후(선조)께서 교지(敎旨)를 내리시어 정성을 다 하셨다.
광해군때 13세 박동열(朴東說 1564-1622 형조참의 ,應福의子)이 나주목사로 오셔서 표석(表石)을 개수 하시고, 1709년(숙종35) 박필명(朴弼明 1658-1716 사헌부대사헌,應男의 6世孫)께서 안찰사로 오셔셔 표석을 다시 세우셨고,1762년 (영조38) 19세 박도원(朴道源 1714-1776 사헌부대사헌, 東亮의 7世孫)이 안찰사로 오셔셔 상석(床石)을 개수 하셨다. 호장(戶長)이란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의하면,고려 성종때에는 향직(鄕職)이 2품이었고 현종때에는 1품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호장 이라고하면 군(郡),현(縣)의 으뜸가는 행정관(行政官)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반남박씨의 시조(始組) 호장공은 나주 반남지방 호족(豪族) 출신 행정관인 것이다.그때의 관인이 석천암에 보관 되어있었으나 조선 영조 16 년(1740년)승려(僧侶) 의 실화(失火)로 소실(燒失)되었다.
호장공의 후예는
왕후.빈(王后 嬪) 3名 『인성왕후』『의인왕후』『현목수빈』
문묘배향(文廟配享) 1名 『박세채』
돈영부(敦寧府) 3名 『박 용』『박응순』『박준원』
의빈(儀賓) 5名 『박 미』『박태정』『박필성』『박명원』『박영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