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편(Mordern Philosophy), in 서양 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45)(러셀, 최민홍, 집문당, 1996(원, 1945, 수정 1961), I 722, II 489.) .
-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영국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
*** 현대편(Mordern Philosophy) 하권
제1부 르네상스에서 흄에 이르기까지 11-269
제2부 루소에서 현대까지 271-487
제30장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 463-476
1859년에 태어난 중요한 철학자 셋이 있다. 미국에서 듀이(Dewey, 1859-1952), 독일에서 후설(Husserl, 1859–1938), 프랑스에서 벩송(Bergson, 1859-1941)이다. 이 세 철학자들 각각은 자신이 속하는 지역의 문화에 의해 다른 철학의 길을 갔다. 듀이는 영국 공리주의가 미국으로 이전되어 실용주의로 그리고 그 자신은 탐구와과 증거를 통한 도구주의에 이르렀다. 후설은 독일 철학의 관념적 인식의 문제를 현상에서 구현된 인식의 문제로 바꾸어 보면서 선험적 현상학의 길을 열었다. 벩송은 약간 예외적 철학자로 프랑스의 학적제도 바깥에서 새로운 형이상학, 즉 스토아와 플로티노스 그리고 스피노자의의 내재성을 근원으로 하는 새로운 철학의 길을 제시했다. / 듀이는, 소위 말하는 제국주의 철학의 주류인 논리 실증의 길에서, 즉 칸트의 인식적 틀에서 벗어난 철학을 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 자신이 속한 문화가 그 틀을 벗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사상도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후설은 그 논리의 위기를 깨달았을 때, 이미 독일은 그 문화의 늪에 깊숙이 빠져 있어서, 하이데거조차도 그 사회에 동의하였다가, 경고하거나 후자처럼 발뺌을 하였을 때는 이미 늦은 감이 있다. 벩송은 전통의 문화에 저항하였는데, 자의든 타의든 대학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프랑스의 오랜 철학적 전통은 대학 바깥에 있었기 때문에 저항 또는 전복의 철학을 계속 할 수 있었다. (50WKC) [러셀은 이들 셋보다 13년 후배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러셀은 20세기 독일 철학을 무시하였다.]
일반적으로 퍼어스와 제임스 실용주의에는 실재성에 대한 탐구와 논의가 있는데 비해, 듀이에 와서는 실재성에서 후퇴하여 – 칸트가 물자체를 인식에서 제외하듯이 – 현상의 관계들에서 유용성과 실용성을 강조하면서, 도구성의 강조로 나간다. 즉 산업사회의 상황에서 교육받은 대로 일의 결과가 나오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에서 실재성을 벗어나 물체들 사이의 관계에서 결과를 보증해줄 수 있는 측면을 강조하고, 나아가 상황에 맞게 살아가는데 도구 또는 결과로서 도움이 되는 측면을 탐구하여, 진리치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실재성을 벗어난 실용성은 현실적 활동에서 결과의 중요시로 나가고, 상품의 유용성과 실용성에 가치를 두는 상품자유주의에 영합하는 경향을 보인 것이리라. (50WKG)
*** 내용
제30장 존 듀이 463-476
1859년에 출생한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는 일반적으로 현재 살아 있는[이 책의 완성은 1945년이니까] 미국의 지도적인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나도 그가 지도적인 철학자라는 데 이의가 없다. .. 그는 매우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그의 견해는 자유주의적이며 대인 관계에 있어서 너그럽고 친절하며 일을 하는 데 지칠 줄 모르고 일에 열중한다. (463) [러셀은 같은 계열로서 찬사를 할 만 하다.]
그러나 나는 유감스럽게도 그의 가장 두드러진 학설에 대해 의견을 달리한다. 그것은 그가 논리와 인식론의 기본 개념으로서의 “진리”를 “탐구(inquiry)”로 대치하는 것이다. (463)
그가 1894년 시카고 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에서 철학교수가 되었을 때 그가 담당한 과목 중에는 교육학도 있었다. 그는 진보적인 학파를 창설하였으며 교육에 대해 많은 글을 썼다. 그리하여 당시 쓴 글을 학교와 사회(The School and Society, 1899)라는 책으로 엮어 놓았다. (464)
러시아를 방문하여서는 부정적인 영향을 받고, 중국 방문에서는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는 부득이 1차 대전을 지지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주장했던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의 범죄를 조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그러나 그는 트로츠키의 혐의가 근거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스탈린 시대에 트로츠키가 레닌의 후계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소련이 더 만족할 만한 나라가 되었으리라고 보지 않았다. (464) [러셀의 서술보다 아래 연표를 참조하시라.]
듀이의 저작이 갖는 중요성은 엄밀한 철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진리”의 전통적인 개념에 대한 비판에 있다. 이것은 그가 “도구주의(道具主義)”라고 부르는 학설에 나타나 있다. (464)
거의 모든 직업적인 철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진리란 정(靜)적이고 궁극적인 완전(完全)이며 영원(永遠)한 것이다. 종교적인 술어로 말하면 진리는 신의 견해와 일치 또는 이성적 존재자로서 인간이 신으로부터 나누어 갖는 견해와 일치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464) [상층 철학자의 견해로서, 상층 권력의 이중성(군주와 제사장)은 완전하고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심층이라는 물 위에 뜬 배인데 말이다. 심층이 자기 의미화와 주체성의 표현은 19세기 말에서야 겨우 드러나며, 그것도 서구 일부 사회에서 뿐이다. / 1953년 이래로, 반도체의 등장으로, 물적 토대의 변화가 인민의 성장이다. (50WKC)]
듀이 사상의 관심사는 수학적이었다기보다는 생물학적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상을 진화의 과정으로 보았다. ... / .. 헤겔은 인간의 지식을 모든 분야에서 점차로 확대되어 가는 유기체적인 전체(organic whole)로 보고 이 전체가 환전한 것이 되기까지는 어떠한 부분도 완전치 못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헤겔의 철학은 듀이의 청년 시절에 그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헤겔철학은 역시 그 절대적인 대상을 갖고 있으며 영원한 세계는 일시적인 과정으로 실재적이다. (465)
[듀이에 대해 러셀의 관심은 두 가지 측면이다. 러셀은 “진리” 그리고 “탐구”, 즉 논리와 과학(인식)이라는 측면에 대해 동의하지만, 다루는 방식에 대해 차이를 설명하고, 그 외 듀이에 대한 반대 입장도 드러낸다. 러셀, 그가 원자론적 논리 분석에 근거하기 때문일 것이다.]
진리(眞理)에 대한 나(러셀)의 견해 .. / 우선 “참”이니 “거짓”이니 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문제이다. ../ 문장이란 “의미 있는” 것이라 참이나 거짓이다[의미론(semantic)의 전형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사용하고 있는 말[문장]에 달려있다. .. 문장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의미이며 낱말이 아니다. (465-466) [러셀이 지시론(reference theory)에서 의미론(semantic)의 강조로 나간 것은 “자기 지시의 제외”라는 파라독스의 발견 때문일 것이다.]
가령 우리가 계단을 내려간다고 하자. 우리가 다 내려온 줄로 잘못 알고 평면을 걸어가듯이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면 꽝하고 소리를 내면서 내려오게 될 것이다. 그때 내입에서는 “나는 다 내려온 쥴로만 알았지” 하는 말이 자연스레 흘러나올 것이다. .. 실수하게 된 것은 우리의 정신이 아니라 육체였다. (466) [그럴까? 의식의 판단이 마지막 계단이고 신체의 행위는 달랐다. 사실은 판단과 달랐다. 의식은 자기 짐작이지, 사실에 관여한 것이 아니다. 즉 실재는 의식의 판단과 달라서 착오를 범한 것이다. 실재를 벗어난 판단은 이데아에 대한 판단과 마찬가지로 현실에 대한 착오이다. 잘못은 의식의 선(先)판단에 있다. - 여기서 의식의 놀람이 있다. 이 놀람은 원본이 있다는 놀람과 다르다. - 철학의 시초는 놀람이라 한다. 상층과 심층의 놀람은 차히에서 표면의 양면성은 차이에서..(50WKG)]
위의 설명에서 잘못의 시금석은 경악(surprise)이다. .. / 그런데 경악은 그것이 신념이 적용될 경우에 좋은 기준이 될 수 있지만 직접 “참된 것”과 “거짓된 것”과의 구분을 지어 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언제나 적용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 제임스 진(James Jeans, 1877–1946)이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467)
때로는 실험적인 시험이 진부(眞否)를 가릴 수도 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경우에도 참과 거짓 어느 하나일 것이며, 이것은 또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467) [둘 중의 어느 하나는 이치(二値) 논리이며, 그런데 다치(多値) 논리도 있다. 게다가 ‘없다와 아니다’의 진위와 관계없이도 의미를 갖는다. 전장에서 부정정보는 긍정정보 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듀이는 “판단”에 대해 절대로 “참”되어야 한다고 기대하지 않고 또 “모순”을 절대로 “거짓”이라고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탐구(inquiry)라는 과정이 있다. (467)
예컨대 독자가 어떤 동물원에 있었다고 하자. 그리고 확성기를 통해 “방금 사자가 한 마리 도망쳤습니다”하는 소리를 들었다면 독자는 아마도 그때 사자를 눈으로 보는 것처럼 행동할 것이다. ... 만일 E라는 사건이 촉진시켰을 행동을 S라는 문장이 촉진시킨다면 이 문장의 의미는 그 사건 F[E]가 될 것이다. (467-468) [사자가 우리를 도망쳤다. 관람자는 서둘러 동물원을 나왔다. 화행론: 문을 열어 놓았다. = 한 사람이 ‘여기 춥다’고 한다. * 누군가 문을 닫았다. ]
[러셀이 듀이와 다른 점, 차이]
듀이는 탐구를 진리나 지식이 아니라, 논리의 본질로 삼고 있다. 그는 탐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즉 이 “상태”의 탐구란 어떤 미해결의 처지를 통제하거나 조정하여 그 미결정의 처지의 구성요소의 특징이나 관계가 결정된 그러한 처지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탐구는 객관적인 주제에 대한 객관적인 변형에 관계하고 있다” (468)
듀이가 생각한 “탐구”란 세계를 좀더 유기화하려는 과정의 일부인 것만은 사실이다. “통일된 전체(unified whole)”가 탐구의 결과가 될 것이다. .. 이 이유의 일부는 생물학에서 비롯된 것이며 다른 일부는 헤겔의 숨은 영향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69)
[탐구에 있어서 사물의 배치를 바꾸면서,, 러셀이 듀이의 입장이라면] “당신의 생각은 너무 정적이다. 나는 동적인 인간이며, 내가 어떤 문제를 탐구할 때에는 우선 그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 알맞게 변경시킨다.” (469) [이 러셀의 입장은 유기체의 입장에서가 아니나 물체(원자론)적 입장에서 보는 것이다. 초기 실용주의에서 탐구는 실재성을 그대로 대하여 실재에 대해 정합과 부정합을 통해 대상을 탐구하는 방식이라야 생물학적이다.]
나는 듀이 박사의 학설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즉 환경에 대한 유기체의 관계는 때로는 그 유기체에게 만족할 만한 것이고, 때로는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다. ... 변화는 결코 “완전히” 한쪽에서만 일어날 수 없다. 이[쌍방 조정의] 과정을 “탐구”라고 할 수 있다. (470) [러셀이 조정의 과정은 유기체에서는 당연한 말을 하고 있다. 삶은 환경에서 표면에서 어떠한 인식과 판단에서도 이중성을 띤다. 순수논리에서는 진위가 구별될 수 있고, 순수 질료에서는 진위자체가 없으며 오직 움직임이 있을 뿐이다. 결과에 대한 판단은 기준을 설정하기 전까지는 실용론에서도 진위는 유보될 것이다.]
이 학설의 난점은 신념(belief)과 사실(fact) 또는 사실을 “실증 한다”[증명한다]고 말하는 사실들과의 관계를 분리시키는 데서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470) [사실들의 실증 관계는 인식에서 추론과 별개인 것은 표면과 상층 관계와 같다. 원리의 신념과 습관에서 믿음(신념)은 별개이다.] [오히려 신념이 신앙의 차원이면 가치판단의 문제로 사실판단과 별개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신념의 의미를 어디까지 확장할 것인가?]
그러나 듀이는 이러한 견해에 반대 한다 그는 신념(belief)을 옳고 그른 것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그러나 듀이 역시 신념을 두 가지 종류로 구별하기는 한다. ... / 그리하여 과거의 어떤 사건에 관한 신념도, 실제로 그런 사건이 일어났는가의 진부(眞否)에 따라 좋고 나쁜 것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 신념에서 비롯되는 미래의 결과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471) [플라톤이래로 신념 또는 견해는 사물들의 사실관계이지, 도덕성, 예술성, 종교성에 관한 것이 아니다. 사실관계를 선악관계에 적용하려는 적용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러셀이 사실관계의 인식에서 진위(眞僞)를 신념을 신앙과 비슷하게 놓고서, 결과에 부합하는 ‘만족할 만한 것’과 ‘만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도덕성에 결부시켜서 설명하려 하면서 문제설정을 바꾸어 놓은 것 같다.]
듀이 박사와 나와의 주요 견해 차이는 이러하다. 듀이 박사는 결과를 보고 신념을 판단하지만, 나는 이와는 달리 과거의 사건에 관련된 원인을 보고 신념을 판단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신념[견해, 믿음]이 그 신념의 원인과 일정한 관계를(때로는 매우 복잡한 것이지만) 가질 경우, 그 신념을 참되다고 보거나 또는 우리가 그 신념을 참되게 할 수 있는 정도로 참되다고 본다. 듀이 박사는 어떤 신념이 일정한 결과를 가질 때. 이 신념은 “보증된 주장 가능성”(warranted assertability) - 듀이는 이 용어를 “진리” 대신에 사용 한다 - 을 갖고 있다고 한다. (472) .
이와 같은 차이점은 세계관의 차이와 관련되어 있다. 과거의 우리 행동에 따라 변경될 수는 없는 것이다. 진리가 무엇이 일어났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면 그 진리는 현재나 미래의 의지와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하겠다. 진리는 논리적인 형식에 있어서 인간이 지닌 능력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72-473)
그리하여 조지 레이몬드 가이거(Geiger, 1903-1998)는 듀이를 칭찬하는 그의 논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듀이 박사의 방법은 “중산 계급과 같이 눈에 띄지 않는 사상에 있어서의 혁명, 즉 1세기 전에 산업혁명과 같은 큰 혁명을 의미할 것이다.” (473) [칭찬인지 비판인지 구분이 안 되네... ]
[러셀의 평, 칭찬] “듀이 박사는 산업주의와 집단 기업의 시대에 어울리는 하나의 견해를 갖고 있다. 그가 강력히 호소한 것도 미국 사람들을 향해서이고 또 중국이나 멕시코 같은 나라에서 진보적인 인사들에게 동일한 환영을 받았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474) [2차 산업혁명 이후에도 듀이의 학설이 적용되고 있는데, 러셀의 착각은 중국 멕시코에 적용했던 것에 찬사를 한 것이 잘못이 아니었을까? 구대륙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어서 그런가?]
이 말이 듀이 박사를 노하게 하였다. .. / “실용주의 지식론을 미국 산업주의의 불쾌한 면과 연결시키는 러셀 씨의 굳어 버린 습성은, 내가 그의 철학을 토지를 소유한 영국 귀족들의 이해관계와 연결시키는 것과 같을 것이다.” (474) [듀이는, 러셀이 아마도 1929년 세계 공황이래로 미국 정부가 사회주의 정책을 쓴 것에 듀이가 동조하였다는 점 꼬집은 것으로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 듀이는 러셀에게 귀족주의적 특성이 있음을 지적하며 비꼰 것 같다.]
산타야나(Santayana, 1863-1952)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듀이에 있어서는, 최근 과학이나 윤리학이 다 그렇듯이, 널리 퍼진 유사 헤겔주의의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하면 개체를 사회적인 기능 속에 분해하여 버리는, 즉 모든 실체적인 것이나 현실적인 기능 속에 분해하여 버리는 즉 실체적인 것이나 현실적인 것을 상대적이며 지나가는 어떤 것으로 분해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474)
[평] 듀이 박사의 세계는 인류가 상상으로 가득 채우고 있는 그런 세계처럼 보인다. 천문학의 우주는 물론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은 하지만, 대체로 무시하고 있다. 일종의 힘의 철학이다. 물론 니체와 같은 개인적인 힘의 철학은 아니지만 일종의 힘의 철학(power philosophy)이다. (474) [니체의 철학은 인간 본성의 발현의 권능을 강조하는 권능(puissance)의 철학이며, 듀이는 산업사회의 국가 권력(power)을 지지하는 관변철학(philosophie officielle)이다. 물론 듀이가 젊은 시절에는 인성자유주의에 관심 있었지만 전쟁을 거치고 경제공황(經濟恐慌)과 더불어 미국의 성장에 포섭되면서, 미국의 영광에 합류하면서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의 실용주의자 파피니(Papini, 1881–1956)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모방하는(Imitation of Christ) 대신 “신을 모방할 것(Imitation of God)을 권고하고 있다. / 나는 이 모든 점에서 커다란 위험 – 우주적인 불경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을 느낀다. 인간의 지배력 밖에 있는 것을 의존하는 진리의 개념은 철학이 지금까지 겸손의 필연적인 요소를 계산에 넣지 않은 것 중의 하나이다. / 일단 자부심에 대한 이 제약이 제거되자 그 후로는 일종의 광란(狂亂)의 길을 치닫게 된다. - 피히테와 함께 철학에 침범한 힘에 대한 도취, 그리고 현대인은 철학자이든 철학자가 아니든 간에 이와 같은 도취의 경향을 띠고 있다. (475) [러셀이 정통 가톨릭에 호의를 갖는 것 같다. 종교의 불경건(不敬虔)이 자연의 불경건으로 제기되지 않는다. 놀람보다 더한 경이로움이 자연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경이로움을 과학의 인식으로 탐구하려는 것이 차라리 불경(不敬)이 아닐까? 겸양의 미덕은 인간관계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 또는 숙명 앞에서 겸손이 경건일 수 있다. 자연 속에서 인간의 사명(피히테)는 종교에서 소명(선교)와는 다른 것이다. / 광란의 도취는 파라노이아(편집증자)이다. 아마도 트럼프가 오늘처럼 다른 한 나라의 수도를 지마음대로 정하는,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선언하는, 그런 도취가 광란이며 파라노이아의 극단인 셈이다. (50WKG)]
나는 이 힘에 대한 도취는 오늘날 우리 시대의 가장 위험임을 알고 있다. 설사 의식하고 있지 않다 해도, 이 도취에 이바지하고 있는 철학은 사회적 재앙의 위기를 증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476) [러셀이 주지주의 철학에 대한 이런 진단을 내렸다면 동의한다. 논리주의를 제외하고 과학주의에게 또는 주객의 대립에서 주체의 강조에게 이런 진단을 내린다면 러셀 자신의 위상도 마치 지시이론처럼 자기를 제외하고 성립하게 될 것이다.]
(6:8, 50WKG) (6:13, 50WKH)
#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 *****
1859 존 듀이(John Dewey, 1859년 10월 20일) 미국 버몬트 주 버링톤(Burlington, Vermont)에서 태어났다. 아버지(Archibald Sprague Dewey)와 어머니(Lucina Artemisia Rich Dewey)의 셋째아들이다. / 미국의 철학자, 심리학자, 교육학자.
- 프랑스의 벩송(Bergson), 독일의 후설(Husserl)과 같은 해 태어났다.
1874(열다섯) 15세의 나이에 버몬트 대학교에 입학하여 4년 뒤 학과 차석으로 졸업하였다. 듀이는 당시 버몬트 대학교의 철학 교수였던 헨리 어거스터스 피어슨 토레이(Henry Augustus Pearson Torrey, 1837–1902)의 수업에 흥미를 보였다. 토레이 교수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강의를 하였다.
1879(스물) 듀이는 사촌의 권유로 오일(Oil City, Pennsylvania) 시의 고등학교 교사로 취직. 듀이는 한 달 40달러의 급여를 받으며 라틴어, 대수학, 과학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듀이는 2년간 오일 시의 교사 생활을 한 뒤 고향에서 직장을 구할 생각으로 사직하였다
1882(스물셋)년 존스 홉킨스 대학교의 철학 대학원에 진학하였고 1884년 그곳에서 「칸트의 심리학」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같은 해 시카고 대학교 강사가 되었다.
1884(스물다섯) 조지 실버스터 모리스(George Sylvester Morris, 1840–1889)의 도움으로 미시간 대학교의 교수진으로 임용
1888(스물아홉)년 미시건 대학교에서 "민주주의와 휴머니티의 거대하고 온전하며 도덕적인 이상은 내 마음 속에서 같은 말이다."라고 연설한 바 있다. - Early Works, 1:128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op cited in Douglas R. Anderson, AAR, The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Vol. 61, No. 2 (1993), p. 383.
심리학(Psychology, 1888).
라이프니츠의 인간 이해에 관한 새로운 에세이(Leibniz's New Essays Concerning the Human Understanding, 1888)
[1890 제임스(William James)의 심리학의 원리들(Principles of Psychology (1890)의 지대한 영향을 입다]
1894(서른다섯)년 듀이는 갓 창립된 시카고 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로 자리를 옮겨(1894–1904), 자신의 지식에 대한 경험주의적 신념과 학교 제도에 대한 실용주의적 주장을 펼칠 수 있었다.
1899(마흔) 학교와 사회(The School and Society, 1899)
1903(마흔넷)년 논리이론에 대한 연구(Studies in Logical Theory)라는 제목으로 출간
1904(마흔다섯)년 그는 주변의 반대로 인해 동부를 떠나 컬럼비아 대학교로 이직하였으며 이 후 평생 동안 이 대학의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1916(마흔일곱) 민주주의와 교육(Democracy and Education, 1916)
1917(마흔아홉) 철학의 재발견 필요(The Need for a Recovery of Philosophy, 1917)
1919(쉰)-1921 북경대학 방문 강연, 호적(胡適, Hu Shih, 1891–1962)과 장몽린(蒋梦麟, Chiang Monlin, 1886-1964)의 도움을 받았다. / 콜럼비아 대학에서 공부한 도행지(陶行知, Tao Xingzhi, 1891–1946)는 신유학의 왕양명(王陽明 Wang Yangming, 1472–1529) 쪽이다. / 1920년 러셀의 중국 강연...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도..
1921(쉰둘) 인간성과 행위(Human Nature and Conduct, 1921)
1924 터키 방문, en Turquie (1924),
1926 멕시코 방문, au Mexique (1926)
1927(쉰여덟) 공중과 그 문제(The Public and its Problems, 1927)
1928(쉰아홉) 소비에트 연방 방문, en URSS (1928).
[이 시기 이후에 그는 소련과 그 동맹국에 대립적 입장을 취한다]
1929(예순) 확실성의 탐구(The Quest for Certainty, 1929)
1931 철학과 문명(Philosophy and Civilization (1931)
1933 뉴 딜(New Deal)은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경제 구조와 관행을 개혁해, 대공황으로 침체된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제32대 대통령이 1933년-1936년에 추진하기 시작한 경제 정책이다. 듀이는 뉴딜 정책을 지지하였으며,
1934(일흔다섯) 경험으로서의 예술(Art as Experience, 1934)
1934, 남아프리카 공화국 방문. at the invitation of the World Conference of New Education Fellowship in Cape Town and Johannesburg,
1935 자유주의와 사회적 행위(Liberalism and Social Action (1935) 듀이는 진보주의 입장보다 자유주의 입장.
1937 [트로츠키(Leon Trotsky, Lev Davidovich Bronstein, 1879–1940), 이해 1월 멕시코 도착]
3월 듀이 위원회 또는 트로츠키 사문(査問)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The Dewey Commission”(officially the "Commission of Inquiry into the Charges Made against Leon Trotsky in the Moscow Trials"). 트로츠키의 소비에트 법정에서(1936년) 혐의를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1938(일흔아홉) 경험과 교육(Experience and Education, 1938)
1939(여든) 자유와 문화(Freedom and Culture (1939)
1939, 산업민주주의 동맹 회장에 선출되다(John Dewey was elected President of the League for Industrial Democracy(LID)
1949(아흔) 아는 것과 알려진 것(Knowing and the Known, 1949)
1952(아흔셋) 존 듀이 1952년 6월 1일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