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일 토요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세계 평화의 날)
‘천주의 성모 마리아’는 초대 교회 때부터 있어 온 칭호였고,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이 칭호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비오 11세 교황은 에페소 공의회 1500주년이 되는 1931년부터 모든 교회에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게 하였다. 또한 교회는 1968년부터 오늘을 ‘세계 평화의 날’로 지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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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루카 2,16-21)
When they saw this, they made known the message that had been told them about this child. All who heard it were amazed by what had been told them by the shepherds. And Mary kept all these things, reflecting on them in her 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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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사제들이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청할 때 복을 주실 것을 강조하시면서, 복된 삶의 근원은 하느님이심을 가르쳐 주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서 태어나셨다.’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님의 참된 인성을 강조한다. 이와 동시에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요 상속자가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다(제2독서).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우리 곁에 오시어 ‘예수’라는 이름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고 축복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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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새해 첫날 복음은 예수님 탄생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예수님의 유년 시절을 잘 기억하고 계실 성모님께서는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되새겼던’ 예수님의 첫 이야기를 이렇게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아기 예수님을 처음 받아 준 손은 목수 요셉의 거친 손이었고, 그분을 처음 맞아들인 장소는 누추한 구유였습니다. 그분께 찬미와 찬양을 드린 첫 번째 사람도 밤을 지새우던 가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강생의 짧은 이야기는 약하고 보잘것없는 곳, 비천한 사람들 안에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핵심 진리가 있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성가로서 수많은 저술을 남긴 헨리 나웬 신부님은 일생을 통해 찾아 헤매던 신앙에 대한 물음이, 만년에 이르러 장애인 공동체에서 ‘아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 장애인을 만나면서 그 답을 얻게 됩니다. 곧, 자신의 삶에서 그 무엇으로도 대답할 수 없었던 인생의 진리가 이렇게 보잘것없는 한 사람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내 안에 깊이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이 나를 구원할 내 ‘인생의 구유’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며 우리 자신은 어떤 구유를 마련하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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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 뵙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일입니다. 상상도 못 했던 일을 그들은 하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놀라운 일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을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의 인생은 바뀌게 됩니다. 구세주를 만난 ‘은총의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늘의 기운’이 그들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도 ‘복음의 목자’가 되어 아기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곁에서 ‘서성대고’ 있는 어두운 기운들이 물러날 것입니다. 한 해의 첫날에 이런 마음으로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을 경배한다면 ‘올해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목자들은 천사를 만났기에 예수님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천사를 만나야 합니다. 올해에도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습니다. 천사들의 인도를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누군가에게 다가가 천사가 되어야 합니다. 한 번이라도 천사의 삶을 실천하면 ‘천사의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한 해의 첫날, 우리는 성모님의 축일을 지냅니다. 성모님의 애정을 청하는 것이지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주시는 어머니의 사랑을 청하는 것이지요. 모든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성모님께서도 우리가 행복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올해는 ‘묵주 기도’를 하루도 빠뜨리지 않을 것을 결심해 봅시다.
2011년 신묘년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토끼는 예로부터 성장과 풍요의 상징이라고 하더군요. 새벽님들 모두가 토끼띠를 맞이하여 좀 더 주님 뜻에 맞게 성장하고 영적으로도 더욱 더 풍요로운 한 해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성장하고 풍요로운 한 해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묵상하여 봅니다. 사실 올해에는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지만 그 중에서 세 가지 정도는 꼭 하고 싶습니다.
우선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쓴 지가 만 10년이 되는 해이기에 내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피정의 시간을 가지는 등 영적 성숙의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두 번째는 제가 몸담고 있는 곳이 성소국이기에 올해에는 더 많은 예비신학생들이 신학교에 갈 수 있도록 만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너무나도 내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음을 반성하면서, 올해에는 어렵고 힘든 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 가지를 이루기 위해서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끈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나무꾼이 있었습니다. 그는 도끼 하나로 생계를 유지할 수가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나무를 패기 위해 자루에서 도끼를 꺼내는데 도끼날은 없고 도끼자루만 있는 것입니다. 도끼자루만으로는 도저히 나무를 팰 수가 없지요. 그래서 그는 도끼날을 찾기 위해 그 주위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도 도끼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친 그는 더 이상 나무꾼 노릇을 할 수 없겠다 싶었습니다. 도끼자루만으로는 나무를 벨 수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미련을 완전히 버리기 위해 도끼자루를 강에 버린 뒤 허탈하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글쎄 그렇게 찾던 도끼날이 집 안 장작더미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기쁨에 넘쳐서 도끼날을 집어 들었지만 이제 도끼자루가 없습니다. 도끼날이 없다고 도끼자루를 강에 버렸으니까요.
도끼날이 없어졌다고 도끼자루를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이처럼 내가 포기한다는 것은 유일하게 나를 살아가게 만드는 수단을 던져 버리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리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도 절대 쉽게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에서는 이렇게 전하지요.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어렵고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서도 그 모든 일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면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생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을 기억하면서 올해에는 우리 역시 절대 포기하지 않는 그리고 항상 지금의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며 당신을 따르는 사람과 주님께서는 언제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미워하는 것은 생쥐 한 마리를 잡기 위해서 집 전체를 태워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해리 에머슨 호스딕)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양승국신부-
<롤모델 성모님>
하느님께서 그냥 편하게 하느님으로 계시지 않고 때로 질퍽질퍽한 진흙탕 같고, 때로 악다구니가 끊이지 않는 전쟁터같이 소란한 이 땅에 내려오신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우리 인간의 유한성을 깨트리기 위해 하느님께서 당신의 속성인 ‘무한성’을 버리시고 유한성을 취하신 결과가 육화강생이 아닐까요? 끝도 없이 깊은 바닥을 헤매 다니는 우리를 더 이상 놔두기 안타까워 밑바닥으로 내려오신 것이 예수님의 마구간 탄생이 아닐까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끝도 없는 노력, 정말이지 감지덕지한 노력에 우리도 조금은 응답해야 그것이 최소한의 예의일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런 노력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셨는데, 우리도 그분을 향해 조금이라도 올라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발돋움 말입니다.
그런 노력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화’요 ‘영성생활’이 될 것입니다. 성화의 길이란 하느님을 닮기 위해 노력하는 여정입니다. 성화의 길이란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한 여행길입니다. 참 영성생활이란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우리지만, 그 그릇 내면을 그리스도의 향기로 가득 채우는 일입니다. 부족하고 불완전한 우리 인간 존재지만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언젠가 하느님을 닮을 수 있다는 확신을 지니는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님의 생애는 오늘날 우리 모두를 위한 제대로 된 ‘롤모델’입니다. 그녀의 삶을 묵상하다보면 성화의 길이 무엇인지, 참 영성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지만 절대로 우쭐한 법이 없었습니다. 구세주 탄생이란 하느님의 큰 사업에 가장 큰 협조자로서 뭔가 기대할 만도 한데 결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저 한평생 자신 앞에 벌어진 모든 일에 대해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습니다.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진의를 찾아나갔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지면서 별 것도 아닌 인간 존재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첨단과학이 점점 발전하면서, 인간은 큰 착각에 빠집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착각, 그러면서 하느님의 영역, 하느님의 자리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니 인간 측의 가장 큰 문제는 겸덕의 결핍이군요. 내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도를 넘어서는 지나친 자신감이 문제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모님의 겸손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성모님이 어떤 분이셨습니까? 영광스럽게도 하느님을 자신의 태중에 모신 분이십니다. 과분하게도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품에 안으신 분입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충분히 그랬을 겁니다. “내가 누군 줄 알아? 이 몸으로 메시아를 낳은 사람이라구. 우리 아들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라구!”
그러나 성모님은 참으로 겸손하셨습니다.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초지일관 겸손의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쓰시겠다고 하니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몸, 자신의 인생 전체를 다 내어드렸습니다. 자신의 한 몸 희생하여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조그만 기여라도 한다면 참으로 영광이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토록 겸손했던 성모님이었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머리 위에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왕관을 씌워주십니다. 끝없이 밑으로 내려서는 성모님을 하느님께서는 가장 높은 곳으로 올리십니다. 그 자리가 바로 ‘천주의 성모’ ‘하느님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
- 최견우-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지난해 시간을 거두어 주시고 또 다른 희망의 한 해를 주심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가장 아름다운 말을 고르라 하신다면 ‘사랑’ 이라는 말을 제일 처음으로 고르고 싶고, 그 다음에 ‘어머니’ 라는 말을 주저 없이 선택하고 싶습니다. 아버지들이 이 말을 들으면 살짝 기분이 나쁠지 모릅니다. 그토록 제 마음에 들면서도 저 역시 한없이 부르고 싶은 말이 바로 ‘어머니’ 입니다.
석가모니가 군중을 거느리고 남방으로 가는 길에 아무렇게나 드러난 한 무더기의 뼈를 보았다고 합니다. 석가모니께서는 그 마른 뼈를 향해 정중하게 예를 올리고 수제자인 아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네가 이 한 무더기의 마른 뼈를 둘로 나누어 보아라. 만일 남자의 뼈라면 희고 무거울 것이며 여자의 뼈라면 검고 가벼우리라.” 그러자 아난이 어떻게 남녀의 뼈를 구분하느냐고 하자 석가모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일 남자라면 세상에 있을 때 법문도 듣고 염불도 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 사람의 뼈는 희고 무거우리라. 그러나 여인은 한번 아이를 낳을 때마다 서 말 서 되나 되는 엉킨 피를 흘리며, 아기는 어미의 흰 젖을 여덟 섬 너 말이나 먹느니라. 그런 까닭에 여인의 뼈는 검고 가벼우니라.”
가슴이 저며 옵니다. 성모님의 생애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을 지켜보시면서 성모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요 ? 그분의 뼈도 그렇게 검고 가벼우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위대합니다. 어머니 중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그저 제 마음을 기대고 싶습니다. 제가 감히 성모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해도 될까요 ?
평화를 염원하며
-김찬선신부-
신묘년 새 해가 밝았습니다.
이 새 해는 어떤 해이기를 바라십니까? 이 새 해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오늘이 세계 평화의 날이니 올 해는 평화로운 해가 되기를 바라고,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니 올해는 한 번 천주의 어머니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작년 한 해 평화가 얼마나 쉽게 깨지는지 보았고, 한 번 깨진 평화를 되찾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깨달았으며, 하여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올 해는 정말 평화로운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平和란 어떤 것입니까? “平”과 “和”가 합친 말입니다.
“平”이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한 부분은 특별한 일이 없는 平安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좋은 일은 평안을 깨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안 좋은 일이 평안을 깨기에 평안은 특별히 안 좋은 일이 없는 것입니다. 올해는 아무 사고가 없는 것입니다. 올해도 중병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올해도 실직되는 불상사가 없는 것입니다. 올해는 천암함이나 연평도 포격과 같은 사건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아무런 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다못해 손가락에 가시가 박히는 일이라도 일어나겠지요. 그까짓 것 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모기 한 마리 때문에 평안이 깨질 수도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참 평안은 아무 일이 없는 평안이 아닙니다. 오히려 올해도 많은 일이 터질 것을 각오하는 평안이고, 많은 일이 벌어져도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목장의 그림 그리기 대회 얘기 말입니다. 주제가 평화였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목장의 평화로운 풍경을 담았고 최종 결선에 올라온 그림 중 하나도 목장의 평화로운 풍경을 담은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아이의 그림은 너무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위험천만한 까까절벽의 옴폭 패인 둥지에 어미 품에 안긴 새끼 새를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새끼 새는 아무리 폭풍우가 몰아치고 위험한 상황이어도 어미 새만 있으면 평안합니다. 새끼 새의 불안은 어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해 우리 평화도 주님 안에서 누리는 평화이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和”의 측면에서 평화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和”란 벼禾와 입口가 합쳐진 말이니 벼와 입의 관계처럼 관계가 좋을 때 오는 평화, 곧 화목한 평화입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관계, 화목한 평화는 어떻게 가능합니까? 다투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선은 다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투지 않기 위해서 시비를 걸지 않고 굴복시키려 들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상대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투지 않는 것도 평화의 길이지만 그런 소극적인 평화로는 참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다투지 않는 것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고 다투지 않기 위해 무관계로 일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 평화는 사랑으로 얻게 되는 적극적인 평화이고 그것도 하느님의 사랑으로만 얻을 수 있는 평화입니다. 오늘 축일의 의미와 연결시킨다면 천주의 모친 마리아처럼 사랑이신 하느님을 품은 자만 이룰 수 있는 평화입니다. 힘의 균형을 이루는 아버지의 평화가 아니라 천주의 어머니의 사랑으로 이루는 평화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듯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낳아주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사랑을 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낳아주는 것입니다. 잉태한 자만이 출산을 할 수 있듯이 마리아처럼 사랑의 하느님을 잉태한 사람만이 다른 이에게 하느님 사랑을 낳아줌으로써 평화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또한 평화는 염원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올 한 해 우리는 평화를 염원할 뿐 아니라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이 많아지도록 행동을 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평화의 사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제 저는 참으로 놀라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오후 다섯 시가 조금 넘어 선교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떤 분이 찾아오셨는데 만나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냥 돌아가시려고 하였지만 사무 보는 자매님께서 붙잡아 저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2년여 전 우리가 평양에 평화 봉사소를 세우고 축복식을 했을 때 그 신문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 이분은 올해가 가기 전에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일하는 저희를 도와야겠다고 마음먹고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전화번호를 알아서 찾아오셨고 한 해의 맨 마지막 날, 그것도 사무실이 문 닫으려 하는 그 시간에 큰돈을 기탁하셨습니다. 요즘처럼 전쟁을 해야 한다고 함부로 떠드는 사람들에게 대항하여 새 해에는 더 적극적으로 남북의 평화를 선포하는 참 평화의 사도가 되라는 격려가 되었습니다.
올해는 이런 분이 많아지기를 염원합니다.
빛과 어둠 어우르는 가정, 사랑과 용서"
-홍승모신부-
오늘은 전례력으로 예수ㆍ마리아ㆍ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기념합니다. 성가정이란 말 그대로 나자렛의 거룩한 정신과 성덕으로 살아가는 가정공동체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를 지닌 성가정 축일 복음으로는 색다른 면이 나타납니다. 복음 내용을 보면,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예수님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나타납니다. 여기에 어떤 뜻이 담겨 있는걸까요? 마리아는 예수님이 없어진 줄 알고 사흘 동안 찾아다니다 결국에는 성전에서 찾게 됩니다. 마리아는 어머니로서 당연한 질문을 합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마리아는 예수님의 행동에 질책 보다는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에 선입견을 갖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의 지평을 넓히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 드러나는 말이 바로 "네 아버지와 내가"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결정보다는 남편인 요셉을 더 우선시 하는 배려는 자녀에게도 해당됩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이며 사랑입니다. 이런 마리아의 안타까운 마음에 대해 예수님의 답변은 단호합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이 말씀은 신앙을 깊이 성찰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를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은 성전뿐 아니라, 사랑의 움직임이 있는 곳 어디에나 현존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어머니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합니다. 가정은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그 생명이 성장하는 울타리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삶을 통해 이뤄지는 교육이 처음으로 시작되는 곳입니다. 가정에서 우리는 말하는 방식, 행동하는 방식, 대응하는 방식, 판단하는 방식, 올바로 살아가는 방식을 함께 익히게 됩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의미가 통하는 삶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삶의 강생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빛과 어둠의 양극이 극단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통합되기도 하는 공동체입니다. 복음에서 보듯이, 마리아의 아픔은 아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 삶의 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 품에 안고만 살 수 없고 독립적인 삶을 이루기 위해 떠나보내야 하는 고통,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달리 바라보는 시각 차이에서 오는 고통, 이 모든 고통과 갈등을 체험하게 합니다. 가정에서도 구성원 사이에 똑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본당 공동체에서도, 특수사목 공동체에서도, 교구 공동체에서도 똑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이때 누가 아버지 요셉의 역할을 하며, 누가 어머니 마리아의 역할을 해야 합니까? 누가 책임을 갖고 잘잘못을 교육하고, 누가 사랑의 마음으로 보듬어 주어야 합니까? 빛과 어둠의 양극을 누가 통합해야 합니까? 채근담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집안사람들이 눈에 거슬리는 허물이 있다고 하여도 몹시 성내지 말 것이며, 또 가볍게 버리지 말 것이니, 봄바람이 얼었던 땅을 풀고 생명을 돋아나게 하듯, 부드러움과 인내심을 갖고 가정의 냉기를 녹이라. 이것이 가정의 규범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콜로 3,13-15). 이 말씀은 가정 구성원들을 화해하고 일치시키는 용서와 사랑과 내적 평화가 누구에게 뿌리를 두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신뢰하며 주님이 주시는 용서와 사랑과 내적인 평화의 삶으로 빛과 어둠을 통합합니다. 그렇기에 나자렛 성가정은 세상을 위한 주님 사랑의 표지이며 성사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 자녀로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주님에게 속하며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그 충만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바로 이것을 깨닫고 실현하신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런 마음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주님을 향한 여정의 동반자로 바라보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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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놓으십시오
-손용환신부-
어머니의 품이 그립습니다.
성화(聖畵) 중에서 단일 주제로 가장 많이 그려진 그림은 무엇일까요? 성모님과 예수님이 함께 계신 모습을 그린 ‘성모자’(聖母子)입니다.
신심 있는 화가라면 성모자를 그리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왜 화가들은 성모자를 그토록 많이 그렸을까요? 그것은 성모자가 가장 종교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품이 가장 평화롭고 하늘나라를 가장 많이 닮았으니까요.
성모자 중에서 가장 우아한 그림을 그린 화가는 라파엘로입니다. 라파엘로의 성모자는 부드럽고 우아해서 그 매력이 경건하기까지 합니다.
라파엘로의 성모자 중에서 최고로 인상적인 작품은 무엇일까요? 이탈리아 피렌체 피티 궁전 미술관에 있는 「의자의 성모」입니다.
「의자의 성모」는 톤도 양식으로 그려진 최고의 성모자 그림입니다. 둥근 액자 안에 세 명의 인물을 집어넣기 위해 라파엘로는 완벽한 구도의 묘미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과 아기예수님의 몸을 옆으로 틀어 좁은 공간에서 다소 여유 있는 동적인 배치를 시도한 것입니다.
또 이 그림은 완벽에 가까운 색채의 조화를 이룹니다. 그림에 사용된 청색, 황색, 적색, 녹색, 흑색은 5대륙의 화합을 의미하는 오륜기의 색과 같으며, 이국적인 머리장식과 어깨를 감싸고 있는 초록색 천은 그림의 다른 부분들과 어우러져 동서양의 조화를 이룹니다. 이것은 전쟁과 갈등을 일삼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림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코와 팔꿈치와 왼쪽 다리는 구성의 수직적인 축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토실토실한 다리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합니다. 이는 아기예수님의 기분 좋은 상태를 표현합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꼭 안아주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성모님은 예수님을 당신의 품으로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아기예수를 품에 안으신 성모님은 참으로 복된 여인입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가 복된 이유는 주님께서 함께 계실 때 가능하니까요.
민수기에 나오는 축복에 대한 정의도 이러합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6)
축복은 주님께서 지켜주시는 것이요, 그럴 때 평화도 옵니다. 그러니 새해에는 예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셔야겠습니다.
그런데 성모님 품에 안긴 예수님은 아기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라파엘로는 8살 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의 품에 대한 그리움이 남달랐습니다. 그는 기억 속에 가장 편안했던 어머니의 품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아기예수님이 아니라 조금 자란 어린 예수님입니다.
화가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품은 하느님의 품이었습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평화로운 곳이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은 두 손 모아 예수님을 품에 안은 성모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간 목자들도 마리아와 아기를 보고 나서 하느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이 예수님을 품에 안고 예수님과 함께 우리를 똑바로 쳐다보십니다. 그분의 응시가 너무나 강렬해 우리를 최면상태에 빠지게 합니다. 그분은 아기예수님과 함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놓으세요. 그리고 예수님을 품어 안듯 세상을 품어 안으세요. 그래야 세상에 평화가 옵니다. 그게 축복입니다.”
이 말씀이 성모님의 덕담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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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경인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이렇게 새해 인사를 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실 그 누구도 “내게 복 많이 주세요.”라고 새해 인사를 하지 않거든요. 대신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말하면서 복을 주는 데에 더욱 더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복이란 예전부터 나만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함께 받는 것이며, 함께 나누는 것이 복입니다. 성경에서도 복이란 주는 데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음을 이야기하지요.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창세기 12,3)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복이 더 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어쩌면 자기만 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느님의 복은 자기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참된 복이 아니라, 순간의 쾌락만을 가져오는 악의 유혹일 뿐입니다. 참된 복이란 하느님께로부터 와야 하며, 이렇게 받은 복은 함께 나누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2010년 1월 1일. 2009년 12월 31일과 하루 차이에 불과한데도 뭔가 다른 날처럼 느껴집니다. 어제와 다를 바 없을 것 같지만, 새 아침 새 날 새 하루라는 생각과 함께 사뭇 다른 마음을 간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다르다는 느낌만을 간직할 것이 아니라, 올해는 나의 복을 나누는데 더 많은 노력을 해보면 어떨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목자들이 나옵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 그리고 그밖에 많은 유다인들은 이들 목자를 사회와 격리시켜서 거의 짐승 취급했었지요. 이러한 상태에서 목자들은 사회와 더욱 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커다란 축복이 내려집니다. 바로 이 땅을 구원하실 아기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구세주께서 자기들처럼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음을 깨달았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들의 행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그토록 멸시와 무시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받은 복을 간직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에게 전해서 모든 이들이 복을 나누어 받아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자신이 받은 아픔과 상처를 생각하며 이제 그들을 무시하며 살겠다고 하십니다. 또한 복수하고 싶다고, 아니 가능하다면 복수하겠다고 이야기하시는 분들도 많이 만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주님을 맞이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도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인 ‘예수’를 예수님께 붙이면서, 자신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어머니,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얼마나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갔었는지요?
목자들과 성모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도록, 올 한 해 복을 간직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반딧불이는 폭풍에도 빛을 잃지 않는다. 빛이 자기 안에 있기 때문이다(스와미 웨다 바라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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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돌보는 목자의 마음으로
- 이영선 신부-
교회는 오늘 두 번째 새해를 맞이합니다. 지난해인 어제 세상을 달리한 이들이 그토록 그리워한 새해를 맞이한 우리는 또 다른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해의 첫날인 오늘 저는 우주의 조화로움으로 또한 우리의 작은 손길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보살핌을 모든 이가 알아차리며 살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돕는 일을 목자의 일이라 여기며 세상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드러내는 우리 노안성당의 올해 사목 방침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첫째, 가톨릭농민회 분회 한 공동체 이상 만들기 100여 명이 모이는 우리 본당 식구들은 본당 사제 둘을 포함해 모두가 농사꾼입니다. 그러니 함께 모여 하느님께 감사하고 오랫동안 땅과 바람과 햇볕과 어둠을 삶의 근본, 곧 섭리로 알고 살아온 삶의 지혜를 나누는 모임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방식이면 좋을까 생각한 끝에 가톨릭농민회 분회를 울타리로 모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죽을 때까지 모임을 계속합시다.
둘째, 하루에 세 번 이상 거울 보고 웃기 우리 교우들, 검게 그을리고 주름살투성이인 얼굴이지만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거칠고 투박한 손이지만 인류를 먹여 살린 하느님의 손입니다. 허옇게 센 머리카락이지만 하느님의 빛깔입니다. 기역자로 굽은 허리지만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왕자이고 공주입니다.
비록 텔레비전에 나오는 얼굴은 아니지만 스스로를 존중하는 사람으로 살다 하느님 품에 안기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서 갖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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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의 하느님
-정찬호-
새해의 첫날이 어김없이 돌아왔습니다. 새날을 허락해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그리고 여러분 모두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 “댁도 평안하시고, 댁의 집안도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또한 댁의 모든 소유도 아무 탈 없기를 빕니다.”(1사무 25,6)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현재는 하느님의 ‘사랑’에 맡기고,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라” 하신 말씀처럼, 새로운 마음으로 하느님 안에서 올 한 해 잘 설계하시고 그에 합당한 결실 맺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목자들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의 복음 선포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당시 목자들은 세관원 등과 함께 ‘사기詐欺 직종’으로 낙인찍혀,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자격조차 박탈되었습니다. 이처럼 비참한 신분의 목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기쁜 소식이 처음으로 주어진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또, 증언 능력이 없는 목자들의 말 값을 낮추어 보지 않으시고, 곰곰이 새겨들으셨던 성모님의 열린 마음도 놀랍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비참한 곳(구유)에서, 버림받은 사람들(목자들) 사이에 둘러싸여 태어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생애의 끝도 그러하였습니다. 비참한 곳(십자가)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죄인들) 사이에 둘러싸여 돌아가셨습니다. 인간이 되신 ‘임마누엘의 하느님’은 오늘도 비참한 곳에서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계십니다.
한 처음의 어머니처럼
-김찬선신부-
어제 한 해를 마감하면서 “한 처음”에 대해서 묵상했습니다. 한 처음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처음”과 “하느님”은 어디서 생겨났습니까? “한 처음”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는 아니 계십니까?
“한 처음”의 어머니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도 없습니다. 마치 太極에서 모든 것이 나왔지만 태극이 無極인 것처럼 “한 처음”의 어머니는 없음이고 “하느님”의 어머니도 없음입니다. 그러므로 없음이 모든 있음의 어머니요, 없음이 모든 것이신 하느님의 어머니입니다. 無性이 어머니性인 것입니다.
오늘 한 해를 시작하면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냅니다. 한 처음, 모든 것을 있게 하신 하느님의 어머니를 기념합니다. 至極한 無 또는 無의 極端인 無極이 太極이고 지극한 무 안에서 태극이 모든 것을 낳듯이 존재와 자기가 지극히 무가 될 때 하느님은 거기서 모든 것을 생성하십니다. 하느님은 “ex Nililo”, “없음으로부터”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體現된 그리스도가 예수인 것처럼 體現된 어머니가 마리아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있게 하신 하느님의 어머니를 깊이 묵상하고 새로운 한 해를 어머니로 살기로 새 해 첫 날 다짐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로 산다는 것은 지극한 무를 사는 것입니다.
요즘 저는 온 국민을 패배자로 만드는 지독한 승리자를 보며 저를 반성합니다. 요즘 저는 힘을 지독히도 숭배하는 지도자를 보며 저를 반성합니다. 요즘 저는 모든 조직을 쥐락펴락하며 국민을 초라하게 만드는 지도자를 보며 저를 반성합니다. 요즘 저는 자기 법을 만들어내며 그걸 어기는 국민을 범법자로 만드는 지도자를 보며 저를 반성합니다. 요즘 저는 승자의 편에 서지는 못하는 대다수를 패배자, 낙오자로 만드는 지도자를 보며 저를 반성합니다.
이것은 어머니가 아니고 어머니다운 힘이 아닙니다. 남을 죽이는 힘은 진정한 힘이 아닙니다. 남을 패배자로 만드는 승리자는 진정한 승리자가 아닙니다. 모두를 살리는 힘이 진정한 힘이고 모두가 승자가 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우리는 모두의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되는 것은 내가 없어지고 내가 낮아져야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자주 얘기하듯 Sustineo해야 합니다. 밑에서 바치고, 참고, 견디고, 바라고 희망하고, 북돋움으로써 마침내 모두를 살리는 그 Sustineo를 해야 합니다.
올 한 해 제가 형제들과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Sustineo를 잘 할 수 있을지 겸허히 살피고 그렇게 살기로 겸허히 다짐하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겸허히 은총을 청하며 새 해 첫 날을 시작합니다.
한 몸이 되는 사랑의 신비
-전삼용신부-
폴란드에서의 일입니다. 에릭이라는 왕이 나라를 다스리던 때, 바사 공작이라는 사람이 반역죄를 저질러 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그에겐 카타리나 지겔로라는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습니다. 바사공작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늘 부인을 생각하며 우울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카타리나는 왕을 찾아가 자신도 남편의 형기를 함께 복역할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부인, 종신형의 뜻을 모르오? 한 번 감옥에 갇히면 다시는 빛나는 햇빛도 아름다운 하늘도 볼 수 없음을 의미하오. 그리고 부인의 남편은 더 이상 공작이 아니오, 그는 반역 죄인이며 평범한 평민일 뿐이오. 그런데도 내게 부탁을 하는 것이오?”
에릭 왕은 깜짝 놀라며 카타리나에게 물었습니다.
“알고 있답니다. 폐하, 하지만 유죄든 무죄든 공작이든 죄수이든 그는 언제까지나 제 남편이랍니다.” 카타리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부인은 더 이상 부부의 인연에 연연할 필요가 없지 않소, 누구도 당신에게 죄를 물을 사람은 없소, 남편은 죄인이지만 당신은 자유요, 그것을 포기하겠단 말이요?”
에릭은 어떻게 하든지 이 아름다운 부인을 설득해 집으로 돌려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막무가내였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꺼내 왕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리곤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반지에는 라틴어로 두 마디가 새겨져 있답니다. Mors sola (단지 죽음만이), 이 말이 뜻하는 것처럼 우린 죽을 때까지 한 몸입니다.”
왕은 하는 수없이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줄기 빛도 스며들지 않는 지하 감옥으로 그녀를 내려 보내며 왕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지만 남편을 향한 그녀의 아름다운 사랑에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편을 따라 스스로의 자유와 영화를 포기할 만큼 그녀의 사랑은 진실 되고 아름다웠던 것입니다. 17년 후 에릭 왕이 죽자, 카타리나는 남편과 함께 석방되어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부부는 ‘죽음 이후’에도 영원한 부부입니다. 왜냐하면 한 번 한 몸이 된 것은 영원히 한 몸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남자는 제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을 이루라고 하셨습니다 (창세 2,24). 또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으냐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한 몸으로 이어 준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태 19,6)
물론 결혼해서 사는 분들은 혹, ‘한 몸이 되는 게 그렇게 쉬운지, 너도 한 번 결혼해서 살아봐라.’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혼의 신비는 모든 그리스도교의 신비를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부부가 한 몸을 이루는 신비를 이해하고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역시 그 신비로 한 몸을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느님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랑도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미사 봉헌 예식 때 사제는 성작에 담긴 포도주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가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해 주소서!”
포도주에 물방울 하나 떨어뜨리면 그 포도주는 무엇이 됩니까? 역시 포도주입니다. 그러나 한 번 떨어져 포도주가 되어버린 물방울은 다시 분리해 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가 되는 신비입니다. 성령님이 그 신비의 주인공이신데 녹여서 모두 하나로 만드는 역할을 하십니다.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불붙은 떨기나무의 형태로 나타나셨던 것은 또 어떻습니까? 그 불은 나무를 태우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예사 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신성을 의미합니다. 나무는 물론 땅에서 자라남으로 인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불붙은 떨기나무는 신성과 인성의 결합인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 곳으로 다가가려고 하자 신을 벗으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 땅은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곳에서 자라난 나무, 바로 성모님의 몸에서 얻은 육체를 의미하고 불은 그 육체와 결합된 신성을 의미합니다.
십계명 판은 또 어떻습니까? 십계명 판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자와 땅에서 나는 돌과 결합된 것입니다. 말씀은 신성, 돌은 인성을 나타내고 한 번 결합된 것은 숯불과 같이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마치 숯불에서 나무와 불을 따로 떼어 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느님의 신성과 성모님으로부터 받은 인성이 결합되어 분리되지 않게 한 몸을 이룹니다.
이런 한 몸이 되는 부부의 일치가, 바로 가장 원천적으로는 성부 안에서 성부와 성자가 한 몸을 이루고,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 그렇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 그렇고, 또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결합이 또한 그렇습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님 대축일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천주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느냐고 개신교에서는 이 교리를 믿지 않지만, 사실 이 교리를 믿지 않는 것은 성모님을 믿지 않는 것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믿지 않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께 비록 육체만을 주셔서 육체의 어머니만 되시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의 합일체가 되셨기 때문에 육체만의 어머니가 아니라 영혼의 어머니도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성만의 어머니, 신성만의 어머니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성과 신성이 한 몸이 된, ‘하느님으로서의 그리스도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입니다.
성자는 한 번 육체를 취해 사람이 되셨을 때 숯불과 같이 또 다른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신 새로운 무엇이 되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고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신’이란 말이 떨어질 수 없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른다면 동시에 사람의 어머니도 포함하는 것이고 사람의 어머니라고 한다면 동시에 하느님의 어머니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만 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 안에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누가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가상으로만 취하셨든지 혹은 떼었다 붙였다 하듯이 겉으로만 취하셔서 완전히 사람이 되신 것 자체를 부정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육화를 부정하는 사람이 곧 적그리스도입니다(2요한 1,7).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그 자체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큰 사랑고백이라고 한다면 역시 사람을 당신의 어머니까지 되게 하신 이 신비도 끝없이 인간을 높여주시려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구원하시고 은총을 주시는 예수님께서 인간을 어머니로 두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무척 든든합니다. 예수님께 청하기 힘든 것은 그 어머니께 청하면 어머니는 당신의 아들에게 청할 것이고 당신의 아들은 부모께 순종해야 하기 때문에 들어주지 말아야 할 것까지 들어주십니다. 가나의 첫 번째 기적이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성모님의 부탁으로 이루어졌음을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한 번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는 영원한 하느님이요 사람이신 것처럼, 한 번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영원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엘리사벳이 성모님의 인사를 받고 성령으로 가득차서 성모님을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라고 인사하였습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사람이 거짓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모님은 주님의 어머니인 것은 확실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그 분과 한 몸을 이루는 교회의 지체이니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동시에 우리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그래서 십자가상에서 요한에게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한 해의 첫 시작을 이 심오하고 핵심적인 혼인의 신비로 시작함은 바로 성모님께서 당신의 겸손함으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듯이, 우리도 성모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이 신앙의 출발이자 마지막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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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사다난했던 2008년 무자년도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리고, 2009년 기축년 새해가 환히 밝았습니다. 작년에는 참으로 아픔이 많았지요. 나라에도 많은 혼란들이 있었고……. 그러나 소띠 해인 올 해에는 소처럼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즐길 수 있는 해가 되길, 그래서 각 가정에 좋은 일만 가득한 멋진 해가 되길 기도합니다.
‘2008년 새벽을 열며’ 한글 파일을 열어보니, 한 해 동안 A4용지로 총 731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썼더군요. 스스로 감탄을 하게 됩니다. 물론 글의 내용과 질은 형편없지만, 이렇게 많은 글을 썼다는 자체만으로도 괜히 뿌듯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지금 ‘2009년 새벽을 열며’ 한글 파일을 다시 시작합니다. 즉,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시작이 올해를 마칠 때쯤이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다시 700페이지가 넘는 글로써 바뀌어 질 것을 생각하니, 다시금 그 시작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2001년 처음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시작할 때, 이 글을 쓰는 저 역시도 이렇게 오랜 기간을 그리고 이렇게 많은 글을 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요. 사실 처음에는 2001년까지만 쓰고서 멈추려고 했었답니다. 글재주도 없고, 쓸 말도 그렇게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저의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이렇게 부족한 저를 통해서 하느님 당신께서 직접 활동하고 있음을 드러내시려는지 벌써 햇수로 9년째 글을 쓰고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거에 연연할 필요도 또한 미래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고요. 나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내가 해야 할 일, 즉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기면 그만이지요.
오늘 우리들은 새해를 맞이하여 금년 한 해도 성모님께서 함께 해주시길 바라면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봉헌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과거에 연연하지도 또한 미래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지요.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따르면서 지금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잉태소식도 아무런 걱정 없이 받아들이시고, 잉태 전 천사가 일러준 이름을 받아들여 예수라는 이름을 붙여주십니다. 또한 그밖에도 천사의 말해준 바를 듣고는 곧바로 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시지요. 그리고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십니다.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피해야 할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대신 성모님의 모습을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들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항상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면서 지금 현재에 최선을 다하면서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새해입니다. 올해에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고통과 시련은 어김없이 우리 곁을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함께 했을 때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음을 굳게 믿으면서 하느님과 하나 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새해는 열두 달 만에 한 번 찾아온다.(스코틀랜드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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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에 -김찬선신부-
기축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소의 해가 밝았다는 뜻이네요. 우습지 않습니까? 신앙인인 우리가 이런 말을 쓴다는 것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표현해야? 하느님께서 주신 새 해가 밝았다 함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소의 해, 닭의 해가 아니고 늘 언제나 하느님의 해입니다.
이 하느님의 해에 그러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까요? 사뭇 궁금하지 않습니까? 올 한 해가 어떤 한 해가 될지 저는 사뭇 궁금합니다. 설레지 않습니까? 전에는 새해가 되어도 담담했는데 올해는 담담하면서도 왠지 설렘도 있습니다.
예견되는 올해의 상황은 비관적입니다. 무엇보다도 경제 상황이 매우 좋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힘의 정치로 계속 가면 정치적으로도 올 봄 큰 저항이 다시 일어날 것 같습니다. 사회적으로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양극화는 더 심해지고 보수와 진보 사이에 갈등도 심해질 것 같습니다. 관구회의 후 새로운 소임과 새로운 환경도 결코 녹녹치 않을 것입니다. 올해는 또 어떤 형제와 살지 모르지만 힘든 형제도 있을 것입니다. 예견되는 외적 상황이 이처럼 모두 비관적인데 새해가 어떻게 될지 궁금할 것은 무엇이며 설렌다는 것은 더더욱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도전하는 자의 설렘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믿는 자의 설렘입니다.
요즘 와서 저는 등산 중독, 마라톤 중독에 빠진 것 같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많이 하지는 못하고, 마라톤의 경우 지난 해 한 번밖에 뛰지 못했지만 올해 다시 도전하고 싶습니다. 그것도 42,195Km를 완주하고 싶습니다.
마라톤을 뛸 때 보면 출발을 앞두고 몸을 풀 때 모두 약간은 들뜨고 설레는 표정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끔찍하게 힘든 상황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앉아서 죽지 않고 나가서 맞이한다는 설렘이고 그 어려움과 고통을 마침내는 이겨낼 것이라는 설렘입니다. 결국 승리하는 자의 기쁨에 대한 설렘입니다.
그러나 그 승리는 나의 승리가 아닙니다. 나는 그저 하느님을 믿고 나에게 닥칠 그 무엇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겠다는 도전적 의지를 가질 뿐입니다. 승리의 나머지 몫은 하느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 힘든 것을 이겨낼 힘을 주실 것이고 하느님께서 그 참혹한 고통을 감수할 사랑을 주실 것이고 하느님께서 그 모든 걸림돌들을 디딤돌로 바꾸실 것입니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묵상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는 것은 힘듭니다. 그러나 힘들지 않고 오르는 것은 없습니다. 힘들지 않고 힘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고통 없이 사랑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걸림돌이라고 치어버리면 디딤돌도 없습니다. 치어버리지 말고 딛고 올라서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해야 할 것은 힘들다고 치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힘드니 힘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오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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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세워야 할 계획
- 이건복 신부-
10년 전 신설본당 주임신부로 발령받아 가정방문을 할 때 한동안 냉담했던 젊은 자매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자매님은 아이를 업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세례명이 뭐냐고 물었더니, 자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직 세례 받게 할 생각이 없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대뜸 한다는 이야기가 “아이가 커서 자신의 종교를 스스로 선택하게 배려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잠시 저도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가 커서 종교를 선택하도록 한다면 아이가 다른 종교를 선택해도 무방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이 어머니의 신앙은 뭐란 말인가? 누구나 부모라면 자식이 잘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과 인생의 목표인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자녀에게 가르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에 조기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도 인생의 목표인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얻는 데 필요한 조기교육을 생각하지 못하는 부모라면 앞으로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지 걱정입니다. 새로운 한 해의 첫날, 교회는 하느님의 어머니 대축일로 지냅니다. 신앙의 모범이시며 구원의 중재자이신 어머니와 함께 한 해를, 일평생을 시작하자는 의미입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키시고, 앞으로 그 아들이 걸어가야 할 구원의 길을 곰곰이 생각하시며 모든 뒷바라지를 하고자 결심하십니다. 우리도 새해 첫날 수많은 계획을 세우는데, 그중에 자녀의 구원을 위해 한 해 동안 무엇을 어떻게 도와줄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가장 먼저 세워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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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양승국신부-
<새해의 빛나는 이 아침에>
새해의 빛나는 아침을 다시금 맞이한 형제자매님들께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 중에 하나가 매일 주어지는 우리의 하루가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또 다시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극진한 자비의 표시로 새해 새 아침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한해 우리 신앙의 모범이신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면서, 침묵하면서, 감사하면서, 그렇게 엮어 가면 좋겠습니다.
인생의 역풍을 만나 허우적거릴 때, 문득 삶이 텅 비어 있다고 느끼는 순간, 혹시라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누군가가 계십니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훈훈해지는 사람, 떠올리기만 해도 감사한 사람, 존재 자체로 행복을 주는 사람, 오늘 같은 새해 첫날 찾아뵙지 못하는 것이 늘 송구스러운 사람, 그런 사람이 있는 분들은 삶이 훨씬 풍요롭습니다. 삶이 한결 여유롭습니다.
고맙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는 신자가 됨과 동시에 그런 고마운 분이 자동으로 한분 생깁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극심한 고통 한가운데서 가장 먼저 찾게 되는 분, 우리가 그분 이름을 부를 때마다 어느새 달려와서 따뜻한 위로의 손길을 건네시는 분,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으로 인해 산전수전을 다 겪으셨던 분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한 평생 가슴에 깊은 통증을 느끼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 성모님이셨기에 또 다른 아들들인 가슴 아픈 우리들,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 탄식하는 우리들의 따뜻한 위로자로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아들 예수님 일생에 여백 같으셨던 분이셨습니다. 예수님 탄생 순간부터 갈바리아 산에 이르기까지 성모님은 언제나 조용히 예수님 뒤에 서 계셨습니다. 아들 예수님이 커지시도록 한없이 작아지셨던 분, 늘 예수님 그늘에 서계셨던 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평생 쓸쓸하셨던 분이 성모님이셨습니다.
성모님에게 아들 예수님은 한평생에 걸친 '연구 대상'이었습니다.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나는 소년 예수를 바라보면서 성모님은 무척 대견스럽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했을 것입니다. 마치도 신비로운 세계, 하늘나라를 들여다보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모든 일을 마음에 조용히 간직하셨습니다. 곰곰이 되새겼습니다. 기도에 기도를 거듭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인생여정은 칠흑과도 같은 암흑을 홀로 걷는 것과도 같은 힘겨운 삶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인생 안에 펼쳐진 수많은 사건들, 아들 예수님으로 인해 겪었던 셀 수 없는 고초들을 거의 예견하지 못하셨습니다. 많은 경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어떻게 자신의 삶이 전개될지 전혀 예측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주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신앙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수많은 이해하지 못할 사건들 앞에서 힘들다는 소리 한번 하지 않으시고 그저 ‘지금 이 순간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꾸준히 하느님의 충실한 여종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낳은 아이, 자신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 애지중지 키웠던 소년 예수를 향한 인간적 사랑이 어찌 마리아에게 없었겠습니까? 그런 인간적 생각이 스며들 때마다 성모님은 다시 한 번 자신을 말끔히 비워야만 했습니다. 아쉽고도 아쉽지만 눈물을 머금고 또 다시 자신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또 다시 따뜻한 인간 세계 둥지를 떠나 거칠고도 황량한 신앙의 사막을 여행해야만 했습니다.
부족했던 우리의 지난 한해, 이제 하느님께서 모두 거두어가셨습니다. 우리는 또 다시 다시 새로운 한 해란 과분한 은총 앞에 서있습니다. 정녕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인 새해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가장 큰 표시인 은총의 새해입니다. 성모님과 함께 다시 한 번 힘찬 항해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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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여백, 성모님 -양승국신부-
요즘 존경하는 존 포웰 신부님의 「내 영혼을 울린 이야기」(가톨릭출판사)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고 있습니다.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여러 감동적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지요. 그 중 '실크 잠옷 한 벌'이라는 이야기는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좋은 삶의 지침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신학교 근처 한 교회 병원에 다재다능하고 친절한, 그래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극찬하는 수녀님 한 분이 근무하고 계셨답니다. 그런데 그 수녀님은 병원에서 활동하기 3년 전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긴장형 분열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 중이었습니다. 의사 선생님들은 어른 수녀님께 '이 수녀님은 남은 생을 이 침대에서 보내야 할 것 같다'고 알렸습니다.
수녀님은 병상에 누운 채, 모든 희망을 잃은 듯한 멍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녀님의 정신 이상은 한 가지 특이한 증상을 보였는데 침대보를 모두 벗겨내고 자신이 입고 있던 환자복마저도 벗어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전문의에 따르면 수녀님은 자신을 사람이 아닌 사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이 지긋한 도우미 아주머니가 밝은 분홍색 실크 잠옷 한 벌을 들고 수녀님 입원실에 들렀습니다. 그녀는 어머니가 딸을 타이르듯, 다정한 목소리로 수녀님에게 말했습니다.
"이걸 입으면 아주 예쁠 거예요."
그 수녀님은 그때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분이 두 손으로 제 뺨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준 순간, 저는 정신분열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첫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저는 제 뺨을 어루만지던 그분 손을 꼭 잡고 얼굴을 더 가까이 밀착시켰습니다. 그 순간, 정말로 사랑이 사람을 치유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이후로 수녀님은 그 '따뜻한 체험'을 자기 인생의 화두로 삼게 됐습니다. 수녀님은 요즘 자신이 도우미 아주머니로부터 받았던 그 '따뜻한 느낌'을 또 다른 환자들에게 열심히 전하고 계신답니다.
어떻습니까? 위 글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얼굴이 없습니까?
인생의 역풍을 만나 허우적거릴 때, 문득 삶이 텅 비어 있다고 느끼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이 누구입니까? 극심한 고통 한가운데서 가장 먼저 찾게 되는 분, 우리가 그분 이름을 부를 때마다 어느새 달려와서 따뜻한 위로의 손길을 건네시는 분, 저는 개인적으로 성모님이 생각났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으로 인해 산전수전을 다 겪으셨던 분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한 평생 가슴에 깊은 통증을 느끼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 성모님이셨기에 또 다른 아들들인 가슴 아픈 우리들,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 탄식하는 우리들의 따뜻한 위로자로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아들 예수님 일생에 여백 같으셨던 분이셨습니다. 예수님 탄생 순간부터 갈바리아 산에 이르기까지 성모님은 언제나 조용히 예수님 뒤에 서 계셨습니다. 아들 예수님이 커지시도록 한없이 작아지셨던 분, 늘 예수님 그늘에 서계셨던 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평생 쓸쓸하셨던 분이 성모님이셨습니다.
성모님에게 아들 예수님은 한평생에 걸친 '연구 대상'이었습니다.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나는 소년 예수를 바라보면서 성모님은 무척 대견스럽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했을 것입니다. 마치도 신비로운 세계, 하늘나라를 들여다보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모든 일을 마음에 조용히 간직하셨습니다. 곰곰이 되새겼습니다. 기도에 기도를 거듭하셨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낳은 아이, 자신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 애지중지 키웠던 소년 예수를 향한 인간적 사랑이 어찌 마리아에게 없었겠습니까? 그런 인간적 생각이 스며들 때마다 성모님은 다시 한번 자신을 말끔히 비워야만 했습니다. 아쉽고도 아쉽지만 눈물을 머금고 또 다시 자신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또 다시 따뜻한 인간 세계 둥지를 떠나 거칠고도 황량한 신앙의 사막을 여행해야만 했습니다.
우리 모두 또 다시 새로운 한 해 앞에 서있습니다. 늘 걸어도 두렵고 떨리는, 때로 혹독한 세월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인 새해, 하느님 사랑의 가장 큰 표시인 '은총의 새해'입니다. 성모님과 함께 다시 한 번 힘찬 항해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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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 해
-이중섭 신부-
한 소년이 떨리는 입술로 내 책상에 왔네. 수업이 끝났을 때. “저에게 새 도화지를 주시겠어요? 선생님, 이것은 망쳤거든요.” 나는 그의 도화지를 받았네. 온통 때 묻고 얼룩진. 그리고 그에게 새 것을 주었네. 하나도 때 묻지 않은. 그 다음에 그의 지친 마음에 나는 웃음 지었네. “이번에는 더 잘 해보렴. 내 아이야!”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옥좌에 갔다네. 한 해가 끝났을 때. “저에게 새로운 한 해를 주시겠습니까? 이번 한 해는 망쳐버렸거든요.” 그분은 나의 한 해를 받으셨네. 온통 때 묻고 얼룩진. 그리고 나에게 새로운 한 해를 주셨네. 하나도 때 묻지 않은. 그런 다음 나의 지친 마음에 그분은 웃음 지었네. “이번에는 더 잘 해보렴! 내 아이야!” 2007년이 지나가고 새해가 밝았습니다. 주님은 지난 한 해를 축복하고 또 새로운 한 해를 주십니다. 새해에는 주님과 함께하는 삶, 하느님의 말씀에 맛 들이는 삶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래야 2008년 말에는 올해도 한 해를 망쳤구나라고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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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도구
-주영길 신부-
루카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와 예수님의 탄생 예고,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예수님의 탄생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역할, 곧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1,76-77)라는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함이리라. 시대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세례자 요한도 ‘주님의 도구’라는 것을 복음사가는 암시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성탄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첫 선포자와 그들의 역할을 전하고 있다. 그 영광을 차지한 이들은 누구인가? 다름 아닌 ‘목자들’이다. 앞서 복음은 ‘밤에도 양떼를 지키는’ 이들이라 묘사한다(2,8 참조). 이 대목은 목자들의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떠올리게 한다. 하느님께서는 막중한 성탄의 선포를 보잘것없는 이들한테 맡기신 것이다. 예수님 역시 공생활에 앞서 당신의 제자로 어부들을 선택하신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이들, 갈릴래아 호수에 의지한 채 하늘이 주는 대로 거두는 순박한 이들을 뽑으신 것이다. 본당에서 연초가 되면 참으로 난감한 문제에 봉착한다. 임기가 끝난 단체장으로 누구를 새로이 임명할 것인가? 며칠씩 고심한 본당 신부의 부탁을 들어주기나 할까?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겠지만 점점 바쁘게 돌아가며 먹고사느라 빠듯한 이들에게 섣부른 부탁을 하는 것 같아 말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거절하면서 가장 흔히 듣는 구실은 ‘아는 게 없어서’ 또는 ‘능력이 안 돼서’이다. 이런 걸 굳이 겸손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도구’라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에게 능력이 있거나 우리 자신이 뽑아주십사 간청해서 쓰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쓰시고자 할 때, ‘예’라고 대답할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한다. 정말 교우들에게 듣고 싶은 대답은 “여러모로 부족합니다만, 신부님께서 말씀하시니 성심껏 해보겠습니다.” 하는 말이다.
모든 것을 간직하시는 성모님
-양승국신부-
젊은 시절부터 남편과 결혼생활이 무척 '팍팍'했던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팍팍'한 정도를 넘어 할머니 젊은 시절은 온통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신혼 초부터 바깥으로만 맴돌던 남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년에 몇 번씩 얼굴을 비치더니 급기야 소식조차 알 길이 없게 됐습니다.
그리고는 끝이었습니다. 아무리 수소문해 봐도 행방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생과부가 된 부인은 일찍부터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자식 교육도, 늙으신 시부모님 봉양도 혼자 몫이었습니다. 다행히 선천적으로 생활력이 강했던 부인은 그 오랜 고난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왔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자식들은 잘 성장했고, 경제적 기반도 어느 정도 마련하게 됐습니다. 장성한 자식들은 나름대로 자리를 잡게 됐고, 한평생 홀로 갖은 고萱?다해온 어머니께 극진한 효심을 표했습니다. 평생 고생한 끝에 할머니는 이제야 겨우 여유있고 편안한 노년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건이 생겼습니다. 세상 떴으려니 생각했던 남편이 나타난 것입니다. 거지도 그런 상거지가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 건장한 체격, 준수한 용모는 어디가고 늙고 병든 할아버지, 볼품없고 꾸부정한 할아버지가 대문 앞에 서성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들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왔느냐'며 문전박대했습니다. 그러나 착한 심성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계속 문 밖에 떨고 서있는 할아버지를 일단 안으로 모셨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천천히 할아버지는 다시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할머니였습니다. 일단 불쌍해서 받아들였지만 아직 마음으로 할아버지를 받아들이지 못해 너무 괴로웠습니다. 용서하자고 수천번 다짐해도 일단 얼굴만 보면 혈압이 오르고 심장 박동이 빨라졌습니다. '이러다 내가 죽지'하면서 마음을 바꿔먹어도 그 때뿐이었습니다.
너무 괴로웠던 할머니는 친구 할머니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습니다. 깊이 생각에 잠겨 있던 친구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렵겠지만 영감님이 집에 들어왔다고 생각하지 말고 늙고 병든 예수님, 추위에 떨고 있는 배고픈 아기 예수님이 찾아오셨다고 생각해봐요!"
그 한마디 말씀이 할머니 가슴에 전광석화같이 파고들었습니다. 그 보석같은 한 말씀에 크게 깨달음을 얻은 할머니는 그날로 '할아버지=아기 예수님' 등식을 만들어가기 위해 무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답니다.
늙고 병들어서야 찾아온 할아버지를 예수님으로 받아들이고자 각고의 노력을 다하시는 할머니 모습에서 온몸으로 주님을 받아들인 산골 소녀 마리아의 향기를 느낍니다.
오늘 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예수 잉태라는 청천벽력 같은 제안과 이후 계속된 가슴 철렁 내려앉는 '별의 별' 상황 앞에서 오직 "예!"라고 순명할 줄밖에 몰랐던 마리아, 지극히 단순하고 겸손했던 마리아가 하느님 어머니가 되시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마리아는 전 생애를 통해 예수님을 자신 안에 깊이 간직하셨습니다. 아기 예수 잉태 이후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던 이해하지 못할 일들, 아들 예수로 인해 속끓이던 일들,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 일들 앞에서 마리아는 철저하게 간직하십니다. 침묵 가운데 지속적 묵상에 전념하십니다.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을 때부터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 시신을 품에 안던 순간까지 성모님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하나는 아들 예수를 바라보며 묵상하는 일이었습니다. 한평생 침묵 안에서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고 하느님 뜻을 찾아갑니다. 그 결과 성모님은 가장 탁월한 신앙인이 되셨고 마침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입니다.
올 한해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여정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입니다. 난데없는 고통과 십자가들,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 의혹들이 우리에게 다가오겠지요. 그 순간 성모님 일생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루가 2,18).
지금은 비록 무엇이 진정한 하느님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너무 혼란스럽지만 하느님 계획과 자비를 굳게 믿으며 굳건히 우리 길을 걸어가도록 합시다.
주님께서 주신 가장 큰 은총의 선물인 이 한해, 주님이 함께 계시기에 고통 속에서도 활짝 웃는 한해, 십자가 앞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은총의 한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새해에는 '기도'합시다
-배광하 신부-
새해’입니다.
묵은 해니 새해니 따지지 말게 겨울 가고 봄이 오면 해 바뀐 듯 하지만 보라고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학명 스님의 글입니다. 먼저 새해 주님의 축복과 은총이 충만하시길 빕니다. 새해에는 정말 모든 아픔과 슬픔을 뒤로 하고 기쁘고 평화로운 일들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코헬렛의 저자도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코헬 1, 9)”고 하였지만 분명 묵은 해가 있고 새해가 있는 법입니다. 새날, 새달, 새해가 없다면 인생이 너무 무미건조해 지리라 생각합니다. 새해가 있어야 지난해의 묵은 찌꺼기인 불화, 불목, 여러 상처들을 다시금 씻어 버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인생의 새로운 설계를 새해 참신한 기분으로 새롭게 짤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새롭게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해에는 정말 기도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욕심과 이기심, 알량하고 쉽게 상처 받던 내 마음의 얼룩이 사라지기를, 새해 새 빛을 받으며 그 광채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도록, 주님과 멀어졌던 나의 이탈이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주님만이 내 생의 모두라는 사실에 더 크게 눈뜰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뜬 눈을 지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의 작은 도움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주님께서 보일 수 있다는 자명한 진리에 진정 눈뜰 수 있어야 합니다.
새해에는 평화가 가득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아직도 분단된 국가의, 민족의 백성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직도 세상은 전쟁의 살육이, 그 포성이 멈추지 않았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에 평화가 오지 않았는데 나 홀로 두 다리 뻗고 잠잘 수 있는 이기심에는 결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음에 깨달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새해에는 진정 새해의 밝은 태양이 떠오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빛을 우리가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을 빕니다
새해의 참된 기원과 그에 따른 실천이 있었을 때 민수기의 축복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라 믿습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 24~26)
우리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복, 그 복은 하느님께서 우리 고달픈 인생길에 참 동행자가 되어 주신다는 약속의 축복이며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빠,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갈라 4, 7)
때문에 우리에게는 넘치는 희망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 같은 축복이 우리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보이시는 복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얼굴’은 구약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로는 ‘파님’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파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걸작 품인 당신 모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신 뒤,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 31)하신 인간이 너무나 타락하여 끝내는 벌하시려는 하느님의 탄성, 그래도 당신께서 만드신 당신의 자녀인 인간이 가여워 다시금 인간을 향하여 당신 자비와 사랑, 용서와 자애의 얼굴을 보이시는 하느님 사랑의 얼굴에서 나온 단어라고 합니다.
‘파님’의 얼굴을 인간을 향하여 보이신다는 축복인 것입니다. 때문에 죄의 유혹 속에 더는 헤어 나올 수 없던 연약한 우리 인간이 구원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실로 영광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새해에는 그 같은 진실한 복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복이 모든 이에게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평화가 모든 가정에, 나라에 가득하길 빕니다. 그 같은 복을 받은 우리는 진정 행복한 사람들 입니다. 행복은 그 행복을 진정 느끼며 사는 이에게 가치가 있습니다.
행복을 느끼는 이들은 진정 그 행복에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그 같은 감사가 있을 때 다른 이들에게도 그 복을 내릴 수 있으며, 복을 조금이라도 나누려는 노력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누었던 복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법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분명 돌고 돌아오는 은총인 것입니다. 새해에는 그 같은 축복이 넘치는 삶을 사시길 진심으로 기도 드립니다.
목자들이 예수님을 뵙다 - 신앙인의 복(福)
-김영수 신부 -
“부~자 되세요?”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무렵이 되면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복을 빌어주는 메시지들이 종종 배달됩니다. 대부분 “부~자 되세요!”라고 기원하는 메시지들을 보면서 한 해를 새로 시작하며 서로에게 감사하고 복을 빌어주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빌어주어야 할 진정한 복(福)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첫 날 우리가 묵상하는 민수기(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백성들에게 빌어주라고 하신 복이 무엇인지를 들려줍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백성들에게 빌어주라고 하신 세 가지의 축복은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빌어주어야 할 복(福)입니다.
첫째 ‘야훼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고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영적진실을 믿는 데서 출발합니다. 어렵고 힘든 세상살이에서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지켜주신다’는 사실은 믿는 사람은 이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희망을 안고 살아갈 힘과 여유를 축복으로 받게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야훼께서 웃으시며 우리를 어여삐 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영적진실에 대한 믿음은 그분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은 헛된 것들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줍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기쁨을 주고 자유를 줍니다.
세 번째로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은 ‘평화’입니다. 사람들은 부자가 됨으로써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자신의 욕심을 채움으로써,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이 가짐으로써 유지되는 힘의 불균형일 뿐이며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위의 성과 같은 평화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를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를 사랑한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진정한 평화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그 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교회는 새해의 첫날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 봉헌하며 평화의 날로 지냅니다. 목자들이 달려간 마구간의 구유에 누워계신 갓난아기는 진정한 평화를 갈망하는 세상에 참 평화를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이 누추한 곳에 누워계신 가난한 아이의 모습 속에서 평화를 축복으로 받은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목자들은 이 초라한 마구간에서 그들이 바라던 평화를 발견했습니다. 이 아기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하며 돌아갔습니다.
반면에 사람들은 이 모든 사실을 듣고서도 그저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평화를 진심으로 갈망하면서도 진정한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애타게 바라는 평화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또 이 평화를 얻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이 평화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호기심과 욕심으로 뒤범벅된 갈망은 인간을 거짓 평화를 찾아 헤매고 방황하게 합니다.
“마리아는 그 일들을 모두 당신 마음속에 간직하여 곰곰이 생각하였다” 고 전합니다.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구세주의 탄생을 자신의 몸으로 겪어야 했던 성모 마리아가 ‘모든 일’들 앞에서 고요히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모습은 참 평화를 바라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진정한 평화의 추구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그 평화를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신앙인은 모든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고자 애씁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아니냐를 찾기 전에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며 ‘하느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고 그 때를 알아 볼 줄 아는 신앙인의 복(福)입니다.
새로운 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한 해를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속에는 어떤 ‘바람’과 ‘지향’이 들어 있는지를 들여다보아야겠습니다. 새해에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처럼 모든 일들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할 줄 알고 곰곰이 생각할 줄 아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바라고 살아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도록 성령께 청하며 새해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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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아침
-서공석 신부-
2006년 새해 아침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의 축복과 행복한 한 해를 빕니다. 우리 모두의 가족들과 친지들에게도 하느님의 특별한 축복이 있으실 것을 기도드립시다. 하느님이 베푸신 또 한 해의 세월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은혜로운 한 해가 되어서 시편의 기도 “주님께서 이루신 일이기에 우리 눈에 놀랍게만 보입니다”(시편 117,23)라는 기도가 우리의 가슴에서 울려 퍼지는 한 해가 될 것을 빕니다.
오늘은 2006년을 여는 초하루이면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고,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말은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사용한 표현입니다. 그 시대 교회 안에는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는 한 인간에 불과하였지만, 그분 생애의 어느 시점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는 순수 인간에 불과 했었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 마리아를 ‘사람의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431년의 공의회는 그들의 사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천명하고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이라 불렀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에 따르면, 만일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면,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은 참다운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참다운 하느님의 생명을 보는 것은 그리도 신앙의 근본입니다. 따라서 공의회는 예수님 안에 참으로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해 ‘천주의 모친이신 마리아’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선포의 목적은 성모 마리아의 품위를 격상시키는 데에 있지 않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사신 분이라는 사실을 긍정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14,9). 이 말씀을 긍정하는 ‘천주의 모친’이라는 오늘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보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이 문제에 대해 반론을 펴는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이 채택된 역사적 상황을 모르면, ‘천주의 모친 마리아’라는 말을 마리아가 하느님보다 먼저 계셨다는 뜻으로 오해할 위험도 있습니다. 이 축일은 1970년에 제정되었습니다. 성모님의 축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확실히 본다는 그리스도 신앙의 근본을 재천명하는 축일입니다.
오늘을 세계 평화의 날로 제정한 것은 1967년의 일입니다. 그러면 그 전에는 평화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가? 과거에 평화는 통치자가 주는 것이었습니다. 통치자가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해 주면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세계 평화의 날을 제정한 것은 교회가 세계 평화는 이제 모든 사람이 함께 찾아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세계의 평화는 모든 사람이 함께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찾아야 하는 평화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평화입니다. 하느님이 인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우리가 성탄날 밤에 들은 루가복음서의 선포가 있었습니다. 천사들의 입을 빌려 복음서는 선포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사랑받는 사람들에게 평화”(2,14). 마태오복음서는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복되어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니”(5,9)라고 선언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인류를 사랑하시고 온 인류가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입니다.
“땅에서는 사랑받는 사람에게 평화”라고 루가복음서는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사랑하시기에 그 사랑을 깨닫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곳에 평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웃을 돌보아주고 그 한계를 보면서 가엾이 여길 때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이 실천되는 곳에 평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이기적이고 자기 위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웃이 자기와 다르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복음서의 이런 말씀들은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아성을 탈피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웃은 자기 자신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에 다양함을 뿌리셨습니다. 그 다양함을 존중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다양함을 은혜로운 것으로 보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것이 성령이 우리 안에 하시는 일입니다. 시편은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숨결을 불어넣으시면...땅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104,30).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던 사람이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으로 땅의 모든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고 사랑하게 되어 땅의 모습이 새로워진다는 말입니다. 인류가 서로 위해 주면 평화를 누리는 땅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새해 아침에 우리는 서로 복 많이 받으라고 인사합니다. 축복받은 한 해가 되라고 비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오늘 제1독서 민수기는 모세에게 하느님이 하신 말씀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오늘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도 우리의 이웃 위에 하느님이 복을 내리시도록 기도합시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여 우리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시고, 이웃이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한 해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좋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또 한 해의 세월을 베푸셨습니다. 은혜로운 한 해를 기쁘게 시작합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고 또 해야 하는 일에 온 정력을 쏟아서 정직하게 능률을 올리는 것도 이웃을 축복하는 일입니다.
새해를 맞이한 것은 우리 삶에서 한 해의 세월이 또 줄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종말에 그만큼 다가갔다는 말입니다. ‘사람만이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생명체들은 자기의 종말을 모르고 살다가 사라지지만, 인간만이 자기의 종말을 내다보면서 산다는 말입니다. 세월을 보면서 하느님을 생각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 축복하셔서 태어났고, 하느님이 축복하셔서 살아가고, 세월이 흐르면 하느님에게로 가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이웃 모두가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도록 힘쓰겠다는 마음 다짐을 하는 오늘 새해의 아침입니다.
생명을 보호하라!
-조욱현 신부 -
새해 첫 날이 밝았다. 오늘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며, 세계 평화의 날이다. 지금 시기는 성탄시기로 전례의 중심은 주님이시다. 그러나 아들을 기억할 때는 어머니도 기억하는 것이다. 왜 성모 마리아가 평화와 축복과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선물로서 ‘평화’가 마리아의 태중에서 봉오리를 맺고, ‘우리의 평화’이시며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를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신”(에페 2,14) 그리스도께서 바로 마리아를 통해 오셨기 때문이다.
제1독서: 신명 6,22-27
24: 야훼께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며-너희를 지켜주시고; 25: 야훼께서 너희에게 당신의 얼굴을 빛내시며-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26: 야훼께서 너희에게 당신의 얼굴을 들어-너희에게 평화를, 즉 구원과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인류의 역사 안에 들어오시어 우리의 영신적 성장뿐만 아니라 단순한 인간적 성장까지도 이끌어 주신다. 그러므로 이 평화는 바로 구원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축복은 365일 계속되어야 한다.
복음: 루가 2,16-21: 여드레 째 되는 날,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일은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하느님의 1주간이 꽉 찬 것이다. 이것은 주일로부터 주일로 부활주일로 완성된 모습이다. 이 8일이 된 날 할례를 통하여 아기가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이 된 날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예수“Jeshua'-Jah, 야훼는 구원이시다”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어제이며, 우리의 오늘이고, 또한 영원히 같은 분이시여라”라고 하고 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계신 분”으로 항상, 그리고 오늘 여기서 주어지는 분이다. 단 말씀을 받아들이고, 성찬을 모시고, 마음의 할례 즉 회개를 할 때, 그분은 우리를 복된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신다.
제2독서: 갈라 4,4-7: “압바, 아버지!”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히브리인과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셨다.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율법에 속하게 하시고, 구 율법을 완성하게 하셨다. 율법을 완성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은 외아들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그 성령을 주셨다. 그래서 인간은 그 성령을 통해 하느님을 “압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세례를 받은 우리들을 위한 전달자이시다. 이 하느님의 자녀의 모습은 종의 모습이 아닌, 참 자녀의 모습이다. 참 자녀는 상속자이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들의 말대로 된 것을 확인하고 믿었던 목동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돌아갔다. 이것은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말씀이 살아있을 때에 감사와 찬미가 나올 수 있으며, 그 안에 평화가 있다. 이 평화는 바로 구원이다. 평화는 마음의 질서가 잘 잡힌 조화로운 상태이다. 우리 마음에 질서가 문란하면 평화가 있을 수 없다. 목동들이 예수님을 본 순간 이 질서가 올바로 정립되어 평화 즉 구원을 맛보고 돌아간다. 하느님께 그 평화에 대한 찬미와 감사를 드리면서 돌아갔다. 마음의 질서의 조화를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주님을 만나 뵈옵기 위한 노력이다. 마치 천사의 말을 믿고 달려가는 목동들과 같이 말씀을 들은 즉시 실천하려고 하는 마음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뜻을 죽일 수 있는 그런 삶이 평화를 구원을 느낄 수 있다.
때가 찼을 때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여인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을 완성케 하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말씀의 성령을 통하여 인간을 당신의 자녀로 되게 해주셨다. “지금의 때”는 이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서 계속 태어나시며, 모든 인간들을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만들어 공동 상속자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우리의 모습이 마리아의 모습, 즉 말씀을 잉태하여 낳아주는 마리아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이가 하느님을 “압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을 때 참 평화-구원이 있을 것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는 면에서 하느님의 어머니이다. 이제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 지금 여기서 태어나실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묵상할 것이 있다. 그것은 마리아가 스스로 자유롭게 받아들여(루가 1,38 참조) 당신 자신의 신적인 모성의 신비로써 ‘구원’과 ‘평화’에 이바지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 되지 못하는 ‘모성’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와 같은 마리아에게서 이 같은 일이 나타났다면 모든 여인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참된 사실이다. 모성은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낙태가 허용된 나라처럼 태아를 살해하도록 합법화하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평화를 파괴하는 전쟁의 행위와 다를 것이 없다. 어머니와 자녀, 더 나아가 아직 태어나지 않아서 더욱 보호가 필요한 자녀와의 사이에 평화가 없다면 과연 어디에 평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바오로 6세께서는 1977년 ‘세계 평화의 날’의 주제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이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생명을 보호하라. 생명은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에 의해서든지, 또한 전쟁, 테러, 무죄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태아에 대한 어머니나 의사들의 폭력 등 어떠한 방법에 의해서도 침해되지 않도록 항상 보호되어야 한다. 생명을 거스르는 모든 범죄는 평화를 침해하는 행위이다. 특히 낙태로써 태어나려는 생명을 없애는 것처럼 오늘날 무섭게 또 때로는 합법적으로 국민 대중의 습성을 썩게 하는 행위는 더욱 그렇다...인간 생명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그 타고난 생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성한 것이다. ‘신성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곧 생명이 어떤 억압도 받지 않도록 되어있으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모든 존경과 배려와 정당한 희생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976. 12. 8. 바오로 6세의 메시지).
오늘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그러기에 마리아가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당신의 신적 모성으로써 이 세상에 이루신 생명과 구원과 평화의 선물에 대해서 묵상하고 깊이 사색하도록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강생 순간부터 그분의 생명과 밀접히 결합되어 변모된 모든 생명의 품위를 깨닫도록 촉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러한 가운데 참 평화를 간직한 즉 구원의 기쁨을 가진 우리가 이 때 진정으로 남에게 복을 빌어줄 수 있으며, 그 복은 복을 빌어주는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되돌아오며, 서로를 하나가 되게 해주고, 그것은 성자를 통하여 아버지께 올려지는 것으로 이것이 참된 감사의 생활이며, 이 생활을 통해 우리는 평화를, 기쁨을, 구원을 항상 맛보며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먼저 평화를 맛보고, 그 평화를 빌어줄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이 시간에 기도하자. 오늘은 새해 첫 날이기에 큰 희망과 부푼 꿈을 가질 수 있는 그러한 날이다. 첫 날이기에 의미를 지니는 날이며, 이 날 이 한해를 하느님께 바치자. 첫 날이므로 성경의 말씀대로 하느님께 바치고 한 해를 하느님 앞에 보다 성실하게 살도록 다짐하자. 이러한 지향이 중요하다. 비록 오늘 짧은 시간이지만 기도와 미사를 통하여 1년의 계획을 압축하여 설계하며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야 하겠다. 그래서 복음에 나타난 목자들과 같이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며 영광을 드리는 삶을 갖도록 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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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어머니
-구요비 신부-
전례력으로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축하는 성탄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내 안에서 탄생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탄생이 나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은 내 안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오늘 교회가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칭송하고 공경하는 신앙교의는 에크하르트가 말한 질문에 빛이 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4,43)라고 한 인사말에서 유래합니다.
성경에서 ‘주님’은 하느님께 드리는 칭호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마리아께서 여신(女神)이라든가, 신성(神性)을 지녔다던가, 그리스도의 신성이 마리아에게서 유래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위격 안에 하느님의 신성과 인간의 본성을 온전히 간직하고 계시기에 마리아가 낳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한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온전한 인간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한 분의 어머니를 모시고 계시기에 우리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실 이 신앙고백은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갈망과 동경인 ‘하느님 됨’(神化)을 채워 주고 있습니다.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는 우리 민족설화 중에서 사랑을 많이 받는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는 신분을 뛰어 넘는 애틋한 사랑이야기이지만, 인간은 다 평등하며 또한 고귀한 존재라는 사상이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의 차원은 이보다 더 깊고 넓고 높습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고백함으로써(갈라 4,6 참조) 우리 안에서 이미 그리스도의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삶의 목표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데”(갈라 2,20) 있다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여서(루카 1,38 참조) 예수님을 잉태하고, 실제로 하느님의 아들을 낳고 키우셨기에 ‘하느님의 어머니’이십니다.
고(故) 바오로 6세 교황은 철학자 ‘장 기통’과 아름다움을 주제로 나눈 대화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요한 1,14)를 “사람이 말씀이 되셨다”로 바꾼다면, “이것이 바로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가장 심오한 정의가 아닐까요?”하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의 말씀을 늘 깨어 듣고 묵상하며 마음 속에 간직하며 살 때(루카 2,19참조), 주님은 늘 우리 안에서 새롭게 탄생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더 아름다운 인간으로 변모되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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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큰 복을 받는 방법
-이기양 신부-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가 되면 만나는 사람들마다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을 주고받습니다. 너도 나도 복을 빌어주는 이 아름다운 새해 아침에 문득 생각해봅니다. 사람들 중에 가장 많은 복을 받은 사람은 누구일까.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2.45)
그렇습니다. 성모 마리아이시지요.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나자렛이라는 작은 동네에 살고 있던 한 소녀,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엄청난 은총을 받고 이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공경과 사랑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어떻게 가장 복된 여인이 될 수 있었을까요? 운이 좋아서 하느님의 은총이 자기도 모르게 넝쿨째 굴러 들어온 것일까요? 아니지요. 그 복은 언제나 하느님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고 하느님 말씀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살았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복이었습니다.
새해 첫날이며,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인 오늘, 저는 여러분들께 하느님 안에서, 또 세상을 살면서 복을 받을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을 한 가지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갈릴래아 호수'처럼 사십시오. 예수님이 태어나신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의 경상도 크기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 '갈릴래아 호수'가 있고 또 바다도 하나가 있는데 그 이름이 '사해'(死海)입니다. 곧 죽음의 바다(The Dead Sea)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에는 갈릴래아 호수가 있고 사해가 있으며 그 둘을 연결해 주는 요르단 강이 있습니다.
그런데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는 극과 극을 이룹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물이 맑고, 고기도 많으며, 강가엔 나무가 자라고, 새들이 노래하는 아주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젖줄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풍요로운 생명이 넘실거리는 호수이지요.
이에 비해서 사해는 죽음의 바다입니다. 더러운 사해는 그 물에 어찌나 염분이 많은지 사람이 들어가면 둥둥 뜰 정도입니다. 해서 이곳에는 고기도 살 수 없고 먹이가 없으니 당연히 새들도 깃들이지 않으며 사람 또한 찾지 않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떻게 그 작은 나라에 생명이 넘쳐나며 누구나 좋아하는 풍요로운 호수가 있는가 하면, 아무도 살지 않고 찾지 않는 죽음의 바다가 있을까요? 이토록 극단적인 호수와 바다가 함께 공존하는 이유는 분명히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상류로부터 흘러 내려온 물을 다시 요르단 강을 통하여 내보내기에 항상 물이 새롭고 깨끗하여 생명이 넘쳐납니다. 반면에 사해는 갈릴래아 호수보다도 낮은 까닭에 물이 흘러 들어와도 계속해서 가두기만 할 뿐 밖으로 내보낼 줄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자연 죽은 물이 될 수밖에 없지요. 받은 만큼 나누는 곳에는 생명이 꽃 피고, 움켜쥔 채로 나누지 않은 곳에는 죽음만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찾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포근하고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그 사람에게 가면 왠지 다시 힘을 얻을 것만 같고 찾아가 아무 말 안 해도 푹 쉬고 온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면 그런 사람들은 자기의 것을 못 챙길 정도로 나누는 것이 몸에 배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늘 솟아나는 생명의 힘이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쓸쓸한 마당에서 친구들을 기다리지만 사람들은 그를 고약하게 여길 뿐 가까이 하려하지 않습니다. 그가 움켜쥐기만 할 뿐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움켜쥐면 풍요롭게 될 것 같지만 결과는 죽음뿐입니다. 결국 생명과 죽음, 축복과 박복은 내 것을 얼마나 나누면서 사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하느님과 인간을 위하여 일생을 봉헌하시고 내어 주는 삶을 통하여 가장 복된 여인이 되었듯이 나눔의 삶을 통한 축복의 한 해를 맞으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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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는 마리아를 믿는 교인가?
-유영봉 몬시뇰 -
초 점: 마리아의 지위는 예수님의 지위에서 나온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던 메시아 그리스도임을,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은 교회는 서슴없이 예수를 낳고 기르신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이라고 불렀다. 구원 역사 안에서 마리아의 특별한 위치와 기여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1. 천주교는 마리아를 믿는 교인가?
우리 주변의 프로테스탄 신자들이 가끔 천주교를 비난할 때, "천주교는 예수님을 믿는 교가 아니라 마리아를 믿는 교회이다."고 말한다. 왜 그런 말을 하는가? 성당 마당에 들어서면 어느 성당이나 성모마리아 상(像)이 모셔져 있고, 한해를 시작하는 1월 1일을 마리아의 축일로 지낼 뿐만 아니라, 그 축일의 이름도 '천주의 모친 마리아 대 축일'이다. 한 인간을 '하느님의 모친'이라니 얼마나 엄청난 호칭인가? 더구나 한국 교회는 이 축일을 주일이 아니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축일'로 지낸다. 그리고 계절의 여왕인 5월을 성모님께 봉헌하고 성모성월로 지낸다. 어디 그 뿐인가? 다른 기도는 몰라도 성모송을 계속 바치는 '묵주의 기도'를 모르는 신자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이렇게 성모님께 대한 교회의 애정과 정성이 남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가 성모님께 바치는 이러한 공경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성탄의 기쁨을 경축하는 8일 동안의 축제가 오늘로 마감된다. 어떤 분의 탄생을 축하한다면 그분의 어머님을 그 축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 아침을 여는 1월 1일이다. "시작이 반이다."는 말이 있듯이 참으로 한해에 있어 중요한 날이다. 그런데 교회는 이 날을 성모님께 바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이유인가?
구약은 신약에로 인도하는 빛이며, 구약의 모든 계시와 예언이 신약에서 완성된다. 구약은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시기였다. 말하자면 구약은 메시아의 오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예수의 탄생은 신.구약을 가르는 분기점이 아닌가? 마리아는 그 극적인 사건, 즉 메시아의 탄생 사건의 핵심에 자리하고 계신 분이시다. 마리아를 통해서 신약의 새 빛이 비춰오기 시작했기에 새해 첫날에 마리아의 축일을 지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2. 마리아는 언제부터 '천주의 모친'으로 불리었는가?
한 여인을 '하느님의 어머니' 즉 '천주의 모친'으로 부르는 것은 합당한가? 교회는 왜 이 엄청난 호칭을 마리아에게 드렸는가?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하며 경탄하였다.
교회가 마리아에게 '천주의 모친'이란 이름을 드린 것은, 서기 431년 에페소 공의회 때의 일이다. 아주 오래된 일이다. 교회사를 보면, "예수는 뛰어난 인간일 뿐이지 결코 신(神)이 아니다."하며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부인한 '아리우스 파'의 주장이 있었다. 서기 325년 니케나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의 주장을 이단(異端)이라고 단죄하였다. 그 후 서기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 두 위격이 있다고 주장한 '네스또리우스'의 주장을 또한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한 위격(位格)안에 있음을 확인하였으며, 예수님이 바로 제2위 성자임을 확고히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그 예수가 바로 하느님 제 2위 성자이시기에 당연히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역적(逆賊)을 낳은 여자는 역적의 모친이 되고, 성군(聖君)을 낳은 여자는 성군의 모후(母后)가 되는 것이 아닌가?
마리아의 위상(位相)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위상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신학이나 신심의 발전을 보더라도 마리아론(論)은 항상 그리스도론(論)에서 나오게 되어 있다. 마리아께 대한 공경과 신심은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가 예수를 낳고 기르신 분이 아니라면 교회가 마리아를 공경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깨닫고 믿었기에, 일찍부터 마리아에게 '천주의 모친'이라는 엄청난 '호칭'을 드렸던 거이다.
3. 마리아는 그저 운 좋은 여자인가?
마리아는 '운 좋게' 구세주의 어머니로 선택되어, 뭇 사람들의 공경과 사랑을 받게된 스타인가? 결코 그렇지가 않다.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한 그 순간부터 그의 생애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소명을 깨닫고 그 길을 가는 예수는 이해하기 힘든 아들이었다. 자신의 인생에 불어닥친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손길은 갖가지 시련을 안겨주었다. 불가사의한 출산, 피난, 아들의 엉뚱한 언행, 아들의 가출, 방랑 설교가가 된 아들, 사형수 어머니 등등 시련의 연속이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나를 어디로 내몰고 계시는가?" 마리아는 이런 의문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했다. 그러나 한번도 하느님의 원망하기보다는 줄곧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fiat)"를 반복하는 삶이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때로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때가 많다.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오는지?" 이해하기 힘들 때 우리도 성모님처럼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하며 그분께 온전히 우리를 내맡길 수 있어야 하겠다. 오늘 본기도의 말씀대로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생명의 근원이신 당신 성자를 맞아들이게 되었사오니, 우리로 하여금 성모 마리아는 또한 우리의 전구임을 깨닫게 하소서." 하며 정성되이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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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훈신부-
오늘 우리는 베들레헴의 어느 마구간에 태어나신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듣는다. 이 이야기는 복된 삶이 무엇인지, 참된 신앙이란 어떤 것인지를 천주(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모 마리아의 모범을 통해 가르쳐 준다.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루카 2,16)
만왕의 왕이시며 세상의 구세주이신 분의 탄생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소박하고 조용한 분위기이다. 천사들의 경배나 천상 군대의 찬미소리는 물론 값진 예물을 들고 찾아온 동방박사들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곳은 왕도(王都)가 아닌 시골이며, 왕궁이 아닌 마구간이다. 또한 세상의 빛이신 분께서 모든 것이 고요하게 잠든 한밤중에 태어나셨다는 사실도 천상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찬란한 광채와 함께 오실 것이라고 기대했던 모습과 매우 다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보잘것없는 이들(작은 이들)을 구원하러 오신 분(루카 17,2 참조)이시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당신의 탄생지로 누추한 시골 마구간을 택하신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엘리야 예언자가 하느님을 체험한 사건을 떠올릴 수 있다. 이세벨에게 쫓겨다니며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엘리야에게 새로운 힘과 사명을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발현하셨을 때의 일이다. 엘리야가 체험한 하느님은 강한 바람, 지진, 불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하고 여린 소리로 당신을 드러내셨다.(1열왕 19,11-12)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요란하고 현란한 방식이 아니라 조용하고 차분한 방식으로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고 구원을 이루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한밤중 시골 마구간을 배경으로 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도 동일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곧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도 같은 방식으로 이 세상 역사에 개입하시어 보잘것없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다.
천사가 일러준 대로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낸다. 이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면 언제나 중앙에는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을, 그 양편에는 요셉과 마리아를, 나머지 둘레에는 목동들을, 마지막으로 가장자리에는 가축들을 배치한 그림이 그려진다. 그렇게 모든 눈이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해 있는 장면이 펼쳐진다. 이러한 분위기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삶만이 참된 기쁨과 행복을 얻는 길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목자들은 들에서 천사들을 만난 일과 천사들이 들려준 말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전한다.(루카 2,17) 여기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벌써 널리 퍼진 것으로 전제하고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고 전한다.(루카 2,18)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은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놀라움이 신앙으로 발전했다는 말이 이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 또는 “거참, 신기하네!” 하고 말할 정도의 일로 여겨진 듯하다. 우리도 가끔 매스컴을 통해 놀라운 일들을 대한다. 그런데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때만 신기해할 뿐이지 시간이 조금 흐르면 어느새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도 그랬던 것 같다. 태어나신 분이 누구신지, 그 탄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찾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나타났고 천상 군대가 하느님께 찬미가를 불렀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기 위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 존재들에게 마음을 빼앗겨 자신들과 함께하기 위해 오신 구세주께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리아는 이러한 사람들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마리아는 놀라움 뒤에 숨겨진 하느님의 뜻과 섭리를 이해하는 데 몰입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의 신비는 이성을 뛰어넘는 것이기에 그것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하느님께서 직?밝혀주기를 기다린 것이다. 마리아의 태도는 소박하고 고요하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탄생 사건과 공통점이 있다. 하느님의 신비를 단숨에 알아듣겠다고 야단법석을 떨지 않는다. 이성을 뛰어넘는 것이라면 깨닫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수동적 자세를 취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능동적으로 모든 것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하느님의 도움 안에서 그분의 신비한 뜻을 깨달으려 최선을 다한다.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부족함을 채워주실 수 있는 하느님께 자신을 낮추면서 그분 지혜의 비추심을 갈망하는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의 소박하고 고요한 신앙이다.
마리아의 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기다림을 토대로 한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그 안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이 분명하면 마리아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고요하게 기다린다. 분명 마리아는 이러한 소박하고 고요한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느꼈을 것이다. 또한 세상의 눈에는 미친 아들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먼저 보낸 불쌍한 인생 여정을 걸었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평화를 누린 행복한 여인이었음이 틀림없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되새기는’ 마리아의 신앙을 거울삼아 우리 신앙을 비춰보고 바로 세워야 한다.
“주님,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물고기처럼 저도 당신을 떠나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때로 그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세속적 사랑과 행복을 찾아 당신을 떠나 헤매기도 합니다. 이처럼 나약하고 부족한 저희에게 당신과 함께하는 삶만이 참된 행복이며 영원한 생명임을 깨닫게 하시고, 저희를 당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세상 유혹(돈, 쾌락, 지위, 과도한 취미생활 등)을 떨쳐버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리고 저희 삶을 자주 깊이 성찰하면서 당신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묵상과 기도 ▷예수님을 마음 한가운데 모시고 참된 행복을 누리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마리아의 신앙에서 느낀 점은 무엇인가? 마리아의 신앙과 나의 신앙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느님의 어머니, 우리들의 어머니
-정동수 신부 -
훈련소에 들어가서 낯선 군복을 받고, 입고 있던 옷을 싸서 집으로 보냈습니다. 보충대를 떠나 교육대에 가서는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며 정신적인 충격 속에 한참 머물러 있었습니다. ‘감성적이어서는 안되겠다’ 생각했습니다. 조교들도 “너희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마라. 개나 소 같은 짐승이라고 생각해야 훈련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말했습니다. 힘든 시절을 버텨내기 위해서 저는 스스로의 마음을 메마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편지 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어머니께 편지를 쓰려 했는데, ‘어머니’라는 글자만 쓰려 해도 눈물이 났습니다. ‘내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되는데...’ 생각했지만, 편지지는 하염없이 젖어만 갔습니다. 다음날 다시 써보려고 했는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놈의 눈물이 마르면 편지를 쓰리라” 생각하고 매일 편지지를 꺼내 어머니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늘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눈물 말리기 작전을 포기하고 눈물 젖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훈련 초기에는 힘들어서 인간미를 포기하려 했었는데, 어머니로 인해서 사람다운 따스함을 지켜 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머니는 떠올림만으로도 마음이 따스해집니다. 어머니는 나를 메마른 인간에서 따뜻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화려함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작음, 겸손함, 따스함, 포근함, 침묵으로 항상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모 마리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새해 첫날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냅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특별히 공경하는 이유는 새롭게 태어나게 해주는 그분의 덕을 닮아가기 위해서입니다. 힘들어하는 이웃을 나의 따뜻함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새로운 탄생을 위해 안아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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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어머니
-이종민 신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천주의 성모”, 즉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요 참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사람은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공경합니다.
사람들은 자주 이런 의문을 품기도 합니다. 수많은 여인 중에 왜 하필이면, 나자렛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었을까? 여기에 대해 성경에서 한 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 앞에 한 천사가 나타나 “기뻐하여라”라고 인사 하였을 때, 마리아의 반응은 몹시 놀라면서도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또 오늘 복음에서도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고 합니다. 또 성전에서 아직 어린 예수님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을 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라는 대답을 듣고,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였지만,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라고 합니다. 마리아는 아마도 말씀을 받아들이고 “곰곰이 생각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이것이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선택된 이유일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하는 습관은 사람을 영적으로 민감하게 만듭니다. 마리아가 영적으로 무딘 사람이었다면, 당황스러워하고 거부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와도 그냥 흘려버렸을 것입니다. 또 교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들려 왔음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곰곰이 생각하는 습관으로 인해 영적으로 예민해 질 수 있었고, 차분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영적 예민함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 왔을 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당황스러워하거나 거부하지 않았고, 겸손하게 마음속에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2007년의 마지막 날, 어제 복음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하느님의 아들”, 곧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에 반해 성모님은 말씀을 받아들이고 품어 안음으로써 구세주를 세상에 보여 주셨고, “그리스도의 어머니”, “천주의 모친”이 되셨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 자신의 아들이 하는 일을 그 때에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나 우선 받아들이고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그것이 이해될 때까지 말씀은 어느 기간 동안 성모님의 마음속에 간직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성모님은 항상 “말씀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이 사건은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마음속에 품은 작은 순종과 노력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마음 안에 품는 일은 지금도 계속 되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말씀은 계속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성서를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주위 형제들과 이웃들을 통해서 들려옵니다. 때때로 우리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셨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을 기억해 봅시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간직하고 있다면, 시간이 흘러 때가 찼을 때 그런 의문은 사라집니다. 하느님의 뜻은 더 이상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가 아이를 가져 구세주를 세상에 보여 주듯,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느님의 말씀은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들려오는 말씀을 놓쳐버리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우리는 성모님처럼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 보일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얻게된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요 상속자가 되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2008년 새해에는 무엇보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복을 누리고, 또다른 성모님으로서 이웃에게 복을 나누어주는 한해 되시기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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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성된 새해 첫날
-박상대신부-
오늘은 새로운 한해의 첫날, 주님성탄 팔일축제의 마지막 날,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세계 평화의 날, 새해 1월 1일이다. 어떻게 보면 1년 365일 중 어느 날도 다른 날 못지 않게 똑같은 비중의 날들인데, 유독 오늘 1월 1일이 이 많은 의미의 날을 담아낼 수 있을까? 그러기엔 오늘도 다른 날과 똑같이 너무 작은 하루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새해의 해돋이를 맞기 위해 사람들은 벌써 어제 저녁 해가 질 때부터 해맞이 길을 재촉했다고 한다. 부산 해운대로부터 동해의 간절곶, 호미곶, 정동진 등 곳곳에 사람들이 진을 치고 평소와는 다른 마음으로 한해의 소원을 빌며 해를 맞는다. 해맞이를 하는데는 높은 산도 좋다. 멀리 동해로 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새벽녘에 산을 찾는다. 그런 곳에서 새해의 태양이 떠오름을 울컥하는 심정과 온몸의 전율로 맞이한다는 것은 하나의 행운이다. 사람들은 그 행운을 간직하며 한해 동안 계속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새해의 첫날, 1월 1일을 다른 여느 날과 같다고 생각한다면, 오늘 하루가 이 많은 사람들의 소망과 꿈들을 담아내기는 분명 어렵다. 그러나 오늘은 다른 날과 다르다. 오늘은 한해를 새롭게 시작하는 희망의 날이다. 오명(汚名)을 씻고, 묵은 때를 씻으며, 아픔과 실패를 딛고 다시 설 수 있는 그런 날이다. 잘해오던 일은 더 잘할 수 있도록 다짐과 재충전의 힘을 주는 그런 날이다. 새해는 그런 용기와 힘을 주기에 충분한 날이다. 다른 날과 똑같은 태양의 오름으로 시작되는 날인데 유독 새해 첫날이 이런 힘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새해 달력의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이유를 다 열거하자면 끝도 없다.
새해의 첫날은 우선 주님성탄 팔일축제의 마지막 날로서 이는 인류구원의 서막을 알리는 구세주의 성탄, 즉 하느님 사람되심의 육화사건이 충만한 날이다. 그것은 오늘 새해 첫날에 봉독되는 미사복음으로 미루어 볼 수 있다. 구세주께서 탄생하신 지 8일째 되는 날 잉태순간 천사가 알려주었던 "예수"(야훼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21절) 이는 곧 하느님의 이름이다. 이 이름은 구약성서에서 예수와 같은 이름으로 불렸던 "여호수아"나 우리 인간이 그렇게 불리는 이름이 아니라 하느님 스스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신 이름이다.
새해의 첫날은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여 사람의 아들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축성되었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천주의 성모" 라는 호칭은 이미 431년 에페소공의회에서 공적으로 승인되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계획에 협조하여 생명과 평화의 근원이신 성자(聖子) 하느님께 인간의 얼굴을 선사하여 사람이 되게 하였다. 그럼으로써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회는 새해 첫날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내며,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이 날을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날로 축성하였다. 그렇다고 사람이 새해 첫날을 축성한 것은 아니다. 시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이 날을 거룩하게 하셨고, 또 좋게 보시며 축복하여 주신 것이다.(창세 1,3-4)
새해의 첫날에 뒤를 돌아보면서 과거의 허물을 들추어 오늘을 김새게 만들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속에 과거가 묻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지난 2003년에는 지울 수 없는 허물과 아픔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았다. 대구 지하철 방화 대참사, 노무현 대통령 재신임 파문, 측근비리와 불법 대선자금 논란, 정몽헌 현대회장의 투신자살, 반발과 갈등으로 흔들리는 국책사업들, 카드대란이 몰고 온 자살극, 태풍 매미가 가져다 준 사상 최악의 피해, 조류독감과 광우병 파동으로 휘청거리는 축산농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아파트 투기, 이라크 전쟁과 테러로 말미암은 위기일발의 세계평화, 이라크 추가파병에 대한 뜨거운 찬반논란, 일확천금을 노리는 로또열풍, 갈수록 상품화되는 알몸과 누드열풍 등, 해결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모든 문제들이 고스란히 새해 첫날인 오늘 안에 잠재하여 있다. 내일이면 틀림없이 이런 문제들로 어제처럼 전국이 들썩거릴 것이다.
물론 그런데 익숙한 우리들이다. 늘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살지 말자. 오늘처럼 살아보자. 소망은 살찌우되 욕심은 버리고 살자. 겉모양은 단정히 하되 허례허식은 버리고 참된 가치를 좇아 살아가자. 파고드는 아픔을 남에게 떠맡기지 말고 온몸으로 받아들여 마음껏 아파함으로써 극복하자. 우리의 주님이 그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과 함께 하고 그분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삶을 살아보자. 새해 첫날의 발걸음을 탄생하신 주님과 함께 내어 딛자.◆애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느님의 축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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