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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무예 여행 스크랩 이형민_우리민족의 무예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757 13.08.31 11: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武란 氣武. 藝武. 軍武를 합한 것을 말한다.

여기서 氣武는 호흡을 통하여 氣를 축척하고 운용하는 눈으로 볼 수 없는 동양무예의 內功을 말하며 藝武는 동작으로 표현하는 권법. 족술. 검도. 권투. 유도. 태권도 등을 말하며 서양무예의 경우 스포츠가 藝武에 해당된다. 軍武은 군에서 사용하는 무예. 전쟁에서 전력을 좌우하는 무력의 전부가 이에 속한다.

우리 민족의 무예역사는 B.C7197년 한나라(桓國)시대 제1세 환인임금이 天山에서 살면서 治身得道하여 無名長壽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을 기록한 天符經의 三一神苦는 B.C3897년 배달나라(培達國) 제1세 환웅천왕이 녹도문(상형문자)으로 기록하였는데 신라때에 이르러 최치원이 한자로 옮겨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桓雄天王은 治神得道하여 곰족의 딸을 황후로 맞이하였다. B.C2333년 단군조선(古朝鮮) 제1세 王儉 또는 한배검은 제18세 황웅 거불단 임금의 아들로서 氣武에 득도하여 蘇塗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문명한 정치를 하였으며 강화도에 塹城檀과 三郞城을 쌓고 耶城에 堂을 세워 무예를 교육 시켰다.
제2세 단군 夫婁임근은 태자때 塗山에서 夏禹에게 五行治水法을 가르쳐는데 이로인해 井田制에서 비롯된 屯田兵制가 중국으로 처음 전해졌다. B.C2137년 제4세 단군 烏斯丘임금이 즉위하여 기린굴에서 제천의식을 행하고 衣(무예의 경지에 이른자에게 검은옷과 관을 씌워주는 의식) 의식을 행했다.
B.C1891년 제11세 단군 島奚임금이 즉위하여 명산마다 國仙蘇塗를 설치하여 大始殿옆에 堂을 세워 三倫九誓와 무예를 가르켰다. B.C1782년 제13세 屹達임금 즉위로 蘇塗를 많이 설치하여 文武를 배운 이들이 밖으로 나갈 때 꽃을 꼿아서 이들을 國子郞 또는 天指花郞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삼국시대의 무예는 A.C424년 고구려시대, 고구려의 고분을 보면 삼실총벽화, 무인공성도, 조의선인등 무예를 하는 형상을 띠고 있다.
B.C18년부터 660년까지 642년간의 역사로 의자왕의 끝으로 신라에 멸망한 백제는 삼국사기 수저81열전등이 백제조의 백제본기 등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온조왕, 아신왕, 비류왕 등은 무예을 숭상하여 수벽타를 수련했다고한다.
신라는 비각술, 수벽타, 탁견술, 화랑선인 등이 무예가 있었다.

고려왕건은 수박희를 국선으로 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고려의11대 문종왕때부터 18대 의종왕에 이르면서 무관은 경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790년 사도세자의 뜻에 따라 정조대왕의 어명으로 이덕무가 어제무예도보통지를 펴낸다.
태종실록8. 동국여지승람9.등에 보면 조선조에서도 수박이 무예로서 계승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와 무예도보통지를 보더라도 우리의 민족무예가 조직적으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제침략으로 우리 고유의 무예의 맥은 끊어지고 말았다

 

수벽치기

수벽치기는 <고려사>에 수박, 수박희, <조선왕조실록>과 기타 고문헌에 수박, 수벽, 수벽타 라는 이름으로 기록돼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송도(개성)의 수박이 지나(중국)로 들어가 권법이 되고 일본에 건너가 유도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쿵푸와 유도의 시원은 수벽치기라는 말이다.

이와 관련, 일본의 무예학자인 야마모토 기타이(덴리대학) 교수가 <한국고대의 수박>이라는 논문(덴리대학 학보)을 통해, 마쓰나미 겐시로(센슈대학) 교수가 <격투기의 문화사> 등에서 수벽치기의 근원과 일본무예의 뿌리에 대해 언급, 육태안씨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우리 고유의 가락인 3박자를 기본으로 삼고 있는 수벽치기는 위아래(손뼉), 앞뒤, 옆, 가새치기와 산쌓기 동작으로 양의 기를 발동시키며 무예수련에 들어간다. 수벽치기에는 사물놀이처럼 서서하는 것(선반)과 앉아서 하는 것(앉은반)이 있다. 방안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내기삼아 하던 것이 앉아서 하는 것이다.

수벽치기에선 손을 날개라고 하는데 날개짓(수벽 8세)은 날개표기, 날개겨누기, 날개접기, 날개치기, 두날개내리기, 한날개내리기, 날개들기, 날개꺾기 등으로 구성된다. 이들 날개짓은 검술과도 직결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수벽 8법으로 불리는 공격기술은 손바닥, 손날(손칼모양), 고드기(손끝), 반날(손날의 반대쪽), 주먹질, 잽이(잡는 법), 찝기(손가락으로 급소를 짚는 것), 쏘기(손가락으로 퉁기는 것) 등이다. 이들 공격기술은 어깨 위쪽의 8군데, 몸통의 5군데 급소를 노리며 발질법도 있는데 배꼽밑으로 낮게 찬다.

또 발뿌리걸음, 황새다리걸음, 뒤꿈치걸음, 울력걸음, 등의 걸음새(발 기본동작)와 발끌어딛기, 제자리 발바꿈질, 뒤집기 등도 발기술에 속한다. 이들 기술은 모두 우리의 전통 몸짓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울력걸음은 처용무이고, 날개짓은 살풀이며, 발차기인 '뒤집기'는 연결동작으로 실시하면 농악의 자반돌리기와도 같다.

단경주 함월산 자락 한 켠에 위치한 골굴사(骨窟寺) 라는 절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유일하게 굴 안에 관음상과 지장불, 약사여래불을 모신 법당이 있는 절로서 굴속 법당 외에 남근석과 여근석이 기묘한 모습으로 서 있고 깍아지른 듯한 바위를 뚫고 샘물이 솟아 신비감을 도는 절이다.

가장 특이한 점은 타 사찰에선 들을 수 없는 기합소리가 독경소리와 묘한 대조를 이루며 산속을 메아리친다는 점. 승려들이 숲과 폭포. 법당 등을 배경으로 무예를 닦는 소리다. 임진왜란 당시 국운이 풍전등화 같던 시기에 나라를 구한 서산대사, 사명대사등 고승들이 수행하던 선무도(禪武道)를 이어가고 있는 것.

선무도의 정식 명칭은 불교금강영관(佛敎金剛靈觀)
석가 출현 이전 부터 인도의 선주민들이 행하던 수련법으로 불교에 유입되면서 호국불교의 일환으로 또는 마음을 수행하는 한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즉 작게는 사찰을 지키고 크게는 나라를 수호하는데 그 의미를 두었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선무도의 궁극적 목표는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
우리나라에 선무도가 들어온 것은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화랑들에게 심신수련과 호국무술의 일환으로 가르쳤는데 이것이 승가의 필수 수행법으로 전래된 것. 그러나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숭유억불 정책과 무예를 경시하는 풍조에 밀려 고승들만이 일부 닦아오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무예 말살 정책에 휘말려 선무도는 사라지다시피 했다.

이 선무도가 다시 빛을 보게 된것은 60년대. 부산 범어사 청련암에서 수도에 열중하던 양익(兩翼) 큰스님을 중심으로 불가의 몇몇 뜻있는 승려들이 불가의 전승무예를 발굴한 것. 현재 선무도는 골굴사 본원을 중심으로 서울, 부산등에 17개 지원을 두고 미국과 캐나다에도 포교원을 개설한 상태. 포교원을 거쳐간 인원만 5만여 명에 달하며 현재도 3천여 명이 수련하고 있다. 또 골굴사에서는 1박2일의 주말 회원제를 실시, 직장인을 위한 건강 수련법을 강의하고 있다.

佛家서 秘傳돼온 수행방법
불교의 가르침에는 현교(顯敎)와 밀교(密敎)의 두가지 방편이 있다. 선무도는 밀교적인 형태로 발전된 불가의 비전 수행방법이다. 선무도의 큰줄기는 수행관.건강관.무도관으로 대별된다. 수행관은 해탈을 위한 선(禪-참선)의 수행법을 이르는 것이며, 건강관은 수행을 통해 병마에서의 탈출을 의미하고 무도관은 무예로서 지니는 도(道)와 예절을 일컫는다.

현재 건강관의 경우 동국대 한의대에 선무기공연구학회가 설립됐을 정도로 일반인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또 무도관은 사회체육으로 발전해가고 있다. 다만 수행관은 승려들에게 주로 보급됐으며 최근에는 서서히 일반 대중에게도 마음의 평온을 찾는 교화법으로 퍼져가고 있다.

선무도의 구성은 선요가, 선무기공, 선무술로 크게 나뉘며 좌관(坐觀), 입관(立觀), 행관(行觀)등의 수행법이 있다. 선무도에는 봉, 검, 권등 각종 병장기 기술이 총망라돼있고 무엇보다 건강한 신체와 깨끗한 마음을 닦게된다는 것이 무예연구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이 가운데 선호흡이나 선요가는 수 천년 전부터 불가에 전승되는 비법이다. 선호흡은 호식(呼息), 지식(止息), 흡식(吸息)의 3단계로 이루어지고 다양한 동작이 곁들여진다는 점에서 단전호흡과 다소 다르다. 선호흡에는 특히 서서 생활하는 인간에겐 척추 아랫부분에 무리가 가해진다는 점에 착안, 7종의 동물을 본떠 기의 흐름을 원활히 하는 12개의 동작이 있다.

선무술의 가장 큰 특징은 부드러움이다. 신체에 큰 무리가 없으면서도 강력한 파괴력을 구사한다. 다른 무예가 공격과 방어의 개념으로 구성돼 있다면 선무도는 신체의 유연성과 균형을 바탕으로 불교의 이상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뫄한뭐루
중국말 같기도 하고 불경에 나오는 용어 같기도 한 생소한 이름의 무예 뫄한뭐루란 경상도 충무, 통영의 토박이 말이다.
"뫄"는 마음과 몸의 해탈을 뜻하고, "한"은 하늘과 생명의과 도가 하나라는 고유사상이며, "뭐루"는 "마루얼" 곧 종가(宗家)정신을 이른다. 즉 무예를 통해 민족의 얼을 함양하고 몸과 마음의 해탈에 도달한다는 목적을 담고 있다. 뫄한뭐루 입문자들은 이름에 담겨있는 이 같은 철학대로 민족고유의 미풍양속을 지키고 질서지키기 등 도덕운동을 함께 펴고 있다.

뫄한뭐루 창시자인 총령(總領)하정효(河政효:59)씨는 [충무공이 단 12척의 배로 1백33척의 일본대군을 물리칠때 펼친 학익열진(鶴瀷烈陣)을 인체에 적용, 지난 57년에 만든것]이라고 무예창설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학익열진은 일본대군의 침공에 고심하던 충무공이 한산도 앞바다에 학이 내려앉는 꿈을 꾸고 이를 형상화한 전법이다. 좌우 척후장, 좌우돌격장을 학의 날개로 배치하고 전, 중, 후부장을 몸체로 해 전투상황에 따라 진을 변화시키면서 효율적으로 적을 공격했던 해상전법이다.

한간대첩을 형상화한 그림이 바로 학익열진을 표현한 것이다. 총 8천 1백92가지의 돌굼(품세)을 지닌 뫄한뭐루의 특징은 철저한 실전형이란 점이다. 또 강한 파괴력과 부드러움, 리듬 등 무예가 지녀야할 요건과 전통적인 정서를 두루 갖추고 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여 동북쪽방향으로 동녁돌굼, 서쪽으로 달녁돌굼, 남쪽으로 물녁돌굼, 북쪽으로 뭍녁돌굼, 사방사이의 간방돌굼등 8방향에 기본돌굼이 있고 방향마다 1천24개의 동작이 입체적으로 전개된다. 마치 한민족의 진취적인 기상이 사방으로 뻗어나는 듯하다.

또 각 돌굼을 맨손으로 익히면 이를 다시 봉술과 검술 등 병기술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어 하나를 알면 열을 구사할 수 있는 무예로 일컬어진다. 작게 구사하면 관절을 꺾는 호신술이 되고 크게 쓰면 상대를 던지는 동작이 된다고 한다. 특히 고정된 중심이 없고 이동하며 중심을 잡아 공격과 방어를 하기 때문에 상대의 여측을 불허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특이한 점은 도덕적 생활을 중시하는데다 뫄한뭐루 특유의 건강수련법(呼節明)이 따로 있어 병자는 물론 가족단위의 수련생이 많다는 점이다.

어떻게 수련할까?
지난해 대전 액스포가 열릴 당시 한산대첩 수륙대제전이란 이름으로 시범을 보여 호평을 받기도 했던 뫄한뭐루는 시중도장 (연무관)에서의 수련과 입산 수련 등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시중 도장에선 손, 발쓰기, 기본돌굼, 호흡수련, 대련(그림자대련, 실전대련), 병기수련(봉,창,검,부체등), 회복수련(건강법) 등을 배운다. 말하자면 신체단련 중심의 수련을 말한다. 이 같은 수련 후 입산수도에 들어가게 된다. 본산과정에 이르면 산간도문(山間道門)에서 전해지는 수도생활을 그대로 모방한, 뼈를 깍는 81개의 과정을 거친다. 뫄한뭐루는 시중 도장에서의 위계(단)와 본산과정에서의 위계가 따로 있어 본산과정에 입문 위계를 받어야만 비로소 사범자격이 주어진다.

뫄한뭐루의 특성은 크게 여섯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는 것이 무예연구가들의 지적이다.

* 공격과 방어의 구별이 없다.
* 고정된 중심이 없고 움직이며 그때그때 중심을 잡는 이동중심이다.
* 전후좌우로 회전할 수 있고 입체적으로 전개된다.
* 한 가지 돌굼 수련으로 맨손, 봉, 검, 총검, 내공술 등을 한꺼번에 체득할 수 있다.
* 일대다수의 실전대련에 능숙해진다.
* 호흡 수련으로 원력(元力)을 얻어 신체가 건강해진다.

일례로 첫번째 돌굼인 나앞나기만 수련해도 꺾기, 던지기, 치기, 조르기, 봉검술 등의 기술을 구사할 수 있게 된다. 뫄한뭐루의 8천1백92가지 돌굼에는 맨손, 총검, 봉, 검, 기물, 망사, 밧줄, 투창 등 기구를 사용한 방대한 기술이 함께 융화되어 있다.

또 손에서 기를 발산해 물건을 깨는 등 내공 12차력의 호흡수련법과 맘쓰기,얼쓰기 과정등도 지니고 있다. 하정효총령은 [아직 5백여 돌굼은 전수하지 않고 있다]며 [8천1백92가지의 돌굼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전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최근 대한무술인총연합회 총재가 된 하총령은 [무술은 호국의 기틀]이라며 [무예의 관장기관이 현재의 문체부가 아닌 국방부여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뫄한뭐루는 충남대, 배재대, 대전산업대, 한서대등 주로 충청도의 대학을 중심으로 동아리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연세대와 한국 외대에도 동아리가 결성돼 있다. 또 멀리 알래스카, 영국, 미국 등에도 5개의 지원을 두고 있다.

 

태권도

태권도는 한국 고유의 전통무도이자 스포츠이다. 그 기원은 4천년 전으로 야생 동물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일종의 자기 보호 수단이었다. 태권도 동작을 보면 짐작되겠지만 야생 동물의 공격이 불시에 어느 방향에서 행해질지 모르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즉각 그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민첩한 동작의 개발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거의 본능적으로 자기 방어 동작을 수련하게 되었고, 그 과정을 거쳐 현대 태권도의 기본인 막기·차기·지르기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오늘날의 태권도와 비슷한 무예의 형태와 발자취를 삼국시대에서부터 확실하게 발견할 수가 있다. 고구려 시대 (37B.C~668A.D)의 고분 벽화에 '태권도의 겨루기를 하고 있는 두 젊은이'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 벽화가 있는 무용총 고분은 A.D 3년부터 427년까지 고구려의 수도였던 환도성(현대 만주 통화성 집안현 통구)에 있으므로 인도의 달마 스님이 중국에 오기 훨씬 전에 이미 우리나라는 고유의 무도를 발전시켜 왔음을 증명해 준다.

이 벽화를 보면, 한 젊은이는 왼쪽을 향하며 왼손으로 몸 중심을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고, 상대방은 왼쪽 손을 뻗어 공격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 밖의 다른 고구려 벽화에서는 오늘날의 태권도 도복 및 띠와 아주 흡사한 수련복을 입은 사람들의 그림도 발견할 수 있다. 그 그림의 주인공들은 머리를 방어하기 위해 왼손을 들어 얼굴막기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그 얼굴막기와 오른손아래막기는 현재의 태권도에서도 모두 사용되는 겨루기 자세이다.

백제 시대(18B.C~660A.D)에서도 왕실의 지원으로 무예가 장려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기록에 따르면, 말등타기, 궁술, 맨손격투기 등이 당시의 군사들이나 평민간에 대단한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다. 특히 '손과 발 두 가지를 사용하는 호신술이 널리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백제 시대에도 오늘의 태권도가 비슷한 고유의 무예가 존재했다는 확신을 갖게 해준다.

한국 무예는 사실 신라 때 최고 경지에 이르러 신라 시대(57B.C~936A.D)에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정복, 삼국 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원동력은 진흥왕이 창도한 군사적, 교육적 사회 조직인 화랑도에 있었다. 화랑도는 귀족의 자제들로서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상무정신(尙武精神)이 그들의 신조였으며, 그것은 신라의 도덕정신과 국력의 근원이 되었다.
즉 화랑도는 세속오계인 사군이충 · 사친이효 · 교우이신 · 임전무퇴 · 살생유택을 철저히 지켰다. 이 세속오계는 한국 전통무도의 철학적 배경이기도 하다. 당시 화랑도는 수박도(手拍道)라는 맨손격투기 등 몇 가지 호신 무예를 익혔다. 특히 수박도는 아주 효율적이고 전투적인 연속동작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 맨손격투기는 신체 단련과 군사 훈련 및 레크리에이션으로 화랑도들에게 장려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태권도는 발전되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화랑도들이 실천한 세속오계의 정신을 오늘의 태권도인들도 철학적 정신으로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이다.

고려 시대(918A.D~1392A.D)에 이르러 맨손격투는 더욱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 때에도 수박도라고 일컬었는데, 무예로서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규칙을 가진 스포츠로서 행해졌다.
매년 왕실의 지원 하에 시합과 시범 경기가 열렸으며, 기술의 진보를 위해 과학적인 연구가 거듭되었다. 따라서 수박도는 국민적인 무술과 스포츠 · 레크리에이션 활동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서기 1392년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체력 단련 · 군사 훈련 등에 관한 관심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태조(太祖)는 국교였던 불교를 유교로 바뀌었고, 따라서 지배 계층의 인생관 및 정치 · 문화관까지 모두 유교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양반들은 중국 고전이나 읽고, 육체적으로 힘드는 활동은 오로지 상놈들만이 하게 되었다. 그러니 태권도(당시에는 태껸이라 불렀다) 같은 무예는 인기를 잃었으며 당연히 그 기술은 퇴보하게 되었다. 문관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무관보다 우위에 있었으므로 무예니 무도니 하는 것은 말 그대로 거의 질식 상태에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얘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몇 세기가 지난 후 정조(正祖) 임금이 우리나라 고유의 무술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1790년 정조는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濟家)에게 우리 나라의 무술 전반에 걸쳐 다룬 교재를 편찬토록 하였는데, 그 속에 맨손격투기를 삽입토록 지시하였다. 그래서 출간된 것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이며, 이 책은 현재 한국 무예의 중요한 초기 고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목판 인쇄본으로 된 40여 페이지 분량의 이 책의 내용과 그림들은 당시 한국무예의 실상을 비교적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909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멸망하고 한국의 무예도 점차 그 맥을 잃어가다가 1945년 광복을 맞자 무술인들에 의해 다시 정립된 것이 지금의 태권도이다.

그러나 태권도가 오랜 우리 무술의 독자적 배경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원이 일본의 가라데에 있다고 하는 설이 분분하다. 태권도는 가라데와 흡사한 점도 있지만 차별화되어 있는 점이 더욱 많다. 현재 태권도의 특징을 꼽자면 신속하고 강력한 발차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태권도 고단자의 발차기는 웬만한 무예인의 주먹지르기 정도로 빠르며, 그 파워는 상상을 초월한다. 쉴새없는 연속 발차기가 태권도의 주특기인 셈이다.

태권도는 분명 수천년간 우리만의 독자적인 무예로 발전해왔으므로 그 역사적 기원이 우리에게 있음을 이 기회를 통해 재언하고 싶다.

 

기천무

무른 것과 같고 아득한 것과 같으며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으면서 하나의 큰 근원으로 비어 있으며 그것을 있다고 말하자니 형체가 없고 그것이 없다고 말하자니 만물에 의지하여 태어났다. 이것을 이름하여 기천이라 한다. 옛 중국에서 동방 최고의 선도로 일컬어졌다는 기천문은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 온 우리 민족 고유의 심수련법이라고 한다. 그 유래와 전승 과정은 문헌상으로 알려진 것이 없고 다소 황당한 무협소설처럼 이야기로서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1970년대 초 부산의 무술가에 괴이한 10대 소년이 나타났는데, 가벼운 마사지로 골절된 팔뼈를 일주일만에 접골시키는가 하면 불치병의 환자를 단순히 어루만지는 것만으로 낫게하는 기행을 하였다. 이러한 신통력을 몰지각한 사람이 악용하여 치료비를 받아 가로채는 사건이 벌어지자 소년은 훌쩍 산중으로 들어가 버렸다.
수년 후 관악산의 작은 암자에서 기천문을 수행하는 몇 명의 젊은이가 있다는 소문이 등산객들의 입을 통하여 알려졌다. 그러나 특별한 관심을 끌지 못한 채 세월은 무심히 흘러갔다. 그리고 1993년 10월 31일, 서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93기천문 대동제가 열렸다. 이 행사에는 5백여명의 기천문 문인들이 길놀이를 시작으로하여 기천무학과 기천단학을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하였다.
여기에는 그동안 기천문을 배운 바 있는 여러 무용단이 기천무를 추었고 서울대, 연세대 등 서울의 10여개 대학과 전남, 강원, 부산 등 10여개의 지방대학에 결성되어 있는 기천 청년학생회가 대거 참가하여 무예 10종을 펼쳐보였다. 그들은 "전 민족 성원에게 이 주법을 전하라"는 선대 기천문 박대양(44세 본명 정용)진인으로부터 전해진 기천을 배운 사람들이었다.

박대양 기천문주는 대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우연히 원예라는 도인을 만나 기천을 전수받았다. 기천에는 행인, 공인, 법인, 정인, 도인, 진인, 상인의 일곱품계가 있는데 원혜가 상인의 열에 들고 박문주는 진인의 경지를 터득했다고 한다. 마지막 산중도인 박진인이 바로 부산에 나타났다가 지리산 천은사로 들어간 그 소년이다. 소문에 떠돌던, 서울 관악산에서 그로부터 기천을 배운 초기의 제자는 현재 기천연수원 원장으로서 기천의 대중화를 주도하고 있는 박성대, 미국에서 태권도 사범을 하는 전진효, 해동검도 총관장 김종호, 수벽치기의 육태안 등 손꼽을 정도의 소수이며 이들보다 조금 늦게 입문한 탤런트 나한일 등이 있다. 최근 시중에 인기 무예로 꼽히는 해동검도, 심검도, 수벽치기 등이 기천문의 분파라는 얘기다.
기천은 무학과 단학을 공부한다. 실전적이라는 무학은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의 멋진 춤이다. 춤인가, 무술인가로 화제가 되고 있는 택견보다 훨씬 춤적인 요소가 많다.

기천의 동작은 많은 사람들이 평하길 중국의 당랑권과 비슷하다 한다. 그러나 세세한 부분에서 다른 점도 있으므로 중국무예와의 정확한 연관성도 단정지을 수 없다. 기천에서는 모든 기예가 낱수로만 존재하며 대개의 동작은 상체의 전후탄력을 이용한 것들로 보인다. 대게 권법 위주로 되어있으나 무기술로서 검, 봉, 부채, 낫 등을 다룬다고 한다. 기천에는 '내가신장'이라는 특이한 기본자세가 보이는데 다른 문파의 기마자세에 해당하는 것이나 그 동작이나 원리 등이 생소한 편이다. 손기술로서는 '반장'을 가장 기본으로 삼는다고 한다.

기천은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인 무예이다. 마치 무협지처럼 박대양 문주가 설악산에서 어린 나이에 무공을 배워 하산한 후 이름을 얻고 제자들을 모아 현재 널리 알려진 무술이다. 따라서 기천의 역사나 박대양씨의 스승에 대해 알려진 바는 모두 소문이나 전설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문화를 보면 대부분 선조들의 은근과 끈기로서 그 맥을 지켜왔다. 민속놀이, 판소리, 창, 사물놀이, 마당놀이, 고전 춤, 탈춤, 민속 공예품등 많은 분야에서 민족의 맥을 이어가는 분들은 자기의 스승이나 선대로 부터 몸에서 몸으로 전수되어 오늘날 우리 문화의 맥을 이어오고 있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민족의 휼륭한 심신수련법인 민족선도가 그 어디엔가 맥을 이어오고 있다면 그것을 찾아내고 발굴하여 민족의 웅지를 펴는 밑거름으로 활용하여야 겠다는 마음으로 기천을 소개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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