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의 어제와 오늘
-어제의 서정시와 디지털 시대 유목민의 詩
송 수 권 / 한국풍류문화연구소장
1. 디지털 유목민의 개념
밀레니엄(서기 1000~2000년)의 세계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칭기즈칸이었다고 <워싱턴 포스트>신문은 1995년 송년호에서 그렇게 밝혔다. 몽골의 작은 부족이 아시아, 유럽을 아우르는 거대한 땅을 정복했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은 병사의 말 궁둥이에 가죽 부대에 농축시킨 ‘보르츠’와 이동 천막인 ‘파오(케르)’를 매달아 군용식량과 잠자리를 한꺼번에 해결함으로써 유럽의 보병부대를 제압하였다. 이는 곧 정주민(定住民, sedentary)과 유목민의 차이점에서 온 이동의 간편함이다. 정주민이 역사는 종이에 기록된 반면 유목민의 선사(先史)는 바람에 새겨져 날아간다. 바로 우리 민족의 이동경로가 그렇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디아스포라(Diaspora. 유랑, 이산)라고 말하고 또 환상방황(環狀彷徨)이라고도 한다.
이런 현상은 민족 이데올로기에 편승한 20세기의 ‘제국주의 광풍’에서 연유했고 따라서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는 20세기를 ‘악마의 세기’라고도 말한다. 이 악마의 세기 다음에 오는 것은 신유목 시대, 즉 노마드로 가는 인간의 세기다. 다시 말하면 인종도 국경도 가족도 무너지는 ‘유랑하는 형제들’이 새로운 부족을 형성하게 된다고 <합리적인 미치광이>에서 자크 아탈리는 쓰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유토피아인 신유목시대이고 환상방황이며 디아스포라라고 말한다. 정말 생각해보라! 우리가 꿈꿀 약속의 땅이 처음부터 없다면 아예 떠날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 아닌가! 세계는 끊임없이 요동치고 코쿤족 시대는 유동하고 있지 않은가? 중국이 고구려사를 왜곡함도 2백만 조선족이 분리국가로 독립될 것을 사전에 예방하자는 정치적 술수가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이것이 ‘동북공정’이다.
이는 자크 아탈리가 문명의 흐름을 살피면서 개념화한 ‘도시 유목민’ 또는 ‘디지털 유목민’ 시대에 삶의 가치관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대한 동시적 물음이기도 하다. 즉 노트북, 컴퓨터, PDA, 휴대전화 등 21세기 ‘문화적 유목민’이 갖고 다니는 배낭 속의 장비들이 현실세계와 사이버 세계를 넘나들면서 디지털화되지 않는 삶은 삶으로서 생명력이 있는가 하는 물음과도 일치한다. 세 쌍 중에 한 쌍이 이혼하고 50페센트의 여성과 남성이 이 환상방황을 꿈꾸고 있다.
따라서 자크 아탈 리가 그리는 유토피아의 세계는 ‘도시 유목민의 형제애를 실현하는 세계’에서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합리적인 미치광이>라는 저서에서 이 유토피아가 실현되려면 프랑스 혁명의 3대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형제애) 가운데서도 ‘형제애’라는 덕목이 실천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여기서 형제는 강자보다 오히려 약자, 가난한 사람, 외로운 사람, 외국인, 패배자 등을 일컫는다. 이는 다름아닌 보편적인 ‘이타주의’ 그것이 바로 ‘형제애’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는 사회과학적 접근이라기보다는 인문학적 접근이며 오히려 시적 접근안 것으로 비쳐진다. 자크 아탈리는 또 5백만 년의 인간 출현 역사에서 겨우 7천 년의 기간만이 정착시대고 그 나머지는 유목시대의 역사였으며, 지금은 그 신 유목 시대로 이항해가는 세기라고 진단한다.
2. 노마드(nomad)이론
노마드의 이론에서 도시 유목민의 삶은 낯선 시간(속도)과 낯선 공간으로의 이동에 의한 여행이며 새로운 경험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서의 텍스트다. 시간과 속도, 공간의 이동에서 미래에 대처해야 할 현대시의 한 단계가 어디쯤 와 있는가를 묻는 것과도 같다. 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첫째는 정주민의 삶에서 노마드로 이행해가는 신유목 시대의 미래사회 진단이며, 둘째는 우리 전통 서정시인 발라드풍을 부정한 신세대의 록핀을 사용한 록 스프리트, 즉 산문정신에서 나온 시풍에 관한 거대 담론이다.
전자는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삶의 내용과 질이 달라져 있음을 뜻하는 것이고, 후자는 전통 서정시의 가락인 발라드에서 록 음악으로 넘어와 있음을 뜻한다. 아직도 서정시는 존재하는가라고 묻는 물음과 함께 매달 쏟아져 나오는 문학지의 산문체 운용의 시, 즉 산문시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 신세대는 이제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는 옥타비오 파스(O.Paz)가 말한대로 현대시는 ‘노래의 체계에서 비평의 체계로 넘어와 있다.’ 라는 어쩔 수 없는 시적 운명을 고집하지만 신세대에게는 별 호소력이 없는 듯하다. 즉 ‘현대시는 그 본체가 운문이 아니라 산문이다.’라고 믿으며 음악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에 의한 새로운 시대의 메시지를 들고 나온다. 이 경우 음악성은 호흡에 불과하며 이미지에 의한 묘사만이 절대적이라 믿는다.
목발을 짚고
네가 온다
너는, 절룩거리는 식탐처럼
불편하게 뵈진 않지만
어딘가 불안하다
암에 걸려
위(胃)를 모두 잘라낸 사내는
식도만 남았다
목이 길어지고
얼굴은 점점 작아졌
-박후기, <왜가리>전문
위의 시에서 보듯이 그것이 묘사적 이미지든 서술적 이미지든 너무나 선명한 그림을 생산한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픈 사람이 없다’(이성복, <그날>)의 병든 사회의 진단이다. 단 경험 시학에서 본다면 묘사로 되어있어 개체험이 없고, 개체험에 따른 구원의식이 떠오르지 않는 점에 현대시의 한 특징을 드러낸다. 너무나도 잘 씌어진 작품임에도 서정의 원리인 자기 동일성(identification) 회복이 아쉬움으로 남는다는 뜻이다. 이는 현대시 전반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물음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는 ‘서정의 육화’라고 할 것이다. 육화(肉化)란 곧 경험의 세계를 뜻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부터 그들은
바람을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바람은 형상을 거부하므로 우상이 아니다
떠도는 피의 이름, 유목
그 이름에는 바람을 찢고 날아야 하는
새의 고단한 깃털 하나가 흩날리고 있을 것 같다.
유목민이 되지 못한 그는
작은 침대를 초원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건기의 초원에 바람만이 자라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생은 건기를 맞아 바람 맞는 일이
혹은 바람을 동경하는 일이, 일이 될 참이었다
피가 흐른다는 것은
불구의 기억들이 몸 안의 길을 따라 떠돈다는 것
이미 유목의 피는 멈출 수 없다는 끝을 가진다
오늘 밤도 베개를 베지 않고 잠이 든 그
유목민들은 멀리서의 말발굽 소리를 듣기 위해
잠을 잘 때도 땅에 귀를 댄 채로 잠이 든다지
생각난 듯 바람의 목소리만 길게 울린다지
말발굽 소리는 길 위에 잠시 머무는 집마저
허물고 말겠다는 불편한 소식을 싣고 온다지
그러나 침대 위의 영혼에게 종종 닿는 소식이란
불편이 끝내 불구의 기억이 되었다는
몹쓸 예감의 확인일 때가 많았다
밤,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經典)은
바람의 낮은 목소리만이 읊을 수 있었다
동경하는 것을 닮아갈 때
피는 그 쪽으로 흐르고 그 쪽으로 떠돈다
지명(地名)을 잊는다, 한 점 바람
-이은규,<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經典)> 전문
위의 시는 2008년도 동아일보 당선 작품인데 선명한 그림보다는 관념 위주로 씌어진 시다. 일상의 경험에서 끌어온 시가 아니라 미래를 예단하는 ‘유목의 피’를 생산한 시다. 바람처럼 빠른 시간과 공간의 이동은 종전에 우리가 맛본 정착사회의 정서가 아니라 낯선 시간 속의 여행을 뜻한다. 이는 노마드의 삶의 정체성이며 환상방황(環狀彷徨)을 꿈꾸는 삶이다. 따라서 ‘정주민의 역사는 종이에 기록되지만 유목의 삶은 바람에 흩어진다.’는 그 노마드의 삶을 이 시는 경험이 아니라 관념으로 보여주고 있다.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은 어쩔 수 없이 익힌 것 대신 날 것을 씹어야 한다. 이는 야생의 울부짖음이며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이다. “유목민이 되지 못한 그는/작은 침대를 초원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에서의 그 환상방황은 새로운 경험의 세계로의 여행이며, 이에 반해 정주민의 관습은 이미 낡은 것이다. 인도여행, 실크로드, 몽골리안 루트와 같은 여행시는 이미 노마드의 체험이 없는 맥빠진 시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래서 묻는다. 당신의 붓에 묻은 피는 언제의 것인가? 결국 시쓰기는 시를 배반하고 위반하며 폭로하는 행위이다. 형식의 새로움도 내용의 새로움도 시상의 새로움도 없는 전통 서정시인들은 이제 머뭇거리며 더 나아가지 못한다. 그 얘기가 그 얘기라는 것이다. 이 시 속의 화자는 곡두와 같은 존재다. 곡두는 ‘이곳’이 아닌 ‘저곳’을 바라보고 꿈꾸는 사람이란 뜻의 우리말이다. 이 환영은 결국 자기 자신으로 귀착한다.
낯선 여행지에서 어깨에 표범 문신을 한 소년을 따라가 하루 종일 뒹굴고 싶어 가장 추운 나라에서 가장 뜨거운 섹스를 나누다 프러시아의 스켄헤드에게 끌려가 두들겨 맞아도 좋겠어 우리는 무엇이든 공모하기를 좋아했고 서로의 방에 들어가 마음껏 놀았어 무례함을 즐기며 인스턴트 커피와 기타의 선율 어떻게 하면 인생을 망칠 수 있을까 골모하며 야생의 경전을 돌려 보았지 그러나 지금은 이산의 계절 우리는 춥고 쉬 지치며 더, 더, 더, 젊음을 질투하지 하지만 네가 잠든 사이 나는 허물을 벗고 스모키 화장을 지우고 발톱을 세워 가터 벨트를 푼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하이힐을 벗어던지고 사로잡힌 자의 눈빛으로 검은 표범의 거처에 스며들 거야 단단한 근육을 덮은 윤기 흐르는 검은 벨벳 흑단의 전율이 폭발할 때까지 이제 동굴보다 깊은 잠을 자야지 도마뱀자리 운명, 진짜 내 목소리를 들려줄까?
-문혜진, <검은 표범 여인>전문
위의 시를 보면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經典)>에서 보다 형식이나 내용면에서 훨씬 진일보한 구체적 체험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편 모두 야생의 경전을 담고 있지만 형식면에서 보면 후자는 록 사운드의 음률인 ‘~싶어’ ‘~됐어’ ‘~놀았어’ ‘~보았지’ ‘~푼다’ ‘~스며들 거야’ ‘~자야지’ ‘~돌려줄까?’ 그리고 ‘더, 더, 더’의 종지 호흡법으로 음악을 만들고 있다. 또 내용(사상)에서도 야생의 날것, 즉 야생의 울부짖음이 ‘검음 표범 ’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유목시대가 아닌 지난 시대의 삶과 체험을 옹호하는 어쩔 수 없는 전통어법의 시인이다. 정서반응의 언어가 아닌 이야기체의 긴 산문시는 읽지 않는 버릇까지 있다. 심원한 겨레말, 즉 그늘을 흔드는 감동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신봉하는 최상의 덕목은 언어, 정신, 리듬의 3합론이다. 이는 우리 시가 내장한 미적 고유성이며 고전화에 이르는 완결성의 성취도라고 보기 때문이다,
한 편의 완결된 시라 할지라도 시적 경지가 없고 발터 벤야만이 주장한 ‘아우라’가 없을 때 나는 그 시를 믿을 수 없다. 또한 전통정서를 벗어나 새로운 유목의 피를 생산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종이에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바람에 흩어지는 시가 될 공산이 크다. 더구나 IT(정보기술), BT(생명기술), NT(나노기술)로의 과학 발전에 힘입어 우리 삶의 질과 내용이 새로워진다 할지라도 ‘클릭하므로 존재한다’는 그 말에는 쉽게 공감할 수 없다. 세계화란 이름을 빌려 국경도, 민족의 개념도 무너지고, 장르파괴, 내용파괴, 형식파괴라는 혼성모방 시대에 저출산, 저인구, 노령화, 극빈, 실업, 인간성 상실 등 우리 삶의 정서와 총체적 정체성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다음의 시는 그것을 여실히 증명해 보인다.
문득문득 나는 사라진다. 나는 저편의 나와 자주 교환된다. 왕래 한다. 스민다. 녹는다. 내 생각이 허공에서 딱딱한 덩어리로 뭉쳐지거나 크림 스프처럼 주루룩 흘러내릴 때 있다. 나는 소리없이 내 몸 거두어 휘발할 때 있다. 사나운 바람 이랴! 이랴! 채찍질 하며 거울 속 사막을 혼자 마구 치달릴 때 있다. 균열된 공중 틈새로 내 사유의 발바닥이 늪처럼 빠질 때 있다. 꿈의 벼랑 끝에 추락 할 때 현실의 그물망에 걸려 내 날개 찢겨질 때 있다. 길을 둘둘 감고 있는 늙은 바오밥나무야, 내가 너를 여러 번 경험했다는 생각이 들 때 있다. 천천히 공중 선회하는 구름 독수리야, 내가 너로 살았고 입었고 벗었다는 생각이 들 때 있다. 사상거처도 없이, 밤과 낮에의 무슨 연고도 없이, 무연히 정박할 때 있다. 내가 수천 아바타로 번쩍번쩍 몸 바꿔 환생할 때 있다.
-신지혜, <나의 아바타>(현대시학, 2006. 3월호)전문
위의 시는 ‘클릭하므로 존재한다(이원)’는 IT 상상력으로 써진 백미편의 시다. 아바타란 사이버 공간에서 사이버 머니를 산 다음 자기 동일시 현상으로 인형에 옷을 입히거나 머리 쪽 짓기 등의 인형 놀이를 말한다. 이는 곧 자기 분신으로 고독을 응시하며 자기 정체성(self-identity)을 회복하기 위한 게임으로서 인간성 회복이 이 시대에 얼마나 고독한 것인가를 묻고 질문한다. 그러므로 위의 시는 현대시 쓰기에서‘대답하지 말고 질문하라.’는 명제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1930년대의 모더니즘 시단에서 그 예를 찾아보면 정지용과 이상을 비교해볼 수 있다. 정지용은 모더니스트로 출발하지만 <카페 프란스>가 아닌 1927년에 발표된 <향수>와 개체험을 삶과 죽음으로 뒤집는 시 <유리창>, 또는 국토 생체험을 쓴 <백록담>등 전통 서정시로 살아남는다. 이에 반해 이상은 ‘이상은 이상이고, 이상은 이상이 아니다.’라고 하던 그의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고전으로 정선될 만한 시가 없고 가락으로 세울 만한 애송시도 없다. 다시 말하면 한 시대의 흐름에서 문제시인으로 기억되지만 고전에 닿을 수 있는 시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한국 현대시 백년사(史)(1900~2000년)를 정리해서 발간한 「문학과 지성사」의 『한국문학선집』을 보면 관념이나 이미지로 시를 썼던 시인들 대신 서정성이 뛰어났던 신석정, 박성룡의 시가 다시 올라와 있음을 본다. 다른 문학 선집들에선 곧잘 빠졌던 시인들이다. 또 박용철, 구상도 빠져있다. 이 선집은 대학 강단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저작에 든다. 통일한국 100년을 내다보며 가장 신뢰할 만한 북한 시인 70명의 대표시 150편까지를 추스르고 있다. 걸핏하면 100인 시선이니 50인 시선이니 하고 장난을 치는 저급한 출판사와는 질적으로 다름을 증거할 수 있다. 이는 은연중에 작용한 본질적인 서정의 힘이라 여겨진다. 서정이 육화되지 않고는 어떤 장난을 해도 시인으로서는 살아남기가 힘든 것이 아닐까?
서정의 육화란 생체험과 주술성을 말한다. 생체험(개체험)이란 삶과 죽음을 뒤집어놓는 지각 변동을 일으키는 자기존재 학인이며 주술성은 언어의 신성한 가락을 낳는다. 이것이 3합론이며 3합론이 시적 아우라를 형성하는 것이다. 최상의 시는 새로운 삶의 내용이 되는 정신을 그 주술성에 실어내는 언어예술이다. 전통 서정시가 지금도 있느냐고 묻고 다닌 얼빠진 시인도 있지만 발라드로 가든, 새로운 서정의 록핀으로 가든 이 요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무릇 시란 겨레의 면면한 정조와 숨결 그리고 가락을 흔들어야 할 것이다. 가락은 이미지로 남는 시가 아니라 민족정서와 역동적인 힘으로 남는다. 이것이 시에서 말하는 음악이며 생취요 촉기다. 대개 ‘좋은 시(詩)’는 혀를 감추고 그 혀를 독자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아니, 어떻게 말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휘늘어진 가락으로 말한다. 이 가락 속에 아픔이 실리고 삶의 극기와 고통이 함축된 은유체계가 형성된다. 이것이 명시로 남고 고전으로 남는 작품이 되는 것이다. 언어영역에서 출제되는 시들은 대개는 이런 쉬운 시들이다. 쉬운 것을 어렵게 쓰기는 쉽지만 어려운 것을 쉽게 쓰기는 더 어렵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기도 하다. 한 편의 시가 철학개론서와 같거나 또는 무식한 대중을 상대로 한 1차정서(이미지가 아닌 감정)로 설탕을 먹이는 관습적인 언어의 발림은 딴따라 근성이 들어나 혐오스럽다.
3. 새로운 시대의 시쓰기로서 노마드(nomad)의 텍스트 작품들
⓵ 다문화 가정
라오, 말라깽이 싸리비 종아리의 시어머니가 욕을 해댔다 너같이 재수 없는 년은 처음이야 자꾸 울면 쫓아내서 겨울에 혼자 아기 낳게 할 거야 마을회관에서 누구라도 라오에게 고향에 다녀오라고 바람 넣는 년은 내가 대가리를 뽀사놓겠어 늙은 마마보이 곰보 신랑과 깡마른 몸에 바가지 엎어놓은 듯 배만 볼록한 열아홉 꽃다운 라오, 구절초 구구절절 무리지어 피어나도 샐비어 샐쭉하게 단내를 풍겨도 라오는 구름에게 혼잣말을 하며 운다 메콩 강 불어 마을을 삼켜도 재스민은 흐드러지게 피어나네
베니스에서 죽다, 왜 그 영화가 생각났지? 일리나, 우크라이나에서 온 여자 언제나 피곤에 쩔어 짜증스런 표정으로 혼자 저녁을 먹고 비좁은 잠을 자던 여인, 10시가 되어야 어둠이 내리는 황홀한 물의 도시 바다에서 피어오르는 오렌지 빛 안개 골목에는 취한 사람들의 웃음소리, 늦은 밤 미로의 골목을 무작정 걸었다 그 길 끝에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던 한 여인 누가 다가가도 모른 채 허공에 연기를 뿜어대며 낮에는 가정부 밤에는 민박집 허드렛일로 장기 투숙하는 베니스의 일리나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거나 이름을 물어오지 않았다
림성혜. 간호사인 아기 엄마가 결벽증이라 쓸고 닦고 아기 보느라 뼛골이 다 시리다 점심도 거르기 다반사, 볼일 보는데 아기가 깩깩 빽빽 우는 바람에 아기를 안고 다시 변기에 앉는다 새벽 비행기에서 웅크린 채 자다가 깨어 부유하는 몸이 내 몸이 아닌 듯 두렵고 가벼워져 창을 깨고 가만히 새가 되고 싶은 적이 있었던가 림성혜는 세탁기 문을 열고 아기를 넣은 채 변기 물을 내린다 무엇에 홀린 듯 아무 이유 없이, 몸이 아파 일찍 귀가한 아기 엄마가 기겁해 경찰을 불렀다 당장 손이 모자라 아기를 놓칠까 봐 가장 안전해 보이는 곳이 세탁기였다고 설명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겠지 ‘조선족 베이비시터 아기를 세탁기에 넣고 유기하다’ 영아 살인미수범으로 9시 뉴스에 출연한 유명인사 림성혜.
-문혜진, <이방인 여자(女子)-라오, 일리나, 림성혜> 전문
(≪검은 표범 여인≫, 2007년 김수영 문학상 시집에서)
⓶ 광기(狂氣)의 언어
이 비가 내리길 정확하게 11개월을 기다렸다.
훨씬 전에 권총은 녹슬었고 장미는 시들었다.
액슬은 녹슬, 슬래쉬는 시들, 밴드는 권총과 장미.
나는 전쟁과 평화를 말했고 남들은 남녀의 성기를 말했다.
나는 남북전쟁을 말했고 남들은 시가전을 말했다.
나는 인내를 말했고 남들은 환자를 말했다.
객석으로 술병을 던지던 지구상에서 가장 난폭한 밴드.
나는 정당방위라고 말했고 남들은 폭행이라고 말했다.
나는 미치고 싶었고 남들은 정신차리라고 말했다.
나는 안다. 권총과 장미가 사막을 건넜다는 것을.
희망을 절망적으로, 절망도 절망적으로.
나는 11개월 동안 미친 듯이 정신차렸다.
흰국화행려술병여관젖은휴지갈라진철길죽은가수끊어진기타짧은손가락말더듬이
내 맞은편에 두었던 모든 것들.
건방지게도 잠시 열망을 품었었노라. 이에 깊이 사과한다.
그래, 11월의 신부와 관 속에 들어가련다.
11개월 동안 죽자고 나는 애드립만 쳤다. 죽자고 나는 기우제만 지냈다.
11개월 동안 한 번도 11월의 비는 내리지 않았다.
11개월 동안 나는 정신차린 듯 미쳤다.
젠장, 뮤직비디오와 라이브클럽은 항상 혼동된다.
이제 녹슬고 시든, 죽은 그들의 라이브클럽을 나는 본다.
내가 미치고 싶은 것도 당연하다. 정신차리고 싶은 것도 당연하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죽은 액슬과 슬래쉬가 살아 있는 연주를 한다.
녹슬고 시들고 죽고 살고, 이 문장은 이상하다. 처음부터 이상했다.
괜찮다. 나는 취했으니까. 항상 애매모호했으니까.
이 비가 11개월 동안 내리길 바랐다.
이 비가 내리길 11개월 동안 바랐다.
빌어먹을, 그때 왜 관 속에 들어가지 못했을까?
신부가 없어서가 아니다. 나도 모른다.
나는 지금 전쟁과 평화의 죽은 삶을 본다.
러닝 타임이 15분만 됐어도 나는 벌써 죽었을 거다.
시도 아닌 이런 거 쓰지 않았을 거다.
이건 정당방위일까 폭행일까?
나는 인내라고 말하고 남들은 환자라고 말한다.
그들은 사막을 건너갔다. 각주를 달면 알까?
오늘 내가 얼마나 흔들렸는지. 얼마나 천박했는지.
왜 내게선 항상 비린내가 나는지.
남들은 정상적으로 살라고 내게 말했다.
권총과 장미는 노래한다. 어둠은 신경 쓰지 말라고.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영원한 것은 없다고. 11월의 비조차도.
그래서 미치겠다.
* 이 시는 록밴드 Guns and Roses의 곡명과 뮤직비디오를 사용했음.
-박장호, <11월의 비> 전문
⓷ 환상방황(環狀紡徨)
최신 분류법에 따르면, 쿠르드족은
새의 한 종(種)에 속한다.
그것이 바로 역사의 누레지고 찢겨진 페이지 위에서
그들이 카라반으로 존재하는 유목민인 이유이다.
그렇다, 쿠르드족은 새이다!
고통을 다스릴 피난처가 남아 있지 않을 때에도
그들은 이동의 환상에서 위안을 찾는다-
고향땅의 따뜻한 고장과
추운 고장 사이를 오가는 이동 말이다.
쿠르드족이 날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다.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다니면서도,
여전히 정착해 문명을 이루려는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둥지를 발견하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땅에 내려서도
머블라나를 방문해 그의 안부를 묻지 않으며,
날리처럼 부드러운 바람 속 먼지를 위해
자신을 바치지도 않고 있으니까.
-카잘 아마드, <새> 전문
(이라크 령, 쿠르디스탄의 여류시인이 쿠르드어로 쓴 시)
4. 결론을 대신해서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의 승리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마비시키고, 꿈의 공간을 텅 비워버린 듯하다. 어떻게 오래도록 가장 뛰어난 자, 가장 새로운 자, 가장 부유한 자가 될 것인가? 이런 물음에 시달리며 우리는 바야흐로 무한 경쟁의 덫에 걸려 있다. 우리가 다시 우리 운명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유토피아들을 창안해야 한다. 자크 아탈 리가 새로운 저서 ≪합리적인 미치광이≫를 통해 우리에게 제안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자크 아탈리는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유토피아를 제안한다. 그가 묘사하는 유토피아에는 아마르티아 센이 말한 ‘합리적인 미치광이’ (그 미치광이는 우선 자유주의의 합리적인 주체라는 의미에서 합리적이다. 그는 자기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의 광기는 타인의 행복을 증대시킴으로써 자기 자신의 행복을 증대시킨다는 데에 있다)들이 산다. 이 유토피아의 성패는 우리가 타인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크 아탈리의 큰 미덕은 우리에게 유토피아의 의무를 상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사람들이 역사의 완성을 생각하는 때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이기주의가 횡행하는 때에 새로운 유토피아가 출현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다. 이 책은 단지 우리의 상상력에 다시 활기를 주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현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읽어야 한다.
-<합리적인 미치광이>(≪르몽드≫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