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오늘은 조용한 서재에 앉아 오랜만에 카메라 장비를 정리하다가 오래 전 아버지께서 남기고 가신 구형 필름 카메라를 꺼내 들었습니다. 요즘은 DSLR 카메라에 가죽 케이스가 씌워져 나오지 않지만, 검은색 가죽 케이스 뒷면에 붙어있는 똑딱이 단추를 가볍게 뜯어 올리면 은빛 헤드에 검은색 몸체가 드러나는 미놀타 X-300 SLR입니다.
카메라 중앙에 달려있는 50mm f.1.4 수동식 표준렌즈는 포켓용 소형 카메라들에 비해 중후한 SLR의 품위를 더 해줍니다. 디지털 카메라가 세상을 지배하는 지금은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 하는 구형 필름 카메라가 되어 장롱 속의 계륵으로 대접받지만, 아버지의 손때가 여전히 배어있는 이 카메라는 제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버릴 수 없는 아버지의 소중한 유산입니다. 다른 카메라는 깨끗이 닦을 수 있어도 아버지의 손때가 남아있는 카메라는 결코 닦을 수 없습니다. 다른 카메라는 다 잃더라도 아버지의 카메라는 그럴 수 없습니다.
지금 제 앞에는 안경수건에 클리너를 묻혀 깨끗이 닦아둔 고성능 렌즈와 사진장비들이 저마다의 위엄과 몸값을 뽐내며 가지런히 누워 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시던 수동카메라 시절에는 상상하지 못 했던 최첨단 디지털 장비들입니다. 유난히 사진을 좋아하셨던 아버지께서 지금 살아계셨다면 이런 장비를 들고 경관 좋은 곳으로 여행도 다니시며 얼마나 즐거운 취미생활을 누리셨을까요?
문득 평안북도 벽동이 고향인 할머니께서 아버지 생전에 제게 들려주시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아, 나 아바지 니북에 있을 때 카메라 사달라고 밤낮 조르니까 니 할아버지래 냉큼 사주지 않았가서? 그걸 들고 사진을 찍는다고 들이고 산이고 돌아다니면서 자꾸 뭘 찍어 갖구 밤낮 캄캄한 암실에 들어앉아서... 말도 말라우. 아, 밥이 다 뭐이가? 내래 뒷산이고 암실이고 니 아바지 밥 먹으라고 맨날 찾으러 댕겼디.”
일제 시대였지만, 할아버지께서 외아들을 위해 지금의 승용차 한 대 값과 맞먹는다는 독일제 라이카(Leica) 카메라를 사주실 정도였으면 살림이 넉넉하셨나 봅니다. 해방이 되고 북한에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면서 개인 토지의 국유화 작업이 시작되기 전 가산을 정리해 남쪽으로 내려와 시작한 수산사업 실패로 그 좋아하셨던 취미사진이 생업을 위한 직업이 되셨지만 말입니다.
저는 한국전쟁 후 군부대 문관생활을 마치고 사진관을 운영하시던 아버지로 인해 어렸을 때부터 여러 종류의 카메라를 가깝게 두고 살았습니다. 지금은 고전이 된 브랜드 야시카(Yashica)에서부터 올림푸스나 캐논, 니콘이나 미놀타, 세계 최초로 팬타프리즘을 개발해 일안반사식(SLR) 카메라시대를 열었던 아사히 팬탁스도 제게는 친숙한 카메라 상표들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카메라나 사진에 대해 여쭤보면 자상하게 대답을 해주셨던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부전자전이라는 말처럼, 아들도 사진을 좋아하다 당신처럼 가난한 사진사가 되기를 원치 않으셨던 때문이겠지요? 사진기술보다는 공부를 열심히 해 아버지처럼 고생스럽게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이 되기를 바라지 않으셨던 이유였음을 잘 압니다.
그런 아버지께서는 이따금 일제 카메라 상품이 소개된 카탈로그 책자를 무릎에 펼쳐 놓고 신형 카메라 광고사진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넉넉하지 못한 현실과는 달리 마음속으로는 그런 럭셔리한 카메라를 얼마나 가지고 싶으셨을까요? 저는 아버지께서 펼쳐놓고 보시던 그 카메라 카탈로그를 지금도 가지고 있어 이따금 책장에 꽂혀있는 책자를 펼쳐 보면서, 신상품에 유혹받으셨던 아버지의 마음을 상상해 보면 늘 지금처럼 마음이 아파옵니다. 아버지께서 지금 살아 계신다면 제가 그런 아버지를 위해 어떤 카메라인들 못 사드리겠습니까?
지금 제 책상 앞에 편안하게 누워있는 교환식 카메라 렌즈들을 바라보며 저는 가슴 아픈 회상에 젖습니다. 어촌마을 사진관 수입만으로는 넉넉하지 못하셨던 아버지는 자식들의 학비가 필요할 때마다 당신이 아끼던 렌즈를 하나씩 팔아 부족한 부분을 보태곤 하셨지요. 아버지는 살림여유가 있어 여러 대의 카메라를 가지고 계셨던 것이 아닌, 대여를 위한 것이었음도 저는 머리가 큰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어촌마을의 사진관에 말쑥한 차림의 낯선 관광객 부부가 카메라를 빌리러 왔던 일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런지 며칠 후 일간지에는 남파부부간첩이 검거되었다는 기사와 함께 그들의 사진이 실렸고, 그 부부가 남파간첩인줄 사전에 알았으면 신고해 받은 포상금으로 낡은 카메라 장비 몇 대를 새 걸로 바꿀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되었다며 웃으시던 아버지의 표정도 떠오릅니다.
지금 저는 아버지와는 달리 자식들의 학비나 긴급한 생활비를 위해 카메라 장비를 내다 팔아야 하는 절박한 형편은 아닙니다. 오히려 용돈을 절약해 마음에 드는 렌즈를 하나 더 구입하려 마음을 쓰는 편이니까요. 하지만 아버지처럼 몇 푼의 현금을 더 만들기 위해 아끼던 렌즈를 중고시장에 내놓아야 하는 어려운 형편이었다면 그런 제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착잡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마음의 아픔을 떠나 몹시 절박한 심경일 것입니다.
제가 어렸던 그 때는 너나할 것 없이 모두가 비슷한 살림형편이었기에 가난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생각해보면 저와 형제들은 자식을 위한 아버지의 지속적인 절박함을 먹으며 자랐음을 압니다. 어쩌다 수재비나 칼국수로 끼니를 해결하긴 했지만, 크게 배가 부를 만큼은 아니었을지언정 그런 아버지 덕에 끼니를 굶어본 기억은 한 번도 없으니까요. 때문에 아버지는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가장으로써의 책임과 의무를 다 하신 훌륭한 분이었음을 다시금 상기합니다.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도 포기한 채 바다로 나가야만 했던, 그래서 태풍과 싸우다 때로는 그 바다에서 생을 마쳐야만 했던 동창들의 슬픈 얼굴들도 떠오릅니다. 우리 집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지도, 농사를 짓지도 않았지만 형편은 그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술을 많이 못 하시는 아버지께서 어쩌다 친구 분들과의 자리에서 약주를 한 잔 하고 집에 돌아오시는 날이면 자식들을 모두 불러 안방에 둥그렇게 앉혀놓고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똑같이 나누어 주셨습니다. 어쩌다 한 번씩 있는 그런 날이면 형제들은 각자의 손에 지폐를 들고 아버지가 매일 술에 취해 들어오시면 좋겠다고 깔깔대며 즐거워했으니까요.
저는 지금도 가족들이 둘러앉은 식탁에 차려진 밥을 먹다가 가끔 회상에 젖을 때가 있습니다. 중학생 시절, 친구네 집에 공부를 핑계로 놀러갔을 때 그 밥상 위 빈곤한 스텐 그릇에 식구들의 숫자대로 뎅그러니 올라있던 풀죽. 예전에 제가 번듯한 집을 새로 지었을 때 도배를 하러 온 일꾼들이 도배지에 풀칠을 하기 위해 밤색 대야에 풀어놓던 그 걸쭉한 풀죽보다 더 희멀건 풀죽이 올려진 밥상 가운데 뎅그러니 놓여있던 간장그릇 하나가 친구네 식구들의 한 끼 저녁식사의 전부였던 그 기억이 가끔 떠오릅니다.
대장간 집 식칼이 무딘 법이라고 했던가요? 남의 집 칼을 갈아주다보니 제 집 식칼을 돌볼 여유가 없었듯, 사진관을 하시던 아버지는 정작 당신 자식들의 사진을 찍어주신 적이 별로 없었기에 지금도 아버지께서 찍어주신 형제들의 사진은 몇 장 되지 않습니다. 지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담이 되는 필름과 인화지 값이면 당장 돈이 되지 않는 자식들의 사진보다는 돈이 되는 손님들 사진재료 구입에 쓰는 게 더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음을 저는 잘 이해합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저는 사진으로 돈을 벌어본 적도 별로 없으면서 직업사진가였던 아버지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비싼 카메라와 장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아버지가 옆에 계시면 그런 고급 장비를 가지고 사진을 겨우 그 정도밖에 찍지 못 하느냐고 꾸중을 하실 듯합니다. 하지만 지금 아버지 옆에서 그런 꾸중을 들을 수 있다면 제가 얼마나 기쁘고 감사할까요?
형제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아버지의 기호인자를 물려받아 한 때는 제임스 낙트웨이(James Nachtwey)같은 전쟁사진작가가 되고 싶었던 꿈은 당면한 경제활동의 제약으로 포기해야 했지만, 지금도 카메라 뷰 파인더를 통해 바라보는 사람들과 세상의 모습은 언제나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습니다.
시간이 지나 사진관도 정리하시고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시다 비로소 직업이 아닌 당신의 취미만을 위해 장만하셨던 SLR 카메라. 오랜만에 어린 손녀가 할아버지를 찾아오는 날에는 당신의 무릎에 앉혀 머리를 곱게 빗겨 묶으시고는 아기 고사리 같이 희고 고운 손녀의 손을 잡고 함께 걸으며 화사하게 만개한 봄꽃 옆에 세워놓고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행복해 하시던 아버지.
아버지께서 그때 찍어주신 손녀 사진을 앨범에서 꺼내 조용히 바라보고 있자니 노년 최고의 선물이라는 손주들의 재롱도 다 못 보고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가 애석하고 그리워 이렇게 눈물이 납니다.
아버지. 오늘은 그런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카메라를 품에 안고 오랜만에 가슴이 후련해지도록 실컷 울었습니다.
아버지의 손때가 남아있는 미놀타 X-300 필름 SLR(Single Lens Reflex / 일안 반사식) 카메라. 지금도 가끔 저 카메라를 꺼내 만져보는 날이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카메라에 눈물을 떨구곤 한다.
아버지 최진흥 요셉 (1927-1991)
15년 전인가, 어렸을 때 살던 강원도 고성군 화진포 근처 고향을 찾았다가 찍어 본 허름한 시골동네 사진관. 내 아버지의 사진관도 저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 오래된 사진관 앞에 걸려있는 코닥칼라나 후지필름 같은 컬러판 사진은 70년대 초반 높은 가격으로 인해 함부로 찍어볼 생각도 하지 못 했던 흑백사진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