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1737년-1805년) 호는 연암 자는 중미이다 그의 글과 함께 한양대 정민교수의 풀이도 싣는다.
.....2007,5월에 ??에서 펌
박지원 그는 우리나라 기행문학의 백미라 할 “열하일기”를 쓴 분이다. 그가 태어나고 활동한 시기는 조선의 르네상스인 영.정조 시대이다.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태어나서 이 시대를 놀다가며 꽃을 피웠다. 그림에 있어서는 단원이요. 글씨에 있어서는 추사요 사상에 있어서는 다산이요, 문학에 있어서는 바로 요분이 아닌가 한다. 다이버라면 하나 더 알아도 좋다.
해양생물학에 있어서는 다산의 형님인 손암 정약전 선생이다.
아래 글 서두의 “유인”은 “현*비유인반남박씨신위” 의 “유인”이다. 유인은 벼슬하지 않은 사람의 아내에게 부치는 명부의 존칭이다. 벼슬을 하지 않은 남자는 “학생” 이나 “처사”를 쓴다. 행여나 하는 마음에 해석을 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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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을 보내며
유인(孺人)의 이름은 아무이니, 반남 박씨이다. 그 동생 지원(趾源) 중미(仲美)는 묘지명을 쓴다. 유인은 열 여섯에 덕수(德水) 이택모(李宅模) 백규(伯揆)에게 시집가서 딸 하나 아들 둘이 있었는데, 신묘년 9월 1일에 세상을 뜨니 얻은 해가 마흔 셋이었다. 지아비의 선산이 아곡(鵝谷)인지라, 장차 서향의 언덕에 장사 지내려 한다.
백규가 그 어진 아내를 잃고 나서 가난하여 살 길이 막막하여, 어린 것들과 계집종 하나, 솥과 그릇, 옷상자와 짐궤짝을 이끌고 강물에 띄워 산골로 들어가려고 상여와 더불어 함께 떠나가니, 내가 새벽에 두포(斗浦)의 배 가운데서 이를 전송하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아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 화장하던 것이 어제 일만 같구나. 나는 그때 막 여덟살이었다. 장난치며 누워 발을 동동구르며 새 신랑의 말투를 흉내내어 말을 더듬거리며 점잖을 빼니, 누님은 그만 부끄러워 빗을 떨구어 내 이마를 맞추었다. 나는 성나 울면서 먹으로 분에 뒤섞고, 침으로 거울을 더럽혔다. 그러자 누님은 옥오리 금벌 따위의 패물을 꺼내 내게 뇌물로 주면서 울음을 그치게 했었다. 지금에 스물 여덟 해 전의 일이다.
말을 세워 강 위를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은 바람에 펄럭거리고 돛대 그림자는 물 위에 꿈틀거렸다. 언덕에 이르러 나무를 돌아가더니 가리워져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강 위 먼 산은 검푸른 것이 마치 누님의 쪽진 머리 같고, 강물 빛은 누님의 화장 거울 같고, 새벽 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그래서 울면서 빗을 떨구던 일을 생각하였다. 유독 어릴 적 일은 또렷하고 또 즐거운 기억이 많은데, 세월은 길어 그 사이에는 언제나 이별의 근심을 괴로워 하고 가난과 곤궁을 근심하였으니, 덧 없기 마치 꿈 속과도 같구나. 형제로 지낸 날들은 또 어찌 이다지 짧았더란 말인가.
떠나는 이 정녕코 뒷 기약을 남기지만----去者丁寧留後期(거자정녕류후기)
오히려 보내는 사람 눈물로 옷깃 적시게 하네.----猶令送者淚沾衣(유령송자누점의)
조각배 이제 가면 언제나 돌아올꼬----扁舟從此何時返(편주종차하시반)
보내는 이 하릴 없이 언덕 위로 돌아가네.----送者徒然岸上歸(송자도연안상귀)
죽은 누님을 그리며 지은 묘지명이다. 번역만으로는 원문의 곡진한 느낌을 십분 전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애잔하고 가슴 뭉클한 한편의 명문이다. 연암과 죽은 누님과는 여덟살의 터울이 있었다. 어려서 그는 누님에게 업혀 자랐을 터이다. 열 여섯에 시집간 누이가 마흔 셋의 젊은 나이에 고생만 하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떴다. 아내를 잃자 살 도리가 막막해졌다고 했으니, 그나마 그간의 생계도 누님이 삯바느질 등으로 꾸려왔음이 분명하다. 자형 백규는 선산 아래 땅뙈기라도 붙이고 살아볼 요량으로 상여가 나가는 길에 아예 이삿짐을 꾸려 길을 떠나고 있다. 그런데 그 세간이라는 것이 겨우 솥 하나, 그릇 몇 개, 옷 상자와 짐 궤짝 두어 개가 전부라니, 그 궁상이야 꼭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데도 연암은 그 비통함을 말하는 대신, 전혀 엉뚱하게도 누님이 시집 가던 날 새벽에 자신과의 사이에 있었던 절로 미소를 자아내는 한 에피소드를 떠올리고 있다. 신부 화장을 하고 있던 누님 곁에서, 허공에 대고 발을 동동거리며 새신랑 흉내로 누이를 놀리던 여덟살 짜리 철 없던 동생. 누이는 부끄러움을 못 이겨 "아이! 몰라."하며 머리 빗던 빗을 던졌고, 그 빗에 이마를 맞은 동생은 "때렸어!"하며 악을 쓰고 울었다. 그래도 누이는 "흥!"하며 야단하는 대신, 패물 노리개를 꺼내 주며 동생을 달래었다. 아! 착하고 유순하기만 한 누이여.
이제 누님의 상여를 실은 배가 떠나가고 있다. 자형, 그리고 조카 아이들과 하직의 인사를 나누고, 배는 새벽 강물 위로 미끄러져 간다. 바람에 펄럭거리는 붉은 명정, 돛대의 그림자를 흔드는 푸른 물결, 그나마도 언덕을 돌아가서는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처남! 세월이 좋아지면 내 수이 돌아옴세"하며 떠나던 자형의 말이 귀끝에 맴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음을 알기에 그 허망한 기약은 외려 가슴 아프다. 이제 누님의 모습은 다시는 볼 수 없는가. 그러나 보라. 강물의 원경으로 빙 둘러선 새벽 산의 짙은 그림자는 마치 시집가던 날 누님의 쪽진 머리 같고, 배 떠난 뒤 잔잔해진 수면은 내가 침을 뱉어 더럽혔던 그 거울 같지 아니한가. 또 저 너머 초승달은 화장하던 누님의 눈썹만 같다. 그러고 보면 누님은 떠난 것이 아니라, 강물로 달빛으로 먼 산으로 되살아나 나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