熟能生巧(숙능생교)
熟:익을 숙, 能:능할 능, 生:날 생, 巧:공교할 교.
어의: 능숙함에서 기교도 나올 수 있다는 뜻으로, 뛰어난 기교도 오랜 기간의 수련을 통한 단련을 통해서만 이
루어진다는 말이다.
출전: 송사(宋史) 권284
진요자(陳堯者)는 자(字)를 가모(嘉謨)라 하며, 소유기(小由基)란 자호를 썼다. 송(宋)나라 때 사천 사람으로 시호는 강숙(康肅)이었다. 그는 자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활을 쏘는 솜씨가 남달라서 백 보 밖에서도 목표물을 겨냥하여 쏴도 백발백중(百發百中)이었다.
때문에 스스로 당대 최고의 궁수(弓手)로 자부하면서 남의 실력은 깔보며 지냈다.
어느 날 그가 집 앞 채소밭에서 활을 쏘고 있었다. 마침 문 앞을 지나던 기름장수가 기름통을 내려놓더니 그의 활 솜씨를 구경하는 것이었다. 한참동안 걸음을 멈추고 그의 활 솜씨를 살피던 그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진요자는 활 쏘는 것을 쳐다보는 기름장수의 꼴을 보더니 언짢은 표정으로 노인에게 물었다.
“당신도 활을 쏠 줄 아시오? 내 활 솜씨는 신기에 가깝소이다.”
그러자 노인이 가볍게 대꾸했다. “별거 아니지요, 단지 몸에 익었을 뿐인 것 아닙니까?”
이 대답을 들은 진요자는 그가 자기를 깔본다고 여겨 화가 치밀어 큰 소리로 말했다.
“감히 내 활 솜씨를 멸시하는 거요?”
“나는 내 자신이 기름 따르는 일을 통해 활 쏘는 이치를 알고 있소.”
그러더니 그는 호로병을 꺼내어 땅에 놓고 구멍이 뚫린 동전 한 닢을 병 입에 덮었다. 그리고 나무주걱에 기름을 가득 담아서 머리 위에서 동전 구멍으로 부어 넣었다. 그 솜씨가 얼마나 정확한지 동전에는 기름이 한 방울도 묻지 않았다. 다 붙더니 기름장수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것도 별거 아니랍니다. 단지 오랜 세월 동안 익숙해진 탓이지요.”
진요자는 그제서야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던가를 깨닫고 깊이 반성했다고 한다.
동도사략(東都史略) 권44에도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경화록(鏡花錄) 제31회에 보면 “구공은 말할 필요가 없다. 속어에서 말하기를 ‘숙달함에서 기교도 나온다’ 고 하였다.”(九公不必談了 俗語說的熟能生巧. 구공불필담료 속어설적숙능생교) 는 구절이 있고, 공궐(공궐)의 <新兒女英雄續傳.신아여영웅속전> 제4장에는 ‘배우지 못했다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잘 깨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 공부가 깊어지면 저절로 기교도 생길 것이니라.(不怛學不會只不肯鉆工夫到了自然熟能生巧.부달학불회지불긍첩공부도료자연숙능생교)
脣亡齒寒(순망치한)
脣:입술 순, 亡:망할 망, 齒:이 치, 寒:찰 한.
어의: 입술이 없어지면 이빨이 시리다. 하찮게 보이던 물건이 사실은 대단히 긴요한 것임을 강조할 때나, 상호
뗄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출전: 좌전 희공(僖公)5년 조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이웃에 괵(虢)과 우(虞)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어느 날 진나라에서는 이 두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먼저 괵나라를 공격하려 했지만, 괵나라를 치려면 반드시 우나라를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진나라는 묘안을 찾고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왜냐하면 우나라가 출병해서 길을 막거나 우나라와 괵나라가 연합해서 대항하면 진나라로서도 승산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진나라 대부 순식(荀息)은 진헌공에게 진나라의 국보인 명마와 주옥을 우나라 임금에게 선물로 주고 길을 열어 보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였다. 진헌공은 처음에는 국보를 주는 것에 반대했지만 그것이 한낱 계략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는 이를 허락했다.
뒤이어 순식이 진나라의 국보를 들고 우나라에 이르자 우나라 대부 궁지기(宮之奇)는 임금 우공에게 절대 길을 열어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말했다.
“괵나라와 우나라는 보거상의(輔車相依)로 순망치한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괵나라가 망하면 우나라도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거상의는 광대뼈(보(輔)와 이래턱뼈(거(車)가 서로 의지한다는 뜻인데, 한편으로 보(輔)는 수레의 덧방나무(비퀴살의 힘을 돕는 나무)를 말하고 거(車)는 수레바퀴를 뜻하여 서로 뗄 수 없는 깊은 관계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또한 순망치한은 입술이 없으면 이빨이 시리다는 뜻으로 순치상의(脣齒相依)라고도 한다.
모두 다 서로 의존하고 있는 양자간의 밀접한 관계를 비유한 말이다.
궁지기의 이 말은 당시 우나라와 괵나라의 의존관계를 더없이 분명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견이 짧고 재물에 눈이 먼 우나라 임금은 진나라의 계책에 말려들어 결국 선물을 받고 길을 내주었을 뿐 아니라 군대까지 동원해서 진나라를 도와 괵나라를 멸망시키고 말았다.
이에 궁지기는 우나라도 머지않아 망하리라 예견하고 일찌감치 가족들을 이끌고 조(曹)나라로 달아나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우나라의 도움으로 손쉽게 괵나라를 손에 넣은 진나라는 퇴군 도중 쉬어 간다는 명목으로 우나라에 한동안 머물더니 재빨리 손을 써서 우나라 마저 멸망시키고 말았다.
이에 우나라 임금도 졸지에 죄수의 몸이 되고, 순식이 선물로 갖다 준 명마와 주옥도 다시 진나라 수중에 돌아가게 되었다. 이때 순식은 <주옥은 여전하나 말은 이빨이 몇 개 더 났구나.(壁則猶是也 而馬齒加長.벽칙유시야 이마치가장)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마치점증(馬齒漸增)과 마치도증(馬齒徒增)이라는 성어가 나왔다.
전자는 옛사람들이 늙은 사람이 나이를 먹는 것을 비유하던 말이고, 후자는 아무런 성취도 없이 나이만 먹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그리고 앞에서 이야기한 사건에서 가도멸괵(假道滅虢)이라는 성어도 나왔는데, <길을 빌려 괵나라를 멸하다>라는 뜻으로 남을 발판으로 삼아 제3자를 멸망시킨 다음 다시 그 사람까지 멸망시키는 계략을 비유하는 데 쓰인다.
이 성어는 장자 거협(胠篋)편에서는 <때문에 입술을 들어 올리면 이가 시리다고 말한다.(故曰脣竭則齒寒.고왈진갈칙치한)는 표현으로 나오며, 전국책 한책(韓策)에도 <입술이 드러나면 그 이가 시리다.(脣擖者其齒寒.순갈자기치한)는 말이 있다.
(임종욱 엮음 고사성어 대사전에서)
脣齒輔車(순치보거)
脣:입술 순, 齒:이 치, 輔:도울 보, 車:수레 거.
어의: 순망치한과 보거상의의 성어가 합쳐져 만들어진 성어다.
출전: 좌전 희공(僖公) 5년 조
진헌공(晉獻公)은 제환공(齊桓公)의 뒤를 이어 진문공(晉文公)이 천하의 패자가 되는 길을 연 사람이다. 진헌공이 주변 약소국인 우(虞)와 괵(虢)을 멸망시켰을 때의 일이다. 헌공은 괵을 치기 위해 우나라 임금에게 길을 빌려 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 때 우에는 궁지기(宮之奇)라는 충직한 신하가 있었다.
"폐하, 저들에게 길을 양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욕심에 눈이 먼 진나라 임금은 분명 괵을 멸한 뒤에 우리를 칠 것입니다."
"그럴 리가 있나. 우리는 그동안 한 번도 저들의 눈밖에 난 일을 한 적이 없지 않은가?"
"그러면 괵은 언제 눈밖에 난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까? 괵과 우는 한 몸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괵이 망하면 우도 망할 것입니다. 속담에 입술이 없어지면 이빨이 시리다 (脣亡齒寒. 순망치한)는 날도 있고, 덧방나무와 수레바퀴는 서로 의지한다(輔車相依. 보거상의)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런 궁지기의 간곡한 충고에도 불구하고 우나라 임금은 결국 헌공에게 길을 열어 주고 말았다.
우가 곧 망할 것을 안 궁지기는 가족들과 함께 보따리를 싸 우를 떠나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괵을 멸망시킨 진헌공은 뒤이어 우를 쳐서 병탄(幷呑)하고 말았다.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어서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쪽도 해를 입는다는 관계를 일러 순치보거라 한다.
述而不作(술이부작)
述:지을 술, 而:말 이을 이, 不:아닐 부, 作:지을 작.
어의: 기술(記述)하기만 할 뿐 창작(創作)하지는 않는다. 선인(仙人)의 업적을 이어 이를 설명하고 저술할 뿐 새
로운 부분을 만들어 첨가하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출전: 논어 술이편(述而篇)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서술할 뿐 창작하지는 않으며 옛것을 믿고 좋아하는 자세를 가만히 노평과 비교하고 싶다.(子曰述而不作 信而好古竊比於我老彭.자왈술이부작 신이호고절비어아노팽)
공자는 누구보다도 상고주의(尙古主義)에 투철한 인물이었다. 그는 최고의 정치는 요순(堯舜)에 비교했으며, 덕 있는 군주로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꼽았고, 가장 완성된 인격은 주공(周公)이나 백이숙제(伯夷叔齊)를 들었다. 모두 공자 이전에 살았던 인물이다.
즉, 공자는 이들의 언행을 본받음으로 해서 가장 이상적인 사회가 건설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해서 옛것을 충실히 익힘으로써 새로운 것도 알 수 있다는 역사관을 내세웠던 것이다. 그런 일례를 보여 주는 예증을 우리는 이 성어에서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