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갈대
정현수
나팔꽃 덩굴이 아랫집 할먼네 싸리문 옆 지주를 감고 올라가 꼭 필요해서 만들어진 것처럼 짙은 푸른색을 띤 자주색 꽃이 산뜻하고 곱다. 시월의 하늘은 더없이 맑고 투명하다. 부드럽게 흘러온 건들바람은 싱싱한 국화 향을 실어 따뜻한 가슴을 가진 이들의 마음을 저절로 열게 하듯 가장 고귀한 사랑의 메신저 같다. 담쟁이덩굴 이파리 빛깔도 엷게 붉어간다.
이것저것에 원인 하며 끝없는 맥락으로 이어져 가는 내 인생, 영감(靈感)에 게으르지 않게 끊임없이 나아감은(여행) 일력장이 한 장씩 뜯기듯 사라져 가는 나의 삶을 조금이라도 살 찌우게 한다. 열 평도 안 되는 텃밭에 잡풀이 무성하든, 단감을 한 개도 먹지 못하고 새들에게 주어 버리든, 세탁물이 바구니에 가득 차 넘쳐흐르든, 간장에 맨밥을 비벼 먹든, 오늘은 어디든 갈 것이다. 나를 돌아보는 하루를 갖고 싶다. 강진만 갈대 축제가 열리기 전에 한가롭게 그곳을 거닐며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호젓이 갈대밭을 걸으며 나를 겸허하게 반추하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
가을볕이 따갑다. 걸어가는 길에 순응해야 하는데 터미널에서 갈대밭까지 걷는 길이 여간 별스럽다. 걷는 내내 메모 노트로 얼굴을 가리며 가야 할 정도다. 비와 태풍이 지나간 뒤라 많은 벼를 아직 거두지 못하고 논바닥에 고대로 누워 있다. 간간이 추수를 끝낸 논도 있지만 대부분 그대로 방치한 듯 안타깝기만 하다. 때로는 희생적 자세(움틈)와 용서하는 미덕(궂은 날씨)으로 조금씩 조금씩 지루한 성장을 해 우리에게 끝없는 아량(쓰임)을 보였던 요긴한 참모습의 벼가 아닌가? 봄에 뿌리를 내려 여름 내내 자라고 화창한 날씨에 나락이 움터 이 세상에서 하나의 가치를 만들었는데…… 논두렁에서 콩 이삭을 줍는 등 굽은 할머니 모습이 애처롭다.
준비하느라 분주한 행사장에 도착해 그늘에 오니 살 것 같다. 40여 분은 걸은 것 같다. 국화는 그날에 맞춰 피우기 위해 꽃 몽우리는 아직 뭉쳐 저 있고 동물 모습의 조각 전시장 옆 꽤 넓은 축구장 반만 한 마당에 살살이 꽃들이 활짝 펴 울긋불긋 제멋대로 살랑거린다.
자전거 길 둑 아래 갈대밭이 광활하다. 20여만 평이라는 습지에 갈대가 꽉 차 있다. 드문드문 갯벌에 짱뚱어나 게들이 뽕뽕 구멍 뚫린 곳으로 바쁘게 들락날락한다. 전체 길이가 4km라는 데크 길이 갈대 모가지 아래로 죽 늘어져 있다. 쫑긋이 서있는 갈대는 아직 덜 익은 듯 거무튀튀하게 누렇다. 이렇게 망망한 평원에 희색 두루미는 평화롭게 하늘을 날고 마치 사막에 버려져 있는 것 같은 한 점(點)은 고독을 즐기고 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닐곱 명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볕이 따가운지 이젠 이 갈대밭에 완연히 나 혼자다. 난 왜 혼자 있는 걸 좋아할까? 가난해서? 가난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내겐 남들이 다 갖고 싶어 하는 에쿠스도 없고 하물며 소박한 2인승 소형차도 없다. 그러나 오래전엔 편안히 안주하면서 삶을 만끽할 때도, 한때는 쾌락주의에 빠져 인생을 즐길 때도 있었다. 신의 가호 속에 보이지 않는 막연한 것보다 눈에 보이는 어떤 풍요를 기대하며 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살기도 했다. 그렇다고 사치스럽고 낭비가 심한 가식적인 사람은 절대 아니다. 그냥 내가 가진 것 안에서 최대한 인생을 즐기면서 살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난 헤어날 수 없는 허무를 경험했다. 흔적을 남기고 사라져 간 어떤 운명적인 신의 가혹함을 경험했다. 내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안이하거나 머뭇거리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인과응보(因果應報)다. 지난 모든 것에 치밀한 계획과 이해가 부족했다. 섣부른 판단, 안이함에 빠져 다 잃은 것이다. 잘못된 생각과 모순된 행위, 교만에 빠져버린 이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발버둥이었다. 이젠 도전도 바람도 없다. 작은 지향인 그냥 소박한 행동, 더 소박한 생각, 있는 그대로의 삶 소박한 행복을 원할 뿐이다.
정오가 지나니 볕이 더 뜨겁다. 아직 축제 전이라 먹을 곳이 없겠다는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 간이 쉼터에서 쪄 온 고구마와 텀블러에 담아 온 커피로 느긋이 앉아 허기를 달랜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바라보며 한 모금의 커피를 마신다. 불현듯 어떤 연민이 흔들리는 갈대에 오버랩되어 슬퍼진다. 바람이 그리움을 싣고 오듯 내 눈을 간질인다.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떠오른다. 이리저리 엉켜 찢고 까불던 지난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흐른다. 하마터면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자칫 미움(안타까운)은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 미련을 단호하게 멈추지 않으면 사정없이 울어버릴 것 같다. 내심 머물러 눈물을 참으니 연민도 멈춘다. 어딘가 무작정 가다 보면 생각지 못한 엉뚱하고 험한 길을 만날 수 있다. 담담해지자. 욕심은 흐르는 강물에 흘려보내버리고 눈높이만큼 모든 걸 좋아하고 미워했던 나를 사랑하자.
갈대밭 한 편에 있는 저어새 모형의 조형물 다리를 건너 꽤 넓은 둑 위에 키가 1m 정도의 쑥부쟁이 꽃이 만발했다. 서로 예뻐하며 연애하듯 하얀색과 연보라의 쑥부쟁이 꽃이 바람에 흔들릴 때 겹쳐 기쁨으로 서로를 보듬고 있는 것 같다. 불편일랑 저만치 버려버리고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 차분하다. 진정한 친구나 연인 같다.
며칠 전 친구와 전활 할 때 사소한 일로 다툰 일이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절대 지지 않겠다는 듯 내 뜻을 강하게 주장했다. 서로의 뜻이 상반될 때 내가 아는 한 정답은 없다. 그러면 슬쩍 물러남도 사는 지혜인데 아무 쓸모없는 못된 자존심 때문에 그와 불편하게 통화를 끝냈다. 내 허전했던 마음은 친구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정말 교만 중에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최고 교만이었다. 나는 절대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최고의 미덕이 겸손이라는 걸 아는 내가 노골적 마음 쓰임으로 그를 무념케 한 것이다. 그 못된 걸 벗어나 그냥 순하고 거리낌 없이 누군가를 편하게 해주는 그런 모습이 아직도 부족하다. 지엽적인 것에 매달려 고정관념에 빠지기 일쑤고 갈등과 불편에 허덕이고 있다. 한 번만 더 생각하면 되는데 순간 우쭐에 빠져 잘난 척은 혼자 다하는 것 같다. 현실적이며 찰나적인 가치, 그런 헐값에 나를 팔아버린 것 같아 쓴웃음만 나온다. 쑥부쟁이의 서로 보듬는 애틋함이 아쉽다. 걷거나 쉬면서 네 시간여를 헤맨 것 같다.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이 보이는 현실로 날 이끈다. 어쩌면 다시 못 올 곳일지 알 수 없지만 비극의 주인공처럼 청승맞게 굴지 말고 이젠 이곳을 떠나자. 또 다른 태양이 뜬다는 말이 있다. 지금 혼자 지내는 생활이 결코 낡지 않았다. 난 아직 젊음 속에 있다. 고루한 생각도, 시대에 뒤떨어진 감각도, 더더욱 아직 숙제를 덜 끝낸 상황이다. 몸도 마음도 아직 싱싱하다.
가깝게 읍내 마을이 보이고 어느 집 처마 밑에 제대로 된 장미 한 송이가 피어 있다. 어정쩡한 덩굴장미가 아닌 빨갛고 겹겹이 잘 포개진 예쁜 꽃송이다. 가는 계절을 아쉬워하며 피워낸 마지막 장미가 아닌가 싶다. 꿀벌 한 마리가 역시 마지막 작업을 하는 양 꽃 위에서 맴돈다. 이렇듯 마지막까지 자기 할 일에 매진하는 모습으로 살자. 누구의 묘비명같이 망설이다 생을 끝냈다는 허무는 느끼지 말자.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을 비유(比喩) 해서 갈대는 꺾이면 죽는 거지만 그 갈대는 흔들리면서 이것저것 요리조리 생각한다 했다. 그렇다. 생을 마감하거나 생각을 멈추면 있는 그대로지만 자기에게 존귀함이나 가치를 불어넣으면 들판의 작은 풀씨와도 같다. 풀씨는 그 자체로 미약하지만 그것은 홍수를 막을 수 있고 베어져 비를 피하는 지붕이 될 수가 있다. 삭막한 현실에서 나를 생각해 보자. 누구와도 다를 바 없는 미약한 존재지만 내 안에 있는 나를 숙고해서 뭔가를 찾아낸다면 세상의 가운데에 있을 수도 있다. "think twice" 두 번 생각해서 뭔가를 결정하고 변화해야 한다. 난 이젠 나락으로 빠지기 싫다. 그동안 나는 가시적인 것에만 눈길을 보내고 얌체스럽게 우연을 기대했다. 보여야만 믿고 은근히 수고도 없이 횡재를 원했단 말이다. 이젠 서로의 신의를 중히 생각하고 상대를 따뜻한 눈길로 배려해야 한다. 그(그녀)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 인정해 주자.
어두운 창가에 달빛이 스민다. 책상 위 스피커에서는 모차르트의 아리아 '저녁 바람은 부드럽게 불어오고'가 들려온다. 내일은 친구에게 전화를 해 용서를 빌어야겠다.
2019. 10. 25.